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 백성들과 면담하는 중이에요.
괴물들을 싸그리 헤치운 병규와 이한영.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까지 스프링클러가 미친 듯이 물을 뿜어내고 있는 실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출구가 없었던 것이다. 괴물들이 기어 나온 셔터 안쪽도 살펴봤지만, 역시나 문 같은 것은 없었다.
유일한 출구는 그들이 들어왔던 문, 그것 하나뿐이었다.
“어쩌지?”
이한영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길이 없어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될 줄이야.
“비밀출구가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 비밀출구가 어디 있는지 그들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의외로 단순한 방법이 좋을 수도 있죠.” 신발 끝으로 벽을 통통 차고 다니던 병규가 돌연 요수의 발톱을 길게 꺼내더니, 동그랗게 잘라냈다.
스륵스륵.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스펀지 조각처럼 잘려져 나간다. 발로 뻥 걷어차자 둥글게 잘려나간 벽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뒤로 넘어갔다. 그렇게 뚫린 벽 뒤쪽으로 보이는 것은 또 다른 통로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것 같은데요?”
병규는 뒤를 돌아보며 씩 하고 웃음을 보였다.
“때론 단순한 게 좋을 때도 있구나.”
이한영은 한 수 배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손끝에서 나오던 그 푸르스름한 기운 말야. 아까 보니 엄청 예리하던 걸. 얼마나 날카로운 거야?” 통로로 걸음을 옮기며 이한영이 물었다.
“글쎄요.”
병규는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사라졌던 요수의 발톱은 손끝에 힘을 주자마자 푸르스름한 안개처럼 다시 솟구쳐 나왔다. 안개처럼 일렁이는 요수의 발톱에 눈길을 주던 이한영이 대뜸 말했다.
“실험해 보자.”
“뭘요?”
“이게 얼마나 예리한지 말야.” “지금 여기서요? 에이.”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험할 마땅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벽에다 금이라도 그을까? 그런 짓이라면 수도 없이 해봤다. 해보나마나 커피 물 젓는 것보다도 쉬울 것이다.
“이 누님이 누구냐? 그런 걱정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턱없는 소리라며 고개를 흔드는 그에게 이한영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녀의 손바닥에서 작은 알갱이 같은 것이 생기더니 물방울이 모이듯 손바닥 위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형성된 알갱이는 큼직하게 자라더니 종래엔 작은 막대크기가 되었다.
“이건 예전에 흡수한 금속들을 재조합해서 만들어낸 거야. 가볍지만 꽤 단단하지. 절단하려면 다이아몬드 절단기 정도는 있어야 할걸?”
이한영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건네준 금속막대를 보며 병규는 꽤나 신기해했다. 사람의 손에서 금속이 만들어지다니.
붕붕 휘둘러보니 정말로 플라스틱을 든 것처럼 가볍다. 그런데 이렇게 가벼운 녀석이 그렇게 단단할까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벽에 휘둘렀다. 깡 소리가 나며 강한 반탄력이 손바닥을 아프게 한다.
손을 탈탈 흔들며 병규는 손과 금속막대를 번갈아 보며 살폈다.
벽에는 큰 흠집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가 준 금속에는 돌 부스러기만 묻어 있을 뿐이다.
“햐. 정말로 엄청 단단하네요.”
“그렇지? 한 번 베어 봐. 그게 얼마나 예리한지 보자.”
“잘 될까 모르겠네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병규는 금속막대를 향해 요수의 발톱을 슬쩍 그었다.
치잉!
불꽃이 튀더니 금속막대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잘려 나간다.
‘이렇게 허무하게?’
쩡쩡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막대조각을 보는 이한영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베는 느낌.... 있었니?”
혼이 빠진 듯한 그녀의 물음에 병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약..... 간이라고?”
이한영의 활처럼 흰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다이아몬드 절삭기로도 자르기 힘들다는 그녀의 금속을 무 베듯 해놓고는 베는 느낌이 약간 있더라고? 아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후.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어. 너랑은 절대 싸우고 싶지 않아.”
“저도 누님과는 절대로 싸우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딜까요? 물류센터는 확실히 벗어난 것 같은데.”
발을 재촉하며 병규가 물었다.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하던 이한영은 전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물류센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몰라.”
“네?” 그럴 리가.
처음에 지하로 연결된 둥근 통로만 해도 한참이나 뛰었는데. 아무리 물류센터가 크다 해도, 그렇게 달렸으면 벗어나도 한참 전에 벗어났을 것이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이한영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 통로 말인데. 겉보기엔 똑바로 이어진 것 같았지만 사실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었어. 아마 물류센터의 지하를 운동장처럼 크게 빙글 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으음.”
병규가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어깨 위의 호랭이가 점잖게 한마디 한다.
“내 생각도 같다.” 호랭이까지 같은 생각이라. 그렇다면 십중팔구 옳은 소리일 것이다.
호랭이는 능력의 대부분을 잃었지만 감각만은 여전해서 아직까지 방위라던가 위치 같은 것을 단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두 사람은 새로운 철문 앞에 닿게 되었다. “자. 여기엔 또 뭐가 있을까.”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이한영이 문을 열었다.
끼그윽.
쇠로 만든 문은 기름칠이 덜 되어 있는지 시끄러운 비명을 질렀다.
문 안쪽의 내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리 어둡지 않았다.
사무실처럼 보이는 작은 공간엔 형광등이 밝혀져 있어, 여태 어두운 통로를 달렸던 두 사람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흐읍.” 안쪽에서 들려오는 답답한 호흡소리에 병규는 가슴이 철렁했다. 기억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기분 나쁜 녀석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흐읍. 생각보다..... 빨리 왔군.”
병규의 몸이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이 탁한 숨소리. 그리고 답답할 정도로 느린 말. 일본말이라 뭐라고 지껄이는지 한 마디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너무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오가마!”
실내엔 병규가 익히 알고 있는 한 사내가 웅장한 자태로 서 있었다.
“후욱. 바퀴벌레는...... 어디 있나.” 바짝 얼어 있는 병규에게 오가마는 두 눈을 부릅뜨며 물어왔다. 물론 병규는 일본어로 지껄이는 그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입맛만 쩝쩝 다시는데, 옆에 선 이한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저 녀석. 무슨 발음이 저러냐? 본토인이라도 알아듣기 힘들겠는 걸.” “엇? 누님. 혹시 일본말 할 줄 아세요?”
“말은 못하지만 몇 마디 알아들을 수는 있어. 예전에 잠깐 배웠거든.”
병규는 기뻤다. 횡재한 기분이다. 주먹만 세고, 카리스마만 넘치는 줄 알았더니 머리까지 똑똑한 누님이 아닌가. 그는 다급하게 이한영에게 물었다.
“그럼 저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지 해석할 수 있어여? 혹시 저보고 한 판 뜨자고 하는 건 아닌가요?”
“맞짱을 뜬다고? 아니야. 바퀴벌레가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바, 바퀴벌레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병규는 어이가 없었다.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한껏 잡으면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바퀴벌레였다니.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솟는다.
과거 그는 놈에게 제대로 반항 한 번 못하고 늘 당했다. 그래서 놈을 보자마자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번엔 한 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뼈가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렇게 호승심을 불태우는 그에게, 바퀴벌레가 어쩔씨구리?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놈은 아예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것 같다. 괜히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바퀴야.”
병규는 힘없는 음성으로 바퀴벌레 왕자를 불렀다. 이곳에 잠입한 이후로 한 번도 못 봤지만, 틀림없이 어느 구석에 숨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저 가볍게 불러본 것이다.
과연 바퀴벌레 왕자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부르기가 무섭게 그의 그림자 속에서 거무튀튀한 것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네네. 샤바. 주인님 부르셨어요? 샤바샤바.” “헉.”
“엇?”
바퀴벌레 왕자의 갑작스런 출현에 병규와 이한영은 화들짝 놀랐다. 설마 그림자 속에 숨어 있을 줄이야. 그런데도 여태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니.
예민하기로는 천하에서 제일간다는 호랭이마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억’ 소리를 연발할 지경이었다.
“다음부터는 기척 좀 내고 나타나라.”
병규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네, 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미안했던지 더듬이를 조금 움츠렸다.
“저분이 널 좀 뵙고 싶다고 하는구나.”
병규의 손을 따라 시선을 이동한 바퀴벌레 왕자는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오가마를 보게 되었다.
“앗. 넌 예전의 그 무례한! 아직까지 살아있었느냐! 샤바샤바.” 잔뜩 분노한 표정으로 바퀴벌레 왕자가 외쳤다.
오가마는 바퀴벌레 왕자가 처음으로 소환되었을 당시 감히 주인님 암살을 기도한 발칙한 놈이었다. 그때 근처의 백성들을 모아 처리했는데, 죽은 줄 알았던 놈이 아직 살아있었을 줄이야.
바퀴벌레 왕자를 본 오가마 역시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흡. 바퀴벌레!” 거친 숨을 내뿜으며 괴성을 질러대는 모습이 여느 몬스터보다 거칠고 흉포해 보였다.
그 엄청난 기백에 움찔 놀란 병규.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는 바퀴벌레 왕자와 오가마를 번갈아 보며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저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요 녀석인 것 같은데. 하긴, 그렇게 심하게 당했으니.’
언뜻 이해가 가기도 한다. 폭풍처럼 몰려온 그 징글징글한 녀석들에게 해일처럼 쓸려갔으니. 자신 같으면 차라리 지옥구덩이에 빠지면 빠졌지 죽었다 깨나도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도 참 이상한 성격이란 말야.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해놓고도 아직 바퀴벌레 타령이네. 좋아. 그렇게 바퀴벌레가 좋으면 아예 같이 있으라고 하지 뭐.’
마음을 굳힌 병규는 다정한 목소리로 바퀴벌레 왕자를 불렀다.
“바퀴야아~?” “네, 샤바.” 맑게 대답하며 돌아보는 바퀴벌레 왕자를 병규는 두 손으로 부드럽게 잡았다.
“오오, 주인님. 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감격했다. 항상 구박만 하던 주인님이 자신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퀴벌레 왕자의 환상은 불과 2초 만에 깨어지고 말았다.
바퀴벌레 왕자를 덥석 집어든 병규는 언제 웃었냐는 듯, 돌연 오가마를 향해 바퀴벌레 왕자를 투척해버렸다. 그리고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바퀴벌레 왕자를 뒤로 한 태 이한영의 손을 잡고 후다닥 내뺐다.
“너무한 거 아니냐? 저 녀석도 나름대로 도와주려고 많이 노력하는 것 같던데.” 이한영이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부메랑이니까요.”
“부메랑?”
이한영의 의문성이 채 끝나기도 전. 병규에게 내팽개쳐진 바퀴벌레 왕자가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부다다다 날아왔다.
“흑흑. 주인님. 무서웠어요. 샤바. 절 혼자 그렇게 버려두고 가버림 어떡해요. 샤바샤바.” 병규가 바퀴벌레 왕자를 턱짓하며 물었다.
“봐요. 부메랑 맞죠?”
“끙. 그렇군.”
이한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병규는 문득 바퀴벌레 왕자가 지나치게 빨리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10여 분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그런데 너 그 괴물 녀석은 어쩌고 벌써 왔냐?”
병규가 묻자 바퀴벌레 왕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요? 샤바. 귀찮게 굴기에 이 동네 백성들과 잠시 면담 좀 시켜놨어요. 샤바샤바.” “며, 면담?”
병규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설마........”
병규는 피부를 자르르 타고 오르는 오한을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끼드득 뒤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통로의 벽을 타고 전해져오는 급박한 숨소리가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흡!!!!!"
오가마는 다시 한 번 쓸려나가고 있었다.
호가마를 처리한 병규는 이어지는 어두운 통로를 불같이 내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는 그들은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묵묵히 달리기만 했다.
오가마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그와 면담중인 이 동네 백성들이 혐오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여간 그들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또 다음 적이 나타날 겁니다.”
발랄하던 누님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 걱정된 병규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혹여나 요놈의 바퀴벌레 때문에 누님이 충격을 먹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러나 그녀는 바퀴벌레 때문에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상해.”
“뭐가요?” “녀석들의 아지트에 들어선 이후로 매번 같은 패턴이야. 어두운 통로. 그 다음 나타나는 방. 그곳을 지키는 보스. 이런 고정 패턴이 계속 이어지고 있잖아. 조금 이상하지 않니?”
“글쎄요.”
병규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돌가루를 우수수 떨어뜨리며 생각해봤지만 대체 뭐가 이상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한영은 친절하게 자신의 생각을 추가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만약에 내가 놈들이라면 차라리 통로엔 함정만을 잔뜩 설치해두고 우수한 부하들은 곁에 두겠어. 그것이 적을 상대하기도 좋고, 탈출하기에도 유리해.”
“흐음. 그렇겠군요. 하나씩 각개 격파 당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좋을 것 같네요. 그러고 보면 녀석들의 지휘관은 머리가 나쁜가 보죠?”
병규의 말에 이한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은신처 하나만 보더라도 적의 참모는 상당히 우수한 녀석임이 틀림없어. 그런 작자가 일을 꾸민 것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게 대체 뭘까요?”
