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랭이까지 사람이 된다고?
“초원이다.”
핏빛 대지 너머 파란 초지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병규는 두 손을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바람결에 파도처럼 출렁이는 초지를 보니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붉은 대지를 벗어난 것이다.
모두들 초췌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초지를 반나절쯤 더 가자, 저 멀리 흐릿하게 성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가 바로 트라우마다.”
성은 멀리서 보기보다 훨씬 거대해서 가까이서 보니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와. 높네요.”
병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물론 지구엔 이보다 수십 배는 더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했지만, 이 성은 사람의 손으로 한 층 한 층 쌓아올린 것이라, 유적을 보는 것처럼 고풍스런 느낌이 풍겼다.
“하하. 트라우마 성의 높은 성벽은 대륙제일이지.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놀라기 마련이라고.”
병규를 시골뜨기로 착각한 제이콥은 득의양양 대소를 터트렸다.
유난히 즐거워하는 모습에 병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호젤이 그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제이콥은 이 지역 토박이야. 오 년 만에 고향을 찾아온 거니 얼마나 기쁘겠니?”
“아하!”
병규는 손바닥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제이콥을 보니 헤벌쭉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기보다 온화한 사람이네.’
그를 보며 빙그레 웃는 병규였다.
“아아. 목욕이 하고 싶어.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파.”
거대한 성문이 보이자 호젤을 말 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눈앞에 욕조가 있으면 당장 뛰어들 것처럼 부산스러웠다.
하긴 목욕을 해본 지 한참 오래 되긴 했다. 붉은 대지에서는 마실 물 말고는 몸에 물을 묻혀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여자인 그녀가 그 정도였으니, 제이콥이나 고든 같은 남자들은 언제 목욕을 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치형으로 높게 세워진 성문 앞은 성안으로 들어서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참 기다려야겠는 걸.”
호젤은 말 위에 축 늘어졌다. 성문에서의 철저한 검문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목욕물 속에 몸을 담그고 싶은 호젤에겐 정말이지 기다리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때, 제이콥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저번의 그 여관 알지? 먼저 가 있어.”
“무슨 볼일이야?”
“아무래도 저걸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제이콥은 뒤쪽의 빈 말들을 턱짓했다.
처음 병규가 끌고 온 말들은 모두 열 마리였으나, 그중 한 마리는 호젤의 식탐에 의해 희생되고 현재는 아홉 마리가 남아 있었다.
눈치가 빠른 호젤은 제이콥이 무엇 때문에 자리를 비우려는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음. 알았어. 그럼 이따 봐.”
“그래.”
호젤에게 일행의 선두 자리를 넘긴 그는 병규와 샤바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말들을 처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병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갑자기 말을 처분하자고 하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장수도 아니면서 빈말을 아홉 마리나 끌고 가는 건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행동이야. 혹시나 뒤늦게 말 주인이 알게 된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성에 들어가기 전에 처분하는 것이 좋을 거야.”
“흐음. 그렇겠군요.”
제이콥의 제안에 병규는 주저 없이 말들을 넘겼다.
같이 여행하는 동안 지켜본 바, 제이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설령 그가 떼어먹고 달아난다고 해도 절대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본래부터 말들은 남의 것을 허락 없이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조금 후에 여관에서 보기로 하지.”
병규에게 말들을 인수 받은 제이콥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성벽을 따라 걸었다.
지루할 정도로 신중하게 걷다 어느 지점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곤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성벽에 다가갔다.
쿵쿵쿵쿵쿵.
처음엔 다섯 번을 두드렸다.
참시 쉬었다 두 번. 그 다음엔 세 번을 두드렸다.
그그긍.
묵직한 괴음과 함께 놀랍게도 성벽의 한쪽이 갈라졌다.
“자네로군.”
문처럼 비스듬히 열린 성벽 틈에서 나온 사내는 비쩍 마른 몸에 날카로운 안광을 가진 자였다.
“오랜만이야.”
제이콥은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지만 사내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무슨 볼일이냐?”
사내가 물었다.
“물건 좀 처분할까 해서.”
