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님, 몇 척이 필요하십니까
“에잉?”
병규의 얼굴이 살짝 맛이 간다.
“집이 어디 간 거야?”
며칠 동안의 특훈으로 귀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즐거운 마음으로 랄라라~ 특재대 본부를 나설 때까지는 좋았다. 아니 그 이후로도 쭉 좋았다.
탁한 도시를 벗어나 정든 골목길로 접어들고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엔. 눈물마저 핑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 즐거웠던 기분은 골목을 지나 노랭이 언덕에 오른 후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그게 그러니까, 뭔가 좀 썰렁해졌다.
아니, 다른 것은 다 그대로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잘못 왔나?”
혹시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골목길. 익숙한 전봇대. 익숙한 풍경 속에서 그의 집만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평평하게 땅을 닦아 그 위에 세운 휘황찬란한 20층짜리 건물의 조감도.
“헛.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병규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열흘 정도 외출한 사이 집이 싹 사라진 것이다. 좀도둑에게 집이 털렸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집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한 그였다.
그가 한참 절규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오빠. 드디어 찾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경애였다. 쪼르르 달려온 그녀는 대뜸 병규의 소매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오빠. 이럴 수 있는 거야? 이럴 수 있는 거냐고. 엉엉엉.”
“무, 무슨 소리야. 경애야 울지 말고 똑바로 애길 해봐.”
병규가 당황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묻는데, 그녀는 신발을 벗어 들고 땅을 두드리며 꺼이꺼이 통곡만 했다.
“무슨 얘길 해. 이렇게 해 놓고. 집세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냥 말로 나가라고 할 것이지. 야박하게 이게 뭐야. 난 그래도 오빠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을 줄이야. 아이고, 억울해. 아이고오.”
“엥? 야, 야박?”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초지종을 알게 되기는커녕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야박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집을 싹 밀어버린 게 나란 말야?” “흑흑, 오빠가 흑. 오빠가 안 그러면 누가 그래?”
병규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팍을 퍽퍽 쳤다.
“바보야. 어떤 미친 녀석이 달랑 집세 500원 때문에 집을 밀어버리겠니? 내가 그런 게 아니야.”
“흑흑. 정말?” “당연히 정말이지. 집이 없어지면 당장 오늘 잘 곳도 없어지잖아.” “흑. 맞아. 오빠도 잘 곳이 없구나.” 그제야 이해가 된 경애.
소매로 눈가를 쓱쓱 닦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그럼 누가 집을 밀어 버린 거예요?”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나쁜 자식들.” 이를 으드득 갈아대는 병규는 조감도에 씌어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넣었다.
“Hello~"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활달한 목소리에 순간 열이 확 뻗친 병규는 다짜고짜 고함부터 질러댔다.
“헬로는 무슨 놈의 헬로야? 나 노랭이언덕의 이층집 주인인데. 내 집 밀어 버린 게 당신이야?” “....... 혹시 대변기 씨?”
“뭐, 뭣? 대변기? 그래. 내가 바로 대변기다. 응가통이라고! 그러는 넌 누구야. 누군데 남의 집을 밀어 버린 거야!”
“Please calm down. 진정하세요. 곧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리무진 한 대가 노랭이언덕 쪽으로 다가왔다.
“아아~” 리무진을 본 경애의 눈이 몽롱해진다.
“돈 냄새가 풀풀 나.” 그녀의 말대로 이놈의 리무진은 비싼 티를 내는 건지 겁나게 번쩍거렸다. 그런데 더욱 약이 오른 것은 그렇게 휘황찬란한 차에서 내린 사람이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가 아니라, 훤칠한 키에, 금발머리의 미청년이었던 것이다.
순간 병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거기 계신 양반. 이거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한 거 아뇨?” 뚜벅뚜벅 걸어온 청년은 병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대변기 씨?”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툭 쳐낸 병규는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내가 바로 대변기다. 그러는 넌 누구냐? 수세식 좌변기라도 되냐?”
“하하. 이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기분이 나빠질 만도 하건만 청년은 과장되게 손을 흔들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체이드. 카트리얼 체이드입니다. 그냥 편하게 채드라고 부르십시오.”
