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네가 바퀴냐?
“서, 설마 네가 바퀴야?”
병규는 흑발의 미소년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물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년의 고개가 태연히 끄덕여졌다.
“네, 전데요. 샤바샤바.”
“헉!”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호랭이 역시 뜨악하며 놀란다.
그 혐오감 넘치던 바퀴벌레 왕자가 이렇듯 엄청난 미모의 사람이 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병규는 바퀴벌레 왕자의 볼을 잡아당겼다.
“뭐, 뭐야. 사람 맞잖아.”
말랑말랑한 그 감촉은 분명 사람의 피부였다.
“아야야. 주인님. 샤바.”
바퀴벌레 왕자가 눈물을 글썽인다.
그 모습에 병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급히 볼에서 손을 떼고는 뒤돌아섰다.
‘무슨 놈의 사내 녀석 얼굴이.......’
병규는 설마 자신에게 그런 발칙한 끼(?)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으나, 호랭이가 ‘커흠’하며 불편한 기침을 토하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안심했다.
자신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퀴 녀석의 얼굴이 대책이 없을 정도로 미남이 된 것이다.
병규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인간이 된 거냐?”
“인간요?”
병규의 물음에 바퀴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가요? 샤바.”
변한 것을 전혀 못 느낀 모양이다.
“넌 더듬이도 있었고.......”
“있어요. 샤바.”
말과 함께 바퀴벌레 왕자의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주뼛 솟았다. 병규는 당황했다. 설마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솟을 줄이야.
“그, 그건 그렇다 해도. 원래 네 몸은 둥글넓적하게.......”
“아! 저 원래 이런 모습이에요. 샤바. 그곳에선 제 백성들이 그런 모습이라 그렇게 있었던 거예요.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의 설명에 병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내가 있던 곳의 백성들도 이곳에 오면 너처럼 그렇게 된다는 거니?”
“아니요. 지구의 백성들은 퇴화되어서 그렇게 안 될 거예요. 샤바. 저도 처음 봤을 땐 백성들이 너무 약해져서 맘이 많이 아팠어요. 샤바샤바.”
“퇴화된 거라.”
병규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게 퇴화된 거면 원래는 어느 정도라는 거야?”
호랭이가 비명처럼 소리친다.
그 엄청난 생명력. 무지막지한 번식력.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적응력까지.
지구 최후의 생명체로 남을 것이 분명한 생명체가 많이 퇴화되어서 약해진 거라니. 만약 퇴화가 되지 않았다면 마땅히 지구는 그들의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도 그......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니?”
“그게.......”
바퀴벌레 왕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안돼?”
“그게 마음대로 안 돼요.”
“마음대로 안 된다면?”
바퀴벌레 왕자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상하게 여기선 마음대로 안 돼요. 이런 모습은 불편한데.......”
병규와 호랭이는 흠짓 놀랐다.
“저, 절대로 그 모습이 좋다.”
“그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마.”
병규는 다시 한 번 바퀴의 뺨을 만져보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데 굳이 그 엄청난 모습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암암.”
보기 드물게 손발이 착착 맞는 호랭이와 병규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산 너머로 지고 있는 해를 지그시 응시하던 호랭이가 푸념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여긴 우리가 살던 세상이 아닌 모양이다.”
병규는 화들짝 놀랐다.
“우리가 살던 세상이 아니라니요?”
“저쪽을 봐라.”
호수면 위로 비스듬히 떠 있는 초승달이 보였다.
그런데 초승달의 모양이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별의 그림자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달 자체가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것이 아닌가.
“뭐야?”
병규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새와 물을 마시던 기이한 짐승들. 그리고 생소한 숲의 풍경.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완전히 다른 세상일 줄이야.
“그게 가능한가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게야. 아공간은 지옥의 입구라는 말도 있지만 여러 세상의 통로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확인할 수는 없었지. 아공간에 빠져서 살아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이야.”
“그, 그럼 정말로 여기가?”
“그런 것 같다.”
병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뽀얀 햇살에 따뜻하게 비치는 대지.
