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32/102)

도대체 쟤들 정체가 뭐야?

 병규와 샤바가 용병패를 받은 며칠 동안, 프리즘 용병단은 ‘트라우마의 새벽’에 머물렀다.

제이콥이 몇 차례 용병길드를 찾아가 일거리를 알아봤지만, 거의 상인단 호송 정도의 일들뿐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것이라 멀리 이동해야하는 호송 일을 기피했다.

그러던 며칠 후, 마침내 제이콥이 일거리를 들고 왔다.

“오크마을 정찰?”

제이콥이 물어온 일에 호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성주가 직접 의뢰한 일이야.”

“성주가 직접 의뢰했다고?”

그녀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성주가 의뢰를 했다는 말이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성주라면 휘하의 병사들을 풀면 되는 일을 왜 굳이 용병들에게 일을 맡긴 것일까.

“몇 번 병사들을 풀은 모양인데, 별 소득이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 길드에 의뢰한 거군. 그런데 오크 마을을 정찰하라는 게 무슨 소리야? 붉은 대지엔 오크들이 거의 없잖아.”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을 여타 지역의 몬스터들보다 몇 배나 흉폭하다.

특히 오우거나 트롤과 같은 대형 몬스터들의 활동이 왕성해서 코볼트나 오크같이 대륙에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중형 몬스터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새로 생긴 모양이야. 그것도 꽤 규모가 큰 모양이야. 성문 옆에 성벽이 무너진 거 봤지?”

“음. 설마 그걸 오크들이 했다는 거야?”

“그래. 상인들을 습격하던 오크들이 성문까지 달려든 거지. 물론 성벽을 무너트린 것은 오크들의 뒤를 쫓아왔던 오우거들 때문이었지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네. 붉은 대지에 오크가 설치질 않나, 몬스터가 성을 넘보질 않나. 백년 내로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성주는 이 일이 붉은 대지에 둥지를 튼 오크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성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오크 마을을 쓸어버릴 계획이지.”

“그래서 오크마을 수색을 길드에 의뢰한 거군. 붉은 대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니 말이지. 의뢰비는 어때?”

“그게 좀 애매한데. 의뢰 내용으로 보자면 2급 정도의 의뢰인데, 붉은 대지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서 길드에선 1급 의뢰로 정해졌지. 그리고 더 좋은 건 성주가 특별히 이번 임무에 한해서 준 특급 의뢰비를 지급한다고 약속했다는 거지.”

“호. 꽤 괜찮은데? 뜨내기 용병 애들이 또 벌 떼 같이 달려들었겠군.”

“그게 의외로 인원이 없어. 올해 이드라센 서남부에 100년 내 최고의 가뭄이 닥쳤잖아. 덕분에 대단위 식량 이동이 있었지. 이 일에 용병길드의 인력이 상당히 투입되었어. 그래서 현재 트라우마에 남아있는 용병은 거의 없다고 봐도 돼. 이번 의뢰에 참가를 신청한 용병대는 고작 용병단 둘뿐이라더군. 물론 우리가 하게 된다면 그들과 경쟁을 피할 수 없겠지.”

설명을 끝낸 제이콥은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의견을 물었다.

“괜찮은 일인 것 같아.”

호젤은 손을 올리며 동의했다.

고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프리먼은 원래 일행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다.

제이콥은 병규와 샤바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둘은 물을 것도 없다는 듯이 찬성을 던졌다.

“좋아. 출발은 내일이다. 다들 준비해둬.”

며칠지낼 식량과 식수를 준비한 일행은 다음 날 오전 일찍 여관을 나섰다.

성문을 나서는데 성문지기가 말을 걸었다.

"여, 자네들도 오크 마을을 찾으러 가는 건가?"

언젠가 호젤의 질문에 대답했던 그 병사 였다.

"네. 그렇습니다. 다른 용병단들도 아침 일찍 출발했나 보죠?"

"두 무리 정도가 지나갔네."

"규모가 어느 정도이던가요?"

"두 무리 모두 열 명 정도였지. 다들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활기가 넘치더군. 조심하게.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을 조심하게."

"네. 감사합니다."

병사의 배려에 감사를 표한 제이콥은 먼저 간 용병단을 쫓을 생각은 않고, 이번엔 무너진 성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보수공사에 땀을 쏟고 있는 인부들을 붙잡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대체로 몬스터들이 성으로 밀려들어올 때의 상황을 물어다.

인부들에게서 이것저것 정보를 얻은 그는 그제야 한가롭게 말을 출발했다.

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을 때, 병규가 제이콥에게 물었다.

"서둘러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번 의뢰는 오크마을을 먼저 찾는 사람이 의뢰비를 받는 방식이다. 먼저 받는 사람이 의뢰비를 수습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경쟁관계의 용병단들이 먼저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제이콥은 느긋했다.

병규의 묻는 말에 제이콥은 빙긋 웃었다.

"트라우마에 전해져 오는 격언 중엔 이런 말이 있단다. 서두른다고 반드시 빨리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

병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제이콥은 넌지시 말했다.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다음 날, 아침부터 모래폭풍이 몰아쳤다.

일행은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바위틈으로 몸을 피했다.

"엄청나네."

괴수의 굉음처럼 울어대는 바람소리에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이런 바람은 처음이다.

사막을 뒤덮는 거대한 모래폭풍을 텔레비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이곳의 메마른 폭풍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대지를 채찍질하는 매서운 폭풍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간신히 누그러드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붉은 대지의 시련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모래폭풍 다음엔 무섭게 쏟아지는 장대비였다.

어찌나 무섭게 쏟아지는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밤부터 내린 비는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그쳤다.

그런데 비가 한차례 지나가자 이번엔 추위가 몰려왔다.

당최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한 날씨였다.

그때쯤, 병규는 제이콥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붉은 대지의 땅은 흙이라기보다는 입자가 고운 모래가 많았다.

때문에 발자국이 생겨도 쉽게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시시 때때로 돌풍이 몰아치니 발자국으로 뒤를 쫓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이동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급변하는 날씨 속에선 체력의 손실이 크다.

또한 언제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체력의 비축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래지 않아 체력의 절실함은 현실로 드러났다.

3일째 되던 날 저녁 일행들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채 붉은 대지 위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호젤이 말에서 뛰어내려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신들을 살폈다.

어세신 출신인 그녀는 말의 사체와 엉망으로 뒤섞여 있는 시신들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정보들을 케냈다.

“죽은 지 얼마나 되지 않았어. 대략 4아워(4시간) 정도. 죽기 직전까지 겁에 질려서 얼마간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것 같아. 그리고 장비로 보아...... 이들은 용병들이야.”

