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23/102)

     넌 물만 있으면 되지?

 수사노오를 채드에게 넘긴 병규는 곧바로 특재대에 연락을 넣었다. 본부장인 자영은 막 샤워를 마친 듯한 촉촉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본부장님? 병규입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신풍의 은신처를 알아냈습니다.” 병규는 화차에게서 들은 신풍의 비밀아지트와 발칸의 소식을 자영에게 아려주었다.

 자영은 물론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 병규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발칸과 전혀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예전에 발칸이 전국을 피로 물들이고 다닐 때,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에도 용의자가 검거되지 않자 끝내 특재대에 사건 의뢰가 접수된 적이 있었다.

 당시 자영은 몇 명의 요원들을 현장에 파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요원을 파견한 다음 날 성난 조폭들에 의해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 물론, 실제로 발칸을 잡은 것은 병규였으나 당시 사정상 언론의 초점은 무차별한 살인에 대한 조폭들의 응징 쪽으로 맞춰져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어정쩡하게 종결된 사건이다 보니 자연 꼼꼼한 자영의 성격상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미결된 사건의 주이공이 신풍의 오로치로 둔갑했을 줄이야.

 일전의 사건으로 오로치라면 이를 박박 갈던 그녀인지라 이번 일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알았어요. 즉시 인원을 파견하도록 하죠. 그나저나 병규씨는 재주도 좋네요. 매번 이렇게 월척을 낚아 올리니 말이에요.”

 “쩝, 글쎄 말입니다. 전 조용히 살고 싶은데 세상이 절 가만 두질 않네요.”

 자영의 칭찬에 병규는 씁쓸하게 웃었다.

 병규의 연락을 받은 자영은 급히 조치를 취했다. 즉시 요원들을 편성하여 해당지역으로 급파하였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어 그녀가 전해온 소식은 신풍의 잔당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애기와 발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암울한 말뿐이었다. 

 “아깝게 됐군.”

 발칸을 또 다시 놓쳤다는 보고에 호래이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따지 보면 호랭이가 이렇게 작아진 것도 발칸이 원인인 셈이다. 

 “실망할 것 없어요. 호랭이.”

 병규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수사노오도 여기 있고 저도 여기 있어요. 발칸은 분명이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

 병규는 확신하는듯했다. 아니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호랭이는 그런 병규를  보며 조금 걱정스러웠다.

 ‘이 녀석. 역시 성격이 좀 변한 것 같아. 소심하던 녀석이 이렇게 호전적으로 바뀔 줄이야. 혹시 괴물의 능력뿐만 아니라..... 기질도........?’

 다음 날 아침.

 수사노오의 상태를 지켜보느라 날밤을 센 병규가 퀭한 눈으로 세면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비상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뭐야. 핵전쟁이라도 발발한 거야?”

 게으른 하품을 하고 있던 호랭이가 정신없이 떠든다. 사이렌 소리 때문에 가뜩이나 소란스러운데 조명까지 죄다 붉은 색으로 번뜩거리니 도대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일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귀를 팔락이며 동태를 살피던 병규가 말했다.

 “일층?” 호랭이의입이 쩍 벌어진다.

 소음이 들렸다는 곳은 1층. 반면 병규와 호랭이가 있는 곳은 15층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웬만한 소음 정도는 그대로 묻혀버리는 게 정상이다.

 게다가 이 빌딩은 매우 특수하게 설계되어 있어 설사 옆방에서 비명을 질러도 문만 닫으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방음처리가 잘 돼 있었다.

 어린 총수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가스펠이 돈을 물 쓰듯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특수빌딩의 15층에서 치카치카를 하던 녀석이 1층에서 터진 소음을 들었다고?

 ‘나도 못 들었는데? 이 녀석 혹시 날 놀리는 거 아냐?’

 호랭이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아무리 감각이 예민해졌다고 해도 이건 터무니없는 소리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단의 난간을 스테이트를 타듯 주르륵 타고 내려와서 본 1층의 풍경에 호랭이는 ‘억’하고 신음을 토해야만 했다.

 풍비박산!

 금속 탐지기를 비롯하여 수십 대의 특수 장비들로 가득 채워져 있던 1층 로비가 폭풍이라도 쓸고 간 듯 완전이 엉망진창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단순히 뒤집혀진 정도가 아니라 현관을 꽉 메우고 있던 수많은 장비들이 마치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하학적으로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장비들 사이엔 눈에 익은 여인 한 명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누님!”

 아는 얼굴이었다. 병규는 손을 들며 그녀에게 뛰어갔다.

 “아.”

 병규를 본 이한영은 심각한 표정을 풀고 어색하나마 웃음을 보였다.

 “누님. 어떻게 된 거예요? 이곳이 왜 이렇게 된 거죠?” 병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녀의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아, 그게 말이야.”

 “하하. 그거라면 내가 대신 설명해 주지.” 웃음소리와 함께 이운석이 나타났다.

 “오랫만이다.” 반갑게 병규이 손을 맞잡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화려하게 해치웠네요, 누나.”

 “예? 그럼 이걸 누님이 하신 겁니까?”

 병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비들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 있는 것을 보고 혹시나 했지만 이한영이 이렇게 했을 줄이야.

 “그것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네. 이제부터 내가 설명해 주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이운석은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두 팔을 활짝 펴며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아, 사건은 누나와 내가 대장의 지시를 받고 이곳으로 파견되었던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 깜짝 놀라게 해주자는 생각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우리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저항을 만나게 되었네. 현관문을 지키고 있던 어깨 좋은 양반들이 앞을 가로막더니 이상한 장비들을 앞세우며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으흠. 놀랐겠군.”

 병규는 이해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앞을 가로막은 어깨 좋은 양반들이란 가스펠의 보안요원들을 말하는 것이다. 집주인인 병규조차 현관을 들어설 때마다 귀찮을 정도로 검사를 해대는 그들이니, 연락도 없이 찾아온 두 사람에겐 얼마나 극성스럽게 굴었을까.

 “그렇지. 친구 집에 놀러 오는 것도 참으로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구나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잠자코 그들의 말을 따랐네. 하지만 순탄하게 진행되던 절차가 마지막 최종단계에서 그만 꼬이고 말았네. 문제의 원인은 다름 아닌 금속 탐지기! 그 망할 놈의 기계가 누나에게 흑심을 품었는지 한 발자국만 지나가려해도 삑삑대며 비명을 질러댔던 것일세.”

 “헛.”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속 탐지기.

 당연히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금속 탐지기의 기능이라곤 금속을 탐지하는 일. 그것 하나분인데 유감스럽게도 이한영의 능력은 쇠를 흡수하는 것. 가만 생각해보니 정말 최악의 궁합이 아닌가.

 “그런 것일세. 핸드백을 내려놔도 삑삑대고, 머리핀을 빼고 혁대를 풀고 신발을 벗어도 미친 듯이 삑삑대니 환장할 노릇이었지. 한데 가뜩이나 화가 슬금슬금 치솟는 사람 앞에서, 분위기 파악 못한 보안용원들이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야 만 것일세.”

 “무, 무슨 말?”

 “‘싹 벗어보시지요’라고 하더군.”

 “헉!” 병규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슬쩍 이한영을 쳐다보니 그녀는 당시의 사오항이 떠오른 듯, 두 주먹을 꼭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됐지?” 병규가 식은땀을 흘리며 묻자 이운석은 초토화된 주위를 한 팔을 들어 쭉 가리켰다.

 “보시는 바와 같이.”

 “보, 보안 요원들은?”

 “아, 그들이라면 저쪽에 잘 걸어놨네.”

 해맑은 웃음을 보인 이운석이 벽 쪽을 손짓해 보였다.

 과연 보안요원들은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처럼 한쪽 벽에 일렬로 걸려 있었다.

 호랭이가 뜨악한 표정으로 묻는다.

 “쟤들 어쩌다 행위예술을 하게 된 거냐?”

 “.......글쎄요.”

 병규는 식은땀을 물처럼 줄줄 흘려댔다.