“이런 식으로 측근들을 하나씩 뿌려두는 경우는 대부분 시간이 필요해서야. 도망갈 시간이 필요해서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것처럼 동료들을 버릴 때, 또는 특별히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을 준비 중일 때. 그럴 때에나 지금처럼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계략을 사용하는 법이지. 그런데 아무래도 녀석들은 후자일 가능성이 큰 것 같아.” 잠시 생각해보던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 분명 놈들은 노리는 것이 따로 있을 거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복도의 끝을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에의 커다란 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한영의 말처럼 지금까지와 똑같은 패턴이다.
“자. 이번엔 어떤 녀석이 있으려나.” 병규가 무심코 문을 열려고 하자 호랭이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문 안쪽에서 쇠 냄새가 난다.” 병규는 주춤 물러섰다. 호랭이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이한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왜? 이상한 거라도 있니?” 병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안쪽에서 나는 쇠 냄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이한영과 나눴던 대화도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통로와 방으로 이어지는 똑같은 패턴.
지금까지는 방으로 들어설 때 한 번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서너 번을 아무런 위험 없이 지나치는 동안 처음의 긴장은 상당히 완화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이곳에도 일본의 능력자가 당당하게 지키고 있겠지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여기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병규는 두 손을쫙 펼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촤아악.
문 주의에 열 줄기의 계곡이 파인다. 두부처럼 파이는 콘크리트와 수수깡처럼 잘려 나가는 철근들. 병규는 둥글게 잘라낸 벽을 어깨로 힘껏 밀었다.
쿠웅.
묵직한 소음. 자욱하게 피어나는 먼지구름.
그리고 수상하게 팡팡 터져 나가는 불꽃들. 문엔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병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면 매우 짜릿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먼지를 풀썩 일으키며 무너진 문 너머엔 여섯 명의 흑의인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역시나 이번엔 암습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삑!
소란스런 와중에 시끄러운 호각성이 울렸다.
벽이 갑자기 무너진 충격에 멍하니 서 있던 흑의인들은 호각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세 자루의 칼이 그의 하체를 쓸고, 나머지 세 자루가 머리를 찍어온다. 그리고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두 자루 칼이 은밀하게 그의 허리를 베어왔다.
소용돌이처럼 쏟아지는 예기에 피부가 따끔거린다. 무시무시한 압박. 그러나 그물처럼 몰려드는 치밀한 칼 빛을 보고도 병규는 물러나지 않았다.
“흥.” 싸늘한 콧바람 소리를 내며 요수의 발톱을 크게 빙글 돌리자, 그를 삼켜오던 여덟 줄기의 시퍼런 칼이 허무할 정도로 잘려져 나갔다. 흑의인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벼규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바닥을 박차며 흑의인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채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일어난 순간적인 대응.
그러나 흑의인들은 여태까지의 풍가닌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놀랍게도 허무하게 얻어맞을 줄 알았던 흑의인이 두 팔을 교차하며 병규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물론 폭발적으로 터지는 충격을 모두 해소하지 못하고 벌렁 나자빠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기습이 실패하지 않았던 병규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심해.” 호랭이가 그의 귀에다 빽 소릴 지른다. 병규는 허둥지둥 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바닥을 쓸어오는 흑의인 둘의 공격에 그만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고 뒤통수를 찍히자 순간 눈앞이 아득해 온다. 그 때 기회를 틈타고 있던 흑의인 하나가 그의 머리 위를 타넘으며 소나기처럼 암기를 뿌렸다.
위기의 순간.
이번만은 호랭이의 외침보다 병규의 반응이 빨랐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자 병규는 생각이고 뭐고 그대로 발로 바닥을 밀어 찼다.
촤악.
그의 몸은 눈 위를 미끄러지듯 바닥을 쭉 미끄러졌고, 암기들은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치며 바닥에 꽂혔다.
“이 녀석들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서는 병규의 두 눈에 시퍼런 요기가 일렁였다.
“박살을 내주마.”
고함을 지른 병규는 다리의 탄력을 이용해 돌연히 앞으로 내달렸다. 가히 쏘아진 탄환과도 같은 스피드. 그러나 한 번의 격돌로 이미 비상식적인 그의 움직임을 경험한 흑의인들은 병규가 돌격해오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막을 수 없으니 피하고 보자는 뜻에서다. 그러나 그들은 병규의 엄청난 스피드에 눌린 나머지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속도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특히 열이 적당히 받았을 때의 그는 이미 인간 열 추적 미사일이라 불릴 만한 가공할 존재였다.
“놓칠까 보냐.”
빵하고 발을 걷어차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지던 그의 몸이 돌연 직각으로 휘어진다.
관성을 깡그리 무시한 듯한 과격한 운동능력.
게다가 튀어나가는 도중에 힘을 더하자 가뜩이나 빠른 가속력이 단숨에 배가되며, 인간의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잡았다.”
기절할 듯이 놀라는 흑의인을 향해 병규는 도끼로 찍어내듯 발을 내리꽂았다.
빠강.
상쾌할 정도의 폭음과 함께 흑의인은 바닥에 쾅하고 짜부라졌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고무공처럼 텅텅 튀어 오르며 몇 번이나 지면을 구른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흑의인들은 얼어버렸다.
도무지 이건 눈으로 보고 따라잡을 수 있는 스피드가 아니다. 게다가 엄청난 탄력을 이용한 저 황당한 파워는 또 뭐란 말인가. 단 한 번의 발길질로 몸서리처지는 수련을 거친 동료 하나가 피거품을 게워내며 지면에 누웠다. 작은 반항조차 못한 채, 그대로 기절하고 만 것이다. 흑의인들의 시선을 어느새 병규의 발 아래로 집중되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파여진 깊은 족적!
대체 얼마만큼의 충격이면 졸보다 단단한 바닥에 저런 발자국이 찍히는 것일까.
압도적인 힘.
흑의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가혹한 훈련으로 이미 오래전에 두려움을 망각한 그들이지만, 병규의 가공할 능력은 깊은 망각 속에 던져버린 공포를 쭉 끌어올려, 팡 하고 터지는 플래시처럼 그들의 노리 깊숙한 곳에 각인시켜 버렸다.
공포를 기억해 낸 그들은 결코 병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곱 명의 흑의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팔다리를 덜덜덜 떨었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은 박수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이어졌다.
“좋아. 이곳까지 올 만한 실력이군.”
사요한 음성과 함께 나타난 자는 사십대 중반의 훤칠한 남자였다. 은은한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을 풍겼다.
날카로온 콧날과 붓으로 그은 듯한 눈썹은 이지적인 인상을 풍겼지만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얇은 얼굴선은 남성이기보다는 여성스런 느낌을 풍겼다.
부채를 팔랑이며 걸어 나온 그는 병규를 향해 살포시 입술 끝을 들어올려 보였다.
“보아하니 자네가 바로 오가마가 말하던 바퀴벌레 술사인 모양이군.”
그는 능숙한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평소 같으면 바퀴벌레 술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발작했을 병규지만 이번만은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릴 뿐, 감히 앞으로 달려 나가지 못했다.
‘감이 좋지 않아.’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사방에서 위험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병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한영 역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이 녀석의 능력이 뭘까.
뭔데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넌 누구냐?” 병규가 물었다. 사내는 부채로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저런 인사가 늦었군.” 혀를 쯧쯧 차 보인 그는 곧 옷깃을 바로잡더니 정중한 인사를 올린다.
“인사드리지요. 제가 바로 신풍(카리카제)의 총군사인 야마타노 오로치입니다.” “오로치!” 병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신풍은 바로 퀴니를 납치한 조직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신풍에서 가장 높은 두 사람이 바로 군주 격인 수사노오와 부관 격인 야마타노 오로치, 바로 그 작자인 것이다.
“네놈이 바로 퀴니 납치를 사주한 녀석이로구나.”병규는 불같은 괴성을 질렀다. 신중한 모습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터져 나오는 활화산처럼 온몸이 벌겋게 상기된다.
“아! 퀴니? 이 아이 말인가?”
오로치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뒤쪽에서 토끼인형을 들고 있는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쿠니였다.
“퀴니야.” 병규는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이한영이 그를 붙들었다.
“왜 이래요. 누님.”
병규는 거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한영은 끝내 그를 놓지 않았다.
“진정해. 저 아이의 눈을 봐. 좀 이상하지 않니?” 그제야 퀴니를 본 병규는 이한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초점을 잃은 듯 멍하게 뜬 눈.
밤하늘의 별빛을 담은 듯 영롱하던 퀴니의 눈동자가 지금은 칙칙하게 침잠되어 있었다.
병규와 호랭이조차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정신에 금제를 당한 것 같다.”
호랭이가 심각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이런 아쉽게 됐군.”
병규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진한 미소를 보이던 오로치가 어깨를 들썩이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계속 달려와 줬으면 그대로 황천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는 소매 속에서 소형 권총 한 자루를 꺼내 보였다. 권총은 성인 남자의 손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였지만, 사람을 죽이기엔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역 누님이 막지 않았다면........’
병규는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렇게나 후회해 놓고도 아직도 성급함을 고치지 못하다니.
“참아라. 지금은 녀석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생각할 때다.”
호랭이가 작은 목소리로 충고한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흥분해서 한 번도 일이 잘 풀린 적이 없다.
‘냉정. 냉정.’
그는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외치며 오로치를 노려보았다. 그가 열을 식히는 동안 이한영은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달려온 통로와 달리 이곳엔 창문이 있었다. 힐끔 바깥을 내다본 이한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창 바깥으로 물류센터의 거대한 창고들이 보인다. 언덕 위에서 본 모습을 대략 떠올려 보았을 때, 이곳은 아마도 물류센터의 중앙건물. 그것도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거대한 창고들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위치다.
‘아마 최상층이겠지.’
지리적인 조건은 자신들에게 그렇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이곳에서 말썽을 무리면 틀림없이 바깥의 동료들에게까지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군요. 오로치.”
“........나를 알고 있나?”
오로치는 그녀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한영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기까지 했던 오로치가 아닌가. 그런데 이제와 그녀를 전혀 모른다니.
오로치의 이상한 행동에 이한영은 혼란스러웠다.
“호오.”
이한영을 지그시 쳐다보던 오로치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성이 흘러나온다.
“반도엔 미녀가 많군. 이런 곳에서 눈에 확 띄는 미인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걸. 특재대에 새로 들어온 능력자인가?”
“........”
그녀를 보고 색기를 번들거리는 오로치.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한영의 표정이 싸늘히 굳어졌다. 이상한 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구심을 얼굴에서 지우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흠. 절 모른다니 유감이군요.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아이를 납치한 이유가 뭐죠? 설마 몸값을 노린 유치한 짓거린 아니겠죠?”
“흐흐. 제법 냉철하게 말하는군. 좋아. 마음에 들어.”
이한영을 향해 미소를 보인 오로치는 인형처럼 서 있는 퀴니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 아이를 왜 납치했냐고? 그야 당연히 우리가 하는 일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지.”
“가스펠의 총수라는 점 때문인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어두운 실내로 새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허어. 이게 누구신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본 오로치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했더니 특재대가 자랑하는 능력자. 기린 이운석이시군.”
그의 말대로 막 실내에 들어선 인물 중 한 사람은 바로 이운석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말할 것도 없이 퀴니를 찾아온 김경애였다.
실내를 쭉 살피던 김경애는 병규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곧 그의 옆에 적당히 헐벗은 채 서 있는 이한영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아닛! 어디서 저런 야시꼬리한 여자를!’
그녀의 두 눈에서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한편 병규 역시 이운석과 함께 등장한 김경애를 보고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뭐야.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퀴니를 찾아오겠다고 달려 나가긴 했지만 금방 잊어먹고 돈벌기에 열중할 줄 알았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신경을 끊었다.
지금은 퀴니를 놈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 먼저다. 김경애에 대한 것은 일이 해결된 다음 천천히 풀면 될 것이다.
이운석을 보며 오로치가 말했다.
“잠재능력만으로는 특재대에서 최고라고 들었네.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잘됐군.”
오로치의 겉치레에 이운석은 팔짱을 끼며 불량스런 태도로 일관했다.
“질문을 내가 먼저 던졌소. 그런 쓸데없는 말은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한 다음에 떠드쇼.”
“하하. 과연 호쾌한 사내군. 좋아. 대답하도록 하지. 가스펠의 총수라서 이 아이를 납치했느냐고? 흐흐. 아쉽게도 아니야. 가스펠의 총수라는 배경도 상당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우리에겐 쓸모없는 명함에 불과하지. 이 아이의 진짜 가치는 따로 있지.”
“호오. 가스펠의 총수자리가 쓸모없는 명함에 불과하다라.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우리 공주님에게 또 어떤 매력이 숨겨져 있는지 말이야.”
이운석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충분히 기분이 나빠질 만도 하건만 오로치는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간단해. 마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이지.”
“에?” 이운성의 멀끔한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표정만으로 보면 고작 그거냐는 식의 반응이다.
“뭐야. 그게. 당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들은 게 맞다면 당신의 주 특기는 분명 최면일 텐데?”
“물론 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와 나는 결정적으로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것?” “후후. 또 틀렸어. 정답은 능력의 범위지. 난 기껏해야 한두 마리 정도의 마수만을 다룰 수 있지만. 그녀는 수십 수백의 마수들을 한꺼번에 부릴 수 있는 능력자지. 어때? 대단하지 않나.”
“허어. 그렇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군.”
