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사람이야, 그리고 내 먹이지
병규가 빌딩과 관련한 일들로 복잡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그때, 특재대의 추적을 피해 은밀한 은신처에 숨어든 신풍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일대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신풍의 군주, 수사노오의 말끔한 얼굴이 충격과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자 오로치의 방을 찾은 수사노오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작은 방안의 모습은 참혹한 그 자체였다.
수십 구의 시체들. 그런데 죽어 있는 모습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시신들은 모두 가슴이 조개처럼 좌우로 벌려진 채 내부를 휜히 드러낸 상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파리가 득실득실 꼬인 내장들 중에는 심장이 보이지 않았다.
없어진 심장.
수사노오는 어렵지 않게 한 살인마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발칸.
심장 강탈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의 심장을 뜯어먹는 잔인한 살인마.
최근 한국을 공포에 몸서리치게 만든 발칸은 사실 일본에서 먼저 악명을 떨친 바 있다. 한때 그도 놈을 잡기 위해 신풍의조직원들과 함께 대단위 추적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발칸은 일본을 뜨고 없었다.
발칸의 그런 점이 여느 살인자들과 다른 점이다. 놈은 영악하게도 일본 내의 관심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곧장 반도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자행했다. 이것은 놈이 국적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님을 시사한다.
하지만 발칸이 악명을 떨치던 것도 옛날일.
최근 소식에 따르면 복수심에 불타는 한국의 야쿠자들에 의해 처리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 놈의 흔적이 발견될 줄이야. 그것도 하필 최측근인 오로치의 방에서.
혹시 이 일이 최근에 오로치에게서 느껴지던 이질감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수사노오의 얼굴이 한층 무거워졌다.
최근 들어 그는 오리치에게 좋지 않은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불길함. 깨고 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몽혼한 악몽과 같은 그런 칙칙한 느낌.
그때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어인 일이십니까.” 오로치였다.
“왔는가?” 수사노오는 묵직한 음성으로 그를 맞았다.
멀쩡히 살아 있는 오로치. 게다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도 무덤덤한 표정. 만약 그가 방안의 참상과 관련이 없다면 이처럼 덤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보아 수사노오는 오로치가 발칸과 관련이 있다는 데 확신이 섰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사노오는 자리를 비켜 오로치가 시신들을 볼 수 있게 했다.
비위 약한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할 만큼 참혹한 시신들. 그러나 오로치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 한 조각을 베어 물뿐이다.
‘역시 다르다.’
수사노오의 굵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한다.
그가 아는 오로치는 심성이 독란하기는 해도 지나칠 만큼 깔끔한 사람. 피비린내 같은 불쾌한 냄새가 나면 손수건으로 입부터 가리곤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손으로 입을 가리기는커녕 오히려 피비린내를 즐기는 듯 하다.
“후후후.”
오로치가 웃는다. 뱀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웃음.
“넌 누구냐.” 수사노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눈앞에서 비릿한 웃음을 풍기는 이놈.
절대로 오로치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
“글쎄, 누굴까?” 오로치는 의뭉스런 대답을 하며 문을 닫았다.
수사노오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놈은 오로치가 확실히 아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죽이려하고 있다.’
문을 닫았다는 것은 수사노오를 죽여서 입을 봉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내가 누군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 수사노오의 전신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솟구친다. 과연 엄청난 힘이다. 그러나 오로치의 표정은 여전히 매끄러웠다.
수사노오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수사노오 간의 격차는 컸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동안 그는 수많은 인간의 심장을 먹었고, 지금은 이드라센에서 활약할 때의 힘을 거의 회복한 상태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이 넘쳤다.
지금까지는 수사노오의 힘에 눌려 몸을 사리며 지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녀석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켜버린 것이 어쩌면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물밑작업은 거의 끝났다. 수사노오는 물론이요, 신풍이라는 조직조차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내가 널 모르는 것 같다고? 천만에 너무도 잘 알지.” 오로치가 말했다.
“넌 사람이야. 그리고........ 내 먹이지.” 오로치의 빨간 혀가 입술을 천천히 핥는다.
“놈.”
수사노오는 분노했다. 감히 자신을 먹이 취급하다니.
“내 너를 잡아 진짜 오로치의 행방을 찾아내리라.”