 금속 탐지기 때문에 벌어진 행위예술사건은 잠시 후 채드가 등장하고 나서야 간신히 수습될 수 있었다. 그는 엉망이 된 현관을 보며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사정을 듣고 난 후엔 금세 얼굴빛을 바꿔 웃음을 지었고, 오히려 이한영에게 허리를 굽히며 용서를 빌었다.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그런 불손한 말을 입에 담은 것은 모두 부하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그가 깍듯이 사과하자 이한영도 고개를 숙였다.

 “흠흠. 저도 잘한 게 없네요. 손해를 끼치게 돼 죄송합니다.”

 “하하, 별말씀을.”

 호탕하게 웃은 채드는 예쁘장하게(?) 걸려 있는 요원들을 수습하고는 따로 인운을 차출해 뒷정리를 지시했다. 그 사이 병규는 이한영과 이운석을 데리고 15층으로 올라갔다.

 15층.

 병규의 방엔 하늘을 나는 특수(?) 항공모함을 손에 든 퀴니가 바퀴벌레 왕자와 한창 우주전쟁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 공주님. 오랜만이네요.”

 “응, 안녕.”

 이운석이 과장되게 인사를 건네자 퀴니는 귀엽게 손바닥을 팔랑팔랑해 보인다.

 “하하, 갈수록 예뻐지시는 것 같은데? 머잖아 엄청난 미인이 될 것 같아. 누나 바짝 긴장해야겠어.”

 병규와 이한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운석이 농을 건다.

 “으이그. 실없는 녀석아.”

 이한영은 동생의 머리를 주먹으로 살짝 쥐어박았다. 물론 맞는 당사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했지만 분명 살짝(?) 쥐어박았다.

 “참, 대장의 지시로 오게 되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이운석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병규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당연히 너와 우리 귀여운 공주님을 보호하기위해서지. 그나마 우리 둘만 보낸 건 가스펠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으니까 비교적 안전할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오늘 보니 그다지 신통한 것 같지 않을 걸?” “흠. 그게 어디 그 사람들이 신통치 않아서 그런가? 누님이 말도 못하게 강해서 그렇지. 현관을 지키는 보안요원들 중엔 꽤 높을 등급의 능력자들도 몇 섞여 있었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들을 죄다 벽에다 걸어 버렸으니, 으휴.” 병규는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휘이~ 그나저나 집 정말 좋은데?” 실내를 둘러본 이운석이 입술을 둥글게 말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푸하하. 살아보니 역시 인생은 한 방이더라고.”

 괜히 우쭐해진 병규가 대소를 터트리는데,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이한영이 고개를 흔들며 투덜거린다.

 “맞아. 신분증 없이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더라. 그리고 화장실 앞에도 뭐가 달려있던 걸? 설마 나중에 여기 입주한 후에도 계속 이래야 하는 거야?” “큭. 화장실........”

 기고만장하던 병규의 안색이 단번에 해쓱해진다. 호장실문제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지는 그였다.

 ‘채드 녀석. 끝끝내 화장실을 그따위로 만들다니.’

 그렇게 반대했음에도 화장실 문짝엔 첩보영화의 비밀기지에나 어울릴 법한 초대형 카드리더기가 설치되고 말았다. 즉, 신분증이 없으면 화장실에도 못 들어간다는 소리다. 덕분에 아침마다 화장실 문짝을 붙들고 통사정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병규가 화장실 문제로 끙끙대고 있는데, 이한영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수사노오요?” 병규의 반문에 이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후후후.”

 갑자기 병규가 쿡쿡대고 웃기 시작했다. 이한영과 이운석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자 그는 자랑하듯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부터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깜짝 놀랄 만한 소식. 병규는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이한영의 반응은 초연했다.

 “잘됐네. 한 방 먹일 수 있게되었으니 말이야.”

 주먹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는 그녀의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녀 역시 병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소사노오의 부활을 태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되살아났다는 병규의 말에 이운석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뭐, 뭐야. 심장이 멈췄다면서? 그것도 멈춘 지 한참 되었다면서.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시.... 부활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가 들은 수사노오의 상태는 주먹만한 구멍이 등과 배를 관통하고, 중요한 내장들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으매. 심장도 멎은 뒤라 사실상 사망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쯤 염라대왕과 쎄쎄쎄를 하고 있어야 할 양반이 다시 살아났다고?

 “글쎄 말이야.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멈춰버린 심장대신 스스로의 능력으로 상처가 없는 부위로만 혈액을 유동시킨 모양이더라고, 덕분에 상처 부위의 괴사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뇌는 무사할 수 있었던 모양이야.”

 “내, 내장은? 완전 뭉개졌다고 들었는데.”

 “크게 망가졌지. 아주 나발이 났더구만. 그런데 능력자의 치유력은 참 불가사의한 것 같아. 그렇게 망가진 내장들이 글쎄 하나 둘씩 재생되고 있다는 거야. 걸레 조각이 된 간은 벌써 거의 원형을 되찾은 모양이더라.”

 “말도 안 돼!”이운석은 비명 같은 고함을 토해 냈다.

 혈액을 마음대로 유동시키고, 뭉개진 내장을 복구해?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이야기가 아닌가.

 “정말 놀라운 걸. 신체를 그 정도까지 컨트롤 할 수 있다니, 과연 M급 이로군.” 여태 평정을 유지하던 이한영마저 감탄성을 토했다.

 “맞아요. 괴물이죠.”

 병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이한영이 씩 웃음 말을 꺼낸다.

 “뭐, 그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괴물이라고 부를 정도까지는 아니야. 난 정말 엄청난 괴물도 알고 있는걸 뭐.”

 “네? 그게 누구죠?”

 “누군데 누가.” 병규와 이운석이 깜짝 놀라며 동시에 물었다.

 수사노오보다 더 엄청난 괴물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다.

 “몰라서 물어?”

 이한영은 병규를 게슴츠레 바라보며 묻는다. 그렇게 눈치를 줘도 병규가 고개를 갸윳거리자 그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착 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물만 있으면 되지?”

 “헉.”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보니 그녀가 말한 괴물은 바로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명색이 친구라는 이운석. 좌절하는 친구를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심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흐음. 과연 그렇군. 그러고 보니 진짜 괴물을 바로 옆에 두고 엉뚱한 사람을 괴물 취급했어. 가만. 생각해보니 물뿐만이 아니네. 가공할 만한 혓바닥에, 레이더처럼 움직이는 귀까지. 이거 완전히 인간의 탈을 쓴 몬스터잖아. 병규야. 너 사람이 맞긴 한 거냐? 잘 생각해봐. 혹시 전생에 괴물이 아니었는지 말이야.”

 “크아아아악!”

 결국 병규는 의자를 들고 말았다.

 잠시의 소란 후, 간신히 분위기를 바로잡은 세 사람은 화제를 바꿔 발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 그러니까 예전에 발칸을 죽인 것이 조폭들이 아니라 바로 너였던 거야?”

 이한영을 통해 숨겨진 비사를 절해들은 이운석은 나직이 감탄성을 토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런 사실이 하나도 안 알려졌냐?”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었거든. 그래서 현장에 있던 형사님들과 누님에게 부탁 좀 했지.”

 “저런, 단번에 유명인이 될 수 있었던 기회였는데, 아깝다.”

 이운석은 정말로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이상한 것은.......”

 조용히 있던 이한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상한 것은 어떻게 발칸이 오로치 행세를 완벽히 해낼 수 있었느냐는 거야. 물류센터에서 만났을 때, 녀석은 과거에 내가 오로치와 만났던 일도 모두 알고 있었어. 마치 오로치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의문은 또 있어요. 발칸이 사사노오를 처리한 것도 이상해요. 제가 알고 있는 발칸의 실력으론 설사 몰래 암습을 했다고 하더라도 수사노오와 같은 능력자를 당해 내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에요.” “나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어. 그래서 한 가지 답을 얻었는데.......”

 “그게 뭐죠?”

 “놈이 터무니없이 강해졌다는 것!”

 이한영의 묵직한 한 마디에 병규와 이운석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정말로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여태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이운석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발칸이 노리는 게 대체 뭘까? 왜 사람의 심장을 먹는 거지? 그리고 힘들게 오로치로 둔갑해 놓고 왜 또 갑자기 모든 걸 뒤엎어 버린 걸까?