호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이콥을 돌아보았다.

처참하게 죽어 있던 시신들.

그들은 프리즘 용병단 일행보다 한발 앞서 떠난 용병들이었다.

“시신의 모양이 전반적으로 양호한 것으로 보아 오우거나 트롤의 짓은 아니야. 이쪽 뒤통수가 갈라진 모양은 도끼 같은 흉기에 당한 거야. 이들을 살해한 것은...... 오크인 것 같아.”

호젤의 종합적인 결론에 제이콥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죽기 전에 이들은 말을 타고 도망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오크들이 쫓아와서 죽일 수 있는 거지?”

제이콥의 물음에 호젤은 고개를 흔들었다.

“바람이 모든 발자국을 날려 버렸어.”

결국 용병들이 오크에게 당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궁으로 남게 되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재대로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그날 밤, 병규는 편편한 돌 위에 자리를 깔고 누워 밤하늘을 울려다보았다.

“밤하늘이 참 멋지네요.”

그의 말에 호랭이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맑은 하늘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나.”

천공의 여신이 한입 베어 문 것 같은 달이, 안개처럼 흩뿌려진 은하수 드레스를 입고, 비스듬히 올라가는 검은 구름 위를 거닌다.

다정한 밤하늘을 시기하듯 구름이 몰려야 어둠을 부르니, 한 가닥 바람이 부드러운 손길로 달랜다.

바위의 냉기조차 잊을 정도로 아름답고 한가로운 광경이었다.

“낮의 일. 신경 쓰이냐?”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랭이가 넌지시 물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은 시신을 보았으니 마음의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병규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있는데도 병규는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다. 마치 나무토막이 쓰러져 있는 것 같은 느낌만이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점점 잃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제이콥의 말은 옳았다.

다음 날 정오 무렵, 저 멀리서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제이콥이 눈을 빛냈다.

바람 때문이 아니다.

바람에 치솟은 먼지는 연기처럼 하늘로 솟구친다. 그러나 지금 저 끝에서 보이는 먼지는 엉성한 솜뭉치처럼 한데 뭉쳐서 흐르고 있다.

말잔등 위에 올라선 채 유심히 관찰하던 제이콥은 먼지 구름이 오크부대의 이동 때문에 생긴 것이라 단정 지었다.

바람도 없는 날, 저렇듯 광범위하게 먼지를 일으킬 만한 무리는 인간과 오크밖에 없다.

붉은 대지에 군대의 이동이 있을 리 없으니 오크가 확실하다.

제이콥은 융단처럼 지면 깔리는 먼지를 은밀히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3아워(3시간) 후, 마침내 그들은 오크마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젠장. 좀 큰 정도가 아니잖아.”

오크마을의 규모는 예상보다 월등히 컸다. 언뜻 보이는 수만 해도 팔구 백은 넘어 보였다.

“오크가 이렇게 큰 무리를 이루는 건 처음 봐.”

호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프리먼 역시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다.

“오크들이 어떻게 붉은 대지에 정착할 수 있었는가 궁금했는데, 이 정도 숫자라면 충분히 가능하겠군.”

오크마을의 규모는 군대라고 불러도 충분할 숫자다. 오우거나 트롤과 같은 대형육식 몬스터의 습격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오크들을 본 병규와 호랭이는 심각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 행성은 참 진화가 골고루 잘 된 것 같구나.”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네요. 도마뱀에 이어 돼지까지 두 발로 설치네요. 원시적이지만 무기도 들고 있는데요?”

“흠. 놀라운 일이야.”

둘이 진화가 가져온 놀라운 현장에 감탄을 참지 못할 때, 그 옆의 샤바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돼지. 맛있는 고기. 햄, 스테이크, 돈까스, 로스구이, 삼겹살, 등심, 족발....... 샤바샤바”

맛있는 음식(?)이 떼로 몰려 있는 걸 본 샤바의 두 눈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제이콥. 저쪽을 봐. 울프들이야.”

호젤이 돌연 한 쪽을 손짓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엔 집채만 한 울프들이 우리에 갇혀 있었다.

울프들은 지구에서의 늑대와 거의 흡사하게 생겼지만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일행이 타고 온 말 조차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말을 탄 용병들을 오크들이 어떻게 쫓아왔나 했더니, 울프들을 길들인 것이었군.”

대륙의 남반부에는 일부 오크 부족들이 울프들을 길들여 말처럼 타고 다닌다. 이 오크들을 울프라이더라고 부르는데 울프나 그 위에 탄 오크 모두 죽음을 두려워 않기 때문에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의 오크들은 상당한 규모로 울프들을 키우고 있었다.

“울프 기사단이라도 만들려나 보지.”

호젤은 농담 삼아 얘기했지만, 그녀의 말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오크마을의 동태를 살피던 제이콥은 일행과 함께 조심조심 그곳을 벗어났다.

의뢰는 어디까지나 오크마을의 위치를 확인한 것이다.

목적을 완수한 만큼 재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괜히 오크들과 부딪히게 되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은 이들에게 좀더 다이나믹한 진행을 원했던 모양이다.

오크마을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샤바의 윗 머리카락이 삐죽 솟았다.

“돼지들이 쫓아와요. 샤바.”

“뭣?”

놀란 병규는 급히 의식을 집중했다.

멀리서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병규는 즉시 리더를 불렀다.

“제이콥. 오크들이 쫓아와요.”

“정말이야?”

제이콥은 달리는 말등 위에 올라서며 뒤쪽을 살폈다.

“제길.”

그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로 엄청난 무리의 오크들이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먼지!”

말을 달릴 때 인 먼지를 오크들이 본 모양이다.

“저 녀석들 꽤 똑똑한걸? 역시 붉은 대지의 몬스터야”

“아마 사람인 줄은 몰랐을 거야. 오우거나 트롤 같은 몬스터가 온 줄 알고 나왔다가 우릴 보게 된 거겠지.”

호젤의 말에 대꾸한 제이콥은 죽어라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 일행들 또한 그의 급한 마음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서둘렀다.

유독 병규와 샤바만은 긴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심지어 그들은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돼지가 뛰어와요. 샤바”

샤바가 몽롱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호랭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양 떼가 뛰어다니는 건 봤어도 돼지 떼가 뛰어다니는 건 처음 본다. 녀석들, 살 좀 뺄 것이지. 뛸 때마다 얼굴 살 출렁이는 걸 봐라. 쯧쯧. 저게 무슨 망신이냐?”

