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9/102)

청아한 구타소리가 고요한 달밤을 울리다.

  병규는 자신의 계획에 샤바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의 은신술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그런데 호랭이가 문제였다. 신선인 호랭이가 도둑질 같은 범죄를 묵인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병규의 계획을 들은 호랭이는 찬성 쪽의 손을 들었다.

“살인, 방화 기타 등등의 극심한 범죄만 아니라면 묵인하겠다.”

“헤. 웬일이세요? 신선이 도적질을 장려하다니요?”

이거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떠오를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무슨 소리야. 난 괜찮다고 말한 것이지, 절대 장려한 게 아니야. 험험. 보아하니 귀족 아이가 버릇이 너무 없어 보이더구나. 철없는 사람에게 한 번쯤 인생 경험을 시켜주는 것도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험험. 어허험험.”

호랭이는 애써 근엄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말미에 꼬르륵 하는 소리가 대미를 장식하는 바람에 톡톡히 망신을 떨어야 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 호랭이에게서 동의를 구했지만 아직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죽어도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는 호랭이는 생김새가 너무 도드라져 금방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 없다.”

병규의 고민을 들은 호랭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눈송이처럼 하얀 털이 점점 검게 변색되어 버린 것이다.

“어억!”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 도술이 돌아온 거예요?”

호랭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큰 힘을 쓰긴 힘들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부릴 수 있게 됐지.”

“그 정도면 충분해요.”

병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자. 이제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슬슬 출발해보자고요.”

“그런데 그냥 갈 거냐?”

병규의 옷 안으로 쏙 들어가 있던 호랭이가 고개를 삐죽 내밀며 물었다.

“그럼요?”

“이 녀석아. 너희들도 이 몸처럼 변장을 해야지. 변장을. 잘못해서 정체가 드러나면 무관한 프리즘 용병단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냐?”

“으흠. 그렇겠군요.”

호랭이의 언질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의 말처럼 도둑질엔 변장이 필수인데, 유감스럽게도 병규와 샤바는 갈아입을 옷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현재 입고 있는 옷들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호젤조차 특이한 옷이라며 관심을 보였을 정도로 그들의 옷차림은 이곳의 양식과 판이하게 달랐다.

변장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도적질에서 가장 필수적인 절차였다.

그런데 이 복잡한 문제를 병규는 너무도 수월하게 해결했다.

“기사단의 옷을 훔쳐 입죠.”

  밀어내기 한판 하러 간다며 일행에게서 빠져나온 병규와 샤바는 빠른 속도로 마차를 찾아 달렸다.

별이 뜬 밤하늘을 등지고 바람같이 내달리는 기분.

오랜만에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이라서 그런지 더 없이 상쾌했다. 짜릿한 쾌감까지 느껴져 병규는 더욱더 속력을 올렸다.

그렇게 전력을 기울여서 달리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와 기사단을 찾을 수 있었다.

멀찌감치 보이는 마차 주위엔 보초로 보이는 기사 두 명이 모닥불 가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위에 침낭을 깔고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의외로 허술한 경계.

‘일이 쉽게 풀리겠군.’

병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참. 샤바는.......’

혼자 신나게 달리다 보니 샤바를 잊고 있었다.

“샤바야.”

“여기예요. 주인님. 샤바.”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샤바가 불쑥 솟구쳤다. 당연히 병규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한참 뒤에나 쫓아오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을 줄이야. 빠르기만큼은 자부하고 있었는데, 샤바 역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녀석.’

끊임없이 발견되는 샤바의 엄청난 재능에 병규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사실 샤바는 체중을 깃털처럼 가볍게 할 수 있었다. 그 재주로 우뢰처럼 내달리는 그의 몸에 살짝 기대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병규가 알 턱이 없었다.

‘좋아. 이제 일을 벌려보자.’

병규가 살금살금 마차 가까이 접근하려 할 때다.

샤바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왜?”

의문스런 얼굴로 돌아보는 병규에게 샤바는 손가락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귀여운 아이가 우릴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샤바”

“?”

병규는 샤바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가 말하는 귀여운 아이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뭐가 있다는 거니?”

“저기요. 저기. 샤바.”

아무리 눈을 치켜뜨고 봐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병규는 샤바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예민한 생물이라 그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 아이가 지금 뭘 하고 있는데?”

“잠시만요. 샤바.”

샤바는 고개를 쳐들고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후 샤바는 심각한 표정으로 병규에게 말했다.

“귀여운 아이가 자기는 정령이래요. 샤바, 주인의 명령으로 주변에 이상한 것이 없는지 살피고 있는 중이래요. 샤바샤바.”

병규는 문득 프리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령술사!’

