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37/102)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신들이 샤바의 수하가 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처음 껄끄러웠던 제이콥들과 사신들의 관계도 지금은 불편한 대로 풀렸다.

  사신들은 프리즘 용병단에 들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마스터인 샤바 한 분인지라 그 외에는 흥미조차 없었다. 그러는 것이 제이콥들에게도 편했다. 수상한 냄새를 풀풀 날리는 사신들을 무턱대고 받아들일 순 없기 때문이다.

  사실 프리즘 용병단은 여태 소수 정예를 지켜 왔다. 병규와 샤바를 받아들인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병규는 여전히 애매한 입장에 서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샤바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어세신마스터에게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사신들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마스터의 주인은 곧 그들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들은 병규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마스터는 물론이고, 자신들보다도 훨씬 약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사신들과 병규 사이엔 기이하고 불편한 기류가 흐르게 되었다.

  사신들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를 살폈다.

  어디서나 따라다니는 감시의 눈길에 병규는 상당한 불편을 느꼈다.

  특히 마그네트라는 소녀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이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를 관찰하고 다녔다.

  본래 출신이 살수라서 그런지 그들의 시선은 따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병규는 그들의 시선을 뻔히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평범하게 행동했다.

  사실 그는 알게 모르게 이런 일에 익숙하기도 했다.

  감시당하는 듯한 시선에는 샤바를 통해 충분히 단련된 것이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며칠 동안 아무 일 없는 평온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안녕하세요. 병규 오빠.”

  병규가 늦은 점심 식사를 즐기는데, 작은 소녀가 아는 척을 해왔다.

  소녀의 이름은 안젤라. 음유시인인 늙은 할아버지와 항께 여관들을 돌며 춤과 노래를 파는 꼬마 댄서였다. 병규가 살던 세계로 치면 집시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일전에 불량배에게 곤란을 겪던 것을 병규가 도와주면서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이렇게 종종 그를 찾아오곤 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꼬마 천사 안젤라잖아?”

  수프를 먹던 병규는 과장된 말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병규는 퀴니가 떠올라서인지 안젤라를 유난히 살갑게 대했다.

  안젤라 역시 병규를 잘 따랐다.

  “그래, 오늘은 뭐 재미난 일 없었니?”

  병규는 그녀를 덜렁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쫑알쫑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길에서 멋진 기사님을 봤어요.”

  “멋진 기사님?”

  “네. 꿈속의 왕자님처럼 너무 멋진 기사님이이었어요.”

  그녀는 두 손을 모으며 감동을 되새김질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 어지간히 멋있었던 모양이다.

  이 나이 때면 으레 갖는 환상 같은 것이라 생각한 병규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한참 멋진 기사님에 대해 떠들던 안젤라는, 문득 병규 옆에서 ‘샤바~ 샤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샤바를 곁눈질하더니 볼을 발그레 붉혔다.

  “무, 물론 기사님이 아무리 멋있다고 해도 샤바 오빠보다는 훠~얼씬 못 해요.”

  “흐음.”

  병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는 따가운 시선으로 샤바를 노려봤다.

  ‘망할 녀석. 얹제 또 우리 귀여운 안젤라에게 망할 페로몬을 뿌린 거야?“

  여자들에게 절대의 위력을 과시하는 샤바의 미모를 병규는 망할 페로몬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압도적인 효과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샤바?”

  병규의 시선을 느낀 샤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방실방실 웃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병규는 샤바의 순진한 얼굴에 결국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샤바는 요즘 병규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프리먼이 더 이상 그에게 마법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히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에게 마나에 대한 어설픈 강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프리먼의 사정이었지만, 그런 오해가 있는 줄 까맣게 모르는 샤바로서는 사랑하는 주인님과 함께 있게 되어서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안젤라. 그 기사님은 어떻게 생겼지?”

  병규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과연 안젤라는 아이답게 금세 그의 계략에 말렸다.

  “네. 하얀 백마를 타고 눈처럼 하얀 갑옷에 하얀 검을 차고 금발을 출렁이며 거니는 모습이 정말 멋졌어요. 얼굴은 또 얼마나 멋있었는데요. 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는 여자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어요.”

  “으흠. 흰 갑옷에 하얀 검이라. 혹시 지금 들어오는 저 사람이니?”

  병규는 여관의 출입문을 손짓했다.

  마침 여관으로 두 명의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한 명은 20대 초반의 다소 냉정하게 생긴 청년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병규 또래의 금발 머리였다.

  그중 금발 머리 쪽이 안젤라가 말한 인상착의와 비슷했다.

  “아!”

  청년을 본 안젤라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병규 뒤에 숨었다.

  정말로 그녀가 말한 백의의 기사님이었던 것이다.

  금발 머리 청년을 본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잘생겼는걸. 그러고 보면 안젤라도 눈이 꽤 높은 것 같아.”

  병규의 어깨에 늘어져 있던 호랭이가 한마디했다.

  백의를 휘날리며 들어온 금발 머리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샤바처럼 눈부신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깔끔하고 자연스런 품위가 흘렀다.

  마침 무심코 식당 안을 둘러보던 금발 머리의 눈이 병규와 마주쳤다. 그러나 정작 그의 눈길을 끈 것은 병규 옆에 앉은 샤바였다.

  “어, 엄청나군.”

  샤바의 인간 같지도 않는 미모를 본 금발 머리는 조금 놀라는 듯했다. 청년은 동료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병규와 샤바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금발 머리 청년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합석을 요구했다.

  그를 잠시 올려다보던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병규의 맞은편에 앉은 금발 머리 청년은 간단한 음식을 시켰다.

  그가 요리를 주문하는 동안 병규는 두 사람을 관찰했다.

  ‘남자치고는 너무 곱게 생겼군.’

  금발 머리 사내는 여자처럼 미끈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착용하고 있는 장비 또한 기사의 것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귀한 집 도령 같았다.

  금발 머리 청년과 함께 온 싸늘한 안색의 청년 역시 기사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의 음식 솜씨가 끝내 준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과연 어떨 지 궁금하군요.”