이번엔 병규가 하하 웃으면 대꾸했다.

“그러네요. 거참, 멧돼지가 두발로 뛰어오니 묘하게 박진감 넘치는 걸요?”

“그렇구나.”

아무리 오크 떼의 돌진이 으리으리하고 광폭해 보인다 해도, 지구에서 본 돼지들의 굼뜬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혀 있는지라 별 다른 긴장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병규는 겉보기엔 비실비실해 보이지만 실상, 보통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격전을 여러 번 치른 맹장이 아니던가.

이미 뇌가 있을 자리를 부은 간덩이가 차지한 지 오래였다.

일행은 한참을 말을 달렸다. 한데도 오크들과의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 무렵, 병규가 제이콥에게 외쳤다.

“소리가 들려요.”

“무슨소리?”

같은 말을 타고 있던 제이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병규의 귀가 잠시 펄럭거렸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늑대…… 소리가 들립니다.”

제이콥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옇게 치솟아 오르는 먼지구름이 좀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눈을 모으며 먼지 구름 너머를 응시한 제이콥의 입에서 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크 라이더!”

울프를 탄 오크 10여 마리가 일행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상황은 더더욱 급박했다.

만약 오크들만 있다면 말을 타고 도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울프라이더가 있다면 도망가기 힘들다고 봐야 했다.

말은 울프보다 빠르지만, 뒤를 쫓는 울프라이더보다 빨리 지친다.

도주가 힘들다고 판단한 제이콥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절벽 아래로.”

사방에서 포위를 당하는 것보다 절벽을 등지고 있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절벽을 등지고 선 일행은 짐을 내리고 말들을 풀어놓았다.

무기를 꺼내들고 맹렬하게 몰려오는 울프라이더를 노려보니 긴장이 목 위까지 치솟았다.

“마법사와 아이들을 보호해.”

제이콥과 고든, 호젤은 프리먼과 병규들을 감싸듯이 펼쳐 섰다.

무기를 빼든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오크들을 노려보던 제이콥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병규의 손에 쥐어주었다.

“너도 이젠 떳떳한 용병이다. 네 몸은 네 스스로 지킬 수 있겠지?”

병규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칼을 받았다.

묵직한 중량감.

한번도 무기를 손에 들어본 적이 없는 병규는 그 이질감이 어색하지만 했다.

“샤바에게 줄 무기는 없나요?”

제이콥은 샤바를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곱게 자란 티가 팍팍 나잖아. 저렇게 약해가지고 어디 무기나 들겠어?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다.”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나는? 난 막 자란 것 같아 보인단 말야?’

큰소리로 항의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울컥 치솟는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울프라이더들이 달려왔다.

집채만 한 울프 위에서 녹슨 무기를 휘두르는 놈들의 흉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놈들은 이미 사냥을 끝낸 사냥꾼처럼 득의의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쉽게 당해줄 순 없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제이콥은 프리먼을 불렀다.

“프리먼. 마법을!”

“알았네.”

프리먼은 두 손으로 지팡이를 감아쥐었다. 이어 눈까지 감은 그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먼지구름과 함께 오크들이 달려드는 상황에서 무진장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의 지팡이가 돌진해 오는 울프라이더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시를 읊듯 흘러나오는 마지막 시동어.

“작렬하는 불꽃의 춤.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퍼펑.

노란 불꽃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울프라이더들을 후려갈겼다.

“키에엑.”

“크웩.”

비명과 함께 살 타는 역한 냄새가 멀리까지 확 풍겼다.

“헉헉!”

단 한 번의 마법 시동에 프리먼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적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많은 마나를 쏟아 부어 마법을 펼쳤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대여섯의 동료가 한꺼번에 통구이가 되었음에도 울프라이더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 가득 흉폭한 기세를 띠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이다.

붉게 충혈된 놈들의 눈동자.

그 속에 일렁이는 광기.

“젠장.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더니. 정말이잖아.”

호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래고래 괴성을 질렀다.

원래 오크들의 용맹함은 수많은 몬스터들 중에서 발군이다.

하지만 아무리 오크들이 용맹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어느 정도 머리도 있고, 전술도 있어서 특히 마법사를 상대할 때엔 적절히 진형을 펼치는 정도의 전술을 구사할 줄 안다.

그런데 이 놈들은 희생이 생기든 말든 무작정 돌진이다.

이성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잠깐 사이에 코앞까지 밀려든 울프라이더.

오크들이 탄 거대한 울프들의 게걸스런 숨소리가 안면을 끈적끈적하게 적셔온다.

“우워어어!”

오크들의 광폭함에 전염된 듯 고든이 사람 머리를 통만 한 해머를 휘두르며 앞을 나섰다.

제이콥과 호젤이 그 뒤를 따랐다.

“죽어라!”

고든이 휘두른 쇠망치에 선두의 울프와 그 위에 울라탄 오크의 머리통이 썩은 수박처럼 부서져 나간다. 그의 해머는 둔했지만, 일격에 울프와 그 위에 탄 오크의 몸End이를 박살낼 정도로 경력했다.

제이콥의 검은 거칠고, 용감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며 돌진했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울프건, 그 뒤에 탄 오크건 사정없이 절단이 났다.

반면 호젤은 섬세하고 예리했다.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고, 검을 휘두르면 반드시 상대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다.

울프라이더들은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닐 수 없다.

그 기동성도 두렵지만, 오크가 타고 있는 것이 집채만 한 울프라는 것이 더욱 까다롭다.

울프는 말과는 다르다.

말과 달리 울프에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다.

오크가 위에서 무기를 휘두르면 덩달아 울프도 아래에서 이빨과 발톱을 휘두른다. 이러한 공격에 웬만한 용병들은 손발만 허둥대다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즘 용병단은 달랐다. 과연 최소 은패를 가진 용병단답게 개개인의 실력이 출중했다. 또한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그들의 협동 플레이는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고든이 돌진하면 그 공백을 제이콥이 메우고, 그래도 생기는 빈틈은 호젤이 처리한다.

기가 막히게 손발이 잘 맞아 돌아간다. 한 배에서 난 세 쌍둥이라 해도 이들처럼 서로의 마음을 잘 읽지는 못할 것이다.

호젤이 울프 위에 올라탄 오크를 두동강이 내자 그 아래의 울프가 괴성을 지르며 호젤의 허리를 물어온다. 그러나 호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옆의 오크를 머리를 날린다.

울프의 싯누런 이빨이 호젤을 물을 때, 고든의 해머가 울프의 목덜미를 도장 찍듯 찍어낸다.