 병규와 이한영은 그의 질문에 묵묵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만은 확실해.”

 한참 만에 이한영의 빨간 입술이 열렸다.

 “발칸이 메스컴에서 떠들던 것처럼 단순한 미치광이 살인마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번처럼 큰일을 저지른 데는 뭔가 그에 상응하는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이한영의 말에 병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과연 발칸이 노리는 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녀석은 대체 뭘 노리는 걸까.” 두 손으로 턱을 감싸며 병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고, 모든 조명이 빨강색으로 변한 건 바로 이때였다.

 “뭐야? 또 손님에게 옷이라도 벗으라고 한 거야?” 이운석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병규는 웃지 않았다. 예민한 그의 감각에 끔찍한 소음이 잡혔던 것이다. “비명소리! 일층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이한영에게 퀴니를 부탁한 병규와 이운석은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는 경고등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핏빛으로 점멸하는 경고등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예시하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그때 마침 경보를 들은 채드가 달려왔다.

 말끔한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한영과 마찰이 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긴박감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죠?”

 병규가 그에게 물었다.

 “침입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직 자세한 보고는 받지 못했지만 큰일은 아닐 겁니다. 소란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두 분은 일단 퀴니님에게 돌아가 주십시오.” 혼란스런 상황 중에도 채드는 가스펠의 명예를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 이운석의 물음에 채드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펠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단체가 아닙니다.” 이운석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정말로 가스펠은 간단한 단체가 아니다. 세력만으로 따지자면 데몬게이트와 중국의 삼룡회 다음가는 규모와 세력이니까 말이다.

 “아래층의 일은 가스펠에게 맡기고 우린 방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웃음을 되찾은 이운석이 병규의 어깨를 툭 치며 뒤돌아섰다. 그러나 병규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래? 뭐 이상한 거라도 있냐?” 괴이함을 느낀 이운석이 물었다 여전히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무서운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내려와.”

 “?” 이운석과 채드가 의아하다는 듯한 낯빛을 띠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고개를 올려 병규가 응시하는 곳을 올려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연녹색으로 칠해진 벽만 보일 뿐이다.

 그르릉. 호랭이가 목덜미의갈기를 치켜세우며 으르렁거린다.

 “이봐. 대체 뭐가 있다고.......” 병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질문을 던지던 이운석의 얼굴이 변했다. 졍뷰의 귀가 움직이고 있음을 본 것이다. 귀를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부터 병규의 감각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방금만 해도 15층 방에 앉아 1층의 일을 훤하게 읽어내지 않았는가.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다.

 평소에는 장난도 심하고 진지한 구석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렇게 굳은 얼굴일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이운석은 침착한 얼굴로 시선을 다시 천장으로 옮겼다. 잠시 후 그의 표정도 병규처럼 굳어졌다.

 “내가 직접 끌어내려 줄까?”

 마침내 병규가 두 번째 말을 꺼냈다. 말과 함께 스산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차갑고도 날카로운 살기. 손등의 잔털이 쭈뼛하고 일어선다.

‘서, 설마 이 정도의 능력자였다니.’

 병규에게서 풍겨 나오는 가공할 만한 압력에 채드는 찬바람을 집어삼켰다. 지금까지 그가 본 병규는 어수룩하고 남에게 잘 속는 단순한 사람 정도의 인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병규는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모습을 송두리째 엎어버릴 만큰 진중한 모습이었다. 정말 동일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때 천장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헛.” 깜짝 놀란 채드가 경악성을 흘렸다.

 허공에서 난데없이 들려온 음성.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벽의 일부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바닥까지 내려온 그 일렁임은 점차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조금 후엔 홀쭉한 체구의 사내로 눈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 사내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인상의 소유자였는데, 유난히 두 팔이 길고 얼굴에 털이 많아 한 마리의 원숭이를 연상시켰다.

 바로 발칸의 앞에 나타났던 삼룡회의 능력자. 백원신.

 완전하게 모습을 갖춘 그는 병규를 쳐다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쓰레기더미 같은 곳에도 그나마 쓸 만한 녀석이 있군.”

 휘오오오.

 백원신은 의도적으로 막강한 기세를 뿜어냈다. 돌풍처럼 치미는 기세에 이운석과 채드의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병규의 얼굴 역시 조금 찌푸려졌는데, 놀란 것보다 짜증난다는 식의 얼굴표정이었다.

 병규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 뭐야? 뭔데 남의 집 천장에 매달려 있었던 어갸?”

 “........”

 백원신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기세를 꽉 죽여줄 심산으로 기운을 좀 뿜어냈는데, 이 천둥벌거숭이 녀석은 오히려 삐딱한 자세로 맞서는 게 아닌가.

 “방금 전의 말은 취소다. 쓸 만한 놈이 아니라 간이 잘못된 녀석이군.”

 백원신의 두 눈에서 불그스름한 광기가 스며 나왔다. 그 순간 펑 하는 폭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아래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새어나왔다.

 ‘불이라도 난 것일까?’

 채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엘리베이터 아래로 스며 나오는 검은 연기. 생각보다 아래층의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때 작은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한데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가스펠의 지원부대가 아니라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십여 명의 불청객이었다.

 현간에 마련된 저지선이 뚫린 것이다.

 “이 빌딩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하지 않았나요?” 채드를 흘낏 돌아본 병규가 구시렁거렸다.

 “흠흠.”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채드는 헛기침을 터트렸다.

 “크크크, 난공불락? 가소롭군.”

 백원신이 고개를 삐딱하게 놀리며 비웃는다.

 “난 가스펠의 요원들이 잔뜩 몰려있다고 해서 꽤 기대를 했는데, 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워.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녀석들뿐이더군.”

 한껏 거들먹거린 백원신은 병규와 이운석들을 쳐다보며 툭하니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날 만족시켜 줄 수 있느냐?” “글쎄.”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자신의 정체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닐까?”

 “흐흐. 이제 곧 죽을 녀석들이 그건 알아서 뭐하겠느냐?” “아아.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지.” 백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병규는 그의 말에서 한 가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프로다. 그런데 이런 녀석들이 왜 가스펠을 충동질 하면서까지 이곳에 잠입한 것일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퀴니를 노린 납치범들이거나 수사노오를 죽이러 온 암살자일 가능성.

 “이 놈들. 중국에서 온 것 같다.” 백원신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호랭이가 입을 열었다. 병규가 눈으로 묻자 호랭이는 간략하게 설명을 추가했다.

 “발음에 중국어 특유의 억양이 조금 묻어 있다.”

 “당신 중국인이야?”

 병규가 다소 건방진 말투로 묻자 백원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대답은 염라댕광에게 물어보는 게 빠를 것이다. 쳐라!”

 휘휘휙.

 백원신의 짧은 호령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온 복면인들이 갑작스레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파도처럼 통로를 가득 메우고 달려드는 복면인들.

 복면인들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좁은 복도를 달리는데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의 손에 들린 장도는 이리의 어금니처럼 흉악하고 매서워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웠다.

 일전에 맞붙은 풍가닌자들과는 사뭇 대비되는 무자비한 공역.

 그러나 그들을 맞는 병규는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침착했다.

 좁은 통로.

 우르르 달려드는 적.

 “병규야. 불독이란 푹주족 녀석들과 싸울 때 생각나냐?”

 “어떻게 잊겠어요?”

 호랭이의 물음에 병규는 씩 하고 웃었다.

 반 년 전. 이 일대의 악명을 떨치던 불독패거리가 그의 집을 습격해 온 일이 있었다. 당시 푹주족들에게 쫓겨 뒷문으로 허겁지겁 달아나던 때의 상황이 지금과 비슷했다.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힘차게 대답한 병규는 자세를 낮추며 일 보. 이 보. 힘을 응축하듯 두 걸음을 내딛었다.

 “죽어라.”

 어느새 달려온 복면인 하나가 그를 향해 도를 휘둘러왔다. 위급천만의 상황. 막 복면인의 도가 병규의 머리를 쪼애놓으려는 순간, 휘릭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병규의 신형이 스프링 튕겨지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쿠쿵!

 병규의 과격한 몸통박치기가 복면인의 명치에 작렬한다.

