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녀석은 대체 언제 나타난거지?
리저드맨을 지나친 이후로 별 다른 일이 없었다.
강가를 따라 펼쳐지는 숲의 풍경은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샤바의 뱃속에서 들려오는 ‘꼬로록’ 하는 소리가 거슬리는 정도였다.
리저드맨들이 있었던 곳을 벗어난 지 한참이 되었건만, 샤바는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듯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빨았다.
그때마다 뱃속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꼬로록’ 소리가 병규와 호랭이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삼 일쯤 더 걷고 나서야 병규 일행은 숲의 끝에 닿았다. 형형색색의 신비로운 빛깔을 자랑하는 숲을 지나자, 피처럼 붉은 빛깔의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무슨 흙 색깔이 이렇게 살벌해.”
아름다운 숲을 벗어나자마자 맞닥뜨린 붉은 대지가 못마땅한 듯 병규는 괜히 구시렁거렸다.
“평범한 황토는 아니군. 입자가 너무 거칠어.”
발바닥으로 흙을 긁어보던 호랭이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 대지의 빛깔 때문일까.
아늑한 요정의 숲과 달리 이곳은 너무도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삭막한 칼바람.
마치 오아시스 너머 황폐한 사막을 마주한 것 같았다.
“기분 나쁜 곳이네요. 빨리 가도록 하죠.”
병규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했다. 옷깃을 여미는 그의 표정이 떫은 감을 깨문 것처럼 떨떠름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동안 그들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쏟아지는 태양빛과 간간이 들려오는 이름 모를 짐승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차가운 바람에 섞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전부였다.
어느덧 호랭이의 말수가 적어졌다. 작은 기척에도 귀를 쫑긋거렸다. 태생이 맹수인지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 반해 샤바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즐거웠다. 척박한 땅을 하루 종일 걷는 강행군. 지칠 만도 하건만 발걸음도 가볍게 랄라라...였다.
“샤바샤바샤바샤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샤바를 질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병규가 한마디 툭 던졌다.
“넌 이름으로 노래까지 부르냐?”
병규의 불만 가득한 물음에 샤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배시시 웃는다.
“네. 샤바. 저희는 이름에 자긍심이 대단해요. 샤바샤바.”
두 손을 척 허리에 걸친 채 으쓱하는 모습에서 자부심이 홍수처럼 느껴졌다.
“허이구. 그러셔. 정말 대단한 종족이구나.”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이유 없는 윽박지름에도 티 없이 밝은 샤바.
‘이건 내가 마치 팥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군.’
쓸데없이 주인공에게 시비 거는 엑스트라가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때 맞춰 호랭이가 한마디를 툭 던진다.
“왜? 요즘 존재감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발악하는 거야? 아서라. 추해 보인다.”
순간 엄습해오는 좌절감.
“에효.”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강을 따라 하류를 걷다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오늘도 노숙이야?”
병규는 처량하게 한숨을 쉬었다. 풀리는 일이 없어서일까. 요즘 부쩍 한숨이 많아진 그였다.
사람이 그리웠다.
호랭이와 샤바가 말벗이 되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풋내 나는 사람들의 구수한 입담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막 샤바와 함께 장작을 모으려 할 때였다. 어두운 평야 저편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두 눈이 마주쳤다.
모닥불을 피우는 거라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병규는 장작더미를 내팽개치며 노랗게 일렁이는 불빛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근방까지 달려간 병규는 발소리를 죽이며 은밀하게 접근했다.
하찮은 도마뱀조차 방사능 맞은 돌연변이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세상이다.
토끼가 모닥불에 멧돼지를 구으며 쿵덕쿵... 떡방아를 찧고 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살금살금 접근해 살펴보니 다행히 모닥불 가에 앉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양인들을 닮은 듯한 체형과 생김새였지만 분명 사람들이었다.
병규는 왈칵 반가운 마음에 수풀 밖으로 불쑥 몸을 드러냈다.
“야호!”
절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 마치 이산가족을 상봉한 것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
“누구냐!”
병규의 갑작스런 등장에 크게 놀란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재빨리 무기들을 잡고 병규를 겨눈다. 그 반응이 놀라울 정도로 신속했다. 병규를 노려보는 그들의 눈은 짙은 경계심을 띠고 있었다.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황무지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이들의 반응은 자연 거칠 수밖에 없었다.