  금발 머리 청년이 두 손을 비비며 안젤라에게 슬쩍 윙크를 했다. 그가 일행과 함께 요리 잘하는 식당을 찾고 있을 때, ‘트라우마의 새벽’을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안젤라였던 것이다.

  대충 눈인사를 나눈 금발 머리는 정식으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레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디스죠.”

  “벼······ 카피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쪽 분은······.”

  샤바예요. 샤바.“

  흠칫!

  샤바의 음성을 들은 레종이 몸을 가볍게 떨었다.

  “어? 저 아이 좀 수상한데.”

  병규의 어깨 위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호랭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병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방금 전의 반응을 눈여겨봐 두었다.

  “험험. 조금 쌀쌀한 것 같네요.”

  헛기침으로 무안을 털어 버린 레종이 밝은 목소리로 병규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직업을 물어봐도 될까요?”

  “용병입니다.”

  병규는 딱 잘라 말했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그가 용병이라고 하자 레종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럼 샤바······ 님도?”

  레종이 슬그머니 시선을 샤바에게 옮기자, 샤바는 기다렸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샤바.”

  “······!”

  레종은 잠시 말을 잃었다. 샤바가 방긋 웃자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뚝뚝

  레종은 멍한 표정으로 코피를 몇 방울 흘렸다.

  레종이 코피를 흘리자 당사자보다 디스가 더 당황했다. 디스는 즉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디스가 레종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제, 제가 몸이 좀 약해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레종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이 녀석, 여자군.’

  ‘계집아이로구나.’

  병규와 호랭이의 입가에 영문 모를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간신히 코피를 수습한 레종은 어색함을 면하기 위해 안젤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여운 레이디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아, 안젤라예요.”

  “오. 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이십니다. 레이디.”

  자리에서 일어난 레종은 과장되게 동작을 취했다. 안젤라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자꾸만 병규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레종의 천연덕스런 연기에도 병규는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후후. 남자인 척하느라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남장을 한 것일까. 얼굴 윤곽을 보니 꽤 미녀인 것 같은데.’

  애써 남자인 척 연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게 보였다.

  병규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음식이 나왔다.

  “하아. 한참을 걸었더니 배가 고프네요.”

  레종은 다소 부산스럽게 음식을 들었다. 디스가 험험 하고 짧게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레종은 머쓱한 표정으로 예의 바르게 식사를 했다. 어지간히 말괄량이인 듯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레종은 샤바와 병규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었다.

  그녀는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처럼 궁금한 것이 많았다.

  특히 용병이라는 직업과 여러 곳의 풍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병규는 용병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는 것이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병규와 샤바가 신참 용병이라는 말에 레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상상하는 용병이란 거칠고 황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삭막한 사내들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두 청년은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된 인상이었던 것이다.

  레종이 병규와 샤바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수다를 떨고 있는 동안, 그녀의 동료인 디스는 불편한 표정으로 반대편의 테이블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곳엔 바인딩과 사일런스가 한가로운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비록 평온했지만 정작 바라보는 디스는 속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바인딩은 붕대를 전신에 둘둘 감고 있었고, 사일런스는 멀대같이 큰 키에 입술을 바늘로 꿰맨 엽기적인 모습이었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들의 해괴한 몰골에 소름이 쫙 돋았을 것이다. 하물며 디스는 레종의 안위에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이라 자연 그들의 존재가 눈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차피 잠시 식사를 위해 들른 식당이다. 대충 배를 채웠으니 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 좋으리라.

  그렇게 결심한 디스는 레종에게 눈짓을 했다. 한참 수다에 열을 올리던 레종은 디스의 눈치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즐거웠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급한 볼일 때문에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아쉬운지 여관을 나서는 순간까지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병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대단한 녀석이야. 여자란 여자는 죄다 꼬시는구나.”

  그는 레종과 디스가 남기고 간 음식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번엔 아닌 것 같다.”

  호랭이가 식탁 위로 펄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방금 전의 그 여아 말이다. 처음엔 샤바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나중엔 오히려 너에게 신경을 더 쓰는 것 같더라.”

  “하하. 그럴리가요.”

  병규는 호랭이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은 하나같이 샤바한테만 눈길을 던졌다.

  병규는 당연히 그들의 관심권 밖이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너무 강해서 달빛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병규는 호랭이의 말을 귀담아 두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병규는 샤바와 안젤라를 데리고 시장 구경을 나섰다. 할 일도 뚜렷이 없는데, 마냥 여관방에 틀어박혀 있기 싫어서였다.

  안젤라는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하긴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돈을 벌기 위해 바쁘게 살았으니 이런 여유를 만끽할 날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갓 상경한 촌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이들은 액세서리 가게에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제이콥과 호젤을 만나게 되었다.

  “오호. 분위기 좋은데요?”

  병규가 짓궂게 휘파람을 불자 호젤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노는 게 아니라 일하는 거야.”

  “무슨 일인데요?”

  “이틀 전, 성주님이 병사들을 이끌고 오크 마을을 토벌하러 갔잖아. 꽤 많은 병사가 차출되는 바람에 성내의 치안에 문제가 생겼거든. 그래서 용병들이 임시로 자치단 일을 도와주기로 한거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저한테도 말을 하지 않고요.”

  “용병단 하나에 두 사람씩만 나서면 된다고 해서, 그냥 우리 둘이 맡기로 했어.”

  “그렇게 된 거였어요? 아쉽네.”

  병규는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제이콥과 호젤이 몰래 데이트라도 하고 있었던 거라면 두고두고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참, 병규가 있으면 아마 그도······.”

  호젤은 병규의 주위를 살폈다. 과연 그의 등 뒤에 샤바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샤바를 관찰했다.

  저 순진한 눈빛.

  가끔은 정말로 드래곤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정황은 그가 드래곤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그때 병규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볼일이죠? 설마 빈둥빈둥 농땡이를 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지. 여기에 수상한 사람이 있어서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말을 하며 호젤은 길 건너편을 턱짓해 보였다.

  그곳에는 검은 후드를 걸친 자가 비렁뱅이처럼 길가에 앉아 있었다. 병규는 그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큰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저 사람이 뭐가 이상한데요?”

