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8/102)

기왕에 할 도둑질이라면 확실하게 해야겠지?

  쏟아지는 햇빛.

텁텁할 정도로 건조한 날씨.

삭막한 대지 위를 걷는 말의 발걸음조차 축 늘어져 보인다.

붉은 대지는 사막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햇빛을 피할 그늘이 없다는 점에서는 괴롭긴 매한가지였다. 다행히 물은 있어 갈증은 면할 수 있었지만 주린 배를 채워줄 식량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일행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다.

그렇게 축 쳐진 사람들 중엔 병규도 있었다. 유달리 그의 어깨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처져있었다. 특별히 그는 남들보다 두 배정도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처음 타보는 말에 있었다.

제이콥과 함께 말을 탔을 때, 그는 신이 났다. 평생에 한 번 타볼까 말까한 승마가 아닌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호기심으로 반질거리던 그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통으로 일그러져 갔다.

다그닥 다그닥거리며 상하로 움직이는 진동에 허벅지와 엉덩이가 심하게 아파왔다.

게다가 그는 제이콥과 둘이서 말을 타야 했으므로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가끔씩 자세가 흐트러질 때는 어김없이 신선한 충격이 국부를 자극하곤 했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머리 위로 별이 총총 뜬 후에야 일행은 비로소 말을 멈추었다. 식량이 떨어진 이상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지만, 그렇게 혹사했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말들이 죽을 게 뻔했다.

간신히 쉴 수 있게 된 병규는 어기적어기적 땅바닥을 기었다.

보기보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은 체력소모가 심했다. 하루 종일 말에 시달리다 보니 걸을 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꼴좋구나.”

병규는 치질 수술 받은 환자처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든 채, 김빠진 푸념만 토해냈다.

“주, 죽겠어요. 서부 영화에서 볼 때는 멋있게 보였는데. 이거 엄청 곤욕이네요.” 

“이 놈아. 그럼 유모차처럼 안락한 줄 알았냐? 말과 한 몸이 되어서 움직여야지. 샤바를 봐라. 저 녀석은 멀쩡하잖아.”

죽겠다고 끙끙거리는 병규와 달리, 샤바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말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너무도 편안한 표정.

이따금씩 뭐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꼭 말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쯧쯧. 어째 이리 틀릴꼬. 한 녀석은 영판 귀공자인데, 다른 한 녀석은 막자란 쌍놈이구나.”

호랭이의 혼잣말에 병규는 쳇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쟨. 특별하잖아요. 저같이 평범한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되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들이 보기엔 병규도 충분히 이상한 사람이다.

심심하면 강아지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했으니 말이다. 말은 안 했지만 프리즘 용병단은 병규를 또라이... 비슷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호랭이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였다.

“호오. 네가 평범해? 어디 그 화끈거리는 엉덩이에 물 한 잔 뿌려볼까? 평범한지 그렇지 않은지?”

평범하다고 항변하는 병규를 호랭이가 거슴츠레한 표정으로 쭉 훑는다.

“됐어요. 물 뿌리면 금세 편해지긴 하지만, 재생될 때 굉장히 아프단 말이에요. 꼭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려서 영.......”

늙은이처럼 투덜거린 병규는 엉거주춤 편편한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어이고. 시원하다.”

바위의 냉기로 달아오른 엉덩이를 식히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엉덩이가 좀 괜찮아지니 새로운 고민거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닌가.

꼬르르륵!

“으윽. 이럴 줄 알았으면 샤바가 가져온 괴물 넓적다리라도 뜯을 걸 그랬나?”

병규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쉬워했다.

붉은 대지의 밤은 유달리 소란스러웠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몬스터들의 괴성으로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프리즘 용병단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밤새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다행히 병규와 샤바는 어리다는 이유로 열외되었다.

제이콥 일행이 병규의 귀와 샤바의 더듬이(지금은 머리카락으로 변했지만)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제이콥 일행들이 그런 것에 대해 알았다면, 이렇게 퀭한 눈으로 새벽을 맞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연일 피곤한 날이 계속되었다.

괴로운 여정 중, 한 가지 소식이 있었다. 샤바가 삼 일만에 웬만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대륙어를 익힌 것이다. 당연히 프리즘 용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살다 살다 이런 천재는 처음 보는군.”

마법사인 프리먼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며칠 여행하는 동안 프리먼과 샤바는 매우 친해졌다. 가르쳐 주는 대로 쭉쭉 빨아들이는 샤바의 천재성. 프리먼은 그런 샤바를 가르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를 지경이었다.