“큭큭. 불가능해. 오로치는 이미 내게 완전히 먹혀버렸거든. 이미 한참 전에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그의 복수를 대신 하겠다.” 콰우우우.
성난 분노가 거센 폭풍이 되어 사방을 휘몰아쳤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엄청난 능력.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칠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푸욱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오로치의 손이 그의 복부를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수사노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보다 오로치의 움직임이 눈에 익다는 데 더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큭. 네, 네놈의 움직임...... 그것은.......”
그의 뱃속에 손을 깊숙이 쑤셔 박은 오로치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래. 그 애송이의 움직임과 비슷하지. 아니 똑같아. 사실 나도 놀랐어. 녀석이 내 능력을 복제해 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거든.” 찌걱. 쩍.
말을 계속하면서 오로치는 수사노오의 뱃속에 박은 손을 잔인하게 휘저었다.
수사노오는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그러나 그는 내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중에도 결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기억해? 애송이의 손에서 솟구치던 푸른 섬광. 사실.......” 오로치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 순간.
추아아악.
예리한 칼이 고기를 파고드는 섬뜩한 소음이 들려왔다. 수사노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푸르스름한 빛 줄기가 그의 등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며 툭 튀어 나왔다. 요수의 발톱이다.
“사실 요수의 발톱도 원래 내 기술이었어. 그 애송이 녀석이 마음대로 카피해 간 거지.”
오로치가 수사노오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턱!
마침내 수사노오가 무너졌다. 부대자루처럼 허물어지는 그를 내려다보며 오로치가 중얼거렸다.
“너의 심장. 과연 어떤 맛일까.”
수사노오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되었다.
‘이런 놈에게. 고작 이런 놈에게.’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이따위 녀석에게 당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차라리 그때 애송이의 손에 죽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곧이어 미칠 듯한 고통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그 순간!
콰콰쾅.
돌연 묵직한 폭음과 함께 잠겨있던 문이 벽째 무너져 내렸다.
“웃!”
수사노오의 심장을 꺼내려 했던 오로치는 별안간 벌어진 일에 당황하며 주춤 물러섰다. 그때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날듯이 달려와 수사노오를 끌어안고 도망쳤다. 고양이를 닮은 듯한 재빠른 움직임.
“감히!”
오로치가 호통을 치며 쫓으려 하자 이번에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그의 앞을 가렸다. 먼지가 너무도 자욱해서 얼굴을 판별할 수 없었지만 오로치는 곧 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팔 다리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간 것이다. 인간의 정기를 갈취하는 두꺼비.
“오가마!” “흡. 추악한........ 놈. 감히 군주를........ 흡!”
오가마는 얼굴 가득 분노를 담고서 오로치에게 달려들었다. 쿵쿵 무거운 발소리. 게다가 오가마의 능력 때문에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오로치는 여전히 입가에 간악한 미소를 그렸다.
“흡! 죽어라!”
오가마가 기둥과 같은 주먹을 오로치를 향해 내뻗었다.
“흐흐. 이것이 너의 능력인가? 가소롭군.”
오로치의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스산한 웃음소리. 곧 오가마는 엄청난 광경을 봐야 했다. 그의 능력에 얽혀 잇는 줄만 알았던 오로치가 휙 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채 놀람이 가시기도 전. 왼쪽 등을 찔러오는 엄청난 고통.
“크윽!”
“오~ 놀랍군. 네 녀석이 흡 하는 소리를 안 지껄일 수도 있다니 말이야.”
오가마의 등 뒤에 바짝 붙은 오로치가 간드러지게 지껄인다.
“내가 그동안 네 녀석의 그 흡 하는 소리에 얼마나 짜증이 났는 줄 알아? 흡! 흡! 하는 쇳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 녀석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흐흐흐흐.”
투드드득.
“!”
차가운 오로치의 말에 오가마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등을 파고든 오로치의 손이 그의 심장을 어루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치가 그의 귓가에 바짝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 네 녀석의 심장을 먼저 먹고, 그 다음 깔끔하게 목을 쳐 줄 테니까.”
쯔거걱.
살점이 강제로 뜯겨져 나가는 잔혹한 소음!
“큭큭!”