제이콥의 말에 사내는 그가 끌고 온 말들을 쓱 훑어보았다. 꼼꼼하게 확인하고, 별 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사내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소란 떨지 마라.”
“물론.”
사내의 경고에 제이콥은 매력적인 웃음을 보였다.
은밀한 출입구 안쪽은 지저분한 빈민가였다.
바람만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집들. 역한 냄새. 때가 꼬장꼬장한 어린아이들.
제이콥은 익숙한 풍경 속으로 조용히 길을 걸었다.
그가 아홉 필의 말을 끌고 찾아간 곳은 빈민촌 내에서도 가장 허름한 곳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하품을 하며 무료한 오후를 보내던 노인이 제이콥을 반갑게 맞았다.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잭.”
“정정은 .......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그런데 어쩐 일인가? 설마 실없이 노인네 얼굴을 보러 예까지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좀 처분할 게 있어서 말이죠.”
“처분할 것이라.”
노인의 시선이 제이콥이 끌고 온 말들에게로 옮겨졌다.
“흐음. 좋은 말들이군. 제대로 키웠어. 길도 잘 들인 것 같고 ....... 정상적으로 구한 것 같지는 않군.”
노인의 빠른 눈치에 제이콥은 씁쓸하게 웃었다.
“조용히 처리해 주십시오.”
“알았네. 대신 약간의 손해는 감수하겠지?”
“당연하죠.”
일일이 말들의 상태를 확인한 노인은 작은 주머니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
“이 정도면 잘 쳐준 게야.”
“네. 그런데 잭.”
제이콥은 주머니 안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또 무슨 볼일이 남았나?”
“말을 좀 구하고 싶습니다.”
“에잉? 지금 막 말을 팔자마자 또 새로 사겠다고? 그건 대체 무슨 심보인가?”
“하하. 제가 원하는 건 하자 없는 물건이죠.”
“쯧쯧.”
노인은 혀를 찼다.
“보아하니 골치 아픈 물건을 넘겨받게 된 모양이군. 제일 안쪽의 놈들로 알아서 데려가.”
노인은 곧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천막을 손짓했다.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간 제이콥은 잠시 후 두 마리의 흑마를 끌고 나왔다. 물론 병규와 샤바를 위한 말이었다.
“말 고르는 눈이 이젠 제법이구나.”
“다 잭이 가르쳐 준 거죠.”
“그래.”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제이콥에게 던져준 주머니를 다시 회수하여, 그 안에 든 돈의 반을 가져갔다.
그렇게 해서 정작 제이콥이 받은 돈은 금화 10개.
겉으로 보면 노인이 폭리를 취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어 주인이 말을 찾아올 경우 노인은 불법유통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오늘 산 아홉 마리의 말들을 모조리 고기로 처분해야 한다.
아홉 마리의 말고기 값으로 금화 10개는 굉장히 비싸게 쳐준 셈인 것이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오게나.”
“네. 잭도 잘 계세요.”
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터덜터덜 걸어가는 제이콥의 등을 지그시 응시했다.
제이콥이 말들을 이끌고 사라진 후, 병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라우마 성은 몬스터들의 성지인 붉은 대지에 인접한 도시다.
몬스터들의 습격은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일이다.
때문에 성문의 경비가 보통이 아니었다. 입성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병사들만 해도 무려 삼십. 성벽 위의 병사들까지 합치면 50명이 넘는 인원이 성문 하나에 배치된 것이다.
신분을 증명할 서류 간은 것이 하나도 없는 병규로서는 자연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걱정의 눈치를 챈 호젤이 병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빙글 웃었다.
“걱정 마. 트라우마의 병사들은 몬스터에게만 엄격해. 이곳은 상인들과 용병들의 출입이 잦아서 신분검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아. 네.”
그녀의 친절한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꾸벅했다.
사실 제이콥들만 아니라면 사람의 이목을 속이고 성안으로 침투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편이 수월했다. 그의 스피드와 샤바의 능력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귀찮더라도 프리즘 용병단에 묻어 들어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프리즘 용병단의 차례가 왔다.
호젤은 병규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태연히 성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말처럼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형식적인 질문 몇 마디를 던진 후 들여보내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나요?”