이운석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도만 그럴 뿐이고, 실제 말투는 여전히 비아냥거림에 가까웠다.
‘마수들을 부린다?’
병규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퀴니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오가마가 간신히 다루고 있는 스크래그를 자신의 애완동물인 양 자유롭게 부리며 오히려 오가마를 곤란케 했다.
만약 심풍이 스크래그와 가라스텐구 같은 괴물들을 만들고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면, 마수를 부리는 그녀의 능력은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람 그것만으로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균형이 맞지 않다. 퀴니를 납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실이 훨씬 크다.
“그 일이 특재대와 가스펠을 적으로 돌릴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병규의 물음에 오로치는 진한 자신감을 보였다. 주저 없이 튀어 나오는 대답. 기르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말끔한 미소.
병규는 배알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이때 다시 이운석이 끼어들었다.
“이봐. 당신이 꾸미는 짓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로 말리망아 일본이 불바다가 될지도 모른다고.”
“불바다라.........” 충격을 받을 줄 알았던 오로치는 피식하고 실없이 웃었다.
“지금의 일본이 과연 가치 있는 나라일까?”
“무슨 뜻이지?” “쓸데없다는 소리다. 지금의 일본은.” 엄청난 망언.
‘똑똑한 줄 알았더니 살짝 맛이 간 녀석인가?’
이한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로치의 말은 그야말로 한쪽이 꽉 막힌 종말론자와 같은 헛소리가 아닌가.
오로치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의 일본은 썩었어.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푹 썩어 버렸지. 적당히 약이나 투여해서 치료될 수준을 넘은 지 오래다. 이제는 눈물을 머금고 진통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다른 멀쩡한 부분마저 모두 썩어 버리기 전에 서둘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일본은 지금 그런 가차 없는 결단이 필요할 정도로 병들어 있다.” “?” “일본의 국민을 보라. 그게 선진국민인가? 그게 자부심 강한 사무라이의 후손들이냔 말이다. 퀭하게 죽은 눈으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어 버린 인간들. 오타쿠에 히키코모리(은둔 족. 사회생활을 거부한 채 방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부류)같은 국가영제에 전혀 도움도 안 되는, 기생충 같은 녀석들이 무려 120만이나 우글거리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경제 선진국이라고? 야쿠자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계와 재계, 정치엔 관심도 없는 국민. 스와핑과 원조교제가 최초로 생겨난 나라. 이것이 일본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채, 속으로 썩다 못해 곪아가고 있는 일본의 현실이란 말이다.
대일본국의 백성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만 깨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따끔한 일침이 필요하지. 그렇다. 아주 따끔한 교훈이 필요한 시기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그런데 타락한 일본을 일깨울 천황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천황은 힘을 잃었다. 국민들의 신망은 있으되 타락한 일본을 이끌 통치력도 카리스마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천명하는 것이다. 일본엔 새로운 천황이 필요하다고.”
“흥, 새로운 천황이 될 재목이 설마 신풍의 두목인 수사노오라는 말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는가?”
오로치의 대답에 이운석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착각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요즘 같은 세상에 천황이라니. 새로운 천황이 나타난다고 이미 자유에 찌들대로 찌든 국민들이 분부만 ‘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하고 고개를 숙일 것 같아? 네 녀석이 하는 말은 모두 망상에 불과해.”
“흐흐. 네 말이 맞아. 확실히 새로운 천황이 등극해도 단숨에 국민들을 융합시키기는 불가능하겠지. 그래서 계기가 필요한 거야.” “계기?” 오로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이운석의 얼굴이 바짝 굳는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본이 불바다가 될 거란 소리에도 태연하던 녀석의 태고. 썩어빠진 일본을 깨우기 위해 강력한 임팩트가 필요하다는 단언! 이 두 가지가 상징하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놈은 전쟁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 맞아. 전쟁이지. 전쟁만큼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핑계거리도 없을 거야. 그럼 면에서 보면 퀴니는 아주 좋은 미끼지. 고작 어린아이 하나 납치한 것만으로도 가스펠이라는 초국가적 단체가 거창한 테러를 일으켜 줄 테니까 밀이야.”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지? 온 나라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냐고!”
이한영이 소리쳐 물었다. 오로치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대답했다.
“새로운 천황아래 하나 되는 힘. 단결이지.” “단결?” 오로치의 말에 이운석은 어이가 없었다. 모국을 황폐화시키고 얻겠다는 이득이 고작 단결이라고?
“우습게 보이는가?” 이운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래. 얼마 살지는 않겠지만 내 평생 너처럼 황당한 소릴 지껄이는 놈은 처음이야.”
“하하하.” 오로치는 고개를 젖히며 대소를 터트렸다. 껄껄 웃는 그의 웃음은 시작할 때처럼 느닷없이 멈춰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니컬한 눈길과 차가운 목소리.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금 일본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세계 최고의 부강국이라 불리면서도 아직까지 패전국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주위 국들에 허리를 굽실거려야 하는 비굴한 이중성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전쟁에 졌다는 이유로 외세의 위협에 선제공격도 할 수 없게 된 반 푼짜리 나라가 침략해 오길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한심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란 말이다. 전쟁이 위기인 것 같은가?
아이야. 이것은 기회다. 다시없을 기회지. 목적 없이 방황하는 일본에 새로운 부흥을 불러올 위대한 부름인 것이다. 가스펠은 그 부흥을 가져올 열쇠. 가스펠이 전쟁을 일으켜 준다면 일본은 비로소 침략자에 대항할 구실을 얻게 되는 것이란 말이다.”
“........!” 모두가 할 말을 잊은 채 쳐다보자 오로치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덤으로 전쟁이란 대환란 속에 아무도 모르게 천황이 교체되는 거지. 멋지지 않나?” 춥다. 후덥지근한 온도임에도 병규는 뼛속까지 시리는 어슬한 한기를 느꼈다. 팔뚝 위로 소름이 오싹 돋는다.
무서운 놈이다.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국민들의 죽음조차 우습게 생각하는 냉정한 사고방식. 그리고 파멸을 부를 수 도 있는 계획들 과감히 단행하는 결단력과 과감성! 여기에 치밀한 계획성까지. 능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저런 생각을 하고, 또 그것을 주저 없이 실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렵다. 명분만 있다면 웃으면서 가족의 목을 벨 놈이 아닌가.
“데체 그렇게 일본을 하나로 묶으려는 이유가 뭐지? 세계 정복이라도 꿈꾸는 건가? 제국주의의 망상에 다시 한 번 빠져볼 생각인가?” 이한영이 이를 으드득 갈며 물었다.
“망상?” 억한 마음에 울분을 토하듯이 뱉은 말에 오로치는 인상을 찡그리며 심각한 반응을 보인다.
“내가 고작 그런 명분 때문에 일을 저지르는 멍청한 작자로 보이는가?” “아니야?” 오로치는 뱀과 같은 차가운 미소로 조소했다.
“너희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우리의 위대한 뜻을. 신풍이야말로 세상을 파탄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고독한 투사다. 데몬게이트의 사악한 야욕을 막으려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며 항쟁하는 외로운 열사들의 집단인 것이다.” 독기 서린 그의 말에 이한영은 입술을 닫았다. 그녀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버렸다.
‘데몬게이트라.’
이운석은 침음성을 삼켰다.
몇 번 들어본 이름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겉으로는 문화재 보호재단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에서 가장 큰 능력자의 단체라는 점. 그리고 본부장인 자영이 그들의 행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정도뿐이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는 단체라는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왜 하필 여기서 또 데몬게이트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까. 게다가 오로치의 대답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일본을 불바다로 만들면서까지 일을 저지르는 이유가 바로 데몬게이트를 막기 위해서라지 않는가.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그때, 여태 침묵하고 있던 병규가 스산한 눈빛을 뿜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분노를 강제로 억누르는 듯한 음성으로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좋아. 네 말. 모두 옳다고 보자고. 그런데 말야. 퀴니는 어떻게 할 거야. 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잡아두는 거냐고. 네놈들의 투쟁과 항쟁이라는 것은 그렇게 국민들을 볼모로 잡고 철없는 아이까지 이용해가면서 이룩해야 하는 것이냔 말이다.”
열변을 토하는 병규의 물음에 대한 오로치의 대답은 간결했다.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희생?” 병규의 눈이 꿈틀한다.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고, 꽉 쥔 두 주먹에선 피가 방울져 떨어진다.
“정말로 독한 놈이로구나. 야망을 위해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숭고한 희생이란 말로 포장하다니. 과연 어린아이까지 이용해 먹는 네놈의 악독한 심성에 몇 사람이나 동조해 줄까?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만드는 네 녀석의 비정한 계획을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해 줄 것 같으냔 말이다.”
“과물?” 오로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병규의 말에 배알이 뒤틀렸는지 입술 끝이 괴상하게 틀어져 올라갔다.
“괴물이라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로군. 나의 용맹무쌍한 병사들을 고작 괴물이란 말로 매도하다니. 그들은 투사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투사. 퀴니는 그 투사들을 진두지휘할 잔다르크지. 영광의 관을 쓰고 암흑의 파도를 헤쳐 나갈 여신이다. 어찌 우둔한 작자들이 이제 곧 새롭게 시작될 신화를 얼토당토 않는 말로 격하시키려 하는가.”
오로치는 마치 거창한 서사시를 읊는 음유시인처럼 당당하게 소리쳐 물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이를 가는 듯한 병규의 말에 오로치는 징그러운 미소를 내뱉었다.
“혁명과 발전을 위한 다소의 피해는 충분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러한 사례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아니 오히려 역사가 피를 원하고 있다. 진시황, 칭기즈 칸, 로마제국, 나폴레옹, 알렉산더. 영토확장을 위해 두 손을 핏물에 담근 희대의 살인마들을 역사가 과연 뭐라고 칭하는가? 악마? 요괴? 아니야. 영웅이라고 부르지. 우리는 그들을 위대한 제왕이라 부른다. 이제 알겠는가? 역사가, 아니 세상이 바로 그런 희생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희생자의 피를 밟고 일어설 때, 비로소 인간은 진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
“궤변이군.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네 녀석의 말은 고거 독재자들의 궤변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아.” “그럴지도. 다만 그들과 나의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실패했지만 난 성공할 것이란 거지.” 오로치는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며 거만하게 지껄였다.
‘역겨운 놈.’
병규는 몰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까지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봤지만 저렇게 구역질나는 놈은 처음이다.
‘하늘아.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 더도 말고 딱 한 번만. 저 뻔뻔한 낯짝에 한 방 먹일 수 있도록 딱 한 번만 기회를 줘!’
병규는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소원을 이루기엔 장애가 너무도 높고 험했다. 무엇보다 퀴니가 문제다. 그녀를 놈에게서 구해 내지 못하는 한 병규의 복수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무했다. 그러한 사정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세 명의 능력자에게 둘러싸이고도, 기고만장할 수 있는 오로치의 여유는 바로 그런 유리한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왜 분한가? 쯧쯧, 아둔한 작자들.”
오로치는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며 수조 속의 열대어를 보듯 느긋하게 다른 이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오만한 태도에 사람들은 터져 나오려는 분통을 참느라 몸을 떨어야 했다.
그의 아가리에 바위라도 쳐 넣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H 빔으로 얼기설기 쳐진 천장 위에서 작은 반전이 일어나고 있음을.
“자 자명종 군. 이제 자네가 나설 차례일세.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에 의해 막 반전이 일어나려 하는 그때, 오로치는 분노에 몸을 떠는 병규 일행을 보며 사요한 미소를 한껏 띠고 있었다.
‘약이 바짝 올랐군. 좋아.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주는 게 좋겠어.’
도망가야 하는 입장인 그였지만, 패배의 쓴잔을 드는 것은 오히려 추적자들이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통쾌했다. 눈앞에 적을 두고도 어찌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패배자들의 표정.
이것이야말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즐겨하는 즐거운 유흥이다.
게다가 이번은 더욱 특별하다. 이 자리에서 그가 물러난 후에도 그가 뿌린 수작들이 여전히 살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흐흐흐.”
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골수 깊숙한 곳까지 짜릿한 쾌감이 전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계획.
이대로 퀴니를 방패삼아 그가 달아나면 병규 일행은 그대로 본부장인 자영에게 방금 들은 이야기를 죄다 고해바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고스란히 가스펠에게로 전달될 테고.
소식을 전해들은 가스펠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예상할 수 있는 가스펠의 대응은 두 가지.
하나는 일본의 완전한 독립을 노리는 그의 계획을 망친답시고 보복을 잠시 미루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모든 가능성을 무시하고 계획대로 보복을 감행하는 것이다.
가스펠의 선택이 어떤 것이던 오로치는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입장이다. 어느 쪽으로나 이득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흡족한 전개야. 크흐흐흐.” 약을 올리듯 그가 말했다. 일그러지는 병규 일행의 표정. 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아, 이 쾌감!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건네주는 마녀의 기분이 바로 이러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갈 테니. 잘들 즐기시게.”
이제 모든 시나리오는 배우들의 손으로 넘어갔으니, 감독은 그만 자리에서 물러날 때다. 이젠 관객의 위치에서 차분히 비극을 즐기기만 하면 될 테지. 자신이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놀아나는 꼭두각시 인현들의 춤을.
“자. 가실까요, 공주님?”
