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엘프의 맹세
다음 날 식사 자리에서 제이콥이 병규와 샤바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글쎄요.”
병규는 뒷머리만 긁적였다.
아직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과연 돌아갈 수 있기는 할까?
그의 표정이 한층 우울해졌다.
병규가 우물쭈물할 때다.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 다녀도 돼.”
호젤이 조심스레 말했다.
“물론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말이야.”
“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의외였던 것은 점잖은 프리먼까지 슬그머니 의사를 물어오더라는 것이었다.
“나도 두 사람이 남았으면 하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길가에 내놓는 것 같아서 영 불안하군.”
말을 마친 프리먼은 슬쩍 제이콥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연발했고, 호젤은 무서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이 사람들 이제 보니…….’
병규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이 이런 제안을 하게 된 배경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샤바 때문이군.'
두 사람 다 샤바를 탐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병규는 본편에 따라붙는 부록에 불과했다.
“으흠.”
제이콥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미간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사실 그는 병규와 샤바의 처우에 대해 며칠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왔다.
그도 병규와 샤바가 썩 마음에 들었다. 샤바는 모르겠지만 병규는 배짱도 있고, 성격도 무난해서 잘만 가르친다면 충분히 제몫을 해낼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것에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핑계를 대지만 뻔한 거짓말이다.
그의 생각대로 무단가출한 귀족가의 자제들이라면 별달리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만약 큰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는 범죄자들이라면 일이 심각해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용병단에 사람 하나 들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용병단의 리더인 제이콥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괜찮다고 본다.”
마침내 고든마저 찬성 쪽에 표를 던졌다.
결국 제이콥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졌다. 모두가 찬성하는데 나만 반대할 수는 없지.”
푸념을 터트린 그는 진지한 얼굴로 병규와 샤바를 응시했다.
“프리즘 용병단의 이름을 걸고 정식으로 제안한다. 우리 용병단에 들어와라.”
“.......”
병규는 침묵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이들과 헤어지면 상당 기간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들과 함께라면 자연스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원래 용병들은 일을 좇아 대륙전반을 돌아다녀 정보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병규는 프리즘 용병단을 쭉 훑어보았다.
다들 기대 어린 눈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빛에 병규는 어떤 운명의 냄새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침내 병규의 입이 열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야호.”
호젤이 환성을 터트리고, 프리먼은 샤바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든 역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좋아. 병규와 샤바가 일원이 되었으니 축배를 들어야겠지?”
호탕하게 웃은 제이콥은 여관주인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호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낮부터 무슨 술이야. 그럴 정신이 있으면 일거리라도 물어오라고.”
“에? 좋은 일도 있는데, 며칠 정도는 쉬자.”
“용병단의 자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드려야 할까요? 단.장.님?”
호젤이 눈 꼬리를 치켜세우자 제이콥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신 제이콥은 대뜸 병규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제 보니까 싸움을 좀 하는 것 같던데. 기왕 우리 용병단에 들어왔으니 용병길드에 가입하는 게 어때?”
샤바는 비실비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병규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드에 가입하면 용병이 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하지만 그냥 가입이 되는 것은 아니야. 간단한 시험에 통과해야 하지.”
“어떤 시험요?”
“그건 길드장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 길드장이 물렁한 사람일 때는 돈 몇 푼만 던져줘도 되지만, 반대로 꽤 난이도 있는 시험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지. 나와 고든 때엔 통나무 자르기와 대련이었다.”
“좋아요. 한 번 해보죠.”
용병길드는 시장 한 구석에 있었다.
건물 내부는 거친 용병들이 이용하는 곳답게 단촐했다.
“어떻게 오셨......어? 이게 누구야. 제이콥이 아닌가.”
탁자에 앉아있던 애꾸눈이 제이콥을 보고 반색을 한다.
“하하. 몇 년 만에 보는군. 잘 있었나?”
“물론이지.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끔 들르게. 너무 오랜만에 보니 얼굴을 잊어 먹을 지경이야.”
“바쁘다보니 그렇게 됐네.”
애꾸눈은 제이콥과 일행을 탁자로 안내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뭐, 용병이 길드를 찾을 일이 한 가지밖에 더 있겠어? 할 만한 일거리 좀 소개해 줘.”
“일이야 많지. 하지만 천하의 제이콥이 만족할 만한 일거리가 과연 있을까 모르겠군.”
“하하. 원 별말을.”
겸허의 말을 주고받던 제이콥은 문득 생각난 듯, 어색한 표정으로 않아 있는 병규와 샤바를 불렀다.
“아참, 홉. 이 애들에게 용병 시험을 치르게 해주고 싶은데.”
“흐음.”
홉이라 불린 애꾸눈의 사내는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병규와 샤뱌를 훑어보았다.
“마법사나 정령술사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네.”
홉의 이마에 주름 몇 가닥이 그려졌다.
“그다지 힘을 못 쓸 것 같네만…….”
제이콥이 소개시키는 사람치고는 별 볼일 없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이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둘은 바람만 불어도 휙 날아갈 것처럼 부실해 보였으니 말이다.
처음 본 사람이라면 과연 칼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홉의 말을 들은 병규는 반발심이 불끈 고개를 들었지만,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라 목까지 치민 화를 꾹 눌러 참았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말고. 시험이나 치르게 해주게. 되고 안 되고는 그 후에 판단해도 되지 않겠나.”
“하긴 그렇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최근 우리 길드의 방침이 바뀌었어.”
“어떻게 변했나?”
“용병패 발급기준이 좀 강화되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은 붉은 대지를 끼고 있어 위험천만한 곳이 아닌가. 그동안 어중이떠중이에게 마구잡이로 용병패를 발급하다보니 의뢰수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지. 덕분에 길드의 신뢰도가 바닥을 쳤네. 보다 못한 신임 길드장이 용병등록 시험을 좀 더 엄하게 바꿨지.”
“엄하게 바꿨다?”
제이콥의 반문에 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길드에 접수된 의뢰들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지만 용병패를 발급하게 되었네.”
“으음.”
제이콥의 이마에 주름이 그려졌다. 병규와 샤바, 둘만으로 의뢰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얼굴을 봐서 좀 봐줄 수 없을까?”
홉은 손을 흔들며 난색을 표명했다.
“안돼. 금패를 가진 자네가 부탁해도 안 되는 일일세.”
제이콥은 몇 번 더 부탁을 했지만 홉은 길드장의 엄명이 있었다며 거부의 뜻을 분명이 했다.
“금패라는 게 뭐예요?”
둘 사이의 대화를 엿들은 병규가 호젤에게 물었다.
“길드에서 용병에게 발급하는 용병해 중의 하나야.”
이어 호젤은 용병패의 등급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용병패는 크게 세 가지로 구별 되는데, 금패와 은패, 그리고 동패가 그것이다.
동패는 가장 하급을 뜻하는 것으로 길드에 소속된 용병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동패다.
은패는 동패보다 상등의 실력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10년 이상 길드의 의뢰를 꾸준히 수행했거나, 1급 의뢰를 3건 이상 처리한 숙련된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일단 은패만 가지고 있어도 길드의 대우가 상당히 달라졌다. 그만큼 은패 획득이 어려운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부나방 인생이 바로 용병이다. 십 년씩이나 용병 일을 하고도 생존해 있다는 것은 충분히 공경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은패보다 훨씬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 금패다.
금패는 길드장이 인정한 특급 이상의 의뢰를 무사히 수행한 용병들에게만 지급되는 것으로, 현재 금패를 소유한 용병은 대륙의 통틀어 고작 33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제이콥이 바로 그런 금패를 가진 특급 용병이었던 것이다.
“호젤은 어떤 패를 가지고 있어요?”
“난 은패야. 나뿐만 아니라 고든과 프리먼도 은패지. 사실 우리 용병단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구성원의 질로 따지면 대륙제일이야.”
“허. 대단하군요.”
병규와 호젤이 용병패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홉을 설득하던 제이콥이 고개를 흔들며 일행에게 돌아왔다.
“휴. 아무리 해도 안 되겠어.”
결국 설득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금패의 위엄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홉은 길드장의 지시라며 추호도 꺾이지 않았다.
“골치 아프게 됐는데. 아무래도 용병패는 나중에 해야 되겠다.”
씁쓸한 표정으로 제이콥이 말하자 병규는 씽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해 보겠어요.”
“정말이냐?”
제이콥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당연하죠.”
크게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샤바를 끌고 홉에게 걸어갔다.
“용병이 되려면 어떤 의뢰든 한 가지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
“좋아요. 그 시험을 치르겠어요. 저희에게 의뢰를 맡겨주세요.”
