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긴다더니
차박차박, 묵직한 발소리.
차일처럼 가려진 어둠 속을 일렁이는 그림자들.
그 끈적거리는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관자놀이를 지끈지끈 자극해 온다.
“거제 뭐지?”
이한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슴푸레 보이는 큼지막한 그림자들. 대충 봐도 3미터가 넘는 거대한 크기들이다.
“녀석들이구나.”
병규의 미간이 좁혀진다.
역시 그놈들이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아스팔트 위에서 맞닥뜨렸던 끔찍한 괴물.
“너. 저놈들이 보이냐?” 호랭이가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던 호랭이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린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깊은 어둠.
그러나 이 어둠 속에서도 병규는 놈들을 확실하게 포착해 내고 있었다.
유심히 병규를 관찰하던 호랭이는 곧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요안!’
일명 귀신의 눈이라 불리는 통찰안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예전부터 가끔씩 귀신을 보곤 했다고 했지?’
평소에는 발칸과 스크래그에게서 복제한 능력들에 가려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능력이지만, 지금처럼 어두운 장소에서는 그 어떤 힘보다 더한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이 요안이다.
“모두 열 마리다. 처음 보는 놈도 3마리나 섞여 있다.”
어둠을 직시한 호랭이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경고한다. 병규는 새로 나타난 요괴에게 안력을 집중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새 인간 정도의 느낌.
키는 약 2미터 정도, 몸은 인간과 같은데 기묘하게도 팔다리는 매나 독수리의 그것처럼 생겼다. 머리 또한 인간과 맹금류를 적당히 조합한 듯한 모습에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엔 기다란 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등에 달린 날개.
저게 과연 펄럭이기는 할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큼지막한 날개다.
‘날아다니는 녀석인가?’
이곳은 천장이 낮아 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지만, 만약 놈들이 머리 위를 노린다면 골치 아프게 될 공산이 크다.
“저게 뭔지 아니?”
눈을 찌푸린 채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하던 이한영은 결국엔 포기하고 병규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개 달린 놈은 처음 봐서 모르겠지만, 개구리같이 생긴 녀석에 대해선 대충 알아요. 귀탄, 또는 스크래그라고 불리는 괴물인데, 움직임이 빠르고 점프력이 매우 뛰어나요. 혀는 무려 오륙 미터까지 채찍처럼 휘두를 수 있고 독까지 품고 있는데다, 엄청난 재생능력이 있어서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에요.”
“재생능력?” “네. 엄청나죠. 머리통을 절단 내고 몸통을 잘라 내도 금방 재생되어 버리니까요. 재생을 막으려면 물이 없는 곳에서 처리하는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병규를 따라 고개를 올린 이한영은 허! 하고 탄성을 흘렸다.
스프링클러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물.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왜 물이 쏟아지나 했더니 이런 이유에서였군. 녀석들. 머리 좀 굴릴 줄 아는데? 네 말이 사실이라면 골치 좀 아프겠는 걸. 한두 녀석도 아니고 말야. 그냥 무사히고 뛰면 어떨까?”
그녀의 물음에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누님은 시속 60킬로로 달릴 수 있어요?”
“.......?”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서, 설마?”
“예전에 저놈을 만났을 때, 스쿠터를 타고 전속력으로 도망가 봤지만 결국 따라잡히고 말았어요. 순간적인 스피드야 제가 더 빠르지만, 지구력까지 생각한다면 스크래그에게서 도망가지 못할 겁니다.”
병규의 말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던 이한영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좀 전까지 그녀는 봉인을 푼 운석과 병규 둘 중에 누가 더 빠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본 것으로만 따진다면 병규가 가장 빨랐다. 하지만 비교대상이랄 수 있는 이운석은 아주 어릴 적의 기록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몸도 훨씬 컸고, 근육도 발달했다.
게다가 십 몇 년간 200킬로그램의 쇠뭉치를 발에 매달고 다녔다는 점. 은연중에 엄청난 수련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지금의 이운석과 병규 중 누가 더 빠를까?
내내 고심하던 그녀는 우연히 병규의 말에서 힌트를 얻게 되었다.
순간적인 스피드는 낼 수 있지만 지구력은 떨어진다.
병규의 그 엄청난 스피드는 순간적인 것이다. 반면 이운석은 하루 종일 뛰어도 지칠 녀석이 아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병규는 100미터를 달리는 스프린터고, 그의 동생인 운석은 장거리를 뛰는 마라토너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운석은 스프린터만큼이나 빠른 마라토너였지만.