그는 퀴니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병규 일행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그가 퀴니의 머리에 총을 겨누자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퀴니.
정말로 그 평생에 다시 찾아볼 수 없는 행운의 천사다. 그녀를 손에 넣음으로써 자칫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었을 일들이 간단하게 풀린 것이다.
퀴니가 그의 손에 있는 한 아무도,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그를 막을 자가 없다.
‘어리석은 작자들.’
정에 휩쓸리는 자들은 이래서 문제다. 그라면 인질은 무시하고 우선 적을 제압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부득이 인질이 희생된다면 그것은 차후의 문제다.
인질의 희생은 일이 해결된 다음 어떻게든 핑계를 댈 수 있다.
아마도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결국 인질범의 손에 희생되고 말았다는 것이겠지. 가스펠은 분노하겠지만 그 분노의 대부분은 인질범의 나라에 퍼부어질 것이다.
이렇게 쉬운 해결책이 있건만, 녀석들은 부득불 인질의 희생을 피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쓴다.
‘불쌍한 녀석들. 너희 같은 녀석들은 영원히 패배자로 남게 될 뿐이다.’
이래서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
아무리 착하고 순진해도 세상은 알아주지 않는다. 착취당하는 자는 언제나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신은 참으로 불공평한 작자다. 만약에 신이 공평하다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사슴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공평하기에 나 같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것이지.’
오로치는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병규 일행을 향해 굿바이 키스를 날렸다. 이제 경쾌한 발걸음으로 퇴장하기만 하면 되는 시간.
발랄하다 못해 엽기적인 노래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단순한 템포에 찢어지는 목소리가 암울한 실내 공기를 뒤흔들었다.
“이건 또 뭐야! 어디서 이런 노래가?”
“뭐지?”
이한영과 이운석이 흠칫 놀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일 때, 오로치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핸드폰 소리일까.
누군지 취향도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의 손에 붙들려 있던 멍한 얼굴의 퀴니가 돌연 눈을 반짝 빛내며 ‘카옹’ 하고 우는 것이 아닌가?
“무, 무슨?” 놀람의 순간을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퀴니의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허둥대는 사이. 그는 그녀가 엽기적인 노래를 좇아 한 마리 고양이처럼 수직으로 선 벽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봐야 했다.
“엥?” 초유의 사태에 모든 사람의 입이 동시에 쩍 하고 벌어졌다.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던 이한영 조차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병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오른쪽 어깨를 쳐다봤다. 예상대로 호랭이가 벌떡 일어선 채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인 양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려는 육체의 욕망을 수백 년의 수행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력도 ‘이눔. 이눔.’ 소리에 맞춰 자명종을 찰싹찰싹 때려내는 퀴니의 음성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결국 호랭이 역시 한 마리의 야생짐승이 되어 수직의 벽을 타고 오르고 말았다.
타다다다 뛰어가는 호랭이를 보며 병규는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 벨소리는 신선조차 거부하지 못하는 거야?” 그는 치를 떨었다. 정말로 무서운 건 오로치도, 세상을 집어삼키려 드는 데몬게이트도 아니다.
‘조건반사.’
그놈의 조건반사가 뭔지. 그놈의 기상 벨 태그매치가 뭔지.
퀴니와 호랭이에게 기상벨소리는 오로치의 최면보다 더 깊은,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각인된 강력한 각성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H 빔 위로 팔딱팔딱 뛰어올라가는 퀴니를 보고 오로치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쳤다.
최면에 걸린 자는 절대로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절대로 배신하지 못한다. 이것은 능력을 얻은 후로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절대의 법칙이다.
그 어떤 능력자도, 그 어떤 비상식적인 인간이라도 그의 최면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 그 절대의 룰이 깨져 버렸다. 그것도 썰렁한 노랫소리에. 쿵짝쿵짝 하는 단순한 멜로디에, 완벽을 자랑하던 계획이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돌아와. 어서. 네 자리로 돌아오란 말이다.”
오로치는 몇 번이나 능력을 발휘하여 퀴니를 불렀다. 그러나 퀴니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하양 털뭉치 강아지와 함께 자명종을 후려치는 데만 열중했다. 아! 다 찌그러진 자명종을 향해 발라당 킥을 날린다.
“이, 이럴 수가.” 오로치는 미끈한 얼굴 가득 경악과 불신을 담은 채 절규했다. 너무도 어이없이 그의 최면이 깨진 것이라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어라? 어라? 일이 재미있게 됐는 걸?” 그때 비로소 대충이나마 상황이 파악된 사람들이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잘됐어.”
이운석이 손목 관절을 부딪혀 뚝뚝 소리를 낸다.
“그래.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전개야.” 이한영은 손을 빙빙 돌리며 몸을 풀었다.
“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티타임입니다.”내내 차갑던 병규의 얼굴에도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히, 히익.”
서서히 화색이 도는 세 사람과 달리 오로치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꼬, 꼼짝 마.” 오로치는 권총을 퀴니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천천히 다가서던 병규 일행은 움찔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젠장. 저 녀석에게 총이 있다는 걸 깜빡했군.’
‘망할 자식. 어린아이에게 총을 겨누다니.’
병규들은 치졸한 그의 행동에 이를 박박 갈았다. 그러나 분하긴해도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퀴니는 여전히 자명종을 상대로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 최면이 깨지기는 했지만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좋아. 그대로 있어!”
오로치는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게걸스런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 반전.
여우는 굴을 여러 개 파 놓는 법이다. 비록 일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마지막에 웃는 자는 결국 자신이지 않은가. 역시 하늘은 아직 그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득의의 웃음을 띨 때였다.
휙!하는 파공음과 함께 함석쟁반이 날아들어 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깡~!
“큭. 어떤 놈이.”
오로치는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흉수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쁜 놈!”
함석쟁반을 날린 경애가 그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녀를 본 오로치의 얼굴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뜨려졌다.
“저것이!”
혀를 날름거리고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는 그녀의 발칙한 행동에 눈이 뒤집힌 오로치는 퀴니조차 잊은 채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뭐 잊은 거 없어?” 달콤한 음성이 그의 귓가를 맴돌고 파고들었다. 노곤한 몸이 확 풀려버릴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였지만, 막상 오로치는 얼음 굴에라도 빠진 듯 온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제, 제길!”
“시끄러워. 말 많은 녀석!”
차가운 일갈과 뱃속으로 틀어박히는 이한영의 송곳 같은 일격.
투쿵!
북을 두드리는 듯한 묵직한 폭음과 함께 그의 몸뚱이가 무려 십여 미터나 솟구쳤다. 그의 입과 코에서 쏟아져 나온 오물이 허공을 벌겋게 물들였다.
“크아아아악!”
입 밖으로 내장이 와르르 쏟아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 오로치는 죽어라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아직 분노한 이들의 징벌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떠오른 상공. 독기를 가득 피어 올리는 한 청년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 파티를 시작해 보자.” 환하게 웃는 사람은 바로 병규였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오로치를 따라잡은 그는 고통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그의 면상에 십여 발의 통쾌한 발자국을 찍어냈다. 그리고 최후로 몸을 휘리릭 회전하며 도끼를 내려찍듯 발뒤꿈치로 그의 정수리를 찍어냈다.
빡!
해머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듯한 어마어마한 충격.
“크아악.”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진 오로치는 사지를 뒤틀며 고통스러워했다.
“아직 멀었어.” 병규는 한 손으로 그를 덜렁 들어올렸다. 비틀린 오로치의 면상을 노려보던 그는 주먹을 어깨 위로 들어올리더니 번개같이 뻗어냈다.
퍽!
“썩을 녀석!”
퍽퍽!
“젠장 맞을 녀석!” 퍽퍽퍽!
“망할 녀석!”
퍽퍽퍽퍽퍽퍽퍽퍽퍽!
“에라이 지옥에나 떨어질 녀석아!!”
놈의 비열한 언사에 뼈가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던 주먹은, 한을 풀 듯 한 방, 한 방 호쾌한 소음을 내며 오로치의 안면에 작렬했다.
“으아. 으아아. 아아아아아!!”
오로치는 두 손을 휘저으며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병규의 주먹을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삽시간에 그의 면상은 부모도 못 알아볼 만큼 아작이 나버렸다.
그때, 돌연한 사태에 멍하니 서 있던 흑의인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바람같이 빠른 몸놀림.
그러나 그보다 수배는 빠른 그림자가 그들 앞을 막아섰다.
“그렇겐 안 되지.” 이운석이었다.
병규를 슬쩍 턱짓해 보인 그는 흑의인들을 향해 예의 매력적인 미소를 보였다.
“저 친구의 유흥을 방해하려면 먼저 날 쓰러뜨려야 할 거야.” 조용한 위협.
“.........!” 흑의인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더니 쏘아낸 그물처럼 그를 덮쳐갔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여유 있게 중얼거린 그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부웅.
웅장한 바람소리. 뒤이어 터지는 호쾌한 파열음!
빠각.
“컥.”
흑의인 하나가 천장에 처박혔다가 살 맞은 기러기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동료가 처참하게 뭉개지는 꼴을 보고도 다른 여섯의 흑의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살수를 날렸다.
쉬쉭.
얼굴을 향해 매섭게 쏘아져 들어오는 두 자루의 칼.
이운석은 풍차처럼 발을 휘둘렀다.
엄청나게 빠른 발길질.
발그림자를 타고 일어난 돌풍이 살모사처럼 달려드는 칼들을 휩쓸어 버렸다. 막대한 풍압에 칼들은 물론이고, 칼을 들고 있던 흑의인들 마저 휭 하니 날아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죽어!” 칼들을 처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으로 몰려드는 세 흑의인. 그들의 살수가 이운석의 등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손이 이운석의 등을 파고들었는데, 아무런 감촉도 없는 것이 아닌가. 곧 그들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운석의 신형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잔상!” 흑의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리고 채 경악성이 가시기도 전, 허깨비처럼 그들의 등 뒤에 나타난 이운석이 다시 한 번 소나기처럼 발길질을 퍼부었다.
퍼퍼퍼퍼퍽.
시원스런 타격음과 함께 흑의인 셋이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졌다.
“자. 이제 마지막이군.” 느긋한 말과 함께 최후의 흑의인에게로 걸음을 옮기는 이운석.
걸음걸음마다 가히 제왕의 웅장한 풍모가 느껴지는 듯했다.
주춤주춤 물러서던 흑의인은 발악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칼을 휘둘렀다. 시퍼런 칼 빛이 사방으로 난사되는 제법 날카로운 일격. 그러나 이운석이 한 걸음 옆으로 옮기자 하무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니제 쉴 시간이다.”
조용한 음성과 함께 그의 발길질이 흑의인을 강타했다.
으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과 함께 무섭게 튕겨 나간 흑의인은 콘크리트 벽에 과격하게 부딪히더니, 그대로 목각인형이 망가지듯 허물어졌다.
“좋아. 이제 대충 다 정리된 것 같군.” 마지막 흑의인을 벽에 처박아 버린 이운석은 손을 툭툭 털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한영은 핸드폰을 들고 차분한 목소리로 어딘가로 연락을 넣고 있었고, 병규는 여전히 오로치를 두드려 패고 있었다.
“이것 봐. 잘못하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운석이 어깨를 툭툭 치자 그제야 병규는 오로치를 놓아준다. 무거운 쌀자루처럼 털썩 쓰러진 오로치는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이거야. 원. 이런 상태라면 심문도 못하겠네.” 이운석은 팅팅 부은 오로치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리 열을 받았어도 그렇지 이건 좀 지나치다. 이 푸르뎅뎅하고 둥글넓적한 물건은 푸줏간에 걸어 놓아야 할 물건이지, 절대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긴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자신의 손에 걸렸으면 손이든 발이든 어디 한 군데는 완전히 못쓰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병규는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험악하게 다룬 것 같은데, 사실 뼈 한 군데 부러뜨리지 않았다. 반쯤 돌아버린 상황에서도 손에 사정을 둔 것이다.
‘
저 친구가 이렇게 온유한 사람이었나?‘
그렇게 두들려 패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는 병규를 돌아보며 이운석은 피식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사실 병규가 그를 대충 손봐주고 만 것은 퀴니가 잡혀있을 때, 딱 한 대만 때리게 해 달라고 하늘에 간청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손을 보고 만 것이다. 물론 적당히 손본 정도가 푸줏간에 걸려야 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좋아. 이제 상황 종료.” 오라로 오로치와 흑의인들을 결박한 이운석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이한영과 병규 역시 빙긋 웃었다. 좀 전부터 살벌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던 김경애는 슬금슬금 한쪽에 팽개쳐진 함석쟁반을 주워들었다. 병규네 집에서 들고 나온 것이라 다시 가져다 놓아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운석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참 독특한 여자다. 이런 상황에서 싸구려 쟁반이나 챙기고 있다니.
‘나중에 쟁반이나 몇 개 사다 줘야겠군.’
이운석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정말로 긴 밤이었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 그러고 보니 요즘 며치간은 정말 정신없이 지나간 것 같다. 여유를 되찾은 그는 그제야 후텁지근한 실내에 답답함을 느꼈다.
“여기 좀 찌는데? 대장이 오기 전에 창이라도 열어놔야겠군.” 이운석이 막 창으로 걸음을 옮길 때다.