부릅떠진 눈. 입 밖으로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검붉은 피. 미칠 듯한 경련이 오가마를 휩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심장이 뜯겨 나간 오가마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역시. 능력자의 심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많은 마나가 들어 있는 건 아니군.”
입가에 피칠을 하며 오가마의 심장을 찌걱찌걱 씹어 삼킨 오로치는 맛없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오가마의 심장을 뜯어먹고 난 뒤. 오로치의 탈을 벗어버린 발칸의 표정은 더 이상 겁날게 없다는 듯했다.
가공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는 능력자. 그들의 심장엔 당연히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마나가 담겨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 능력을 빌려 쓰기 때문인가.”
능력자들은 수호신이라 불리는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 쓴다.
이 말은 즉 능력자의 몸뚱이 자체는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소리다. 그들의 몸은 단지 수호신으로부터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매개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곧 능력자의 심장을 먹어도 더 큰 힘을 얻을 수는 없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수사노오의 시신을 훔쳐 달아난 자의 움직임은 무척 빨랐다. 그런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자라면 그가 아는 한 세 명에 불과하다. 하나는 애송이 녀석. 그리고 기린을 수호신으로 둔 이운석.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화차. 그녀로군.”
화차라면 조금 귀찮아진다.
그녀의 스피드는 성가실 정도로 빨라서 지금 뒤쫓는다 해도 따라잡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발칸은 단거리엔 강해도 장거린엔 약했다.
“쫓아가야 할까?” 그러나 발칸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 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수사노오의 심장은 확실히 멎었다.
오가마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발악한 그들의 탈출극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고생고생 메고 간 군주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화차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크흐흐.”
턱을 쓰다듬으며 발칸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니 굳이 그녀를 쫓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가만 내버려두는 편이 깊은 절망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수사노오를 죽여 버렸으니 어쩐다?”
수사노오를 뺀 신풍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화차나 오가마는 꽤나 탐이 나는 능력자이긴 하지만 그들은 수사노오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존재. 결코 자신의 발아래 둘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사실 오로치의 몸을 차지한 이후로, 그는 한참 동안 신풍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신풍을 과감하게 포기하게 되었다. 신풍은 수사노오에 대한 결집력이 무척 강한 집단이다. 지나칠 정도로.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깨끗이 치워버리는 게 좋겠군.”
기괴한 미소를 지은 발칸은 얼마 전부터 생각해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총사.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폭음소리를 들은 풍가닌자들이 달려왔다. 발칸은 태연스런 표정으로 핑계를 댔다.
“별일 아니다. 실험을 하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던 것뿐이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라.”
“네.” 오로치로 변장한 발칸의 삼엄한 명에 풍가닌자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돌아갔다.
몇몇은 피 냄새를 맡고 사상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발칸의 최면에 말려들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내부의 소요를 가라앉힌 발칸은 곧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30분쯤 지났다.
종이에 먹물이 스며들 듯 발칸의 앞에 십여 명의 사내들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 말이의 용이 그려진 중국식 무도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비틀어진 살기를 솔솔 풍기는 그들.
그들 중 유난히 팔이 길고 원숭이 같은 관상의 사내가 키득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에게 이곳을 정리하라고 하더니, 당신도 한바탕 한 것 같군.” 그의 시선이 힐끗 실내로 향한다. 그 안에서 피비린내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발칸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사내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흠. 백원신. 말이 좀 짧은 것 같군. 삼룡회에서 내게 협조하라고 했을 때엔 분명 내 말에 복종하라는 지시가 있었을 텐데.” “흐흐. 실수했군. 용서하시오.”
백원신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나 능글맞은 그 태도는 오히려 사람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이 녀석들도 믿지 못할 놈들이군.’
백원신을 쳐다보던 발칸의 두 눈에 스산한 살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이들 복면인들은 발칸이 중국의 암흑 능력자 연함인 삼룡회와 모종의 계약을 맺고, 그 증거로 지원받은 능력자들이다.
삼룡회는 중국의 마피아와 같은 조직으로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대 조직이다.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고 야심이 크다보니, 세계적인 능력자 연맹인 데몬게이트와 심심찮게 분쟁이 일기도 했는데, 그것 때문에 능력자라면 능력의 고하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정을 훤히 꿰뚫은 발칸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과감히 신풍을 버리고 삼룡회와 손을 잡았다.