 “크웩!” 복면인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하 대형포탄이 명치에 꽂히는 듯한 충격. 대응이고 자시고 너무도 빠른 병규의 일격에 복면인은 비명을 지르며 볼링 핀 넘으트리듯 뒤따라오는 동료들을 넘어트리며 엘리베이커 구석까지 날아가 버렸다.

 “엥?” 백원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바람 한 줄기가 나부낀다 싶더니 용맹한 그의 수하들이 모조리 푹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단련된 자신의 눈에도 그림자만 잡힐 정도로 병규의 움직임은 엄청나게 빨랐던 것이다.

 “채드!”

 복면인들을 비질하듯 한 방에 쓸어버린 병규가 채드를 불렀다.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던 채드가 깜짝 놀라며 병규를 쳐다봤다.

 병규는 백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외쳤다.

 “채드. 퀴니에게로 가요.”

 “?”

 잠시 의아하게 생각하던 채드는 이내 병규의 뜻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적은 십중팔구 총수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총수의 안전이 아닌가.

 “부탁합니다.”

 병규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채드는 곧장 뒤쪽으로 달려갔다.

 “운석아.”

 병규는 채드가 물러나자마자 이번엔 이운석을 불렀다.

 “왜? 나도 갈까?” “아니. 넌 여길 맡아줘.” 갑작스런 병규의 말. 당연히 이운석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라? 친구. 날 버릴 셈이냐?”

 “그게 아냐. 아무래도 그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아.”

 병규가 언급한 그. 수사노오였다.

 “넌 그가 어느 방에 있는지 모르잖아. 내가 움직이는 게 빨라.”

 “쳇 어쩔수 없군. 좋아. 여긴 내가 맡지.”

 이운석은 두 손을 바지춤에 찔러 넣으며 멋들어지게 앞으로 나섰다.

 “활약을 기대하마.”

 “체. 입에 발린 소리 그만 하고 빨리 갔다 오기나 해.”

 “알았어. 번개같이 다녀오지.”

 이운석의 어깨를 툭툭 쳐준 병규는 곧장 창문을 깨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닛.”

 백원신이 깜짝 놀라 소치쳤다.

 병규와 이운석의 대화를 들은 그는 당연히 병규를 방해할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설마 병규가 건물 밖으로 무작정 뛰어내릴 줄이야. 무려 15층이나 되는 높이인데 말이다.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뛰어내리다니. 보통 놈이 아니었군.”

 백원신은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근래 처음 맛보는 패배감이었다.

 한편 창밖으로 있는 힘껏 뛰어내린 병규는 어처구니없게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아악. 뭐가 이렇게 높아!”

 그렇다. 병규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린 것이다. 15층이었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고 말이다. 단순한 병규의 행동에 괜히 백원신만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우왁. 어 무슨 생각으로 뛰어내린 거야. 미쳤어?”

 병규이 어깨에 매달린 호랭이가 고함을 질렀다. 전부터 생각 없이 사는 녀석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건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쥐포 되고 싶냐? 빨랑 어떻게 해봐.”

 “알았어요.”

 빽 소리친 병규. 그러나 손발을 사용하기엔 빌딩과의 간격이 너무 멀었다.

 ‘어쩔 수 없지.’

 병규는 즉각 취릭 하며 혀를 뻗어내 휙 지나가는 6층 베란다를 잡아챘다.

 쭈우욱.

 무섭게 떨어지는 힘에 혓바닥이 쭉 늘어났다. 혓바닥이 통째로 뜯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에 병규는 비명을 질렀다.

 “꾸웨에에엑.”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솟을 지경이다. 그나마 혓바닥이 채찍처럼 빠르고 고무줄처럼 질기지 않았다면 허망하게 세상 마감할 뻔했다.

 “아고고. 혓바닥아.” 병규는 얼얼해진 혓바닥을 쓰다듬어 주며 베란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6층이었다.

 수사노오의 병실은 3층에 있었다. 병규는 욱신거리는 혓바닥을 손부채질하며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에서 두 명의 복면인을 만났지만 병규는 미처 그들이 자세를 잡기도 전에, 미친 듯한 스피드로 그들을 때려 눕혔다.

 쿠당탕 요란스럽게 계단을 미끄러지는 복면인들. 병규는 그들을 스케이트 삼아 3층까지 다이렉트로 내려갔다.

 3층 복도는 정신없이 터지는 파공으모가 격한 숨소리로 웅웅 울리고 있었다.

 가히 눈이 부실 정도의 속도로 수사노오의 병실까지 다다른 병규는 ‘으라차’ 고함을 치며 문을 발로 뻥 걷어찼다.

 어수선한 실내엔 화차와 세 명의 복면인이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행이구나.”

 침대를 살핀 병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사노오는 아직 멀쩡했다. 천만다행이다.

 예상외로 화차가 잘 막아내 준 덕이다. 과연 천하의 이운석을 고생시켰던 능력자다. 실제로 그녀의 실력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특히 화염구름은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시뻘건 연기에 닿은 것은 쇠건 콘크리트건 순식간에 지글지글 녹아내렸다.

 그러나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복면인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이었다. 게다가 교활하기까지 했다. 정교하게 공수를 전환하며 그녀에게 대항하는 한편. 간간이 수사노오에게 암수를 날리며 화차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그런 이유로 화차와 복면인들의 대결은 아슬아슬하게 평수를 이루고 있었다.

 “음.”

 병실로 뛰어 들어가려던 병규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의시선이 병실의 한쪽 구석을 바라본다.

 사자머리의 사내가 불량스런 자세로 식탁 위에 발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좋아. 드디어 남자가 나타났군.”

 병규를 향해 하얀 이빨을 보인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바로 삼룡회에서 발칸에게 지원해준 암살부대의 삼인방 중 하나인 인면호신 마복이라는 자였다.

 “니루해 죽을 것 같았는데 참 잘 와 줬다.”

 두팔을 쭉 치켜 올리며 기지개를 켠 마복이 병규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마복은 원래 호쾌한 성격만큼이나 취향이 독특한 자로, 밥 먹다가도 뛰쳐나갈 만큼 싸움을 즐겼지만 이상하게도 여자와 싸우는 것은 죽도록 싫어하는 괴벽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암살을 청부받은 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여자인 화차였다. 그리고 정작 잔뜩 기대했던 M급 능력자인 수사노오는 의식조차 불분명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열기가 삽시간에 식어버렸다.

 아무리 싸움을 즐기는 그라도 상대가 여자라면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늘어지게 하품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병규가 나타난 것이다. 수상한 기운을 잔뜩 품고서.

 “네가 와 줘서 내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우두둑.

 마복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듣기 거북한 소음이 일었다. 강철같이 단련된 손이다.

 그에게서 풍기는 묵직한 압력에 병규는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발칸이 보낸 자객인가?”

 병규가 물었다.

 “.......”

 마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병규는 순간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

 병규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다.

 “흥.”

 병규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던 마복이 콧바람을 힘껏 내뿜었다.

 “적으로 만났는데 무슨 대화가 필요한가. 덤벼라. 남자는 자고로 주먹으로 대화해야 하는 법이다.”

 쿵쿵 하는 묵직한 두 번의 발소리와 함께 그의 발그림자가 병규의 머리를 찍어왔다. 가히 도끼질을 연상케 하는 호쾌한 일격.

 하지만 병규는 여유가 있었다.

 “느려.”

 가볍게 발을 튕기니 미끄러지듯 그의 신형이 뒤로 밀려난다. 뒤늦게 날아든 마복의 발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빈틈!”

 술쩍 물러난 병규가 당겨진 고무줄이 퉁겨지듯 마복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퉁.

 병규의 어깨가 마복의 팔꾸미를 강타하자 탄력 넘치는 폭음이 터졌다.

 “끅.”

 격한 신음과 함께 밀려나간 마복은 요란한 소음을 터트리며 벽에 부딪혔다. 쿵 하는 충격음과 함께 묵직한 진동이 건물 전체를 울렸다. 모르긴 몰라도 뼈마디가 산산조각 나는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녀석. 이젠 제법인데? 틈을 노릴 줄도 알고 말이야.”