순식간에 십여 기의 울프라이더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울프라이더들을 모두 처치한 그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채 숨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백여 마리의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 것이다.

“젠장.”

제이콥은 쌍소리를 뱉었다. 고든은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으로 오크들을 노려보았고, 호젤은 제이콥의 등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마법사인 프리먼은 계속 스펠을 암송하고 있었다.

“이거 분위기가 영 살벌하네요.”

바위틈에 숨어 있던 병규가 밖을 슬그머니 보며 말하자, 호랭이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느리지만 꽤 박진감 있구나.”

하도 병규의 환상적인 스피드에 시달리다보니 이젠 웬만큼 빠른 것엔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 호랭이였다.

“더 이상 무리면 리더가 위험할 것 같은데. 우리도 나가서 한바탕 놀아볼까요?”

병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호랭이는 힐끔 프리먼을 올려다 보았다.

“조금 후에 나서라. 마법사가 과연 어떤 신기한 마법을 쓸지 궁금하구나.”

호랭이는 유독 이곳의 마법에 관심을 보였다.

둘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우르르 몰려든 오크들이 제이콥 일행을 빙 둘러싸기 시작했다.

 울프라이더들의 시신을 경계선으로 오크들은 자리에 정렬했다.

우락부락한 오크들의 시선.

절로 위축이 되는 것 같았다.

오크들 무리가 갈라지며 탄탄한 체격의 오크 하나가 횃불을 손에 든 채 앞으로 나섰다.

놈은 쓰러진 울프라이더들을 내려다보며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릉거렸다.

“킁. 난 갈색 오크족의 족장 우르하이다. 빌어먹을. 용맹한 전사들을 죽인 너희들의 이름을 묻겠다.”

“이름을 알려주면 살려줄 생각이냐?”

제이콥은 눈을 날카롭게 거리며 물었다.

우르하이는 씩 하고 추악한 웃음을 머금었다.

“크흐. 빌어먹을. 너희들의 뼈에 이름을 새겨주마.”

제이콥의 이마 위로 주름이 그어졌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긴 그른 것 같다. 제이콥은 우르하이에게서 시선을 유지한 채 프리먼에게 물었다.

“마법은 어느 정도 쓸 수 있겠어요?”

“두 번 정도. 1,2서클이라면 다섯 번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네.”

“폭발형 공격마법은 자재해 주세요. 난전이 될 테니까요.”

“알았네.”

프리먼에게 지시를 내린 제이콥은 호젤와 고든을 불렀다.

“호젤. 넌 나와 함께 움직인다. 고든, 프리먼과 아이들을 부탁해.”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위아래 질서도 없어 보이는 그들이지만,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자 놀랍도록 절도 있는 모습을 보였다.

“물러서라.”

병규는 고든에 밀려 뒤로 빠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고든을 올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밀려났다.

“킁. 용맹한 갈색 오크의 용사들아. 킁. 먼저 간 용사들을 기리자.”

우르하이가 소리치자 오크들이 일제히 무기를 두드리며 괴성을 질렀다.

“쿠워어어어어.”

“캬아아아.”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싸움의 기폭제가 된 것은 이번에도 프리먼의 마법이었다.

오크들이 달려들자 프리먼은 이미 캐스팅을 마친 듯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아이스 볼트(Ice Bolt)!"

하얀 빛줄기가 냉기를 흩뿌리며 오크들에게 날아든다.

캐캑하는 신음과 함께 선두의 오크 둘이 허옇게 탈색되며 꼬꾸라진다.

“가자.”

제이콥이 도를 휘두르며 달려 나가자 호젤이 뒤를 따랐다.

“죽어라.”

오크들은 거칠었다. 개미 떼처럼 제이콥에게 몰려들었다. 사방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무기들.

제이콥은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두른다.

험악한 기세로 그에게 달려들던 오크의 머리통이 두 쪽이 되어 날아갔다.

그러나 오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밟고 녹슨 칼을 우악스럽게 휘둘렀다.

제이콥은 방금 일검을 날린 뒤라 적절히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위기의 순간, 호젤이 레이피어를 휘둘러 오크들을 물러서게 했다.

그사이 자세를 정비한 제이콥이 다음 희생자를 향해 검을 날렸다.

퍼억.

오크의 머리통이 날아간다.

제이콥과 호젤.

두 사람은 잘 짜여진 연극공연을 하는 것처럼 호흡이 착착 잘 맞았다.

거기에 프리먼이 간간이 마법으로 뒤를 받쳐주자, 수많은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위급천만의 상황에서도 비교적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두의 오크들 열 마리가 단박에 쓰러졌다.

쿵쿵. 

크와아아.

오크들의 괴성이 높아졌다. 피를 본 놈들은 눈을 벌겋게 충혈하며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쿵. 저놈을 노려라.”

우르하이가 마법사인 프리먼을 손가락질했다.

멀리서 마법을 날리는 마법사의 존재가 영 꺼림칙했던 것이다.

“킁킁. 제거.”

“재수 없는 마법사, 킁. 죽여.”

족장의 명에 오크들의 일부가 우르르 달려갔다.

“어딜 감히!”

굵직한 음성과 함께 고든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큰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해머는 위력적이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오크 하나가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작은 틈을 노리고 다른 오크가 도끼를 휘둘러왔다.

고든은 급히 몸을 숙였지만, 그만 옆구리의 옷이 찢어지며 피가 솟았다.

그러나 고든은 오히려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날뛰었다.

프리먼은 아예 자신의 위험엔 일별도 안 했다.

괴성을 지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오크들은 무시한 채, 제이콥과 호젤이 위험할 때에만 마법을 날렸다.

프리즘 용병단은 정말이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긴 힘들었다.

특히 혼자서 프리먼과 병규를 보호해야 했던 고든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고든의 든든한 방어벽이 뚫렸다.

두 마리의 오크들에게 고든의 발이 묶인 사이 오크 한 마리가 프리먼에게 달려든 것이다.

“이, 이런.”

프리먼은 급히 지팡이를 들어 오크의 칼을 막았다. 간신히 지팡이로 막긴 했지만 그만 힘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킁. 죽어라!”

의기양양한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칼을 내리찍었다.

녹슨 칼이 막 프리먼의 미간을 쪼개 놓을 찰나였다.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돌연 칼을 든 오크의 팔이 툭 빠져버렸다.

“크, 킁”

팔이 빠진 오크도 놀라고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 프리먼도 놀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신께서 프리먼의 죽음을 원치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곧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병규가 씩 웃으며 물었다.

