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102)

    샤바와 사신들의 격돌!

  차갑게 쏟아지는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인물들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데도 미묘한 파공음만이 일 뿐이다.

  상승의 어세신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극도로 정제된 움직임.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지라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그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은 두건에 그려진 붉은 핏방울 그림이 전부였다.

  두건에 그려진 붉은 핏방울.

  그것은 바로 블러드 콜렉터의 표식이었다.

  ‘서둘러라.’

  이카루가는 건물 지붕을 고양이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타고 넘는 부하들을 열심히 독려했다.

  켄트의 의뢰를 받아들인 이카루가는 이번 일에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대대적인 인원을 출정시켰다. 길드의 모든 실력자들을 투입하고, 그도 모자라 길드장인 이카루가까지 직접 참여했다.

  그만큼 이번 일에 신중을 기한다는 뜻이다.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할 까닭이 없었다.

  이미 상대에 대한 조사는 끝났다.

  표적 주위에 불온한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즉, 함정은 아닌 것이다.

  면밀한 조사 끝에 이카루가는 오늘 임무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단지 의뢰 내용에 비해 너무 많은 의뢰비와 뭔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그로 하여금 만전을 기하게 만들 뿐이었다.

  ‘저기로군.’

  길드장 이카루가는 여관 ‘트라우마의 새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미 시간은 새벽의 절정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관의 불은 모두 꺼져 있고, 창밖으로 코 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표적들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이카루가는 어세신들을 여관 주위에 촘촘히 배치하고, 품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 볼품없는 구슬에는 슬립마법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소 비싼 것이 흠이지만 일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주 애용하는 물건이었다.

  이카루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관의 창을 소리 없이 열었다.

  이제 열려진 창으로 구슬을 던지고, 수면에 취한 녀석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허탈할 정도로 쉬운 의뢰군.’

  공돈을 버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큿”

  작은 신음 소리가 잡혔다.

  흠짓 놀란 그는 즉시 자세를 낮추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들릴 듯 말듯 미미하게 들려온 신음 소리에 느슨해진 감각이 대번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밤은 깊은 고요의 흑막 속에 묻혀 있고, 새벽의 공기는 여전히 차기만 했다.

  하지만 이카루가는 그 짙은 고요 속에서 좀 전과는 다른 이질적인 뭔가를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목에 건 피리를 불었다.

  힘껏 불었건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특수한 피리라 훈련받은 자들만이 그 독특한 음향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곧 대답 대신 저주파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30...... 40...... 50...... 56?’

  차근차근 피리 소리를 헤아리던 이카루가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턱없이 부족하다.

  이번 의뢰에 그가 동원한 어세신은 정확히 111명. 그런데 방금 들려온 응답은 채 60개도 되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 50명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이카루가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누가 어둠 속에 은신한 어세신들을 소리 없이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함정이었군.’

  이카루가는 이를 갈았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더라니.’

  그는 분노하면서도 급히 피리로 수하들을 불러들였다.

  놈들이 누구건 간에 희생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감히 블러드 콜렉터를 건들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이제야 눈치 챈 모양이군.”

  지붕 아래, 박쥐처럼 매달려 있던 흑의인을 조용히 처리하던 백발의 노인이 부드럽게 웃는다.

  너무 편안한 미소였다.

  방금 목뼈가 부러져 나간 흑의인들이 노인의 작품이아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휘리리릭.

  가벼운 파공성이 일제히 들려왔다.

  여관 주위에 잠복해 있던 자들이 갑자기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등 뒤로 단발머리의 소녀 한 명이 소리 없이 날아 내렸다.

  “어세신마스터란 자도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요.”

  노인의 시선이 흐르듯 소녀를 살폈다.

  은발을 찰랑이는 그녀는 꽤나 귀여운 외모였다. 때로는 인형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깜찍한 얼굴이었다.

  은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붕대로 전신을 감은 괴인을 필두로 세 명의 사내가 창가에 맺히는 이슬처럼 신비롭게 나타났다.

  그들 중 키 작은 남자의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놈들이 다 도망갔잖아. 이런 피라미들 죽이는 데 꼭 그렇게 소란을 떨어야 해?”

  유달리 작은 키의 사내가 붕대로 전신을 감은 자를 타박했다.

  좀 전에 났던 미세한 소음의 정체는 바로 붕대 사내가 저지른 실수였다.

  키 작은 사내는 바로 그것이 불만이었다.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처리할 수 있었던 일이 괜히 복잡해진 것이다.

  하지만 붕대 사내도 할 말은 있었다.

  “시끄러. 난 은밀히 일을 처리하는 게 적성에 안 맞는단 말이야. 영감. 뭐 하러 이렇게 일을 귀찮게 해. 몰아놓고 그냥 한꺼번에 처리하면 되잖아.”

  툴툴거리는 그의 말에 영감이라 불린 노인은 진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세신마스터의 실력을 살펴볼 생각이었네.”

  “어떻게?”

  “그의 수하들을 처리하면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게 궁금했던 것이지. 하지만 아누래도 그는 수하들의 목숨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야. 이렇듯 많은 자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일세.”

  “아니면 우리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죠.”

  소녀의 생기 넘치는 말에 사내들은 으스스하게 웃었다.

  “흐흐흐. 과연 그렇겠군.”

  “킬킬킬.”

  “영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허허허. 이대로 놓아줘도 상관없겠지만, 왠지 뒤가 깔끔하지 못한 것 같으이.”

  자상한 미소와 대비되는 무시무시한 발언이었다.

  노인의 말에 나머지 넷은 소리 없이 웃었다.

  “감히 어세신마스터를 자처하는 녀석에게 어둠의 율법을 가르쳐 주마.”

  음침한 말과 함께 다섯 그림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지트를 떠난 마일드의 사싱들은 며칠 만에 트라우마에 당도할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야음을 틈타 성벽을 넘은 그들은 곧장 카리오스가 알려준 여관을 찾아갔다.

  그렇게 기대 반 흥분 반으로 ‘트라우마의 새벽’을 찾았을 때, 그들은 놀라 멈춰 서고 말았다.

  백여 명에 가까운 어세신들이 여관 주위를 가득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철통같은 경비에 사신들은 안색을 굳혔다.

  “어세신마스터란 놈의 추종자들이군.”

  노인을 비롯한 5인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어세신마스터는 그들의 동료인 카리오스를 현혹했듯 또 다른 어세신들을 꼬드겼을 것이다.

  그들은 잠시 머리를 맞대고 처리 방법을 논의했다.

  결론은 간단하게 내려졌다.

  오늘 내로 어세신마스터를 처리한다.

  그리고 방해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제거한다.

  결단을 내린 사신들은 물이 종이에 스며들듯 소리 없이 어세신들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갔다.

  물론 여관 주변을 물샐틈없이 경계하고 있던 백여 명의 어세신들은 블러드 콜렉터의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어세신마스터를 지키고 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샤바를 포함한 프리즘 용병단을 납치하러 온 길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기를 잘못 택하고 말았다.

  길드장인 이카루가가 만약 이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억울하다며 땅을 치고 통곡을 했을 것이다.