낯선 세상, 낯선 땅이었다.
멍한 눈으로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던 병규는 그림 같은 자태로 앉아 있는 바퀴벌레 왕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여기가 어딘지 아니?”
바퀴벌레 왕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몰라요, 샤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던 병규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실망했다. 지옥과 같은 아공간에서 간신히 빠져나왔구나 했는데, 달 모양조차 생소한 전혀 다른 세상이라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다.
위로하듯 병규의 발등을 토닥이던 호랭이가 조용히 말했다.
“해가 지는구나. 복잡한 것은 내일 생각하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밤을 보낼 준비나 하자.”
병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의 말처럼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말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발악이라도 해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오늘 밤을 안전하게 보내야 한다.
생소한 세상이라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
병규는 주위의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왔다.
바퀴벌레 왕자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쫑쫑거리며 걸어 다니며 귀신같이 마른 나뭇가지들을 찾아왔다.
이때만큼은 호랭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다행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호랭이를 위해 항상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으니, 덕분에 나뭇가지를 비비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호숫가에 앉았다.
호수의 물결은 잔잔했고, 바람 또한 부드러웠다.
병규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멍하니 모닥불을 응시했다.
“어떻게 돌아갈까 걱정이냐?”
“......네.”
“걱정하지 마. 설마 돌아갈 방법이 전혀 없겠냐?”
호랭이는 씩 하고 웃었다.
“돌아갈 방법이 있겠지요? 그럼요.”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던 병규는 힘을 얻은 듯 밝게 대답했다.
그렇게 둘이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흥겨운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바퀴벌레 왕자가 모닥불 가에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며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반들반들 윤기 나는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앉아서.
보드라운 피부, 그린 듯한 눈썹에 반짝이는 눈동자, 오뚝한 코에 빨간 입술.
마치 신이 만든 걸작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
바퀴벌레 왕자의 단아한 모습에 신선인 호랭이마저 시선을 빼앗겼을 정도다. 물론 병규는 일찌감치 시선을 뺏긴 참이지만.
‘어휴. 저 녀석이 남자였으니 망정이지, 만약 여자였으면.’
어쩌면 그는 바퀴벌레를 사랑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짤짤 흔들며 잡생각을 털어 낸 병규는 문득 여태까지 바퀴벌레 왕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름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누가 봐도 인간인데 계속 바퀴라고 부르기가 영 어색했다.
“바퀴야. 너 이름이 있다고 했지?”
병규가 조용히 물었다.
“네, 네! 저 이름 있어요. 샤바.”
바퀴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바퀴의 눈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너무도 고와 병규는 저도 모르게 ‘윽’ 하며 시선을 피했다.
“가, 가르쳐 줄래?”
“오옷.”
바퀴벌레 왕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쫑긋 솟는다.
“정말요? 샤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바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이야.”
“와아.”
바퀴벌레 왕자는 기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깡충거렸다. 그 동안 이름을 가르쳐 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눈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주인님은 여전히 ‘바퀴’ 라고만 불렀다. 그런데 이제와 그의 이름을 묻는 것이다.
바퀴벌레 왕자가 너무 좋아하자 병규는 조금 미안해졌다.
“빨리 대답 안 하면 계속 바퀴라고 부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혹시나 병규가 딴소리를 할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흠흠. 그래 이름이 뭐야?”
호랭이도 궁금한 듯 고개를 돌려 바퀴벌레 왕자를 바라보았다.
큰 눈에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바퀴벌레 왕자는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샤바에요. 샤바.”
“......?”
“......?”
병규와 호랭이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둘 다 못 알아들은 듯하자 바퀴벌레 왕자가 신중하게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샤. 바. 에. 요. 샤. 바. 샤. 바.”
“...... 설마 네 이름이 샤바라는 거야?”
병규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재차 물었다.
“네. 샤바.”
“그, 그럼 지금까지 네 이름을 말끝에 붙이고 다닌 거야?”
호랭이가 침을 삼키며 다시 묻는다.