“환기라. 됐네. 바람이라면 지금부터 신물이 날 정도로 쐬게 될테니.” 갑자기 날아든 근엄하고 느긋한 음성.
번개같이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어느새 실내의 한 구역을 점하고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은 짧은 머리칼의 시원스럽게 생긴 남자였고, 다른 사람은........
“오로치?” 이한영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갑작스레 나타난 두 사람 중 하나는 엉망으로 망가진 채 결박당한 오로치였다. 그 얄미운 미소를 여전히 입가에 매단채!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을 수가.
병규 일행은 어리둥절해 만신창이가 된 오로치를 재차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뭐야?” 병규는 묵사발이 된 오로치와 새로 나타난 오로치를 번갈아 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쌍둥이?” 이운석의 표정 역시 병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글쎄. 어떻게 된 일일까요?”
새로운 오로치는 느글거리는 음성으로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뱀의 차가운 미소가 연상되는 저 표정. 확실히 놈은 오로치다. 그럼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때,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잇던 이한영이 작은 음성으로 눈앞에 멀쩡하게 서 있는 오로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진짜로군.” “맞습니다. 예전에 우리 한 번 본 적이 있지요?” “그럼 이 가짜는 뭐지?” “한 번 맞춰보시지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짐작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최면이로군.” “빙고!”
“어느 쪽?” 이한영은 손가락으로 자신들과 결박당한 또 하나의 오로치를 번갈아가며 가리켰다.
“아무리 저라도 뛰어난 능력자 여럿에게 최면을 거는 것은 무리랍니다.” “결국 최면에 걸린 것은 자신이 오로치라고 믿은 불쌍한 저 녀석이군.” “하하, 당신과의 대화는 참으로 편하군요.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요. 문득 아까운 생각도 드는군요. 예전에 영입을 했었어야 하는 건데.”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포옥 한숨을 쉬는 오로치. 손을 가리고 얌전하게 웃는 모습이 상당히 여성스럽다.
“누나. 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운석이 이한영에게 물었다.
“저 녀석. 처음부터 우릴 가지고 놀았던 거야. 엉뚱한 녀석에게 최면으로 자신을 오로치라고 믿게 만들고는 우리 앞에 내세운 거지. 그리고는 정작 본인은 뒤쪽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던 거야. 정말 멋지게 당했는 걸? 지금까지 전혀 엉뚱한 녀석을 오로치라고 믿고 있었으니 말야.” 이한영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뭐? 하지만 방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녀석은 분명 신풍의 총사인 오로치라고. 대장이 나눠준 파일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겼.........”
결박당한 오로치를 손가락질하던 이운석의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이럴 수가 전혀 다른 얼굴이 아닌가. 좀 전까지 오로치라고 믿었던 녀석은 지금 눈앞에서 간교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오로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머리가 긴 것만 빼고는 한 군데도 닮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이 녀석을 오로치라고 믿고 있었던 걸까.
이한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통로와 방으로 이루어진 반복적인 구조. 끝도 없이 회전하는 계단. 빛과 어둠의 순환. 결국 우리가 여태 달려왔던 길 자체가 최면을 위한 준비였던 거지. 엉뚱한 녀석을 오로치라고 믿게 만드는....... 문제는 왜 굳이 가짜를 내세웠느냐 하는 것인데. 아마도 특재대에 상대하기 껄끄러운 인물이 있는 모양이지?” “자영이란 여자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궁금했지요. 그런데 이제 보니 당신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군요. 마지막 한 수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뻔했습니다.” 오로치는 시계 종처럼 손가락을 까닥이며 ‘쿵짝쿵짝’이라는 리듬을 반복해 보였다.
세 명의 능력자를 앞에 두고도 여유 있는 모습. 수사노오를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한 수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한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말로 상대하기 껄끄러운 녀석이다. 일반적으로 뛰어난 자들은 지나친 천재성만큼 자만심이 강하기 마련인데. 녀석은 치밀한 계획을 짜 준비해 놓고도 이중, 삼중으로 빠져나갈 구멍까지 마련해 두었다.
이런 작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녀석이 준비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꼼짝없이 놈이 파 놓은 덫에 걸려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 녀석이 최후로 내밀 카드는 무엇일까. 분명 대단한 것일 테지?
이한영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병규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병규를 본 오로치의 두 눈에서 잠깐 살기가 번뜩였지만, 그것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사라져버렸다.
“아, 진짜 오로치나 가짜 오로치나 말 많기는 마찬가지군. 골치 아프게.”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인 병규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다시 나타난 것을 보니까 퀴니가 꼭 필요한 모양이지? 하지만 아쉽게도 퀴니는 지금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데려가려면 날 이겨야 할 거야.”
“호오. 제가 보기엔 당신들에게 보호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강아지랑 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부채를 팔락이며 웃는 깔끔한 오로치의 미소. 그러나 병규는 지지 않고 밝은 웃음을 보였다.
“너도 녀석의 존재를 모르는 거냐?”
“.......?”
“하하, 역시 너도 완벽한 인간은 못되는구나. 아아. 그렇게 의아한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사실은 나도 녀석의 기척을 느낄 수 없거든. 꽤 민감한 편인데도 말야.”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뭐. 간단한 얘기야. 이 방에 여기 세 명 말고도 우리 편이 하나 더 있다는 소리지. 그리고 녀석은 틀림없이 퀴니를 보호해 줄 거라 믿어. 퀴니의 좋은 친구니까. 안 그래?”
병규의 물음에 어두운 천장에서 대답이라도 하듯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샤바샤바.”
“흐음.”
오로치의 두 눈이 뱀처럼 가늘게 찢어졌다.
예상치 못한 요소가 나타난 때문일까? 풀풀 날리던 웃음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과연. 의외의 것이 있는 것 같긴 하군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원래부터 당신들은 온전하게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껄끄러운 상대는 기회가 되는 대로 쳐 내는 것이 제 신조라서 말입니다.”
말을 하는 도중 오로치는 이한영을 위해 싱긋 눈웃음을 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협력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이한영은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좋아.”
병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계략이 짜증나게 얽히는 것은 정말로 싫었지만, 단순히 치고 박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이리 나와. 한 번 붙어 보자.” 병규는 오로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나 오로치는 부채를 좌락 펼쳐 입을 기리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여러분을 상대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나다.” 웅장한 목소리와 함께 잠자코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고오오.
그가 발을 옮기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실내를 휘감고 돌았다.
“좀좌의 이름은 수사노오. 친분 있는 자들은 폭풍의 군주라고 부르지.”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천둥과 같은 힘이 있어 공기가 우르르 진동했다.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듯한 묵직한 압력.
풀어졌던 근육이 쫙 땅겨 올라가고 피부위로 소름이 쪼르르 돋는다.
‘이제 보니 가짜 오로치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은 바로 이 녀석 때문이었구나.’
병규는 뼛속까지 찌릿하게 울리는 압력에 쓴웃음을 지었다.
왜일까. 엄청난 상대와 붙게 되었는데, 오히려 마음이 들뜨는 이유는.
“까짓것! 해보자.”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병규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휘릭
짧은 바람소리. 그리고 어느새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녀석의 주먹.
병규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눈을 깜빡이고 보니 저만치 있던 자가 어느새 눈앞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속도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운석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엄청난 가속이었다.
"우선 한 방.”
병규는 수사노오의 무표정한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십여 걸음 정도의 거리는 이미 반 자가량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주먹만 내밀면 닿을 거리.
그러나 수사노오는 그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아예 눈조차 뜨지 않았다.
“넌 나와 힘을 겨룰 자격이 없다.”
근엄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장대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펑 하는 폭음과 함께 폭풍과 같은 기세가 병규를 휘감아 올렸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온몸을 조여 오더니 병규의 몸뚱이를 허공으로 휙 하고 날려 버렸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돈다.
빙글빙글 돌아간다.
멀미가 날 정도로 모든 게 뒤죽박죽으로 섞인 시야.
“크악.” 병규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하는 둔한 충격과 함께.
“!” “.........!” 돌연 정적이 찾아왔다.
이운석은 달려 나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럴 수가.
병규가 폭발적인 탄력을 최대로 발휘해서 달려가더니 다음 순간 허공을 빙글빙글 돌아 땅바닥에 메다 꽂혀 버렸다. 수사노오가 한 대응이라고는 기껏해야 손 하나를 슬쩍 들어올린 것이 전부.
이운석은 병규의 실력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천부적인 격투센스가 잇는 능력자. 그런데 그런 그가 별 자항도 못하고 날아갔다?
‘이것이 M 급의 위력인가.’
그의 뺨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회오리?”
이한영은 턱을 덜덜 떨었다. 이것은 공포? 아니 놀라움이다. 방금 병규를 매섭게 휘감아 올린 것은 분명 회오리. 그러나 그 위력은 학교 운동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산들바람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지붕을 날리고, 벽돌을 우박처럼 날려버리는 초강력 허리케인. 그런 엄청난 에너지가 병규라는 한 점에 퍼부어진 것이다. 땅에 발을 박고 있지 않는 한 절대로 그 힘에 항거할 수 없을 것이다.
경애는 즉시 병규에게로 뛰어갔다.
“다행이다.”
숨은 쉬고 있었다. 정신을 잃었지만 어디 한곳 부러진 곳도 없다.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진 것치곤 지나칠 정도로 양호한 상태다.
경애는 병규가 걸쳐주었던 겉옷을 벗어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을 닦아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오돌오돌한 느낌.
세상에나. 면도칼로 난도질당한 듯한 상처가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이 아닌가. 피를 닦아낸 피부위로 드러난 수많은 상처들은 노예의 낙인만큼이나 처참했다.
‘어떻게 해.’
안절부절못하던 경애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뻘건 피를 보니 괜스레 눈물만 솟는다.
“걱정 마. 괜찮을 거야.”
이한영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진정시켰다. 이어 그녀는 차분하게 병규의 상태를 확인했다.
외상이 엄청 심하긴 했지만 어디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따.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 방에 병규를 날려버린 수사노오의 능력을 생각하니 앞이 컴컴해졌다.
볅로 힘을 쏟은 것 같지도 같은 능력이 이 정도라니.
“오빠....... 괜찮을까요? 괜찮겠죠? 그렇죠?” 함석쟁반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경애가 촉촉한 음성으로 물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이한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아. 그는....... 이 정도에 죽을 사람이 아니야.”
그녀의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잠시 흐릿한 시선으로 병규를 내려다보던 이한영은 이제 막 싸움이 붙은 동생과 수사노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병규를 잘 부탁해.”
김경애를 끌어다 병규 옆에 앉혀 놓은 그녀는 수사노오를 향해 달렸다.
파파파팡.
미트를 때리는 듯한 짧고 경쾌한 소음.
빠르고 경쾌한 발길질에 날카로운 파공성마저 시원스럽게 울려댄다. 대체 발이 얼마나 빠르면 저런 소리가 나는 것일까.
비단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정확하다.
낫처럼 접혀진 발이 대나무처럼 쭉 펴질 때마다 ‘팡’ ‘팡’ 하는 소음이 명쾌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 같은 이운석의 공격도 수사노오 앞에 펼쳐진 바람의 장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소문의 그 M 급 능력자?”
소나기 같은 일격을 퍼붓고 난 후, 잠시 숨을 돌리며 이운석이 물었다. 수사노오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내려다보는 눈초리로 이운석을 응시했을 뿐이다.
“기린인가.”
그의 눈동자에 어리는 것은 차가운 조소.
긴 털을 가진 모든 동물의 왕이라 불리는 기린의 능력자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비웃음이었다.
“이 녀석.”
이운석의 눈자위가 팔딱팔딱 뛴다.
"누워라.“
게가 걷듯 빠르게 거리를 좁힌 그는 하늘을 무너뜨릴 기세로 무수한 발그림자를 찍어댰다.
쉬쉬쉬쉬쉭.
숨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파공음!
몇 차례의 접전에서 보여준 그의 능력은 장대하면서도 웅장한 것이었지만, 지금 수사노오에게 쏟아지는 공격은 가히 여름날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우처럼 무자비했다.
우르르 하고 쏟아지는 발길질들. 그리고 그 속에 깃들어 있는 현모함.
창처럼 쭉쭉 뻗어오면서도 몽창몽창 휘어지는 연검처럼 교묘한 일격! 일격! 그러한 치밀한 공격이 촘촘하게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공세에 걸려든 사람은 마치 수십 명의 적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수사노오의 표정은 여전히 냉막했다.
“지나치게 정직한 공격이군.”
수사노오는 느릿하게 왼손을 쳐들더니 부채질을 하듯 가볍게 흔들며 이운석의 발그림자를 거둬냈다. 직접 손으로 쳐낸 것이 아니다.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세찬 바람이 일어나 이운석의 발을 횡하니 밀어내 버리곤 했다. 끝내 바람의 장벽을 뚫지 못한 이운석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크윽.” 진득한 신음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두 발이 다 아프다.
‘왜?’
그러나 이운석은 발아래를 내려다볼 겨를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를 휘감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읏!”
신음인지 기합인지 불분명한 소리를 내지르며 이운석은 허공으로 신형을 쭉 뽑아 올렸다.
휘이이이.
매서운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병규를 일격에 날려 버렸던 그 회오리 공격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만약 병규가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모른다. 절로 몸이 떨려왔다.
두 번의 재주를 더 넘으며 적당히 거리를 벌린 이운석은 그제야 발을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맙소사!
