소설리스트

8화 (41/102)

마왕을 먹겠다?

  끄왕.

  오우거는 당황했다.

  갑자기 변했다.

  좀 전까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인간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인간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소름 끼치는 기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라 볼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 전율에 오우거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인간의 눈이 떠졌다.

  쭈뼛.

  순간 발이 굳어 버렸다.

  세로로 쭉 찢어진 붉은 눈동자가 그들에게 향했을 때, 항거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몸마저 굳이 버린 것이다.

  “크크크.”

  인간이 웃었다.

  벌어진 입가로 유달리 뾰족한 송곳니가 보인다.

  칼날 같은 기세가 더더욱 맹렬해졌다.

  인간은······, 아니 좀 전까지 인간이었던 놈은 이제 주위에 팽배했던 마기까지 닥치는 대로 흡수하며 거대한 존재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크크크.”

  인간이 다시 웃었다.

  섬뜩한 핏빛 미소였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빛에 온몸이 저절로 벌벌 떨렸다.

  “아까처럼······.”

  인간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놀아 보자.”

  섬뜩한 그 말에 오우거들은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두 마리의 오우거 모두 정신없이 도망가고 있었다.

  하찮은 인간을 피해서 말이다.

  

  “크크.”

  병규는 정신없이 달아나는 오우거들을 쳐다보았다.

  도망가 봤자 사방 40미터가 고작이다. 그런데도 놈들은 꽁지에 불붙은 강아지인 앵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그 모습에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기분 좋군.”

  좀 점에 오우거의 피를 먹은 후, 병규는 자신의 무언가가 조금 변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오르가슴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흥분 상태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태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때 그의 눈에 팔이 잘려진 오우거가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이 잡혔다.

  그는 코를 킁킁댔다.

  향긋한 비린내.

  이 냄새.

  좋다.

  과거엔 왜 그렇게 혐오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피가 더 많이 쏟아지면 좋을 텐데.

  콸콸.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끈적거리고 비릿한 것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싶다. 마음껏 퍼마시고 싶다.

  끝없는 자극이 그를 유혹했다.

  어느새 그는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래······ 기왕이면 하얀 뼈다귀와 물컹한 뇌수도······ 볼 수 있으면 좋겠지.”

  입맛을 다시던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크앙. 끄어엉.

  그가 움직이자 오우거들은 난리가 났다. 미친개처럼 입가에 거품을 물고 죽어라고 도망간다. 상당한 속도였다. 하지만 병규는 그보다 더 빨랐다.

  그저 천천히 걸은 것뿐인데, 어느새 오우거 한 마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데, 그전에는 왜 그렇게 빨라지려고 사력을 다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눈앞에 보이는 오우거의 거대한 발을 툭하고 가볍게 건드렸다.

  오우거 발의 엄청난 크기에 비하면 그의 주먹질은 모기가 물은 것보다도 별 볼일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슬쩍 친 손길에 오우거의 발목이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드드득.

  발목뼈가 부서지며 살을 찢고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크와앙.

  묵직하게 무너진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놈의 거대한 주먹이 그를 내리찍어 왔다.

  전신을 행해 다가오는 주먹을 보고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파리를 치우듯 손을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다.

  쩌걱.

  오우거의 팔이 무참히 찢겨져 허공으로 솟았다.

  끄, 끄앙.

  오우거는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팔 한 짝은 잘려져 나갔고, 다른 팔은 방금 어마어마한 힘에 강제로 뜯겨졌다. 그리고 발목마저 박살났다. 더는 저항할 힘도 없었다.

  오우거는 벌벌 떨며 애처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

  “쓸모없는 놈.”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오우거의 뱃살을 향해 가볍게 발길질을 해댔다.

  철퍼덕.

  고깃덩이에 방망이질을 가하는 듯한 무참한 소음이 터졌다. 동시에 오우거의 그 큰 동체가 허공으로 부웅 솟았다. 오우거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렸지만 그렇다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쿠쿠쿵.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전면으로 떨어진 오우거의 몸뚱이가 잔경련을 일으켰다.

  즉사였다.

  콸콸콸.

  가죽 부대 안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졌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

  그제야 그는 만족했다.

  이 냄새. 이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크크크.”

  그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긋한 걸음이었다.

  “네 녀석도 저놈처럼 재미없게 죽어 줄 테냐?”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마치 이브를 유혹하는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 같았다.

  부들부들 떨던 트윈헤드 오우거의 눈에 갑자기 광기가 돌았다.

  크와아앙.

  하늘을 무너뜨릴 듯 괴성을 지르더니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전력을 기울인 듯, 두 손으로 휘두르는 쇠방망이의 기세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크크, 그래 그래야지.”

  그는 흡족하게 웃었다.

  슥.

  그의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쩌겅.