오로치의 뛰어난 지략을 흡수한 발칸이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세력 확장의 중요성이었다.
이드라센을 무너뜨린 마계를 물리치기 위해선 무엇보다 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혼자의 힘만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 세상의 발전된 과학문명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면, 무적을 자랑하는 마계와도 한바탕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더더구나 마왕이 이 세상에 왔다는 소식은 그의 이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힘을 키워 이곳에 스며든 마왕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면, 마계를 토벌하는 것도 꿈에 그치지 않을 것이리라.
야망을 품은 발칸은 삼룡회에 손을 내밀었다.
처음 삼룡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발칸은 갓파와 가라스텐구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키메라 제조법으로 흥정을 한 것이다.
마침내 삼룡회가 움직였다.
데몬게이트와의 보이지 않는 암투 속에서 대단한 무기를 찾고 있던 삼룡회의 입장에선 발칸이 내민 키메라 제조법은 구미가 당기는 만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일차적인 자료를 넘기고 협조를 받은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물론 이 수가 전부는 아니다.
삼룡회에서 보내온 인원은 총 삼백여 명. 모두들 지하 깊숙한 곳에 은신한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나저나 부탁한 일은 어떻게 처리했지?” “큭. 일본의 능력자들을 처리하라던 명령 말인가? 크크. 그들은 너무 약하더군.” 백원신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킥킥거렸다. 새카맣게 굳은 피가 덕지덕지 묻은 그의 손가락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발칸이 그들에게 명령한 것은 단 하나, 신풍의 정리였다.
일전에 있었던 특재대와의 전면전으로, 상당수의 능력자가 포로로 잡혔지만 아직 비밀아지트 내에는 백여 명의 조직원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풍가닌자라 불리는, 만들어진 능력자들이었다. 수준은 고작해야 하급의 능력자 정도. 하지만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었다간 자칫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일.
그래서 삼룡회에 협조 받은 인원들의 실력도 알아볼 겸 청소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게 아닌가.
무려 백여 명에 이르는 풍가닌자들을 십여 명의 인원이 소리도 없이 제거해 버린 것이다.
‘삼룡회에서 꽤 쓸만한 녀석들을 보냈군.’
발칸은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어차피 서로 이용해 먹는 관계니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발칸은 삼룡회에서 지원해준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십여 명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은 셋.
첫 번째는 지금 그의 앞에서 거들먹거리고 있는 백원신이라는 녀석이고, 두 번째는 한쪽 벽에 기댄 채 이따금씩 어깨를 비틀고 있는 사자머리의 마복이라는 녀석이다. 녀석은 유난히 큰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리와 따로 떨어진 채 서 있는 태극 문양 도포를 입은 사내. 그는 백택이라는 이름으로, 듣기로는 무당파의 직전제자라 하였다.
이들 세 명은 각기 독특한 느낌을 풍겼다. 특히 무당파 제자인 백택은 어떤 힘을 감추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할 정도다.
‘좋아. 이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특재대를 흔들어 놓을 수 있겠어.’
그의 계획은 먼저 한국의 능력자들을 제압하여 세력을 불린 다음. 일본까지 삼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충분히 이계를 정벌할 수 있을 테지.
문득 그는 계획의 실행에 앞서 한 가지 거추장스러운 녀석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을 복제하던 해괴망측한 녀석!
사사건건 그의 일을 방해하는 고얀 녀석.
‘그래. 이번엔 눈에 거슬리는 그 애송이 녀석을 먼저 치워버려야겠어. 하는 김에 퀴니라는 그 앙큼한 계집아이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닌가. 크흐흐흐.’
삼룡회에서 지원받은 중국인 능력자들을 훑어보며 발칸은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냐. 역시 군주님의 염려대로였어.”
수사노오의 몸을 안고 부리나케 달리고 있는 화차는 군주에게 들었던 명령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수사노오는 오로치에서 풍기는 기운이 이상하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얼마 전. 급기야 그녀와 오가마에게 오로치를 은밀히 감시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일전에 특재대와의 싸움에 수사노오가 굳이 그들 두 사람을 버리는 것처럼 행동했던것도 사실 이러한 움직임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냐, 군주님 죄송해요. 저희의 대처가 늦어서.”