그는 정령술사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프리먼의 말로 대충 마법사와 비슷한 부류라는 것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어쩐지 경계가 허술하다 했더니, 그 정령술사라는 여자가 술수를 부린 모양이군. 그나저나 어쩐다?’

정령이 경계를 서고 있으니 그냥 접근했다가는 그대로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고민하던 병규는 샤바가 그 정령이라는 것과 대화가 통한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샤바야. 그 정령이라는 아이에게 우리가 몰래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 좀 해봐.”

“네. 샤바.”

샤바는 귀여운 표정으로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병규의 귀에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가볍게 일렁이는 파문.

“바람?”

“어? 귀여운 아이가 바람의 정령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샤바가 방긋 웃으며 물어온다.

“아, 아니. 그냥 바람이 좀 부는 것 같아서. 그보다 얘기한 건 어떻게 됐어?”

병규의 물음에 샤바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원래는 계약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지만, 샤바. 특별히 이번만은 절 봐서 봐주겠대요. 샤바샤바.”

“잘했어.”

신이 난 병규는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령 때문에 틀어질 수도 있었던 일이 무난하게 해결된 것이다. 

주인의 칭찬에 샤바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즐거워했다. 샤바샤바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좋아. 이제 정령은 해결되었으니 기사들에게서 위장복을 빌려볼까?”

병규는 돌을 주워 일부러 작은 소리를 냈다. 과연 무료한 표정으로 서 있던 두 기사가 엉거주춤 걸어왔다.

“코볼트라도 있나?”

정령을 믿는 것인지 두 사람은 하품을 하며 병규가 숨어있는 바위틈까지 걸어왔다.

파팍.

가벼운 파공성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목 뒤를 찔러오는 통증.

움찔하고 떨리던 기사들의 허리가 숙여졌다.

“큭.”

얕은 신음소리.

하지만 그들은 목 뒤를 가격 당했음에도 리저드맨처럼 기절하지 않았다.

‘어? 꽤 버티는걸?’

병규는 그들이 채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이격을 날렸다.

발을 무겁게 찍으며 주먹을 나선으로 휘두른다.

쿠웅.

송곳처럼 날카롭고 쇠망치처럼 무거운 통증이 뱃속을 파고든다.

일전에 무당의 제자라던 백택이 부리던 무공.

비록 수박 겉핥기 식으로 훔쳐 배운 것이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일격을 받은 기사의 입이 쩍 벌어지며 격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기사가 꼬꾸라지기도 전, 병규는 이미 다른 기사를 덮치고 있었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손이 막 호통을 치려던 기사의 턱을 밑에서 위로, 후려갈긴다.

딱!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히는 딱딱한 소음.

강제로 다물려진 입술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이제 그만 잘 시간이다.”

병규는 다시 한 번 기사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연이어진 충격에 기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자위를 허옇게 치뜨며 쓰러졌다.

 두 기사 모두 기절하는 순간까지 병규를 보지 못했다. 그저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자신들의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만을 언뜻 보았을 뿐이다.

순식간에 기사들을 제압한 병규는 재빨리 그들의 갑옷과 내의를 벗겼다.

“윽. 냄새. 좀 빨아 입을 것이지.”

기사의 내의를 입은 병규는 퀴퀴한 냄새에 코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 역시 근 반달 동안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도 갈아입어.”

샤바에게도 기사의 내의를 던져준 병규는 겉에 갑옷까지 걸친 채 태연스레 마차로 걸어갔다.

그가 기사들을 상대한 곳은 마차와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지만 밤인지라 소리가 멀리 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과연 수면 중이던 기사 한 명이 자리에서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켄트였다.

“무슨 일인가?”

물어오는 말에 병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말을 했다가는 정체가 들통 날 판이다.

“괜히 소란 떨지 마라.”

주의를 준 켄트는 다시금 침낭에 누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병규는 마차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 뒤를 샤바가 소리 없이 따랐다.

기사들은 마차를 빙 둘러싸듯 잠에 빠져 있었다.

‘마차 안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둘이라. 그 건방진 녀석과 정령술사라는 여자는 안에서 자고 있구나. 숨소리가 꼭 붙어서 들리는 걸 보니 평범한 관계는 아니군’

대충 주위를 살핀 병규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음식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했다.

하지만 굳이 몸소 수색을 할 필요는 없었다.

“주인님. 마차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요. 샤바.”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솟은 샤바가 마차를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병규는 매우 편리한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며 마차를 살폈다.

마차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소리 없이 안으로 침입하기는 불가능한 상황.

‘어쩐다.’

병규는 마차에 엉거주춤 선 채로 고민했다.