성안으로 걸음 하던 호젤이 성벽 한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폭발이라도 있었던지 성벽의 한 쪽이 허물어져,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아. 요즘 몬스터들이 갑자기 극성이라서.”
병사의 대답에 호젤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근래 들어 갑자기 몬스터들이 흉포해졌다는 소문이 있던데.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도 그런가 보죠?”
“이곳의 몬스터들도 그러냐고? 말도 말게. 가장 심한 곳이 바로 여기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원. 몬스터들이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어.”
“그건. 큰일이군요.”
호젤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서 가장 단단한 성벽이 바로 트라우마의 성벽이다. 그런 성벽에 저렇게 엉망으로 허물어진 것으로 보아 대단위 몬스터의 난동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몬스터들이 군대가 주둔한 성에 떼로 달려드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재앙이었다며 병사는 한숨을 쉬었다.
호젤은 대답해 주어 고맙다고 말해주곤 성안으로 발을 옮겼다.
“도무지 모르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호젤의 음성에 근심이 묻어났다.
“뭐가요?”
“몬스터 말이야. 왜 갑자기 날뛰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사실 몬스터는 용병들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길드로 의뢰되는 일의 절반 이상이 상단 호위나 몬스터 퇴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몬스터들이 하나같이 미쳐 날 뛰고 있었다. 이것은 직접 몬스터와 맞닥뜨려야 하는 용병들에게는 생명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소문처럼 마왕이라도 강림한 거야? 뭐야?”
호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진다며 푸념했다.
트라우마는 바호크 제국과 아마스 신성제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도시다. 때문에 붉은 대지라는 몬스터 소굴을 옆에 끼고 있어 성의 형태로 발달되기는 했지만, 그 내부는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대륙의 곳곳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시장은 활기를 넘쳤고, 잘 정리된 거리는 사람으로 득시글했다.
워낙에 유동인구가 많아서인지 성문에서부터 으리으리한 여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여관 앞 골목은 고용된 소년들의 호객행위로 소란스러웠다.
어김없이 일행에게도 소년들이 허리를 굽신거려 왔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내내 시달린 뼈마디는 빨리 쉬게 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런 차에 소년들이 달콤한 말들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러나 호젤은 죄다 무시하고 무작정 뒷골목을 방향으로 잡았다.
“여관은 그저 주인 인정 많고, 음식 맛 좋은 곳이 최고야. 겉보기 번드르르한 곳은 괜히 돈만 쓰게 된다고.”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호젤이 안내한 ‘트라우마의 새벽’이라는 이름의 여관의 주인은 배불뚝이에 인심 좋게 생긴 양반이었으니 말이다. 음식은 모르겠지만 인정은 많아 보였다.
“여 ~. 이게 누군가. 말썽쟁이 제이콥의 신부 될 사람 사람이잖아?”
프리즘 용병단을 본 여관주인 척은 대뜸 농담부터 던져왔다.
“여관 문 닫고 싶지 않다면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관둬요. 피곤하니 일단 방부터 줘요.”
“몇 개나 필요해?”
호젤은 병규와 샤바를 슬쩍 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제이콥과 고든 프리먼이 방 하나, 그리고 그녀가 하나. 마지막 남은 방은 병규와 샤바를 위한 것이었다.
“이층 끝의 전망 좋은 방들을 주지. 그런데 제이콥은?”
“곧 올 거예요. 씻고 싶으니까 목욕물 좀 부탁할 게요.”
“그러게.”
병규와 샤바의 방은 2층의 세 방중 중간이었다.
짐을 풀고 얼마 후, 제이콥이 돌아왔다. 그는 병규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말을 처분한 돈이다.”
주머니 안에는 금화 10개가 들어 있었다. 병규는 이곳의 말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 몰랐다. 하지만 제이콥이 사기를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병규는 자신의 말도 아닌데 홀랑 다 받아먹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말을 처분하시느라 고생하셨으니.......”
병규는 주머니에서 금화 5개를 꺼내어 주었다. 그의 손위에 번쩍이는 금화를 본 제이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 적나?’
병규는 금화 2개를 더 꺼냈다. 그가 내민 금화를 보며 제이콥은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애들 돈이나 뜯을 녀석으로 보이냐? 됐다. 넣어둬라. 앞으로 필요할 일이 많을 거야.”
