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7/102)

내 이름은 카피(COPY)

  나름대로 화끈했던 아침이 지나고, 일행은 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길을 떠났다.

물론 그들은 샤바가 가져온 오거의 넓적다리엔 일별도 주지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몬스터의 고기를 먹다니.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쫙 돋는 그들이었다.

제이콥과 일행들은 한 사람에 한 마리씩, 말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 갈 말이 없는 병규는 제이콥과 같이 타고, 샤바는 마법사인 프리먼과 함께 탔다.

출발하기 전, 샤바를 누가 태우는가 하는 문제로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

호젤이 부득불 자기가 태우겠다고 우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멀겋게 풀린 눈동자를 본 사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샤바를 호젤에게 맡겼다간 대낮부터 공개 도색 영화가 상영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되고, 제이콥은 당연하다는 듯이 병규와 샤바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무턱대고 동행하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어설픈 거짓말로는 들통 날 게 뻔하다는 걸 알게 된 병규는 무조건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희들은 키 큰 도마뱀들에게 잡힌 상태였어요. 도마뱀들은 저희들을 노예로 부리려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자는 틈을 타 도망친 거예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거냐? 이름도? 나이도? 살았던 곳조차?”

“이름은 기억나요.”

제이콥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각 나라마다 독특한 억양이 있다. 때문에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대충이나마 출신지를 파악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는 병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제 이름은 태병규에요.”

병규의 이름을 들은 제이콥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변기?”

움찔.

병규의 어깨가 흔들렸다. 제이콥의 어설픈 발음에서 문득 아픈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항상 엉뚱하게 불러댔던 퀴니.

불긴한 예감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서, 설마 이곳 사람들도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것이 아닐까?’

병규는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다시 말했다.

“벼엉규.”

“벼언기.”

“쿡쿡쿡.”

어깨 위의 호랭이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병규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가만 보니 사태는 자신의 생각대로 최악의 방향으로 흐르려 하는 것이 아니가. 자칫하다간 보는 사람마다 지산을 ‘대변기’라고 부르게 될 판이다.

‘이름을 대체할 예명이 필요해.’

끙끙하며 고심하던 병규는 문득 좋은 이름이 떠올랐다.

“카피(COPY)!"

그것은 특수재해대책본부에서 그에게 부여한 코드명이었다.

“카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제이콥이 그의 새로운 이름을 중얼거린다.

병규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생각대로 버터끼(?)가 흘러넘치는 단어라 그런지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다.

“네, 그래요. 제 이름은 카피예요.”

“흐음. 이름으로 보니 바호크 공국의 출신 같군. 그런데 처음 말한 대변기라는 것은 뭔가?”

“그, 그건 그냥 별명 같은 겁니다.”

“흠. 별명이라. 묘하게 정감 가는 말인걸.”

“아하하. 가, 가끔 그런 소릴 듣곤 하죠.”

병규는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그건 그렇고 ‘바호크 공국’이라면 여기에서 꽤 멋 곳인데. 어쩔 생각이지?”

제이콥은 진지한 표정으로 병규의 행로를 물어왔다.

“글쎄요. 딱히 제가 그곳 출신이라는 증거도 없고....... 그나저나 제이콥은 어디로 가는 거죠?”

“우리는 ‘아이린 왕국’의 트라우마라는 곳으로 가는 중이다. 여기서 일주일 정도 말은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

“흐음. 그럼 우선 저희도 그곳으로 가볼래요. 그 다음 행선은 그곳에  도착한 다음에 생각해볼 게요.”

“흐음.”

제이콥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잠시 신중하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들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기억이 안 난다는 것도 거짓말인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황량한 대지에 그냥 버려두고 갈 수도 없으니.’

그는 곁눈질로 병규의 몸을 살펴보았다.

가는 목, 엉성한 팔다리.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허리.

약해빠진 몸이다.

“휴.”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병규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제이콥에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엄청난 점프력과 재생력.

무엇이든 갈라 버리는 요수의 발톱.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

적외선 스코프를 능가하는 시력.

그리고 주위의 기척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귀까지.

병규의 능력 중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은 겉으로는 일체 드러나지 않았다. 때문에 모르는 사람은 항상 그를 약하게 보곤 했다.

제이콥 역시 그런 경우다.

‘이런 애들을 버려두고 가면 간접살인이나 마찬가지지.’

결국 제이콥은 병규와 샤바를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까짓것. 이렇게 어린애들인데 무슨 큰 일이 있으려고.’

  어영부영 프리즘 용병단에 합류하게 된 병규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는 이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돌아갈 때를 기약할 수 없는 이상, 기본적인 정보만이라도 알아야 한다.

우선 그는 동행하게 된 제이콥과 그 일행들에 대해 물었다.

제이콥은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묻는 말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들은 용병으로 스스로를 프리즘 용병단이라 칭했다.

용병단이라고는 하지만 인원은 여기 있는 네 명이 전부. 하지만 실력과 명성은 대규모 용병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이콥의 설명이었다.