우선 마차 안의 괘씸한 놈팡이들을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수로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쓰윽 옮긴 병규.

그의 입가에 사요한 미소가 싹 그려졌다.

표정이 예술이다.

‘기왕 뜨거워진 거 내가 아주 활활 달궈주마.'

병규는 살금살금 걸어가 불붙은 나무를 들고 왔다. 그의 움직임은 지독하게 은밀하여 작은 소음조차 일지 않았다. 물론 그 방면에서는 샤바가 최고의 달인이긴 했지만.

‘이거 문제일세.’

마차에 물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기름이 필요했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시대에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가 고민할 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병규의 옷 속에 들어가 있던 호랭이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잠시 마차 아래에서 처량하게 일렁이는 작은 불씨를 쳐다보던 호랭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문제라면 내게 물어봤어야지.”

자부심 강한 말과 함께 호랭이의 입에서 흥얼흥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자장가처럼 흘러나왔다.

“천하만물은 화염 속에 태어나고, 화염 속에 잠드나니. 일어날지어다. 불의 기운이여.”

길게 울며 호랭이가 마차를 향해 두 눈을 치켜떴다.

화염을 일으키는 도술.

눈부신 번쩍임이 마차를 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콰쾅!

우렁찬 폭음과 함께 마차 아래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화려하게 작렬하는 불꽃과 함께 폭죽처럼 허공으로 치솟는 마차.

병규는 멍한 눈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마차를 올려다보았다.

“좀...... 화려한 것 같은데요.”

“......”

하염없이 솟구치는 마차를 올려다보는 호랭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원래 호랭이가 하려고 했던 것은 불의 기운을 활성화시켜 주는 기본적인 도술. 그러나 막상 펼쳐진 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폭발력이었으니.

“오...... 익스플로전(Explosion)이네. 샤바.”

지뢰 밟은 자전거처럼 하늘 높이 치솟은 마차를 보며 샤바가 팔짝 뛴다. 강력한 폭발력의 그것은 얼마 전 프리즘에게서 들은 익스플로전과 같은 것이었다. 폭발력은 황당할 정도로 강화되긴 했지만.

허접한 도술의 막강한 위력에 호랭이가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잠들었던 기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폭발소리에 잠에서 깬 기사들은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는 걸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하늘 높이 치솟았던 마차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콰콰쾅!

거센 폭음이 다시 한 번 터지며 사방으로 마차의 파편이 날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불마차.

간신히 잠에서 깬 기사들에게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같은 재앙이었다.

기사 셋이 마차의 파편에 휩쓸려 날아가 버렸고, 간신히 몸을 뺀 나머지들도 낭패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켄트는 망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폭탄처럼 떨어진 불마차.

가만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이 아닌가. 뒤늦게 도련님의 존재를 기억해 낸 켄트는 파편을 뒤집어쓴 수하들을 독촉했다.

“어서. 불을 꺼라. 마차 안의 도련님을 구해라.”

부하들을 독려하면서도 그 스스로 칼을 뽑아 들고 마차로 달려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공작의 자제다. 단지 그 하나의 목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나 여기 있네. 컨트 경.”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반가운 음성에 켄트는 기성을 부르짖었다.

죽은 줄 알았던 도련님이 소환술사에게 안긴 채 천천히 밑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어? 두 사람 발밑에 뭔가가 일렁이는 걸?’

기사인 척하고 있던 병규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여전히 일렁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일렁거림은 주위를 경계하던 정령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저것도 분명 바람의 정령인가 뭔가 하는 건가보군.’

다른 점이 있다면 샤바에게 설득당한 정령보다 일렁거림이 크다는 정도.

‘그나저나 보기 좋은 걸.’

청년과 정령술사는 거의 벌거벗고 있었다. 예상대로 마차에서 잠만 잔 게 아닌 모양이다.

“라이트 도련님. 무사하셨군요.”

청년과 정령술사가 사뿐히 내려서자 켄트가 반갑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라이트라 불린 청년의 음성엔 짜증이 하나 가득 묻어 있었다.

“그것이 ....... 저희도.”

“그렇겠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난 어떻게 된 일인지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

예상외로 차분한 라이트의 말에 켄트는 어정쩡한 표정이 되었다.

“너. 도대체 누구지?”

라이트는 정확히 병규을 손가락질했다.

물론 그가 병규의 정체를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정령술사인 요엔 덕분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마차에서 탈출한 요엔은 크게 당황했다. 실프에게 주변을 경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바람의 중급 정령 슈리엘을 소한하여 대략의 사정을 캐물은 것이다.

슈리엘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두 기사를 지적하며, 외인이라는 경고의 말을 해주었다.

“흐음.”

병규는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이렇게 쉽게 정체가 드러날 줄이야.