“네. 샤바. 저희 종족은 자신의 이름을 말끝에 붙이고 다녀요. 샤바샤바.”
“.......”
병규와 호랭이는 시선이 마주쳤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이름이 나올까, 명색이 그래도 바퀴벌레 왕자인데.......
둘은 나름대로 멋스러운 이름이 바퀴의 입에서 나올 줄 알았다가. 그만 김이 팍 새어 버렸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좋은 이름이죠? 샤바.”
바퀴벌레 왕자가 병규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 그래.”
“호랭이도 그렇게 생각하죠? 샤바.”
“그, 그런 것 같구나.”
“역시.”
바퀴벌레 왕자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기뻐했다. 팔짝팔짝 뛰는 모습이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잘생긴 얼굴과 대비되니 좀 방정맞은 것 같기도 했다.
병규는 그런 바퀴의 행동이 너무도 어이없어 보였다.
“그래. 샤......바야. 너 왕자님이라고 했지? 네 얘기 좀 해주겠니?”
“네. 샤바.”
샤바는 방글방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샤바가 살던 세계는 병규의 생각과 달리 바퀴벌레 공화국(?) 같은 곳이 아니었다.
‘환계’ 라고 불리는 전혀 다른 세계였는데, 호랭이의 설명에 의하면 ‘선계’와 마찬가지로 차원이 다른 세상이라고 한다. 다만 선계와 다른 점이라면 특정 세상과 연결된 선계와 달리 환계는 모든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의 차이다.
샤바는 그런 ‘환계’의 왕자였다. 그런데 그다지 인정은 못 받고 있는 모양이다.
“환계는 어떤 곳이지?”
“글쎄요, 샤바. 설명하기 어려워요.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체가 없는 세상이라고도 하죠. 샤바샤바.”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호랭이는 샤바의 말을 곱씹었다.
호랭이가 바퀴의 정체에 대해 캐묻고 있을 때 병규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바퀴벌레가 왕자라면. 환계는 곤충세상인가? 바퀴가 왕자고 모기가 공주인?’
병규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해충들이 무더기로 날아다니는 암울한 세계가 그려졌다.
‘사람은 절대로 못 살 동네일세.’
자기 마음대로 환계에 대한 정의를 내린 병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샤바에게 물었다.
“그, 그런데 어쩌다 왕자면서 인정을 못 받는다는 거야?”
“그게.......”
샤바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힘이 좀 불안정해요. 샤바.”
“......?”
“환계의 환수들을 다스리려면 환술을 능숙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전 적통이면서도 그다지 힘을 잘 사용하지 못해요. 그래서 ....... 샤바샤바.”
“음. 뭔지 모르겠지만 힘이 불안정하다는 소리구나.”
“네. 샤바.”
물론 병규는 환수니, 환술이니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 샤바가 의외로 사연 많은 녀석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참 아름다운 호수구나.”
호랭이가 호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병규는 호랭이의 말에 고개를 돌려 호수를 보았다.
파란 초승달이 잠겨 있는 거울같이 잔잔한 호수.
정말로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네. 그러네요.”
병규는 무릎 위에 턱을 올린 채 호수를, 그리고 호수 속에 잠긴 달을 보았다. 물 속에 비쳐 보이는 달그림자는 몸서리쳐지게 차가웠다.
호랭이가 그의 어깨 위로 올라와 길게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불침번 서라.”
호랭이는 앞 뒤 재지도 않고 한마디 툭 던지고는 그냥 잠을 자버린다. 내심 불만을 토로하려던 병규는 호랭이가 코를 골자 그냥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무척 평화스러워 보이는 호수의 전경.
낯선 곳인데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 호수를 보고 있던 병규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저 잠시 피곤한 눈을 붙일 생각이었지만, 피곤했던지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호랭이도 잠들고, 병규도 잠든 호숫가에 샤바 혼자만 눈을 반짝였다. 자장가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샤바가 고개를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 호수에 사니? 샤바.”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숫가에서 반짝이는 빛 가루 같은 것이 날아와 그의 주위를 감쌌다.