설마 비실한 녀석들이 곧바로 테스트에 응할 줄 몰랐던 홉은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저쪽 벽에 붙어 있는 게 다 의뢰들이다. 그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만 해결하면 된다.”
“네.”
하얀 벽에는 길드원들이 평가한 난이도와 의뢰 내용이 적힌 종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거의가 호송 임무였는데, 유독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었다.
“샤도우를 잡아 달라? 음, 시장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훔치고 있다라. 도둑이잖아?”
난이도는 2등급이었고, 내용은 최근 트라우마의 상가들을 차례로 털고 있는 신출귀몰의 도둑에 대한 것이었다.
샤도우가 출현한 것은 대략 반달 전이었는데, 그동안 놈은 매일 한 집씩 시장에 위치한 상가들을 털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샤도우를 잡기 위해 골목마다 성의 병사들과 자치군을 배치했는데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한 집씩 털려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날이 갈수록 피해가 커지자 참지 못한 상인길드에서 용병길드로 의뢰를 한 모양이다.
병규는 이 의뢰에 흥미가 당겼다.
멀리 갈 필요도 없고, 살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상당히 깨끗한 일인데다, 도둑의 몸이 날래고 신출귀몰하다는 것에 흥미가 동했다.
도적이 너무 빠르고 움직임이 은밀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다는 내용의 의뢰.
마치 그를 위한 사건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2등급 의뢰치고는 보상금이 크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차피 돈이야 필립 공작가의 기사들에게서 얻어낸(?) 금궤가 있어, 당분간은 걱정이 없었다.
“이것으로 하겠어요.”
병규는 샤도우에 관한 의뢰서를 홉에게 내밀었다. 의뢰서를 읽어 본 홉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이걸...... 하겠다는 거냐?”
병규는 그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으로 하겠어요.”
“진심인가?”
홉이 거듭 확인하자, 이상함을 느낀 제이콥이 병규를 제치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의뢰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다만?”
“몇몇 녀석들이 시도를 했는데, 모두 실패했거든.”
“왜지?”
홉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실패한 녀석들의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어.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제이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필이면 이런 의뢰를 고르다니.
“아무래도 다른 의뢰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그는 점잖게 권했지만 병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거절했다.
“아니에요. 그냥 이것으로 하겠어요.”
“방금 들었잖니. 지금까지 몇 명이나 실패한 의뢰라고. 첫 의뢰이기도 하니, 차라리 다른 것으로 하는 게 어때?”
호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병규는 히죽 웃으며 고집을 부렸다.
“괜찮아요. 저도 다리가 꽤 빠른 편이거든요.”
표적이 너무도 빨라서 잡을 수 없었다는 말에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우는 병규였다.
밤이 되었다.
“정말로 둘만으로 괜찮겠어?”
외출을 준비하는 병규와 샤바를 보고 호젤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네. 충분해요.”
동료들의 염려와 달리 병규는 소풍 나가는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원한다면 따라가 줄 용의도 있다.”
“괜찮아요. 저희도 용병이 되려 하는데 최소한의 능력은 보여야죠. 너무 걱정 말아야. 멋지게 일을 마치고 돌아올 테니.”
병규는 자신감 있게 소리쳤다. 하지만 호젤은 물가에 내놓은 애들인 양 영 못 미더운 모양이다. 샤바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병규는 속으로 웃었다.
주저 없이 짱돌로 여자를 후려치고, 오우거 허벅지 살을 보며 침을 삼키는 녀석이 바로 샤바다.
겉보기엔 비실해 보여도 실상 무지하게 살벌한 녀석인 것이다.
“계획은 세워뒀니?”
제이콥이 물었다.
“우선은 피해가 접수된 지역의 건물 옥상에서 표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어요. 오늘은 마침 달이 밝으니 운이 좋으면 찾아낼 수 있겠죠.”
“흠. 그래. 첫 의뢰니 성패에 신경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임해라.”
“네.”
밝게 대답한 병규는 샤바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섰다.
“걱정돼. 걱정돼.”
둘이 떠나자 호젤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불안해했다. 제이콥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듬직하게 말했다.
“믿어줘라. 남자는 때로 사내임을 인정받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줄도 알아야 해. 너도 저 아이들이 남에게 기대기만 하는 철부지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으응. 그건 그렇지만.”
호젤은 마지못해 수긍하는 눈치다. 제이콥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인데 혹시나 불안하다고 뒤를 따라가 본다거나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딸꾹.”
호젤은 이유 없이 딸꾹질을 했고, 제이콥은 호탕하게 대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을 가만 쳐다보고 있던 고든이 실실 쪼개며 한마디를 던졌다.
“제이콥이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애 아빠 다됐군.”
“딸꾹.”
이번엔 제이콥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별이 떠오른 거리는 한산했다.
병규는 목 좋은 장소에 위치한 집의 지붕 위에 느긋하게 누워있었다. 제이콥들에게는 밤새 도둑이 오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레이더에 필적하는 귀의 능력을 빌리면 이렇게 탱자탱자 놀면서도 충분히 오십 미터 안의 미세한 기척까지 죄다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샤바는 어느새 잠이 들고, 호랭이 역시 하품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쯤, 자고 있는 샤바의 윗 머리칼이 더듬이처럼 쫑긋 솟았다.
“쟤는 머리카락에 근육이라도 심어 놓은 거야?”
호랭이와 병규가 신기한 눈으로 보는 사이, 쫑긋 솟은 머리카락은 레이더처럼 빙빙 회전하더니 한쪽을 향해 번개모양으로 착 구부러졌다.
‘맛있는 냄새라도 발견한 거야?’
나침반처럼 바르르 떨리는 샤바의 머리카락은 충분히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런데…….
팔락팔락
이번엔 병규의 귀가 팔락였다.
은밀한 기척 잡힌 것이다.
병규는 눈을 감고 귀로 흘러 들어오는 기척을 읽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잡혔다.
움직일 때 이는 소음은 기껏해야 들 고양의 정도, 하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파동은 대상의 크기가 그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놈이다.’
확신이 든 병규는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기척은 ‘성인의 길’이라는 술집 주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 없이 접근해 살피니 모자를 쓴 작은 그림자 하나가 과일을 훔쳐먹고 있었다.
‘오늘은 음식도둑질인가? 명성에 비해 스케일이 작은 도둑이네.’
그리고 생각보다 나이도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열 대여섯 정도의 꼬마였다.
‘조금 놀려줄까?’
장난기가 인 병규는 은밀히 접근해 소년의 어깨를 툭 건들었다.
“뭐하니?”
“헛!”
소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겁먹은 눈동자를 본 병규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그냥 먹어.”
병규는 애써 배려해 주었지만 소년은 오히려 몸을 움츠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나이아스!”
돌연, 소년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주방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작은 요정의 형상이 되었다.
병규는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이와 같은 것을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정령?”
소년은 정령술사였던 것이다.
“재워!”
소년이 병규를 손가락질하며 앙칼지게 외치자, 물의 하급 정령 나이아스는 고속으로 분출되는 물줄기처럼 쏘아졌다. 하지만 병규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목욕을 이미 했다고.”
입가에 짓는 미소와 함께 병규의 모습이 휘릭 하고 사라졌다.
“엇!”
소년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그는 남달리 영민한 이목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그런 그의 이목을 속이고 사라지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물의 정령마저 잠시 표적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혹시 일루젼 마법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방금 전의 기척은 분명 환상이 아니었는데.’
소년은 긴장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찾고 있지?”
“으악!”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으슬한 음성에 소년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랐다. 허나 놀란 와중에도 손을 휘둘러 병규를 가리켰다.
“고, 공격!”
쏴아아아.
화가 난 나이아스의 기세는 좀 전보다 몇 배나 거칠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규는 여유 있게 피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 병규와 나이아스의 쫓고 쫓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야. 아직도 못 믿겠니?”
병규는 몇 번이나 소년의 등 뒤에 나타나며 설득했지만, 소년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나이아스의 조종에만 열중했다.
“어쩔 수 없군.”
병규는 소년을 설득시키는 일을 포기했다.
그의 귀가 팔락거리고 있었다.
주위에 다른 기척이 나타난 것이다.
별수 없이 병규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휙.
또 한 번의 고속이동으로 나이아스의 공격을 피한 그는 소년의 뒷목을 툭 하고 가볍게 쳤다.
이미 몇 번에 걸친 실습으로 그의 공격은 꽤 섬세해진 터다.
