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16/102)

8. 아직도 바퀴벌레 타령이냐아아아!

  “정말 여기가 맞아?”

  바퀴벌레 왕자가 안내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병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물었다. 이한영 역시 그린 듯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번개모양으로 꼬부라진 바퀴벌레의 더듬이 안테나가 가리키는 방향은 다름 아닌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대단위 물류센터였기 때문이다.

  물류센터란 간단히 업체의 물건(상품)을 통합 관리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일시적으로 모인 물품들이 지역별 분류를 거쳐 같은 지역끼리 묶여져 한꺼번에 수송된다. 결국 운송비용을 줄이기 위한 임시 창고 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물류센터는 의류나 책 같은 특정한 물품을 다루는 곳도 있지만 간혹 수 개의 업체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대단위 센터도 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물류센터로 드나드는 거대한 트럭들과 개미떼처럼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들. 이러한 광경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놈들이 숨어 있다? 하. 믿을 수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녀석들에겐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있다고 했지 아마? 이렇게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그런 괴물을 숨기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족제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애초에 이런 돌연변이 바퀴벌레 따위의 말을 믿고 온 것이 잘못이다. 족제미가 빈정거리자 바퀴벌레 왕자는 당장 발끈하여 소리쳤다.

  “그럴 리 없다. 샤바. 내 백성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퀴니는 분명 여기 있다. 샤바샤바.”

  “백성이라니. 기껏 바퀴벌레 말이냐? 곤충에 불과한 녀석들이 어떻게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단 말야? 금발머리만 보고 아무렇게나 연락한 거겠지. 아니 금색을 구별해낼 수나 있는 거냐?”  “후워어어. 그건 우리 백성들에 대한 모독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샤바샤바.”

  흥분한 바퀴벌레 왕자의 더듬이가 쭉 하고 수직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흑갈색의 몸체에서 검은 기운이 물컹물컹 밀려나왔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녀석아.”

  주먹을 들어 바퀴벌레 왕자를 한 대 쥐어박으려던 병규는 문득 좀 전의 아픈 기억을 생각해 내고는 주위에 굴러다니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들어 버퀴벌레 왕자의 머리 위에 쿵 하고 떨어뜨렸다. 그런데 이 놈의 바퀴벌레 왕자, 몸뚱이는 납작한 것이 동작은 얼마나 잽싸고 빠른지 돌덩이가 떨어지는 잠깐 사이 샤샤샥 하더니 이미 저만치까지 도망간 것이 아닌가.

  “이 별은 비대신 돌이 떨어지네. 위험한 동네다.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각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내심 황당한 표정으로 바퀴벌레 왕자를 쳐다보고 있던 병규, 문득 묘하게 눈길을 끄는 찌그러진 물건을 발견했다.

  “뭐야? 너 자명종은 왜 끌고 다니는 거야?”

  병규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묻자 바퀴벌레 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태그 친구인데요. 샤바.”

  “......?”

  병규는 잠시 뜨악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사이 언덕 아래로 보이는 초대형 물류센터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이한영이 돌연 눈을 빛냈다.

  “그래.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등하불명(燈下不明). 촛불아래가 어둡다고 했어. 이렇게 유동인구가 많고 복잡한 곳이라 오히려 감시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도 몰라.”

  “네?”

  “생각해봐. 특재대와 경찰이 집중적으로 수색한 곳은 어디지?”

  “일본인이나 일본인 2t;가 경영하는 회사나 창고, 항만, 부두, 공항 근처의 폐 공장과 그밖에.......”

  “그래. 주민의 신고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인적이 드문 곳만을 수색했지.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특재대가 미처 손대지 못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뒤지고 다녔어. 그런데 한 곳, 특재대나 우리가 모두 건들지 않은 곳이 있어. 절대로 그곳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장소!”

  “설마. 그것이 무류센터?”

