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이 가져간 물건
타타탁.
가스펠의 동북아지부 지부장인 채드는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뛰었다.
손님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 3시간 전, 그는 바쁜 일과를 쪼개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린 것이다.
1층 홀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상당히 심각한 사태인 듯, 가벼운 소란에도 즉각 연락이 오던 평상과 달리 이번엔 전화조차 오지 않았다.
연락을 취할 틈도 없었다는 뜻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가니 아수라장이 된 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값비싼 전자기기들이 엉망으로 부서져 있고, 출입구를 지키던 요원들은 옷걸이에 걸린 옷들처럼 벽에 나란히 걸려있다.
벽에 걸린 요원들은 힐끔 쳐다본 채드는 문득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또 그녀로군.’
똑같은 일이 예전에도 있었다.
쇠를 다루는 여자능력자에게 금속탐지기가 계속 반응하자, 요원들이 옷을 벗어보라고 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때도 착실하게 홀이 박살났었는데, 오늘을 더 확실하게 무너졌다. 과연 수리를 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다.
과연 홀 중앙엔 사건의 주범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한데 그녀는 과거에 말썽을 부린 여자와 동일인이 아니었다.
전의 그녀는 긴 흑발을 자랑했는데, 이번의 여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머리를 찰랑이고 서 있었다.
그녀는 특재대의 본부장인 자영이었다. 그녀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었는데, 하나같이 특재대의 요원들이었다.
“아. 채드 씨. 오랜만이로군요.”
금발의 그녀가 그를 보고 아는 체를 해왔다. 요사스럽게 웃고 있는 금빛 눈동자에 채드는 슬쩍 눈을 피했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보는 것은 극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채드가 애써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홀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지 묻는 것이다.
“제가 설명해 드리죠.”
그녀를 대신해 멀쑥한 청년이 쓱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운석이다.
그는 어느새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하긴 벌써 3년이 지났으니.’
채드가 씁쓸하게 웃을 때, 슬그머니 앞으로 나선 이운석이 거창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에......, 금일 저희는 오랜만에 퀴니 님을 뵙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이 점은 채드 님께 미리 통보를 드렸으니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네.”
채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여간 그렇게 힘들게 시간을 짜내어 여기에 도착했을 때, 이곳 홀엔 여전히 출입을 통제하는 기기들과 요원들이 있더군요. 당연히 저희들은 순순히 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검사기기를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또 금속탐지기인가?”
채드가 안경을 슬쩍 들어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이운석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채드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그러졌다.
예전엔 이운석의 누나인 이한영이 금속탐지기와 충돌하는 바람에 큰 소란이 인적이 있었다. 금속을 다루는 능력자인 이한영을 금속탐지기는 ‘금속’으로 인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과거와 똑같은 말썽인가 물어보았더니 아니란다. 금속탐지기가 아니면 도대체 또 뭐가 말썽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그...... 엑스레이처럼 생긴 물건이었습니다만.......”
“자기공명장치!”
자기공명장치라고 하면 통상 MRI라고 불리지만 이곳에 설치된 기계는 그것보다 훨씬 정밀한 기계였다. 정밀하다 해도 사실 이 기계는 사람의 내부를 정밀하게 찍는 기계라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촬영시간이 현저하게 짧다는 것.
때문에 이 장치는 금속 탐지기처럼 좌우에 세워진 봉 사이로 통과하는 잠깐 사이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총체적인 입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굳이 가스펠에서 이 장치를 설치한 이유는 가끔 몸 속에 무기나 그 외 불순한 장치들을 숨겨가지고 오는 능력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영이 이 장치를 통과할 때였다.
그녀의 내부가 요상하게 찍힌 것이다. 다이나믹하고 역동적으로 찍혔어야 할 그녀의 내장 대신 흐릿한 여우의 모습이 계속 비치는 것이다.
이에 의문을 느낀 경호원들은 과거 이한영에게 했던 실수를 그녀에게 또 하고 말았다.
벗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과 같았다.
이운석의 설명을 들은 채드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한심한 녀석들.’
그녀의 본신은 구미호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내부가 다른 게 당연하다. 그걸 모르고 옷 속에 여우를 숨겼나 하는 생각에 옷을 벗어보라 했으니.
이렇게 풍비박산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경호원들의 멍청한 짓에 고개를 젓던 문득 그는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자영 정도의 능력자라면 자기공명장치 정도의 기계는 충분히 속일 수 있지 않을까?