  그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일에 만전을 기한답시고, 백 명이나 되는 인원을 끌고 나온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일드의 사신들에게 걸리다니.

  한마디로 말해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

  “가 버렸네.”

  여관의 어느 객실.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던 병규가 피로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블러드 콜렉터의 어세신들이 몰려들 때부터 일찌감치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의 예민한 감지 능력 덕분이다.

  한데 갑자기 그 많던 기척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왜 온 걸까? 그리고 왜 갑자기 가 버린 거지?’

  병규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알 길이 없었다. 괜히 무리하게 머리를 굴렸더니 잊었던 피로만 몰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별일 아니겠지.”

  침대 위로 풀썩 누워 버린 병규는 잠시 후 요란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하지만 샤바는 그와 달랐다.

  역시 인기척 때문에 잠을 깬 샤바는 더듬이처럼 솟은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고민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창문 밖으로 살며시 나갔다.

  그는 호기심이 너무도 왕성한 생물이었다.

  부하들을 불러 모은 이카루가는 으슥한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젠장. 그새 수가 이렇게 줄다니.’

  백 명이 넘던 출동 인원 중 그의 호출에 모인 인원은 고작 5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60명 가까이나 사라진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수하들이 사라지는 낌새를 전혀 눈치 cowl 못했다는 것이다.

  ‘상대는 같은 어세신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고도로 훈련된 어세신들을 이토록 은밀하게 제거할 수 있는 인물은 같은 어세신뿐이다.

  “어떤 놈들이냐. 나와라.”

  이카루가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외침이 밤공기 속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대답 없는 메아리만 공허하게 돌아올 뿐이었다.

  상대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이카루가는 초조해졌다.

  ‘침착하자. 녀석들은 결국 몸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은 사방이 훤하게 트인 지형이다.

  적이 자신들을 노린다면 반드시 모습을 나타내야 했다.

  과연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꿀꺽.

  예리한 눈으로 그들의 면면을 살피던 이카루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놀랍게도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다섯 녀석들에게서는 아무런 존재감도 느낄 수 없었다. 속 빈 인형들이 흐느적거리며 걸어오는 것 같았다.

  더더욱 기분 나쁜 것은 사람이라면 응당 들려야 할 숨소리조차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카루가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보통 실력자들이 아님을.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이카루가는 긴장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로 외쳐 물었다.

  “허허허.”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노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세신마스터를 모시는 자들치곤 간이 너무 작군.”

  “어세신마스터?”

  어세신마스터라면 소드마스터에 비견될 정도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전설의 어세신을 말한다. 여기서 전설리라고 칭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불가능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정신이 이상한 놈인가 보군.’

  이카루가는 노인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눈에 독기를 가득 뿜으며 물었다.

  “그 망할 기사 놈이 보낸 것이냐?”

  이카루가는 지금의 상황이 자신에게 이 일을 의뢰했던 기사 놈의 짓이라 생각했다. 고작 여섯에 불과한 용병단 하나를 사로잡는데 너무 큰 거금을 건네줄 때부터 찜찜했다.

  “허허.”

  노인은 웃기만 했다.

  망할 기사 놈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의 웃음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이카루가는 속으로 이를 박박 갈았다.

  ‘어쩐지 구린내를 풀풀 풍기더라니.’

  이카루가는 이제 놈들의 배후를 알게 되었으니 눈앞의 어세신들에게는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처절한 복수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쳐라.”

  이카루가의 한마디에 은신해 있던 어세신들이 검은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데도 아주 미세한 파공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음조차도 사신들에게는 천둥 벼락 치는 소음으로 느껴졌다.

  “어세신이라는 녀석들이 너무 요란하게 움직이는군.”

  흑의인들을 유심히 쳐다보던 키 작은 사내가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그의 행동은 수많은 적들에게 포위된 사람치곤, 지나칠 정도로 태연했다. 그런 양상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십의 어세신이 벌 떼처럼 달려드는데도 마일드의 사신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 중 유일하게 표정이라 불릴 만한 것을 내비치는 사람은 홍일점인 마그네트뿐이었다. 그녀는 말끔한 얼굴 위로 미미한 주름을 그리고 있었다.

  무언가 불만이 서린 표정이었다.

  “어세신이란 자들이 품위 없게......”

  휘릭!

  탐색하듯 주위를 휘돌던 어세신 중 하나가 검을 빼어 들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맹렬히 북상하던 태풍이 돌연 고개를 휙 틀어 버린 것처럼 그들의 공격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전개되었다.

  샤아아아아아.

  일시에 폭발한 그들의 살기에 대기는 몸서리를 쳐댔다.

  사삭.

  바람 소리가 차게 울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 자루의 칼이 마그네트의 뒷덜미를 찔러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그네트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투덜투덜 계속 불만만 곱씹었다.

  “한심해.”

  콰각.

  마침내 칼이 살 속으로 틀어박히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륵.

  쇠붙이가 살을 비집고 내장을 휘젓자 수축된 근육은 괴로운 비명을 쏟아 냈다.

  털퍼덕.

  묵직한 동체가 차가운 지면 위로 무너졌다.

  그러나 쓰러진 것은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를 노리던 어세신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어세신의 심장에 박힌 것이 바로 그가 들고 있던 검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검으로 본인의 심장을 찔렀다?

  자살이라고 보기엔 터무니없는 사건이었고, 실수라고 보기엔 어세신의 실력이 너무 높았다.

  ‘왜? 어떻게?’

  죽어 가는 어세신의 눈동자엔 온통 의문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휘릭.

  숨이 끊어진 그의 머리를 무정한 동료들이 타고 넘었다.

  죽음을 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어세신이다. 동료가 눈앞에서 죽는다 해도 절대 동요해서는 안 된다. 슬퍼할 바엔 차라리 복수의 칼을 빼 드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이번엔 무려 셋.

  그들의 칼은 여전히 마그네트를 향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약자를 먼저 처리하는 악독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양털을 뒤집어쓴 마녀의 사악한 계략일 뿐이다.

  콰악. 서걱. 키긱.

  귀에 거슬리는 세 번의 절삭음이 울렸다.

  추아악......

  피가 쏟아지는 끈끈한 소음과 함께 마그네트를 노리던 세 어세신의 검은 동체가 뻣뻣하게 넘어갔다. 이번에도 그들은 자신의 칼로 본인의 심장을 쑤신 채였다.

  ‘맙소사.’

  멀찍이 떨어진 채 그녀와 어세신들 간의 사투를 지켜보고 있던 이카루가는 망연자실했다.

  그는 방금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소녀를 향해 휘둘러진 단도들이 막 그녀의 작은 몸뚱이에 작렬하려는 순간, 그들의 칼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주인의 심장으로 틀어박혔다. 마치 주인의 심장이 쇠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소녀를 덮쳐 가던 흑의인들은 본의 아니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 설마 이 기술은......’

  소녀의 놀라운 능력에 경악을 금치 못하던 이카루가의 뇌리로 번개처럼 스치는 이름.

  ‘시, 심혼의 마녀.’

  그리고 그녀가 속한 악몽과 같은 단체.

  ‘마일드의 일곱 사신.’

  쿵.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싫은 이름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사신이다.