그러나 그녀는 병규가 능력을 얻은 지 이제 고작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도망갈 수 없다라. 그런다면 간단하네.” 이한영은 주먹을 팡팡 두드리며 호기 있게 외쳤다.
“싹 쓸어버리면 되지.” 병규는 씩 하고 웃었다.
“역시 화끈하네요. 누님은.” “어? 그거 이상하게 들린다. 나 의외로 부드러운 여자야.” “하하, 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호탕하게 웃은 병규는 돌연 한 줄기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파도처럼 쫙 갈라진다.
행동은 빠를수록 좋다.
특히나 상대해야 할 적이 많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우선 첫 번째.” 병규는 제일 선두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스크래그를 노렸다.
처음이 중요하다.
기선을 제압한다고 할까?
싸움이 길어지면 절대로 불리한 입장이 되는 만큼 기습을 해서라도 적의 머릿수를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요수의 발톱.’
촤악!
그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요기가 일 미터 가까이 솟았다.
“가랏!” 병규는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상체를 숙이며 크게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돌았다. 팽이처럼 회전하는 그를 따라 요수의 발톱이 헬기의 프로펠러처럼 살벌한 움직임을 보인다.
파파팍 튀어 오르는 물방울.
그와 함께 쭉 쏟아지는 핏줄기. 스크래그의 발목이 장작쪼가리처럼 굴러간다.
키롸롸롸롸.
종아리 아래가 몽창 잘려 나간 스크래그는 미친 듯이 괴성을 질렀다.
“아직이야.” 물이 있는 한 놈의 재생력은 무지막지할 정도다.
병규는 쓰러지는 놈이 머리통에 주저 없이 요수의 발톱을 쑤셔 박았다. 정수리를 꿰뚫은 요수의 발톱이 목뼈를 절단 내고, 다시 등뼈를 대나무처럼 길게 쪼개며 등가죽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다.
쿠룩쿠룩........
피거품 게우는 듣기 괴로운 신음과 함께 놈의 커다란 육신이 축 늘어졌다. 놈의 몸뚱이에서 요수의 발톱을 끄집어내자 벌어진 살가죽 사이로 끈적끈적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온다.
병규는 다시 한 번 요수의 발톱을 휘둘러 아예 놈의 머리를 다져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베어진 살점과 뇌를 발로 뻥뻥 걷어찼다. 이렇게 해도 이놈은 재생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줄 테지.’
병규가 막 놈의 머리통을 걷어찼을 때다.
“오른쪽. 피해.”
호랭이가 급박한 음성으로 경고한다. 서늘한 느낌이 정수리를 스치며 온 신경을 쭈삣하게 만들자 병규는 즉시 넘어지듯 뒤로 몸을 뉘었다.
꾸웅.
무시무시한 바람이 안면을 스치고 지나간다.
뇌를 압박하는 묵직한 충격. 얼굴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물방울.
간신히 피했지만 안도의 숨을 쉴 틈이 없었다. 놈의 또 다른 손이 발밑을 쓸어왔다.
구르듯 몸을 일으킨 병규는 곧바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그곳에도 적은 있었다.
키악!
기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들었다.
“새인간!”
병규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허공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 하필 이때 놈의 공격을 받다니. 그는 발악하듯 신형을 회전시켰다.
쫘악.
등허리와 허벅지의 옷이 길게 찢어진다.
살갗이 벗겨진 걸까 아니면 살갗이 깊숙이 파인 걸까.
옷이 찢겨져 나간 부위가 뜨거운 물이라도 부은 것처럼 화끈거린다. 코를 쿡 찔러오는 역한 피비린내. 그리고 이어지는 따끔따끔한 통증을 수반한 간지러움.
‘당했다.’
그러나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없다. 새인간의 펄럭이는 날갯짓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던 것이다.
“이얏!”
병규는 긴 괴성을 지르며 꽃봉오리가 펼쳐지듯 요수의 발톱을 쫙 펼쳐냈다.
퍼퍼퍽!
폭죽 터지는 소음.
키롸롸롸.
처절한 비명소리.
한 덩이의 뜨거운 핏물이 그의 얼굴로 확 끼쳐왔다.
빙글 휘돌며 바닥으로 착지하자 조각난 새인간의 육편들이 털썩털썩 떨어져 내렸다. 잘려진 팔다리가 벌레처럼 발버둥 친다.
그러나 병규는 조각난 새인간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았다. 온몸에 뒤집어쓴 놈의 피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역겹다.