청년은 노랑머리에 코쟁이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유창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병규의 기분은 더 엉망이 돼 갔다.
‘이 자식. 우리나라 말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날 대변기라고 불러?’
집도 없어지고 이름까지 해괴하게 불려진 병규는 이래저래 짜증이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만나서 반갑소. 카드캡터 채리 씨! 그런데 당신. 왜 남의 집을 허락 없이 밀어 버린 거요?”
“하하. 역시 그것 때문이었군요. 기분이 안 좋으셨던 이유가.”
원래 천성이 그런 듯. 시비조의 말에도 채드는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미리 설명을 드렸어야 했는데, 일이 급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많이 당황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사정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엇?” 막 설명을 시작하려던 청년의 입에서 돌연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무엇을 보고 놀란 것일까. 찢어질 듯 커진 눈동자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온다.
‘이게 미쳤나.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병규는 불안한 표정으로 청년의 끈적끈적한 시선이 향하는 곳을 살폈다. 그의 등 뒤, 퀴니가 고개를 빠꼼히 내민 채 채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총수니임!”
갑자기 채드가 퀴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다로 뛰어드는 물개처럼 퀴니 앞에 넙죽 엎드린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손등에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이 마스터.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이 청년.
조금 전까지는 젠틀한 이미지를 팍팍 풍기더니, 퀴니를 본 후론 하는 짓이 완전 유치원생 수준이 되어버렸다.
“퀴, 퀴니야. 아는 사람이니?”
황당한 표정으로 병규가 묻자 퀴니는 고개를 딸랑딸랑 끄덕여 보였다.
“얘, 퀴니 쫄병. ”
“쫄병? 부하란 소리야?”
“응.”
병규는 청년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신을 청년이 퀴니를 총수라고 부를 때부터 대략 눈치를 챘다.
퀴니를 총수라고 부르는 곳.
청년은 유럽의 능력자 연합. 가스펠에서 온 능력자인 것이다.
청년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병규, 불현듯 그는 청년이 자신을 대변기라는 시금털털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끙, 퀴니였군.’
원흉은 퀴니였다.
그를 대변기라는 흉악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퀴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리려나.’
채드는 10분이 넘도록 퀴니의 손바닥과 손등에 번갈아 가며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하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우응. 마스터. 마스터. 마이 마스터.”
“이게 뭐죠?”
“매매계약서입니다.”
“매매계약서?”
채드라는 사내가 내민 서류를 받아든 병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밀어 버렸냐는 질문에 그는 대뜸 매매계약서를 내민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매계약서를 훑어본 병규의 입이 차츰차츰 벌어진다.
매매계약서는 병규의 집 주변 일대의 토지와 가옥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으며 소유권 이전의 대상으로 태병규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새로 건축되는 20층 빌딩과 이 주변 일대의 땅이 병규의 소유가 된다는 소리였다.
“이, 이거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저, 정말로 이 빌딩을 제게 주시는 건가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하지만 전 가스펠에게 이런 선물을 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
“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유가 없다니요. 저희의 총수님을 돌봐주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납치된 총수님을 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께 이 정도 보상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오오.”
병규는 탄성을 질렀다.
그저 가족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닌 것뿐인데, 이런 엄청난 보상이 뒤따를 줄이야.
이미 이층집이 없어진 불쾌감은 은하계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허름한 이층집을 날린 대신 삐까번쩍한(?) 빌딩을 얻게 되었으니, 이득도 이런 이득이 없지 않은가.
병규는 갑자기 퀴니가 엄청 사랑스러워졌다.
“그런데 20층이라니. 개인소유로는 너무 크지 않을까요?” “허어. 크다니요. 그나마 이것도 최소로 잡은 겁니다. 총수님의 품위를 생각한다면 200층짜리 초고층 빌딩으로도 부족합니다. 공사기간을 감안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소박한 건물 따위를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소, 소박요?” 병규는 김빠지는 소릴 냈다. 20층 건물이 소박하다니.
“그럼 계약에 동의하십니까?”
“무, 물론입니다.” 병규는 혹시나 말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대답했다.
그는 채드가 내미는 계약서에 후다닥 서둘러 서명을 했다. 서명을 하고 계약서를 한 장씩 나눠 갖자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당장 복권에 당첨된다 해도 이렇게 뿌듯할 것 같지 않을 듯 했다.