  지금까지 사신들이 이룩한 업적을 보면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일국의 왕은 물론이고, 제국의 재상과 숱한 인간들이 그들의 손에,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즉, 사신의 표적이 되었음은 곧 피할 수 없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일드의 사신이 다섯이나 오다니. 대체’

  망연한 눈으로 기묘한 사람들을 바라보던 이카루가는 이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모자라다.

  분명 다섯이었던 사신들의 머릿수가. 불과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셋으로 줄어 버린 것이다.

  노인과 빨간 머리의 소녀. 그리고 장대 같은 키의 사내.

  이들 세 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게 큰 머리를 가진 녀석과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기괴한 녀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언제?’

  다섯 사신들이 출연한 이후로 이카루가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단지 딱 한 번. 눈을 깜빡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무려 두 사람이나 사라진 것이다.

  촤아악.

  몸서리쳐지는 끔찍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카루가의 두 눈에 암흑 공간을 붉게 채우는 피 무더기가 잡혔다.

  마일드의 사신들이 괴기스럽게 서 있는 등 뒤로 돌연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 것이다.

  그것은 정녕 괴이한 일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느닷없이 핏물을 토해 낸 것 같았으니 말이다.

  “끄륵.”

  “끅.”

  답답한 신음성이 귓가를 적셨다.

  털썩털썩.

  사신들을 덮쳐 가던 이카루가의 수하들이 베어진 벼 이삭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사라진 두 사신은 피를 쏟아 내는 암흑 무리 한중앙에 있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눈으로 그의 수하들을 도살하듯 베어 넘기고 있었다.

  20여 명 정도 남은 어세신들은 온힘을 다해 대항했지만 역부족, 두 사신의 무차별한 공격 앞에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이카루가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마일드의 사신들 중 또 누군가가 소리 없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을 감지 않아도 악몽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희롱하듯, 신기루처럼 은밀히 나타났다.

  “자네가 이들의 지휘자인가?”

  “헉!”

  깜짝 놀란 이카루가는 놀란 개구리처럼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대체 언제였을까.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좀 전까지 저만치에 있던 노인이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스르르 나타난 것이다.

  백태가 낀 노인의 하얀 눈동자.

  노인의 초점 없는 눈을 본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벌렁거렸다.

  “이제......”

  노인이 노회한 음성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 혼자 남았군.”

  “!”

  이카루가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네 사람이 스산한 달빛 아래 서 있었다.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사신들의 주위. 핏물에 잠긴 수십의 인영들이 이카루가의 눈동자를 아프게 찔렀다.

  노인의 말은 옳았다.

  어느새 그의 수하들은 모조리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마일드의 일곱 사신에 비하면 명성도에 어느 정도 손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블러드 콜렉터 길드는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어세신 조직이다.

  그중에서도 오늘 그가 데려온 자들은 그야말로 최상급.

  일류 어세신들인 것이다.

  한데 그런 그들이, 무려 백 명이 넘는 일급 어세신들이 잠깐 사이에 소리도, 기척도 없이 모조리 전멸당해 버렸다.

  압도적인 실력 차라는 말조차 이 순간만큼은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사신들의 능력은 엄청났다.

  “긴장했군.”

  노인이 슬며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헉!”

  숨이 턱 막혔다.

  노인은 살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기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기도에, 인상 역시 평범했다.

  시골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노인을 마주 대하니 가슴이 턱 하고 막혀 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허. 길드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담이 작아서야.”

  노인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처럼 품에 안겨 잠이 들고 싶게 만드는 노인의 웃음에 이카루가는 오히려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어쩌다 자네가 못된 사람을 만나 고생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게.”

  노인은 이상한 소릴 입에 담았다.

  물론 노인이 지칭한 사람은 카리오스를 물들인 어세신마스터였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이카루가는 자연스럽게 엉뚱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기사 놈!’

  이카루가는 황금을 들고 왔던 켄트를 떠올렸다.

  감히 자신의 길드를 함정에 빠트리다니.

  절로 이가 갈렸다.

  “허허허.”

  노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그냥 뒤돌아섰다.

  이카루가는 의아했다.

  여태 사신이 표적을 살려 주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이군.’

  이카루가는 턱 아래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사신들이 완전히 어둠에 묻히고 나서야 이카루가는 노인의 별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일드의 일곱 사신에게는 저마다 독특한 별명이 하나씩 있었다. 그 별명은 그들의 독특한 특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크리티컬.

  노인의 별명이었다.

  그의 특기는 치명적인 급소 공격이었다.

  불길한 느낌이 뒷골을 으스스 떨리게 했다.

  그때였다.

  뚝뚝.

  턱 아래로 떨어지는 끈적거림에 손을 문지르자 피가 묻어 나왔다. 코피가 흘러나온 것이다.

  “재, 재수 없게.”

  평생 몇 번 흘려 보지 않았던 코피가 하필 지금 흘러나오다니. 노인의 기세에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소매로 코밑을 쓱 닦았다.

  한 번, 두 번......

  어찌 된 일인지 코피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꾸만 출혈이 심해져 숨쉬는 것조차 곤란했다.

  코피가 샘물처럼 쏟아지다니.

  심상치 않았다.

  “서, 설마.”

  이카루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떤 암수를 받은 것은 아닐까? 설마 노인이?

  “대체...... 언제......”

  문득 떠오르는 기억.

  노인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었다.

  “그 짧은 순간에?”

  믿을 수 없지만 노인과의 접촉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하찮은 접촉이 이루어지는 사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큭, 악독한 놈.”

  이카루가는 이를 부드득 갈며 뛰기 시작했다.

  몸이 잘못된 것이 틀림없는 이상 한시바삐 치료를 해야 한다.

  교단의 신성력을 빌리면 비싸기는 하지만 분명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바쁘게 뛰었다.

  그러나 채 몇 걸음 더 옮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크륵. 수, 숨이. 크르륵.”

  벌려진 그의 입으로 피거품이 콸콸 뿜어져 나왔다.

  비단 입뿐이 아니었다.

  눈, 귀까지 벌건 핏물을 뿜어내더니 곧이어 그의 하복부까지 검붉게 물들어 버렸다.

  “끄르륵.”

  답답한 신음과 함께 그는 끝내 탑이 무너지듯 무너져 내렸다.

  처음 걸음을 옮긴 곳에서 채 열 걸음도 되지 못한 곳이었다.

  “커컥. 이, 이렇게 허무하게.”

  억울한 외침과 함께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 침묵.

  노인이 말한 다음이란 바로 다음 생이란 뜻이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자들이군.”

  멀리서 들려오는 피거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바인딩이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어세신마스터를 지키고 있는 자들치고는 형편없었어.”

  나이프 역시 동감을 표했다.

  “한심해. 어세신마스터도 이렇게 실망스러우면 어쩌지?”

  마그네트가 입술을 뾰족 내밀며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못 들을 사람은 없었다. 바인딩이 몸에 감고 있는 붕대만큼이나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잔혹하게 웃었다.

  “크흐흐. 혹시 우리가 너무 강한 것은 아닐까?”

  “호호. 맞아. 만약 어세신마스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들일거야.”