그 끈적끈적한 괴이함과 속이 울렁거리는 비릿함을 어찌 말로다 표현하리. 병규는 토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소매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침을 퉤퉤 뱉었지만 찝찝함은 여전히 남았다.
“먹었냐?”
호랭이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얼떨결에 입에 들어온 걸 삼킨 것 같아요.”
“........”
호랭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병규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고는 싶은데. 차마 꺼내지 못하는 얼굴. 물론 병규는 호랭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몬스터의 특기를 카피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고 했었지?’
병규도 호랭이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지금 그가 사용하고 있는 능력은 과거 처절하게 싸웠었던 발칸과 귀탄의 능력이다.
“이번일로 확실히 알게 되겠네요.” “그렇지. 하지만 우선 지금은 이 녀석들을 헤 치우는 것에만 집중하자.” 호랭이는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활기차게 외쳤다.
“네!”
병규는 힘차게 대답했지만, 상황은 좋지 못했다.
철퍽철퍽하는 소음과 함께 괴물들이 그를 둥글게 감싸왔다. 동료가 둘이나 토막 났는데도 두려워하는 빛이 전혀 없다.
“돌진!”
호랭이의 구령에 병규는 즉각 몸을 퉁겨 올렸다. 부응 하고 떠오르더니 박쥐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다. 천장에 매달리자 키 큰 괴물들이 모두 그의 머리 아래에 있게 되었다.
“간다!”
병규는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 자세 그대로 마치 평지를 달리듯 달렸다.
중력에 역행하는 듯한 움직임.
머리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스크래그들.
병규는 밭이랑을 파헤치는 갈퀴처럼 요수의 발톱을 휘둘렀다.
서거거걱.
고깃덩어리를 썰 때 나는 으슥한 절삭음.
병규를 포위하고 있던 스크래그 네 마리의 머리통이 대나무처럼 세로로 쪼개져 버렸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괴물 넷을 처리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이 덜 찬 듯 병규는 지면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소용돌이치듯 몸을 회전시키며, 새인간 한 마리를 채 썰 듯 썰어 버렸다.
퍼퍽. 투두둑.
한 줄기 돌풍처럼 그가 휩쓸고 지나가자 잘려나간 고기조각들과 느끼한 녹색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너무도 신속한 병규의 공격에 괴물들은 일시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들의 동체가 수그러들더니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시작이군.” 병규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기습적인 공격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정면승부뿐이다.
까드드드드드.
등뒤에서 들려온 목 울음소리.
호랭이는 즉각 경고했다.
“뒤.” 호랭이의 외침이 들리자마자 병규는 신형을 휘리릭 띄웠다.
촤악.
날카로운 파공음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간다.
스크래그가 혀를 날려온 것이다. 독을 잔뜩 품은 것이라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다.
병규가 기우뚱 불안하게 착지하자마자 스크래그 한 녀석이 뛰어올랐다. 그 큰 몸이 활짝 펼쳐지며 머리 위를 뒤덮자 도무지 피할 구멍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때는 정면 돌파!”
병규는 즉각 요수의 발톱을 길게 뽑아내고는 어지럽게 허공에 그어댔다.
서걱. 서걱. 서걱.
진저리 쳐지는 절삭음.
머리 위로 쏟아지는 녹색 피.
이 지독한 비린내는 아무리 맡아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핏물이 비가 되어 쏟아진 다음엔 조각난 괴물들의 몸뚱이가 그의 주위에 후두둑 떨어진다.
순식간에 두 녀석을 처리했으니 기분이라도 통쾌해야 할 텐데.
잘게 쪼개진 놈의 살점들이 부글부글 재생되는 꼴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기가 막히다 못해 참담한 기분까지 든다.
바로 그때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 그의 주위를 휘감았다.
휘오오.
“바람소리?” 느닷없이 들려온 소음에 병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 웬 바람소리란 말인가.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마치 늘어진 칼날이 그의 전신을 서서히 저며 오는 것 같은 살기. 무언가를 느낀 호랭이가 갈기를 세우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뛰어!” 그대로 병규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휘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그의 발밑을 스쳐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병규는 꽤 멀찍이 달아난 다음에야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가 서 있던 그 자리. 작은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회오리바람 속에 휘말린 스크래그의 살점이 마치 믹서에 갈린 고기처럼 분해가 되어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것이 아닌가.
“저럴 수가!”
호랭이의 하얗고 복실한 털이 쭈뼛 솟는다.