빛 가루를 가만 지켜보고 있던 샤바는 싱긋 웃었다.
“너희들 참 이쁘게 생겼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님에게 못된 장난을 하면 안 돼. 샤바.”
아무도 없는 공간에 까르르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비벼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 피곤하실 테니 조금 주무시게 하는 것 정도는 봐줄게. 샤바샤바.”
다시 한 번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빛 가루가 병규와 호랭이를 한차례 떠돌았다.
둘의 지친 듯한 숨소리가 평온해졌다.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샤바의 입에서 고요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병규는 호랭이의 드롭킥을 얼굴로 받아야 했다.
“이 녀석. 망을 보라고 했더니 퍼질러 자?!”
꾸벅꾸벅 앉아서 졸고 있던 병규는 그대로 뒤로 폭 넘어갔다. 모래여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왜요. 무슨 일이에요?”
병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선을 떨자 호랭이가 한심한 듯이 쳐다본다.
“잘한다. 망을 보라고 했더니 잠이나 자고. 쯧쯧.”
그제야 무슨 얘기인지 알게 된 병규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간밤에 맹수라도 왔으면 어쩔 뻔했냐?”
“그러네요.”
“녀석. 긴장 좀 해라. 넌 어째 엉뚱한 세상에 왔다는데도 긴장감이 전혀 없냐?”
호랭이의 잔소리가 쏟아지는데. 가만 듣고 있던 샤바가 즐거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샤바. 제가 밤새 지키고 있었는 걸요? 샤바샤바.”
눈이 둥그렇게 된 병규. 문득 모닥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안 피곤하냐?”
“원래 잠이 없어요. 샤바.”
그러고 보니 샤바가 자는 걸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병규는 샤바를 가리키며 호랭이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헤. 다행히 샤바가 지키고 있었대요.”
“허이구. 그래 잘났다. 주인이란 녀석이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서 어따가 써?”
“하하. 그만 피곤하다보니.”
어색한 미소로 대충 사태를 무마한 병규는 호랭이의 잔소리가 또 터지기 전, 재빨리 호숫가로 달려가 세수를 했다. 호수의 물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찼다.
늘어지게 기지개까지 켜니 날아갈 것처럼 시원하다.
“이제 어떻게 하죠?”
“무한정 여기서 있을 순 없으니 일단 다른 곳으로 가보자.”
“잠깐만요.”
병규는 가까운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다. 잠시 후 내려온 그에게 호랭이가 물었다.
“뭐가 보여?”
“없어요. 지평선 끝까지 숲밖엔 안 보여요.”
“그래?”
호랭이의 표정이 조금 찡그려졌다.
뭐라도 있어야 표적을 삼고 걸어갈 텐데. 난감했다. 설마 이곳은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까지 생겼다.
샤바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별엔 용맹무쌍한 그의 백성들은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은 강을 따라 가보자. 강을 따라가도 보면 뭐라도 만나게 되겠지.”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호수로 흘러드는 강물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숲은 너무도 조용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숲 전체를 화사하게 물들였고, 향긋한 과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바람마저 한가롭게 흘렀다. 마치 신이 만든 낙원에 와 있는 듯했다.
호랭이는 먹을 수 있는 과일과 먹을 수 없는 과일을 냄새만으로 구별해 냈다. 개중엔 약초로 쓸 만한 풀들도 있어, 만약을 대비해 조금 뜯어 가기로 했다.
“이곳은 자연에 퍼져 있는 기가 유달리 강하구나. 그래서인지 뛰어난 효능의 약초도 많은 것 같다.”
호랭이가 입에 물며 보여준 것은 냉이같이 생긴 풀뿌리였다.
“이건 산삼보다 오히려 약효가 좋을 것 같군.”
“에에. 정말요?”
신기하다는 듯 풀뿌리를 보던 병규가 물었다.
“그런데 약초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내가 괜히 신선이냐? 냄새만 맡아도 훤하지.”
“하하. 과연 그렇겠네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호랭이가 말하는 약초나 꽃들을 부지런히 챙겼다. 혹시나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여긴 좀 이상해.”