왠지 호호호 웃으며 이한영과 조잘조잘 수다를 떠는 그녀의 모습이 요상해 보인다.
양팔을 쭉 펴는 모습이 그렇게 개운해 보일 수 없다.
마치 스트레스를 잘 풀었다는 것처럼.
‘당했군.’
아마도 이한영이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어디에 가면 마음 놓고 부셔도 되는 곳이 있다고, 물론 핑계는 자영 스스로가 만든 것이겠지만.
“다음부터 특재대에서 여자 대원이 오면 이유 불문하고 그냥 들여보내라고 지시를 내려야겠군.”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영과 채드는 현재의 세계정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현재의 세력판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영은 다소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혼란, 그 자체겠죠.”
채드는 그녀의 대답에 동의했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최근 중국의 삼룡회와 일본의 능력자들간의 충돌이 있었다. 대부분의 국가는 일본의 승리를 예상했다. 일본의 배후엔 세계최대의 능력자 협회인 데몬게이트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런 예상을 뒤집고 단 3일 만에 삼룡회의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세계는 경악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일본이 중국의 능력자에게 무릎 꿇은 것으로 볼 수 없는 일이다.
세계최강이라 암암리에 생각되던 데몬게이트가 처음으로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은 새롭게 부각한 삼룡회에 촉각을 기울였다.
능력자들 간의 다툼을 그림자전쟁이라 부른다.
소리 없이 진행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전쟁은 사실 현대에 이르러선 국력을 상하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과거엔 핵무기 같은 신형 무기들의 질과 양이 국가의 국력을 나타내는 척도였지만, 지금은 능력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관광객으로 몰래 숨어 들어와 핵폭탄에 버금가는 테러를 자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능력자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각 국가들은 능력자들을 키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심혈을 기울였다.
즉, 능력자들의 힘이 곧 내부적인 국력인 것이다.
중국의 삼룡회가 데몬게이트를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세가 급격히 불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최근 새로 삼룡회의 회주가 된 백원신에게서 답을 찾는다.
1년 전 삼룡회의 암살조직 중간 간부에 불과하던 백원신이 돌연 삼룡회의 수뇌부를 장악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들에게 세계 삼대 능력자협회가 평탄 되었으니 자연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외로 백원신에 대한 데이터는 없었다. 능력 또한 가장 최근 기록으로는 고작 A급 정도. 물론 뛰어난 능력이긴 했지만, 삼룡회엔 그보다 월등히 뛰어난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이 일은 능력자들 간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제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삼룡회를 강탈한 백원신이 돌연 세계의 능력자들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중국은 단일국가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능력자들의 종류도 다양하여 도(道), 기(氣), 공(功). 즉, 도술과 기공술과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고루 많았다. 그런 이유로 세계제패의 야욕을 부리는 삼룡회의 거대한 포부를 데몬게이트와 가스펠은 심각한 눈으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룡회가 두 번째로 탐욕의 이빨을 들이댄 곳이 바로 한국인 것이다.
자연 데몬게이트와 가스펠에서는 삼룡회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능력자들을 대거 한국에 파견했다.
그런 이유로 한국은 차후 세계의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음흉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점차 말려들고 있었다.
한국의 능력자들을 통솔하고 있는 자영의 머리가 복잡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잠시 세계정세에 대해 논하던 채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영에게 물었다.
“헌데 그는…….”
자영은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한영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이 아닌가.
‘아직이군.’
그녀의 표정변화 하나만으로 충분한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인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암흑의 공간에 몸을 던진 용기있는 소년.
그가 사라진지도 어느새 3년이 흘렀다.
살아 있다면 벌써 어떤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특재대와 가스펠의 대대적인 수색에도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채드는 이미 그가 죽었다고 단정했다.
1년 전, 가스펠은 그의 수색을 포기했다.
물론 총수의 지시로 표면적으로는 수색을 계속 하는 척하고 있지만, 잠정적으로 이미 그를 사망처리 해 버린 것이다.
비단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나 특재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의 자취를 좇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본부장인 자영은 여러 차례 상부의 질책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가 살아있다고 굳게 묻고 있었다.
대체 어떤 것이 그녀에게 그런 확신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했다.
넓은 복도엔 귀여운 아가씨가 창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한영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화차.”
“냐?”
눈을 감고 있던 화차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반짝 돌렸다.
“한영!”