“엇?”
리더로 보이는 사내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비져 나왔다.
바위 뒤에서 뛰어나온 것이 몬스터가 아니라 소년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키는 다 자란 성인 정도였지만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비록 어리더라도 그는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몬스터 중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여행자를 현혹하는 교활한 놈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거 분위기가 너무 살벌한 걸?”
사람들의 지독한 경계에 머쓱해진 병규는 괜스레 뒷머리만 긁적였다.
“다시 묻겠다. 누구냐?”
선두의 사내가 검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전혀 낯선 언어였지만 이번에도 병규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연 병규였지만, 막상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누구냐는 질문에 ‘병규인데요?’ 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인간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손을 브이 모양으로 내밀며 ‘반갑습니다.
차원을 넘어온 이계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PEACE, 평화입니다. 여러분! 손가락을 내밀어 주세요. 자전거와 함께 하늘을 날게 해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이번 이벤트 기간 동안은 50% 디스카운트된 저렴한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라는 시골 약장수 같은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글쎄요. 누구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병규는 대답할 말을 찾느라 끙끙거려야 했다. 이렇게 되자 그를 향해 칼을 겨누고 서 있던 사람들 역시 난감해졌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더니, 이번엔 간단한 질문에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민한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한편, 병규는 자신만의 생각에 점점 빠져들었다.
턱을 감싸 쥐었다가 뺨을 긁기도 하고, 급기야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땅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에...... 그러니까 설라무네. 길을 걷다 운석이 떨어져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 그런데 운석을 머리에 맞고 이렇게 멀쩡하면 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래. 머리통 한쪽이 좀 찌그러져야 말이 되지. 안 되겠다. 다른 걸 생각해야지. 그래, 두 발로 뛰어다니는 도마뱀 무리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다고 하자.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 떠나갔다고 하자. 흐음. 아니야. 요놈도 좀 이상해. 도마뱀들에게서 어떻게 도망쳤냐고 물으면 또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잖아. 귀찮아. 귀찮아. 그럼 도마뱀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했다고 할까?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그런데 남자가 성폭행 당했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 그것도 도마뱀들에게? 바지 자크를 강제로 내리는 것이 아니겠어요오오...!! 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점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병규였다. 보다 못한 호랭이가 빽 소릴 질렀다.
“바보야. 그냥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
탁!
“아하.”
고민하던 병규는 호랭이의 한 마디에 깨달음을 얻은 듯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러네. 길을 잃어버렸다는 무난한 핑계거리가 있었어.”
절묘한 대꾸라고 생각한 병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 길을 잃어버렸어요. 하하.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네요. 하하하.”
“.......”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무난한 대답(?) 한 병규였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에? 뭐가 이상한가요?”
병규가 엉성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두에 선 사내가 눈빛ㅇ르 차갑게 빛내며 물었다.
“길을 잃어? 이곳에서 인가까지는 말로 달려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먼 곳인데?”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병규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꾸했다.
“흥.”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넌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곳은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저주받은 땅. 붉은 대지다. 기사들조차 단독으로는 절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공포의 땅이 여기다. 이런 곳에서 일주일이나 헤매고도 살아있다고?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
신랄하게 허점을 집어오는 사내의 예리한 질문들. 병규는 단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알아야 대답을 할 게 아닌가. 심지어 이곳을 붉은 대지라고 부른다는 것조차 처음으로 알게 된 그였다.
병규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사내는 입가를 들어올렸다.
“되도 않는 헛소리는 그만두고 솔직하게 목적을 밝히는 것이 어떤가?”
“아아. 그것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병규는 두 손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순순히 바른 말을 불지 않을 생각인 것 같군. 좋아. 그런 식이라면 어쩔 수 없지.”
무기를 꼬나든 사람들이 천천히 접근해왔다. 병규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끝내 손을 쓸 생각인 것이다.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병규는 마빡에 ‘전 수상한 사람입니다.’ 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어째. 여기 온 이후로 만나는 생물마다 날 사로잡으려 드네.”
병규의 입에서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가지도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물론 따지고 보면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진 하지만 말이다. 애초부터 어쭙잖은 핑계를 댄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어쩌겠냐? 그게 다 네 녀석의 복인걸.”
호랭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키득거린다.