호랭이가 콧등으로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뭐가요?”
산삼보다 효능이 좋다는 풀뿌리를 씹어 먹던 병규가 고개를 돌린다.
“이렇게 좋은 숲에 동물들이 너무 없잖아.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호숫가에서 본 짐승들을 제외하고 여태 다른 짐승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맹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환경오염도 없고, 지천으로 먹을 것이 깔렸으며, 맹수라고 불릴만한 것도 없는데, 동물들이 없다?
“글쎄요. 원래 동물이 흔하지 않은 세상인가 보죠. 뭐.”
병규는 아무렇게나 대충 대답했다. 지구라면 이상할 일이라도 이곳에선 지극히 정상일지 모른다. 아예 다른 세상이니 말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말끝을 흐리는 호랭이의 표정이 영 석연치 않아 보였다.
병규 일행은 낮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길을 걷고, 밤에는 대충 나무 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셋 다 기척을 읽는 데에는 능숙했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맹수의 접근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
병규 일행은 처음으로 갈림길을 만났다.
상류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물이 갈라져 하나는 지금까지 걸은 호수 쪽으로 흘러가고, 한 갈래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병규는 하류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삼 일쯤 지났을 때, 지성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와 만나게 되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도마뱀이었는데, 키는 대략 2미터 정도로 칼과 방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세 마리의 도마뱀은 사냥을 하는 듯 조심스런 걸음으로 사방을 수색하고 있었다.
“혹시 여기는 도마뱀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닐까요?”
나무 위에서 리저드맨들을 관찰하던 병규가 조심스레 물었다. 호랭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다. 아는 게 전혀 없으니. 일단 뭐든 부딪쳐 봐야 알겠지.”
미지와의 조우.
병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될 수 있으면 좋은 만남이 되어야겠지만, 상대가 호전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한바탕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은 병규는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곤 엉거주춤한 자세로 풀숲을 뒤적거리고 있는 리저드맨들에게 조심스럽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등 뒤에서 은근히 들려온 목소리.
리저드맨들은 깜짝 놀랐다.
긴장한 채 사방을 경계하며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등 뒤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으니 어느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쉭!”
놀란 리저드맨들은 칼로 병규를 겨눈 채 주춤 물러섰다. 그들이 너무 놀라는 통에 괜히 조용하게 말을 건 것이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
병규를 확인한 리저드맨들의 눈빛이 변했다.
“응? 인간이라고?”
병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와. 인간을 아는 걸 보니 여기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요?”
병규는 반갑게 소리쳤다. 혹시 도마뱀 혹성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곳에도 인간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병규의 말을 들은 호랭이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되레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것이 아닌가.
호랭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너. 설마 저 녀석들 말을 알아듣는 거냐?”
“네? 그게 뭐가 이상해요? 저 녀석들 분명 우리말로.......”
말을 하던 병규도 언뜻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도마뱀들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한국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어도 아니고, 굉장히 이상한 억양의 말이었다.
“어? 그런데 왜 난 말을 알아듣는 거지?”
병규는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듯했다.
그때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리저드맨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나섰다. 그들에게서 살기를 느낀 병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쟤들, 사람과 좋은 관계는 아닌 모양인데요.”
“넌 저 녀석들 말을 알아들었잖아. 혹시 말을 할 수는 없냐?”
“글쎄요.”
뒷머리를 긁적이던 병규의 입에서 잠시 후 리저드맨들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놀라울 정도로 능숙한 것이 원래 구사하던 언어처럼 생각될 지경이었다.
“난 적 아니다. 길을 잃었다. 여기 어디냐?”
“......!”
다가서던 리저드맨들은 그 자리에 뚝 멈췄다. 놈들의 눈동자가 단춧구멍처럼 얇아진다.
“너 어떻게 ‘칸칸다라’ 말을 할 줄 아는 거지?”
“ ‘칸칸다라’ 말?”
한 리저드맨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저들의 언어를 칸칸다라라고 하는 모양이군.’