먼저 리더인 제이콥은 턱수염을 짧게 기른 인물로 강인한 인상만큼이나 실력이 뛰어난 자다.

그의 무기는 오우거와의 혈투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그레이트 소드.

보통 사람이라면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든 이 칼을 그는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의 실력은 이드라센의 수많은 용병들 중에서도 발군이라 했다.

제이콥과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는 과묵한 거한의 이름은 고든이다.

거대한 베틀 엑스를 무기로 사용한다. 2미터가 넘는 신장에다 웬만한 여자 허리만 한 팔뚝, 백 킬로에 가까운 베틀 엑스를 한 손으로 휘두를 정도로 힘이 장사다.

그는 굉장히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며칠 여행하는 동안 병규는 그가 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고든의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샤바를 훔쳐보고 있는 여자는 일행의 홍일점인 호젤.

검은빛이 많이 도는 갈색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그녀는, 일행 중 가장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주무기는 작은 단도 두 자루. 과거에 어세신 일을 좀 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몸이 날렵했다.

당사자의 말로는 용병단 내의 삭막한 분위기 타파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있다지만, 사실 그녀는 프리즘 용병단 최고의 골칫덩이였다.

마지막으로 긴 망토를 걸치고 있는 중년인. 그는 4서클의 마법사로 프리먼이라 불렸다. 마른 몸에 평범한 인상이라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마법사란 말에 병규는 그를 힐끔 살폈다.

특별히 마법사에게 흥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마법이라면 이미 퀴니를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다. 비록 하급의 마법들이긴 했지만.

“그런데 4서클 마스터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병규의 물음에 제이콥은 이마에 주름을 그렸다.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냐?”

당연히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퀴니가 마법을 쓰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몇 서클이라는 식의 분류는 처음 들은 것이다.

“마법사는 마나의 이해에 따른 단계가 있는데, 그걸 서클이라고 불러. 그 구분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서클이 높을수록 뛰어난 마법사라고 볼 수 있지.”

“흠. 그럼 몇 서클이 가장 높은 거죠?”

“글쎄. 9서클이 인간의 한계라고 말하는 마법사들도 있고, 10서클이 최종이라고 부르짖는 마법사도 있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거야. 하지만 무식한 나도 한 가지 아는 사실은, 현재 이드라센에서 가장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8서클 마법사라는 것과 역사상 가장 높은 서클의 마법사인 에반 실브리언이 9서클 유저였다는 사실이야.”

“흠. 그렇군요.”

실제 마법의 끝이 몇 서클이건 간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계는 9서클 정도라는 설명이다.

이어 제이콥은 마법사가 되려면......

첫째 재능을 타고 나야 하고,

둘째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며,

셋째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마법사는 매우 귀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프리즘 용병단이 대단한 거야. 일반적으로 100명 이상의 큰 용병단에 속해있는 마법사도 고작해야 2서클 마스터나 3서클 유저 정도라고. 그런데 우리 용병단은 무려 4서클 마스터가 떡하고 버티고 있지. 하하. 넌 잘 모르겠지만 이건 엄청난 일이라고.”

제이콥은 고작 네 명에 불과한 자신의 용병단에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뿌듯하게 여겼다.

자화자찬격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병규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퀴니는 과연 몇 서클의 마법사였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조차 없다. 너무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뭉클 솟은 병규는 괜히 말갈기만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샤바와 같은 말을 타고 있던 프리먼이 갑작스레 경악성을 질렀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깜짝 놀란 일행들이 일제히 프리먼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일행들이 묻자 프리먼은 말을 같이 타고 있는 샤바를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샤바에게로 쏠렸다. 쏟아지는 삼엄한 눈길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눈길들에 무안할 만도 하건만 샤바는 도리어 방긋 웃음을 보였다.

눈이 부신 미소였다.

“이 아이가 왜?”

사람들의 두 눈에 의문이 서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황홀한 미소만 뺀다면 말이다.

“흠흠.”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프리먼은 헛기침을 했다.

“같이 말을 타게 된 것을 계기로 난 이 아이에 대해 알아보려고 이런 저런 말을 했지. 생소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입고 있는 복장도 특이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가 궁금했네. 그런데.......”

샤바는 이곳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 손발을 활용한 바디 렝귀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대화를 이끌어가던 중, 샤바가 드문드문 그가 사용한 단어를 금방 따라하는 것을 알게 된 프리먼은 신기한 생각에 ‘하늘, 구름, 땅’ 하는 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명사들을 알려주었다. 샤바는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쉽게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고작 네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놀랍게도 샤바가 더듬더듬 기본적인 일상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가히 경악할 만한 언어습득능력.

“그게 사실이냐?”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제이콥이 샤바에게 물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해지다니. 프리먼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리다.

제이콥의 물음에 샤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조금 말할 수 있다.”

어색한 어투였지만 발음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샤바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한 천재로군.”

“놀라워.”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샤바의 천재성을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만 긁적였다.

“쳇. 난 배우지 않고도 여기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는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샤바를 째려보며 불만스럽게 조잘거리는 병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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