  “그냥 좀 신경이 쓰여서.”

  정말로 두 사람이 후두를 뒤집어쓴 사내를 감시하게 된 것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길을 가다 미친놈처럼 킬킬거리는 그를 보게 된 것이고, 호젤은 느낌이 이상하다며 제이콥과 함께 줄곧 그를 감시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예감이 틀린 것 같아.”

  호젤은 무안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그녀는 유난히 예감 같은 것에 강했다. 특히나 오늘처럼 느낌이 강하게 온 경우는 여간해선 틀리지 않았다.

  사내를 본 순간 그녀의 감은 이렇게 속사였다.

  놈은 뭔가 큰 사건을 저지를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사내는 여전히 길가에 앉아 있었고, 가끔 지나가는 여자 아이들을 보며 킬킬거리는 것 외에는 수상한 점이 전혀 없었다.

  ‘별일이네. 이렇게 크게 감이 틀린 적은 없었는데.’

  무안해진 그녀는 대뜸 병규의 어깨를 탁탁 소리 나게 두드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야말로 시장엔 웬일이냐? 살 거라도 있어?”

  “필요한 건 없고요. 그냥 산책이나 할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병규는 따분한 표정으로 시장을 둘러보았다.

  변한 건 거의 없었다. 

  대륙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든다는 트라우마지만, 병규의 관심을 끌만한 물건은 거의 없었다.

  시장을 한 바퀴 빌글 돈 병규는 문득 한 사람이 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가 사라졌네.”

  안젤라가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니 한 초라한 가게에 진열된 장신구들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려도 여자아이구나.’

  병규는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러고 보니 안젤라의 몸에는 치장이라 불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빠듯한 그녀에게 장신구는 사치였다.

  ‘나온 김에 안젤라에게 뭐라도 사 줄까?’

  병규는 곧장 안젤라의 손을 붙들고 액세서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벽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장신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여자들의 물건이었는데, 토속적인 취향의 것들이 많았다.

  “와.”

  안젤라는 연신 감탄성을 토하며 장신구들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안제라. 뭐가 가지고 싶니? 사 줄게. 오빠에게 말해 봐.”

  “네?”

  병규의 말에 눈을 반짝인 안젤라는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받을 수 없어요.”

  “괜찮아. 그냥 내가 선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병규는 거듭 청했지만 안젤라는 오히려 처연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할아버지가 기다리실 텐데.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내일 봐요.”

  바쁘게 말한 그녀는 누가 잡을세라 부리나케 가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런.”

  병규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껏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당사자가 달아나 버렸으니 난감할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상 사내가 일단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는 게 정석. 아예 말을 안 꺼냈으면 모를까,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곤란해하는것 같아도, 막상 주면 넙죽 받아 주겠지.”

  병규는 매장을 쭉r 돌아보며 안젤라에게 뭘 선물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에게 선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병규는 호젤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한창 제이콥과 깨가 쏟아지고 있는 참이었다.

  “호랭이가 골라 주시겠어요?”

  “어허! 내가 인간 계집아이의 취향 따위를 어떻게 알겠느냐? 암컷 호랑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겠군요.”

  병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샤바한테 옮겨졌다. 그러나 순진한 그의 눈을 보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저어 버렸다.

  샤바가 무슨 종족인지 기억이 난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비싸 보이는 걸로 고르면 되겠지.’

  장신구들을 쓱 훑어보던 병규는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목걸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목걸이는 화려했다.

  금으로 만든 것 같은 줄에 고리마다 오색영롱한 보석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좋아. 이걸로 하자.”

  병규가 목걸이를 계산하려 할 때였다.

  “그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영롱한 목소리와 함께 금발의 청년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레종?”

  금발 머리의 청년, 아니 청년을 가장한 여자는 다름 아닌 레종 이었다.

  “죄송해요. 지나가는 길에 안젤라를 보고 들어오게 됐어요. 그거 안젤라에게 선물할 건가요?”

  “그럴 생각입니다만······.”

  “휴.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별로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

  병규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자 레종은 차분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직 어린 안젤라가 그렇게 화려한 장신구를 차고 다닌다면 못된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장신구에 맞춰서 옷을 사 입으려면 돈도 많이 필요할 거예요. 이래저래 많이 부담되는 선물인 거죠.”

  “아!”

  비로소 병규는 자신이 고른 목걸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물건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물건이라 해도 받는 사람에게 가치가 없다면 필요 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그렇게 누렇기만 한 장신구는 중년의 귀부인한테나 어울리는 물건이에요. 가만있자······ 이게 좋겠네요.”

  가게 안을 꼼꼼히 살핀 레종은 구석에서 작은 목걸이를 찾아냈다. 그녀가 고른 목걸이는 수수한 디자인이었지만, 대신 오래 봐도 쉬이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허. 과연.”

  병규는 레종의 안목에 감탄했다. 특히 꼼꼼한 성격은 그에게 부족한 면이라 더욱 크게 와 닿았다.

  병규가 고마워하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욱으려다 말고, 오히려 과장되게 껄껄거렸다. 일부러 목소리까지 굵게 냈다.

  “하하. 이 정도 가지고 고마울 게 있겠습니까. 그 목걸이가 안젤라의 목에 걸리는 것만으로도 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하하.”

  지나치게 쾌활한 그녀의 모습에 병규는 속으로 웃다 말고 목걸이를 계산했다.

  밖으로 나가 보니 디스가 엄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레종은 당장 찔끔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뭔가 잔소리를 하려던 디스는 그녀의 그런 표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휴. 늦었습니다. 빠리 가시지요.”

  “아, 알았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레종은 앞서 걸어가는 디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두 손을 입 주변에 모으며 ‘안젤라에게 제 얘기도 전해줘요’ 라는 말을 전했다.

  병규는 끝내 웃고 말았다.

  “방금 그 사람. 아는 사이인가?”

  심각한 표정으로 레종을 살피던 제이콥이 병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식당에서 잠깐 본 게 전부예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그냥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인 것 같아서······.”

  대답을 얼버무린 제이콥은 호젤에게로 돌아갔다.

  병규는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아다고 생각했지만, 안젤라에게 줄 선물을 바라보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쿠쿵!