“하지만.......”
“정 마음에 걸리면 너희들 방 값을 그 돈으로 내.”
병규는 몇 번 더 권했지만 제이콥은 한사코 거절했다.
‘욕심이 없는 녀석들인지 아니면 배포가 큰 녀석인지 도무지 모르겠니.’
밖으로 나간 제이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설마 금화를 7개씩이나 줄 줄이야. 그는 이 일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호젤이 이 일을 알면 투덜거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병규와 샤바가 목욕을 마쳤을 때, 호젤이 문을 두드렸다.
“뭐해? 밥 먹자.”
“네.”
문 앞에 프리즘 일행이 깔끔해진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가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샤바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샤바의 미모는 대단했지만 막 목욕을 한 모습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특히 여자에게 엄청난 파장을 미쳤다.
“아아. 나 녹아버릴 것 같아.”
호젤은 마치 다리뼈가 모두 녹아버린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대단하군.”
“허. 이러다 눈이 높아져 버리면 어쩌지?”
사내들의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런 현상은 식사를 내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드라센 대륙의 여관들은 대개 숙식과 숙박을 겸업했다. 트라우마의 새벽 역시 마찬가지라 한산하던 실내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용병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조심스럽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상인 일행. 양아치로 보이는 녀석들의 고함소리…….
마치 인간사의 한 부분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계단으로 내려오자마자 그렇게 시끄럽던 곳이 돌연 조용해졌다.
역시나 이번에도 샤바 때문이었다.
경악한 표정의 사람들은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샤바의 얼굴에 집중했다.
쩔겅.
정신없이 수프를 떠먹던 털보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대단한 몰입도가 아닐 수 없었다.
샤바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철없는 아이처럼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주위를 돌아볼 뿐이었다.
“하하. 이거 매번 이러면 곤란해지겠는걸.”
제이콥은 어색하게 웃었다.
식당에 불어온 때 아닌 적막은 일행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척. 여기 아무거나 푸짐한 걸로 줘.”
“하하. 맡겨주게. 오랜만에 솜씨를 부려보지.”
배불뚝이 척은 소매를 걷으며 껄껄 웃었다.
잠시 후 식탁 위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일행은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요리들을 입안으로 퍼 넣었다.
지난 며칠 동안 먹은 거라곤 양념도 안 된 느끼한 말고기가 전부였으니, 향긋한 냄새의 음식에 환장하며 달려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한참 식사에 열중할 때다.
노인과 손녀로 보이는 소녀가 여관으로 들어왔다.
“음유시인이로군.”
노인의 손에는 하프가 들려 있었다.
주인의 하락을 얻은 노인은 실내 한쪽에 자리를 잡고 하프를 켰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부드럽고도 발랄한 음률을 일으켰고, 손녀는 그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며 귀엽게 춤을 추웠다.
그녀의 춤은 전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완성도도 떨어지는 엉성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려서인지 마냥 귀여워 보였다.
관중들도 마냥 즐거워했다.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던 병규는 괜스레 코밑을 한번 훔쳤다. 뭐가 떠오른 것일까. 그는 글썽이는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왜? 누구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어?”
소녀의 춤을 감상하던 호랭이가 삐죽이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병규는 어색한 병명을 했지만 천하의 호랭이님을 속일 수는 없었다.
“퀴니지?”
“.......”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어색한 미소만을 머금었을 뿐이다.
호랭이가 뭐라 또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춤을 추던 소녀가 스텝이 엉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쏟아졌다.
콰당 하고 꽤 크게 넘어진 소녀의 무릎이 빨갛게 까졌다. 많이 아플 텐데도 소녀는 씩씩하게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며 사과를 한 소녀는 다시금 노인의 노래에 맞춰 절뚝절뚝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춤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박수와 격려가 쏟아졌다.
대 호평이었다.
소녀가 노인의 모자를 들고 테이블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아낌없이 동전을 던져주었다.
제이콥 일행도 동전을 주었다. 호젤은 소녀를 살며시 안아 주기까지 했다.
병규 역시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그녀의 모자에 넣어주었다.