마치 병규의 불행을 즐기는 것 같았다. 얄미운 호랭이의 웃음소리에 병규는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후일을 생각하며 애써 참았다.
지금이야 호랭이가 작으니 몇 대 쥐어박아도 충분히 수습이 가능하지만, 나중에 호랭이가 모습을 되찾게 되면, 그때부터는 순식간에 입장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도 지금은 기필코 참아야 했다.
병규가 호랭이의 독설에 무념무상의 도를 되새기고 있을 때, 천천히 다가오던 사람들이 돌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요정의 숲에서 만났던 도마뱀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대화할 준비들이 덜 되신 것 같으니. 일단 분위기부터 잡고 보죠.”
병규의 몸이 쓱 하고 움직였다.
사내들은 병규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는 듯, 무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신체가 건장한 사내들이라 맨몸으로 덤벼드는 것임에도 묘한 박력이 넘쳐났다. 애송이를 상대한다는 자만심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대해 용병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오가고 있었다.
‘요정의 숲에서는 그 무엇도 믿지 말며, 붉은 대지에서는 그 무엇도 얕보지 말라.’
닳고 닳은 용병들 사이에 이런 말이 떠돌 만큼 이 지역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사내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곤란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병규 역시 슬슬 행동을 개시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한차례 드잡이질은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역시 말보다는 몸으로 대화하는 것이 편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아쉽게도 둘 간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새로운 위험이 그들을 엄습해오고 있었던 것.
미세한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병규였다.
“잠깐!”
병규가 두 손을 내밀어 보이자 막 몸을 날리려던 사내들은 흠칫 놀라며 급히 몸을 세웠다.
“이제야 바른 말을 할 생각이 든 거냐?”
선두의 사내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병규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에요.”
사내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병규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때, 뒤늦게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을 눈치 챈 호랭이의 귀가 쫑긋 솟았다.
“크, 크다.”
호랭이는 화들짝 놀랐다. 멀리서 들려오는 이 묵직한 진동.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진동만으로도 충분히 놈의 엄청난 크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혹시, 이 동네에 두 발로 뛰어다니는 큰 동물이 있나요?”
“뭐?”
병규의 질문에 사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해오는 그의 뜻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병규는 답답했다.
지금 느껴지는 기척을 이들에게 알려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접근해 옴에 따라 미미하게 전해오던 진동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곧이어는 급기야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규에게 다가가던 사내들의 발걸음이 일시에 멈춰졌다. 마치 거대한 헤머로 땅을 두드리는 듯, 너무도 선명하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땅.
이러한 정황은 지금 접근해 오고 있는 생명체가 얼마나 큰 거체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사내들이 주춤하는 사이,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검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재빨리 바위 뒤로 올라갔다. 곧이어 들려온 그녀의 비명과 같은 외침에 사내들의 표정이 싹 변해버렸다.
“오, 오우거(Ogre)."
“젠장.”
선두에 선 사내, 제이콥의 입에서 욕지기가 쏟아졌다.
“어째 조용하다 했더니.”
그는 재빨리 몸을 틀더니 한쪽에 묶어 놓은 말을 향해 달려갔다. 말들은 이미 거대한 몬스터의 존재감을 느끼고 흥분한 상태였다. 간신히 말들을 안정시킨 그는 고삐를 풀어놓았다.
오우거는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신장에도 불구하고 달려오는 속도가 엄청났다.
보통의 오우거가 쫓아온다고 도망가기 힘든데, 더더구나 이곳은 붉은 대지가 아닌가.
말 그대로 몬스터들의 미쳐 날뛰는 저주받은 곳, 붉은 대지.
도망갈 생각은 애초 갖지도 말아야 했다.
쿠워어어어!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괴성이 붉은 대지 위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어둠을 뚫고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족히 4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키.
구겨진 철판을 망치로 정성껏(?) 두드려 편 것 같은 흉측한 면상.
마치 악몽에 비할 만한 괴물이 아닌가. 과연 붉은 대지의 몬스터답게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오우거는 보통의 오우거보다 덩치가 훨씬 거대했다.
“워! 워!”
제이콥은 말 엉덩이를 때리며 말들을 오우거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몰았다.
사람 대신 말을 희생시킬 생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우거는 거품을 흘리고 달려오는 말들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고기 맛을 본 놈이군.”