그의 가벼운 손길에 소년의 눈동자가 금세 탁해지더니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병규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 다니던 나이아스가 흩어졌다.
정령은 계약자의 마나로 중간계에 머물 수 있다. 때문에 계약자가 죽거나 의식을 잃으면 정령계로 강제 소환되는 것이다.
소년이 쓰러지자마자 병규의 귀가 거세게 팔락였다.
소란을 들은 주점의 주인이 주섬주섬 나오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이대로 있다간 소년은 둘째치고, 그마저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일단 나가자.”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즉시 소년을 안아들었다.
보기보다 소년은 훨씬 가벼웠다.
‘풀만 먹고살았나?’
소년을 덜렁 안은 병규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창밖으로 새어나갔다. 방망이를 든 주점주인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을 땐, 찬바람만이 쓸쓸히 휘돌고 있었다.
주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
날다람쥐처럼 가볍게 건물 벽을 타고 오른 병규는 푸석한 건물지붕 위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뺨을 톡톡 가볍게 치니 부스스 눈을 뜬다.
정신이 덜든 듯,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병규를 발견하고 벌떡 몸을 일어섰다.
“괜찮아. 안 잡아먹어.”
그러나 병규가 아무리 설명해도 아이는 허둥지둥 손발을 놀리며 달아날 생각만 했다.
작은 몸인데도 귀신같이 움직임이 빨라 잠시사이 벌써 건너편 건물지붕까지 날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병규를 따돌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병규는 느긋한 마음으로 소년의 뒤를 쫓았다.
반시간 정도, 둘은 쫓고 쫓기며 건물 지붕 위를 뛰어다녔다.
“계속 도망만 갈 거야?”
지루해진 병규가 소년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아무리해도 병규를 떨쳐낼 수 없었던 소년은 분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앉아봐. 대화 좀 하자.”
병규가 먼저 털썩 앉았다. 소년은 주저하며 엉덩이만 살짝 건물지붕에 걸쳤다. 언제라도 즉시 뛰어나갈 수 있는 자세였다.
“왜 도둑질을 한 거냐?”
병규의 물음에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죄의식 때문일까?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인지 소년의 태도는 많이 고분고분해졌다. 그때 소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두 손을 배를 감쌌지만, 그런다고 이미 새어나온 소리가 다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나.”
병규는 주머니에서 사과를 닮은 과일을 꺼내주었다. 호젤과 시장구경을 갔다가 사 온 과일이었다.
소년은 주저하다 조심스레 과일을 받았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다.
그저 조심스런 눈으로 병규를 쳐다볼 뿐이었다.
‘참 귀엽게 생겼네.’
은은한 달빛에 비친 소년의 모습은 꿈이 아닌가 착각할 만큼 영롱했다.
샤바가 몽혼한 환상 같은 모습이라면, 소년의 얼굴은 순정만화 풍으로 미화된 그림 같았다.
‘응? 그런데 이 아이 귀가 좀 이상하네.’
소년은 원래 큰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병규를 피해 도망치던 와중에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지금은 맨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달빛에 파르스름하게 드러난 소년의 귀는 보통사람보다 길었다.
병규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혹시 엘프?”
말을 타고 트라우마로 오는 도중, 병규는 제이콥에게 이드라센 대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중엔 엘프나 드워프 같은 유사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병규의 물음에 소년은 흠칫 놀랐다. 그제야 모자가 없어진 걸 깨달은 것이다. 병규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던 소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호오.”
병규는 새삼스런 눈으로 소년을 살폈다.
귀를 제외하곤 사람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인간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물론 처음엔 뾰족한 귀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것이었다.
아름다움.
소년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얼굴, 몸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어느 곳 하나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었다.
마치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랄까.
부조화의 조합인 인간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저......."
갑자기 소년이 물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소년의 목소리.
‘이런 목소리까지 완벽하잖아.’
병규는 속으로 분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 샤바 때문에 남다른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인데, 이제는 엘프라는 요상한 종족까지 나타나 그의 속을 뒤집는 것이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죠?”
어렵사리 입을 연 소년의 질문은 과연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응?”
병규는 소년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냐니? 인간이잖아.”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소년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병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병규의 물음에 소년은 대뜸 그의 귀를 가리켰다.
“아!”
여관주인의 기척 때문에 그의 귀가 잠시 팔락거린 적이 있었다.
그걸 소년이 용케 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당신의 움직임.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하.”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분명 사람이야. 그저 조금 안 평범한 사람.”
병규의 대답에 소년은 귀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해졌다. 실망한 듯한 모습이다.
“인간은......싫어요.”
소년의 조용한 음성이 병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왜 인간이 싫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 안에 쥔 과일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이다.
둘의 대화를 가만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병규의 뺨을 툭 쳤다.
“바보야. 저 이이의 목을 잘 봐.”
“!”
소년의 목에는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개 목걸이처럼 목을 채우는 장식이라도 한 것일까?’
생각해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엘프는 숲의 종족이다.
자연스러움을 좋아해 귀걸이 같은 장식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소년의 목에 있는 상처는 분명 무언가를 꽉 졸라맸던 흔적이었다.
“수갑을 채웠던 것 같다.”
호랭이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병규는 새삼스런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먼저 옷차림이 너무 초라했다. 누가 버린 옷을 주워 입은 듯, 크기도 맞지 않았다.
목에 난 붉은 자국은 그의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끔찍한 느낌마저 주었다.
소년의 본 모습은 너무도 완벽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반대로 너무 어색했다.
“으음.”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그림에 병규는 짧게 신음성을 흘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게 말해 주겠니?”
병규는 소년에게 사정을 물었지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대답을 들은 후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난감한 상황.
“내가 해 보마.”
호랭이가 그의 어깨에서 팔짝 뛰어내렸다.
“내 말이 들리니?”
호랭이가 갑자기 말을 걸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의 귀가 바짝 섰다.
소년은 슬그머니 호랭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 언어를 사용하자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소년은 손을 내밀어 호랭이의 등을 쓸며 친근감을 보였다.
하지만 그뿐, 결정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지.”
호랭이의 입을 웅얼웅얼거렸다.
도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심즉통(心則通).”
음성과 함께 호랭이에게서 눈무신 백색 서기가 만개하는 꽃봉오리처럼 피어올랐다.
빛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에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이제 내 뜻을 느낄 수 있느냐?”
근엄한 호랭이의 음성.
“아?”
소년은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짐승이 말을 건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엘프의 언어로.
“어, 어떻게 숲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거지?”
“엥?”
호랭이의 눈이 톡 튀어나온다.
숲의 언어를 했다고?
이것은 전혀 뜻한 바가 아니다.
심즉통의 술법은 마음속의 소리를 타인에게 전해주는 술법.
즉, 그저 상대가 생갓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단지 마음이 통하는 걸 넘어 자연스럽게 대화까지 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끙. 어떻게 된 게 이 세상에는 도술의 힘이 터무니없이 강해지는군.’
어쨌든 결과가 더 좋아졌으니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단지 뜻만 전달하려고 했는데 아예 대화까지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호, 혹시 신수이십니까?”
소년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엘프어를 말하는 짐승.
소년이 아는 한 그러한 존재는 신수밖에 없었다.
“흠. 뭐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쪽과 전혀 무관할 수도 없는 직업이지. 그건 그렇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다.”
어영부영 정확한 대답을 회피한 호랭이는 소년에게 일을 캐물었다. 호랭이를 신수라고 굳게 믿은 소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불기 시작했다.
소년의 이야기는 30분 정도 걸린 후에야 끝을 맺었다.
그의 말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두 가지.
첫째로 소년은 샤도우가 아니었다.
도둑질은 오늘이 처음이었고, 그것도 배가 너무 고파 과일 몇 개 주워 먹은 게 전부란다.
병규의 헉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 시간이 넘도록 실랑이를 했는데, 정작 찾던 범인이 아니라 엉뚱한 엘프였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알게 된 이야기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년은 노예였다.
며칠 전, 마을 밖으로 나왔다가 엘프사냥꾼에게 잡힌 불쌍한 신세였다. 소년은 물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지만 엘프사냥꾼이 마나를 억제하는 수갑으로 목에 채우는 바람에 아무런 힘도 사용할 수 없었다.
엘프사냥꾼들의 저택 지하엔 소년과 같은 처지의 엘프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수갑에 채워진 채 팔려갈 날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였다.
소년 역시 참혹한 나날을 보내다 우연히 수갑을 풀고 탈출한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며칠이나 굶었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그래서 몰래 주점의 과일을 훔쳐 먹다 병규에게 샤도우로 오인 받아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병규와 호랭이는 분노했다.