  “크크. 큰링이군. 이 좁은 대륙에 어세신마스터가 한꺼번에 여섯이나 나타났으니.”

  “흐흐흐.”

  “하하하.”

  모두들 쾌활하게 웃었다.

  먹이에 들러붙은 귀찮은 파리들을 처리했으니, 이젠 느긋하게 메인 디쉬를 기다릴 차례다.

  그때였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샤바?”

  등 뒤에서 들려온 조용한 물음에 유쾌하게 걸어가던 사신들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그들의 고개가 번개같이 뒤로 돌아갔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검은 장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아!”

  소년의 얼굴을 본 마그네트가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가히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미모가 아닌가. 순간 달빛의 정령이 나타난 것은 아닌지 착각될 정도였다.

  “예쁘다. 가지고 싶어.”

  느닷없이 나타난 소년을 보고 마그네트가 게게 풀린 노른자처럼 눈동자를 흐리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경악성을 애써 삼키고 있었다.

  ‘배후를......’

  ‘뺏기다니.’

  그들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오직 하나.

  당했다는 섬뜩하고도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것도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말이다.

  대륙 제일의 어세신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그들에겐 너무도 충격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들 중 소년의 기척을 느낀 자가 단 한 명도,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혹시......”

  놀란 얼굴로 소년의 얼굴을 응시하던 크리티컬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세신마스터요?”

  노인의 질문에 잠시 정신을 놓았던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모았다.

  달빛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얼굴.

  흑요석을 박아 놓은 것 같은 검은 눈동자.

  묘한 광택마저 느껴지는 미끈한 몸매.

  “허.”

  “미치겠군.”

  소년을 살피던 사신들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여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대해 왔지만, 지금 눈앞의 소년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완벽한 외모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카리오스가 말한 그가 분명하군.”

  크리티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리오스는 그들에게 어세신마스터는 인간의 한계를 한참이나 벗어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이 바로 그런 외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전 어세신마스터가 아니라 샤바예요. 샤바.”

  샤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극구 부인했다.

  어세심마스터라니.

  자신에겐 샤바라는 긍지 높은 이름이 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자들이 전혀 엉뚱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이다. 당연히 샤바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신들은 샤바의 강력한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그들에게 어세신마스터의 본명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 아름다운 어세신마스터가 자신들의 동료인 카리오스를 현혹시켰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허허. 솔직히 난 그대의 존재를 믿지 않았소. 전설의 어세신마스터라니. 존재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인 줄 알았지. 솔직히 조금 전까진 대륙에서 우리가 제일인 줄 알았소. 그러나 이제 그대를 보니 내 생각이 자만에 불과했음을 잘 알겠구려.”

  노인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꼬리를 틀었다.

  “샤바......”

  샤바는 기분이 나빠졌다. 노인의 목소리에서 은은히 풍기는 적의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눈을 가늘게 뜬 노인이 말을 이었다.

  “우린 그대를 시험하기 위해 먼 길을 왔소. 승부를 받아 주겠소?”

  샤바의 머리카락이 삐죽 솟았다.

  승부를 받아 주겠냐는 노인의 말과 함께 사신들의 전신에서 가공할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워낙에 예민한 샤바인지라 그런 변화를 민감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노인장. 무슨 잡소리가 그렇게 많아?”

  노인이 샤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키 작은 사내가 앞으로 불쑥 나섰다.

  “난 나이프란 사람이다. 네 실력을 보고 싶다.”

  나이프는 두 팔을 축 늘어트렸다.

  흐느적거리는 그의 두 손에 어느샌가 작은 단검 두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지금부터 난 널 공격하겠다. 싸우기 싫다면 지금 도망가라.”

  그는 단검을 쥔 손을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허나 샤바는 끝내 달아나지 않았다.

  싸울 이유도 없었지만 도망갈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평소엔 철없는 아이처럼 행동하지만 그는 환계의 왕자인 것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 뻣뻣하게 서 있는 샤바를 보고 나이프는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좋아. 훌륭한 마음가짐이군.”

  마침내 그가 걸음을 얾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굼벵이가 기어 오듯 느렸다.

  그러다 돌연 벼락이 치듯 빨라졌다.

  흐늘거리던 그의 걸음걸이에 익숙해졌던 샤바의 눈엔 지금의 움직임이 본래의 속도보다 두세 배나 빠르게 느껴졌다.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나이프의 단도는 어느새 코앞까지 밀어 닥쳤다.

  쉬악!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단도가 샤바의 목을 벴다.

  ‘감촉이 없다.’

  나이프는 인상을 찡그렸다. 단도는 놈의 그림자만 벤 것이다. 

  ‘내 시야에서 사라지다니.’

  스피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이프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 넘겼다.

  짜릿한 긴장이 솟자 나이프의 두 눈이 활짝 떠졌다.

  ‘어디로 숨은 것일까?’

  밤의 그림자가 자욱하게 뒤덮여 있는 사방 어디에도 샤바의 모습은보이지 않았다.

  “디그!”

  떨어져서 구경하던 바인딩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한순간 샤바가 땅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는 걸 본 것이다.

  “디그? 아냐, 마법이 아니다.”

  마그네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샤바는 분명 환상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뭐냐?”

  바인딩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그네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모르겠어. 난생 처음 보는 기술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신들이 놀란 그때였다. 두리번거리며 샤바를 찾던 나이프의 입에서 음침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흐흐. 좋아! 안 나타난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게도 좋은 수가 있다.”

  그가 양손을 활짝 펼치자, 손가락 마디마다 작은 암기들이 무수하게 쥐어졌다. 그는 그것을 머리 위로 쏘아 올렸다.

  쉬쉬쉬쉭!

  그의 몸에는 무한정의 암기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끊임없이 두 팔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모래알 같은 암기들이 하늘을 가릴 듯이 솟구쳤다.

  무제한의 나이프.

  그것이 바로 그의 능력이었다.

  “하하하. 받아라. 블러드 레인!”

  후두두둑.

  허공으로 던진 암기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강철 비가 쏟아져 내리는 그의 공간은 피라니아로 가득 찬 작은 연못과도 같은 공포를 안겨 주었다.

  어디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촘촘히 떨어지는 암기의 소나기에 사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한 대응 방법은 방패 같은 것으로 머리 위를 막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이프가 바라는 행동이기도 했다. 머리 위를 막는 순간, 나이프의 또 다른 암수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영활하게 날아올 것이다.

  “어디 숨었느냐! 나와라! 나와서 한바탕 춤을 추어라!”

  그는 득의에 찬 대소를 터트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끄럽게 하지 마. 샤바.”

  지면 위로 스며 나온 샘물처럼 나이프의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나타난 샤바는 갑자기 고무공이 된 것처럼 맹렬한 탄성으로 튀어 올랐다.

  빠각!

  그의 머리가 나이프의 턱을 그대로 받아 올렸다.

  “커억”

  둔탁한 소음과 함께 나이프는 허공으로 긴 호선을 그리며 떠오르다, 묵직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충격이 꽤 큰 듯, 그의 작은 몸뚱이가 경련을 일으켰다.

  “......”

  사신들은 말을 잃었다.

  한순간. 정말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사신 중 일인이 쓰러져 버린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크크크.”