  멀리서 묵직한 진동과 함께 폭음이 울렸다. 폭팔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순간 땅이 들썩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 지진?”

  갑자기 일어난 일에 병규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방금의 진동은 지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성문 쪽이다.”

  제이콥이 성문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치솟고 있었다.

  빌딩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음은 그 후로도 몇 차례 계속되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제이콥과 호젤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말이 필요 없는 사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 보죠.”

  호랭이에게 말한 뒤 병규도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사신들을 거느린 샤바가 조용히 따랐다.

  트라우마의 성문은 한마디로 거대했다.

  높이는 사람 키의 두 배가 넘고, 너비는 장정 열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이 성문은 단순히 거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매우 단단하기도 했다.

  매일 수십, 수백의 인원이 출입하는데다, 흉포한 몬스터들의 공격으로부터 견뎌 내야 하기 때문에 쇠와 나무를 엮어 아주 튼튼하게 지어졌다.

  그런데 지금 그 거대하고 단단한 성문이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무너져 있었다.

  거대한 폭발이 있었던 듯, 문의 중심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고, 은빛 광택으로 번쩍이던 외부는 검은 그을음으로 지저분하게 변해 버렸다.

  무너진 것은 성문뿐만이 아니었다. 보수 중이던 성벽마저 다시 허물어져 흉물스런 내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현장에 도착한 제이콥은 너무 놀라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성문 앞의 풍경은 한마디로 처절했다.

  웅장한 성문은 바닥에 비스듬히 누웠고, 매캐한 냄새와 함께 부서진 돌가루가 안개처럼 주위를 부옇게 흐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너진 성벽과 성문으로 거품을 입에 문 몬스터들이 개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병사들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맞아 피 튀기는 혈전을 벌였다. 몬스터들을 상대로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성안으로 침입하는 몬스터들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데 반하여 이를 막는 병사들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성주가 성의 주력을 이끌고 오크 토벌에 나선 것이 치명적이었다.

  거기에 성문이 무너질 때, 희생당한 병사들마저 있었다.

  크와아!

  “으악.”

  “쳐라.”

  카악카악.

성문 앞 일대의 공터는 몬스터들의 괴성과 병사들의 신음 소리가 한데 뒤섞여 아비규환의 참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차앙.

  제이콥이 돌연 검을 뽑아 들었다.

  “이대로는 성안의 주민들이 위험하다.”

  그는 힘차게 호통을 치며 거침없이 몬스터 무리로 파고들었다. 시퍼런 검빛이 일렁이더니 삽시간에 고블린 몇 마리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나도 함께해.“

  어느새 그의 곁에 내려선 호젤이 호흡을 같이 했다.

  병규 또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그늘로만 움직이며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의 팔, 다리 관절을 잡아 뽑았다. 특히 인간을 노리는 몬스터들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꽤······ 하는군.”

  병규의 움직임을 유심히 바라보던 크리티컬이 침음성을 발했다.

  비실거릴 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병규는 가히 숙련된 전사처럼 능숙하게 싸움을 이끌고 있었다. 그가 참가하고부터 병사들의 희생이 확연히 줄러들었다.

  한편, 병규는 처절한 현장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종괴 디스가 몬스터들 무리 속에 있었던 것이다.

  성을 떠나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이 소란 통에 말려들고 말았다.

  두 사람 곁에는 평복차림의 사람들이 스무 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실력이 대단했다.

  간신히 몬스터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병사들에 비해, 그들은 비교적 가볍게 중급 이상의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음. 제대로 수련을 한 자들이군.”

  호랭이가 레종의 주위를 물샐틈없이 감싼 사내들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군인들이란 소리예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의 격식 있는 움직임은 예전에 싸웠던 기사들과 비슷한 것 같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는 유달리 눈썰미가 좋다. 그런 호랭이가 기사라고 했다면 십중팔구 저들은 실제 기사들일 것이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병규는 굳이 자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레종과 그 일행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안전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였다.

  “제이콥! 호제!”

  한참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든과 프리먼이 뒤늦게 달려 온 것이다.

  고든은 곧장 제이콥과 호젤의 대열레 합류했고, 프리먼은 분노한 얼굴로 마법을 시전했다.

  “어둠을 몰아내는 위대한 불꽃의 향연, 파이어 볼!”

  그의 전면에서 화염구가 이글이글 타오르더니, 몬스터들의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퍼펑!

  폭음과 탐욕스런 화염이 세상을 모조리 태울 기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키에에엑!

  쿠아아아!

  불길에 휩싸인 몬스터들이 지옥의 아귀처럼 비명을 질러 대는 통에 귓가가 멍해졌다.

  꾸역꾸역 몰려들던 몬스터들의 행렬이 잠시 주춤했다.

  막대한 마법의 위력은 비단 몬스터들의 발만 붙잡은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다. 고위 마법사가 지원 왔다.”

  “우와! 몬스터들을 몰아내자.”

  “트라우마를 지키자.”

  병사들은 용기백배하여 성문 앞으로 달려갔다. 마법사의 존재가 그들에게 이토록 큰 희망을 준 것이다.

  거기에 샤바와 사신들이 달려들었다. 샤바는 직접적으로 싸움에 개입하진 않았지만 사신들은 달랐다.

  샤바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을 본 그들은 광기에 휩싸여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지고, 거기에 마법사인 프리먼과 사신들까지 합류하자 성문 앞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여전히 몬스터들은 물밀듯이 밀려들었지만, 병사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허. 마법사가 이렇게 대한한 역할을 할 줄이야.”

  병규는 전장에서의 마법사가 얼마나 킄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현대전으로 말하면 포격 지원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다양한 효과로 보면 포격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병규가 마법사의 존재감에 깊이 탄복하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궁!

  묵직한 굉음과 진동이 트라우마를 휩쓸었다.

  성벽의 또 다른 곳이 허물어진 것이다.

  “북쪽이다!”

  “성주님의 저택 이 있는 것이야.”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외침이 일었다.

  성주님의 가족이 위험하게 되었음에도 보낼 병력이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병규!”