  흙먼지를 날리던 쇠방망이가 종이 조각처럼 구겨졌다

  툭.

  그의 발이 가볍게 움직였다.

  쩍!

  오우거의 두 발이 완전히 꺽였다.

  슥.

  가볍게 점프한 그는 손바닥으로 오우거의 배를 툭 하고 쳤다.

  오우거의 축 늘어진 뱃살이 파도처럼 출렁이더니 잠시 후 가닥가닥 끊어진 내장을 입 밖으로 토해 냈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

  오우거는 그대로 죽어 버렸다.

  “시시하군.”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건 너무 시시하다.

  간단한 운동도 되지 못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오우거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퍽 하고 오우거의 머리통이 터지며 허연 뇌수와 피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뿜어 나왔다.

  그제서야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잔인한 비린내가 왠지 모르게 좋아질 것 같았다.

  “가만 있자. 그러고 보니 한 녀석이 더 있었지?”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히,히끅.”

  리치는 너무 놀라 자칫 뒤로 넘어질 뻔했다.

  순간 지금은 썩어 문드러져 사라지고 없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저, 저놈은 대체 뭐야.’

  분명 겉모습은 좀 전의 그 녀석이 틀림없다.

  그런데 풍기는 기세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껍데기만 같고, 속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린 듯했다.

  “크크크. 그래, 네놈이 있었지.”

  빙그레 웃으며 그가 걸어왔다.

  분명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엄청나게 빠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리치는 겁이 덜컥 났지만 그 와중에도 주문 암송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주문을 완성하는 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너무 빨리 도착하고 말았다.

  “시,실드”

  리치는 급하게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마법진을 완성하느라 너무 많은 기력을 쏟았다. 이제는 고작 실드 마법을 펼치는 데에도 힘이 벅찼다.

  물론 마력을 충분히 끌어다 만든 것이라 강도가 보통의 실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좀 전에 놈의 손끝에서 나온 기이한 기운도 모조리 막아 내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리치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기대는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슬쩍 내뻗은 그의 손에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길드가 허무하게 부서졌다.

  실드를 부순 손이 그의 갈비뼈를 거칠게 훑었다.

  두두둑.

  3백 년간 육신을 유지한 뼈가 과자처럼 허무하게 부서졌다.

  “크윽.”

  리치는 진득한 비음을 흘리며 물러섰다.

  그런 와중에도 주문 암송은 계속되었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위대한 마계의 지배가가 강림하여 이 불한당 같은 놈을 갈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소환해 준 대가로 그는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육체를 보장받게 된다.

  리치는 미친 듯이 주문을 외웠다.

  “제법이구나.”

  그가 웃었다.

  슬며시 손을 뻗는다.

  뚜둑.

  다리뼈가 부러지고.

 드거걱.

  왼쪽 어깨가 무너졌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자근자근 리치의 뼈를 잘게 부수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치는 두개골만 남게 되었다.

  달깍달깍.

  머리통만 남은 상태에서도 리치는 턱뼈를 덜그럭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마계의 우두머리를 부르는 일이다.

  결코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오늘을 위해 석 달 내내 마법진을 그렸고, 무려 백 명의 제물을 차례로 바쳤다.

  이제 마지막이다.

  “꽤 재미있어.”

  그는 리치의 두개골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턱뼈를 부숴 보면 어떨까?

  뚝.

  리치의 입이 움직임을 멈췄다.

  퀭한 해골이 안에서 일렁이던 푸르스름한 안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크크크.”

  그는 잔혹하게 웃었다.

  묘하게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이봐.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르려는 게 뭐지?”

  “마계의 지배자. 마왕이다.”

  “마왕? 어둡고 음습한 지하에서 왕 노릇이나 한다는 지하 단칸방의 제왕 말이냐?”

  “무, 무엄한!”

  리치의 안광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분은 감히 네몸 따위가 쉽게 입에 담을 만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파괴자이시다.”

  “호호.”

  그는 가볍게 탄성을 발했다.

  위대한 파괴자.

  “마음에 쏙 드는 말이군.”

  타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빙글 돌리던 그가 간드러진 목소리롤 제안했다.

  “좋아. 놈을 불러내 봐.”

  “뭐, 뭣?”

  리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왕을 불러내라니.

  이 미친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그의 불타는 두 눈은 탐욕으로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크크. 네놈에게 기회를 주마. 어서 불러내.”

  리치는 그의 속셈이 뭘까 의심이 들었지만 결국 주문을 계속 외웠다.

  긴 주문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자 마법진 내부에 큰 변화가 생겼다.

  꽈르릉하며 허연 뇌전이 거미줄 같은 마법진 위를 질주하고, 어둠이 고운 먼지처럼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더불어 소녀들의 고통도 가일층 되었다.

  안젤라가 절규를 토하는 모습에 호랭이는 사력을 다해 그를 불렀다.