  붕대를 전신에 감은 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동료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음에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과연 한 가닥 하는 녀석이로구나. 하지만 그런 잡스런 기술이나, 바인딩에게도 통한다고는 생각하지 말거라.”

  스스로를 바인딩이라 지칭한 자는 정말로 괴기스러웠다. 전신을 감싼 붕대는 둘째치고, 쉴새없이 뱉어 내는 음산한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불러일으키키에 충분했다.

  한편, 샤바는 새로 나타난 괴인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이 사람들은 왜 달밤에 모여 낄낄거리고, 또 왜 자신에게 공연히 시비를 거는 걸까. 그리고 이 괴이한 녀석은 뭣 때문에 다짜고짜 달려드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지만, 그렇다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환수계의 왕자다.

  도전 앞에서는 절대로 피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왕가의 자존심이었다.

  비록 그 왕가의 자존심이 주인님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뒈져라!”

  파팡!

  외침과 함께 바인딩의 두 팔에서 붕대가 날아왔다. 붕대는 한낱 천 조각에 불과한데도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샤바.”

  뚱한 표정의 샤바가 안개처럼 쓰윽 흩어졌다. 찰랑거리며 사라지는 그의 머리칼 끝으로 바인딩의 붕대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또 땅으로 숨겠다? 크크. 그 따위 수작은 나에게 통하지 않아!”

  바인딩의 쭉 찢어진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가 좌우로 손을 펼치자 촘촘히 감겨 있던 붕대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죽어라!”

  도끼로 내리치듯 두 팔을 땅에 후려치자 펄럭이던 붕대의 양 끝이 송곳처럼 변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샤바가 사라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크흐흐. 네놈이 어딜 가든 끝까지 따라가 주마. 내내 쫓기다 죽는 공포를 마음껏 만끽하거라!”

  그의 기술은 붕대를 이용한 것이었다.

  몸에 감긴 붕대는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의 능력이 주입되면 특이한 성질을 가지게 된다.

  평범한 붕대가 송곳처럼 뾰족하고, 칼처럼 날카로우며, 그물처럼 chacha하고, 드릴처럼 무지막지해지는 것이다.

  나이프의 기술이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강철의 소나기라면, 그의 능력은 붕쇄. 붕쇄의 그물이었다.

  드드드드드!

  땅속으로 파고든 붕대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지하를 들쑤시고 다녔다. 덕분에 잘 정비된 길은 움푹 패고 솟구친 채로 망가져 갔다. 마치 거대한 지렁이가 땅속을 누비고 다니는 것 같은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맹렬히 지면을 들쑤시고 있는 붕대는 끝내 샤바를 걸러 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샤바는 땅속으로 숨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륵.

  어두운 음영이 지면을 가렸다.

  ‘구름?’

  무심코 고개를 든 바인딩은 훤한 달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용한 달빛을 받으며 샤바가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샤바는 땅이 아니라 하늘로 솟구쳤던 것이다.

  “거기냐!”

  바인딩은 괴성과 함께 두 팔로 지면을 내리쳤다.

  파팡!

  경쾌한 파음과 함께 붕대가 독 오른 뱀처럼 지면 위로 튀어 올랐다.

  무서운 속도로 솟구친 붕대는 순식간에 샤바의 전신을 감싸 버렸다.

]  “끝이다!”

  바인딩은 득의에 찬 괴성을 질렀다.

  그물을 당기듯 두 팔을 당기자 샤바를 감싼 붕대가 물을 짜듯 꽉 쥐어짜졌다. 하지만 샤바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붕대가 전신을 감싸는 순간, 매미가 허물을 벗듯 가볍게 빠져나간 것이다.

  “무슨 저런 움직임이......”

  놀라는 바인딩의 등 뒤로 샤바가 허깨비처럼 날아 내렸다. 언제 주워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짱돌이 쥐어져 있었다.

  빠각.

  바인딩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그대로 지면 위로 무너졌다.

  털퍼덕.

  바인딩이 쓰러진 후, 잠시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나이프에 이어 바인딩조차 삽시간에 당하자 사신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였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랍군. 놀라워.”

  감탄성을 터트린 것은 노인이었다.

  “그물처럼 촘촘한 바인딩의 공격을 모두 피하고 오히려 반격까지 가한다. 허허허허. 놀랍군. 놀라워. 그 정도 능력이면 어지간한 트랩은 가뿐하게 통과하겠군.”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감탄성을 질렀다.

  동료가 둘이나 쓰러졌는데도, 그다지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스윽.

  바인딩이 쓰러지자 이번엔 비쩍 마른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한마디로 괴이했다.

  특히 입이 특이했는데, 입술이 바늘로 모두 꿰매져 있었다.

  공포 영화에나 등장하는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말을 못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를 대신해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사일런스요. 그의 능력은......”

  빠각.

  막 사일런스의 능력을 소개해 주려던 노인은 갑자기 들려온 날카로운 소음에 두 눈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사일런스가 피를 쏟으며 나자빠지고 있었다.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샤바가 재빨리 제압해 버린 것이다.

  노인의 웃는 얼굴이 처음으로 변했다.

  미소 대신 무심한 표정이 얼굴을 가득 뒤덮었다.

  “그의 능력은 주위의 소음을 완전히 차단하도, 표적의 균형 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네만,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것 같군.”

  말을 마친 노인은 마그네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번엔 그녀의 차례였다.

  마그네트는 14, 5세 가량으로 보이는 귀여운 외모의 소녀였다. 그녀의 깜찍한 외모는 별빛 같은 은발과 묘하게 어울려 간혹 인형이 아닐까라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의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발.

  빨간 구두를 신은 두 발은 놀랍게도 지면에서 한 치 정도 떠 있었다.

  노인이 바라보고 있는 내내, 그녀의 두 발은 단 한 번도 바닥을 딛지 않았다.

  마법일까?

  아니다. 마나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소녀는 마법에 전혀 재능이 없었다. 결국 순수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언제 봐도 신기한 재능이군.’

  노인은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마일드의 일곱 사신들은 저마다 독특한 재주를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이 생각하건대 사신들 중 이 소녀의 재능이 가장 독특하고 탁월해 보였다.

  한편, 노인의 시선을 받은 소녀는 귀엽게 어깨를 으쓱했다.

  “난 포기. 내 능력은 금속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상대에겐 안 통해.”

  유감스럽게도 샤바는 짱돌을 들고 설쳤다.

  “할 수 없군.”

  푸념을 한 노인은 불편한 걸음으로 나섰다.

  “어세신마스터.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모셔야 할 것 같네.”

  “난 어세신마스터가 아니야. 샤바야.”

  샤바는 준엄한 음성으로 외쳤다.

  위엄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타고난 고귀함마저 엿보였다.

  평소엔 순진한 아이처럼 행동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환수계의 왕자인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겐 샤바가 어세신마스터건, 환수계의 왕자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쓰러트릴 대상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터벅. 턱. 터벅.

  노인은 발이 무척 불편해 보였다.

  불안정한 발소리가 고요해진 밤공기를 두드렸다.

  샤바는 가만히 노인을 지켜보았다. 이번엔 또 무얼 보여 줄까.