제이콥은 이를 악물었다.
한 번이라도 사람을 잡아 먹어본 몬스터는 미친듯이 사람고기를 즐기게 된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오우거가 바로 그런 놈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제이콥은 무기를 꺼내들었다.
2미터가 넘는 육중한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트 소드(Great sword)라는 물건.
이드라센 대륙에서는 거대한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비교적 크고 무거운 중병기를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런 중병기 중에서도 제이콥의 그레이트 소드는 발군이었다.
“호젤, 뒤로 물러서. 프리먼,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고든, 나가자.”
재빨리 명령을 내린 그는 힘차게 앞으로 나섰다.
듬직한 덩치의 거한이 배틀 엑스를 어깨에 걸친 채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자 오우거는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나무둥치를 들고 휘둘렀다.
‘부웅’ 하는 웅휘한 바람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제이콥은 급히 몸을 수그렸고, 순발력이 좀 떨어지는 고든은 급한 대로 배틀 엑스로 앞을 가로막았다.
과연 오우거의 힘은 대단했다.
고든 역시 인간치고는 보통사람보다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지만, 오우거의 힘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쿠웅’ 하는 무직한 충돌음과 함께 고든의 큰 동체가 ‘부웅’ 하고 떠올랐다.
“이놈!”
고든이 요란스럽게 넘어지는 사이, 제이콥은 오우거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그레이트 소드를 힘껏 휘둘렀다.
위협을 느낀 오우거는 왼팔을 휘저으며 칼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아무리 육중하고 둔해 보여도 그레이트 소드는 칼. 뼈와 살로 된 맨손으로 잡기엔 무리였다.
‘서걱’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오우거의 손가락 몇 개가 단박에 잘려 나갔다.
크워어어어!
오우거의 괴성이 밤하늘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병규는 오우거의 압도적인 위용에 얼이 빠졌다. 기척으로 대충 키와 체중 등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이건 정말 엄청난 놈이 아닌가.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힘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놈이 나무둥치를 휘두를 때마다 폭풍과 같은 바람과 함께 흙먼지 기둥이 주위를 휩쓸었다.
“무시무시한 동네구먼.”
병규는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지구에 생존하는 그 어떤 맹수도 눈앞의 오우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한편, 병규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제이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오우거의 손가락 몇 개를 간신히 잘라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달려들며 휘두른 오우거의 일격에 그만 어깨를 스쳐 맞고 말았다.
“크윽!”
둔한 고통이 전신을 눌러왔다. 그러나 신음을 흘릴 여유도 없었다.
통나무 구르듯 무섭게 구른 그를 오우거의 거대한 발이 벌레 밟듯 찍어눌러왔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파이어 볼(Fire Ball)!"
프리먼이 때마침 캐스팅을 마치고 급히 마법을 시전했다.
밤하늘을 달구며 날아간 시뻘건 화염구는 오우거의 가슴에 무서운 기세로 작렬하였다.
콰쾅!
무직한 폭음과 함께 성난 화염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급하게 시전한 것이라 3서클의 마법치고는 위력이 다소 떨어졌지만, 그래도 상당한 위력이었다.
오우거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그사이 제이콥은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었다.
“괜찮은가?”
거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제이콥은 찡그린 얼굴로 대답했다.
“뭐, 그럭저럭. 자네는?”
그는 비스듬히 맞았지만 고든은 최초의 일격을 정통으로 맞고 가랑잎처럼 날아갔었다. 한데 이 듬직한 사내는 배틀 엑스를 한손에 쥔 채 털털하게 웃기만 했다.
“뭐, 벌레에게 물린 정도지.”
그의 태연한 모습에 제이콥은 피식 웃었다.
“뒤통수를 바위에 그렇게 심하게 부딪히고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드라센 대륙을 전부 뒤져도 자네 하나뿐 일거야.”
“칭찬으로 듣지.”
“쳇. 마음대로 생각해. 우선은 저 못생긴 몬스터부터 처리하고 보자.”
프리먼의 마법 지원에 용기백배한 두 사람은 불길에 휩싸인 오우거를 향해 돌진했지만, 막상 오우거는 전혀 엉뚱한 상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병규였다.
크워어어!
오우거가 입을 벌리자 벌건 잇몸과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심한 악취가 코를 찔러왔다. 허나 병규의 얼굴은 의외롤 담담했다.