“조심해라. 저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야.”
고개를 끄덕이는 병규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대체 어떤 놈이.’
고개를 휘휘 돌려보니 새인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놈이다!” 병규는 확신했다. 놈밖에 없다.
스크래그는 독이든 혓바닥이더니 이 녀석은 회오리바람을 쏘아댄다. 그것도 인간의 무른 피부쯤은 순식간에 다지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칼바람을.
그때였다.
새인간에게 한참 정신이 팔려있는데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턱하고 짚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이한영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헉. 너....... 뭐가 그렇게 빨라? 헉헉헉. 따라다니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잖아.” 병규가 괴물들을 상대하는 동안 그녀는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하긴 그렇게 요란하게 설쳐댔으니.
‘에구야.’
괜히 미안해진 병규는 뒤통수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어떻게 누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다. 어느새 다가온 스크래그 한 놈이 그 큰 손바닥을 휘둘러 이한영의 머리 위를 철퍼덕 하고 내리쳤다.
“으앗!”
스크래그의 큰 손이 이한영의 얼굴을 뒤덮는 순간 병규는 목이 째져라 비명을 질렀다.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가는 광경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러나........
떠엉~!
쇳소리?
퍽 하는 묵직한 폭음 대신 마치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드러난 모습은 병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피를 쏟으며 죽어있을 줄 알았던 이한영은 솜털 하나 다치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고, 오히려 인정사정없이 그녀를 내리친 스크래그가 충격을 받은 듯 손바닥을 움켜쥐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병규와 호랭이는 아연실색했다.
‘설마 스크래그가 특별히 살살 때린 걸까?’
하지만 사실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그녀의 가녀린 두 다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하다.” 병규는 감탄했다.
정말로 강철과 같은 신체가 아닌가. 그 엄청난 파워를 꿋꿋하게 견뎌 내다니. 그래도 충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쓰으읍. 아이고, 골 흔들려라. 나쁜 녀석. 감히 숙녀의 머리를 그렇게 무식하게 쳐” 쓴맛을 보여주마!“
욕지기를 내뱉은 그녀는 돌연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주먹 한 점에 모이는 응축된 힘.
“으라차차차!” 버럭 고함을 지른 이한영은 자심을 공격한 스크래그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부응.
크고 호쾌한 동작.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심상치 앖다.
팡!!
가슴마저 후련해지는 파음. 사람의 주먹이 괴물의 두터운 가죽을 두드렸는데 들려오는 소음은 마치 펀칭머신을 후려친 것처럼 너무도 통쾌하다.
크어억.
이한영에게 맞은 스크래그가 비명을 지른다. 그 큰 덩치가 한순간 붕 떠오르더니 요란한 소음과 함께 무려 십여 미터나 굴러간다.
“주먹은 이렇게 쓰는 거야.” 이한영은 작은 주먹을 후 하고 불며 빙그레 웃었다. 날씬한 그녀가 주먹을 쳐들고 멋을 주리니 정말 귀엽다.
“대단한 위력이구나.” 호랭이의 입에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체중이 적어도 200킬로그램은 됨직한 괴물이 속 빈 깡통처럼 굴러가다니. 병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랭이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저 야들야들한 주먹에 맞은 스크래그의 배가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푹 파였다. 그런데 그렇게 푹 꺼진 상처부위가 유난히 눈에 띄는 은색빛깔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땜질용 납을 한 바가지 퍼 부어 놓은 것처럼 번들거리는 피부.
한 방 크게 날리며 체내에 흡수했던 금속융합물을 놈의 내장 깊숙한 곳에 뿜어놓은 것이다. 그것이 스크래그를 몹시 괴롭게 만들었다. 스크래그는 바닥을 긁으며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댔다.
“흡수한 쇠를 다시 뿜어낼 수도 있었구나.”
그렇다면 단순히 파괴력만으로 그녀를 힘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맞는 순간 그녀의 권에서 그며 나온 금속이 뭉개진 피부 안으로 스며든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은색으로 물든 제 살을 손톱으로 북북 찢어내고 있는 스크래그를 보니 뒷골마저 으스스해진다.
이한영은 괴로워하는 고물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흥. 그게 그렇게 쉽게 제거될 것 같아? 참, 괴물 너, 재생능력이 엄청나다고 했지? 그럼 신진대사도 활발하겠구나. 혈액순환도 그렇겠고. 그렇다면 부룻ㄴ물이 혈관을 타고 지금쯤은 네 녀석 머리까지 올라갔겠는 걸? 머릿속의 혈관이 막히면 어떻게 될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금방 나타났다.