 호랭이는 흡족해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병규의 격투센스만큼은 정말 발군이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이 정도까지 성장하다니. 만약 직접 두 눈으로 본 게 아니라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호랭이가 미소 짓고 있을 때다.

 “윽.”

 돌연 병규가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의 왼쪽 어깨가 축 처졌다.

 “왜 그래?”

 깜짝 놀란 호랭이가 급히 물었다.

 “어깨 관절이.”

 “뭐?”

 병규의 신음성에 고개를 돌려본 호랭이는 화들짝 놀랐다. 병규의 왼쪽 팔이 뼈가 없는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탈골된 것이다.

 “대체 언제!”

 호랭이는 기겁을 했다. 병규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 

 “어깨로 들이박았을 때. 녀석의 손가락이 잠시 스쳤었어요.”

 슬쩍 스치기만 했는데 어깨뼈가 탈골 됐다?

 “저 녀석. 관절기의 고수였군. 하지만 물리쳤으니 다행이야.”

 호랭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녀석은 생각보다 대단한 고수였던 모양이다. 만약 최초의 격돌로 박살내지 못했다면 꽤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관절이 빠진 고통은 상상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움직임이 봉쇄된다는 것이다. 뼈가 부러져도 고통만 이겨내면 움직일 수 있지만 관절이 빠지면 절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음하던 병규가 암울한 말을 던진다.

 “녀석을 때릴 때 아무 느낌도 없었어요. 마치 스펀지를 두드린 것처럼.”

 “뭣?”

 경악한 호랭이의 시선이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속을 향했다. 때마침 마복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아. 끔찍하게 빠른 걸?”

 툭툭 먼지를 털고 일어서는 그는 의외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아예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느긋한 웃음까지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맙소사.’

 호랭이는 헛바람을 삼켰다. 그렇게 엄청난 충격을 받고도 멀쩡히 일어서다니. 저 녀석이 과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방어력. 호랭이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문득 스친다.

 “능력자!”

 무공의 고수가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라니. 가히 호랭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아닌가. 하물며 병규는 왼쪽 팔을 못쓰게 된 상태.

 ‘정말로 힘든 상대로구나.’

 호랭이는 암담한 생각마저 들었다.

 “강하면서도 탄력적인 뼈군. 느낌이 좋아.”

 마복은 맛있는 음식을 맛본 미식가처럼 병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엔 어느 곳의 뼈를 뽑아볼까.”

 마복이 다시 몸을 날려왔다.

 느린 듯하면서도 표홀한 움직임. 곁으로 보기엔 느긋하게 걷는 것 같은데 어느덧 그의 손이 눈앞에 와 있다.

 “보법!”

 호랭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법은 간단히 말해 걷는 방법이다. 하지만 단순한 이 걸음걸이에는 적의 눈을 속이고, 상대의 사각을 파고드는 현묘한 이치가 녹아있었다.

 ‘이 녀석의 움직임은 칠성과 팔괘의 오묘한 변화를 섞은 것으로 복잡하면서도 경쾌하구나. 반면 병규는........“

 한마디로 말해 병규의 움직임은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지금도 마복의 연환공격에 정신없이 뒤로 물러날 뿐이다.

 만약 두 사람이 넓은 공터에서 마주쳤다면 병규의 이러한 움직임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은 좁은 실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어느새 병규는 구석까지 몰리게 되었다.

 “자. 말해 보라고. 어디 뼈를 원하지?”

 빙긋 웃은 마복이 비쾌한 움직임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의 공격은 보법과 마찬가지로 느릴 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다가 빠를 때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에도 병규는 눈을 빛내며 마복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그의 움직임을 눈 속에 담아두려는 것처럼.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냐. 피해라!”

 보다 못한 호랭이가 고함을 질렀다. 흠칫 정신을 차린 병규는 급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딜!”

 마복의 갈퀴 같은 손 그림자가 병규의 다리를 스쳤다.

 덜컥.

 기묘한 소음.

 천장까지 솟았다 다시 아래로 떨어진 병규는 휘청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오른쪽 발목이 덜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짧은 순간 발목의 관절이 뽑힌 것이다.

 “하하하. 최고야. 너의 뼈는 정말로 최고구나. 이런 손맛은 처음이다.”

 마복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었다. 그의 열손가락은 악기를 연주하듯 쉴새없이 움직였는데, 그 모습이 관절을 뽑을 때의 광경을 연상시켜 여간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좋았냐? 좋았다니 기쁜데?”

 마복의 웃음이 뚝 그쳤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병규가 절뚝절뚝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 어디 최고의 뼈를 가진 사람에게 복날 개처럼 맞아보자고.”

 “하하. 그 꼴로? 웃기는 녀석이군.”

 마복은 가소롭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병규는 왼팔과 오른다리가 탈골되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제와 어설픈 방항을 해보겠다고 하니 코웃음이 절로 난다.

 “과연 그럴까?”

 돌연 병규는 왼발을 박차며 몸을 뒤로 날렸다.

 마복이 급히 그를 쫓으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도망가는 거냐?”

 그러나 병규가 뛰어든 곳은 병실에 딸린 샤워실이었다.

 “도망갈 곳도 제대로 못 찾는군.”

 마복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을 곧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전신에 물을 뒤집어쓴 병규가 멀쩡한 모습으로 샤워실을 차박차박 걸어 나왔던 것이다. 탈골되었던 팔과 다리는 언제 그랬었나 의심이 갈 정도로 멀쩡했다.

 “뼈를 맞출 줄 알았던가?”

 마복은 흥미가 동하는 듯 혈로 입술을 축였다. 병규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재미있는 상대군. 그럼 어디 온몸을 뼈를 뽑아도 다시 붙일 수 있는지 볼까?”

 손가락을 구부리며 으드득 소리를 내 마복이 보법을 밟으며 달려들었다.

 빠르면서도 경쾌한 움직임.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그러나 병규는 침착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쓱 닦아내는 여유까지 부린다.

 “움직이는 방법이라면 나도 하나 아는 게 있지.”

 돌연 병규의 발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뭣?”

 마복은 어느새 자신의 턱 아래로 스며든 병규를 보며 경악성을 질렀다. 움직이는가 싶은 순간 어느새 자신의 사각으로 스며든 것이 아닌가.

 “그리 간단히 당해줄 순 없다.”

 마복은 칠성운행보를 운용하여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빠져나가듯 병규에게서 벗어났다.  그러나 병규는 이제고작 한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아직 그에겐 두 걸음이 더 남아있었다.

 휘리릭.

 바람소리와 함께 한, 두 번째 걸음.

 “허억.”

 마복은 경악했다.

 저만치 거리를 벌려놓은 병규가 그새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발이 꼬여 그만 비틀비틀 뒤로 밀려났다.

 적당한 간격.

 차분하게 서 있던 병규의 두 손이 허리 아래로 모여진다.

 “내 주먹은.......”

 휘이익.

 조용한 음성과 함께 병규의 몸이 회오리처럼 휘돌며 마복을 휘감아 올렸다.

 “내 주먹은 질풍이다!”

 호쾌한 음성과 함께 터져 나온 질풍삼연격!

 휘이이잉.

 한 줄기 거센 회오리바람이 실내를 휘감는다.

 파파팡!

 소나기처럼 시원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타격음!

 그리고 비명과 함께 솟구치는 마복의 걸레 조각 꼴이 된 육신.

 “크아악.”

 피 끓는 괴음과 함께 용권풍에 말려든 마복이 병실 한 구석에 거세게 처박혔다.

 콰쾅.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속에; 뭉클 일어난 붉은 피보라.

 “........”

 뇌전처럼 정신없이 쏟아진 주먹의 향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정적.

 화차와 세 복면인은 정신없이 싸우던 것도 잊은 채 혼미한 눈으로 병규를 쳐다보았다.

 “저거 사람 맞아?”

 화차의입에서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 그 짧은 말이 그들의 심란한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허억허억.” 병규는 턱까지 찬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방금의 질풍삼연격. 그것은 과거의 질풍삼연격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수사노오의 일전의 싸움에서 몸으로 체득한 나선의 움직임을 한데 융합한 새로운 질풍삼연격인 것이다. 급하게 생각해 낸 것이긴 했지만 위력은 당초 에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휘이잉.