특히 프리먼의 마음에 쏙 든 것은 마나에 대한 샤바의 이해력이었다. 가끔씩은 가르치는 프리먼조차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질문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허허. 안타까운 일이야. 안타까워.”

샤바의 천재성이 빛을 발하면 발할수록 프리먼의 안타까운 탄성을 터트렸다.

마법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때문에 다른 어떤 학문보다 조기교육이 절실했다.

물론 희대의 천재들이 있어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뛰어난 성과를 이루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프리먼이 보기에 샤바는 정말로 인세에 드문 천재였다. 그런데 그런 천재가 이렇게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었다니. 샤바의 천재성이 빛을 발할 때마다 프리먼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려야 했다.

‘아무리 늦었다한들, 이 아이가 이대로 묻혀 버리는 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결심을 굳힌 프리먼은 샤바에게 마나에 대한 지식을 하나 둘 알려주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되기엔 이미 너무 늦은 나이. 대신 이론적인 마법학이라도 전수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 프리먼의 진심을 아는지, 샤바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한 얘기들을 싫은 내색하나 없이 고분고분 잘 들었다.

그야말로 열정적인 선생에 충실한 제자였다.

“저런 고리타분한 얘기가 대체 뭐가 좋을까?”

샤바와 프리먼을 돌아보며 병규는 혀를 내둘렀다. 잠시도 쉬자않고 떠들어대는 프리먼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골치 아픈 설명을 아무 불평 없이 계속 들어주는 샤바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병규가 입을 내밀며 투덜거리자 제이콥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 아무래도 자넨 마법사보다는 우리처럼 육체노동파인 것 같군.”

호탕하게 웃은 그는 병규의 귀에 은근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실은 나도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야.”

“호오. 역시. 제가 이상했던 게 아니군요.”

병규는 제이콥에게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저 샤바라는 친구. 대단한 걸?”

“뭐가요?”

“프리먼은 고든만큼이나 과묵한 사람이거든. 모르는 사람과는 여간해서는 대화도 잘 안 하는 편이지. 그런데 저렇게 신이 나서 떠드는 걸 보면 저 친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야.”

“헤요. 그렇군요.”

병규는 입을 삐죽거리며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샤바의 인기가 갑자기 급상승한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트라우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지쳐 쓰러지겠어.”

병규와 샤바가 프리즘 용병단에 합류한 지 삼 일째 되던 날.

급기야 사람들은 탈진해 버렸다.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호젤이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짜증 섞인 말을 던졌다.

“젠장. 너무 배가 고파서 오크 엉덩이라도 뜯어먹고 싶을 지경이네.”

물로 배를 채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꼬르륵거리던 배는 언제부터인가 끊임없이 시냇물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앞으로 삼사 일은 더 가야 사람이 있는 트라우마에 도착할 수 있는데, 벌써부터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이다.

“버텨. 십 일 정도는 음식 없어도 안 죽는다는 건 상식이야.”

“그거야.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 앉아 있는 경우지. 말 타는 게 얼마나 심한 노동인지 몰라서 그래?”

“으으. 떠들지 말아주세요. 의식이 멀어져.”

병규 역시 죽을 지경이었다. 발달된 문명 덕에 여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그다. 귀찮아서 밥을 안 챙겨먹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무작정 굶은 건 처음이었다.

“투정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제이콥은 피곤한 눈으로 일행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 역시 위장이 둘둘 꼬이는 것 같은 허기를 참기 힘들었다.

“으으으으. 꽃다운 나이의 병규는 이렇게 굶어죽고 마는 것인가.”

말 잔등이 축 늘어진 병규는 혀를 길게 베어 물며 아사 직전의 궁핍한 상황을 온몸으로 열연하고 있었다.

‘사람들 몰래 말이라도 잡아먹을까?’

병규는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의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말이 부르르 떤다.

그렇게 원하지 않던 기아체험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병규의 두 귀가 어느 순간 살짝 움직였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꽤 먼 거리.

‘음? 이건!’

가물가물한 곳에서 전해져오는 기척에 정신을 집중하던 병규의 두 눈이 활짝 떠졌다.

‘말발굽소리잖아?’

병규는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침 샤바도 머리카락을 더듬이처럼 쫑긋 세운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샤바야. 너도 느꼈냐?”

“네. 말이에요. 샤바. 말발굽 소리. 샤바샤바.”