놈의 노란 눈동자가 벌겋게 충혈 되더니 쭉 벌려진 아가리에서 멀건 피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녀석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더니 천천히 뒤로 쓰러져 버린다.
“정답은 뇌내출혈. 아무리 재생능력이 좋다고 해도 혈관 속의 불순물은 쉽게 제거하지 못할 거야.” 경련을 일으키는 스크래그를 보며 조용히 뇌까리는 이한영. 그런 그녀를 보며 병규와 호랭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 무섭네요.” “그, 그렇구나.”
절대로 이한영과는 싸우지 말아야겠다고 둘은 생각했다.
“이제 한 녀석 남았군.” 스크래그 한 마리를 뇌사시킨 이한영. 그녀의 시선이 허공으로 옮겨졌다. 그곳엔 새인간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나타난 괴물은 모두 열 마리. 그중 스크래그가 일곱이었고, 나머지 셋은 새인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병규와 이한영에 의해 모조리 박살이 나고, 남은 것은 이제 새인간 한 마리뿐이었다.
“어? 저거 가라스텐구잖아.” 새인간을 유심히 살피던 이한영이 깜짝 놀라며 말한다.
"가라스텐구요?“
“그 왜 있잖아. 가끔 게임이나 만화에 보면 코가 긴 이상한 가면을 쓰고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나는 수도승 복장의 괴물 있잖아.”
“아! 본 것 같아요.”
“그래. 그걸 텐구라 그러는데, 텐구 중에서 저렇게 새 머리를 한 것을 가라스텐구라고 하거든.”
“흐음.” 고개를 끄덕이던 병규는 문득 왜 호랭이는 가라스텐구를 몰랐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신선이라면 당연히 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병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니 호랭이는 흥하고 콧바람 소리를 낸다.
“가라스텐구라면 물론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저렇게 생기지는 않았다. 전에 귀탄 때도 그랬지만 이 녀석들은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요괴들이 아니야. 아무래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합성생물 같다.” ‘키메라.’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괴물.
호랭이의 말을 들으며 병규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놀라운 기술로 하필이면 이렇게 추악한 마물들을 만든 것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어두운 마음.
“자, 빨리 처리하고 다음으로 가자. 여긴 냄새가 너무 지독해.” 이한영이 팔을 빙빙 돌리며 서둔다. 노린내와 피비린내로 가득한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가라스텐구는 위협을 느꼈는지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경계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적의는 여전했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끝내 도망가지 않고 공중을 유영하며 공격할 기회를 넘본다. 그러던 어느 순간 놈의 날개가 세차게 펄럭였다.
휘이이이.
약한 바람 소리. 그리고 뒤이어 찾아오는 날카로운 소음.
귓가를 진동하는 바라소리에 병규는 ‘앗’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이한영을 밀쳐내고 다시 자신도 재빨리 몸을 날렸다. 병규가 몸을 날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회오리바람이 누렇게 일어났다.
촤아악.
바닥에 차 있던 핏물이 회오리바람에 말리며 비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반사 신경이 탁월하게 빠른 병규는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얼떨결에 떠밀린 이한영은 주춤거리다 그만 상의가 왼쪽 어깨부분에서부터 길게 찢어지며 속옷이 살짝 노출되었다.
“이게?!” 약이 잔뜩 오른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스크래그의 끈적끈적한 살덩이를 집어 들고는 투포환 선수처럼 맹렬하게 던졌다.
터엉.
박격포의 탄환처럼 무섭게 날아간 살덩이는 가라스텐구의 배에 깊숙이 박혔다.
“쿠엑.” 작은 살덩이에 맞은 가라스텐구는 부리를 쩍 벌린 채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라스텐구가 떨어지자 즉각 병규가 달려들어 말끔히 뒤처리를 했다. 요수의 발톱 앞에선 가라스텐구의 두터운 가죽도 물 먹은 종이와 다를 바 없었다.
“병규야. 저걸 보라.” 호랭이가 턱짓하는 곳엔 이한영이 던진 살점이 뒹굴고 있다. 그런데 색깔이 조금 이상했다.
“은색?”
사람 머리통만 한 살덩이는 꼭 도색이라도 한 것처럼 은색으로 반질거렸다. 발로 밀어보니 묵직하다.