“저, 오빠.”
계약서를 품에 안고 헤벌쭉 웃고 있는데, 경애가 그의 소매를 살짝 당기며 묻는다.
“저, 기존의 세입자 내쫓지 않을 거죠? 방세도 올리지 않을 거죠?”
그녀는 그의 소매를 살며시 붙든 채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길로 끼잉끼잉 운다.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정신없이 흔들었을 것 같다. 병규는 금세 거만해져서는 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핫. 물론이지. 20층이나 되는데 그깟 500원 정도야. 푸하하하.”
“와아. 대한독립 만세~! 만세~!”
경애는 두 손을 쳐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체 이 사건과 대한독립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런데 20층 건물을 뭐로 채우나.’
그가 어떻게 빌딩을 굴릴까 고민하는데 계약서를 받아 챙긴 채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참. 그런데 건물의 설계상, 몇 가지 특이점이 있는 걸 깜빡 잊고 알려 드리지 않았군요.”
“트, 특이점요?” 병규는 왠지 불안해졌다.
“뭐 별것은 아니고, 총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만큼 그에 걸맞은 시설과 보안장비가 필수라 생각돼서 말입니다. 설계 당시부터 신경을 쓴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지하 1층에서부터 5층까지는 주차장으로 사용되며, 3층은 손님접대를 위한 라운지로, 그리고 최상층인 20층은 다목적 무도장으로 꾸밀 예정입니다. 또한 건물의 옥상에는 헬기 착륙장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병규는 오오 하는 환성을 질렀다.
괜한 걱정이었다.
채드의 말대로라면 그의 빌딩은 웬만한 호텔 뺨칠 정도로 편하고 화려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딱 여기까지였다.
채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병규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에또.... 그리고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1층에 금속 탐지기 같은 최첨단 검색장비 몇 개를 설치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보안강화의 일환으로 각층의 복도를 이중으로 구성할 예정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밀 복도엔 수백 명의 요원들이 상시 대기, 빌딩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세밀히게 감시하게 될 것입니다.
아! 물론 특수한 훈련을 받은 요원들이라 절대로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변기 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사소한 사항이긴 하지만, 각층마다 100여 대의 고성능 CC TV가 설치될 겁니다. 아! 물론 CC TV 또한 저희가 직접 관리한 생각이니 변기 씨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속 탐지기? 비밀복도? 24시간 감시? 특수한 훈련을 받아서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이지 않을까? 과연 화장실에서 마음 놓고 ‘청산~ 벽계~ 퐁당’을 할 수는 있을까?
그리고 각 층마다 100여 대의 CC TV가 설치된다는 것은 또 웬말이란 말인가. 아예 천장을 CC TV로 도배를 하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나사(NASA) 나 펜타곤(미국국방부의 본부청사)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보안이다. 아니 이 정도면 아예 대놓고 스토킹을 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채드의 충격적인 설계방침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건 사소한 문제입니다만, 역시 보안강화의 일환으로 방문마다 전자식 도어를 설치하여 개인 카드가 없으면 화장실도 출입할 수 없도록 할 예정입니다.
또한 헬기 착륙장 바로 아래에 대공 미사일과 더불어 신형 패트리어트 미사일 발사장치, AHED(자기감응유도 방식의 신형탄약 시스템)를 장착하여 상공에서의 공격에 대비할 예정이며, 이와 같은 맥락으로 건물의 최하층인 지하 6층엔 장갑차 5대와 군용 지프 8대. 귀빈 수송용 방탄차량 10여 대 및 각종 화기들을 비치할 생각입니다."
"무, 무슨!"
병규는 질겁했다.
‘화장실 갈 때도 보안카드가 필요하다?’
카드가 없으면 볼일도 못 본단 얘기가 아닌가. 심각할 정도로 불편할 것 같다.
‘대공 미사일 발사장치와 장갑차? AHED는 또 뭐야.’
이건 무슨 만화에나 등장하는 지구방위대 사령부라도 만들 모양이다. 만약 대공요격장비들에 이상이 생겨서 지나가는 여객선이라도 추락시켜 버린다면 그야말로 전쟁발발이 아닌가.