리저드맨들은 병규가 그들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지 여전히 적의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까지 찡그리며 병규를 위협해왔다.
“인간. 얌전히 잡혀라.”
선두의 리저드맨이 대뜸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런. 초면에 너무 과격한 걸?”
병규는 가볍게 피해냈다.
능력자들의 엄청난 움직임에 비하면 리저드맨의 몸놀림은 장난이나 좀 쳐보자는 식에 불과했다.
병규가 가볍게 발을 걸었을 뿐인데도 리즈드맨은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우당탕 넘어졌다.
“아닛!”
나머지 두 리저드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동료가 너무도 허무하게 넘어진 것이다.
“재수 없게 넘어졌다.”
“용사가 추태를 보이다니.”
병규의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을 실수로 넘어진 것으로 생각한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병규를 압축해갔다.
“죽이지는 않는다. 얌전히 노예가 돼라.”
“저항하면 죽는다.”
팔짱을 낀 채 도마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주시하고 있던 병규의 입가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노예?”
병규는 인간을 노예로 부린다는 말에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순간 그의 몸이 휙 하고 앞으로 나갔다. 리저드맨들에겐 갑자기 병규의 모습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졌다.
바람같이 리저드맨들의 등 뒤로 이동한 병규는 손날을 세웠다.
“서서 얘기하기 귀찮으니. 일단 누워라.”
뒤이어 퍽퍽! 하고 들려오는 두 번의 타격음.
엉거주춤 다가오던 리저드맨들이 철퍽 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것이다.
“여긴 대체 어떤 세상이야? 도마뱀들이 인간을 노예로 잡는다는 소릴 하고.”
병규는 투덜거리며 굵은 덩굴을 끊어서 리저드맨들을 묶었다. 목을 친 녀석들은 기절했지만, 발에 걸려 넘어진 최초의 리저드맨은 머리에 혹이 났을 뿐 정신은 말짱했다.
병규는 녀석을 심문했다.
순식간에 쓰러진 동료들을 본 놈은 온몸을 덜덜 떨며 병규를 매우 두려워했다.
“위, 위대하신 분이십니까?”
뭔가를 오해한 듯했다.
사실 리저드맨의 오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정의 숲에는 인간이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인간이다. 그리고 방금 전의 그 움직임. 리저드맨은 이미 그를 엄청난 존재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난.......”
“잠깐!”
병규가 해명하려 하자 호랭이가 고개를 흔들어 막았다. 놈이 병규를 무엇으로 오해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보를 캐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호랭이의 지시에 따라 병규는 헛기침을 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거드름을 피웠다.
“헴헴. 그래. 내가 바로 그 위대한 분이시다. 먼저 묻겠다. 넌 어디서 온 누구냐?”
“푸, 푸른 뱀족의 미천한 족장 저드. 위대한 분을 뵙습니다. 소, 소인들이 눈이 어두워 감히 못 알아 뵙고 불경을.......”
저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리저드맨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감히 병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에 저드는 병규에게서 드래곤 특유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도마뱀이 벌벌 떠는 것을 깨달은 병규는 신이 나서 더욱 거들먹거렸다.
“험. 저드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좋아. 네가 내 질문에 대답을 잘한다면 좀 전의 불경쯤은 과감히 용서해 줄 수도 있다.”
“감사합니다.”
저드는 쿵쿵 소리 나게 머리를 찧으며 기뻐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잘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저드는 잔뜩 긴장한 채 질문을 기다렸다. 하지만 의외로 드래곤의 질문은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여긴 어디냐?”
“......?”
드래곤의 질문 치고는 너무도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저드는 눈앞의 드래곤이 굉장히 오랜만에 유희를 나와서 그런 것일 거라 생각하고는 성실히 대답했다.
“요정의 숲입니다.”
“흠. 요정의 숲이라.”
병규는 턱을 쓰다듬으며 썩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요정들이 진짜로 있다면 아마도 이런 숲에 살 것이다. 호랭이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호랭이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 세상을 뭐라고 부르는지 물어봐라.”