하긴 호랭이의 도술이 화려하게 터질 때부터 틀어진 일이었다.

“오라. 대충 알겠군.”

수리엘이 적이라고 알려준 기사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라이트는 두 눈을 번뜩였다. 짐작 가는 놈들이 있었다.

“넌 분명 낮의 그 녀석들 중의 하나렷다? 누구냐? 비굴하게 무릎을 꿇은 사내자식이냐? 아니면 눈물을 질질 짜던 천한 계집이냐?”

라이트의 천박한 말투에 병규는 일부로 목소리를 굵게 하며 대소를 터트렸다.

“움화화화화. 과연 생긴 만큼 지껄이는 말도 오만 방자하구나. 날 보고 뭐라고? 흐흐흐. 미안하지만 헛다리 짚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나가던 의적 ‘에이’다.”

“의적 에이?”

라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근래 들은 농담 중에 제일 황당한 소리다.

“헛소리!”

“믿고 안 믿고는 자유야. 아! 그리고 얘는 지나가던 의적 ‘비’ 라고 하지.”

“가당찮은 녀석들이군. 그런데 네놈이 입고 있는 갑옷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저쪽에 있다. 무사한지는 안 물어보나?”

“흥. 몰래 숨어든 쥐새끼에게 당하는 멍청한 녀석들이라면 필요 없지.”

말과 함께 라이트는 켄트를 슬쩍 돌아보았다. 켄트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호오. 그 쥐새끼에게 네가 당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하하. 과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구나.”

웃음과 함께 라이트는 켄트를 눈짓했다.

스르릉.

차가운 치찰음.

칼을 빼든 켄트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선다.

“네 녀석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할 소린 걸? 내가 곱게 물러날 거라는 생각은 버리라구. 이미 배알이 꼬일 대로 꼬였으니까 말야.”

“머리가 어떻게 된 녀석이로군. 해치워.”

“네.”

묵직한 음성과 함께 네 명의 기사가 나섰다.

이번 여정에 참가한 기사는 총 10명. 그중 둘은 이미 병규에게 소리소문 없이 당했고. 또 셋은 마차의 파편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현재 남아 있는 인원은 다섯.

그중, 인솔자인 켄트를 뺀 나머지 기사들이 모두 나선 것이다.

달빛에 반사된 칼날이 번뜩번뜩 시퍼런 빛을 뿜었다.

기사들의 표정 또한 칼 빛처럼 스산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맞는 병규는 여유만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식당 종업원처럼 허리까지 굽실거린다.

“오냐. 가주마.”

분노한 기사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막 그들의 검이 병규의 몸을 난자하려는 순간.

철컹.

갑옷이 움직이는 쇳소리와 함께 병규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놀란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돌연 등 뒤에서 차각차각 하는 쇠 비벼대는 소음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우선 한 분!”

기사들이 고개도 돌리기 전, 한 줄기 바람이 폭풍처럼 그들 사이를 휩쓸었다.

터엉.

“큭!”

숨넘어가는 신음과 함께 기사 하나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아닛!”

눈 깜짝할 사이에 동료가 쓰러지자 기사들은 경악했다.

이토록 빠른 움직임이라니.

단련된 그들의 동체시력으로도 흐릿한 그림자만 잡힐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대가 풀 플레이트 메일(full plate Mail)을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대한 철판이나 마찬가지인 갑옷의 무게를 생각해보면 기적과 같은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가능성은 한 가지.

“경량화 마법에 헤이스트를 사용하는 놈이로군.”

“주의해라. 적에겐 마법사 동료가 있다.”

그들은 적당히 거리를 벌리며 포위하듯 병규를 감쌌다. 그러나 주의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사들이 움츠러들자 병규는 오히려 더 기가 살아 마음껏 날뛰었다.

“두 번째 손님!”

차각차각차각.

자욱한 안개처럼 스멀스멀 몰려드는 요란한 치찰음. 그리고 다음 순간, 큭 하는 신음과 함께 또 한 명의 기사가 비질에 쓸린 낙엽처럼 허공을 날았다.

동료기사들이 다급히 병규에게 검을 휘둘렀을 때엔, 이미 그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묻혀든 다음이었다.

꿀꺽.

긴장한 기사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차각차각차각차각.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치찰음.

머리털이 쭈뼛 솟는다.

어느새 그들의 손아귀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어김없이 들려오는 병규의 음성.

“자! 이번엔 한꺼번에 두 분!”

“보였다!”

용케 병규의 움직임을 잡은 기사들이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응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미처 치켜든 칼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병규의 주먹이 그들의 복부를 강타한 것이다.

빠방.