“누님. 이거 처음부터 이랬나요?” 병규가 문제의 살덩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이한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던질 때 금속을 좀 발랐거든. 아프라고 말야.” “참. 여러 가지로 활용하네요.” 지금까지 알게 된 그녀의 능력은 금속을 흡수하고 다시 뿜어낼 수 있다는 것. 단지 그것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런 단순한 능력으로 참 다양한 재주를 부린다.
“그래. 실제로 능력자의 힘은 수호신의 역량일 반이고 능력자의 자질과 활용능력이 나머지 절반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장소만 잘 맞는다면 설사 최하위 등급의 능력자라도 최고의 능력자를 이길 수도 있는 게야.”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그동안 얻은 능력을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사용하기만 했지. 제대로 갈고 닦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언제 날 잡아서 수련을 해야겠어.’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런 때를 대비해서 실력을 갈고 닦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었다.
“잡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이 녀석들이 재생 못하게 작업이나 하자.”
호랭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요수의 발톱을 길게 잡아 뽑으며 몸을 날렸다.
스크래그들의 재생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지만, 그것에도 한도가 있는 듯, 병규가 일일이 뛰어다니며 채 썰 듯 몸을 분해해 버리자 꿈틀꿈틀 엉기면서도 제대로 재생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가라스텐구는 재생 능력이 없었다.
“좋아. 이제 다 처리된 거지?”
이한영이 두 팔을 쭉 펼치며 기지개를 켠다.
질펀하게 늘어진 괴물들의 살점들과 바닥에 찰랑거리는 녹색 피. 그리고 코를 찌르는 지독한 악취.
푸른 물감을 덩어리째 흩뿌린 듯한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풍경 속에서도 그녀의 자태는 눈보라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환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너 아까 좀 다친 것 같던데. 괜찮니?”
이한영이 문득 생각난 듯 묻자 그제야 병규는 허리와 허벅지 부근을 다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몸을 살펴보니 북북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엔 별 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살갗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별달리 불편한 곳도 없다.
“옷만 찢어졌었나 봐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뒤에서 보니 꽤 다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잘됐구나.”
이한영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기뻐했다.
“그나저나 어디 좀 씻을 만한 곳이 없을까?”
이한영은 피 묻은 소매를 들어 보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털털한 성격임에도 꽤나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다. 본의 아니게 괴물의 피와 살점이 옷에 묻으니 영 찝찝한 모양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런 곳에 샤워실이 딸려 있을 리 없지.”
그녀가 난처한 표정이자 당황하던 병규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돌연 몸을 솟구치더니 요수의 발톱으로 천정을 쭉 그어버렸다.
쩌억.
두꺼운 콘크리트가 갈라지며 그 안에 있던 관마저 파열되었다. 스프링클러에 물을 공급하던 수도관이었다.
쏴아아아아.
갈라진 틈 사이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졸지에 물벼락을 맞게 된 이한영은 화들짝 놀랐다.
“아, 차가워. 이럴 거였으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물을 구한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병규는 이한영이 꾸지람에 괜히 무안해져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이그. 하여간.” 가볍게 병규의 머리를 통 때려준 그녀는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로 걸어 들어가 옷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이런. 다 젖어버렸네.” 잠시 후 나온 그녀는 살에 찰싹 달라붙은 하얀 블라우스를 들어 보이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속옷이 하얀 블라우스 안으로 살짝 내비치니 묘하게 색정적으로 보였다.
‘헛. 누님 몸매 정말 잘 빠졌는데?’
말라보이던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적당한 볼륨에 상당한 탄력을 과시했다. 병규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두근 거렸다.
“뭐하냐?”
호랭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병규에게 말을 걸었다.
“?” 침을 뚝뚝 흘리고 있던 병규는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의 멍한 눈을 본 호랭이가 짜증 어린 음성으로 재촉한다.
“구경만 하지 말고 웃옷 정도는 벗어줘야지.” “아!”
병규는 급히 윗도리를 벗어서 이한영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적당히 시선도 돌려주었다.
“녀석. 매너 좋은데?” 옷을 받아든 이한영이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헤헤헤.” 병규는 쑥스럽게 웃었다.
“에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긴다더니. 꼭 그 짝이네.” 병규의 행동을 쭉 올려다보던 호랭이가 한숨을 포옥 내쉰다. 어쩌다 이렇게 둔한 녀석과 함께 다니게 되었는지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하다.
“자, 그럼 다시 가볼까? 샤워는 일이 끝난 후 시원하게 해보자고.”
이한영은 상큼하게 웃으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