  “병·····규야. 안 돼······막아야····해. 주문을······막아.”

  “왜?”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내가 주문을 막아야 하지?  조금만 기다리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텐데.”

  호랭이는 그의 태연한 물음에 섬뜩함을 느꼈다.

  병규는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아주 근본적이 뭔가가.

  “워······원하는 게······뭐지?”

  “마왕의 힘.”

  호래이의 물음에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는 빨간 입술로 혓바닥을 축였다.

  “놈이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그놈의 힘을 흡수해 버리겠어.”

  너무도 광오한 소리에 호랭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녀석이 과연 자신이 알던 그 녀석이 맞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주문을 막아야 했다. 그것도 빨리.

  “안젤라가······주문이 완성되면······안젤라가······죽는다.”

  병규의 미간에 주름이 그어졌다.

  뭔가를 갈등하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안젤라는 이름을 듣게 된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전혀 다른 소녀의 얼굴이었다.

  금발 머리에 귀여운 아이.

  그를 대변기라 부르며 자명종과 샤바를 유난히 좋아하던·······.

  “퀴니.”

  쩡하고 머릿속의 무언가가 깨졌다.

  그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퀴니가······ 죽으면 안 되지.”

  기적이었다.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그를 움직인 것이다.

  리치는 해골을 툭 던져 버린 그는 가볍게 한 걸음을 옮겻다.

  불과 한 걸음인데, 이미 그는 안젤라 곁에 도착해 있었다.

  “아아악.”

  안젤라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뭍으로 올라온 송어처럼 허리를 펄떡펄떡 튀겼다.

  그는 안젤라의 가슴을 눌러 격한 움직임을 막은 후, 손바닥에 꼽힌 쇠못을 뽑았다.

  쑤욱.

  너무도 허무하게 뽑혔다.  이어 그는 나머비 손과 발에 박힌 쇠못도 뽑아냈다.

  안젤라가 그의 가슴에 축 늘어졌다.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 박동을 잠시 느낀 그는 안젤라의 땅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를 소녀들에게 걸어갔다.

  그가 제물로 쓰인 소녀들을 모두 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잠깐에 불과했다.

  피를 철철 흘리는 소녀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그를 보고 호랭이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한순간 정말로 그가 딴사람이 되어 버린 줄 알고 걱정했다.

  소녀들은 모두 마법진의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이 말도 안 되는 소환진도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호랭이의 혼자만의 낙천적인 희망에 불과했다.

  “크히히히. 끝냈다. 끝냈어. 마침내 주문이 끝났단 말이다.”

  광기로 가득 찬 웃음소리가 소환진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리치였다.

  두개골만 남은 리치가 턱뼈를 달그락거리며 기성을 지르고 있었다.

  “크히히히. 마왕. 이제 마왕님이 납신다.”

  그는 기뻤다.

  고난이 많았지만 결국 해냈다.

  자신은 영생을 얻을 것이며, 저 건방진 녀석은 사지가 뜯겨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 속에서 정화될 것이다.

  그때였다.

  슥 하는 미세한 소음과 함께 어느새 그가 리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리치의 두개골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공포로 물들었을 것이라 기대한 그의 얼굴은 황당하게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잘했어.”

  그가 칭찬했다.

  “네 녀석 덜분에 날 완성할 수 있게 되겠군.”

  “?!”

  완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가 무섭게 느껴졋다.

  “마왕이라는 녀석, 분명 강하다고 했지?”

  “무, 물론이다. 마계의 통치자이자 위대한 공포의 군주이신······.”

  “아아. 사설은 그쯤이면 됐어. 아무튼 대단한 놈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군. 크큭.”

  고소를 짓던 그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시장기가 일었다.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미식가의 표정으로 그는 마왕이라는 진수성찬을 기다렸다.

  리치는 황당했다.

  ‘뭐 이딴 놈이.’

  터무니없게도 놈은 마왕을 먹으려 하는 것이다.

  ‘놈. 과연 마왕님이 강림한 후에도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독한 마음을 품은 리치는 주문의 마지막 문구를 힘차게 외쳤다.

  “여기 당신의 영원한 종이 피의 제물을 바치나니. 이 땅에 강림하소서.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일 마수들의 제왕. 마왕 벨로로폰이시여!”

  콰콰쾅.

  마법진 안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소녀들이 제물로 올려져 있던 자리에서 화염이 치솟고, 암흑이 안개처럼 짙게 깔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크크크크큭.”

  짙은 어둠 속에서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왕을 기다리는 그의 두 눈에 붉은 광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리치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쇠 긁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에서 허망함이 묻어났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문이 완성되고, 마력이 폭주하여 미친 말처럼 날뚜었는데도.