철퇴로 후려친 것과 같은 충격!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두 기사의 몸뚱이가 수직으로 상승했다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쿨럭.”

“켁켁.”

호되게 배를 두드려 맞은 그들은 허리를 기역자로 꺾으며 저녁에 먹은 음식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이럴 수가.”

라이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사 넷이 쓰러지다니. 너무도 빠른 공격이라 기사들이 어떻게 쓰러졌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무슨 저런 황당한 녀석이 다 있단 말인가.’

허접한 병사 넷이 당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상대는 기사다.

그것도 초보가 숙련된 기사들.

그런 실력자들을 불과 눈 몇 번 깜빡일 사이에 때려눕히다니.

공작가의 수많은 실력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지금과 같은 재주를 보여준 자가 없었다.

‘아니야. 놈은 몸이 빠른 것뿐이다. 실제 실력은 대단할 것도 없어. 무엇보다 검사도 아니지 않은가. 권투사가 힘을 써봐야 얼마나 쓴다고......’

라이트는 이를 악물었다. 지나가던 의적 ‘에이’를 노려보는 그의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보기보다 꽤 하는군.”

굳은 얼굴로 켄트가 나섰다.

“어서 나오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규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켄트는 콧수염을 슬쩍 한 번 쓰다듬더니 곧장 칼을 뽑아 들었다.

“도적과 긴말 주고받을 필요는 없겠지.”

차앗!

섬전같이 날아드는 칼 빛. 상대의 몸이 날렵하니 아예 움직일 틈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웅 하고 휘둘러지는 검에 희뿌연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맺혀있었다. 병규는 슬쩍 허리를 틀어 피했다. 그러나 켄트의 검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쉬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검의 방향이 급격히 틀어지는 게 아닌가.

멋모르고 있다가는 허리가 잘릴 판!

깜짝 놀란 병규는 즉시 발끝을 튕겨 몸을 솟구쳤다.

휘익 ... 하며 발밑을 스쳐가는 칼바람 소리.

‘이거 가볍게 생각할 수 없겠는걸.’

멀찌감치 간격을 둔 병규는 반짝 긴장했다.

갑옷의 무게가 부담스럽다.

움직임도 부자연스럽고, 무거워서인지 평소보다 굉장히 둔하게 느껴진다.

두근거리는 가슴.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상대할 만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 기쁜 것일까.

‘요수의 발톱을 쓸까?’

그의 고개가 흔들렸다.

요수의 발톱은 너무 특이한 능력이다.

자칫 정체가 까발려질 위험이 있다.

‘굳이 요수의 발톱을 사용할 필요도 없지.’

뚜둑. 뚝.

병규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소리를 냈다.

마침 수면 중 급하게 일어난 상대는 갑옷도 입지 않고 있었다.

“여유를 부리다니.”

노호성을 지르며 켄트가 다시 달려왔다.

단순하지만 무거운 검술이 공간을 바짝 압축해온다.

사실 켄트의 검술은 병규가 지구에서 상대한 능력자들에 비하면 조잡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순했다.

그러나 대신 힘이 넘쳤다. 특히 검신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불길한 느낌까지 주었다.

검 끝을 지그시 쳐다보던 병규는 예기가 목을 찔러오는 순간, 슬쩍 뒤로 피했다.

“소용없다.”

수평으로 베어오던 검이 병규를 쫓아 비스듬히 꺾여진다. 허나 이미 한 번 경험한 변화.

두 번이나 같은 수법에 당해줄 정도로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다. 고개를 슬쩍 틀며 검을 피한 병규는 어깨로 슬쩍 켄트를 밀었다.

“어. 어.......”

켄트의 발이 꼬이며 볼썽사납게 휘청거렸다.

“이 놈이.”

도련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였다고 생각한 켄트는 괴성을 질러대며 검을 뿌렸다. 사방팔방으로 힘차게 휘둘러지는 검.

‘쓸 만한 건 검의 방향을 트는 기술뿐인가?’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가볍게 몸을 날리던 병규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맺히기에 뭔가 대단한 재주가 있겠거니 잔뜩 기대했는데, 이건 영 수준이 낮다.

‘후딱 해치우고 가야겠군.’

병규는 번개처럼 주먹을 켄트의 안면으로 날렸다.

무지막지한 빠르기.

갑자기 시야를 꽉 채우는 강철 건틀렛.

“엇!”

깜짝 놀란 켄트는 급히 검을 들어 앞을 막았다. 그런데 얼굴을 찔러오는 건틀렛이 돌연 비스듬히 방향을 트는 것이 아닌가.

익숙한 변화.

그것은 그의 케이에서 가문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검술을 권법으로 펼친 것이다.

“이, 이건!”