멍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프리먼이 어색한 음성으로 물었다.

“오크의 팔, 네가 한 거야?”

병규는 씩 하고 웃어 보이더니 팔이 빠진 오크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이 녀석이 팔을 너무 세게 휘둘렀나 보죠.”

“파, 팔을 너무 세게 휘둘러서 그랬다고?”

프리먼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오크가 아무리 둔하다 해도 그렇지. 설마 관절이 빠질 정도로 팔을 휘두를까?

프리먼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병규는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하며 애써 모른 체했다.

높은 돌 위에 올라 살벌한 전장을 살피니 난전도 이런 난전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이 주변 일대는 오크들이 흘린 피와 비명소리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난자하게 흐트러진 피.

코를 쏘아오는 지독한 악취.

끔찍한 풍경 속에서 제이콥과 호젤은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야차처럼 날뛰었다.

그들의 검과 칼이 둔한 호곡성을 지를 때마다, 오크들의 죽음으로 그려지는 잔혹한 풍경화가 조금씩 그 크기를 확장하고 있었다.

인상이 절로 찡그려질 만큼 잔혹한 장면들의 연속. 

그런데 어찌된 이유인지 병규는 평온했다.

마치 일상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호랭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대범했었나?’

처음 만났을 때의 병규는 소심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상할 정도로 호전적이 되었다.

‘역시 피를 먹을 때마다 힘뿐만이 아니라 기질까지 카피되는 모양이군.’

호랭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오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한 편은 제이콥과 호젤을 감쌌고, 다른 한편은 고든에게 달려들었다.

의외로 프리즘 용병들의 실력은 상당하여, 10배가 넘는 오크들을 상대로도 아직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듯,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고든은 아직 버틸 수 있어 보였지만 제이콥과 호젤쪽은 많이 지쳐 보였다. 게다가 마법사인 프리먼은 이제 마나가 고갈되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

가히 최악의 상황이었다.

“네가 나서야 할 것 같구나.”

호랭이가 중얼거렸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사실 나서고 싶지 않았다.

병규는 이곳에서 프리즘 용병단의 보호를 받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잃어버린 가족을 찾은 것처럼 편했다. 그런데 이제 그가 힘을 사용하게 되면 그러한 균형이 깨져 버리게 될 것이다.

아니, 그의 괴물 같은 몸을 보면 자신을 멀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이들의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간신히 친해진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은 싫지만, 그들이 죽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기왕이면 신나게.”

병규는 팔을 걷어붙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신나게 날뛰어 볼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치열하게 불타오르던 분위기가 조금씩 눈에 띄게 식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작은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병규가 눈치 챘을 때는 산불처럼 전장을 크게 휘저었다. 그리고 어느새 모두는 싸우던 것도 잊은 채 한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병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엔 샤바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성난 오크들에게 몰살당할 위기 속에서도 샤바는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마치 지금의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특유의 은신술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눈에 띄게 된 마법에 당한 오크들의 시신.

프리먼의 ‘아이스 볼트’에 꽁꽁 동사된 오크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 샤바는 나뭇가지를 주워 그들의 딱딱한 몸뚱이를 쿡쿡 찔러보았다.  

“냉동고에 들어갔다 나온 고기 같다. 샤바.”

신기한 듯, 오크들을 살펴보던 샤바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침을 후르릅 삼켰다.

아무리 봐도 오크들은 돼지처럼 생겼다.

물론 사육하는 돼지보다는 산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멧돼지를 닮긴 했지만, 잡식성에 유달리 식욕이 왕성한 샤바의 눈에는 그 돼지(?)가 그 돼지(?) 같았다.

가끔가다 병규가 기분 좋을 때 조금씩 던져주던 돼지고기가 생각난 샤바.

입에 착착 감기는 잊을 수 없는 그 감칠맛!

“맛있을 것 같다. 샤바.”

살을 출렁거리며 무기를 휘두르는 오크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 일어야 마땅하건만 샤바는 웬일인지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아직 못 먹었다.

점심 먹을 시간에 돼지 떼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든 샤바는 모종의 결심을 굳혔다.

‘통돼지 구이를 해먹는 거야. 샤바.’

물론 아무리 둔감한 샤바라 해도 싸움터의 소란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다.

다른 별이었다면 백성들을 불러 돼지 떼들을 한번에 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별엔 그의 백성들이 한 명도 없었다.

“주인님이 손을 쓰시면 될 텐데. 샤바.”

주인의 능력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돼지 떼는 삽시간에 정리가 될 터. 그런데도 구경만 하는 주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샤바였다.

결국 전장의 소음에 신경을 끊은 샤바는 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을 주워 모았다.

그런데 장작으로 쓸 만한 나무가 부족했다.

잠시 고민하던 샤바는 오크들이 떨어뜨린 무기들을 모아왔다.

“이건 쇠뭉치라 안 되고 샤바. 이건 손잡이가 나무라 되고 샤바 ......”

노래를 부르며 장작(?)을 선별해 낸 샤바.

그가 골라낸 무기들은 하나같이 손잡이가 나무로 된 도끼와 해머였다.

그렇게 얼렁뚱땅 장작은 구했지만 이번엔 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런데 불은 어떻게 구하지? 샤바.”

샤바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다.

문득 마법사의 마법이 떠올랐다.

마법사라면 마법으로 불을 피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프리먼을 쳐다본 샤바는 곧 적이 실망하게 되었다.

믿었던 마법사는 마법을 모두 사용해 버린 듯 했다.

탈진한 채 숨을 헐떡거리는 걸 보아하니 불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갈색 오크족 족장이 우르하이가 손에 들고 있는 횃불이 보였다.

갈색 오크에게 불은 곧 번영과 힘을 상징했다.

때문에 족장은 항상 무기 대신 횃불을 들고 다녔다.

다행히 붉은 대지엔 불에 타는 물(기름)이 풍부하여 사냥 중에도 불을 지니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 불을 찾는 샤바의 눈에 그 횃불이 보인 것이다. 

“불이다. 샤바.”

샤바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물론 오크 족장을 보호하기 위한 오크들의 방어는 철저했다. 하지만 배고픈 샤바에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오크가 아무리 몰려 있어봤자 그에겐 요리재료가 단체로 꿀꿀대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은밀한 움직임으로 족장의 배후로 이동한 샤바는 침을 줄줄 흘리며 족장의 횃불을 냉큼 집어 들었다.

“이거 좀 빌려줘. 샤바.”