  그의 눈은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키 작은 사람처럼 갑자기 뛰어나올까? 아니면 기묘한 기술을 보여 줄까.

  그러나 크나큰 기대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여전히 한가롭게 걸어오고 있을 뿐이다.

  공격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산책 나온 한가로운 노인의 걸음걸이. 크리티컬의 걸음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노인의 지팡이가 쓱 내밀어졌다.

  하품이 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거리가 너무 멀었다.

  샤바와 노인의 간격은 대략 열 발자국.

  지팡이를 던지기 전에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다.

  샤바의 눈에도 잠시 잠깐 의문이 맺혔다.

  그런데 돌연 섬뜩한 느낌이 얼굴을 후벼 오는 것이 아닌가? 샤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쉬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이상적인 감각으로 공격을 피한 샤바는 눈을 반짝이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의 지팡이 끝이 30센티 정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라진 끝 부분이 샤바의 귀 옆에 나타나 있었다.

  “신기하다. 샤바.”

  샤바는 노인의 기술을 마냥 신기해했지만 노인은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노인의 별명은 크리티컬.

  물체를 공간 이동 시키는 것이 특기다.

  이동시킬 수 있는 거리가 근거리라는 단점이 있지만, 여태까지 실패를 모르는 무적의 기술로 불려왔다.

  누가 있어 노인의 지팡이가 공간을 넘어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겠는가.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노인은 실패라는 생소한 경험을 만끽하게 되었다.

  “흐음.”

  노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대단하오. 하지만 아직 내 기술을 모두 보여 준 것은 아니요.”

  노인이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간격을 좁히더니 지팡이를 스윽 휘둘렀다. 샤바는 버드나무처럼 허리를 휘며 여유 있게 피해 냈다.

  “계속 재주를 부려 보시게.”

  비질을 하듯 노인의 지팡이가 다시 그의 발밑을 쓸어 왔다. 샤바는 하는 수 없이 공중으로 뜰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바로 그때를 노렸다.

  슥.

  지팡이를 들지 않은 노인의 왼손이 샤바의 가슴을 짚었다.

  “이제 끝일세.”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공격에는 굳이 큰 힘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저 신체의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슬쩍 충격을 가하면 그만이다.

  샤바의 가슴에 손을 댄 순간 노인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턱.

  힘을 가하는 순간 마르고 딱딱한 질감이 되돌아왔다.

  절대로 인간의 피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질적인 감촉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샤바는 원래 인간이 아니다. 지금의 모습은 이 세상에 맞게 육체를 재구성한 모습에 불과하다.

  때문에 필요하면 신체의 일부를 원래의 견갑 형태로 변화시킬 수도 있었다.

  크리티컬의 기술은 피부가 말랑한 사람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지 환수계의 왕자에게까지 쓸모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화, 황당하군.”

  노인의 얼굴이 급기야 일그러졌다.

  손 끝에 닿는 생소한 촉감.

  옷이나 갑옷의 감촉과는 전혀 다르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절대로 노인의 충격파를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엔 내가 할 차례다. 샤바!”

  샤바는 빙글 재주를 넘으며 노인의 턱을 걷어찼다. 그러나 노인 또한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벼운 동작으로 샤바의 공격을 피해 냈다.

  휘릭.

  빙글 돌아선 노인의 지팡이가 샤바의 뒷목을 후려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둔탁한 느낌만 전해져 왔을 뿐이다. 예상대로 소년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휘릭.

  샤바의 반격이 날아들었다. 엉성한 동작에 엉성한 주먹인데도 묘하게 피하기 어려운 각도였다.

  노인은 하는 수 없이 손을 들어 막았다.

  펑!

  폭음과 함께 노인의 몸뚱이가 몇 미터나 붕 떠올랐다.

  “노, 놀라운 힘이군.”

  간신히 균형을 잡아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치. 손해 봤다. 샤바샤바.”

  빠른 동작으로 노인과 거리를 벌린 샤바는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자신은 한 번도 못 때렸는데, 노인에겐 두 번이나 맞았다. 굉장히 손해 보는 놀이가 아닌가.

  노인은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잠시 샤바를 응시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난 수학자처럼 심각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노인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허허. 이거 안 되겠군. 안 되겠어. 도저히 내 미천한 기술로는 그대를 이길 수 없겠어.”

  노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소년과의 싸움은 승산 없는 도박과 같았다.

  노인은 초일류의 어세신이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 정도로 멍청한 위인이 아니었다.

  “허허허허.”

  허탈하게 욱던 노인의 입에서 노회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과연 자네 말대로군. 어세신마스터라 불릴 만해.”

  노인의 고개가 으슥한 골목길로 향했다. 그곳엔 한 명의 사내가 찬 바람을 몰려 걸어 나오고 있었다.

  “카리오스.”

  그는 카리오스였다.

  동료 사신들에게 억류당했던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사실 카리오스는 결코 사슬 따위에 결박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다른 사신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를 묶어 두었던 것은 어세신마스터를 시험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찬 바람을 몰고 나타난 카리오스는 샤바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늦었습니다.”

  “아아. 술래잡기. 샤바.”

  카리오스를 본 샤바는 반가운 듯 손뼉을 쳤다.

  그가 기억하는 카리오스는 술래잡기를 하며 논 상대였다. 당시 이 은발의 미남자는 잠시 어딜 갔다 온다며 놀다 말고 사라진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샤바가 아는 척하자 카리오스는 더욱 공손해져,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로 올리며 군신의 예를 취했다.

  “제 이름은 카리오스입니다. 마스터. 앞으로 그렇게 불러 주십시오.”

  “카리오스가 이름이야. 샤바?”

  “네. 그렇습니다. 마스터.”

  샤바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았어. 카리오스. 샤바. 잠깐만 기다려 이쪽 좀 정리한 다음에 놀자. 샤바샤바.”

  카리오스에게 빙그레 웃어 보인 샤바는 표정을 굳히며 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쩌다 이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왕 시작한 일이니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돌연 노인이 그를 향해 카리오스처럼 무릎을 꿇는게 아닌가.

  “그 자리, 나도 함께하고 싶소.”

  “엥, 샤바?”

  노인의 의외의 발언을 하자 샤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 할아버지도 술래잡기가 하고 싶었다는 걸까. 샤바?’

  “gpd. rm 자리 나도 껴 주쇼.”

  이번엔 나이프였다. 그는 기절한 바인딩과 사일런스를 질질 끌고 오더니 노인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마그네트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나이프라 하오. 이쪽의 붕대 녀석은 바인딩이고, 요쪽 멀대 녀석은 사일런스라고 하오. 잘 부탁하오.”

  “무례한!”

  그의 거친 말투에 눈을 부릅뜬 카리오스가 스릉 칼을 빼 들었다. 서슬 퍼런 그의 살기에 나이프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봐. 이봐. 나도 적응 시간이 필요할 거 아냐?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마스터라 부르며 굽실거리라고? 난 너처럼 얼굴이 두껍지 않단 말이야!”

  나이프는 두 손을 흔들며 핑계를 댔지만 카리오스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다.

  사각.

  빛이 번쩍하더니 나이프의 상의가 쩍 갈라졌다.

  “히익.”