  제이콥이 병규를 불렀다. 굳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네가 저쪽을 맡아 줘.”

  병규가 가면 샤바가 따라갈 테고, 그렇게 되면 사신들도 움직이게 된다. 비록 샤바가 유희 중인 드래곤이라 본래의 힘을 쓰지 않을지 모르나, 그를 따르는 사신들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 될 것이다.

  제이콥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았어요.”

  제이콥의 의도를 눈치 챈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상황이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태연하게 힘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병규는 즉시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말을 잡아타고 북쪽으로 내달렸다. 샤바가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자 사신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을 타지 않았음에도 조금도 뒤쳐지지 않았다.

  성의 북쪽에는 글로리 후작의 저택이 있었다.

  성벽이 무너진 곳은 바로 그 뒤였다.

  병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보게 된 것은 거대한 괴물들이 배고픈 이리 떼처럼 날뛰는 장면이었다.

  저택의 정문엔 피떡이 되어 죽은 병사들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고, 광포한 오우거들이 고풍스런 저택을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있었다.

  끼히히힝.

  저택으로 들어가려 하자 말이 앞발을 들며 거부했다. 오우거 한 마리가 정면에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병규는 즉시 말 등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크워!

  오우거가 파리채를 휘두르듯, 두터운 손바닥을 휘둘러 왔다. 하지만 병규는 몸을 가볍게 뒤틀며 오우거의 머리를 뛰어 넘었다. 오우거의 키는 적어도 4, 5미터는 되었다. 하지만 병규는 특유의 탄성으로 그다지 힘도 들이지 않고 가뿐하게 넘어섰다.

  오우거를 넘어간 병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의 현관을 향해 달렸다.

  뒤는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맡긴다.

  우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달리면서 그는 귀를 활용하여 저택의 내부를 살폈다.

  뾰족한 비명 소리가 잡혔다.

  현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병규는 빛살 같은 스피드로 움직였다.

  저만치 있던 현관이 무서운 속도로 눈앞으로 WN욱 당겨졌다.

  휘리리릭!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로웠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이었다.

  병규는 순식간에 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긴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현관문을 지나 홀에 도착했더라는 말이 더 옳을 정도로 그는 빨랐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갈가리 찢겨진 병사들의 시신 뒤에서 자지러질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거대한 갈색 오우거 한 마리가 침을 게게 흘리며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어딜!”

  병규는 발끝을 튀기며 신형을 허공으로 뽑았다. 무서운 탄성으로 솟구친 그는 몸을 한 번 뒤집으며 천장에 매달렸다.

  고개를 들다 오우거의 흉측한 머리 꼭대기가 보였다.

  광기에 미쳐 버린 놈이다.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슥.

  병규의 오른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서걱.

  소름 끼치는 절삭음과 함께 오우거의 머리통에 수직으로 가느다란 줄이 생겼다.

  우뚝!

  발광하듯 날뛰던 오우걱의 움직임이 돌연 정지했다.

  동시에 머리통에 그어진 가느다란 실선에서 핏방울이 송알송알 맺히기 시작했다.

  깃털처럼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병규가 오우거의 거대한 몸뚱이를 슬쩍 밀었다. 그 가벼운 손짓에 놀랍게도 거구의 오우거가 썩은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철퍼덕 하고 오우거가 쓰러지자 그제야 잘려진 머리통이 수박 갈라지듯 좌우로 쫙 갈라졌다.

  넓은 홀은 금세 역겨운 피비린내로 가득 차 버렸다.

  “부인. 괜찮으세요?”

  오우거를 쓰러트린 병규는 후작 부인을 진정시켰다. 후작 부인은 많이 놀란 듯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녀들이······ 몬스터에게······.”

  “알겠습니다. 우선 진정하세요.”

  후작 부인을 의자에 앉힌 병규는 숨 쉴 틈도 없이 다시 몸을 날렸다.

  휘리리릭.

  놀랍도록 무서운 속도였다.

  그를 따라 현관에 들어섰다가 유우거들과 격전을 벌이게 된 사신들도 그의 놀라운 움직임에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무슨 저런 황당한.”

  사신들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들이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병규의 스피드는 그야말로 가공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사신들이라서 병규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자들 같았으면 그저 바람이 지나갔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사신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병규는 귀를 팔락이며 사람들의 기척을 탐색했다.

  몇 사람의 기척을 좇아 움직이니 부엌이 나왔다. 그곳엔 하녀 다섯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녀들 앞에는 트롤 두 마리가 설쳐대고 있었다.

  트롤ㄹ은 광분한 상태였다.

  눈이 뒤집혀 버린 듯, 하녀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부엌을 박살 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하녀들이 아직 무사할 수 있었다.

  병규는 두 팔을 좌우로 펼쳐 내며 힘을 쏟았다.

  “요수의 발톱!”  

  촤아악!

  그의 양손 끝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맹렬하게 솟구쳤다.

  크드드드드!

  예기를 느낀 트롤들이 고개를 돌렸다. 병규를 발견한 놈들이 목을 길게 빼고 울어댄다.

  콰드득!

  우는가 싶더니 돌연 두 마리가 동시에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큰 놈들이 상상외로 빨랐다. 게다가 힘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무심코 휘둘러진 손에 벽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다.

  트롤들이 위협적으로 달려드는데도, 병규는 피하지 않았다.

  맹렬하게 휘둘러지는 트롤의 손아귀를 향해 그저 가볍게 손을 휘둘렀을 뿐이다.

  서거걱.

  요수의 발톱은 무섭도록 예리했다.

  슬쩍 휘두른 손짓에 트롤의 한쪽 팔이 다섯 뭉치로 잘려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병규의 두 눈이 증오로 이글거렸다.

  괴물. 희생당한 사람들. 피.

  이 모든 정황들이 과거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스팔트 위에서 마주쳤던 무서운 괴물, 그리고 스프링클러가 쏟아지는 건물에서의 사투.

  눈앞의 트롤들은 여러 가지로 과거에 상대했던 스크래그라는 괴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편하게 보내 줘라.”

  호랭이의 조용한 음성이 들렸다.

  흠칫 놀란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롤을 보고 지나치게 흥분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크와아아!