엄청난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이래뵈도 너 같은 괴물을 상대하는 것에는 이골이 난 몸이야.”
지구에 있을 때부터 스크래그와 가라스텐구 같은 괴물들을 심심찮게 상대했지 않은가.
그는 오우거를 올려다보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는 다른 이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저 녀석, 왜 도망도 안 가고 가만히 서 있는 거야?”
“제길, 너무 무서워서 도망도 못 가는 것 아냐?”
오우거를 올려다보는 병규의 모습.
다른 이들의 눈엔 꼭 겁에 질려 도망도 못 가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것.
그런 위기감은 오우거의 팔이 병규의 머리를 찍어갈 때 최고조가 되었다.
“피해!”
막 오우거의 두터운 손바닥이 병규의 머리를 후려치려는 찰나, 검갈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병규를 감싸 안고 몸을 굴렸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호젤이었다.
“우악!”
느긋하게 오우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병규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몸을 날린 그녀의 플라잉 바디촙에 그만 맨땅에 헤딩을 하고 말았다.
이어 돌기둥처럼 떨어지는 오우거의 손바닥을 피해 땅바닥까지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아니, 그렇게 달려들면 어떡......”
간신히 오우거의 공격을 피한 병규는 눈을 부릅뜨며 호젤에게 따지려했다. 그러나 웬걸? 오히려 그녀가 도끼눈을 한 채 병규에게 빽 소릴 지르는 게 아닌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오우거가 눈앞에서 설치는데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병규의 멱살을 짤짤짤 흔들더니 머리까지 인정사정 없이 쥐어박았다. 병규는 굉장히 억울했지만 목숨을 걸고 달려와 준 것이 가상해 애써 참았다.
“호젤, 취향이 그쪽이었냐? 아주 신혼방을 차려라. 정신 차렸으면 빨리 뒤로 빠져!”
뒤늦게 달려온 제이콥이 병규를 타박하고 있는 호젤에게 농을 걸었다.
“헤헤. 질투하는 거야?”
“헛소리 그만하고 비키기나 해. 녀석이 또 달려든다.”
제이콥의 말처럼 눈을 벌겋게 뜬 오우거가 광폭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방해되니까 우린 빠져 주자.”
호젤은 병규의 손을 잡아끌었다. 허탈한 표정의 병규는 마치 엄마에게 끌려가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에게 질질 끌려갔고, 제이콥과 고든이 그의 빈 자리를 메웠다.
제이콥을 본 오우거는 미친 황소처럼 발광했다. 그러나 제이콥과 고든이 힘을 모아 맞서고, 프리먼이 가끔씩 마법을 날리자 괴력의 오우거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콥의 그레이트 소드가 오우거의 심장에 박혔다.
쿠워어어!!
마지막 괴성과 함께 오우거는 썩은 고목처럼 무너져 내렸다.
“헉헉! 제길. 돈도 안 되는 일에 힘을 너무 뺐군.”
제이콥은 바위에 기댄 채 거친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 길게 늘어진 오우거를 슬쩍 쳐다본 그는 치가 떨리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붉은 대지의 몬스터는 난폭해도 너무 난폭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은 타 지역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강하고 더 흉폭했다. 오크조차 이곳 출신이라면 뭐가 달라도 달랐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제이콥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피 냄새를 맡고 근처의 몬스터들이 모두 몰려올 거야. 빨리 여길 뜨는 게 좋겠다.”
제이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오우거 한 마리만으로도 완전 탈진 상태다. 더 이상 다른 몬스터들과 싸우는 것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제이콥이 휘파람을 불자 말들이 돌아왔다. 말 잔등에 짐을 싣고 막 떠나려던 일행은 병규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병규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
특히 호젤에게 보내는 눈빛이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었다.
“제이콥.”
호젤이 비음 섞인 목소리로 리더를 불렀다.
“알았어, 알았다고.”
제이콥을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병규를 불렀다.
“어이. 일단은 너도 함께 가자.”
‘오호라.’
병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괴물의 난입으로 일이 엉뚱하게 꼬이긴 했지만, 오히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잘 풀리는 분위기다.
히죽 웃어 보인 병규는 곧장 제이콥의 말 위에 올라탔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지금은 위험하니까 잠시 태워주는 것뿐이야.”