화차의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품에 안은 수사노오에게서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처참하게 찢겨진 뱃속에서 피와 함께 내장이 흘러나왔다.
화차는 소매를 찢어 군주의 상처 부위를 대충 칭칭 감았다.
지금은 치료를 할 여유가 없다. 언제 오로치의 추적이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가마.”
정신없이 달리던 화차는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오가마는 아마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내다. 군주를 위해 한 목숨 바치려 했던 사내니 후회 없이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의 희생을 밟고 달려야하는 화차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냐. 빨리 몸을 피해야 해.”
일본으로 향하는 항만과 공한은 놈이 미리 수작을 부려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은 세상의 눈을 피해 잠적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래.
경계가 느슨해 졌을때, 그때야 비로소 그녀는 부상당한 군주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냐. 어딜까. 발칸이 생각할 수 없는 곳이.’
그녀는 오로치가 얼마나 치밀한 자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오로치가 당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군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로치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단순한 살인마인 줄로만 알았던 발칸. 그자가 실은 엄청나게 치밀한 작자였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런 발칸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타국.
일본인인 그녀는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혹 있다 해도 이미 발칸이 손을 써 두었을 것이다.
‘냐.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지?’
도무지 몸을 숨길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초조해졌다. 그러다 문득 한 곳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결코 친하지 않은 사람. 아니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지만 임무차 찾아갔기에 대충이나마 집을 알고 있었다. 마침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게다가 적이라는 관계. 발칸의 허점을 교묘하게 찌를 수있을 것으로 보였다.
“냐. 좋아. 가자.”
방향을 잡은 화차는 눈부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냐. 이게 뭐야?”
목적지에 당도한 화차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했다.
분명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주위 풍경이 예전과 전혀 달랐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던 집들은 싿 다 사라지고 웬 20층짜리 빌딩 한 채만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아닌가.
“냐. 잘못 왔나?” 화차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온 것이 맞다. 그녀가 이운석 등과 한바탕 했던 골목은 여전히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냐. 어떻게 된 거야. 이게.” 화차는 길을 잃은 초등생처럼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훌쩍거렸다. 그때였다.
언덕 아래에서 가방을 멘 병규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띈 것은.
화차는 반가운 마음에 왈칵 눈물이 맺혔다. 적이었던 사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하지만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자칫 상대의 경계심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주위를 살핀 화차는 조심조심 그에게 다가갔다.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규는 발걸음도 가볍게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20층 빌딩의 웅장한 모습에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렇게 삐까번쩍한 걸물이 자신의 것이 되다니, 웃음이 절로 나오고 좋아서 미칠 지경이다.
물론 가스펠의 간섭 때문에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 말하기도 좀 뭐하고, 실재로 수입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자신의 소유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다.
게다가 일이 잘 풀리려는지 갑자기 좋은 소식만 들려왔다.
오늘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과 곧 이한영이 이사를 온다는 소식.
그야말로 해피 해피한 일의 연속이 아닌가.
가물치 형을 위시한 조폭 형님들의 압박이 심상치 않지만 그쯤이야. 필요하다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작정이다. 이한영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좋아. 기왕이면 특수면허라도 따 둘까? 누님과 드라이브라도 할 수 있게 말이야.’
특재대의 요원에겐 국가에서 발행하는 특수면허라는 것이 있는데, 이 면허 하나로 모든 종류의 차량을 자유롭게 운전할 수 있었다. 이운석이 미성년자이면서도 스포츠카를 몰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이 면허 덕분이다.
그렇게 병규가 방학과 함께 시작될 분홍빛 미래를 상큼하게 설계하고 있을 때.
“병규야.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언덕을 오르던 병규는 호랭이의 경고에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그도 수상한 기척을 느끼던 차였다.
팔락팔락.
소리에 의식을 집중하자 레이더처럼 귀가 팔락인다.
귀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 이후로 뜻하지 않게 그는 소리를 매우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전혀 생각도 못한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다.
단순히 소리만이 아니다. 감각이라고 할까. 주위의 기척을 무서울 정도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박쥐의 초음파만큼이나 민감하면서도 놀라운 재주였다.
지금도 화차의 미세한 발걸음소리를 귀신같이 잡아내고 있었다.
‘조금 놀려줄까?’