채 경악성을 터트리기도 전, 터엉 하는 쩌릿한 타격음과 함께 그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켄트는 망연자실했다.

놈이 어떻게 가문의 비전 기술을 사용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그걸 물어볼 정신이 없었다.

기사가 검을 떨어뜨린 것은 목숨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때문에 죽기 전엔 검을 놓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검을 놓치다니.

목구멍을 저려오는 절망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손을 내려다보니 두 손 모두 기이한 방향으로 부러져 있었다.

“미안. 원래는 관절만 뺄 생각이었는데. 강철장갑이 너무 둔해서.”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마복에게서 훔쳐낸 진천추운권(震天抽雲拳)은 섬세한 손동작이 요구되는 가공할 절기다. 그걸 강철 장갑을 낀 채 사용했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걱정 마. 이제부터는 제대로 해줄게.”

건틀렛을 벗은 병규는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여 보였다.

병규는 켄트를 다른 기사들처럼 쉽게 기절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건 너무 가벼운 처벌이다.

말 위에 올라탄 채 사람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그 시선.

놈에게 제이콥이 느낀 굴욕감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다.

“기대하라고.”

“!”

켄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병규가 스산한 살기를 머금고 켄트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라이트는 정령술사인 요엔을 닦달하고 있었다.

“한눈을 팔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놈을 처치해.”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어버렸다. 목소리마저 조급함이 느껴졌다.

요엔은 조금 꺼림칙한 얼굴로 이미 소환한 슈리엘을 불렀다.

“창공의 수호자여. 날카로운 발톱이 되어 적을 갈기갈기 찢어 발길지어라.”

계약자의 명령에 슈리엘의 두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끼이이익!

날개를 펼친 슈리엘은 찢어지는 파공음으로 변해 병규를 덮쳤다. 바람의 정령이 펼치는 윈드 커터(Wind cuttur)!

이때, 병규는 켄트에게 집중하던 때라 슈리엘의 급습에 미처 대비하지 못 했다.

막 칼날 같은 바람이 병규를 난자하려던 찰나.

“멈춰!”

샤바가 병규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보 같으니. 같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요엔이 눈썹을 치켜뜨며 일갈했다. 슈리엘은 계약자가 지적한 목표를 난도질하게 될 때까지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이든 찢어발긴다. 구한답시고 앞을 막아봤자 같이 죽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미소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분노한 설녀처럼 매섭게 날아가던 슈리엘이 샤바와 마주치는 순간, 따뜻한 봄바람처럼 풀어져 버린 것이다.

“좋아. 착하지. 아가. 샤바.”

샤바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어 아무도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슈리엘은 만족한 듯 길게 호성을 질렀다.

살랑살랑 갑옷 밖으로 흘러나오는 샤바의 검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모습이 마치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요엔은 경악했다.

계약을 맺은 정령이 주인을 배신하다니.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다.

문득 그녀는 떠오르는 게 있는 듯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보니 실프의 경보를 막은 것도 바로 네놈이었구나.”

샤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요엔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네놈. 정령술사냐?”

샤바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특유의 샤바거리는 말투 때문에 정체가 탄로 날까 저어한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요엔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익, 뭐, 뭐하는 거야. 저 버릇없는 두 놈을 당장 죽여버리지 않고!”

라이트는 길길이 날뛰었다.

정령을 볼 수 없는 그는, 요엔이 소환한 바람의 중급 정령을 샤바가 한순간에 홀려버렸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크으으으윽!”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켄트였다.

그는 두 다리 관절이 빠진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라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믿었던 요엔은 검은 머리의 벙어리 녀석에게 옴짝달싹 못하고 있고, 이제는 켄트마저 맨손의 상대에게 당해버린 것이다.

최악의 상황.

“자. 전채요리는 충분히 먹었으니, 이제부터 메인디쉬를 즐겨 보실까?”

손가락을 꺾으며 병규가 다가섰다.

“으헉! 가, 가까이 오지 마. 네 놈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필립 공작가의 문장이 보이지도 않느냐!"

라이트는 발작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병규는 손가락을 들어 투구 안의 귀를 파는 듯한 흉내를 냈다.

“어디서 개가 짖나? 거 시끄러운 똥개네. 그저 버르장머리 없는 개는 그저 패는 게 약이지.”

병규의 보폭이 커졌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병규를 보고 라이트는 식은땀을 비처럼 흘렸다. 그가 언제 이런 꼴을 당해보았겠는가. 지금까지 살면서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에게 세상 사람은 단 두 가지 부류가 있었을 뿐.