병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채드에게 물었다.
“저, 저기. 방금 말씀하신 장비들. 꼭 설치해야 하나요?”
“네. 반드시.” “........”
채드의 대답은 단호했다. 병규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빌딩만 병규의 소유로 해놓고 실질적인 관리 감독은 가스펠에서 모두 맡겠다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퀴니가 앞으로 쑥 나서며 하는 말이 또 걸작이다.
“나 항공모함 좋아. 항공모함 줘.”
“컥.”
탱크에 미사일 발사장치까지 갖춘 20층짜리 건물로 부족해서 이젠 항공모함을?
‘여기서 바다까지는 100킬로미터도 넘는다고!’
병규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내의 행동이 또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때리더니.
“총수님께서 항공모함이 갖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즉시 수배 좀 해주십시오.”
‘마, 말도 안 돼.’
병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양반도 정신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사내의 다음 말에 병규는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저, 총수님. 몇 척이나 필요하시냐고 묻는데요?” “헉!”
숨넘어가는 병규.
충격의 여파로 그는 잠시 굳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득달같이 채드에게 따지고 들었다.
“말도 안 돼.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항공모함은 둘째치고, 그 큰 것을 집 앞까지 어떻게 가져올 겁니까.”
병규는 절대로 안 된다며 결사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채드는 훗 하는 웃음과 함께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하. 그거야 집 앞까지 수로를 뚫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하는 김에 아예 운하를 건설하죠.”
국토를 양분하는 엄청난 작업을 무슨 애들 소꿉장난처럼 얘기한다. 돈은 둘째 치고, 한국 정부로부터 어떻게 허락을 얻을 생각인 건지.
“안 돼. 안 돼. 항공모함? 운하? 절대 안 돼.”
병규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빌당에 설치될 예정인 보안시설도 모두 제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실험실의 생쥐냐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채드는 계약서를 흔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병규의 눈물보다 퀴니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급기야 병규는 감히 치사해서 동원하지 않으려고 했던 비장의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나, 빌딩에서 안 살아.”
“하지만 분명 방금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습니까?”
채드는 당당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계약서를 흔들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번엔 병규가 허허 하고 웃어 보였다.
“누가 빌딩을 안 가진다고 했나요?”
“........”
“빌딩은 가지겠지만, 그곳에서는 안 살겠다는 말이지요.”
“!”
채드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병규의 소매를 붙들고 있는 퀴니를 내려다보더니 곧 입가에 차분한 미소를 그린다.
“갈 테면 가십시오. 그러나 총수님은 이곳에 남으실 겁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투다.
“호, 과연 그럴까?”
병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퀴니를 응시했다. 퀴니는 병규와 채드를 번갈아 보더니 채드를 향해 뭐라 입을 열었다.
“난 변.......” 그 순간 채드가 두 손으로 입을 감싸 쥐며 소곤거렸다.
“항공모함입니다. 총수님. 군함 100척은 보너스로 얹어 드리겠습니다.”
“오옷!”
퀴니가 솔깃한 반응을 보인다.
“후후후.”
채드는 손가락으로 황금빛 머리칼을 휙 쓸며 득의의 미소를 날렸다.
이미 승부는 끝났다는 식의 여유로운 웃음.
그러나 병규는 픽 하고 가볍게 비웃어 주었다. 감히 항공모함 정도(?)로 퀴니를 꼬시려 들다니. 아직 한참 연구가 필요한 녀석이 아닌가.
그는 망설이고 있는 퀴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긴 더듬이. 반질반질 등껍질.” 퀴니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반응이 온다. 역시 이 아이의 취향은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한다. 병규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유혹을 계속했다.
“차다다다. 샤바샤바!” 추르르르.
퀴니의 뽀얀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지더니 입가에 침이 흥건하게 고인다.
반대로 채드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무, 무슨!”
“후후후.”
병규는 창백한 그의 얼굴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더니, 마침내 최후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둥글넓적한 바퀴벌레 왕자~”
“후오오옷. 나 변기할래.” 대뜸 병규의 허리춤에 매달리는 퀴니.
“크윽.”
결국 채드는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가. 총수님이.”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좌절했다.