“휘익~”
고든이 휘파람을 불었다.
병규가 그녀의 모자에 집어넣어 준 것은 금화였던 것이다.
금화의 가치를 모르는 병규가 동전을 주자 소녀는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이마가 땅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고, 고마워요.”
“뭘. 좋은 구경했어.”
병규는 그녀의 과분한 인사에 뒷머리만 긁적였다.
제이콥의 이마가 찌푸러졌다.
병규는 큰돈을 준 것은 그의 씀씀이니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큰돈은 항상 귀찮은 일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특히 노인과 소녀처럼 돈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전무한 사람들이라면 특히나 더 그렇다.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화를 보고 탐욕의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터지고야 말았다.
한눈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패거리들이 노인에게 돌아가는 소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호오. 가까이서 보니 꽤 곱상한걸?”
녀석들 중 매부리코에 간사하게 생긴 녀석이 소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악.”
소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오히려 사내는 그녀를 덜렁 들어올렸다. 돈이 들어 있던 모자는 이미 다른 동료들에게로 넘어간 후였다.
“짭짤하구만. 이참에 나도 댄서로 나가 봐?”
돼지 같은 녀석이 모자 속에서 금을 꺼내들며 킬킬거린다.
“저쪽의 돈 많은 양반이 계속 도와준다면야 충분히 해볼 만하겠지.”
매부리코의 사내가 병규를 눈짓하며 찡긋 웃는다.
“푸하하.”
“그러네.”
양아치들 사이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다분히 시비를 거는 모습이다. 물론 녀석들은 도발에 이쪽이 움찔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시비가 붙으면 몇 대 쥐어박으며 돈을 뺏을 생각인 것이다.
그때, 하프를 타던 노인이 달려와 그들에게 허리를 굽실굽실했다.
“아이고. 제 손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시게. 이 늙은이가 이렇게 대신 빌 테니.”
움찔.
병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에게 노인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속에서 불길이 확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못된 녀석들은 끝내 노인을 발로 차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아이고. 아이고.”
노인이 배를 움켜잡으며 끙끙 앓자, 매부리코가 노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말도 안 되는 괴변을 늘어놓는다.
“우리가 괜히 이러는지 알아? 누군 뼈 빠지게 일해서 구리동전 몇 개 받는데, 어떤 자식은 고작 노래 한 곡 부르고 금화를 받아? 이런 불평등이 말이나 돼?”
“그럼 그럼. 용서할 수 없지. 크헤헤헤.”
사내들의 추행을 지켜보던 제이콥이 음식을 나르던 척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이곳 물이 많이 안 좋아졌군.”
“뭐, 자네가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 말이야. 타지에서 온 철없는 애송이들이 설철 때도 됐지.”
고개를 흔든 척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나선 사람이 있었다.
“이봐. 그 애를 놔줘”
갑자기 들려온 낭랑한 음성. 모두의 고개가 목소리를 발한 사람에게 향했다.
병규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양아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굉장히 열이 받은 듯 그의 얼굴을 벌겋게 달아있었다.
그를 본 양아치들은 놀라기는커녕 입가에 얄미운 미소를 띠었다. 멍청한 고기를 미끼를 물은 것이다.
“허이구.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애송이야. 어딜 가나 꼭 이런 미친 녀석이 있기 마련이지.”
“크흐흐. 동화책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오늘 좀처럼 드문 광경을 여러 번 보게 되는걸? 금화를 적선하는 또라이에 개념 상실한 영웅놀이까지 말이야.”
그들은 불에 기름을 붓듯 병규에게 조소를 퍼부었다.
프리즘 용병단은 깜짝 놀랐다. 설마 병규가 나설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걱정된 호젤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제이콥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제이콥은 귓속말을 속삭였다.
“잠시 기다려봐. 넌 병규가 어떤 아인지 알고 싶지 않냐?”
“뭐?”
“넌 설마 호위무사도 없이 붉은 대지를 헤매고 있던 두 아이가 평범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말과 함께 제이콥은 샤바를 턱짓했다. 이런 소란 중에도 샤바는 식탁 위의 음식에 몰입하고 있었다. 한 손엔 고기를 들고, 다른 한손으론 수프를 떠먹으며 정신없이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지금의 소란엔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병규를 지극히 따르던 샤바의 평소 행동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무관심이었다.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걱정조차 되지 않는 것일까?”