그의 두 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구두와 바지는 걸레 조각처럼 찢겨저 나갔고, 훤하게 드러난 종아리와 발은 톱질을 당한 것처럼 거친 자상들로 빼곡했다.
‘어느새.’
이운석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녀석과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있었다면 장벽처럼 일어난 바람과 수 없이 부딪혔던 것뿐.
‘결국 녀석의 바람은 최강의 방패이자 최강의 창이 되는 건가?’
이운석의 시원스럽게 뻗은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인다.
그가 지금까지 찾아낸 기린의 능력은 지치지 않는 빠름이다. 그 빠름을 기초로 그는 천둥처럼 웅장하고, 번개처럼 날카로운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사노오와 같은 적에게 그의 특기는 터무니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적에게 타격을 주려면 천상 녀석의 몸에 직접 타격을 주어야 하는데, 녀석의 한 자 안으로 접근할 수 없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능력도 연구해 보는 건데.’
자신의 무능에 괜한 짜증을 내며, 이운석은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발을 거칠게 내딛자 가시에 긁힌 듯한 상처에서 진득한 핏물이 송알송알 배어 나왔다.
‘동생의 능력으론 힘들어.’
수사노오와 이운석의 대결을 냉정하게 관찰하던 이한영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녀석의 절대적인 방어를 감안해 봤을 때, 웬만한 충격은 씨알도 안 먹힐 거야.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불의의 기습!
그도 아니면 생각지도 않은 기묘한 공격일 것이다.
이한영은 즉시 맨손으로 바닥을 뜯어냈다. 단단한 콘크리트가 두부처럼 패이며 그녀의 손안에 돌 조각이 한 움큼 쥐여진다. 그녀는 지체 없이 손을 휘둘렀다.
“받아랏!”
휘잉.
탄환처럼 쏘아진 콘크리트 조각이 매서운 바람소리를 냈다.
‘흥!’
차가운 코웃음과 함께 수사노오가 한 손을 펼쳐내자 폭풍 같은 기세가 장벽처럼 드리워지며 날아든 돌 조각을 조각조각 분쇄해버렸다.
파바박.
과자처럼 부서지는 콘크리트 조각. 그런데 놀랍게도 모래처럼 부서진 조각들이 반짝반짝 은빛으로 빛나더니, 바람의 장막 안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돌 조각을 던지가 직전, 이한영이 몰래 투입한 금속입자가 흩뿌려진 것이다.
“제법이군.”
수사노오의 건조한 입가에 한 줄기 웃음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의 손이 허리춤의 칼 손잡이로 향했다. 굵은 손가락이 칼 손잡이를 감싸 쥐었을 때에는 이미 잘게 부서진 쇳조각들이 안면을 저밀 듯이 다가와 있었다.
위급한 순간.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스윽.
칼이 칼집을 빠져나오는 부드러운 울림.
찡.
칼집을 벗어난 칼이 지르는 한 줄기 청아한 울음. 그리고 곧바로 그의 상반신을 뒤덮은 거무스름한 칼 그림자. 시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처럼 잔잔하나 마지막 칼을 휘두를 때의 움직임은 가히 성난 바람과 같았다.
짜자자장.
그 한 번의 칼질에 금속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이한영의 공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합.”
이한영이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려 왔다.
수사노오가 칼로 쇳조각을 처리한 순간의 빈틈을 노린 것이다. 작고 하얀 주먹에 무슨 힘이 그렇게 실렸는지 부웅 하는 거친 바람소리가 인다.
‘그냥 어째로 받아낼까?’
그러나 수사노오는 그녀의 주먹이 은빛으로 번쩍이는 것을 보고는 크게 한 발을 물러섰다.
‘불길하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든 것이다.
“좀스런 녀석. 여자의애교 섞인 주먹쯤은 받아줘도 되잖아?” 공격이 실패한 이한영이 억지스럽게 외쳤다. 그러나 태연한 말만큼이나 여유로운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회심의 일격을 피해낸 수사노오가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쇠를 부리는 능력자인가? 나쁘지 않았다.”
무뚝뚝한 칭찬. 그러나 그 이후에 이어진 것은 잔혹하게 조여오는 회오리바람이었다.
“피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이운석처럼 몸이 빠르지 않았다. 그래서 칼날 같은 회오리바람이 온몸을 휘감아오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체내에 흡수한 금속을 재빨리 피부 바깥쪽으로 얇게 둘렀다.
치리리리링.
모래 알갱이가 금속판을 두드릴 때의 치열한 소음. 바람에 휩쓸린 이물질이 그녀의 팔뚝을 스치며 불꽃을 토했다. 금속으로 피부 바깥쪽을 빙 둘러버린 지금, 그녀는 견고한 무쇠갑옷을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통증이란.
‘쓰라리다.’
전력을 기울여 피부를 보호하고 있는데고 개미가 무는 듯한 따끔거림이 전신을 후벼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휘리리.......
귓가를 천둥처럼 울리던 바람소리가 돌연 사라졌다.
이한영은 즉시 안면을 가리던 팔을 풀고는 앞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회오리바람을 무사히 견뎌낸 그녀를 향해 수사노오가 칼을 찍어내고 있었다.
이한영은 이마를 쪼개오는 칼의 예기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건 보통의 기운이 아니다. 왠지 저 칼이라면 철벽을 자랑하는 피부도 허망하게 잘려나갈 것 같았다.
이한영은 기벅을 하며 몸을 굴려 피하려 했지만 놈의 칼이 조금 더 빨랐다.
수사노오의 칼이 벼락처럼 이한영의 어깨를 갈라가려 할 때였다.
“떨어져!”
고함을 지르며 이운석이 수사노오의 등을 발로 찼다. 수사노오는 왼손을 그에게 뻗어냈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바람의 장벽이 일어난다. 방벽에 부딪히자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튀어 오른다. 그러나 이운석은 그런 와중에도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부웅웅웅.
대체 얼마나 빠르기에 파공성이 고주파의 진동음처럼 웅웅 울려대는 것일까.
“........!” 수사노오의 미간에 한 줄기 주름이 생겼다. 절대의 방어를 자랑하는 바람의 장벽이 계속되는 이운석의 공격에 발기발기 찢어졌기 때문이다.
“이 녀석.”
밀려드는 발그림자를 향해 수사노오가 손을 휘젓자 이운석은 폭풍에 휩쓸린 조갑배처럼 힘없이 밀려나갔다. 바닥에 몸이 찍찍 끌리며 붉은 자국을 남긴다.
“이 녀석. 감히 동생을.”
이한영의 눈빛이 변했다. 이운석의 난입으로 가까스로 수사노오의 칼을 피할 수 있었던 그녀는 동생이 쓰러지자 계획이고 뭐고 다짜고짜 두 손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수사노오에게 달려들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공격. 그러나 수사노오는 감히 태만히 대하지 못하고 신중하게 물러서며 칼집으로 그녀의 주먹을 쳐냈다.
퍽!
망치로 내리쳐도 꿈쩍 않던 칼집이 썩은 대나무처럼 터져 나간다.
수사노오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역시나 이 여자의 주먹은 심상치 않다. 이운석을 곤란케 한 바람의 장벽조차 그녀에겐 별반 효용이 없었다.
“막을 수 없다면 잘라낸다.”
연속으로 서너 걸음이나 후퇴한 그는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칼을 휘둘렀다. 이번만은 이한영도 준비를 단단히 하여 바닥을 구르며 피할 수 있었다.
CLR.
차가운 바람소리와 함께 수사노오의 칼에 스친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날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피부와 마찬가지로 금속의 보호를 받는다. 그런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는 말은 그녀의 피부도 얼마든지 베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죽을 수도 있다!’
심장을 조여 오는 섬뜩한 긴장감.
“겁을 먹었군.” 거만하게 외친 수사노오가 칼을 비스듬히 썰었다. 이한영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간신히 피해냈다. 그러나 뒤이어진 발길질에 그만 배를 얻어맞고 말았다. 피부는 무쇠와 같았지만 내부를 파고드는 묵직한 충격만은 어쩔 수 없었다.
“끄으윽.”
파랗게 질린 그녀의 입술에서 참혹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편, 이한영 오누이가 수사노오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경애는 기절한 병규를 깨우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
짱짱짱.
함석쟁반으로 안면을 때리고, 손등을 콱 깨물어 봐도 전혀 일어날 기색이 없다.
끄으윽!“
그때 처절한 신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수사노오의 발길질에 이한영이 피를 토하며 내지른 비명이었다.
경애는 다급해졌다.
절대로 쓰지 않으리나 다짐했던 가전의 비책을 동원할 때다.
“어쩔 수 없지.”
두 눈을 찔끔 감은 그녀는 기도를 올리듯 두 손을 하나로 모아 병규를 찔렀다.
푸욱!
번쩍.
놀랍게도 어떤 방법으로도 일어나지 못하던 병규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나 요상하게도 곧바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굉장히 고통스런 신음이었다.
“끄으으으윽!”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불 위의 오징어처럼 온몸을 마구 꼬아댄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미칠 듯한 고통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경애는 그의 절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집주인 오빠. 일어나. 빨리 일어나란 말야. 언니가. 언니가 죽는단 말야.”
“뭣?”
돌연 병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치!’
언니가 죽는다는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킨 병규를 보고 경애는 살짝 질투가 일었다. 그래서 두 볼을 잔뜩 부풀리며 병규를 쏘아봤다. 그러나 병규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두 눈을 치를 토하며 뒹굴고 있는 이한영의 모습만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누님!”
마침 수사노오가 그녀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리고 있었다.
병규의 신형이 휘릭 하며 경애의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이한영을 부둥켜안은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병규가 처음의 위치에서 이한영이 있는 곳까지는 적게 잡아도 15미터 정도. 그 거리를 칼 한 번 휘두르는 사이에 달려온 것이다.
특재대에서 제일가는 준족인 이운석조차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순발력.
‘저 녀석은........’
병규를 쳐다보는 수사노오의 안색이 가볍게 변한다.
‘죽지 않았나?’
분명 머리부터 거꾸로 내쳤는데, 바닥에 떨어질 때 묵직한 충격음이 들렸는데, 겉으로 보이는 병규의 모습은 멀쩡했다. 물론 회오리바람에 말려든 피부는 흉하게 너덜거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움직이는 데는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녀석이었나 보군.” 그러고 보니 방금 전의 움직임도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처음에는 제법 빠르다고 느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 아닌가. 어쩌면 각성하지 못한 기린보다 까다로운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님." 이한영을 품에 안은 병규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의 모습은 처참했다. 말끔했던 피부는 줄 톱에라도 쓸린 듯 거칠게 일어나 있고, 군데군데 엷은 검상도 보인다.
‘젠장. 젠장.’
병규는 입버릇처럼 ‘젠장’을 연발했다. 누님이 이렇게 될 때까지 맘 편하게 기절이나 하고 있었다니. 사실 그녀는 이번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 때문에 말려든 사람에 불과했다.
“녀석. 우냐?”
이한영이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병규는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누님.” “아서라. 남자 녀석이 우는 꼴은 영 보기 안 좋다.”
기운도 없으면서 애써 쾌활한 목소리를 내는 그녀. 병규는 옷소매로 눈자위를 쓱쓱 닦으며 껄걸 소리 나게 웃었다.
“하하. 누님. 그나저나 서비스가 지나친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이건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사실 지금 누님, 굉장히 섹시한 차림이거든요.” 수사노오의 회오리에 여러 번 말려들었던 이한영은 찢어진 옷가지로 부끄러운 부분만 간신히 가린 상태였다.
“이 녀석.”
이한영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하지만 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엔 누님이 좀 쉬세요. 저처럼 한숨 자고 나면 머리가 개운해질 겁니다.” 푸근하게 웃어 보인 병규는 이한영을 경애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수사노오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쪽 구석. 이운석이 핏물에 잠긴 채 쓰러져 있었다.
기절한 걸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괜찮을 거야. 녀석은 강하니까.’
병규는 이운석을 굳게 믿었다.
“약속할 게.”
걸음을 옮기며 병규는 다짐하듯 수사노오에게 말을 걸었다.
“두 번째는 결코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촤르르 펼친 그의 두 손에서 푸르스름한 요수의 발톱이 길게 뻗어 나왔다.
팅!
병규는 힘껏 발을 퉁겼다.
발끝에서 전해오는 경쾌한 탄력.
허리와 다리를 살짝 비틀어 퉁기자 버들가지와 같은 탄력이 일어나며 그를 허공으로 휙 날려버린다. 피리릭.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의 풍압이 얼굴로 몰아친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의 움직임을 보았다면 입을 쩍 벌렸을 것이다. 가히 수면 위를 가르는 제비에 비견될 재빠름이 아닌가. 그러나 병규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아직 부족해.’
상대는 사상초유의 능력자.
가볍게 휘두른 손짓에 그는 비에 쓸린 낙엽처럼 처참하게 날려갔다. 더 큰, 지금보다 월등히 큰 힘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렇게 허공으로 뜬 상태에서 어떻게 더 큰 힘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회전!’
질문을 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머릿속에서 명쾌한 대답이 떠올랐다.
병규는 고민하지 않았다. 두 발을 선박의 스크루처럼 휘돌리며 그로 인해 발생한 폭발적인 기운을 모조리 상체로 쏟아냈다.