한편, 생각보다 완강한 인간들의 저항에 굳은 얼굴로 전장을 살피던 우르하이는 갑자기 누가 횃불을 채 가자 깜짝 놀라게 되었다. 

급히 손에 힘을 주었지만 이미 횃불은 빼앗기고 만 상태.

“킁. 누, 누구냐.”

“나? 난 샤바야. 샤바.”

괴성을 지르고 보니 비실비실하게 생긴 검은 장발의 소년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르하이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이 보잘것없는 녀석이 무슨 똥배짱으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족장의 괴성에 어리둥절해하던 오크들은 샤바의 손에 횃불이 들려있는 것을 보고는 분기탱천하여 달려들었다.

“인간. 킁. 신성한 불을 내놔라!”

“킁. 죽인다.”

족장을 지키고 있던 오크 세 마리가 흉폭한 기세로 샤바에게 달려들었다.

“뭐야. 샤바. 좀스럽게 불 좀 빌려 달라는데 이럴 거야? 샤바샤바.”

샤바의 그린 듯한 눈썹이 상큼 치켜떠졌다.

“시끄럽다. 킁.”

“킁. 불을 내놔라.”

샤바의 항의에도 무식한 오크들은 달려드는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숨을 내쉬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아닌가.

“좋아. 그렇게 한다 이거지. 샤바?”

샤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크들이 무기들이 막 샤바의 몸을 난도질할 찰나, 그의 몸은 바닥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크, 킁. 없어졌다.”

“신성한 불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샤바가 갑자기 사라지자 오크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샤바만 사라졌으면 모르겠지만, 그들이 신성시하는 불까지 없어졌으니 난리가 난 것이다.

족장인 우르하이 마저 난감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킁. 불. 불!”

“킁킁. 불을 찾아라!”

신성한 불이 없어지면 족장으로서의 권위 또한 사라진다.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그때 사라졌던 샤바가 허둥대고 있는 족장의 등 뒤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꼼짝마. 샤바.”

샤바는 횃불을 족장의 턱밑에 들이대며 협박했다.

“킁. 이놈이 어디서.......”

잠시 당황하던 우르하이는 곧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킁. 갈색 오크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킁.”

자부심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실제로 우르하이는 명예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오크였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의 호기 있는 말은 분명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샤바.

인간이 아닌 샤바는 당연히 자부심 어린 족장의 말에 평범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정말? 정말 죽는 게 안 무서워. 샤바?”

눈을 동그랗게 뜬 샤바는 대뜸 횃불을 족장의 턱에 들이댔다.

찌지직하는 소음과 함께 길게 자란 족장의 수염이 타버리고 턱마저 달구었다.

“킁. 뜨, 뜨겁다. 고문을 하려거든 차라리 죽여라. 킁킁.”

족장을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그러나 수염이 타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샤바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털 타는 거 재미있어. 조금만 더 태워 볼게. 샤바.”

“킁. 뭐......뭣!”

족장이 당황하는 사이 샤바는 대뜸 횃불을 그의 머리 위에 들이댔다. 불과 함께 횃불 안에 들어있던 기름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족장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족장 우르하이는 그대로 살아 있는 오크 횃불이 되었다.

“끄, 꾸워어어어어!!”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타는 기름이 머리 위로 쏟아졌으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전장을 울리는 처절한 돼지의 비명소리에 한창 치열하게 싸우던 오크들조차 잠시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았을 지경이다.

그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족장이 신성한 불을 머리 위로 피워 올리고 있지 않은가.

“킁킁. 족장 머리에서 불난다.”

“킁. 족장이 신이 되는가 보다.”

전장에 나타난 신비한 현상(?)에 칼을 휘두르다말고 족장을 향해 절을 하는 오크까지 있을 정도였다.

“호오오. 신기한걸. 샤바.”

머리카락이 고슬고슬 타 들어가는 장면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살핀 샤바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머리 위에 쏟아진 기름은 머리카락을 금세 태워버렸다. 그리고도 꺼지지 않은 불은 급기야 머리의 살을 익히기 시작했다. 살이 익는 그 맛깔스런 냄새가 코를 슬금슬금 파고든다.

샤바의 눈동자가 헤... 풀려 버렸다.

“맛있는 냄새야. 샤바.”

족장은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는데 샤바는 침을 삼키며 그를 본다. 이게 참 잔인하다면 잔인할 수 있는 장면이고, 웃기다면 웃길 수 있는 장면이라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킁. 부, 불을 꺼라. 킁. 불을 꺼.”

족장은 땅바닥을 뒹굴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머리가 지글지글 타 들어가는 고통에 체면이고 뭐고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간 지 옛날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크들이 족장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급한 김에 손바닥으로 때리던 그들은 기름이 옮겨 붙어 화상을 입기만 하고 정작 불은 끌 수가 없었다.

당황스런 순간, 누군가 외쳤다.

“발로 해라. 샤바.”

갑자기 들려온 그 음성은 족장을 구할 방법을 찾지 못해 안달하던 오크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발은 손보다는 가죽이 두텁다.

기름불이 옮겨 붙어도 땅바닥에 문대면 될 것 같았다.

단순한 그들은 급한 상황에 옷을 덮어주면 된다는 당연한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킁. 발이다.”

“킁. 발로 하자.”

마침내 제대로 된 방법(?)을 찾게 된 오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족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위대한 족장의 머리를 시커먼 발로 밟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의 인원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니 불이 붙은 머리는 물론, 얼굴이며 목이며 인정사정없이 밟게 되었다.

“킁. 그, 그만 컥! 그만해! 꾸웩!!”

이번엔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족장이었다.

불은 일찌감치 꺼졌지만 족장을 구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달려온 오크들은 도와주겠다는 일념하나만으로 발을 날려댔다.

결국 오크들이 우르르 빠지고 난 자리엔 온몸에 검은 발자국이 찍힌 족장이 팔다리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킁. 족장. 불 꺼졌다.”

“그런데 킁, 더 아파 보인다.”

“죽었나? 킁.”

“킁킁. 신이 되려고 한 족장. 다시 오크 됐다.”

족장을 빙 둘러싼 오크들은 걱정스런 눈으로 수군거렸다.

개중에 신이 되려다 만(?) 족장에게 실망한 음성이 들려오기도 했다.

한편, 발로 해라라는 간단한 말로 족장을 의식불명으로 빠뜨린 샤바는 몽롱한 눈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살이 익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던 것이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침을 삼키던 샤바는 돌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래. 기왕이면 싱싱한 것으로 먹자. 샤바”

생각해보니 기왕 먹을 것이면 죽은 놈보다 살아서 팔딱팔딱 하는 고기가 싱싱하고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다른 것보다 족장이 좋아 보였다. 다른 돼지보다 잘 먹어서 살도 토실토실 하고, 적당히 운동도 되었고, 열심히 두드려 맞기까지 해서 육질도 최상급일 것 같았다.