귓가에 속삭이는 제이콥의 말에 잠시 주저하던 호젤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며시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고든이 나직이 말했다.
“걱정 마라. 위험해지면 그때 나서면 된다.”
프리먼마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병규의 귀가 얼마나 밝은지 알지 못했다.
병규는 잠시 생각했다.
그의 본 실력을 보이면 이곳 사람들이 과연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까.
십 미터가 넘는 가공할 만한 점프력. 무지막지한 스피드. 6미터의 혀. 팔락이는 귀.
아마도 괴물이라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해도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하지만.......
신음하는 노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소녀는 양아치 녀석들의 희롱에 어쩔 줄 모르고 훌쩍거리기만 했다.
그들의 나약한 모습에 바보 같았던 자신의 과거가 겹쳐졌다.
으드득.
병규의 이빨이 갈리며 괴기스러운 소음을 토해 냈다.
“이 녀석들만큼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병규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냐? 어쭙잖은 기사도라도 보여주시겠다 이거냐?”
매부리코는 병규를 위아래로 훑으며 피식 웃었다.
뒤쪽에 앉은 녀석의 동료들도 한 마디씩 던졌다.
“크큭. 아서라. 젊은 객기에 몸 상할라.”
“어딜 가나 꼭 저런 멍청한 녀석이 있지.”
“노즈. 살살해라. 애 울겠다.”
극도로 화가 치민 병규의 얼굴엔 표정조차 지워졌다. 그걸 본 매부리코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쫄았냐? 크큭. 대가리 꼬라지하고는. 촌스럽게 검은 머리가 뭐냐? 검은 머리가.”
급기야 병규의 머리를 툭툭 쳐댔다. 매부리코가 건드는 대도 병규는 묵묵히 맞고만 있었다.
“넷, 다섯.......”
“잉? 뭘 세고 있는 거냐?”
병규는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빚.”
“빚? 허야. 돈 말이냐? 돈? 그래. 니가 몇 대 맞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잘 생각했다. 알아서 상납한다면 나야 좋지. 어여줘바.”
놈은 얄미운 미소를 보이며 뻔뻔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쓱 내려다보던 병규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줘도 돼?”
“하. 이놈 싸가지 보게. 어디서 감히 눈깔을 부릅뜨고 주둥아릴 놀려? 그래그래. 봐준다. 형님에게 헌금도 해준다는데 다 봐주마. 그러니 어여 성의를 보여 봐.”
“좋아.”
병규의 입술이 가느다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퍽!
시원스런 타격음과 함께 매부리코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 대.”
조용히 읊조린 병규는 쓰러진 노인을 부축했다.
“할아버지.”
양아치들 사이에 있던 소녀가 뛰쳐나오며 울먹인다. 병규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소녀에게 노인을 넘겨주며 방긋 미소를 보였다.
“잠깐만 눈을 감아줄래? 지금부터는 미성년자 관람불가라서 말이야.”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순진한 그녀의 행동에 병규는 씩 웃었다.
“컥컥!”
배를 맞은 매부리코 녀석은 배를 감싸 쥔 채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의자 하나를 집어든 병규는 놈의 숙여진 허리를 슬슬 쓸었다.
“딱 좋은 높이군.”
순간 그의 얼굴이 야차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의자가 허공을 난다.
“둘! 셋! 넷! ......”
잡초를 밟듯이 자근자근.
병규는 의자로 녀석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혼을 빼놓고 있던 양아치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우르르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쌍. 저 새끼 뭐야.”
“의자 잡아. 의자!”
“개 허접 쓰레기 같은 자식이!”
욕지기를 쏟아내며 십여 명의 청년들이 달려들자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넌 또 뭐야!”
병규는 두 눈을 부릅뜨며 양아치들을 맞았다.
휘릭.
나무의자가 나이프를 들고 설치는 망나니의 턱을 상쾌하게 날려버린다.
“켕.”