  나이프는 아예 사색이 되어 버렸다.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그가 카리오스보다 손에 들고 있던 흑색의 검을 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이봐. 혼돈. 자네까지 이러기야? 동료에게 꼭 날을 세워야겠어?”

  “크크크.”

  소름이 쫙 끼칠 것 같은 으스스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카리오스가 들고 있는 검의 한복판이 쩍 갈라지며, 사악한 검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눈동자는 사색이 된 나이프를 향해 히죽 웃었다.

  “크크크크. 나야 무슨 힘이 있겠느냐. 잡고 흔드는 놈이 휘두르는 대로 끌려갈 뿐인데. 절대로 내가 널 베고 싶은 게 아니야.”

“큭! 그걸 말이라고 해. 넌 마음먹은 대로 칼날을 세울 수도 무디게 만들 수도 있잖아.”

  “아아. 맞아. 그럴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군. 다음부터는 잊어 먹지 않도록 하지.”

  검신에 그려진 검은 눈동자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이프와 살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샤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노인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카리오스가 들고 있는 검 ‘샤프’는 에고소드라고 합니다. 그까지 포함하여 우리 모두를 마일드의 일곱 사신들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마스터.”

  “샤바.”

  샤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정작 이들이 왜 자신을 보고 돌연 마스터라고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저희들의 갑작스런 행동 때문에 혼란스러우신 것 같군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몽연한 음성으로 샤바에게 과거의 일을 읊기 시작했다.

  “저희는 대륙에서 마일드의 일곱 사신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호칭에서 예상할 수 있으시겠지만 저희 모두는 마일드를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크리티컬의 설명을 이러했다.

  과거 이드라센 대륙에 독보적인 어세신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일드.

  그는 사신으로 불리며 전설의 어세신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최강의 어세신인 그조차 흐르는 세월만은 어쩔 수 없었다.

  황혼이 다 된 나이, 마일드는 백발을 휘날리며 자신의 뒤를 이을 재능 있는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는 눈이 높아 웬만한 자질로는 성이 안 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륙을 떠돈 지 10년.

  폐허가 된 작은 마을에서 마침내 그는 발이 닳도록 찾아 헤매던 아이들을 한꺼번에 다섯이나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정녕 특별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에 기이한 특기까지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쩌다 마을이 이렇게 되었는지,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커다란 충격 때문에 한둘이 기억을 상실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백치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마일드는 아이들의 기억상실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과거가 없는 백지상태라면 오히려 어세신 기술을 가르치기 쉽기 때문이다.

  마일드는 아이들을 즉시 제자로 삼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를 따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마을에 유일하게 암은 어른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일드는 흔쾌히 그들이 보살피고 있다는 어른을 만났다. 폐허가 된 마을 어귀에서 발견된 중년인 역시 아이들처럼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중년인을 본 마일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발이 망가져 있었다.

  평생 절름발이 신세로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절대로 어세신이 되지는 못할 운명인 것이다.

  ‘아이들의 하인으로 쓰면 되겠군.’

  결국 마일드는 중년인마저 데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놀랍게도 중년인에게도 놀라운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공간을 점프하는 그의 능력에 마일드는 결국 중년인마저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은 다섯 아이와 중년인에게 마일드는 자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하며 한 가지 약속을 받았다.

  후에 이들 여섯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그가 바로 너희들의 마스터이니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말이었다.

  제자들에게 대답을 받은 마일드는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모종의 방법으로 이들에게 제약까지 걸어 두었다.

  “사실 저희들은 마일드 스승님과 약속까지 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존재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일드 스승님이 대륙 제일의 어세신이라고 명성을 날릴 때에도, 이미 저희들은 스승님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지요. 그런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는 어세신이라. 감히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여기까지 말한 크리티컬은 잔주름이 가득한 눈으로 샤바를 응시했다.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한 어세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샤바’라고 중얼대었다.

  그의 순진한 얼굴에 노인은 소리 없는 미소를 그렸다.

  “이제 왜 저희들이 마스터님을 따르는지 이해가 되셨습니까?”

  “흠. 샤바.”

  샤바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노인의 설명은 충분히 이해됐다. 결국 그들의 사부가 남긴 유지 때문에 자신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왜 마일드라는 사람이 그런 유언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샤바와 그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샤바가 뺨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자 노인을 비롯한 사신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저희들은 반드시 마스터님을 섬겨야 합니다.”

  말과 함께 사신들은 일제히 팔을 걷어 보였다. 낫을 든 검은 사신의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문신을 빤히 쳐다보던 샤바는 그것이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사신의 문신은 미세한 룬어로 그려진 일종의 정교한 마법진이었다.

  “마일드 스승님이 남기신 겁니다. 만일 승부에 지고도 마스터를 따르지 않으면 제재가 가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울 수는 없나요. 샤바?”

  “몇 번 시도는 해 봤지만 끔찍한 고통만 뒤따랐습니다.”

  노인의 설명에 다른 사신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었는지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다.

  “스승님께서 왜 이런 제약을 저희에게 걸어 놓았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저희는 스승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신임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카리오스가 깊게 부복하며 부탁했다. 사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충심으로 섬기겠습니다.”

  샤바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을 섬긴다는 데야. 게다가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받는다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주인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몰라 약간 걱정이 될 뿐이었다.

  생각을 마친 샤바가 눈을 떴을 때, 사신들은 기대와 흥분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샤바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았어. 그냥 내 것 하면 되는 거지? 샤바.”

  “저 녀석 이번엔 이상한 녀석들까지 끌어들였네.”

  병규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샤바가 걱정된 그는 끝내 졸린 눈을 비비며 야밤 행차까지 감행했다.

  “안 잘 거냐?”

  그의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호랭이가 게으른 하품을 흘리며 물었다.

  “당연히 자야죠?”

  병규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샤바와 사신들의 일도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으니 들어가서 자고 싶었다.

  터덜터덜 걷던 병규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흘끔 사신들을 뒤돌아보았다.

  ‘저들의 기운. 왠지 낯이 익단 말이야.’

  잠시 생각하던 병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은발 머리 남자를 빼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인데. 낯이 익을 리가 없잖아. 졸리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까지 다 드네.’

  피식 웃은 병규는 엉기적거리며 여관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여관 ‘트라우마의 새벽’은 호젤의 비명 섞인 고함 소리에 발칵 뒤집혀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예쁘고, 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하기까지 한 샤바가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다, 당신들 뭐야!”

  호젤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샤바를 감싼 자들은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전직 어세신인지라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를 이내 파악할 수 있었다.

  ‘이자들. 모두 어세신이다.’

  그녀의 두 눈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왜 살수들이 드래곤을 노리고 있는 거지?’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샤바와 괴이한 몰골의 어세신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세신들을 쭉 훑어본 그녀는 더더욱 놀라고 말았다. 노인과 어린 소녀는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정말이지 몬스터라고 불러도 될 만큼 흉악한 면상들이 아닌가.

  그런 면상들이 샤바에게 히죽거리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저, 저 사람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저러다 샤바가 화를 내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뇌리 속에 포악한 드래곤의 강림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물처럼 줄줄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다, 당신들 샤바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 있는 겁니까?”