소년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거란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노예라니. 이건 정말 최악의 얘기가 아닌가.
팔려간 엘프들의 처우에 대해 들었을 땐, 분노를 넘어 증오를 느껴야 했다.
엘프들은 보통 돈 많은 귀족의 노예로 팔려간다. 이곳에서 그들은 말도 못할 고초를 겪게 된다.
엘프들은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매우 아름다웠다. 때문에 엘프들을 구하는 귀족들은 대부분 그들을 성노예로 사용한다.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가 된 것도 억울한데 성노예라니.
“호랭이.”
호랭이를 부르는 병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가 뒷말을 잇기도 전에 호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허나 호랭이 다소 냉정한 음성으로 현실을 깨우쳐주었다.
“네가 애쓴다고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알고는 있어요.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병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그가 아무리 발악을 한다 하더라도 대륙의 엘프들을 모두 해방시킬 수는 없다. 고작 눈에 밟히는 몇 명을 구해내는게 다일터.
어쩌면 엘프들을 구해주는 행동자체가 다른 차원의 쓸데없는 간섭이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호랭이가 그의 손에 발을 올렸다. 힘없는 고개로 물끄러미 쳐다보니 입가를 좌우로 늘리며 빙그레 웃어준다.
“분명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의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 한, 영원히 변하지 않을 일이겠지. 허나 아무리 쓸모없는 짓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부조리를 모른 척 지나치는 것 또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지?”
“!”
침울해하던 병규의 눈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호랭이 또한 그를 따라 웃었다.
“하하. 이래서 제가 호랭이를 좋아한다니까요.”
병규는 호랭이를 덜렁 들어올리며 빙글빙글 맴을 돌았다.
“이, 이놈. 위대하신 신선님에게 이 무슨 불경한 짓이냐!”
호랭이는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생전 처음 만난, 그것도 도둑질을 하던 자리에 나타는 청년이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것도 모두를 구해주겠다며.
그에겐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엘프인 그보다 훨씬 빠른 다리, 그리고 팔락이는 귀.
무엇보다 귀여운 신수를 모시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하지만 아직 불안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소년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산 소년이지만 신수를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상상과 달리 신수는 작았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하얀 털. 동그랗고 큰 두 눈.
애써 위엄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 귀여워 보인다.
신수의 내면에서 배어 나오는 신령스런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신수라는 사실을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가자.”
신수와 웃고 떠들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아직 결정을 못 내렸다.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정말로 그가 모두를 구해줄 수 있을까?
소년에겐 반드시 해야만 할 임무가 있었다. 빠른 시간 내에 엘프마을에 이 일을 알리는 것. 그래서 지하에 갇혀 있는 엘프들을 구해야 한다.
갇혀 있는 엘프들이 언제 팔려가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시가 급하다.
하지만 여기서 엘프 마을까지는 너무 멀고 험한 고난이 가로막고 있었다.
붉은대지.
홀로 헤치고 가기엔 너무 버거운 장벽이다.
그는 이제 막 세상에 첫 발을 들인 엘프다. 그에게 세상은 두렵고 위험한 것들로 가득한 지옥이었다.
그러던 차에 손을 내미는 이 사람.
이 역시 인간이다.
그에게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엘프사냥꾼과 같은.
믿을 수 있을까?
엘프는 천성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그의 감정만은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엘프사냥꾼은...... 수가 굉장히 많아요.”
소년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적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다.
귀를 파닥거릴 줄 아는 사람과 신수 한 마리로 무얼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믿고 싶어졌다.
소년은 조심 조심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손끝으로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왔다.
얼어붙은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주인님. 어디 가세요. 샤바?”
소년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머리의 소년이 불쑥 튀어나왔다.
“헉!”
소년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가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다니.
병규라는 남자에 이어 두 번째 맞닥뜨린 충격이었다.
“괜찮아. 같은 편이란다.”
몸을 움츠린 소년을 그가 가볍게 들어 목마를 태웠다. 그리고는 검은 머리의 소년에게 친근한 어투로 물었다.
“구출작전이다. 너도 갈 테냐?”
“주인님도 가는 거예요. 샤바?”
“그래.”
“그럼 당연히 가야죠. 샤바.”
소년이 보기에 검은 머리칼의 소년은 그가 간다고 하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것 같았다.
새벽의 으슬한 한기가 한층 두터워졌다.
어둠이 차갑게 내려앉은 거리.
병규는 소년을 등에 업은 채 무서운 속도로 어둠을 가르며 내달렸다.
쉬이익.
귓가를 스치는 맹렬한 바람소리.
소년은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숲에서라면 그 무엇보다도 빠르다는 엘프다. 하지만 그런 소년의 병규의 가공할 만한 움직임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엘프 한 명을 등에 업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몸놀림이 이토록 가볍다니.
마치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이다.
병규가 몸을 날린 지 채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꽤 잘 사는 집구석이잖아? 하여간 꼭 있는 놈들이 뒤가 더 구리다니깐.”
소년이 가리킨 집은 기괴함이 느껴지는 이층 저택이었다.
병규는 준비해 온 천으로 얼굴을 감쌌다.
먼젓번의 경험으로 이미 위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상태다.
샤바는 위장이 필요 없었다.
병규의 귀로 기척을 읽지 못하는 유일한 생물이 바로 샤바다.
평범한 인간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평생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늦기 전에 빨리 일을 벌려보자.”
병규는 소년의 손을 잡은 채, 저택의 음울한 그림자 속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간 꼬맹이를 아직도 못 찾았단 말이냐!”
렉스는 쾅 소리 나게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호통에 수하들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렉스의 포악한 성격은 익히 근방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오늘같이 최악의 기분 상태일 때 수하를 한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저, 렉스님. 아직 멀리는 도망가지 못했을 겁니다. 곧 잡아들일 테니, 그만 화를 거두십시오.”
수하들 중 하나가 주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날을 너무 잘못 골랐다.
“이런 망할 자식! 지금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 당장 오늘이라도 소공자가 도착할지 모르는 판에! 네가 소공자에게 엘프 꼬맹이가 도망갔다고 내 대신 얘기해 줄래? 앙!”
욕지기와 함께 수정으로 만들어진 쟁반이 날아갔다. 용기 있게 의견을 말한 사내의 코는 비수처럼 날아든 쟁반에 처참하게 뭉개졌다.
“빨리 찾아! 동이 틀 때까지 못 찾으면 꼬맹이 대신 네놈들 목에 수갑을 채울 줄 알아!”
렉스의 엄포에 수하들은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쌍. 시답지 않은 것들.”
렉스는 뒤룩뒤룩 살찐 몸뚱이를 의자에 밀어 넣으며 짜증을 연발했다.
어제만 해도 그의 기분은 최고였다.
소공자의 밀명을 받고 엘프 사냥을 시작한 이후로 최고의 성과물이 그의 저택 지하에 감금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소공자에게 엘프들을 넘기고 누런 금화만 받아 챙기면 되는 것이었는데, 하필 일의 막바지에 망할놈의 엘프 꼬맹이가 탈출할 줄이야.
술에 진탕 취한 간수 녀석의 배가 아프다는 말에 속아 녀석을 우리 밖으로 내보낸 것이 원흉이었다. 물론 엘프 꼬맹이를 놓아준 그 멍청한 녀석의 배를 갈라 복도에 널어 놓았지만, 치솟는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젠장. 젠장. 귀찮게 됐어. 만약 이 일이 성주에게라도 알려지는 날에는.......”
렉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린다.
트라우마 성을 비롯한 아이린 왕국에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엘프나 드워프 같은 유사인간에 대한 유괴는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오죽하면 타국에서 아이린 왕국을 요정의 나라라 칭할까.
만약 그 꼬맹이 엘프가 이곳의 일을 까발린다면, 일이 매우 골치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그 꼬맹일 잡아야 해.”
렉스의 두 눈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냥의 최대 성과는 그 꼬맹이다. 꼬맹이에 비하면 나머지 엘프들은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그나마 소공자가 늦는 것이 다행이군.’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늦어도 어제 정도에 도착했을 소공자가 이번따라 많이 늦는다.
‘하늘이 도왔어.’
만약 소공자가 정상적으로 도착하고, 일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다면.......
“끄응.”
렉스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의 성격이 아무리 거칠고 더럽다고 해도 소공자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소공자는 잔인한 사람이다.
웃으며 사람의 목을 베는 미치광이다. 그런 미친 작자에게 그런 절대의 권력이 주어진 것부터가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 꼬맹이를 빨리 잡아야 해. 소공자가 오기 전에 어떡해서든.”