 그의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던지 압축된 공기가 뒤늦게 풀리며 찬바람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풀려난 바람결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놀랍군. 심의육합권인가?”

 마복이었다. 놀랍게도 그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펀지를 두드린 것 같았어.’

 병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를 때렸을 때. 손으로 전해져 오는 타격감이 너무 가벼웠다. 두루뭉실한 솜뭉치에 몸통박치기를 한 것 같은 느낌.

 “너도 무술을 배운 모양이군. 좋은 움직임이었다.”

 꽤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마복은 맞은 부위를 몇 번 툭툭 털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었다. 그 웃음이 지극히 오만해 보였다.

 “좋은 공격이긴 했지만 아쉽게도 난 보통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내 수호신인 마복은 피부와 내장을 고무처럼 부드럽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그의 입가에 그려지는 느긋한 웃음.

 “날 죽이려면 칼이라도 들어야 할 거야.”

 “.......”

 잠시의 정적.

 “왜 웃지?”

 갑자기 마복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심히 서 있던 병규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그려졌던 것이다. 회심의 일격이 실패한 자가 지을 수 있는 웃음이 결코 아니다.

 “조금 응용해 봤다.”

 병규가 말했다.

 “뭐?”

 “이럴 줄 알고 너의 기술을 조금 응용해 봤다.”

 “내 기술?”

 의아해하는 마복.

 대체 무슨 소리인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등골을 싸하게 적셔오는 전율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목구멍을 화끈 태우는 열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전율은 곧 몸서리 처지는 불길함을 동반하고 그의 몸으로 전해져 왔다.

 뚜드드드득.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음.

 황급히 고개를 내려 본 마복의 시야 속으로 덜컥 하고 내려앉는 오른팔이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공포에 질린 경악성. 그러나 경악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투드드드드득.

 발목. 무릎, 양발, 손가락, 손목, 팔목, 어깨........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그의 관절들이 하나씩 주저앉았다. 그리고 결국 그의 육신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크윽. 말도 안 되는........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내 기술을 완벽하게 익혔단 말이냐?”

 진득한 신음을 흘리며 마복이 물었다.

 “그냥 흉내 낸 거야.”

 병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흉내라고? 하하하.”

 팔다리의 관절이 모두 빠져버린 마복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있었던 것이군. 천재란 것이. 졌다. 말도 못하게 경이로운 재능이다.”

 “.......천재? 글쎄. 사실 난 그다지 똑똑하지 않아.”

 병규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멍청하고 생각 없이 행동한다고 매일같이 호랭이에게 혼나는 사람에게 천재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병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호랭이도 치를 떨고 있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처음엔 그저 스피드만 빠른 능력자이겠거니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르쳐 준 질풍삼연격을 한 번에 완벽하게 소화하는 걸 보고는 센스가 좀 있는가 보다 생각했다.

 발칸과 귀탄의 능력을 복제하는 걸 보곤 뭔가 좀 특이한 녀석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이젠 한 번 본 기술을 그대로 따라한다.

 남들이 몇 십 년에 걸쳐 고된 수련 끝에 얻어낸 무공을 단지 한 번 본 것만으로 그대로 펼쳐 내는 것이다. 물론 숙련도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엉성하나마 상대 기술의 엑기스만은 그대로 읽어내고 있었다.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운 재능이다.

 ‘그렇다면...... 설마 육체를 변화시키는 데 괴물의 피가 필요하다면...... 단순히 기술을 훔쳐 배우는 것은 몇 번 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단 말인가?’

 소름이 오싹 돋는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설마 이대로 무한히 복제해 나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런 제약도 없이?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사람에겐 엄연히 재능이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무수히 떠오르는 의문들.

 그러나 병규는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의 수호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안심되는 점이라면 병규가 함부로 살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의 대결만 해도 요수의 발톱을 사용했으면 간단히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병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피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여라.”

 체념한 듯 마복이 말했다. 그를 멀뚱히 내려다보던 병규가 고개를 흔들었다.

 “죽으려면 다른 곳에 가서 죽어. 괜히 남의 집 어지럽히지 말고.”

 “허허.”

 마복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래서야 완벽하게 진 셈이 되는 게 아닌가. 싸움으로나 대범함으로나.

 병규는 화차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쳐라!”

 멍하니 서 있던 복면인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니 야당초 상대가 안 되는 싸움.

 수사노오에게 신경이 분산되어 있던 화차와 달리 병규는 아무 것도 거릴 낄 것이 없었다.

 그가 봄바람처럼 복면인들 사이를 누비자 뚜두둑 하는 소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짚단처럼 허물어지는 복면인들. 그들은 하나같이 고관절(골반과 대퇴골을 잇는 관절)이 탈골되어 있었다.

 “이거 꽤 쓸 만한 기술이네.” 병규는 손가락을 움직여보며 만족스러워했다. 관절을 빼 버리면 제아무리 대단한 자라도 무너져버린다. 게다가 피를 보지 않아도 되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봐. 이거 이름이 뭐지?”

 “.......진천. 진천추운권이라고 한다.”

 “진천추운권? 복잡한 이름이네? 아무튼 잘 쓸게.” 마복에게 천연덕스런 웃음을 보여준 병규는 멍하게 서 있는 화차에게 다가갔다.

 “다친 곳은 없어?”

 “냐. 어, 없어요.”

 “다행이네.”

 푸근하게 웃어준 병규는 수사노오를 살폈다. 별 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다. 화차가 전력을 다해 지킨 덕이다.

 “에효. 내가 어쩌다 이 녀석을 지키게 되었는지.”

 수사나오를 내려다보며 병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적으로 만났어야 할 사이다. 그런데 입장이 묘하게 꼬이면서 적인 그를 보고하게 되었다.

 “이제 여기 적은 대충 처리한 것 같으니 그만 가볼게.”

 화차에게 손을 흔들어준 병규는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왔다.

 “냐. 고마워요. 정말.”

 등 뒤로 화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 걸?”

 흐뭇하게 웃으며 병규는 발을 빨리했다. 위층의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이다. 엘리베이터로 달려갔으나 놈들이 무슨 조작을 했는지 작동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병규는 비상구로 달려갔다.

 3층에서 15층까지.

 그 많은 계단을 병규는 단숨에 올랐다.

 “에고. 숨차라.”

 “쯧쯧. 그러게 평소에 운동을 좀 했어야지.”

 병규가 헉헉 숨을 몰아쉬자 호랭이가 점잖게 핀잔을 준다. 병규는 그런 호랭이를 게슴츠레 쳐다보았다.

 “이게 다 호랭이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간접흡연 몰라요? 호랭이가 하도 담배를 뻑뻑 피워대니까 제몸이 이렇게 나빠진 거잖아요.”

 “허. 이 녀석이 생사람 잡네.”

 그래도 조금 찔리긴 하는가 보다. 툴툴거리긴 해도 별소리 없이 넘어간다.

 “괘 격렬했던 모양인데요?”

 백원신이라는 녀석과 처음 마주쳤던 복도 곳곳엔 격렬했던 혈투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톱질을 한 것처럼 길게 갈라져 있는 콘크리트 벽. 움푹움푹 패어 있는 사람의 발자국. 잘게 부서진 파편. 그리고 찢어진 옷자락.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작된 혈투의 흔적은 복도 저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운석이가 제대로 했을지 모르겠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운석을 혼자 남겨두고 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복면인들은 둘째 치고, 원숭이 낯짝은 꽤 강해 보였다. 흔적으로 봐선 꽤나 악전고투를 치른 모양이다.

 격투의 흔적을 좇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병규는 썰렁한 실내의 모습에 표정이 굳어졌다.

 “없다.”

 방엔 아무도 없었다.

 퀴니도 이한영도. 그리고 이운석과 채드의 모습도. 엉망이 된 실내의 모습에 병규는 부쩍 심란해졌다. 혹시나 다들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디로 간 거지?”

 호랭이 역시 고개를 휘휘 돌리며 단서를 찾았다.

 “잠깐만요.”

 병규는 귀를 펄럭이며 감각을 최고로 올렸다.

 ‘20층에서 꽤 큰 소음. 누군가 싸우고 있다.’