짓궂은 생각이 든 병규는 호랭이에게 꽉 잡으라는 눈신호를 보낸 후 몸을 움직였다.
‘헉!’
살금살금 병규의 뒤를 쫓던 화차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조용히 걷고 있던 병규의 모습이 돌연 휙 하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는데, 등 뒤에서 병규의 음성이 들려온다.
“어? 누군가 했더니 고양이 아가씨네.”
“냐? 냐!” 화차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 역시 스피드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뛰어난 능력자.
과거 이운석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방금 병규의 움직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오죽하면 두 눈 멀쩡히 뜨고도 그의 종적을 놓쳤으랴.
“흐음. 그때 운석이에게 잡혔다가 운 좋게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멀리 안 가고 여길 돌아다니고 있었네. 뭐, 하여간 그건 그렇다 치고 무슨 볼일이야?”
병규의 물음에 화차는 어깨를 움츠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몰래 살금살금 다가가 병규를 깜짝 놀라게 만든 후에, 협박 반 부탁 반으로 협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지금은 완전히 반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병규의 음성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어, 너 그 소매에 묻은 거 뭐야?”
화차의 소매에 묻은 피를 본 병규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온다.
“너 사람 죽였냐?” 병규의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화차는 급히 두 손을 흔들며 극구 부인했다.
“냐. 난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그리고 사람을 해치지도 않았어. 사실 그 반대야.”
“반대?”
병규가 묻자 화차는 큰 두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며 울먹였다.
“냐. 도와줘. 제발 군주님을 살려줘.”
“?” 병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군주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폭풍의 군주, 수사노오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가 아는 그는 절대로 살려 달라는 말을 들을 만큼 허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일단 들어보자.”
호랭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우선 그녀는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던 화차는피로 물든 소매로 눈가를 닦더니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두서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냐. 숨을 곳이 필요했어. 오로치를 피해서 숨어야 해. 그런데 갈 곳이 없어. 그래서 여기로 왔어.”
“무슨 소리야. 오로치를 피해야 하다니. 너 오로치와 싸우기라도 한 거야?"
“냐. 아니야. 오로치 전혀 다른 사람이야. 오로치는 발칸이었어. 그가, 그가 군주님을 해쳤어.” 쿵!
병규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발칸.
이 두 글자 이름이 주는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 그 녀석은 죽었잖아.”
병규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 발칸은 죽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해치웠다. 요수의 발톱으로 몸뚱이를 양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살아있다고? 그리고 오로치가 되었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일단...... 가보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럴 수가.”
화차가 안내한 으슥한 곳의 수풀 속에서 수사노오를 발견한 병규는 신음성을 흘렸다. 천하무적이라 생각하던 폭풍의 군주가 으슥한 수풀 속에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녀석. 고작 이런 꼴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위엄 가득한 모습이 떠오르는 폭풍의 군주!
상상도 못할 폭풍을 과시하며 그를 몰아붙였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고통. 죽을 것 같은 통증을 참아내며 어거지로 덤벼들었다. 한 방만.딱 한 방만 때리자며 악을 쓰지 않았던가.
그리고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간신히 한 방 먹였을 때, 녀석은 이제 그만 두자며 몸을 돌렸다. 그때 그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던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의식을 잃는 그 순간까지 다음에 만나면 기필코 이기겠노라고 투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지금 그의 발아래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것이다.
붉은 피에 범벅이 되어 흥건히 고인 핏물에,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병규는 수사노오의 배를 칭칭 동여맨 헝겊을 천천히 풀어냈다. 안에서 밖으로 터져나간 석처럼 벌어진 살점. 그 안으로 보이는 뭉개진 내장들.
욱신.
갑자기 아랫배로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전에 발칸에게 당했던 자리다. 수사노오의 상처를 보자 갑자기 예전의 그 미칠 것 같았던 통증이 떠올랐다.
“정말이로군.”
수사노오의 상흔을 확인한 호랭이가 신음성을 흘린다.
“이런 짓을 할 수잇는 녀석은 내가 알기로 발칸. 그 녀석뿐이다.”
병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였다고 생각하던 녀석이 버젓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몸이 반 토막이 났는데도 살 수 있는 거지?“ 부검실로 수송 중이던 발칸의 시신이 중간에 사라졌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단순한 사고로만 받아들였다. 몸이 반 토막 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있겠느냐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놈이 버젓이 살아있다.