  호젤은 널뛰듯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호오.”

  그녀를 살피던 바인딩의 음침한 눈동자에 순간 기광이 일었다. 호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그녀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같은 직종에 일하는 사람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었다.

  “꽤 수련이 되었군. 어제 만난 허섭스레기들과는 비교도 안 돼. 마스터의 수하 중 하나인가?”

  “...... 마스터?”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을 때였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호젤의 외침을 들은 제이콥과 고든이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사신들의 기괴한 몰골을 본 두 사람은 즉시 무기를 빼 들고 호젤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야?”

  제이콥은 사신들 쪽으로 눈길을 유지한 채 속삭이는 음성으로 호젤에게 물었다.

  호젤은 두려운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저들이 샤바를 위협하고 있어.”

  그녀의 설명에 제이콥과 고든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당신들 미친 거 아냐?”

  제이콥은 대뜸 화부터 냈다.

  감히 드래곤을 협박하다니. 뭣도 모르는 저 멍청한 녀석들 때문에 트라우마가 통째로 날아갈 뻔했지 않은가.

  어이없기는 사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스터와 이런저런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며 아양을 떨고 있는데, 웬 여자가 튀어나와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사신들 중 몇몇은 얼굴이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흉악하기는 했다. 하지만 사람을 면전에 두고 괴물 보듯 하는 것은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 해도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고 하는데, 튀어나오자마자 검을 들이대며 미쳤냐고 윽박지르는 두 사내놈은 또 뭐란 말인가.

  “가만두고 볼 수 없는 녀석들이군.”

  급기야 나이프가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섰다.

  제이콥과 고든이 시선을 맞추더니 무기를 꼬나들고 좌우로 나눠 섰다. 나이프는 실실 웃으며 단도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만둬요. 그들은 적이 아니에요.”

  2층 계단에서 흐리멍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프리먼과 병규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중 말을 꺼낸 것은 병규였다.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보였다.

  새벽에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어깨 위의 호랭이 역시 비몽사몽이었다. 널어놓은 빨래처럼 병규의 어깨에 축 늘어진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주인님. 샤바.”

반갑게 외친 샤바는 사신들 무리에서 빠져나가 당장 병규의 등 뒤에 매달렸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방금...... 뭐라고 했지.”

  제이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병규는 가까운 식탁에 털썩 주저앉으며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암. 그 사람들 말이에요. 샤바를 헤치려는 게 아니에요. 사실 그들은 샤바의 부하거든요.”

  “부하라니? 누가 누구의 부하란 소리냐?”

  “샤바죠. 그쪽 사람들은 모두 샤바의 부하들이에요.”

  사람들의 묻는 듯한 시선이 샤바에게로 쏠렸다.

  병규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샤바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부하로 받아들였다. 샤바.”

  “......?!”

  사람들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사실이오?”

  제이콥이 사신들에게 물었다.

  별로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사신들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당황스럽군.”

  제이콥과 일행들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난감하기는 사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우며 간신히 마스터를 받아들였는데, 그 위대하신 마스터에게 또 다른 주인님이 있단다.

  ‘주인님이라니?’

  ‘아, 아양을......’

  초유의 사태에 사신들은 넋이 빠져 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신들은 복잡한 시선으로 병규와 그에게 들러붙은 샤바를 바라보았다.

  그때 마그네트는 번뜩이는 눈으로 병규와 호랭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머. 여긴 신기한 게 둘이나 더 있는걸?’

  그녀의 눈빛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와 같았다.

  “뭐라?”

  라이트는 황당한 보고에 갖은 인상을 다 썼다.

  얼마 전 그는 블러드 콜렉트에 의뢰를 넣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사람을 시켜 조사를 명했다.

  그런데 조사 내용이라는 것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블러드 콜렉터가 모두 증발해 버렸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길드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고? 설마 대륙 10대 어세신 길드 중 하나가 돈만 챙겨서 도망갔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라이트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보고자는 고개를 숙이며 빠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켄트 자작님께서 알려 주신 술집은 자물쇠가 채워진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강제로 뜯고 들어가 봤지만 사람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며칠째 비어 있었던 듯합니다. 여러 곳에 선을 대서 그들을 찾고 있습니다만, 아직 어디에서도 연락은......”

  “이이이!”

  라이트는 쥐어짜듯 의자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꽤나 거금을 들여 일을 추진했는데,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당할 줄이야.

  “트라우마를 샅샅이 뒤져서 놈들을 찾아내!”

  분노한 라이트는 휘하의 기사들까지 동원하여 트라우마를 이잡듯 뒤졌다. 그러나 어세신들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라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알아낸 것이라곤 며칠 전, ‘트라우마의 새벽’이라는 여관 뒤 공터에서 싸우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는 것과, 그곳에 남아 있는 약간의 핏자국 정도였다.

  “이 발칙한 것들이 감히 내 돈을 들고 튀다니?”

  라이트는 불같이 분노했다.

  그는 어세신들이 의뢰비만 챙기고 도망간 것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감쪽같이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더불어 그 모든 원망과 분노는 프리즘 용병단에게로 자연스레 옮겨졌다.

  “놈들을 만난 후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군요.”

  “애초에 미천한 어세신들에게 일을 맡긴 것부터가 실수인 듯합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켄트의 물음에 라이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당연히 수단을 강구해 프리즘 용병단 녀석들을 잡아 족쳐야지요. 이렇게 된 이상 프리즘 용병단을 자근자근 씹어 먹지 못하는 게 원통한 듯했다.

  그때 정령술사인 요엔이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복수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라이트와 켄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간략한 내용이 적힌 메모를 펼쳐 보였다.

  “방금 마법구를 통해 연락이 왔어요. 본가에서 최대한 빨리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이유가 뭐죠?”

  “자세한 설명은 없었습니다만, 계획이 곧 실행될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습니다.”

  “계획!”

  라이트와 켄트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얼굴은 놀라움과 격동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만큼 계획이라는 단어가 주는 파급이 상당했던 것이다.

  “정말이오? 정말로 계획이라고 말했소?”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예정보다 너무 이른 것 같은데······.”

  켄트가 말꼬리를 흐리자 요엔은 메모지를 펼쳐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요주의 인물이 궁전을 떠난 모양입니다.”

  “흐음. 그녀가······.”

  라이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요엔이 언급한 ‘그녀’가 그를 동요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바로 가라앉았다.

  대계가 발동한 이상 머뭇거려선 안 된다.

  “아무튼 켄트 자작님께서도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 주십시오. 준비되는 즉시 본가로 출발하겠습니다.”

  빠르게 지시를 내린 라이트는 프리즘 용병단의 일을 잠시 잊기로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지금은 실컷 즐겨라. 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내 친히 네놈들을 처리해 주고 말 테니. 그때는 고통 없는 죽음 같은 사치는 바라지도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 뒤집어쓴 코피가 더 많소이다

  누굴 죽여주길 원하오?

  샤바와 사신들의 격돌!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초유의 매직미사일

  그곳에서 넌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오우거의 힘, 그리고 핏빛 각성

  마왕을 먹겠다?

  인간이 아닌 넌 대체 뭐냐?

  떠나는 그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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