키이잉. 풍차처럼 돌아가는 요수의 발톱이 굶주린 울음을 터트린다. 잠깐 사이의 준비. 눈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찰나였지만 병규는 이미 수사노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우선 한 방!”
병규는 처음 수사노오에게 돌격할 때의 그 호기로운 외침을 다시금 발했다.
촤아아악.
요수의 발톱이 허공을 갈라온다. 병규의 눈부시게 빠른 움직임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수사노오는 즉시 칼을 들어 대항했다.
차앙.
요수의 발톱과 그의 칼이 부딪히자 파란 불꽃이 요란하게 튄다. 과연 그의 칼은 범상한 물건이 아니었다. 여태 못 가르는 것이 없었던 요수의 발톱을 버텨낸 것이다. 그러나 병규의 공격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움직임은 애초에 휘몰아쳐 가는 소용돌이.
그리고 요수의 발톱은 왼손과 오른 손. 각각 두 개다. 허공에서 그가 풍차처럼 맹렬히 회전하자 굶주린 이리떼처럼 요수의 발톱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웃!” 수사노오는 기겁을 했다.
설마 공중에 뜬 상태로 몸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다급해진 그는 크게 한 걸음 물러서며 바람의 장벽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촤아아악!
절대의 방어력을 자랑하던 바람의 장벽이 허무하게 찢겨져 나간 것이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요수의 발톱이 소름 끼치는 한기를 발산하며 그의 안면을 찍어왔다.
“역풍!”
수사노오는 몸을 움츠리며 응축된 바람의 기운으로 자신의 몸을 후려쳤다. 펑 하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그의 동체가 뒤로 급격하게 밀려났다. 덕분에 그의 머리칼을 스친 요수의 발톱은 애꿎은 바닥만 깊숙하게 베어 냈다.
“이 녀석!”
바람의 기운을 타고 십여 미터나 훌쩍 이동한 수사노오의 입에서 노한 외침이 터졌다. 그의 격노는 곧 사나운 회오리바람으로 나타났다.
휘오오!
병규가 우두커니 서 있는 자리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병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읏!”
돌연 수사노오가 경악성을 터트린다. 어느새 병규가 그의 하체를 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눈 한 번 깜빡일 사이? 아니 찰나라고 말할 만한 순간에, 병규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천상보!”
수사노오의 발 아래로 바람이 일며 그의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병규의 일격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그러나 병규는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한 바퀴 재주를 넘더니 압축된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그를 쫒아 튀어 올라왔다.
놀라운 탄력.
수사노오는 기겁을 했다.
이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이 엄청난 점프력은 대체 또 뭐란 말인가.
급하게 바람을 일으켜 몸을 뺐다.
칙!
대응이 늦었던 것인지, 손목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옹알옹알 떨어지는 핏방울.
“내 이 녀석을.”
수사노오는 분노했따. 감히 신의 대리인에게 반항하다니. 감히 신성한 피를 흘리게 하다니.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자 우르릉 하는 천중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는 힘을 억제하지 않으리라.
놈에게 지엄한 분노를 내리리라. 푹풍과 같은 힘으로 놈ㅇ르 갈기갈기 찢어 놓으리라.
그런데.......
없다.
놈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놀란 수사노오는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곳에 있었다.
놀랍게도 병규는 아래로 떨어지기는커녕, 천장이 맨땅이라도 되는 듯 신나게 내달렸다. 날개처럼 좌우로 쪽 펄친 그의 손끝에서 가공스런 요기가 일렁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녀석!”
수사노오는 이를 악물며 힘들게 모은 기운을 병규에게 사정없이 뿌려댔다. 먹구름 같은 검은 기운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갑작스런 발출이라 원래 힘의 절반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귀찮은 쥐새끼를 가루로 만드는 것은 충분하리라.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호락호락 맞아줘야 말이지.
휙.
경미한 파공성. 갑자기 병규의 모습이 사라졌다.
검은 기운이 수사노오의 손에서 채 빠져나가기도 전이다. 기겁을 하고 찾아보니 멀찌감치 안전한 곳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병규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그는 이번에도 쓸데없이 힘을 낭비한 셈이다.
수사노오는 한탄했다.
‘이곳이 실외였다면.’
그는 손이 미치지 않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병규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좁은 천장이 한없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제약이 이 순간 더 없이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수사노오를 몰아치고 있는 병규는,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
턱까지 차오르는 숨. 입에서 단내가 확확 풍긴다.
사람의 체력엔 엄연히 한계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스피드를 쉴 새 없이 폭발시켰는데 몸이 무리가 없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병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한계 속에서도 결코 쉬려하지 않았다.
한숨을 돌리는 순간 죽는다.
병규는 이를 악물었다.
호랭이는 말했었다.
때와 장소만 제대로 활용한다면 하급의 능력자도 최고의 능력자를 누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장점은?
단순히 빠르기로만 말한다면 이운석이 그보다 빠르고, 재치와 신중함은 호랭이를 따를 수 없으며, 신체의 단단함과 기기묘묘한 재주는 이한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그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다.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순발력과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요수의 발톱.
그는 이 두 가지 재능을 최대로 활용하여 수사노오를 정신없이 몰아쳤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연계기들. 빠르게 이어지는 연속공격이라면 이운석도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 그러나 저돌적인 이운석과 달리 그는 영악했다 아니 머리는 둔해도 몸은 놀라울 정도로 기민한 반응을 보였다.
좁은 상자 안을 정신없이 튀어 다니는 고무공처럼, 그는 장소의 이점을 최대로 활용하며 수사노오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 이노옴!’
수사노오는 미칠 것 같았다.
이게 과연 기절했다 막 깨어난 사람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이 녀석에게 나와의 간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눈앞에 나타난 녀석을 향해 칼을 쑤셔 넣고 회오리를 일으켰더니 어느새 녀석은 그의 등을 그어오고 있다. 급히 몸을 피하고 보니 녀석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업다. 어느새 발아래를 갈라오는 시퍼런 기운.
마치 허깨비와 싸우는 것 같다.
아니 인간일 리 없다.
인간의 몸뚱이로 어찌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자는 아닐까?
병규가 달려들 때마다 몸서리치는 소름이 오싹오싹 돋는다.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의 등은 땀으로 젖은 지 오래다.
‘긴장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짜릿한 녀석이다.
그리고 뜨겁다.
감염이라도 된 듯 자신마저 뜨거워진다.
이런 녀석이 있었는데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차라리 엄청난 능력으로 그를 곤란케 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흥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약하다.
날카로운 요기? 점프력? 빠른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고 보자면 보잘것없는 능력들이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능력들을 융합해 놓은 녀석은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보인다.
“하하하, 좋아. 널 인정하마. 넌 충분히 나와 싸울 자격이 있다.”
껄걸 대소를 터트린 수사노오는 돌연 두 팔을 확 펼쳐냈다.
고오오오오오오!
자욱하게 밀려드는 회색의 회오리.
대기가 울부짖는다.
바람에 휩쓸린 잡동사니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쿠르르르르르르!
발밑에서 일어난 검은 먹구름이 바람을 타고 그의전신을 휘감는다.
건물 전체가 우르르 흔들린다.
벽이 무너지고 천정과 바닥이 쩍쩍 갈라진다.
장엄하기까지 폭풍의 기운.
용솟음치는 폭풍 속에서 병규를 향해 수사노오가 손을 까딱였다.
“오라!”
“좋아, 가지!” 병규는 무섭게 솟구치는 폭풍 앞에서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사내자식이 좀스럽게 폭풍 속에 몸을 감춰? 나보고 오라고? 오냐 가주마. 허약한 네 녀석에게 사내의 주먹질이 무엇인지 꼭 한 번 보여주고 말 테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병규의 신형이 한 줄기 빛처럼 쏘아졌다.
촤아아아악.
비단이 갈라지듯 폭풍의 한 자락이 거침없이 쪼개진다.
“으랴아아! 우선 한 방이다!”
호쾌한 음성이 해일처럼 쏟아지는 폭풍 속을 아련히 진동했다.
‘역시 저놈은!’
한가롭게 부채를 부치고 있던 오로치. 아니, 오로치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발칸은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병규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가 치솟아 자칫 이성을 잃을 뻔했다. 요수의 발톱으로 자심의 배를 갈라오던 놈의 얼굴이 떠올라 두 손이 바르르 떨려오던 게 몇 번이던가.
‘역시 놈은 요수의 발톱을 사용할 수 있다.’
병규의 움직임을 차분히 살펴보고 얻은 결론이다. 아니 단순히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부린다.
‘어떻게 내 기술을 저 녀석이 훔쳐간 거지?’
그러고 보니 놈의 빠른 움직임도 묘하게 자신과 닮아 있다. 마치 능력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다.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 놈이 타인의 능력을 복제하는 능력자라는 것.
‘터무니없는 녀석이군.’
발칸은 치를 떨었다. 설마 이런 해괴망측한 능력자가 존재할 줄이야.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오로치의 노를 아무리 검색해 봐도 능력을 복제하는 수호신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수호신이 없는 능력자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오로치가 알고 있는 선에선 그랬다. 물론 풍가닌자들처럼 수사노오 급의 뛰어난 능력자가 자신의 힘 일부를 불어넣어 만든 대용품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능력자와는 차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녀석이 어떤 능력자이건 상관할 바 아니지. 여기서 죽을 게 뻔한데.’
수사노오는 강력하다.
질투가 날 정도로.
이 세계에서 오로치가 만난 인간들 중 가장 강했던 존재가 바로 수사노오였다. 처음 수사노오를 보았을 때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에 얼마나 놀랐던가.
애송이는 절대로 수사노오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수사노오에게 병규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저 걸레처럼 뭉개놓기를. 그래서 그가 직접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일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사노오가 평정을 잃었다.’
애송이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능력은 그에게서 복제해간 어중간한 기술들. 한데 최고라 칭송받는 수사노오가 그런 녀석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녀석의 보잘 것 없는 재주에 휘말리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천한 녀석의 발악에 잠재능력까지 폭발시킨다.
여간해서는 웃지도 않는 수사노오다. 오로치의기억을 모두 뒤져봐도 크게 웃었던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 그 목석 같은 남자가 몸이나 풀어보려고 끼어든 싸움에 껄걸 대소를 터트리고, 경악성을 질러대고 있다.
‘좋지 않다.’
오로치의 가늘고 긴 눈썹이 지그시 휘어진다.
한가롭게 팔랑이고 있던 부채는 어느새 그의 손에 차분히 모아졌다.
‘대체 녀석의 무엇이 군주를 흥분하게 만드는가.’
오로치의 가는 두 눈이 병규의 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무서운 폭풍. 사방의 집기들이 날아다니고, 유리창들이 펑펑 터져 나간다.
“꺄악!”
실신한 이한영을 꼭 끌어안은 경애는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토했다.
거친 바람에 몸이 질질 밀려난다.
벽이 없었다면 아마 밖으로 날려갔을 것이다.
‘숨이 막혀.’
막강한 풍압. 눈앞이 컴컴해지고, 물에라도 빠진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입을 꼭 막아도 숨쉬기가 힘들다. 그녀는 낑낑거리며 이한영을 벽에 기대 앉히고, 그녀 자신도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조금이라도 폭풍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서다.
‘참, 그 잘생긴 남자는?’
경애는 주위를 살폈다.
부옇게 날리는 먼지들, 송곳 같은 바람.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운석은 근처에 있었다. 정신을 차렸던지 벽을 짚어가며 경애쪽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이운석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애써 웃음 짓는 모습이란. 경애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따뜻한 음성으로 대꾸한 이운석은 그녀와 이한영을 감싸듯 안았다.
“저, 저기 굳이 이러실 필요는........”
당황한 듯 경애가 말을 꺼내자 이운석은 씩하고 웃어 보인다.
“괜찮아요. 전 회복능력이 남다르니까 조금 다쳐도 금방 낫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원래 남자가 하는 겁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멋있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믿음직스러운 목소리. 경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뭘까. 이 불안감은. 아직 한 사람이 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안정이 되질 않는다.
“잘 해낼 겁니다.”
이운석이 말했다.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쉬고 있는 이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나가 이 정도로 의지할 만큼의 실력을 갖춘 남자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겁니다.”
조용히 말ㅇ르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엔 강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의 표정에서 분한 느낌이 읽혀졌다. 인정은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부족한 능력에 자괴감이 든 것일까.
경애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복잡한 표정으로 폭풍의 중심을 응시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무서운 괴음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중심. 그곳에 병규가 있다.
경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힘내! 오빠.’
촤악.
요수의 발톱을 휘두르자 무섭게 휘몰아치던 폭풍이 양 갈래로 쫙 갈라진다.
바람의 장벽 사이로 뚫린 길.
병규는 십계의 한 장면처럼 양쪽으로 나눠진 폭풍의 한가운데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놀라운 스피드.
그러나 갈라진 폭풍은 베어진 물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로 모이며 그의 뒤를 맹렬하게 쫓아왔다.
병규는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보면 두려움만 생길 뿐이다.
야수의 괴성과 같은 폭풍의 중심.
수사노오의 경악에 찬 표정이 보인다.
‘얼마 안 남았다!’
병규는 폭주하는 육체를 더욱 더 채찍질했다.
“카아악.”
그를 보고 놀라던 수사노오가 돌연 고함을 지른다.