마음에 드는 놈과 마음에 안 드는 놈.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그저 손가락만 지그시 내밀면 그 뿐. 충성스런 기사들이 그의 손발이 되어 거추장스런 것들을 대신 치워주었다. 간혹 기사들만으로 어쩔 수 없는 상대는 공작인 부친이 직접 해결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부친은 멀리 떨어진 상태고, 충실한 기사들은 죄 기절한 상태이며, 막강한 켄트마저 저만치 다리관절이 뽑힌 채 고통스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철컥철컥 쇳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병규가 그에겐 죽음의 사신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저, 저리가.”

라이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비명을 질렀다.

“재수 없는 녀석.”

환멸을 느낀 병규가 라이트를 발로 걷어차려 할 때다.

“잠깐.”

요엔이 병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정령은 샤바에 의해 봉쇄당했지만 그렇다고 라이트가 당하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건 그녀는 공작가의 녹을 받는 사람인 것이다.

병규는 움찔했다.

그도 귀가 있는 지라 방금 전, 그녀가 자신을 해치려 했던 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여자다 보니 막상 손을 대기 영 껄끄러웠다.

“설마 여자를 때릴 건가요?”

병규가 망설이자 요엔은 보란 듯이 가슴을 내밀며 대들었다. 병규는 난처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때, 그녀의 그림자에서 샤바가 허깨비처럼 쓰윽 솟아나왔다.

그의 손에는 주먹만 한 짱돌이 들려있었다.

빠각!

둔탁한 소음과 함께 요엔의 몸이 주룩 쓰러졌다.

“넌 여자에게도 인정사정이 없구나.”

병규는 질렸다는 듯이 샤바에게 말했다.

무식하게 짱돌로 찍다니.

그 같으면 절대로 못할 짓이다.

요수의 발톱으로 옷을 한 장씩 벗기며 스트립쇼를 하는 거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는 샤바가 원래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사람이 벌레를 암, 수 구별해가며 약을 뿌리는 게 아니듯, 인간의 남녀차이란 샤바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다.

“뭐, 어쨌든 난감한 문제도 해결했으니.......”

병규는 네 발로 기어가고 있는 라이트를 덜렁 들어올렸다.

“이 악물어라. 잉!”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라이트에게 투구 쓴 얼굴을 들이밀며 병규가 친근하게 말했다.

“히, 히익.”

빠바바바바바바박!!

청아한 구타소리가 고요한 달밤을 울렸다. 그리고 그 뒤로 구수한 비명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쩝. 아쉽네.”

라이트를 곱게 다져주고 터덜터덜 일행에게로 돌아가는 병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과 기사들을 묵사발 내준 것은 분명 통쾌했다. 하지만 정작 목적이었던 식량은 눈곱만큼도 구하지 못했다. 식량이 들어있던 마차가 모두 불타버렸으니 가져오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도 없을 결말이다.

“이게 다 호랭이 때문입니다. 어쩌자고 마차를 폭파시켜요? 제가 언제 귀한 식량 가지고 볼꽃놀이 하자고 했습니까?”

“크흠. 그게 ...... 원래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

지은 죄가 있는지라 호랭이는 병규의 부리부리한 눈길을 외면하며 말끝을 흐렸다.

호랭이는 억울했다.

원래는 그저 화(火)의 기운을 돋워주는 도술을 가볍게 부린 것뿐이다.

정말로 가볍게.

개미 눈곱만큼 말이다.

그런데 그게 왜 폭발하느냔 말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괴사였다.

병규가 호랭이를 핍박하고 있을 때다.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던 샤바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주인님. 샤바.”

“왜?”

“먹을 거라면 ...... 챙겨뒀는데요.”

“무엇이?!!!”

병규와 호랭이의 고개가 홱 뒤로 돌아갔다.

“그게 정말이야?”

“네. 샤바.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두었어요.”

병규는 놀라면서도 기뻤다.

화염에 불타고 있는 마차에 이 녀석이 과연 언제 들어가서 식량을 챙겨왔단 말인가.

정말로 놀랄 일이다.

“이 녀석. 너무 잘했다.”

병규는 샤바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 순간만큼은 샤바가 더없이 귀여웠다.

덕분에 자칫 헛고생이 될 뻔한 일이 멋지게 마무리 된 것이다.

“가져와요. 샤바?”

샤바가 귀엽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물론!”

병규와 호랭이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와아 ..... 그럼 곧바로 가져올 게요. 샤바.”

주인의 신임이 기쁜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던 샤바는 손을 흔들며 어두운 밤길을 뛰어갔다.

사라지는 샤바의 뒷모습을 보며 병규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녀석이 많이 귀여워 보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맞장구를 치듯 호랭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잠시 후, 콧노래를 부르며 샤바가 끌고 온 것을 본 병규와 호랭이의 얼굴이 단번에 해쓱해졌다.