병규가 호랭이의 말을 그들의 언어로 옮기자 저드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띠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이 대륙은 ‘이드라센’ 이라고 불립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드라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걸. 뭐, 하여튼 좋아. 그럼 마지막 질문이다.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지?”
“강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붉은 대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붉은 대지 너머에 바로 인간들이 사는 곳이 있습니다.”
저드는 혹시나 위대한 분이 노여워할까 봐 땅바닥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좋아. 아주 잘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을 표했다.
간을 졸이고 있던 저드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병규가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내리쳤다. 저드는 땅에 고개를 처박으며 쓰러져 버렸다. 가볍게 기절시킨 것이었는데. 어쨌든 곧 깨어날 것이다.
“정말로 다른 세상이었군.”
기절한 리저드맨들을 내려다보며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드에게 들은 이드라센이라는 이곳은 정말로 다른 세계였다. 물론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에게 직접 듣게 되니 기분이 또 묘했다.
“그래도 이곳에 인간이 있다니 다행이네.”
병규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이왕에 닥친 일이다. 끙끙하고 고민해봤자 도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사람들이 있다는 곳으로 먼저 가 보도록 하죠.”
병규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호랭이가 거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넌 어떻게 이곳의 말을 하는 거냐?”
병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어떻게 도마뱀들의 말을 갑자기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뺨을 긁적이며 한참 고민하던 병규는 어색한 표정으로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한국말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던 걸요.”
“그게 말이 되냐? 너 혹시 전생에 여기에서 살기라도 한 거 아니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병규는 손을 팔락거리며 가볍게 말했지만 호랭이는 진지했다.
전혀 낯선 세계의 언어를 듣자마자 구사한다? 엄청난 천재라도 불가능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간혹, 전생의 기억이 남아 전혀 낯선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 간에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에이. 인체의 신비 아니면 서프라이즈...한 현상이겠죠. 뭐,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해요.”
병규는 마음 편하게 살자며 쾌활하게 말했다.
성격이 소탈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인지.
맹한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잊어버린 듯했다.
호랭이는 기가 막혔지만 고민해봤자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닌지라 한숨을 쉬며 넘어갔다.
그런데 막 병규가 걸음을 옮기려 할 때다. 샤바가 기절한 리저드맨들을 내려다보며 그를 불렀다.
“저기. 주인님 샤바.”
“왜?”
“이거 버리고 갈 거예요. 샤바?”
리저드맨들을 향한 샤바의 범상치 않은 눈빛.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버리고 갈 거냐니? 무슨...... 소리야?”
떨떠름한 그의 물음에 샤바는 몽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기...... 안 먹어요? 샤바.”
병규와 호랭이는 흠짓 놀랐다.
“서, 설마 그......걸 먹고 싶은 거냐?”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샤바.”
샤바가 침을 꿀꺽 삼킨다. 한동안 과일만 먹었더니 허기가 지는 모양이다.
‘무서운 녀석.’
호랭이와 병규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제야 샤바가 배가 고프면 콘크리트도 뜯어멱는 무지막지한 생물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 둘이었다.
샤바는 리저드맨들에게 고기를 얻고(?) 싶어했지만, 병규와 호랭이의 단호한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도마뱀이라도 말을 하는 녀석들이다. 왠지 잡아먹기가 영 꺼림칙했다. 특히 호랭이의 반대가 심했다. 신선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호랭이도 짐승이다. 단지 일반 짐승들과 다른 점이라면 수양을 쌓아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 이 때문에서인지 호랭이는 리저드맨을 먹는 것은 곧 자신을 먹는 것과 같다는 요상한 이론을 펼쳐 샤바를 설득했다.
그 와중에 샤바가 호랭이를 보고 침을 끌꺽 삼켰지만 다행스럽게도 호랭이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샤바가 호랭이를 보며 침 삼키는 것을 보고 병규는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나중에 배가 고파지면 나도 잡아먹는 거 아냐?’
평소에 친근한 행동을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병규는 왠지 샤바라면 그런 만행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