이한영을 발견한 그녀가 고양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달려왔다.
“잘 지냈어?”
“냐. 물론. 한영은 수척해진 것 같아.”
“으, 응.”
이한영과 화차는 과거 퀴니의 일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에는 적으로 만났다. 그런데 그것이 이유가 되어 둘은 죽이 잘 맞아 놀았다.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았군요.”
화차를 본 자영이 슬쩍 미소를 그렸다.
“수사노오도 아직?”
그녀의 물음에 채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풍이 와해된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셈이지요. 현재는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신풍의 총수 수사노오는 가스펠의 적이나 마찬가지다. 가스펠의 총수를 납치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그 일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가해졌을 것이다. 한데 의외로 납치되었던 총수가 그들을 자유롭게 두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금은 가버린 그가 들인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가스펠에서 총수의 지시는 절대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수사노오와 화차는 이곳에 그냥 남아있을 수 있었다.
“수사노오가 정말로 조용히 있는 건가요?”
자영이 눈을 빛내며 조용히 물어본다. 채드는 빙그레 웃었다.
역시 대단한 여자다.
겉으로는 3년 전에 사라진 그의 수색에만 전념하는 것 같으면서도 국내외의 모든 자잘한 사안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그런 능력 때문에 삼룡회와 데몬게이트의 압박 속에서도 특재대를 이끌 수 있는 것이겠지.’
탄복한 채드는 작은 목소리로 수사노오의 근황에 대해 전해주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은밀히 일본의 능력자들과 접촉하는 모양이더군요. 신풍을 재건할 뜻인 듯싶습니다. 아마도 삼룡회에 복수할 생각이겠지요.”
“그렇군요.”
자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자영이 수사노오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특재대의 요원인 독쟁이, 준엽이 화차를 보고 슬금슬금 앞으로 나섰다.
“고양이 양.”
“냐?”
다정히 부르는 소리에 화차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비쩍 마른 몸. 얼굴에 그려진 억지웃음.
몇 번 보긴 했지만 그다지 친분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왜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것일까?
그가 고개를 갸웃하자 준엽은 입가에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냐?”
준엽의 억지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고양이 양은 말하는 투도 고양이고, 수호신도 고양이인데 왜 옷은 고양이 옷이 아니지?”
괴이한 질문.
화차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저런 질문을 할 줄이야.
더더욱 황당했던 것은 준엽의 말을 들은 특재대의 남자 대원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었다.
“그렇군.”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로군.”
“그럼 그럼.”
마치 준엽의 질문이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 아닌가.
“냐. 그, 그건. 내 수호신은 분명 고양이지만.......”
“그래서 말인데.”
화차의 말을 슬쩍 막으며 준엽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가 꺼낸 것을 본 화차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준엽이 그녀에게 들어 보인 것은 고양이 복장의 코스튬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목에 큼지막한 방울이 달려 있는 귀여운 복장이었다.
“이 변태가!”
“이런 망할 중년!”
자영과 이한영이 ‘케케케’ 하며 음침하고 웃고 있는 준엽을 향해 크로스 어택을 날렸다.
“키엑.”
그녀들의 공격을 받은 준엽은 비명을 지르며 창밖으로 날아갔다.
“휴. 예전부터 저 아저씨의 눈길이 맘에 걸렸어.”
“해치우니 속이 다 후련하네.”
통쾌하게 준엽을 날려버린 두 여자는 속 시원한 표정으로 손을 털었다.
그녀들의 과격한 행동에 채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12층인데.”
한편, 준엽이 던져놓고 사라진 고양이 옷을 자세히 훑어본 화차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냐, 따...... 딱 맞아.”
고양이 옷은 그녀에게 딱 맞았다.
어깨에서 가슴, 허리...... 심지어 머리에 쓰는 귀 모양의 헤어핀까지.
“무서운 중년이군.”
“과연 중년의 남자란 말인가.”
무서운 중년의 집착에 자영과 이한영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변태 중년을 처리한 일행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퀴니는 복도의 맨 끝방으로 썼다.
“퀴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나요?”
이한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채드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가 아공간에 빨려간 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퀴니였다.
해맑던 그녀가 식음을 전폐한 채 삼일 밤낮을 무표정하게 울어댔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고, 아무도 그녀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퀴니는 미친 듯이 어떤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무언가를 고민했고, 또 항상 무언가를 그렸다.