꼬리만 강아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한 녀석의 턱이 박살이 났는데도 다른 녀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었다.
“잡아! 잡아!”
“쥐새끼 같은 자식.”
파도처럼 달려드는 양아치들 사이를 병규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신들린 듯 나무의자를 휘두르며 날뛰었다.
“뭐야 저게?”
“막 싸움이잖아?”
“개판일세.”
프리즘 용병단의 입에서 샛바람이 새어나왔다.
뭔가 한 가닥 실력을 기대했는데 이건 영락없는 개싸움 아닌가.
그나마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양아치들의 물량공세에 호기 있게 맞서는 모습이 용하기는 했다.
“하하하.”
멍한 얼굴로 병규를 쳐다보던 제이콥이 돌연 대소를 터트렸다.
“저 녀석. 마음에 드는걸?”
그는 불의 굴하지 않고 맨몸으로 달려드는 병규의 행동이 마음에 꼭 들었다.
“막 싸움은 내 전공이니 빠질 수 없지.”
그가 팔을 걷어붙이며 나서자 고든과 호젤 역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미있어 보인다.”
고든이다.
“하여간 무식한 사내들 같으니라고. 말로 하면 될 일을 꼭 주먹질이야. 에효. 이렇게 된 이상 어여쁜 내가 나서서 싸움을 말려야겠지?”
은근슬쩍 몸을 일으키며 호젤이 쫑알거린다. 한데 말려보겠다고 나서는 여자가 장갑은 왜 끼는 것인지.
“프리즘 용병단 출격이다!”
“좋아.”
“나가자!”
거창하게 함들을 지르며 세 명의 남녀가 아수라장에 합류했다.
“허참.”
홀로 남은 프리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규의 정체를 파악하겠다며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 금세 분위기에 휩쓸려서 주먹을 휘두르며 뛰쳐나가는 꼴이란. 마법사인 그로서는 몸이 앞서는 그들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샤바야. 넌 절대 저 사람들처럼 분별없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프리먼의 조언에 샤바는 고개만 갸웃했다.
‘왜 주인님은 항상 힘을 아끼는 걸까. 샤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주인님이라고 생각하는 샤바였다.
병규와 양아치들 간의 패싸움은 제이콥들이 달려들자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괜찮냐?”
제이콥은 씩씩거리고 있는 병규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병규는 고개만 까딱였다.
지금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죄 헝클어지고, 옷은 군데군데 찢어진데다 먼지마저 부옇게 뒤집어쓰고 있어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형편없이 당한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 다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양아치 몇 명 상대하는데 상처까지 입을 정도로 허접한 실력이 아닌 것이다.
“녀석. 보기보다 터프한데?”
호젤이 그의 등을 빵! 치며 하하하 웃는다. 병규가 힐끔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짜식 멋있었다. 흠. 그런데 옷이 망가졌네. 여벌의 옷은 없지?”
이번에도 병규는 고개만 까딱했다.
“그럼. 새로 사야겠다. 내가 좋은 옷가게로 안내해 줄게.”
이때 성의 병사들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누가 싸움을 신고한 것이다.
여관 주인과 제이콥이 나섰다.
그들이 병사들에게 싸움이 아니라 떠들썩한 유흥이었다고 변명하는 동안, 호젤은 병규와 샤바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이미 밤이 서서히 뿌리를 내린 시각이지만 거리를 생각보다 훨씬 밝았다. 거리 곳곳을 비추는 마나 라이트 때문이었다.
마나 라이트는 마나석 알갱이에 라이트 마법을 채워놓은 것으로, 수은등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늦은 시간임에도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랜만의 도시구경에 호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신없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병규도 낯선 풍물에 흥미가 일어 지루하지 않았다.
“여기가 좋겠다.”
중구난방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호젤이 둘을 데려간 곳은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게였다.
그곳에서 병규는 호젤이 안내를 자청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머어머. 어쩜 이렇게 멋있니? 이 옷도 입어 봐. 햐! 최고야. 옷걸이가 좋아서 뭐든 잘 어울리는 구나. 그럼 이건 어때? 아! 쓰러질 것 같아.”