두 사람이 반갑게 외치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뭣?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고?”

“어디야. 어디?”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은 광폭한 폭도들처럼 병규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들의 과격한 재촉에 병규는 켁켁거리며 먼 능선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들려요.”

“어디 어디?”

“안 보이는데?”

정신없이 병규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돌린다.

“능선 너머에 있어요.”

“능선 너머?”

호젤이 퀭한 눈으로 물어본다. 병규가 가리킨 능선은 꽤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난 소리를 들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환청이 들리는 거냐?”

제이콥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고생을 모르고 자란 녀석이라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병규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환청이 아니에요. 샤바도 들었으니까요.”

샤바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모두들 굶주림에 지쳐있었지만 유독 샤바만큼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저도 들었어요. 샤바.”

“정말이야?”

“확실한 거야?”

사람들이 다시금 묻는다. 눈 밑에 축 늘어진 다크서클이 유난히도 뚜렷하게 보인다.

“가보면 알 거에요.”

병규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워낙에 당당한 태도라 일행은 긴가민가하면서 그가 지시한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아닛!”

말을 타고 능선을 넘은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던 것이다.

십여 기의 기사들과 귀족가의 것으로 보이는 사두마차가 황량한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너. 정말로 말발굽 소리를 들은 거야?”

호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무리 황량한 대지에서 나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해도 이건 너무 먼 거리다. 이 정도 거리라면 숲의 종족인 엘프조차도 듣지 못할 것이다.

병규는 대답 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배 안 고파요?”

그제야 허기를 느낀 일행은 허겁지겁 마차로 달려갔다.

“멈추어라.”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십여 명의 기사단은 곧장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버드(Halbard)와 랜스(Lance)를 들이미는 모습이 흉엄하기 짝이 없었다.

“웬 놈들이냐!”

콧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이 근엄한 목소리로 외쳐 물었다. 제이콥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리며 대답했다.

“저희는 프리즘 용병단이라고 합니다. 트라우마로 가던 중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마차 앞을 막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피치 못할 사정?”

“그게...... 식량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제이콥이 주저주저 말을 꺼내자 중년 기사의 굵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구걸하러 온 것인가?”

“먹을 것이 필요해서 온 것은 맞지만 구걸은 아닙니다.”

호젤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두던 중년 기사는 비릿하게 웃었다.

“대뜸 길을 막고 먹을 걸 달라고 강짜를 부리는 것이 구걸이 아니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한다는 소리냐?”

중년인의 말에 기사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처음 보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무안을 주다니. 프리즘 용병단은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당장 궁한 것이 이쪽의 사정이라 목구멍까지 치솟는 화를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저흰 벌써 며칠째 굶고 있습니다. 음식을 조금만 나눠주십시오.”

제이콥은 정중하게 부탁했다.

자존심을 죽인다는 것.

남자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지루한 여정이었다.

몇몇 몬스터들이 달려들긴 했지만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가볍게 퇴치할 수 있었다. 붉은 대지의 악명을 익히 들어왔던 기사들에겐 김빠지는 여행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궁핍한 모습으로.

그들을 본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명예로운 기사다.

허나 기사가 갖추어야 할 명예로운 자질과 덕목들은 오직 지체 높은 귀족에게만 발휘되는 고귀한 물건에 불과했다.

“글쎄. 어떨까.”

중년 기사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길게 말꼬리를 늘인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들을 골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켄트 경. 잠깐 기다려 보시오.”

낭랑한 음성과 함께 마차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남 일녀였는데, 남자는 병규 또래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었고, 여자는 삼십대 중반의 요염한 인상이었다.

그중 켄트라 불린 중년 기사를 저지한 것은 화려한 외관의 청년이었다.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유독 눈꼬리가 솟아있어 다소 신경질 적으로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청년은 우선 제이콥 일행을 쓱 훑어보았다.

씨익.

지칠대로 지쳐 있는 프리즘 용병단을 본 청년의 입가에 사요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배가 고파서 왔다고?”

청년이 능청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제이콥은 청년이 귀족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정중한 태도. 그러나 켄트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허리에 찬 검을 빼들며 호통을 쳤다.

“이놈. 필립가의 문장이 안 보이느냐! 고개를 조아려라.”

강압적인 태도에 호젤이 눈썹을 치켜뜨며 나섰다.

“이봐요. 아까 말했듯이 우린 용병이에요. 그리고 아이린 왕국의 국민도 아니죠.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강요하는 거죠? 용병은 고용인 외에는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아요.”