“애초에 녀서을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어.”
병규는 넋이 나간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런 그를 호랭이가 다독였다.
“놀라는 건 나중에 해도 돼. 우선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 보자.”
“네.”
병규는 즉시 수사노오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어 그는 수사노오의 코와 입에 손을 가져갔다.
“숨도....... 수지 않아.”
“냐.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화차는 곧 눈물을 뿌렸다. 수사노오의 몸 위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구출해 왔는데, 오가마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 구해 냈는데,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다니.
그녀의 울음은 어느새 통곡으로 바뀌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수사노오의 손을 잡고 있던 병규의 입이 열린 것은.
“아직은....... 살릴 수 있을 지도 몰라.”
“냐?”
화차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의 심장은 이미 오래전에 멈춘 것 같아. 그리고 피도 너무 많이 흘렸지. 숨도 쉬지 않아.”
“냐. 싫어 싫어.”
화차는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도리질을 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병규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힘으로 그녀의 귀를 열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죽은 게 맞아. 하지만 이상해. 그는 열기가 있어. 체온이 있단 말이야.”
“냐?” 화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화급히 수사노오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약간이긴 했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군주님. 군주님.”
화차는 수사노오의 손을 붙든 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군주님은 몸이 죽어버린 상황에서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화차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병규는 조용한 목소리로 호랭이에게 물었다.
"살릴 수 있나요?“
예전에 그 역시 이런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살려낸 것이 호랭이였다. 그러나 호랭이는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불가능해.”
“왜요?” “전에 말했다시피 널 살리기 위해 난 수백 년의 도력을 소모해 버렸다. 그래서 이런 꼴이 되었지 지금 내게 이 녀석을 살릴 만한 도력은 남아있지 않아.”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더 있다. 호랭이가 도력을 사용할 때의 병규는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이었다. 그렇지만 수사노오는 누가 봐도 죽은 사람이 아닌가. 호랭이가 아무리 대단한 도력을 지녔다 해도 명계로 넘어간 혼령을 어찌할 능력은 없었다.
“냐. 제발.”
화차는 간절한 표정으로 병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왜 병규가 강아지를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의지할 사람은 그 하나뿐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병규는 씩 하고 웃음을 보였다.
“걱정 마.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러나 화통한 대답과 달리 병규는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아무리 능력자의 회복능력이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고는 하지만, 심장이 맘춘 상태에서도 과연 되살릴 수 있을까?
‘상처도 좀 꿰매고 피도 수혈해줘야 할 것 같고. 아니지. 심장이 멎었으니 전기 충격을 줘야 할까? 3분만 피가 안 통해도 뇌세포가 죽는다고 하던데, 이거 고생해서 살려놨더니 혹시 치매환자가 되어버리는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전문의의 진단과 치료가 필요했다. 그러나 화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냐. 절대로 안 돼요. 병원 같은 곳에 갔다간 발칸이 금방 눈치를 챌 거예요.” “흠. 병원이 안 된다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특재대 본부의 의료센터.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재대의 지원을 바라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런 그에게 전혀 다른 대안이 떠올랐다.
‘그래. 가스펠이라면.’
퀴니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가스펠은 이 주변에 다수의 특수요원과 시설들을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런 시설 중엔 최첨단의 의료장비들과 의료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규는 수사노오의 몸을 들쳐 업고 무작정 빌딩을 행해 뛰었다. 뛰면서 그는 바퀴벌레 왕자를 호출했다.
“바퀴” “부르셨어요? 샤바?” 부르자마자 화차의 그림자 속에서 바퀴벌레 왕자가 파다다다 날아왔다.
“꺅!” 화차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병규는 아예 무시했다.
이미 바퀴벌레 왕자의 치 떨리는 은신술(?)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라스텐구의 피를 먹은 후, 10미터 후방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조차 잡아낼 수 있게 된 그의 감각으로도, 아직 바퀴의 은신술(?)만은 도무지 파악이 안 되었다.
“마퀴. 채드가 어디 있는지 알 수있어?”
“물론이죠. 샤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 바퀴벌레 왕자는 더듬이를 번개 모양으로 구부리며 잠시 수상한 전파를 송수신했다.