“쿠후후후후. 음화화화화화홧.”
거만한 자세의 병규는 썩은 미소를 채드에게 날려주었다.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다.
“대, 대체, 총수님을 무엇으로 유혹한 것인가!”
채드는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병규를 향해 물었다. 그를 흘끔 내려다본 병규는 동정하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바퀴벌레.”
“무엇이?!” 쿠쿵.
채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랐다. 이어 실성한 듯 흘러나오는 절망 어린 음성.
“하, 항공모함이 바퀴벌레에게 침몰되다니.”
그렇게 일련의 사건은 병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항공모함을 원하는 퀴니에겐 프라모델로 만든 항공모함으로 대충 합의를 보았다.
퀴니는 항공모함에서 비행기가 안 날아간다며 투덜거렸지만, 병규가 접착제로 붙여서 그런 것이라고, 대신 그 항공모함은 통째로 하늘을 나는 놈이라고 얘기해줬다.
퀴니는 ‘후오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병규가 선물한 항공모함은 그녀의 손에 붙들린 채 부웅~ 하며 하늘을 날고 있다. 어디서 들었는지 ‘우주전함 야마토’란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병규에게 패해 한동안 의욕상실 증세를 보이던 채드는 곧 원래의 쾌활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병규가 원하는 모든 사항에 합의해 주었다. 그렇게 빌딩 공사가 시작되었다.
“너무 빠르다.”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20층짜리 빌딩이다.
아무리 수수하다고 해도 무려 20층이나 되는 빌딩이다.
‘일 주일 전에 계약서에 서명했는데.’
그때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20층 빌딩이 거의 완성되어 있다. 남은 것이라곤 페인트칠과 자질한 뒷손질 정도.
어떤 마술을 부린 거냐고 채드에게 물으니 새로운 공법을 도입했단다.
예전처럼 H빔으로 뼈대를 만들고 한 층 한 층 살을 붙이는 방식 대신, 장난감 블록처럼 다른 장소에서 이미 만들어진 큐브 형태의 방 하나하나를 탄탄하게 닦인 베이스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식으로 건물을 완성해 간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새로운 공법이라곤 해도 일 주일이라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동안 완공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나 단단한 자금력과 무자비할 정도의 인력투입 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슨 놈의 건물을 일 주일 만에.’
병규는 혹시나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빌딩은 차츰 제법 제 모습을 갖춰갔다. 내부 역시 내장재와 더불어 퀴니를 보호하기 위한 첨단장비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병규가 우려했던 CC TV와 이중복도에서의 감시문제는 대충 합의점을 찾았다. 그러나 패트리어트 미사일 발사대와 같은 가공할 만한 병기들은 끝내 건물 이곳저곳에 장비되고 말았다.
정원 아래에 장착되는 최첨단 자동병기들을 보며, 병구는 혹시 빌딩 뒤쪽의 작은 연못 아래에 로봇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만약 그렇다면 조종사는 틀림없이 퀴니겠지?”
후오오라고 외치며 로봇을 조종하는 귀여운 얼굴의 퀴니를 떠올리니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여간 그렇게 빌딩의 완공일이 다음 날로 잡혔을 때다.
학교에서 터덜터덜 돌아와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빌딩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 조폭들이었다.
‘조폭들이 이곳에 무슨 볼일일까.’
만약 뜯어먹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이라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픈 협박도 끝내기 전에 정원에 설치된 수많은 자동화기들의 환영을 받아야 할 테니 말이다.
“여, 사장!”
조폭들 사이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리따운 여자 한 명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엇! 누님?” 그녀는 이한영이었다. 병규는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특재대에 들어가게 됐거든.” “특재대요?”
별일이다.
그녀는 영원히 암흑가에 남을 줄 알았더니.
병규의 의문을 눈치 챈 이한영이 씩 웃으며 말을 덧붙인다.
“본부장이란 여자가 동생들과 굳이 헤어질 필요가 없다고 해서 말이야. 돈세탁도해 준다고 했다.” ‘역시 구미호 본부장.’
병규는 새삼 또 한 번 감탄했다.