그야말로 최고의 고기.

불에 굽기만 하면 요리가 끝날 것 같았다.

"좋아. 저 돼지로 하자. 샤바"

마침내 결정을 내린 샤바는 오크들 틈을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삼십에 가까운 오크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마침내 족장에게 다가간 샤바는 방긋 웃었다.

"돼지다. 돼지 . 샤바. 고기다. 고기. 샤바샤바.""

경련을 일으키는 족장의 다리를 질질 끌며 샤바는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걱정스런 눈으로 족장을 내려다보던 오크들은 이 황당한 사태에 넋을 놓았다.

수 십 마리의 오크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태연히 족장을 고기라고 부르며 납치해 간다?

노래를 부르며?

거기에 두 손으로 모셔가도 부족할 판에 발 한 짝만 들고 질질?

그러고 보니 놈의 손에 신성한 불까지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이렇게 대담한 녀석이 있을 줄이야.

오크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킁. 마, 막아라"

"족장이 끌려간다. 킁."

멍청하게 서 있던 오크들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샤바에게 달려들었다.

"뭐야? 고기 일인분(?)도 양보 못하겠다는 거야?"

샤바는 화가 치밀었다.

불을 빌려 달라고 할 때도 좀스럽게 굴더니 이번엔 치사하게 먹는 것까지 따지고 드는 게 아닌가.

"싫어, 이건 안 줄 거야. 샤바."

육질 좋은 고기에 욕심이 생긴 샤바는 족장을 질질 끌면서 도망갔다. 그 뒤를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쫓았다.

놀란 오크들은 죽어라 달렸고, 어느덧 샤바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샤바는 눈썹을 상큼 치켜들더니 대뜸 손에 든 음식(?)을 집어던졌다.

"비켜!"

샤바는 바람만 불어도 나아갈 것처럼 마른 체구였지만 힘은 장사였다.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족장은 꾸엑 하는 비명을 지르며 휘둘러져야 했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앞을 가로막은 오크와 몸통박치기를 해야 했다.

결국 몸통박치기를 당한 오크는 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족장은 입에 거품을 물고 다시 기절하게 되었다.

"또 막을 거야. 샤바?"

위협하듯 족장을 붕붕 휘두르며 샤바가 외쳤다.

오크는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만약 또 앞을 가로막았다간 족장이 죽을 것 같았다.

"방해하지 마. 샤바."

한 손을 허리에 척 올린 자세로 오크들을 협박한 샤바는 족장을 질질 끌며 흥겹게 걸음을 옮겼다.

모아놓은 장작에 횃불을 던져 불을 붙인 샤바는 족장의 옷을 벗겼다.

모닥불 좌우에 검을 꽂아 걸쇠를 만든 샤바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런데 얠 어떻게 돌리지? 샤바."

족장을 구우려하니 이번엔 또 꼬챙이가 없는 것이다.

마땅한 것을 찾던 샤바의 눈에 좋은 물건이 보였다.

오크들이 사용하던 길쭉한 창.

길고 튼튼한 것이 딱 좋았다.

"불 위에 빙글빙글. 맛있는 통구이. 샤바..."

샤바는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발로 족장의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샤바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창으로 족장의 엉덩이를 조준했다.

'서, 설마 아니겠지. 킁'

'절대로 아닐 거야. 킁.'

샤바의 행동을 보고 순간 떠오른 끔찍한 상상에 오크들은 손에 땀을 쥐며 긴장했다.

설마 아무리 무식한 놈이라도 오크를 꼬챙이 구이하려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기대에서였다.

그저 위협하려고 하는 연극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통수를 스멀스멀 자극하는 이 불길한 예감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어느새 싸움은 중지되어있었다.

프리즘 용병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던 오크들은 족장을 산 채로 구워삶으려는 샤바의 엽기적 행각을 긴장감 어린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 글쎄."

프리즘 용병단 역시 황망한 표정으로 샤바와 오크들을 쳐다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였다.

그만큼 오크들의 기세는 무서웠다.

그런데 마지막을 고할 순간, 이 무슨 사태란 말인가.

그들 역시 정신없이 샤바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였다.

"잘 꽂아야 해. 샤바."

창을 들고 족장의 엉덩이를 조준하던 샤바.

물론 그는 오크의 기대와 달리, 정말로 족장을 요리할 생각이었다.

한쪽 눈을 감은 채 영점을 조준하던 샤바는 창끝을 족장의 엉덩이에 살포시 꽂았다.

"킁킁!"

"꾸엑!"

오크들의 입에서 일제히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꽂다니.

무지막지한 사태에 그들은 혼이 떠나갈 것처럼 놀랐다. 참혹한 광경(?)에 손으로 눈을 가린 오크까지 있었다.

한편 조준을 위해 창을 살짝 엉덩이에 꽂았던 샤바는 회심을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창대를 잡았다. 

그리고는 창대를 빙빙 돌리며 창끝으로 족장의 엉덩이에 살포시 밀어넣기 시작했다.

"꾸에에에에에엑!"

엉덩이가 찢어진 고통에 혼수상태였던 족장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차라리 기절한 것이 나았을 것이다.

엉덩이를 찔러오는 그 날카롭고 섬뜩한 통증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꾸에에에에에에에엑!!!"

족장은 자신의 고통을 온 세상에 전파하려는 듯, 온몸을 오징어 비틀 듯이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가만히 있어."

샤바는 족장의 목을 콱 밟았다.

캑 하는 비명과 함께 반항하던 족장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되었다.

샤바는 다시금 룰루루... 노래를 부르며 창대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손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와서 창대를 잡았다.

오크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족장이 통구이 되는 광경을 생 라이브로 감상할 뻔했던 것이다.

"샤바?"

고개를 올려본 샤바는 창대를 잡고 있는 것이 병규라는 걸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해둬라."

병규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샤바. 배고파요. 샤바"

샤바는 손가락을 빨며 순진무수한 눈으로 호소했다.

때마침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흘러나왔다.

병규는 씩 웃었다.

"그래도 안돼 . 이 녀석은 쓸모가 있거든."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병규는 ‘똥 침 맞은 멧돼지의 오묘한 표정'을 박진감 넘치게 연기하고 있는 족장을 덜렁 일으켜 세웠다.