  트롤의 괴성이 들려왔다.

  이제야 자신의 팔이 잘려 나갔음을 인지한 것이다.

  트롤리 광분해서 날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미쳐 날뛰던 트롤들이 갑자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의 거친 숨결에 앞 머리칼이 출렁였다.

  병규는 가볍게 발을 놀렸다.

  휘릭!

  어느새 그는 트롤들의 등 뒤에 서 있게 되었다.

  콰쾅.

  무차별한 트롤들의 공격에 병규가 서 있던 자리가 박살이 났다.

  처참하게 뭉개진 그곳을 힐끗 쳐다본 병규는 무심코 하녀들에게로 걸어갔다. 트롤들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의 발소리에 트롤들이 뒤를 돌아봤다. 병규가 이미 뒤에 있음을 알게 된 놈들은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의지는 있으되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이미 놈들은 상체와 하체가 깨끗하게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달리고 싶어도 달릴수가 없었던 것이다.

  철퍼덕.

  기울어진 트롤들의 상체가 바닥으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뒤이어 놈들의 하체가 허물어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덜덜 떨고 있는 하녀들에게 걸어가던 병규가 우뚝 발을 멈췄다. 그의 귀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기묘한 소음을 잡은 것이다.

  ‘아직 숨을 쉬고 있다?’

  트롤에게 다가간 병규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놀랍게도 몸이 두동강 난 트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잘려진 몸뚱이가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다.

  상처가 울컹울컹 일어나며 찢겨진 살덩이를 치유하는 광경에 병규는 미간을 심하게 찡그렸다.

  “이 녀석들. 스크래그와 비슷한 종류의 괴물이구나.”

  스크래그처럼 엄청난 재생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끝내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할 것이다.

  트롤들을 노려보던 병규가 손을 가볍게 떨쳤다.

  촤촤촥!

  얼린 고기가 토막 나는 듯한 소음과 함께 트롤들의 몸뚱이가 가닥가닥 끊어졌다. 아무리 엄청난 재생력을 가진 괴물이라도 이렇게 토막 내면 결국 죽게 된다.

  그것을 병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재생력 있는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지겹도록 겪어 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병규가 트롤들을 처리하고 뒤돌아섰을 때, 하녀들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지도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병규한테 고정되어 있었다.

  비리비리하게만 보이던 그가, 기사들도 당황하게 만드는 거대 몬스터를 삽시간에 잡아낸 것이다. 더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그가 맨손으로 트롤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무위는 이 저택의 주인인 글로리 후작 정도나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실력자?’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평범한 얼굴의 그와 트롤들을 단숨에 조각내던 광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손끝에서 피어 나오던 푸른색의 칼날 같은 기운은 그녀들의 가슴에 무언가 섬뜩한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괜찮으세요?”

  병규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들에게 물었다. 그제야 하녀들은 충격과 격정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이었다.

  병규가 트롤들을 제압하고 다시 홀로 돌아왔을 때, 저택에 침입한 몬스터들은 사신들에 의해 모두 정리된 상황이었다.

  저택으로 침입한 오우거들은 모두 열두 마리나 되었다. 거기에 트롤까지 합하면 스무 마리가 넘는 대형 몬스터들을 이들이 처리한 것이다.

  “전에도 봤지만 상당한 실력들이야.”

  “저들 말이다. 조금 이상하지 않냐?”

  호랭이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병규에게 물었다.

  “뭐가요?”

  “이상한 능력 말이다. 마치 우리가 있던 세계의 능력자들과 비슷한 것 같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음······.“

  잠시 생각하던 병규는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뭐 이쪽 세계라고 능력자들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잖아요. 이들도 분명 능력자나 그 비슷한 존재일 거예요.”

  허나······.“

  호랭이는 말끝을 흐렸다.

  ‘저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몬스터에 더 가까운 것 같으니 대체······.“

  병규는 후작 부인과 하녀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무너진 성벽 주위의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한 다음, 성문 쪽으로 달려 갔다.

  성문 쪽 역시 대략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몬스터들이 감자기 물러나더군.”

  허겁지겁 달려온 병규를 보고 제이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치열한 혈전을 보여 주듯, 제이콥의 몸은 끈적이는 몬스터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은 어떻던가?”

  “저택의 병사들이 좀······ 하지만 생각보다는 몬스터가 많이 들어오지 않아서 피해가 적은 편이었어요.”

  병규는 단순히 몬스터들의 수만 가지고 적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저택에 침입한 몬스터는 오우거 열두 마리에, 트롤리 아홉 마리였다.

  이 정도 규모의 초대형 육식 몬스터 무리라면 웬만한 기사단이 투입되어도 애를 먹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인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 길 없는 제이콥은 병규의 말에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몬스터의 주력이 대부분 이쪽으로 몰렸었나 보군. 피해가 적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제이콥은 수고했다며 병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빙긋 웃은 병규는 슬쩍 성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피와 살점들이 지면 위로 걸쭉하게 눌어붙은 한쪽, 레종과 디스가 다친 병사들을 돌보고 있었다.

  다행히 레종은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그 치열한 격전 중에도 기사들이 그녀를 무사히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몬스터들도 쳐들어올 것 같지 않으니 우리들도 뒷정리를 도와주록 하자.”

  제이콥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들을 간신히 막긴 했지만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부상자들을 신전으로 옮기고, 무너진 성벽을 대신해 목책도 쌓아야 했다. 그 외에도 할 일이 무수히 많았다.

  한참 만에 병규가 대충 일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젤라. 몬스터가 우리 안젤라를 데려갔소.”

  그의 바지를 붙들고 적규를 터트리는 늙은 음유시인은 바로 안젤라의 조부였다.

  다음 날 아침, 트라우마에 상주한 용병들은 모두 용병 길드로 모였다.

  어제처럼 대대적인 사건이 터지면 으레 용병들은 우선 길드에 모여 차후의 일을 노의했다. 그곳에서 결정된 상황에 따라 용병들의 미래가 좌우되는 것이다.

  이것은 용병들의 행동 지침 중 가장 우선시되는 조항이었다.