자영은 사람을 살살 녹이는 데도 정말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
병규 때는 병역문제를 들먹이더니, 이한영은 동생들(그녀를 따르는 조폭들)과 돈세탁이라는 절대로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들이민 것이다.
마치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은 그녀만의 영업능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녀가 보험설계사 쪽 일을 하게 된다면 업계 최초의 백억 대 연봉자도 꿈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특재대에서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잘됐네요.”
이한영의 두 손을 잡으며 병규는 웃음을 보였지만 한편으론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아아, 이제 누님의 빵 만드는 그 화려한 춤은 못 보게 되는 것인가.’
마침 호랭이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가 보다.
“쩝. 결국 작두는 안 타는 거야?”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다. 호랭이의 괜한 투정에 씩 웃던 병규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 온 거랑 특재대에 가입한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거지?’
“음? 설마 본부장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못 받은 거야?”
병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네, 별 다른........”
“어허. 이런. 일처리가 좀 늦네.”
이한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래서 공무원은 안 된다는 둥, 일처리가 굼벵이라는 등, 월급도둑이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
“저, 혹시 본부장님이 이곳으로 가 보라고 한 겁니까?”
“그래. 마침 새로운 사무실을 구하고 있었거든. 전의 빵집은 여학생들이 너무 몰려들어서 영업하는 데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어. 마침 본보장이 이곳에 사무실로 쓸 만한 방이 많을 거라고 소개해 주더라고.
그래서 어제 긴가민가하며 전화를 해 봤지. 그런데 하필 넌 없고 세입자란 분이 받더라. 그래서 그 분께 물었지 방은 어느 정도 크기며, 또 집세는 대충 얼마나 줘야 하느냐고. 그랬더니 그분이 방은 현관문을 열면 맞은편의 베란다가 안 보일 저도고, 방세는 한 달에 딱 오백 원이면 충분하다고 하던 걸?“
“큭!” 병규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졌다. 그리고 호랭이와 그의 입에서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경애군.”
“역애닷!”
다른 사람일 리 없다.
세입자. 500원.
이 두 가지만 봐도 확실하다. 병규는 문득 그녀가 생각보다 엄청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또 한 번 들었다.
설마 집세 500원을 정말로 믿고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매월 1일 날만 되면 500원짜리 하나를 주면서 바득바득 영수증을 요구한다 했더니.
“저런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네. 하여간 이렇게 한 집에 살fp 돼서 정말 잘됐어. 앞으로 잘 부탁해.”
이한영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하얗게 웃는 미소에 병규는 머릿속에 홀랑 타버릴 것 같았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릴 게요.”
땀으로 흥건한 손을 바지에 쓱쓱 물지러 닦고 마주 손을 내미는데, 그의 손을 잡은 이한영이 갑자기 그를 덥석 껴안더니 등을 팡팡 두들기는 게 아닌가.
“좋아, 앞으로 잘해보자. 동생.”
다소 거친 내용과 달리 그녀의 말투는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오오.”
병규의 얼굴이 42.195% 만큼 행복 충전.
반대로 이한영을 호위하고 있던 형님들의 얼굴은 42.195% 만큼 흉악함 충전.
‘누님이, 숨백의 천사가 저런 허접한 녀석을 껴안다니.’
이한영을 따라온 일면 동생들의 경악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매에서 주르르 흘러나오는 각종 연장들. 듬직하던 형님들의 얼굴은 순간 사탄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
뽀샤시하던 병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사태를 짐작도 못한 이한영은 병규의 어깨를 토닥이며 연신 방긋거렸다.
“녀석. 순진하구나.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긴. 하여간 빌딩 완공식 때 보자. 그럼.” 검은 양복들의 형님들에게 둘러싸인 채 멀어져 가는 하얀 원피스의 그녀. 문득 사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는 순백의천사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어이구. 좋아 죽는구나! 아주 죽어라.” 황홀한 표정의 병규를 보고 호랭이가 빈정거렸다.
“헤헤헤.”
병규는 뒷버리를 긁적이며 마냥 헤헤거리며 웃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받아보니 가물치였다.
“아, 가물치 형. 네, 네.......? 그, 그런. 아, 알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병규.
“뭐래냐?”
호랭이가 묻자 병규는 좀 전의 모습과 달리 암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라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