 다수의 움직임을 감지해 내자마자 병규는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비상구의 계단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계단 위쪽으로 수상한 인기척이 감지되었던 것이다.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럴 바엔 차라니.’

 머리를 굴린 병규는 요수의 발톱을 꺼내 고장 난 엘리베이터 문을 베어 냈다.

 쩌걱.

 두부 잘리듯 엘리베이터 문이 쪼개지고, 그 너머로 시커먼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줄이...... 끊어졌잖아?”

 엘리베이터를 지탱하는 와이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못한 것이다.

 “어쩔 생각이냐?”

 호랭이가 물었다.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을 쪼개고 위를 쳐다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당연히 이곳으로 올라갑니다.”

 병규는 호랭이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엥? 여길 어떻게.... 우엑!”

 호랭이의 물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 돌연 병규가 엘리베이터 통로로 몸을 날렸다.

 맞은편 벽을 밟자마자 반대편으로 몸을 날린 병규는. 이어 좁은 통로를 지그재그로 뛰어다니며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다리의 탄성을 이용한 놀라운 재주.

 그렇게 단숨에 20층까지 올라갔다.

 당연히 병규의 어깨에 매달린 호랭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힘을 썼는지 앞발이 다 얼얼했다.

 “흐이그. 이 정신없는 녀석아. 좀 정상적인 방법은 생각할 수 없는 거냐?”

 “하하. 이게 빠르잖아요. 그리고 깜짝 놀라게 하는 맛도 있고.”

 쾌활하게 웃은 병규는 느긋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헛!”

 “뒤, 뒤에서?”

 계단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복면인들이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병규는 그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요즘 산타클로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닌답니다.” 물론 헛소리다.

 잠시 주춤하던 복면인들은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병규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네 명.’

 상대를 빠르게 파악한 병규는 바람처럼 움직이며 그들의 손과 발의 관절을 뽑아버렸다.

 복면인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랐지만 일본의 닌자들처럼 어떤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달려드는 공격법에 능숙해서 오히려 닌자들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병규의 엄청난 움직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희끗한 그림자가 눈앞을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덜커덕.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순식간에 넷을 처리한 병규는 그대로 복도를 달렸다. 얼마 후 그는 십여 명의 복면인들과 대치중인 이운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숨어 있는 낯익은 사람의 모습도.

 “어. 쟤는?”

 “경애잖아?”

 이 빌딩의 유일한 세입자인 경애. 바로 그녀였다. 어쩌다 또 일에 말려들게 된 모양이다. 냄비를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운석을 도울 생각으로 나선 모양인데,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여~ 늦었어.”

 이운석이 병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뒤늦게 병규의 기척을 느낀 복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위로 떠오르는 경악!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동안 아무런 기척도 못 느끼다니.

 “눈치 채는 게 너무 늦었습니다.”

 병규는 앞으로 크게 발돋움하며 팔꿈치를 찍어냈다.

 “크억!”

 어떻게 된 일인지 채 파악도 하기 전에 복면인 한 명이 신음을 흘리며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동료하나가 쓰러졌지만 복면인들의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그들은 즉각 이운석에 대항하던 인원을 나눠 병규에 대항했다. 그러나 고작 다섯 명으로는 이운석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자. 이제 그만 잠잘 시간이다.”

 가볍게 도약한 이운석의 다리가 현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깃털같이 차솟아 송곡같이 쏟아지는 공격들.

 복면인들은 두 손으로 앞을 가린 채 사력을 하대 막았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뼈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충격이란. 그들의 무거운 입이 저절로 떡떡 벌어졌다. 그러나 무자비하게도 이운석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칠어졌다.

 결국엔 홍수에 제방이 무너지듯. 비처럼 쏟아지는 발길질에 복면인들은 한꺼번에 휩쓸려 버렸다.

 이운석이 복면인 다섯을 뭉개버렸을 때, 병규는 임 자신의 몫을 처리하고는 손을 툭툭 털고 있었다.

 “으앙, 오빠.”

 상황이 대충 마무리되지 경애가 뛰어와 병규의 팔에 매달렸다.

 “이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얼마 전에 싸웠던 그 일본 사람들이 또 쳐들어온 거예요?”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그나저나 많이 몰랐겠구나.”

 자상한 병규의 발에 경애는 울먹울먹 고개를 끄덕였다.

 “흑.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르바이트 가려고 씻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갑자기 제방으로 뛰어들잖아요. 그래서 막 비명을 질렀는데, 다행히 운석 오빠가 와서 구해줬어요. 흐흑. 그런데 왜 자꾸 이런 사람들이 쳐들어오는 거예요? 혹시 카드빚이라도 있는 거예요? 얼마예요? 돈은 별로 없지만 보태 드릴게요.”

 “하하. 아니야. 돈을 빚진 건 아니야. 그나저나 안 다쳤다니 다행이네.”

 경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병규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운석에게 물었다.

 “퀴니와 누님은?” 이운석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비밀통로로 몸을 피했어. 어디로 간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흠.”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디로 간 것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하로 간 것 같다.”

 병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운석에게 설명했다.

 “이 건물을 처음 지을 때, 채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거든. 이 건물의 지하엔 비상시 대피용으로 방탄 차량 몇 대가 대기하고 있다고 말야.”

 “흠. 과연. 그런 거라면 지하로 갔을 확률이 제일 크겠군. 그런데 네 감각에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안 잡히는거야?”

 “벽이 두꺼워서 그런지 지하까지는 감지되지 않아. 하지만 확실하게 알아내는 방법이 있긴 하지. 바퀴야.”

 “네. 샤바샤바.”

 이운석의 그림자 속에서 바퀴벌레 왕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척도 없이 바퀴벌레 왕자가 나타나자 이운석이 ‘헛’ 하고 놀란다.

 “에효. 하여간 넌 여러 사람 놀라게 만드는구나.”

 “샤. 샤바.”

 “그런데 너 혹시 퀴니가 어디 있는지 아니?”

 “네. 샤바. 퀴니는 다른 사람들과 좁은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요. 샤바. 검은 사람들이 그 뒤를 바싹 뒤쫓고 있고요. 샤바샤바.”

 “확실하군.”

좁은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면 지하실 말고는 달리 생각할 만한 곳이 없다.

 “우리도 쫒아가도록 하지.”

 병규는 두 사람을 데리고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가는 도중 병규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가자마자 그 원숭이 닮은 녀석과 크게 한판 붙었어. 꽤 하는 녀석이더군. 원숭이 권법 비스무리한 걸 쓰는데 팔이 길어서 영 상대하기 껄끄럽더라고. 한창 재미있게 싸우고 있는데, 녀석의 증원군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아니겠냐. 누나와 채드라는 양반이 뒤늦게 합세하긴 했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결국 여기까지 도망왔는데, 이 위는 옥상이라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잖아? 좀 힘들겠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채드가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뒤를 봐줄 사람이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서 난 남았지. 그 원숭이 같은 녀석과 승부를 내고 싶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퀴니 일행이 비밀통로로 사라지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아까 나와 싸우던 열 명을 제외한 나머지 놈들이 갑자기 싹 사라지더라. 아마도 퀴니를 쫓아간 것 같아. 그리고 경애는 그 후에 만나게 된 거고.”

“특재대에 연락은 넣었어?”

 “누님이 넣었을 거야. 하지만 거리가 있으니까 빠른 지원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걸? 빨라야 한 시간 후, 헬기를 타고 온다고 해도 말이지.” “하긴.”

 “그런데 이 주변을 지키고 있다는 가스펠은 왜 이래? 너무 허술하게 뚫려 버렸잖아?”

 “글쎄쎄.”

 미지근하게 대답하는 병규. 사실 그도 그게 의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기로는 퀴니를 보호하기 위해 상당한 능력자들이 한국으로 파견되었고, 그중 대부분이 이 주변에 배치된 것으로 들었다. 그런데 이런 큰 사건이 터졌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뭔가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우선은 퀴니를 찾자.”

 “그래.”

 이운석과 병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또 무서운 사람이 나타나는 거 아닐까?’