  만약 용병들이 상주한 도시에 전쟁이 터진다면 길드를 통해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 빨리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용병들이 모드 모이자 홉은 몬스터 침공으로 입은 피해를 먼저 보고했다.

  "정보길드‘주시자의 눈’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사망자가 123명, 부상자는62명으로·····.“

  홉이 피해 정도를 보고하자 용병들 사이에서 가벼운 술렁임이 일었다.

  사망자만 백 명이 넘었다. 몬스터와의 전투치곤 상당한 규모의 피해였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피해의 대부분이 민간인에게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부상자의 수가 사망자의 수보다 적은 것은 그만큼 몬스터들이 광분해 있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성문과 성벽이 허물어진 이유가 뭐랍디까?”

  털 복숭이 용병이 질문을 던졌다.

  트라우마는 성의 거대한 규모뿐만 아니라 성벽의 강력한 방어력으로도 유명했다.

  성이 지어진 지 수백 년, 이 고성은 수많은 전쟁과 몬스터들의 침공에도 아직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채 견고함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번엔 허무하게 두 곳이나 무너진 것이다.

  대답은 홉 대신 프리먼이 했다.

  “마법일세.”

  자리에서 일어나며 프리먼은 짧고 간단한 말로 대답을 시작했다.

  “성문이 무너질 때, 강한 마나의 파동을 느꼈네. 분명 성문과 성벽은 마법의 힘으로 무너진 것일세, 그것도 안쪽에서 누군가 힘을 쓴 모양이야.”

  “대체 누가?”

  “몬스터에게 마법사가 있단 말이야?”

  “터무니없는 소리.”

  용병들이 웅성거리자 길드는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손을 들어 좌중을 진정시킨 홉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직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비공식적인 정보에 의하면 이번 사건으로 실종된 자가 스무 명 정도인데, 그중 15세 미만의 어린 여자 아이가 무려 열두 명이나 된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의 목적은 소년들의 납치에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술렁임이 커졌다.

  “뭐야 그게?”

  “몬스터들이 소녀들을 데려가서 뭘 어쩐다고·····.”

  소란스런 가운데 누군가의 경악성이 들여왔다.

  “설마 피의 의식?”

  술렁거림이 한층 커졌다.

  피의 의식이란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분하여 저마다 목청을 돋워 떠들었다. 

  “다들 조용히.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홉은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외쳤지만 술렁임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회의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던 병규는 호젤의 손등을 톡톡 건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의 의식이 뭐죠?”

  호젤은 목소리를 낮추며 설명했다.

  “10년 전에 있었던 흑마법사들의 잔인한 의식을 말하는 거야.”

  이때쯤 병규도 이드라센 대륙에 대해 제법 많은 지식을 습득한 상태였다. 당연히 흑마법사에 대하서도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흑마법사는 강대한 힘을 추구한 나머지 마계의 힘을 빌려서인지 흑마법사들 중엔 괴이하고 괴팍한 성격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원래 마법사들은 지식에 대한 탐욕이 평범한 자들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그런데, 흑마법사들은 그 탐욕이 지나쳐 금단의 영역까지 발전해 버렸다.

  인체에 대한 실험과 잔혹한 주술들까지, 그들은 탐구심의 충족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잔인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모든 흑마법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이 사악한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이드라센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흑마법사들을 배척했다. 특히 신성제국 아마스는 10년 전,흑마법사들을 악의 주축으로 보고 대대적인 토벌전을 감행했었다.

  “신성제국에 쫓기던 흑마법사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마왕을 현신시키기로 했지. 그때 벌렸던 행위가 바로 피의 의식이야.”

  “왜 피의 의식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건······제물로 쓰이는 것이 수십 명의 어린 소녀들이기 때문이지.”

  “!”

  병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용병들이 수군거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심각한 것은 납치된 아이들 중에 안젤라가 있기 때문이었다.  

‘안젤라.’

  병규는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힘껏 움켜쥐었다.

  이때, 탁자를 두드리며 좌중을 진정시킨 홉이 큰 목소리로 새로운 의뢰 내용을 외쳤다.

  “사실, 소녀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아 달라고 의뢰를 해 왔다. 아아. 물론 실종된 소녀들이 대부분 서민층이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의뢰비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보람 있는 일이 될 것만은 분명하다. 혹시 관심 있는 사람 없나?”

  수군거리던 실내가 돌연 조용해졌다.

  실종된 소녀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상대는 흑마법사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들이다. 한낱 영웅심으로 달려가 봤자 처참하게 살해당할 뿐이다.

  홉 역시 이런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던 터라 용병들의 태도에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긴 고작 2골드에 목숨을 걸 만한 멍청이들이라면 일찌감치 죽었겠지.’

  이 의뢰에 걸린 의뢰비는 고작 2골드다. 실종된 소녀들의 부모들은 숨겨 둔 비상금까지 싹싹 긁어서 가져온 돈이겠지만 용병들의 목숨 값으로써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 없는 것으로 알고 다음 안건으로······.”

  그때였다.

  “그 의뢰, 저도 동참할 수 있을까요?”

  길드로 한 청년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청년을 본 병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종?”

  그, 아니 그녀는 다름 아닌 레종이었다.

  레종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완연했다. 백색의 의복은 몬스터와 사람의 피로,제 색깔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레종은 꿋꿋한 표정으로 단상까지 걸어갔다.

  “무슨 소린가?”

  홉의 물음에 레종은 품에서 두툼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나와 함께 소녀들을 구해 주는 일에 동참하시는 분들께 이 돈을 드리겠습니다.”

  레종이 가죽 주머니를 뒤집자 테이블 위로 찬란한 금화가 우수수 떨어졌다, 금화를 보는 용병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한 금액이었다.

  “왜 이런 의뢰를 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혹 납치된 소녀들 중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군. 이건 상당한 금액인데, 어째서 모르는 사람을 위해 큰 돈을 쓰겠다는 거지?”

  홉의 물음에 레종은 오히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정의를 행하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녀의 말에 용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영웅 나셨군.”

  “젊은이가 기백이 대단하네.”