병규를 말안장에 올리며 제이콥이 경고했다. 허튼 수작하지 말라는 소리다.
병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간만에 만난 사람들이다.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지만 단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았다.
한 시간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고서야 일행은 비로소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너무 피로한 나머지 불을 피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잠자리부터 폈다.
병규가 어정쩡하게 서 있자, 제이콥이 말잔등에서 두꺼운 모포를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
“네 문제는 내일 물어보도록 하겠다. 일단은 자 두도록.”
무미건조한 말투. 그러나 병규는 그런 제이콥을 보며 씩 웃었다.
“의외로...... 괜찮은걸?”
무뚝뚝한 남자이긴 하지만 냉정한 사람은 결코 못되는 사람.
병규는 그가 던져준 모포를 바닥에 대충 깔고 벌렁 드러누웠다.
색색의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염된 도시의 하늘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
“아흥.”
기지개를 쭉 켠 호랭이가 병규의 가슴 위에 올라와 빙글 몸을 만다. 피곤했던지 곧 차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오우거의 습격이 있었는데도 호랭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하긴 그동안 경험한 괴물만 해도 엄청난 녀석들뿐이었으니.......
병규는 조심스레 호랭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호랭이 신선님.’
다음 날, 벌겋게 터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지친 팔다리를 두드리던 제이콥은 비명 아닌 비명을 질러야 했다. 밤새 일행이 한 명 더 늘어있었기 때문이다.
골아 떨어졌던 일행들이 화들짝 깨어나 그에게 달려왔다.
“뭐, 뭐야?”
“또 몬스터가 나타난 거야?”
동료들의 독촉에 제이콥은 굳은 얼굴로 병규를 손가락질했다. 소란 중에도 병규는 시원스럽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옆. 전혀 새로운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이 병규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던 것.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소년의 정체는 샤바였다.
“누, 누구. 어제 저 녀석을 본 사람 있어?”
제이콥이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동시에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 불침번을 서는 도중 저 녀석이 다가오는 걸 본 사람은?”
역시나 이번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저 녀석은 언제 나타난 거지?”
샤바를 보는 제이콥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샤바를 보고 경악한 제이콥들은 서둘러 병규를 깨웠다. 병규는 잠이 덜 깬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며 칭얼거렸다.
“졸려요.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요?”
“지금 자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병규의 물음에 그들은 샤바를 턱짓해 보였다.
“이 녀석 ...... 아는 놈이냐?”
병규는 그제야 왜들 이러는지 알게 되었다.
지구에 있을 때부터, 샤바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절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주인인 병규의 명령도 있었지만, 샤바 스스로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자신의 미려한 몸(?)을 보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제이콥 일행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에도 습관적으로 은신술을 사용해 숨어 있었다. 그러다 모두가 잠들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샤바의 은신술은 완벽했다.
병규나 호랭이조차 기척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히 제이콥들은 샤바를 감지해 내지 못했고, 때문에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이 녀석요? 물론 잘 알죠. 샤바야 일어나봐.”
병규가 짤짤 흔들자 샤바는 부스스 일어났다. 하지만 잠에 취했는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제이콥 일행들은 삼엄한 눈으로 샤바를 노려보았다.
“아는 녀석이란 말이냐?”
“네. 당연하죠. 어제도 계속 같이 있었는 걸요.”
병규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어제 누구 이 녀석을 본 사람 있어?”
모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 어세신이냐?”
인상을 찡그리며 제이콥이 물었다. 어느새 그의 손은 칼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줄곧 같이 있었는데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자랑이 아니라 그들은 꽤나 수준이 높은 용병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 중 아무도 샤바의 존재감을 알아챈 인물이 없다. 이런 설명에 합당한 자는 오직 어세신뿐이다.
물론 병규나 샤바가 그들을 노릴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허튼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어제 저녁의 혼란한 틈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세신이면 ...... 자객을 말하는 거죠? 에이, 전혀 아니예요.”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인 병규는 샤바의 얼굴을 들어 보였다.
“설마, 이 얼굴이 어세신 일을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세요?”
“으음.”
작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샤바의 얼굴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특히 여자인 호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마,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멋질 수가.”
꺄악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풀어진 계란처럼 흐리멍덩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녀만큼은 아니었지만 샤바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절대로 어세신 ...... 일 리는 없겠군.”