그녀는 샤바에게 이 옷 저 옷을 입혀가며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감탄사. 그녀의 장난감이 된 샤바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에효.”
병규가 한숨을 쉬는데, 호랭이가 어깨를 두드린다.
“넌 내가 있잖냐. 어디 입어봐. 봐주마.”
“……에휴에휴.”
호랭이의 위로에 어쩐지 병규의 한숨은 더욱 깊어진 것 같다.
결국 병규는 편해 보이는 옷 세벌을 골랐고, 샤바는 호젤이 직접 옷을 골라주었다.
호젤이 고른 옷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입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옷걸이가 좋아서인지 샤바와는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얼마죠?”
“네. 다해서 2실버 5실링입니다.”
제이콥이 준 주머니를 꺼낸 병규는 금화 한 개를 꺼내주었다.
금화를 받은 주인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이쿠. 손님. 지금 저의 가게엔 이렇게 큰돈을 환전해 드릴 잔돈이 없습니다.”
“?”
병규가 당황하는 듯하자 호젤이 스윽 끼어들었다.
“아까 전 음유시인에게 금화를 줄 때도 혹시나 했는데, 너 설마 화폐가치를 전혀 모르는 거니?”
병규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는 거니. 이름 안 잊어 먹은 게 신기하다.”
투덜거린 그녀는 병규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씩 꺼내며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화폐는 크게 브론, 실링, 실버, 골드로 나뉘어져 있으며, 실링은 브론의 10배, 다시 실버는 실링의 50배, 그리고 골드는 실버의 20배였다.
즉, 브론이 백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면 금화는 백만 원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소리다.
‘결국 아까 전의 싸움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군.’
옷값을 치르고 나온 병규는 고초를 당한 노인과 소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노래 한 곡 듣고 수표를 뿌린 격이니 기생충이 꼬이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물론 무지로 인해 생긴 실수였지만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저년 늦게 여관으로 돌아가니 일행들 모두가 자고 있었다. 붉은 대지에서 며칠 동안 고생을 했으니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아흠. 그럼 내일 보자.”
호젤도 길게 하품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여관의 방은 푹신한 침대 두개와 좁은 창 하나가 전부였다.
병규는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이불의 감촉.
얼마 만에 맛보는 부드러움인가.
노곤한 몸이 침대 속으로 한없이 파묻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부족한 게 뭘까 생각하던 그는 한참 후에야 호랭이가 보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니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 아래, 호랭이가 있었다.
바른 자세로 눈을 착 내리감은 모습에서 구도자의 면모가 얼핏 엿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병규가 물었다.
“담배 피우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예요?”
이 세계로 넘어온 후로 호랭이는 담배를 피울 수 없어 가끔씩 괴로움을 토로하곤 했다.
“어허. 명상하는 중이다.”
“헤에?”
병규는 신기한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지구에 있을 때는 한번도 명상 같은 걸 한 적이 없었잖아요.”
“그곳에서야 그랬지. 명상을 하나 안 하나 쥐꼬리만 한 도력만 회복됐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이상하게 기가 충만해서 도력이 쉽게 회복되더구나. 그래서 한번 명상을 해봤다.”
“결과는 어때요?”
병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아마...... 며칠이면 충분할 것 같다.”
“하하. 잘됐네요.”
병규는 껄걸 웃으며 기뻐했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걱정인데요.”
“또 왜?”
“생각해 봐요. 호랭이의 원래 몸 말이에요. 그 커다란 몸으로 어슬렁거리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호랭이의 본신은 거대한 북극곰조차 ‘형님 아니십니까?’ 라고 외칠 정도로 거대한 덩치였다.
사람들에게 몬스터 취급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호랭이는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과 친구 동생 하면서 살아야 될지도 몰라요.”
“어헛. 그 무슨 소릴. 걱정 마라. 신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설마...... 사람으로 변신을?”
“둔갑이라고 한다. 신선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흐흐. 두고 봐라. 샤바가 울고 갈 정도의 미남으로 변해 보일 테니”
호랭이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샤바에 이어 호랭이까지 미남이 되어버리면, 평범한 외모인 나는 그대로 두 꽃 미남에게 묻혀 버릴 게 아닐까?’
병규는 달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