소공자의 희끄무레한 얼굴이 떠오르자 렉스는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씨앙. 주위에 답답한 녀석들밖에 없으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군. 에잉.”
답답한 마음에 방안을 서성일 때다.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가 보군.”
음산한 음성이 렉스의 귀를 자극했다.
언제 들어왔던가.
은색의 머리를 빛내고 있는 사내가 그의 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오. 카리오스. 그대가 왔군.”
렉스는 거만한 사내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커녕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카리오스는 그가 이번 일로 특별히 초빙한 특급 어세신이었던 것이다.
"오늘따라 달빛이 차군."
은발의 사내는 창가로 비치는 달을 보며 술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피처럼 붉은 술이 목구멍을 화끈 달구고,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불을 지른다.
술병을 본 렉스의 눈썹 끝이 꿈틀 기울어졌다.
카리오스가 마시고 있는 술은 드래곤 블레이드라 불리는 것으로 돈 주고도 못살 귀한 물건이다.
원래는 그의 벽장 속에 고이 모셔져 있어야 할 물건인데, 언제 어떻게 찾아냈는지 카리오스가 태연스레 마시고 있는 것이다.
카리오스가 아끼던 술을 맹물 마시듯 퍼 마시자 렉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의 빛은 카리오스가 쳐다보기 무섭게 비굴한 미소로 변질되었다.
"확실히 달빛이 이상한 것 같군."
"......내가 할 일이 무엇이오?"
카리오스가 축축한 음성으로 물었다.
"헤헤. 아주아주 간단한 일일세. 그저 작은 꼬맹이 하나를 잡아주면 되는 손쉬운 일이지."
"손쉬운 일이라."
카리오스의 음성에서 묘한 여운이 느껴졌다. 이어 그의 파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음성은 차갑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내가 어세신일을 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소. 무엇인지 아시오?"
"헤헤. 나는 어세신이 아니라 도무지 모르겠군. 그래, 무엇을 느꼈는가?"
"의뢰주가 쉽다고 말하는 일일수록 뒤가 구리다는 사실."
술병에 담긴 독주만큼이나 직설적인 독설.
렉스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그러나 그 역시 인생을 허투로 살아온 인물은 아니다. 긴장한 기색은 이내 얼굴에서 사라지고, 대신 그 빈자리를 간사한 웃음이 차지했다.
"헤헤헤. 모르겠네. 모르겠어.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흠."
렉스의 뻔뻔한 태도에 카리오스는 나지막한 비음을 흘렸다.
"헤헤. 내가 자네에게 할 말을 아까도, 지금도 한 가지 뿐일세. 이번 일은 꼬맹이 하나를 잡으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야. 물론 보수는 제대로 쳐 주겠네."
"......."
렉스의 짜증나는 음성을 조용히 귓가로 흘리며, 카리오스는 입안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어느새 술병은 비어 버렸다.
술병을 거칠게 집어던진 그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쥐를 잡으러 가볼까?"
한 방울로도 취한다는 독주를 무려 한 병이나 마셨건만, 그의 걸음걸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얼굴 가득 차 오른 것은 싸늘한 냉기였다.
저택의 내부는 부산스러웠다.
새벽달이 기우는 시각임에도 횃불이 저택 곳곳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으며, 사방에서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병규의 침입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움직임은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자연스러웠고, 음울한 달빛처럼 은밀했다.
엘프들이 갇혀 있는 곳은 저택의 지하였다.
병규는 감시의 눈길을 피해 단숨에 지하까지 잠입할 수 있었다.
엘프들이 갇혀 있는 지하 석실 앞의 괴기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철창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감시병 둘.
감시병들이 갑자기 잠에 빠지지 않는 한 흔적 없이 침입하기란 불가능한 상황.
'어쩔 수 없지.'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그가 막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소년이 그의 손을 꼭 잡아왔다.
분해서일까. 아니면 갇혀 있던 동안의 괴로운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아이의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애써 이빨을 악물며 몸의 떨림을 참고 있었지만 손끝을 통해 아이의 참담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안심해.'
병규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끝난다.'
소년을 진정시킨 병규는 박쥐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달렸다.
순식간에 사내들의 머리 위까지 이동한 그는 어둠이 빛을 삼키듯 사내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퍽. 퍽.
두 번의 짧은 타격음.
사내들은 썩은 부대자루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간단히 감시병들을 처리한 병규는 철창의 문을 흔들어 보았다.
철컹.
당연하다는 듯이 잠겨 있었다.
병규는 굳이 열쇠를 찾지 않았다.
몹쓸 일에 쓰이는 철창이다.
다시는 못 쓰게 철저하게 박살내고 싶었다.
"요수의 발톱."
부아앙.
그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한 자나 치솟았다.
병규는 나직하게 우는 요수의 발톱을 철창 속에 휙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젓가락으로 물을 젓든 가볍게 휘둘렀다.
스겅스겅.
놀랍게도 그 가벼운 동작에 철창이 맥없이 잘려져 텅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년은 이제 더 놀랄 기운도 없었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잘려진 철창과 요수의 발톱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손끝에서 빛이 나오는 인간이라니.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괴사였다.
'정말 인간 맞아?'
소년의 혼란은 점점 가중되고 있었다.
철창 안은 희미한 횃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엘프는커녕 작은 벌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소년은 절망 어린 탄식을 터트렸다.
어제만 해도 애처로운 엘프들이 애처로운 얼굴로 갇혀있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싹 사라지고 없다니.
"너무 늦었어."
털썩.
망연자실한 소년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창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한쪽이 찡하게 아파왔다.
그때 한줄기 구원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아직 여기 있다.”
병규였다.
놀란 소년이 그를 바라보았다. 간절한 소년의 눈빛에 병규는 씩 웃으며 석실의 한쪽 벽을 손가락질했다.
“저쪽에서 다수의 숨소리가 들려.”
소년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불신이 맺혔다.
엘프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인간이 들었다고?
오크가 오우거와 쎄쎄쎄를 했다는 소리보다 믿기 힘든 말이다.
그런 소년을 보며 병규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줘야 믿을 것 같다.
석실 벽을 차분히 더듬어가던 그는 유난히 손때가 많이 묻어있는 벽돌을 찾아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었다.
그그긍.
소음과 함께 한쪽 벽이 돌아가며 안쪽으로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엘프들은 그곳에 있었다.
“저, 정말이군요.”
소년은 새삼스런 눈으로 병규를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엘프 보다 청각이 뛰어난 존재할 줄이야. 병규를 만난 후로 계속 놀라기만 하는 소년이었다.
한편 비밀문 안쪽에 갇혀 있는 엘프들을 본 병규는 충격의 파도에 휩싸인 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죽어 있는 눈빛.
축 쳐진 귀
굽어진 어깨.
그리고 그들의 목에 채워진 칙칙한 빛깔의 강철 수갑.
빛 한 점 없는 곳에 갇혀 있는 엘프들의 모습은 시든 꽃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악독한 놈들.”
병규는 치를 떨었다. 호랭이 역시 한숨을 쉬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세계나 참으로 이기적이로구나.”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겐 말도 못하게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소년을 포함하여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엘프들은 모두 열 명이었다. 병규는 그들을 데리고 조심조심 저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꽤 많은 수임에도 이동하는 데 소음이 거의 일지 않았다. 엘프들의 걸음걸이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조용했다.
‘잘하면 아무런 말썽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겠는걸?’
일단은 엘프들을 구하는 것이 먼저다. 엘프를 노예로 부리고 있는 사냥꾼들에 대한 징계는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게 엘프들과 함께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우뚝.
맨 선두에서 엘프들을 이끌고 있던 병규의 발이 갑자기 멈춰졌다.
“?”
그의 뒤를 따르던 소년이 의아한 얼굴로 병규의 등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의 앞을 살폈다.
“헛.”
소년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지하실의 출입구.
저택의 사병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겨누고 있는 십여 개의 활. 그리고 그 뒤에 쭉 도열해 있는 삼십여 명의 병사들.
‘언제 들킨 것일까?’
병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침입은 완벽했다.
감시병들의 이목에 걸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사실은 이러했다.
원래 엘프들이 갇힌 지하실엔 알람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하의 비밀문을 작동시키면 자동으로 렉스의 침실에 신호가 가게 되어 있었는데, 병규는 그걸 몰랐던 것이다.
마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긴 실수였다.
“으흐흐흐.”