“그렇군.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는 .......”
“저 얼굴로 어세신이라니. 너무 억지 같아.”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는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쉽게 병규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어느새 긴장마저 지운 그들을 보고 병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람은 역시 외모란 말인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비장감이 감도는 한마디.
오해를 풀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병규. 그러나 샤바는 고작 얼굴을 한 번 보고 저렇게 쉽게 믿어버리다니.
복잡한 심사에 병규는 절로 의기소침해졌다.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랭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이 뭐 다 그런 게야.”
“......!”
호랭이의 위로에 왠지 모르게 더 화가 치미는 병규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샤바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난 후의 일이다.
“이런.”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던 호젤이 당황스런 외침을 토해 냈다. 음식이 든 가방이 없어진 것이다. 어제 급하게 달려오느라 그만 어딘가에 떨어뜨린 듯했다.
“어쩌지?”
지금 돌아가 봤자 가방은 오우거의 사체를 보고 달려온 몬스터들에 의해 깔끔하게 처분되었을 것이다.
“트라우마까진 아직 일주일이나 더 가야 하는데.”
호젤의 말에 모두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붉은 대지에서는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 길은 아직 먼데, 먹을 것은 없다.
여행자에게 이보다 나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사람이 활짝 웃으며 말을 꺼냈다.
“먹을 거라면 있어요. 샤바.”
생뚱맞게 샤바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침 햇살처럼 찬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사람들은 눈이 부신 듯 급히 시선을 피했고, 호젤은 뽕 맞은 사람인 양 다리를 후들거렸다.
“뭐, 뭐라는 거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제이콥이 떨리는 음성으로 병규에게 물었다.
샤바는 이곳의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병규는 그런 샤바를 대신하여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먹을 게 있다는데요.”
“무엇이?”
“먹을 게 있다고?”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한 표정으로 샤바를 쳐다보았다. 샤바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잘됐구나. 그럼 가져다주겠니?”
제이콥의 부탁에 병규는 턱을 긁으며 고민했다.
음식이 있다는 샤바의 말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문제는 그가 가져올 음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사실 병규는 도마뱀들의 일이 떠올라서 영 꺼림칙했다. 호랭이 역시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때 샤바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주인님. 샤바?”
밝은 얼굴. 티 없이 맑은 미소.
멍한 표정으로 샤바의 얼굴을 쳐다보던 병규는 홀린 듯 입을 열고 말았다.
“음식을...... 가져다 줄 수 없냐고 묻는데?”
“와아,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샤바는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더니 어딘가로 휭하니 달려갔다.
“정말로 뭐가 있는 모양인데?”
“허, 정말 다행이군.”
“그래, 처음엔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긴장했네.”
샤바가 음식을 가지러 달려가자 제이콥과 그 일행들은 한층 표정이 밝아졌다. 영락없이 쫄쫄 굶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인물이 요깃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들과는 달리 병규와 호랭이의 표정은 가볍지가 못했다.
“어째 좀 불안하지 않냐?”
“그, 그러네요.”
“그렇게 불안해할 거면 왜 말해준 거냐?”
“그, 그게...... 녀석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어쩔 수가.”
“하긴.”
공감한다는 듯 호랭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양이 깊은 호랭이 역시 샤바의 천진한 얼굴엔 저항하기 힘들다.
“설마...... 그걸 가져오진 않겠죠?”
병규가 암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호랭이가 과장스럽게 껄껄 웃었다.
“물론! 절대로 아닐 게야. 아마 그 이상한 숲에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조금 챙겨온 걸 테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푸하하.”
“하하하. 그, 그렇겠죠? 하늘이 그렇게 무심할 리 없죠. 하하하하.”
서로를 마주보며 둘은 과장되게 웃었다. 그러나 괜찮을 거라며 자위하는 그들의 이마엔 식은땀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샤바가 들고 온 음식을 보며 병규와 호랭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절망 어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역시나.”
“에효. 하늘도 무심하시지.”
샤바가 가지고 온 큼지막한 고깃덩이. 그것은 바로 오우거의 넓적다리였다.
쏴아아아아아.
맛있게 먹으라며 샤바가 던져준 오우거의 넓적다리 고기를 본 제이콥 일행의 얼굴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가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