채드는 그녀가 그리는 게 마법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마법진의 용도가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마법진이 무려 12층으로 이루어진 입체 마법진이라는 것이다.
마법진에 쓰인 수식과 다양한 룬어는 그 어떤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창성과 복합성을 자랑했다.
가스펠엔 적지 않은 마법사들이 있지만 가장 상위의 마법사들도 고작 3층 정도의 입체 마법진을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삼 년이나 거린 그녀의 마법진이 최근 완성되어 간다.'
채드는 그녀의 마법진이 완성되어 갈수록 말로 표현 못할 불안을 느꼈다.
왜인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그렇게 여러 상념과 함께 퀴니의 방에 거의 다다랐을 때다.
쿠궁.
프레스로 찍어 누르는 듯한 거대한 충격이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이게 무슨!"
건물의 진동과 함께 휘청이던 채드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고함을 질렀다.
"거대한 에너지가."
상상도 못할 엄청난 에너지가 한곳으로 소용돌이치듯 모여들고 있었다. 그 양은 수치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서, 설마!"
채드는 왈칵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홀린 듯 마법진에 매달리던 퀴니를 볼 때마다 언뜻언뜻 일던 불길한 생각.
"안 돼!"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복도를 내달렸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덜컹.
퀴니의 방문을 거칠게 열자 눈부신 빛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채드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앞을 살폈다.
고도로 복잡한 마법진이 찬란한 빛과 함께 작동되고 있었다.
퀴니가 그리던 마법진이다.
그런데 그 마법진의 중앙엔 거대한 틈이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도 있는 것이 아닌가.
"아...... 공간."
암흑의 틈을 본 이한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3년 전 그를 삼킨 저주받은 차원의 틈과 똑같은 것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총수님!!"
채드는 처절한 음성으로 퀴니를 불렀다.
힘을 모아 달려갔지만 마법진 안은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이운석과 이한영이 모든 힘을 기울여 마법진을 공격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소용없어. 여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해."
마법진 안에서 퀴니가 눈부신 금발을 펄럭이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그 시간은 소녀에게 성숙한 향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키도 많이 컸고, 귀여움으로 도배되어 있던 얼굴도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게 되었다.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절망 어린 채드의 외침에 퀴니는 가만히 웃었다.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슬픈 미소였다.
"그를 만날 거야."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송곳 같은 그녀의 음성.
"하, 하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아공간으로 들어간 인간은 아무도 돌아올 수 없다지 않습니까!"
"괜찮아. 난 이미 한 번 가봤거든."
퀴니의 조용한 말에 채드는 피가 싸늘히 식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은 이미 아공간을 한 번 타 봤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 말이 뜻하는 것은 그녀가 다른 세계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휘오오오.
아공간에서 일어나는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진 암흑의 구멍.
사람들은 아공간의 흡입력에 쩌릿쩌릿한 소름을 느꼈다.
"돌아와요."
자영이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여전히 퀴니는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그녀의 돌연한 결심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다만 한 사람, 이한영 만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한 가지 일만은 의외로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가는 거죠?"
마법진 안, 퀴니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경애였다.
"그래도 한 집에 같이 살았는데, 그만 혼자 보내면 너무 쓸쓸하잖아요. 저희가 가서 데려올 게요."
그녀가 처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데려가줘."
입술을 꼬옥 문 이한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진 안의 두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경쟁자를 늘리기 싫어."
"언니에게 이길 자신이 없어요."
그녀들의 말에 이한영은 피식 웃었다.
"못된 아이들."
그런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퀴니와 경애의 진심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아공간.
삶과 죽음을 기약할 수 없는 밑바닥이 없는 무저갱.
살아서 그를 만날 확률은 지극히 미미할 것이다. 그런 위험한 길에 그녀를 끌어들일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이한영은 책임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녀가 가버리면 슬퍼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 잘 대해줘서 고마워. 모두 잘 있어."
"안녕."
퀴니와 경애는 입가에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그녀들의 입가에 떠오른 맑은 미소란.
3년 만에 처음으로 접해보는 그녀의 미소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채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슬픔과 외로움이 화살처럼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파고든다.
파아앗.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한층 농염해졌다. 빛과 함께 두 여자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눈동자를 찌르던 빛줄기가 사그라졌을 때는 슬픈 미소를 그린 그녀들의 모습도, 바닥을 가득 메우던 마법진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그녀들이 가져간 것은 엉망으로 찌그러진 낡은 자명종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