“채드는 지금 퀴니와 놀고 있어요. 샤바. 15층 22호실이에요. 샤바.”
“잘했어.”
바퀴벌레 왕자를 칭찬한 병규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휘이잉.
그의 움직임이 무서울 정도로 빨라졌다. 화차는 아예 쫓아오지도 못할 정도였다.
저 멀리 보이던 번쩍거리는 빌딩이 어느새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1층엔 금속 탐지기를 비롯한 복잡한 보안절차가 있었다. 그런 보안절차들을 정상적으로 통과하려면 상당한 시간을필요로 한다. 그러나 병규는 잠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예 문이 없는 벽으로 달려가 빌딩의 외벽을 평지처럼 타고 오르며 15층의 복도 창을 깨고 들어갔다.
“냐. 냐?”
숨을 헐떡이며 뒤쫓아오던 화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직으로 선 건물 벽을 평지처럼 달려?
“냐. 거짓말!”
화차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경악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녀를 당황케 한 것은.
“냐아! 난 어쩌란 말야!”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스파이더맨이 아니었다.
“채드!”
22호실의 문을 뻥 걷어차며 병규는 곧장 채드를 불렀다.
“아. 병규 씨.”
퀴니와 소꿉장난을 하고 있던 채드가 방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병규는 수사노오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며 그에게 부탁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채드.” “네?” 멀뚱한 표정의 채드는 병규와 침대에 누운 수사노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학교에 갈 때만 해도 이제 여름방학이 시작된다며 ‘해방이다.’
‘자유다.’ ‘하렘이다.’ 한껏 들떠있던 그가 지금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사내 하나를 들쳐 메고 왔다.
패싸움이라도 한 것일까?
공연한 의심을 하며 침대에 쓰러진 수사노오에게 눈길을 주던 채드. 돌연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엇! 이 자는!”
눈에 익은 얼굴이다.
“푹풍의 군주.”
채드는 단번에 수사노오의 정체를 파악했다.
감히 총수인 퀴니를 납치한 무례배. 채드가 그를 본 곳은 가스펠에서 발행된 척결명령서에서였다.
사실 가스펠에서는 신풍을 징계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많은 힘을 쏟았다. 그러나 신풍의 자취가 너무도 신비하여 지금까지는 별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병규가 홀아비가 과부보쌈 하듯 신풍의 군주를 들쳐 메고 온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채드의 얼굴 위로 살얼음 같은 냉기가 내려앉았다.
“잠시만. 이제부터 설명할 게요.”
가쁜 숨을 몰아쉰 병규는 화차를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합니다.”
병규의 얘기를 들은 채드는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멎어버린 사람을 다시 살려보겠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정말로 안 될까요?”
병규는 음울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심장이 멎은 지 한참이나 지난 사람입니다. 체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안 됩니다. 안 돼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거듭되는 병규의 부탁에도 채드는 점잖게 거부했다.
“휴.” 깊은 한숨을 내쉰 병규. 별 수 없이 그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퀴니야.”
“헛!”
병규가 무표정한 얼굴로 퀴니를 부르자 냉정하던 채드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다.
“서, 설마 비겁하게 총수님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병규는 그를 보며 씩 하고 웃어 주었다.
“앞으로 비겁을 생활신조로 여길 생각입니다.”
“!”
결국 채드는 병규의 사주를 받은 퀴니의 한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엔 완강하게 저항했던 그였지만 일단 퀴니의 명령이 떨어지자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곧바로 대기 중인 의료반에 연락을 놓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특수장비들을 공수해오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엉뚱한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채드의 가시 돋친 말에 병규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조금이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수사노오를 살리려는 거죠? 그는 적이잖아요?”
채드가 물었다.
“한 방 먹여 줄 생각이거든요.”
“네?”
채드는 병규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병규는 그를 향해 짙은 미소를 보였다.
“전에 싸움에서 졌을 때. 다음에 만나면 꼭 이겨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도저히 이해 못할 사람이군요.”
채드는 머리를 저었다. 다음에 싸워서 이기기 위해 다 죽은 원수를 다시 살려낸다고?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맞아.”
호랭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채드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참 이상한 놈이야. 하지만 그것이 녀석의 매력인지도 모르지.”
폭주 날라리 신선님의 입가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