“이곳은 엄연히 아이린 왕국의 국토다. 귀족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가 아닌가.”

“흥. 언제부터 붉은 대지가 아이린 왕국의 소유가 되었죠? 제가 알기론 아이린 천년 왕국사에 붉은 대지를 국토로 삼은 것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틀린가요?”

조목조목 따지는 그녀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무엄하다!”

일순 말문이 막힌 켄트의 칼이 부들부들 떨렸다. 극도로 흥분했다는 증거.

그때, 흥미로운 표정으로 일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던 청년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켄트 경. 그깟 일로 흥분할 필요는 없네.”

켄트를 진정시킨 그는 한 가닥 차가운 마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들....... 식량이 필요해서 왔다고 했나?”

“그래요.”

“호오. 구걸하는 입장치고 목이 너무 뻣뻣한 것 같군.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내게 절을 한다면 식량을 주도록 하지.”

그가 가리킨 인물은 다름 아닌 제이콥이었다. 청년은 그가 일행의 리더임을 눈치 채고 이렇게 농을 건 것이다.

“제이콥. 그럴 필요 없어. 가자. 이런 일로 자존심 구길 필요 없어. 그냥 며칠 굶자.”

호젤은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제이콥의 팔을 끌었다. 그러나 굳은 얼굴의 제이콥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콥!”

호젤이 버럭 고함을 질렀으나 제이콥은 가만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체력손실이 있으면 위험해. 이곳은 붉은 대지다. 우리가 지쳐 있을 때, 먼저처럼 오우거와 같은 몬스터를 만나게 된다면 우린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거야.”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한 그는 당황하는 호젤을 스치며 청년의 앞까지 나아갔다.

“내가 당신의 발 앞에 고개를 조아리면 남는 식량을 나눠주겠다는 말이 사실이오?”

제이콥의 말에 의외라는 듯 눈빛을 보내던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좋소.”

제이콥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제이콥!”

호젤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끝끝내 청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허. 동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쯤은 과감히 버린다. 괜찮은 남자로군.”

거만한 자세로 제이콥의 절을 받은 청년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기사들 중 한 명이 가까이 다가오자 청년은 그에게 귓속말을 몇 마디 했다. 기사에게 명을 내리는 그의 눈이 장난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저 자식이!”

뒤쪽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병규가 돌연 욕을 씹어냈다. 다행히 그의 욕은 한국어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었다.

밝은 귀 덕택에 청년의 귓속말을 들을 수 있었던 병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른 세상의 일이라 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간 병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제이콥의 팔을 끌었다.

“제이콥, 가요. 저 사람들은 나눠줄 생각이 없어요.”

“아니야. 그는 맹세했다. 귀족이라면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제이콥은 확인하듯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물론.”

청년은 거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확답을 얻은 제이콥은 처연한 시선을 병규에게 보냈다.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잠자코 있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저 사람이 부하에게 한 말은.......”

병규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려 할 때, 청년의 명을 듣고 사라졌던 기사가 돌아왔다. 기사는 작은 헝겊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받은 청년은 마치 징그러운 것을 만진 듯 두 손가락으로 툭 하고 던져주었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니, 가져가라.”

“고맙소.”

짧은 말로 인사를 감사한 대신한 제이콥은 즉시 헝겊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제이콥의 어깨가 휘청 흔들렸다.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을 퀴퀴한 냄새로 진동하는 상한 음식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먹으란 말이오!”

분노한 제이콥은 주머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청년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음식이지 않은가? 그대가 원하던 것일세.”

“그걸 말이라고 하는 말이오? 이건 먹을 수 없는 것이잖소. 어떻게 이럴 수가. 귀족이라면 응당 명예를 중시해야 하거늘. 어찌 사람이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준단 말이오!”

“호오. 좀 전에 그대가 말하지 않았는가? 남는 식량을 나눠달라고. 우리에게 남는 식량은 그것뿐이라 그걸 나눠준 것인데 뭐가 잘못됐단 거지?”

“그 무슨.......”

제이콥은 할 말을 잃었다. 설마 겸손하게 보일 양으로 한 말을 이런 식으로 악용할 줄이야. 얼마나 분했던지 눈두덩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참담한 심정을 누르고 있던 프리먼과 호젤은 어안이 벙벙했다.

“당신은 귀족의 덕목도 모르시오? 불쌍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의미이지 않소!”