뒤쪽, 안전한 곳에서 음흉한 눈으로 병규와 엘프들을 쭉 훑어보고 있던 배불뚝이 중년인의 입에서 득의의 웃음을 흘러나왔다.
그는 물론 렉스였다.
카즈엘을 본 렉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크흐흐흐. 도망친 꼬맹이가 제 발로 다시 돌아오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크흐흐흐흣.”
웃을 때마다 그의 배가 파도처럼 심하게 출렁거렸다.
기름기 가득한 그의 지방에 괴이한 웃음소리까지.
한마디로 역겨운 인간이었다.
병규의 얼굴이 대뜸 구겨졌다.
“으, 느물거려. 내 평생 저렇게 재수 없게 웃는 인간은 처음이네.”
꿈틀.
병규의 목소리를 들은 렉스의 안면살덩이가 파도를 친다. 그는 기괴한 표정으로 병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엘프는 아닌 것 같은데. 네놈은 누구냐!”
“흥. 그건 알 것 없어.”
얼굴을 가린 병규는 배짱을 부렸다.
렉스의 안면근육이 다시 한 번 파도를 쳤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들어왔다.
“하긴 네놈이 누구건 상관없지. 처리하면 그뿐이니까.”
딱!
렉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검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려왔다. 횃불에 반사된 30여 개의 검신들이 시퍼렇게 빛을 발했지만 병규는 두렵지 않았다.
검을 든 병사들의 움직임은 여관에서 만난 양아치들과 다를 바 없이 허술했고, 자신을 겨눈 활 또한 엉성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피하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엘프들이 걱정이었다.
그는 탁월한 스피드로 피할 수 있지만 혹여 눈먼 화살이 엘프에게 맞을까 걱정되었다.
병규가 엘프들 때문에 주춤거리고 있을 때다.
궁수들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인영이 쓰윽 하고 나타났다.
샤바였다.
때는 한창 병규와 검사들 간의 대결이 펼쳐지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아무도 그의 출현을 눈치 채지 못했다.
‘좋구나.’
궁수들의 둥그스름한 뒤통수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샤바의 손에는 예의 짱돌이 쥐어져 있었다.
휘리릭!
돌연 짱돌이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한 여름 밤의 소나기처럼 궁수들의 뒤통수를 흡족한 표정으로 작렬하는 짱돌의 물결!
쾅쾅쾅쾅쾅.
벼락치는 소음에 놀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보았을 땐, 궁수들은 이미 모두 쓰러진 상태였고, 일을 저지른 샤바 또한 어둠 속에 녹아든 후였다.
영문을 알 길 없는 렉스의 눈엔 궁수들이 갑자기 픽픽 쓰러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이 녀석들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하늘을 쳐다보니 별똥별 하나가 꼬리를 끌며 서산 너머로 떨어진다.
‘설마 운석이?’
렉스는 황당한 얼굴로 애꿏은 하늘만 쳐다보았다.
“녀석 제법이잖아.”
엄지를 추켜세운 병규는 와 하고 달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궁수들이 치워졌으니 이제 마음껏 싸울 수 있었다.
휘익!
그의 몸이 푹 꺼지는 듯하더니, 돌연 한 줄기 광풍이 병사들 사이를 몰아쳤다.
우드득.
“아악.”
끄극.
“크아아. 내 팔. 팔이......!.”
바람이 불어칠 때마다 병사들의 팔 다리 관절이 빠져 땅바닥을 뒹굴었다. 병사들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병규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모두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병규가 그렇게 질풍처럼 날뛰고, 소년까지 물의 하급정령을 부리며 병사들을 교란시키니 눈 깜짝할 사이에 렉스의 사병들은 모두 땅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게 되었다.
“다, 다리가.”
“윽.”
“하악. 하악.”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팔다리 관절이 빠진 자들의 비명소리는 시체가 산처럼 쌓인 전장의 절규만큼이나 처절했다.
“뭐, 뭐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렉스는 눈 몇 번 깜빡일 사이에 쓰러진 자신의 사병들을 보며 눈을 허옇게 떴다.
“이, 인간이냐?”
병규를 손가락질하는 그의 음성이 두려움으로 벌벌 떨렸다. 손을 툭툭 털고 있던 병규는 그제야 생각난 듯 성큼 걸음을 옮겼다.
“참 그러고 보니 당신을 잊었군.”
착 가라앉은 병규의 음성은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히, 히끅.”
렉스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을 허우적대며 철퍼덕 엎어졌다.
믿었던 수하들이 저 괴물 같은 놈에게 모두 쓰러져 버렸으니, 이제 누가 자신을 지켜줄 것인가.
그때, 등 뒤에서 조소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렉스 자작님. 보기 안 좋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싸늘한 달그림자를 밟으며 카리오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를 본 렉스는 화색이 만연하여 껄껄 웃었다.
“그, 그렇지. 크헤헤. 자네가 있었지. 어서 저, 저 녀석을 처리해주게.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의뢰비의 두배, 아니 다섯 배를 주겠네.”
“후후. 애송이 목숨 값 하나에 다섯 배라. 꽤 남는 장사로군.”
스산한 웃음을 띤 채 은발의 사내가 천천히 병규에게 걸어갔다.
병규는 그의 걸음걸이에 주목했다.
자연스런 걸음이다.
한데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엘프들보다 오히려 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게감 없는 그림자 하나만 을씨년스럽게 걸어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사내의 전신에서 회오리치듯 뿜어져 나오는 기운.
병규의 마음속에 적신호가 밝혀졌다.
‘이 녀석은 강하다.’
붉은 대지에서 만난 켄트라는 녀석보다도 훨씬 더.
진짜배기인 것이다.
은발의 사내는 바짝 긴장하는 병규를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적어도 상대의 강함 정도는 알고 있는 녀석인 것 같군.”
다음 순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마자 어둠에 묻혀 버리듯 그의 몸이 사라졌다.
팔락팔락.
병규의 귀가 맹렬하게 팔락였다.
“뒤!”
뒤통수를 찔러오는 섬뜩한 기운에 병규는 쏘아진 탄환처럼 앞으로 몸을 날렸다.
쉬익.
날카로운 기운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베고 지나갔다.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병규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만약 방금 전에 피하지 못했자면 그대로 머리통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사람은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려온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와 싸우는 기분이다.
병규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난 환한 곳에 있는데. 적은 어두운 곳에서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게 불리한 입장에서 싸우는 것은 처음이다.’
“어디까지 피할 수 있는지 볼까?”
쉬악!
밤공기를 가르는 차가운 소음.
병규는 풍차처럼 회전하며 신형을 허공으로 빼 올렸다. 번뜩하는 검광이 그의 다리가 있던 자리를 거침없이 쓸어갔다.
이번에도 간발의 차.
‘대단한 자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지구에 있을 때도, 일본의 닌자나 중국의 자객들과 붙어 보았지만 이 자는 그들보다 몇 배나 수준이 높았다.
아주 미세한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아 간발의 차로 피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어떻게 상대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창 긴장을 곧추세울 때다.
“뭘 그리 힘들게 싸우냐”
어깨 위의 호랭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병규는 기가 막혔다.
자신은 이렇듯 피가 바짝 마를 상황인데, 산책이라도 즐기는 듯한 호랭이의 한가한 음성은 대체 뭐란 말인가.
“싸우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병규가 따지듯 묻자 호랭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바보 녀석. 뭐 하러 골치 아프게 살수 녀석과 싸우는 거냐? 그런 건 전문가에게 그냥 맡겨버리면 편하잖아.“
“전문가?”
호랭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기울이던 병규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손바닥을 두드렸다.
“아! 샤바.”
그렇다.
그에게는 이쪽 방면에 최고 전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절정을 넘어선 정도의 초절정고수가.
“샤바야.”
병규는 청아한 음성으로 전문가를 불렀다.
“네. 주인님. 샤바.”
그의 그림자 속에서 샤바가 불쑥 튀어나왔다. 샤바가 모습을 드러내자 부채처럼 맹렬히 파닥거리던 그의 귀가 움직임을 멈췄다.
무섭게 이동하고 있던 카리오스가 걸음을 멈춘 것이다.
병규는 속으로 흐흐 하고 웃었다.
놈은 분명 샤바의 존재에 동요하고 있을 것이다. 하긴 지금까지 전혀 기척도 못 느낀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적잖이 당황했을 테지.
한 방 먹였다는 짜릿한 쾌감을 만끽하며 병규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어험. 샤바야. 방금 전에 나와 놀고 있던 음침한 아저씨 알지?”
“네. 샤바.”
주인의 의도를 모르는 샤바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험험. 그 아저씨가 너와 놀고 싶다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정말요. 샤바?”