"이봐. 너 응아색 오크족이라고 했던가?" 혼수상태이던 족장은 응아색이라는 말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는 크게 외쳤다.

"킁. 난 용맹한 갈색 오크족의 족장, 우르하이다."

"아아, 그래 . 갈색 오크족이라고 했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 이제 납치된 돼지 신세인데 그렇게 소릴 질러도 되겠어?"

병규가 빙글빙글 웃으며 은근하게 말하자 우르하이는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킁킁. 죽일 테면 죽여라. 우리 갈색 오크족의 용사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르하이의 자부심 넘치는 외침.

초조한 표정으로 사태는 추이를 주시하고 있던 오크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족장을 연호했다.

놈들은 다시 무기를 집어 들며 프리즘 용병대를 압박해갔다.

"호오. 그래?"

병규는 눈이 거슴츠레해졌다.

달짝지근하게 변한 병규의 눈빛에 우르하이는 순간 오한이 치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긋 웃어 보인 병규는 손가락을 빨고 있던 샤바에게 우르하이를 휙 던져주었다.

"옛다. 그냥 너 먹어라."

"오옷. 감사합니다. 주인님. 샤바."

몽롱한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샤바는 두 손을 활짝 펼쳐내며 우르하이를 받아들었다.

다 잡은 고기를 주인에게 뺏긴 것이 상당히 아쉬웠던 듯, 샤바는 행복한 표정으로 우르하이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걱정 마. 내가 맛있게 요리해 줄게. 샤바."

그 순진무구한 표정. 빨간 입가에 흥건한 침.

평범한 여자라면 단번에 넘어갈 만큼 매력 만점의 표정이었지만 우르하이에겐 죽음의 낫을 휘두르는 사신보다도 더 두려웠다.

"히, 히익!"

결국 자부심강한 갈색 오크족 족장 우르하이의 입을 비집고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병규에게 애원했다.

"킁킁. 사, 살려줘라. 인간!"

"어라 반말이네?"

"......인간님."

"후후."

병규는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베어 물었다.

"잠깐 다시 줘봐."

"히잉. 샤바."

병규가 족장을 다시 채가자 샤바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멀리서 지켜보던 호젤이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

"이봐, 널 통구이 해 먹지 않는 대신 앞으로 인간을 습격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해."

"킁. 그런 터무니없는!"

병규의 제안에 반발하던 족장은,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샤뱌의 얼굴을 보여주자 입이 쏙 들어갔다.

"해 줄 거지?"

병규가 방긋 웃으며 다시 묻자 족장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그래야지."

병규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랭이가 한심스럽다는 듯 중얼 거렸다.

"이놈이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샤바에게 배웠냐?"

당연히 병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방방 뛰었다.

"어허. 샤바에게 배우다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설마 호랭이는 제가 얼마 전부터 비겁함을 신조로 삼기고 다짐한 걸 잊어버리신 겁니까? 오히려 샤바가 저에게 배운 겁니다."

"어휴. 그래 잘났다. 그야말로 그 주인에 그 소환충이구만."

호랭이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족장을 협박하여 다시는 인간들을 습격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은 병규는,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금품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족장은 반발했다.

"오크들의 금품을 뜯다니. 니가 인간이냐! 킁킁."

결연한 갈색 오크족 족장은 병규의 정체성까지 물고 늘어지며 맹렬하게 저항했다.

병규는 노발대발하는 족장의 태도에 웃기만 했다.

샤바의 얼굴을 그의 낯짝 앞에 들이대며 은근한 음성으로 강요했다.

"내가 언제 너희들의 식량을 달라고 했냐? 왜 그렇게 성질을 내?"

말과 함께 그는 샤바의 귀여운 얼굴을 쓱 보여줬다

이때쯤 샤바의 굶주림은 극에 달해 있었다. 고슬고슬하게 익은 족장의 얼굴을 들이밀자 무의식적으로 혀로 얼굴을 쓰윽 핥았다.

“킁킁!!”

갑자기 우르하이의 숨이 가빠졌다.

대화할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병규는 짙은 미소를 띠며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리 많은 게 아니야. 너희들이 사람들에게서 털은 거 있지? 그런 것들 중에서 누런 것이나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들만 주면 돼. 알았지?”

샤바의 기상천외한 행동에 혼이 빠진 족장은 비명을 지르며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잠시 후 일행 앞에 인간들에게서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잡동사니들이 수북이 쌓였다.

잡동사니에서 돈 될 만한 물건들을 찾아 챙긴 병규는 마지막 요구라며 식량을 달라고 했다. 

오크들은 이를 박박 갈며 사냥을 나섰고, 잠시 후 구수하게 익은 요리가 일행 앞에 바쳐졌다.

“드세요.”

병규는 마치 자신이 한 요리인 양 제이콥 일행들에게 권했다.

“응. 응.” 

“그, 그래.”

얼이 빠져있던 제이콥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크들이 차린 요리를 뜯어 먹었다.

물론 가장 열심히 먹은 것은 샤바였다.

정신없이 음식을 들고 거창하게 트림을 하고서야 프리즘 용병단은 섬뜩 정신을 차렸다,

‘이게 뭐지?’

‘뭔가 굉장히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이 사태가 대체 뭐란 말인가.

오크들의 금품을 뜯고, 오크들이 요리한 음식을 대접받았다고?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그, 글쎄.”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일행은 까슬까슬해진 갈색 오크족 족장 우르하이의 배웅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다.

병규는 기분이 좋았다.

배도 부르겠다. 돈도 벌었겠다. 실력을 보이지 않고도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겠다.

이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주인이 기분이 좋자 샤바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샤바샤바’ 라는 의미도 불분명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그들을 보는 프리즘 용병단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오크들의 금품을 뜯고, 식사를 대접받으며 전송을 받아?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일행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샤바를 쳐다보았다.

여자처럼 가는 몸. 하얀 피부.

툭 치면 톡 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약한 몸이다.

그런데 그런 몸의 주인공이 그 치열한 격전 중에 호위가 수두룩한 오크족 족장을 납치했단다.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도 어처구니없게도 배가 고파서였단다.

발버둥치는 오크 족장을 무식하게 기절시키고는 꼬챙이 구이를 해먹으려고 했다.

이해할 수 없기는 병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혼란한 격전 중에도 태연히 오크 족장을 협박하여 금품을 갈취하다니. 아마 이 말을 용병길드에 전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오크들을 공갈 협박하는 놈이 어디 있다는 거야!’

틀림없이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도대체 재들 정체가 뭐야?”

제이콥과 그 일행들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병규와 샤바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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