식량이라며 샤바가 들고 온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열 마리의 말을 끌고 왔던 것이다.

멍해진 얼굴로 호랭이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거 ...... 혹시 기사들의 말 아니냐?”

“네. 맞아요. 샤바.”

병규와 호랭이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 순간 둘의 뇌리에 동시에 떠오는 생각은 .......

‘하여간 다리만 달려있으면 뭐든지 주워오는구나.’ 라는 것이었다.

“저. 또 뭐 잘못한 거예요. 샤바?”

고개를 움츠린 샤바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병규에게 잘 보이려다 혼난 게 몇 번이던가.

발로 꼽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주인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휴. 아니야. 잘못한 거 없다. 이번만은 잘했어.”

병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거라도 가져가지 뭐.”

타던 말을 먹는다는 게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몬스터의 엉덩이 살을 베어 먹는 것보다는 백번 나으리라.

“그나저나 이 말을 어디서 얻었다고 해야 하나.”

다시 한 번 난감한 생각이 드는 병규였다.

병규는 우선 말안장만 남겨두고 나머지 것은 모두 버렸다.

말 위에 실려있던 짐을 버리던 중 병규는 의외의 횡재를 했다.

약간의 건량과 함께 돈주머니가 나왔던 것이다. 건량은 간식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반짝거리는 동전을 꽤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더 있을지도 모른다.’

금화의 누런 광택에 정신이 혼미해진 병규는 부리나케 짐들을 뒤졌다. 그러던 중 백마에 실린 작은 상자에서 금궤를 발견하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금궤가 10개나 들어 있었다.

‘흐읍’

병규의 숨이 가빠졌다.

‘이걸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병규의 두 눈이 몽롱해졌다.

‘더! 더! 있을지도 몰라.’

광포해진 병규는 이미 뒤졌던 짐까지 다시 뒤지는 열의를 보였다.

그렇게 구리구리한 냄새를 풍기는 양말까지 뒤집어가며 찾아낸 동전은 금화 50개, 은화 33개, 그리고 녹색 동전과 구릿빛 동전 여러 개. 또 눈부시게 빛나는 금궤 10개였다.

“만세.”

병규는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로또에 당첨이라도 된 듯이 기뻤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가 혀를 찼다.

“쯧쯧. 하여간 속물 같으니.”

하지만 병규의 헤벌쭉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잘했어. 아주 아주 아 ...... 주 잘했어.”

흡족해진 병규는 샤바의 뒷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골칫덩이가 한순간에 귀염둥이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금궤와 동전을 깡그리 수급한 병규는 요수의 발톱으로 말안장에 새겨진 공작가의 문장까지 죄다 긁어버린 후 태연한 모습으로 일행에게 돌아갔다.

“어디 갔었던 거야?”

없어진 그들을 찾아 헤맨 듯, 병규를 발견한 프리즘 용병들이 걱정스런 말을 건넸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병규는 가슴이 찡 ...... 할 뻔했는데.

나중에 남자고 여자고 모두 샤바만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그만 여린 가슴이 살포시 아파왔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난 말이냐?”

제이콥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주웠습니다.”

병규는 시침 뚝 떼고 대답했다.

“주워?”

사람들의 얼굴 위로 엷게 주름이 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끈적끈적한 그들의 시선에도 병규는 절대 굴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볼일을 보러 꽤 멀리까지 나갔는데 말발굽소리가 나더라.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달려갔더니 말들이 뿔 달린 짐승과 달밤에 체조를 하고 있더라.

버려진 말인 것 같아 잡으러 갔더니 도망가더라.

약이 올라 죽어라고 쫓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걸리고 만 것이다.

병규의 설명을 들은 모두의 얼굴,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뭐? 말들이 단체로 달밤에 체조를 해?”

‘미노타우르스와?’

물론 병규가 언급한 짐승은 소였지만, 이 동네에선 미노타우르스라고 하는 흉악한 몬스터였다.

“혹시 이 말들은 .......”

말이 딱 열 마리인 것으로 확인한 프리먼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

제이콥 또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벌어진 사건에 때문에 그들의 의구심은 휭 하니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침을 게게 흘리고 있던 호젤이 느닷없이 말의 목덜미를 물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말은 죽는다고 몸부림을 쳤다.

“헛. 말려.”

“호젤. 생으로 먹으면 탈난다. 익혀 먹어야지.”

그렇다. 

그들의 굶주림을 참다가 이미 한계상황을 살짝(?) 넘은 상태였던 것이다.

뇌리 한 구석에서 살며시 고개를 쳐들던, 버르장머리 없는 기사들의 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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