 경애는 불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그녀의 두 손에 꼭 쥐여진 찌그러진 냄비가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망가졌기 때문에 지하로 가기 위해선 할 수 없이 또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병규와 이운석, 두 사람에겐 엄청나게 빠른 두 다리가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경애는 보통사람. 시간이 지체될 것 같자, 병규는 아예 그녀를 등에 업고 뛰었다.

 “우아아아.”

 휘릭휘릭 무섭게 지나가는 계단과 좁은 복도.

 경애는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병규와 이운석의 스피드는 보통 인간인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빨랐다. 결국 그녀는 난생처음 멀미를 경험해야 했다.

 경애를 업은 병규와 이운석이 8층까지 내려갔을 때였다.

 “멈춰라.”

 다수의 복면인이 튀어나오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분노한 병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니들이 뭔데 집주인보고 서라 마라야?”

 분노한 병규가 통쾌한 드롭킥을 선두의 녀석에게 날렸다.

 좁은 계단.

 와당탕 넘어지는 선두.

 그리고 일렬로 우르르 올라오던 복면인들.

 당연히 그 다음 수순은 인간 도미노였다.

 “꾸에에에엑.”

 “크아악.”

 “미, 밀지 마.”

 “케게게겍.” 급박한 비명소리와 함께 복면인들이 와르르르르 쓸려 내려간다. 

 “와우. 인간 눈사태라. 오늘 새로운 구경을 하게 되는 걸?”

 이운석은 병규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흥. 집주인의 분노다.”

 병규는 콧바람을 뿜으며 손을 툭툭 털었다.

 그렇게 한 무리의 복면인들을 해치워버린 병규는 5층에서 전혀 새로운 적을 만나게 되었다. 계단 아래에 몸을 숨긴 세 명의 복면인들이 기척도 없이 두 사람을 암습해 온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상대라면 크나큰 효과를 보았을 그들의 암습은. 오늘 상대를 크게 잘못 만난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기척을 없애도 귀신같이 찾아낼 수 있는 고성능 탐지기가 병규에게 있었던 것이다.

 일명 펄럭이는 귀로 불리는 이 탐지기는 5미텨 전방의 사람 심장 뛰는 소리쯤이야 어렵지 않게 감지해 내는 성능을 과시했다.

 결국 귀식대법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그들은 심장이 뛰고 있다는 죄 하나로, 채 살수를 펼치기도 전에 병규에게 박살이 나야했다.

 “허어. 그 귀 굉장히 편리한데?”

 귀가 팔락인다며 병원에서 무진장 놀려대던 이운석조차 감탄을 터트렸다.

 “후후, 뭘 이 정도를 가지고.”

 병규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항상 놀림만 당하다 오랜만에 칭찬을 받으니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한편 병규의 등에 업혀 있는 경애는 필사적으로 멀미를 참고 있었다.

 ‘주, 죽을 것 같아.’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병규의 등에 업힌 그녀는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휙 하고 움직이는 것 같더니 주위 배경이 무지막지하게 지나가 버린다. 고속도로에서 창을 열었을 때 들을 수 있는 거센 바람소리가 귀를 자극하고,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스쳐갔다.

 입이라도 벌렸다간 얼굴 가죽이 훌렁 벗겨질 것 같은 공포.

 울렁거리는 뱃속. 띵해오는 머리.

 그것만 해도 돌아버릴 지경인데, 병규는 그녀를 업은 채 드롭킥까지 해댄다. 줄지에 쿠션이 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더럭 났다. 다행히 등이 계단에 찍히기 직전 병규가 몸을 돌리며 똑바로 내려섰으니 망정이지, 잘못하면 시집도 가기 전에 허리병신 될 뻔했다.

 그런데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다시 병규가 달리기 시작했다. 경애는 아예 두 눈을 딱 감았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휘이잉.

 귓가를 스치는 미친 듯한 바라소리.

 그런데 그녀가 눈을 감자마자 갑자기 바람소리가 멎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본 그녀.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지하 5층이라고 씌어 있는 푯말이었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벌써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내, 내려줘요.”

 경애는 허둥지둥 병규의 등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자 어지러움이 밀려와 휘청거렸다. 병규가 그녀를 잡아주자 히잉 하면서 훌쩍였다.

 “힝. 무서웠어요.”

 “급하다보니. 미안.”

 괜스레 무안해진 병규는 멋쩍게 웃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본 이운석이 병규를 불렀다.

 “병규야. 여기가 맞아?”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퀴니는커녕 사람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가 아니야.”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동할 수 있는 최하층이 바로 여기다. 그러나 퀴니들이 간 곳은 이곳에서 한 층 더 아래.

 유감스럽게도 그곳으로 가는 비밀통로는 채드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병규는 고민하지 않았다.

 “바퀴.”

 “네, 샤바.”

 “여기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를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더듬이를 번개 모양으로 구부리며 지하실의 구석으로 파다다닥 날아갔다.

 바퀴벌레 왕자는 기분이 좋았다. 항상 꺼림칙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주인님이 최근 들어 그를 자주 호출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한(?) 그 목소리.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은 행복이었다.

 “샤바샤바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여기예요. 샤바.”

 바퀴벌레 왕자가 더듬이로 가리킨 곳은 지하 구석의 소화전이었다.

 “이 아래에 아래층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어요. 샤바.”

 이운석은 잠시 소화전을 들여다보더니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퀴벌레 왕자를 쳐다보았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통로라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설마 너희 동족들이 드나드는 통로를 말하는 거냐?“

바퀴벌레 왕자는 당장 발끈하여 소리쳤다.

 “아니다. 샤바. 사람이 다니는 통로를 말하는 거다. 샤바.” “못 믿겠는 걸?”

 아무리 살펴봐도 지하로 통하는 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뜯어보면 알겠지.” 병규가 나섰다.

 요수의 발톱을 꺼내더니 소화전 주위를 둥글게 베어 냈다. 큰크리트 벽이 종이처럼 베어진다.

 덜컹.

 빨간 소화전이 덜컹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드러난 검은 통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다.

 “이번엔 바퀴 말이 맞은 것 같은데?” 비스듬이 내려가는 둥근 통로를 내려다보던 병규가 이운석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바퀴벌레 왕자는 대뜸 이것보라는 듯이 더듬이를 쭉 펴들고 따졌다.

 “통로 맞잖아. 샤바. 나는 절대로 거짓말을 안 한다. 샤바샤바.” “허허. 말세로다 벌레가 이 정도로 똑똑하다니.”

 이운석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지간히 바퀴벌레 왕자를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방금 그 말. 나와 우리 동족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다. 왕자의 신분으로 절대로 널 용서할 수 없다.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샤바샤바.”

 “결투? 하하. 됐네. 벌레랑 싸우면 내가 뭐가 되겠냐? 그냥 내가 진 것으로 하고 용서해 줘.”

 “우잇. 계속 그렇게 나올 테냐. 샤바. 좋다. 내 오늘 밝고 건전한 내 백성들과의 면담을 통해 너의 그 삐뚤어진 심성을 바로잡아 주겠다. 샤바샤바.” 분노한 바퀴벌레 왕자는 날개를 파다닥 흔들며 허공을 떠올랐다. 번개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더듬이.

 “됐다. 그만해 둬라.”

 심각한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병규가 왕자의 더듬이를 재빨리 낚아챘다. 이 이상 내버려뒀다간 애 하나 크게 망가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님. 샤바.”

 “됐어. 됐어. 그만해. 운석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너까지 똑같이 놀면 되겠냐?”

 “흠흠.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샤바. 역시 주인님.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병규를 보는 왕자의 눈빛에 존경심이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하나를 해결하자 이번엔 다른 하나가 말썽이다.

 “어이,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철이 없어?” 이운석이 병규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나직이 한숨을 쉰 병규는 그의 귓가에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마. 너 벌레랑 같은 레벨로 놀고 싶은 거냐?”

 “당연히 아니지.”

 거센 콧바람 소리를 낸 이운석은 종족의 우월성을 보이겠다는 듯, 턱을 추켜올리며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등 뒤에 선 병규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깨 위의 호랭이도 덩달아 한숨을 쉰다.

 ‘이 녀석도 휩쓸려 가면 흡흡흡흡 하고 헤엄칠까?’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호랭이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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