  뇌전은 하늘을 태우고, 화염은 대지를 달구었다. 그렇듯 웅장한 존재감의 출혈을 알리는 거창한 무대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정작 마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변화는 팍하고 백열들이 꺼지듯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남은 거은 숨 막힐 듯한 고요와 허무함뿐이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그가 공들여 그린 마법진이 모래성처럼 날렸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잘못됐어.”

  두개골만 남은 리치는 턱뼈를 달달거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왜······왜! 서, 설마 마왕이 마계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마계의 왕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믿을 순 없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언제까지고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잔혹한 미소를 흘리던 그가 기절해 버렸다는 것이다.

  폭주하는 마력 속에서 껄걸 웃어대던 놈은 결국 넘치는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리치는 기절한 그를 증오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모든 게 이놈 때문이다.

  이놈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다.

  모든 걸 걸었던 그의 인생이 이 오만한 놈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뼈까지 자근자근 씹어 먹는다고 해도 이 분노는 가라앉지 않으리라.

  “크윽.”

  리치는 억울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턱.

  작고 앙증맞은 하얀 발이 리치의 두개골을 밟았다.

  호랭이었다.

  마법진의 효과가 사라지고 마력이 흩어지자 비로소 호랭이는 기력을 되찾았다.

  “네 이놈!”

  호랭이는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리치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엄 넘치는 박력에 리치는 불안을 느꼈다.

  “네놈이 감히 위대하신 이 몸을 기게 만들었겠다.”

  호랭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상태였다.

  이놈의 터무니없는 야망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가 대체 몇이란 말인가.

  지금도 안젤라와 열 명의 소녀가 사경을 헤매고 있고, 자칫했으면 그조차 이 망할 놈 때문에 죽을 뻔했다.

  자존심에 대포알만 한 구멍이 생겼는데, 어찌 참을 수 있으리오.

  한 방에 해골을 깨 버리려고 하던 호랭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발을 멈추었다.

  “분명 리치에겐 영혼을 담는 그릇, 라이프 포스 베슬이라는 것이 있어서 육체를 소멸시켜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했지?”

  리치는 안광이 슬쩍 흔들렸다.

  “히히히. 맞는 말이야. 아무리 날 죽이려 해도 라이프 포스 베슬이 파괴되지 않는 한 소용없지.”

  “큭.”

  호랭이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못된 놈을 소멸시키지 못하다니, 이놈의 사악한 영혼이 구천을 떠돌면서 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인가.

  반면 리치는 득의에 찬 광소를 터트렸다.

  “키히히. 누구도 날 죽일 수 없다. 내 영혼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으니까.”

  “혹시 그 라이프 포스 베슬이라는 게 이거야.샤바?”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는 호랭이의 고개와 리치의 두개골이 동시에 휙 돌아갔다.

  샤바가 두 눈을 귀엽게 깜빡이며 서 있었다.

  샤바는 마력과의 반발 때문에 마법진 안으로 들오오지 못했었는데, 소환 의식이 실패하고 마력이 흩어지자 그제야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는 작은 항아리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많은 공이 들여 봉인한 것처럼 보였다.

  “켁!”

  항아리를 본 리치가 비명을 질렀다.

  “그, 그걸 어떻게.”

  샤바의 대답은 간단했다.

  “산 아래에서 몬스터들과 놀다가 주웠더.”

  “······.”

  주웠다.

  어이없는 대답이다.

  그토록 꼼꼼 숨겨 놓은 항아리를 길 가다 주은 것처럼 말하다니.

  “푸하하. 잘했다. 샤바야.”

  호랭이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 이제 이걸 부수면 어떻게 될까?”

  샤바에게서 항아리를 넘겨받은 호랭이가 슬쩍 위험을 가했다.

  “자, 잠깐. 우, 우리 협상하자. 원하는 게 뭐냐. 힘? 권력? 재물? 바라는 건 뭐든지 들어 주마. 난 고위 흑마법사다. 네 소원이 뭐든 다 들어줄 수 있다.”

  “필요 없어.”

  호랭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겐 그런 쓸모없는 물욕 따윈 전혀 필요 없다. 이래뵈도 난 신선이거든.”

  “시, 신선이 뭐냐?”

  “뭐, 저쪽 동네에 사는 현자 비스름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돼. 그럼 ‘안녕이디’ 이 고얀 놈아!”

  항아리에 앞발을 올린 호랭이가 작게 으르렁거렸다.

  화악 하고 일어난 불길이 잠깐 사이에 작은 항아리를 삼켜 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악!!”

  리치의 마지막은 처절한 비명이었다.

오늘 뒤집어쓴 코피가 더 많소이다

  누굴 죽여주길 원하오?

  샤바와 사신들의 격돌!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초유의 매직미사일

  그곳에서 넌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오우거의 힘, 그리고 핏빛 각성

  마왕을 먹겠다?

  인간이 아닌 넌 대체 뭐냐?

  떠나는 그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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