  레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용병들이 웃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다. 아니 순진하다기보다는 세상 물을 너무 모른다는 말이 옳았다. 그가 아는 세상이란 책과 얘기로만 들은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의 금화를 흘낏 쳐다본 홉은 실실 웃고 있는 용병들에게 다시 물었다.

  “보다시피 의뢰비가 상당히 늘었다. 이 정도 금화라면 일급 의뢰비쯤은 되리라 본다. 누구 할 사람 없나? 한 번만 수고하면 1년 내내 놀고먹을 수 있는 기회다.”

  홉은 꽤나 호기 있게 말했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이번 역시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돈보다 목숨이 귀해.”

  “망할 흑마법사와 싸우는 일이라면 난 정대 사양이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용병들은 손을 저었다.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레종은 당황했다. 이런 거금을 걸었는데 설마 아무도 안 나설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여, 여러분. 소녀들을 구출하는 일입니다. 정의라고요.”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용병들은 비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아무도 나설 리 없었다.

  설사 금화 천 개가 걸려 있다 해도 죽으러 가는 길에 순순히 나설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런 멍청한 용병이 딱 한 명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모두의 눈길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쏠렸다.

  “카, 카피?”

  “카피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병규였다.

  사실 그는 굳이 의뢰가 아니더라도 소녀들을 구하러 갈 생각이었다. 납치된 소녀 중 안젤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설사 안젤라가 없었더라도 호랭이 신선님이 있는 한 어떻게든 소녀들을 구출하러 가야 했을 것이다.

  “아니?”

  “벼, 병규야.”

  프리즘 용병단의 놀란 목소리와 함께 용병들의 비아냥거림도 들려왔다.

  “멍청한 자실.”

  “돈에 눈이 먼 녀석이 하나 있었군.”

  “내버려 둬라 . 어린 자식이잖아. 한 번쯤 객기를 부릴 만한 때지.”

  용병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모들 들었을 텐데도 병규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를 가만 지켜보던 홉이 물었다.

  “그건 자네 용병단 전체의 뜻인가 아니면 자네 혼자만의 의지인 건가?”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흐음.”

  길드장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왜인지 이류를 물어도 되겠나?”

  “납치된 소녀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병규의 말에 레종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녀는 병규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발견할 t 있었다.

  ‘설마 그 아이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걸 보니 가족은 아닌 모양이군. 그런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홉의 자극적인 물음에 병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전혀.”

  결연한 그의 태도에 호랭이마저 깜짝 놀라 버렸다.

  ‘이 녀석이 웬일로,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지.’

  퀴니가 납치되었을 때도 병규는 전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적극적이었다.

  병규가 안젤라를 남달리 귀여워했던 것은 퀴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가 납치되었으니 이렇게 진지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평소에는 gm리멍덩한 녀석이지만 이럴 때는 조금 듬직해 보이는군.’

  호랭이가 병규를 쳐다보며 흡족해하는 동안, 홉 역시 진지하게 병규를 살폈다. 진심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병규가 결코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진심이군. 하지만 허락할 수 없네.”

  “왜죠?”

  “자넨 자유 용병이 아니야. 엄연히 프리즘 용병단에 소속된 용병이지. 용병단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의뢰를 맡을 수는 없는 걸세.”

  말을 마친 홉은 제이콥에게 시선을 던졌다. 설마 이런 바보 녀석을 진짜로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라는 의미였다.

  “휴.”

  제이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 저런 녀석을 용병단에 들이게 되었는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리는 모습이 젊은이들의 행태를 토로하는 늙은이 같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홉은 그가 병규를 말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콥이 꺼낸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용병단의 대장으로서 전체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단원의 행실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를 혼자 보낼 생각도 없소.”

  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자네의 말은 이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소리인가?”

  “어쩔 수 없잖아? 허락을 안 하면 혼자서라도 갈 것 같은데. 그렇지?”

  제이콥이 묻자 병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저렇다는군. 이렇게 난감한 상황이니 어쩌겠나.”

  “······무책임한 말이다.”

  “붉은 대지는 몬스터들의 성지. 혼자 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여럿이 가면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높아질지 모르지.”

  “내가 듣기엔 모두 다······죽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홉의 적나라한 말에 제이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이 어렵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동료를 버릴 생각은 없어. 그건 우리 용병 단원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야.”

  잔잔한 그의 음성에 용병들의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최곱니다.”

  병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호젤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바보라고 구시렁거렸고, 프리먼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친구인 고든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이 정도면 대답은 충분하리라 믿소.”

  

  “무슨 생각인 거냐?”

  용병들이 모두 돌아간 후, 홉이 제이콥에게 물었다.

  그는 제이콥이 얼마나 유능한 인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제이콥이 이곳에서 나서 자랐듯, 홉 역시 이곳 출신이다.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는데 서로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이유가 뭔가?”

  그가 아는 한 제이콥은 이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이콥은 호젤에게 호되게 혼나고 있는 병규에게 시선을 던졌다. 호젤은 샤버는 굉장히 어려워하면서도 병규는 편하게 대했다.

  병규와 샤바 둘 다 정체가 미심쩍었지만, 이상하게 병규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능력이 잇는 것 같앗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콥의 시선을 좇아 홉도 병규를 보았다.

  몸에 비해 큰 옷을 걸쳐서인지 유난히 가늘어 보이는 몸이다. 사실 그렇게 마른 체형은 아니지만 워낙 근육질의 용병들만 보아서인지 병규의 몸은 더욱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 소년의 어떤 점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이는지 모르겠군.”

  “후후.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흐릿하게 웃던 제이콥의 눈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샤바가 발끈한 표정으로 호젤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인님에게 뭐라 하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샤바가 노려보자 호젤은 금세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참으로 복잡한 서열 관계였다.

  ‘그가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라면······ 반드시!’

  샤바를 보는 제이콥의 눈에서 묘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오늘 뒤집어쓴 코피가 더 많소이다

  누굴 죽여주길 원하오?

  샤바와 사신들의 격돌!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초유의 매직미사일

  그곳에서 넌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오우거의 힘, 그리고 핏빛 각성

  마왕을 먹겠다?

  인간이 아닌 넌 대체 뭐냐?

  떠나는 그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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