병규의 말에 샤바는 즐거운 듯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그런데 무슨 놀이요?”
“글세 무슨 놀이가 좋을까?”
샤바의 물음에 병규와 호랭이가 씨익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헛!”
두 사람에게서 농염하게 풍기는 사악한 기운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화들짝 놀랄 지경이었다.
“숨바꼭질!”
호랭이와 병규는 동시에 말했다.
“에? 숨바꼭질이 뭐에요. 샤바?”
“뭐 간단하게 말하면 상대를 먼저 잡아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지.”
“와. 재미있겠네요. 샤바.”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 샤바는 저택의 그림자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아저씨가 먼저 도망 다녀요. 내가 먼저 잡을 테니까. 샤바.”
파닥.
병규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
“흐흐흐.”
그의 입에서 음흉한 음악소리가 새어나온다. 카리오스가 움찔 놀라는 기색이 잡혔던 것이다.
그가 가리킨 방향은 정확히 카리오스가 숨어 있는 곳이었다.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허무할 정도로 쉽게 들켰으니 심장이 덜컥 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
병규의 신호와 함께 샤바의 모습이 스륵 사라졌다. 동시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카리오스도 신속하게 자리를 이탈했다.
드디어 술래잡기를 빙자한 은신술 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으하하. 가뿐하네.”
병규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기지개로 가볍게 몸을 푼 병규는 득의양양한 웃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배불뚝이 손님이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자. 손님. 이제부터 차분하게 면담 좀 해 볼까요?”
“히, 히익!”
병규의 은근한 음성에 렉스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병규가 렉스의 멱살을 쥐어뜯으며 즐거운 면담(?)시간을 가지는 동안, 저택의 뒤쪽 정원에서는 그 어떤 싸움보다 빠르고 치열한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쪽만의 심각한 오해였지만.
“헉헉.”
어느새 카리오스의 숨은 거칠어져 있었다.
표가 날 정도로 숨이 거칠어졌다는 것은 어세신에겐 치명적인 허점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기척을 상대방에게 훤히 읽힐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세신의 숨이 이토록 거칠어졌다는 말은 곧 그만큼 그가 궁지에 몰렸다는 말이 된다.
“이럴 수가.”
카리오스는 경악했다.
이렇게 숨이 턱에 찰 때까지 정신없이 뛰어본 게 언제였던가.
마일드의 일곱 사신에 든 이후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를 상대하고 있는 인물이 고작해야 십 육칠 세 가량의 소년이라는 점이다.
‘저 나이에 이런 실력을 가질 순 없다. 분명 지극히 높은 수양으로 다시 어려진 것일 거야.’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들은 실제로 젊어진다는 기록도 있다.
소년 역시 그런 부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 소년의 아름다운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년의 얼굴은 다시 젊어진 것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웠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처음 소년이 놀이를 시작하자며 말을 걸어올 때 이후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소년은 지금 …… 그의 등 뒤를 귀신같이 따르고 있었다.
그는 미칠 것 같았다.
죽어라고 달려도, 귀신도 울고 갈 정도의 은신술로 숨어 봐도, 심지어 미친놈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을 돌아도 여전히 ‘샤바샤바’ 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것이다.
목을 죄어오는 공포.
살수가 상대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만약 샤바샤바 하는 소년에게 죽일 마음만 있다면 그는 이미 수백 번도 더 죽었을 것이다.
입안이 바싹바싹 탄다.
전신은 이미 식은 땀으로 목욕을 할 정도로 푹 젖었다.
자신은 이렇게 피가 마르는 긴장감에 정신마저 몽롱해질 지경인데.......
‘정말 세상은 넓구나. 설마 이런 고수가 있을 줄이야.’
현재 대륙 제일의 어세신 길드는 바로 ‘마일드의 일곱 사신’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다. 그런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그를 설마 어린애 다루듯 하는 고수가 있을 줄이야.
‘설마 그는 어세신 마스터란 말인가!’
마법사들에게 현자가 있고, 검사들에게 소드 마스터가 있듯이 그들에게도 그와 비슷한 전설상의 존재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어세신 마스터다.
수천 년 대륙 역사에 어세신 마스터가 출현한 것은 단 한 번뿐. 때문에 어세신들은 어세신 마스터를 그저 얘기하기 좋아하는 노인네들이 만든 가공의 경지로 보았다.
카리오스 자신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일곱 어세신 중의 하나다. 그런 자신을 아이 데리고 놀듯 하는 초절한 소년의 능력이 그의 생각에 확신을 두었다.
상대의 정체를 깨닫자 카리오스는 더 이상 도망갈 마음이 사라졌다.
‘망할!’
소년의 탈을 쓴 어세신 마스터가 이젠 샤바샤바 소리로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차라리 죽여라!”
카리오스는 마침내 포기하고 악을 질렀다.
어세신이 되기 위한 그 끔찍했던 고행들.
어세신 마스터 앞에선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허무했다.
일생을 걸었던 어세신의 길이 이렇듯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그가 비장하게 외친 후다.
턱.
어세신 마스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카리오스는 흠칫했지만 눈을 감고 담담히 죽음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참 처절한 날들이었지.’
카리오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왜 이리 허전하고 홀가분한지.
그때 어세신 마스터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왜 아저씨를 죽여요? 죽이면 더 이상 놀지 못하잖아요. 전 남을 죽이지 않아요. 백성들로 묻어버리던가, 면담을 시키기는 해도.”
“......?”
무슨 말일까?
어세신 마스터가 한 말의 의미를 카리오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안 죽인다는 것일까.
더 이상 못 논다는 말은 또 뭐지?
백성들로 묻어버리고, 면담을 시킨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나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인가?’
순간 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논다는 것은 어세신의 마음가짐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가볍게 즐기듯이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최근 그는 사람을 죽이는 자신의 일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은 어세신 일을 하면 할수록 더 커져 급기야 술을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 괴로움을 겪고 있던 그에게 샤바의 논다는 말은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은 것처럼 밝은 광명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렇군, 논다는 말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과 백성들로 묻어버리고 면담을 시킨다는 말은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혹시 백성을 위하라는 말이 아닐까? 백성들의 뜻을 읽고 그들이 묻어버리고 싶어하는 악인들에게 칼을 들이밀라는 말이 아닐까?
그렇군. 악인이라면 마음이 가벼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의 악인을 죽여 만 명의 고통받는 민중을 구하리라 하고 외쳤던 옛 현자의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돌연 카리오스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전율.
마치 진리를 얻은 기쁨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면서 목이 잠기고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어졌다.
그렇게 진리(?)를 깨친 카리오스는 잠시 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차분히 뒤를 돌아보자 어세신 마스터가 그를 보며 방긋 미소를 짓는다. 그도 소년처럼 입가에 맑은 미소를 지었다.
소년이 지은 미소 한 조각, 이 미소 하나로 그는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가 있었다.
“마스터. 신변을 정리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런 부탁의 말.
고개를 갸웃거리던 샤바는 시간을 달라는 말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란 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니 굳이 더 주고 말 것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요. 샤바. 마음대로 가지세요. 샤바샤바.”
대범한 샤바의 말에 카리오스는 감동을 받은 듯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열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마스터.”
절을 하며 극도의 존경을 보인 그는 홀가분한 얼굴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마스터가 뭐지?”
카리오스를 보낸 샤바는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몰라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숲의 숨결이 다할 때까지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차가운 달빛 아래, 엘프들은 병규를 향해 고마운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하하.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병규는 어색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년, 카즈엘은 작은 미소를 그렸다.
‘이상한 사람.’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정말로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무서웠던 바깥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
엘프 사냥꾼에게 잡혔을 때, 그는 절망했다.
간신히 지하 감옥을 탈출했을 때는 기쁨보다 다급한 마음뿐이었고, 과일을 훔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무서웠다.
그리고 그에게 업힌 채 엘프들을 구하러 저택에 잠입했을 때엔 불안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끝나고 엘프들과 함께 그에게 작별을 고하는 지금은.......
따뜻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준 것이다.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의 편린은.
병규를 조용히 쳐다보던 소년은 문득 결심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병규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소년의 갑작스런 물음에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병...... 아니 카피야.”
“카피.......”
소년은 잠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눈을 감고 뜻을 음미하던 그는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카피 님.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께 엘프의 맹세를 해도 될까요?”
고운 눈으로 물어오는 소년. 병규는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하하 하고 웃으며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고마워요.”
씽긋 웃은 소년은 조용히 병규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새벽달의 은은함을 담아 아름다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미로운 입맞춤.