키오오오오!
폭풍이 더욱 거세어진다. 살갗이 따가워 미칠 지경이다. 옷을 거리지 않은 상체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칙칙.
급기야 피부가 갈라진다. 녀석의 바람은 형체 없는 톱처럼 사정없이 피부를 뜯어간다.
조금씩 찢어지는 피부.
그 고통이란 칼에 베인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병규는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폭풍 속의 수사노오만이 보일 뿐이다.
“으아아아아!”
맹수의 표호와도 같은 거친 외침.
요수의 발톱이 한계까지 뻗어 나오며 사납게 날뛰는 폭풍을 단번에 쪼개버린다. 병규는 흩어지는 폭풍 너머의 수사노오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우선 한 방이다!”
병규의 신형이 빙글 회전하며 수사노오를 휩쓸어간다.
“감히!”
수사노오가 분노에 찬 한 마디를 내뱉는다. 성난 폭풍이 한 순간에 사그라지고 대신 회색빛 회오리가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병규에게 집중되었다.
그것은 대륙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막대한 에너지.
집을 날리고 거대한 화물차를 뒤집어 놓는 허리케인, 그 엄청난 힘이 한 사람에게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것이다.
‘크윽.’
병규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아 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다. 아니 실제로 그의 몸은 비명을 지르며 피부 바깥쪽부터 찢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방!
녀석의 그 잘난 낯짝에 한 방을 선물할 수 있다면 피부에 생기는 생채기 정도는 멋진 훈장으로 치부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허리케인에 휘말린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따. 움찔이라도 하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허공을 올려다보던 그의눈에 문득 섬광이 번뜩인다.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며 솟구치는허리케인의 움직임.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병규의 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따.
평소엔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성격 탓에 잦은 실수가 많은 편이지만, 지금처럼 숨 쉴 틈 없는 격전에서는 그의 직선적인 성격이 그 어떤 잔재주보다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병규는 더 이상 허리케인에 저항하지 않았다. 전신의 힘을 풀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휘리리리리릭!
허리케인에 말린 그의 몸이 맹렬히 회전히기 시작했다.
“저, 저럴 수가!”
오로치의 몸뚱이를 뒤집어쓴 발칸의 입에서 끝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병규를 응시하던 그의 두 눈은 찍어질 듯이 흡 떠져 있었다.
애송이가 요수의 발톱을 휘두르며 수사노오의 폭풍을 가를 때만 해도 그는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훔쳐 배운 능력으로 꽤 그럴싸한 저항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항은 어디까지나 반항일 뿐이다. 수사노오가 힘을 조금만 더 배가시키면 저 처절한 저항도 순식간에 끝날 것이라 믿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지만 녀석은 고양이가 아니라 성난 사자에게 대들고 있는 것이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힘의 차이는 너무도 명백했다.
그러한 그의 예측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군주가 사방으로 방사하던 능력을 녀석에게 집중하자 마침내 피를 뒤집어쓴 처량한 쥐새끼 꼴의 녀석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끝났군.” 발칸은 확신했다.
갈기갈기 찢겨져서 날리는 녀석의 살점. 물보라처럼 치솟아 오르는 피. 사람의 신체가 외부에서부터 천천히 분해되는 듯한 처참한 광경을 보며 그는 짜릿한 쾌감까지 느꼈다. 다만 자신의 손으로 그 쾌감을 얻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때.
애송이가 어설픈 반항을 시작했다.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그대로 허리케인에 휩쓰려 올라간다.
‘마침내 포기한 것인가?’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리케인에 말린 병규가, 천장에 처박히며 묵사발이 되었어야 할 그가 오히려 회전하는 그 힘을 이용해 시퍼런 요수의 발톱으로 건물의 지붕을 뚫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툭!
발칸의 손에서 부채가 떨어졌다.
그의 미끈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 밑으로 가는 경련이 일었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놈은. 이 쥐새끼는. 살기 위해서 사자의 입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이럴 수가.”
놀란 경악성. 그러나 놀라운 사건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쩌걱.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거대한 소음.
시끄러운 소음을 좇아 천장으로 고개를 돌린 발칸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인다.
“천장이.......!”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사노오가 서 있는 바로 위쪽의 천장이 예리한 무언가로 둥글게 잘린 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연한 일로 보기엔 절단된 면이 너무 날카롭다. 틀림없이 놈이 요수의 발톱을 써서 잘라낸 것이다.
“놀랍군.”
발칸의입에서 끝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저럼 일을 저지를 줄이야.
정말 뛰어난 격투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지, 본능리라고 해야겠군.’
발칸의 두 눈이 가늘게 오므려졌다.
“헉!”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본 수사노오는 경악성을 질렀다. 대경한 그는 급히 폭풍을 일으켜 무너지는 시멘트 철근을 날려버리려 했다. 하지만 막상 천장이 낮다는 사실이 그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채 돌풍을 일으키기도 전에 시멘트 덩어리가 머리를 눌러왔던 것이다. 이대로 버티다간 꼼짝없이 압사당할 판.
결국 수사노오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야 했다.
쿠웅.
충격과 함께 먼지구름이 확 피어오른다.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수사노오는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성난 쥐새끼 병규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퍽!
병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수사노오의 얼굴을 발로 지그시 밟아주었다.
“큭!”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한 신음성!
병규는 짧게 외쳤다.
“한 방이다.”
“이 자식이!”
수사노오의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 나온다. 말과 함께 뇌전 같은 섬뜩한 기운이 병규의 상체를 쓸어온다. 병규는 춤을 추듯 허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하고 이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며 발로 수사노오의 턱을 올려쳤다.
화려한 백 핸드스프링 킥!
딱!
이가 부딪히는 듣기 괴로운 소음.
수사노오의 입에서 핏물이 튄다. 그러나 그 역시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턱에서 시작된 통증이 찡 하게 머릿속을 저며 오는데도 팔을 휘저으며 질풍을 뿌렸다.
꾸웅.
병규의 배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벌려진 입에서 한 바가지의 피가 쏟아진다. 내장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제 끝이다!”
번쩍 치켜든 수사노오의 두 팔이 병규를 내리친다.
우르릉하며 울리는 뇌성.
무지막지한 기운이 병규를 눌러왔다.
“아직......”
병규의 두 눈에 독기가 서린다.
“부족해!”
병규의 두 발이 지면을 찼다.
탕!
경쾌한 소음.
병규는 하체에서 비롯된 탄력으로 신형을 돌개바람처럼 회전시키며 수사노오에게 달려들었다. 같이 죽자는 식으로 몸을 부딪히는 막무가내식 공격.
“소용없다.”
수사노오는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러나 병규는 집요했다. 무서울 정도로.
쾅하고 지면에 떨어지자마자 이번엔 팔랑개비처럼 한 바퀴 휘돌며 수사노오의 하체를 공격해 들어간다.
“이 녀석이.” 독기가 오른 수사노오는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는 심정으로 전력을 기울여 병규를 내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병규의 발그림자가 쉭~ 하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하늘로 승천하는 용권풍처럼 수사노오의 가슴과 얼굴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팡!
폭죽이 터지는 듯한 폭음. 수사노오의 몸이 뒤로 쿵쿵 튕기며 밀린다.
‘이건!’
두 사람의 치열한 생사혈투를 응시하던 발칸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이것은 수사노오의 회오리바람이 아닌가.’
몰론 그의 능력을 복제했던 것처럼, 수사노오의 바람을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순간 회전하며 승천하는 병규의 몸놀림이 회오리를 연산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선움직임의 효율을 깨달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좀 전부터 녀석의모든 움직임이 나선을 그리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힘의 효율과 파괴력을 삽시간에 깨닫고 곧바로 실전에 응용한 것이다.
“말도 안 돼!”
비명과 같은 경악이 터져 나온다.
저 놀라운 적응능력. 생명력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것 같은 터프함. 그리고 무엇보다 바퀴벌레와 같은 억센 생명력!
발칸은 전율했다.
처음으로 녀석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지긋지긋한 자식! 제발 쓰러져라.”
수사노오는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이젠 뜨겁지 않다.
더 이상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이 즐겁지 않다.
힘들다. 아니 괴롭다. 미칠 만큼 괴롭다.
“싫어.”
입에서 피를 쿨럭쿨럭 토해 내며 병규가 대꾸한다.
“아직 부족해.”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다.
“.........”
불같이 화를 내던 수사노오는 병규의 웃음에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화가 나야 하는데, 왜 저 녀석의 옹고집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일까.
“3회전이야.”
병규가 천천히 걸어온다. 병규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전신의 살갗은 거의 다 벗겨져 있었고,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보통사람이 저 정도 상태였더라면 고통 때문에라도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병규는 통증을 전혀 못 느끼는 듯했다. 몽롱한 그의 두 눈은 말없이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수사노오는 고요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굳어있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만 하자.” 병규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뭐?” “그만 하자고 말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수사노오는 병규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무시하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놀란 얼굴의 발칸이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주군.”
“가자.” “하, 하지만 저하.”
발칸은 당황했다. 수사노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
오로치의 몸을 얻고 난 후부터, 남의 속을 제 손바닥 보듯 읽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 수사노오의 생각만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잘못되었다.” 수사노오의 묵직한 한 마디. 발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떨려온다.
‘이 녀석. 애송이에게 반했군.’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경우. 저속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매료되고, 인정하게 되는 것.
수사노오는 마음속으로 애송이를 인정한 것이다.
‘아깝게 되었군.’
발칸은 입맛을 다셨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처리할 수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애송이 녀석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힘을 모을 때까지 당분간 오로치 행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수사노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허면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허리를 숙인 채 총총히 물러난 발칸은 H 빔 위의 퀴니를 올려다봤다. 비록 버러지 같은 녀석 때문에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퀴니만을 꼭 되찾아 와야 한다.
그의 장대한 계획을 위해서.
그러나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병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오로치의 눈가가 실룩인다.
“주군을 조금 곤란케 했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이군요.”
차가운 오로치의 말.
병규는 대답이 없었다. 독기서린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몰골. 그러나 여전히 그의 두 눈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건방진!”
발칸은 하얗고 긴 손을 들어 부채처럼 펼쳐보였다.
최면.
단순한 녀석일수록 걸려들기 쉽다. 차라리 잘되었다. 이대로 녀석을 백치로 만들어 버리면.
그때 수사노오의 묵지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만해 둬라.”
발칸은 찔끔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수사노오는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넓은 등.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날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허나 주군. 저 아이는 꼭.”
수사노오가 비스듬히 뒤를 돌아본다. 그 스산한 눈동자란. 발칸은 순간 얼어버렸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내 스스로 해결해 보이겠다.”
병규.
하급의 능력자 주제에 감히 수사노오와 맞선 자. 죽음을 면하기 힘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내 한 방을 보여주었던 사내. 불가능한 일에 목숨 아까운지 모르고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멍청한 녀석.
그러나 왜일까. 그의 무모함이 부러운 이유는.
수사노오의 굳은 음성. 발칸은 그의 결정이 걸코 번복되지 않을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발칸은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수사노오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발칸의 등을 누군가 잡아챘다.
“헛.” 피투성이가 된 병규의 얼굴이 바짝 들이밀어진 것이 아닌가.
놀란 발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병규의 그 시퍼렇게 발화하는 눈빛이란. 차가운 심장의 소유자인 그도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넌 못 가.”
묽게 풀린 눈으로 병규가 말했다.
“뭐?”
“놈 맞아야 하거든.” “?” 발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녀석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수사노오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내 손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참한 꼴이 되었을 녀석이.......’
그는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dflrmfjwu야 했기 때문이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던 병규의 얼굴이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게 무슨........”
경악성을 토하던 발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쿠쿵.
강한 진동과 함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목직한 통증.
“크윽.” 이를 빠득빠득 갈며 비명을 참아 보려 했지만 끝내 진득한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발칸은 배를 움켜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건 퀴니를 납치한 벌이댜.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약속하건데 영혼을 팔아서라도 널 죽여버리겠어.”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병규가 중얼거린다. 뒤통수를 훑으며 쏟아지는 살벌한 병규의 목소리. 원인을 알 수 없는 오한으로 발칸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만 됐다.” 어느새 가가온 수사노오가 바닥에 엎어져 꿈틀대고 있는 발칸을 부축했다. 그에게 부축된 발칸의 두 눈에서 순간 살기가 흘러나왔지만, 그런 사실을 병규는 물론 수사노오도 눈치채지 못했다.
“기회가 되면 또 보지.” 수사노오는 비스듬히 선 채. 병규를 향해 조용한 한마디를 날렸다. 묵직한 음성.
깨어진 찬 틈으로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길게 흩날린다. 어딘지 모르게 사내다운 멋이 물씬 풍기는 모습니다.
잠시 병규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는 미련을 거두는 듯 빙글 돌아서며 깨어진 창을 뛰어 넘어갔다. 폭풍의 군주에겐 고층빌딩의 높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수사노오가 사라진 후, 끈적거리는 피를 뚝뚝 흘리고 서 있던 병규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는...... 꼭 이길 거야.”
병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뭄철 논바닥이 갈라진 것처럼 쩍쩍 갈라짐 피부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털퍼덕.
“오빠!”
“병규.”
귓가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하지만 병규는 꿈속의 일인 양. 전신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정말...... 피곤한 하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