프리먼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분노로 일그러진 외침. 그러나 청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를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흥. 내 나라의 백성도 아닌데 내가 왜 선정을 베풀어야 하지?”

능청스럽게 대답한 그는 흥분으로 벌겋게 상기된 호젤에게 느글느글한 미소를 보였다.

“이 말 또한 너희들이 한 말이다.”

청년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에게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대단하십니다. 도련님.”

기사들의 비웃음이 쏟아지는 가운데 켄드카 앞으로 나서며 거창하게 외쳤다.

“꺼져라. 감히 허절한 이유로 귀족의 마차를 막다니. 죽이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이!”

화산이 폭발하듯 호젤이 뭔가를 터트려는 순간, 멍한 눈으로 서있던 제이콥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됐다. 그만해.”

“하지만....... 하지만.......”

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호젤. 제이콥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너무하잖아.”

흥분해 떨던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휴.”

제이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가 위로해 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은 누가 위로해 주는가.

울분이 솟았다. 귀족나부랭이라며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것이 더없이 참담하게만 느껴졌다.

“가자.”

제이콥은 우울한 얼굴로 동료들을 이끌었다. 그때, 청년이 그를 불렀다.

“감히 귀족이 주는 은혜를 거절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헝겊 주머니를 턱짓하고 있었다.

몸서리쳐지는 굴욕감.

“좋은 말 할 때 도련님의 말씀을 듣는 게 좋을 거야.”

“귀족 모독죄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키득거리던 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꺼내들었다. 기사들의 흉엄한 표정을 쭉 훑어본 제이콥은 조용한 걸음으로 주머니를 들고 왔다.

“고맙소.”

“좋아. 그래야지.”

떠나가는 제이콥의 뒤로 청년과 기사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우마까지 고작 삼 일 거리다. 밤을 새서 달리면 굶어죽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하하하.”

으드득.

청년의 비아냥거림에 병규는 이를 갈았다.

  “젠장. 저열한 귀족 놈들.”

호젤은 발밑의 돌을 차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제이콥이 들고 있던 주머니를 확 빼앗아 들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금 가서 복수해 주자. 우리 실력을 보여주자고. 무능한 기사들 10명쯤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어. 증거만 남지 않는다면 누가 해치웠는지 어떻게 알겠어?”

흥분한 호젤을 제이콥이 말렸다.

“그만둬. 너도 봐서 알겠지만 얼치기 기사들이 아니야. 우리 용병단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쪽 피해가 전혀 없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다. 게다가 상대는 공작의 자제야. 단순히 귀족 살해혐의 정도가 아니라고. 게다가 아까 그 여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인상착의였다.”

“정령술사네.”

프리먼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공작가에 뛰어난 정령술사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인상착의를 보니 그녀가 틀림없는 것 같군.”

“정령술사 정도는 프리먼 아저씨가 해결해 줄 수 있잖아요.”

따지듯 물어오는 호젤의 말에 프리먼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와 정령술사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지. 그녀는 대륙에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지만 난 그렇지 못하단다.”

“하지만......!”

제이콥은 고개를 흔들며 항변하려는 호젤의 입을 막았다.

“참아라. 분하고 원통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야. 넌 어세신 출신이잖니. 가장 냉철해야 될 네가 이렇게 흥분하면 어떡하냐.”

“제길.”

그녀는 울었다. 분해서 울었다.

“치졸한 자식들. 고작 먹을 거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분하게 만들다니.”

그들에겐 권태로운 여행에 흥을 돋우어 줄 유흥거리였는지는 몰라도. 이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프리먼은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고, 고든은 배틀해머를 꺼내들고는 쿵쿵 바닥을 찍었다.

“분해하지 않아도 돼. 녀석의 말대로 트라우마까지 이제 고작 삼 일이다. 밤새도록 달리면 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 때는 우리 배가 터지도록 먹자.”

제이콥은 실망한 동료들을 애써 다독였다. 공작가의 치졸한 행동에 분통을 터트리던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귀족의 자제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판결 없이 즉결 심판, 즉 그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일이 잘못되어 그들의 소행임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끝없는 도망자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용병들은 국법에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렇다고 공작가의 자제에게 대놓고 저항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병규는 결코 그들처럼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만 그의 사상으로는 얼토당토 않는 말에 불과했다.

게다가 최근 그는 인생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비겁하게라도 잘 살아보는 것으로.

‘이렇게 된 이상 도적질이라도 해야겠어.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겠지?’

병규의 입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