“나. 숲의 발걸음 카즈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카피. 당신을 숲의 소중한 동반자로 인정합니다. 이 약속은 숲의 속삭임이 다하는 날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속삭이는 듯한 카즈엘의 목소리에 새들이 모여들고, 바람이 숨을 죽였다. 구름은 숨을 멈추고, 달빛은 깊어지기만 했다.
마치 그의 목소리에 자연의 모든 것이 공명하는 듯했다.
그 순간 병규는 만약에 마법이 있다면 그의 음성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법일 거라고 생각했다.
“숲의 바람이 그대를 인도할 때, 그때 다시 운명의 시계추가 흐를 겁니다.”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카즈엘은 엘프들의 수호를 받으며 떠났다.
병규는 석상처럼 굳은 채, 그들이 떠나가는 것조차 몰랐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을 지나 아침으로 흘러갔고, 밝은 아침 햇살이 비치자 병규의 몸을 묶어 두었던 마법이 풀렸다.
털썩.
굳었던 몸이 풀리자마자 병규는 엎어졌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절망 어린 탄식을 흘렸다.
“또......또! 남자와 ......했어. 어째서......난 맨날 남자랑만 하게 되는 거지?”
급기야 얼마나 서러웠던지 병규는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 본 호랭이는 ‘카즈엘이 사실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란다’라고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때만 해도 병규와 호랭이는 하이엘프의 맹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 허탈해.”
엘프들을 보내고 여관으로 돌아온 병규는 연신 ‘허탈해’만 연발했다.
정말로 허탈했다.
의뢰도 미루고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 밤새도록 그 고생을 했는데, 기껏 보답으로 돌아온 게 사내아이와의 길고도 긴...딥키스 라니. 더더욱 절망스러웠던 것은 그와의 키스가 은근히 좋았다는 것이었다.
“아. 나 혹시 취향이 그쪽인 건 아닐까?”
병규는 탁자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절규했다.
마침 아침식사를 위해 내려오던 일행이 그 모습을 보고 반색을 했다.
“오. 돌아왔구나. 어떻게 됐냐?”
간밤의 일을 물어오는 일행의 질문에 병규는 퀭한 눈으로 ‘최악!’이라는 두 마디만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역시 잘 안 된 모양이군.”
“하긴 초보에겐 무리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실의에 젖은 병규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는 제이콥과 나머지 일행들이었다.
실의에 빠진 병규는 그날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비로소 밍그적거리며 일어났다.
그가 일층 식당에서 밥 대신 텁텁한 빵 조각을 씹고 있을 때다.
용병길드에 다녀온 제이콥이 기쁜 얼굴로 그의 등을 냅다 후려갈겼다.
“이녀석.”
퍽!
그 무지막지한 손길에 병규는 그대로 불에 구운 오징어가 되었다.
“아뜨뜨. 갑자기 왜 때리는 거예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따져 묻는데, 제이콥은 오히려 실실 수상한 웃음을 흘린다.
“요 엉큼쟁이.”
“엉큼쟁이? 그게 무슨 말이예요?”
제이콥의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병규는 오만인상을 다 쓰며 쨍쨍 악을 썼다.
“어쭈굴. 끝까지 모른 체하네. 욘석.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릴 하는지 두고 보자.”
음흉한 말과 함께 제이콥이 내민 것은 동으로 만들어진 둥근 패 두 개였다.
금속 패에는 각각 카피와 샤바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길드 소속의 용병임을 증명한다는 내용이 길드장의 서명과 함께 간략하게 들어 있었다.
“엥? 이게 뭐야?”
자신과 샤바의 이름으로 발급된 동패를 보며 병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반응에 제이콥은 해괴한 표정이 되었다,
“전혀 몰랐어? 용병패가 발급될 줄?”
“그럼요. 지난밤에 저희는 샤도우의 꽁무니도 못 봤단 말이에요.”
병규의 설명에 제이콥은 고개를 갸웃 했다.
“이상하네. 오늘 길드에 갔더니 홉이 이걸 주더라고. 그가 말하길 네가 엘프들을 시켜 잡은 샤도우를 길드에 넘겨주었다고 하던걸?”
“아.”
병규는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엘프들이 샤도우를 잡아준 것이다.
지난밤에 병규는 엘프 소년 카즈엘을 샤도우인 것으로 착각한 일이 있었는데, 용케 그걸 기억한 카즈엘이 구해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축하한다.”
“이제 정식 용병이 되었구나.”
“프리즘 용병단에 무능한 사람은 없어. 선배들 따라오려면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동료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얼떨떨한 병규도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야 정식으로 프리즘 용병단의 일원이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일었다.
한편, 병규가 제이콥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선 샤바가 용병패를 입에 물어보고 있었다.
따각따각.
아무리 물어봐도 동패는 씹히지도 않고 맛이 별로였다. 결국 샤바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뚱하고 내밀었다.
“먹지도 못하는 걸 받았는데 왜 좋아하는 거야, 샤바?”
늦은 시각.
트라우마의 성문이 닫히려 할 때, 십여 명의 사람들이 도망치듯 붉은 대지에서 달려왔다.
그들의 행색을 본 병사들은 쯧쯧 혀를 찼다.
“당해도 아주 오지게 당했구만.”
“허어. 거지도 상거지가 따로 없군.”
죽어라고 달려오는 그들의 행색은 십 년이 넘도록 성문을 지킨 병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오크와 백 대 일로 붙고, 곧장 트롤과 레슬링을 한 다음, 오우거와 신나는 댄스를 춘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모습과 조금은 비슷해지리라.
“무, 물을 줘.”
머리를 산발한 채 달려온 그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물 한 모금을 청했다.
병사 하나가 작은 수통을 던져주자 서로 먹으려고 난리가 났다.
그러나 거지들 중에도 우두머리는 있는 모양인지 중년의 거지가 날랜 몸놀림으로 수통을 가로채더니 푸르딩딩 다 죽어가는 금발머리 거지의 입에 물을 들이붓는다.
꿀꺽꿀꺽.
꾀죄죄한 청년의 목울대가 출렁이는 것을 나머지 일행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애타게 쳐다만 보고 있다.
그 모습을 처량한 듯 바라보던 병사들 중 한 명이 금발청년의 소매에 달린 단추를 보고 그제서야 화들짝 놀랐다.
단추에 새겨진 문양은 놀랍게도 필립 공작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흐엇.”
헛바람을 삼킨 병사는 급히 상부에 이 일을 보고했고, 잠시 후 성주가 직접 말을 달려 마중을 나왔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성주는 필립 공작가의 영식 (令息:자신보다 높은 사람의 아들을 높여 부르는 말.)인 라이트가 다 죽어가는 꼴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보고한 병사의 말처럼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었던 것이다. 라이트도 자신의 꼴을 알고 있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피했다.
“몬스터들을 만나 그만...... .”
성주는 급히 라이트 일행을 성으로 안내했다.
하루 정도 성주의 대접을 받은 라이트는 제법 회복된 모습으로 렉스 자작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가 필립 공작가를 떠나 이 먼길을 온 이유가 바로 렉스 자작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황당한 사건을 경험을 해야 했다.
렉스 자작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을 본래의 색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고, 두 눈은 물고기 눈처럼 부어 올라 튀어나왔으며, 코는 너덜너덜해진 채 엉성하게 매달려 있었다.
하물며 입을 열 때마다 부러진 이가 보였다 가려졌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렉스 자작의 처참한 모습을 본 라이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그놈이군. 지나가던 의적 에이!”
이렇게 얼굴만 골라서 착실하게 망가뜨리는 놈은 그놈밖에 없었다.
그 자신도 얼마나 망가졌던가.
성주도 대면할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록 이젠 성의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아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한 번 상처 입은 자존심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노예는?”
지나가던 의적 ‘에이’에 대한 분노로 씩씩 콧김을 뿜던 라이트가 문득 생각난 듯, 살기 어린 눈으로 물었다.
“주, 죽여주십시오.”
렉스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벌벌 떨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데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군.”
라이트는 붉은 대지에서 당한 일과 노예들이 털린 일련의 사태를 결코 단절시켜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계획적으로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놈이 있는 것이다.
까드득.
라이트는 이를 갈았다.
불연듯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자신을 향해 비아냥을 흘리던 놈의 건방진 태도.
“지나가던 의적 ‘에이’!”
무심결에 신음 같은 외침이 흘러나온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 아가리를 찢어 놓고야 말겠다.”
그의 처절한 외침은 훗날 아이린 왕국의 기반을 흔드는 대사건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