  “그래. 맞아. 바로 이런 곳이야.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물류센터 말고도 몇 군데가 더 있겠지만 이런 대단위 물류센터라면 충분히 녀석들이 숨어들 수 있어. 잘 봐. 저 뒤쪽의 창고들을. 이쪽의 활기찬 분위기와 달리 한적하잖아? 분명 오래된 물품들이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처치가 곤란해진 물품들이 가득 쌓여 있을 거야. 저런 곳이라면 충분히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고 숨어들 수 있겠지? 이것이야말로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라는 말을 제대로 활용한 거야.”

  “물류센터는 인구유동이 많은 지역이라 당연히 군경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겠군요.”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한영의 말에 동의했다. 생각해보니 충분히 일리 있는 설명이다.

  “좋아요. 들어가 보면 확실해지겠죠.”

  병규는 기지개를 하듯 몸을 쭉 폈다. 하루 종리 시달린 뼈마디가 뚜둑 비명을 지른다. 멍한 피로가 목뒤를 지그시 눌러왔지만 병규는 오히려 더 거칠게 몸을 풀었다.

  피로는 싫지만 적당한 긴장정도는 필요하다. 만약 정말로 녀석들이 저곳에 있다면 한바탕 난리굿을 피할 수 없을 터. 피로로 늘어진 전신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겨놓을 필요가 있다.

  “무슨 몸을 그렇게 요란하게 풀어?”

  웃음기 어린 음성과 함께 늘씬한 그림자 하나가 그의 옆에 늘어섰다. 이한영이었다.

  “누님.”

  병규가 놀란 목소리로 부르자 그녀는 한 손을 치켜들며 혀를 찼다.

  “쯧쯧.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이 누님을 버리고 혼자 갈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누님. 저기는.......”

  “아아. 됐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하지만 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은 거니? 쓸데없는 걱정이야. 기껏 정탐이나 하고 오는 일이 뭐가 위험하겠니. 좀 아니다 싶으면 발바닥에 땀나게 도망 오면 되는 거지. 그까짓 뗏놈들. 감히 이 누님 앞에서 까불면 한 손으로 콱 눌러줄 테니 걱정 마.”

  “누님.”

  감동한 병규가 눈물을 글썽이자 그녀가 장난스레 손바닥으로 얼굴을 쭉 훑어준다.

  “아서라, 사내자식이 그런 표정 짓는 거 별로 안 멋있다. 자식!”

  “하하.”

  “좋아, 준비 다 됐지? 그럼 가볼까?”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이한영이 말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병규는 문뜩 떠오르는 게 있어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말한 뒤 한적한 곳으로 달려갔다.

 “볼일이 있다더니 소변이었냐? 아님 큰 거?”

 어깨 위의 호랭이가 볼멘소리로 궁시렁거렸다. 씩 하고 웃은 병규는 호랭이를 두 손으로 받쳐 올리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같이 가실 거죠?”

 “쳇. 언제 그런 걸 물어보긴 했냐?”

 호랭이가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이 귀여운 털 복숭이 안에 숨겨진 그 근엄한 존재(!)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부비고 싶은 욕구가 불끈 솟을 정도다.

 하지만 병규는 간신히 울컥 치솟으려는 웃음을 참았다. 지금은 호랭이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흠뻑 빠질 때가 아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사지로 함께 갈 것을 부탁하는 어려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호랭이와 함께 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제 고작 넉 달 남짓? 하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호랭이를 빼놓은 일상을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어때 위에 늘어져 있는 호랭이가 없으면 허전한 건 둘째치고 옷을 안 입은 것처럼 쌀쌀함까지 느껴진다.

 가부를 물어보는 병규의 간절한 표정. 둥그런 눈으로 마주보던 호랭이가 씩 웃으며 말한다.

 “훗, 처량한 표정하곤. 누가 안 간다고 했냐? 너에게도 그렇지만 나도 퀴니를 훔쳐간 괘씸한 녀석들을 절대로 용서 못한다.”

 “호랭이.”

 병규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데 호랭이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걱정 마. 여태하던 대로 네 녀석의 눈이 되어주마. 대신.......”

 “대신?”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던 돌연 고개를 거만하게 뒤로 훌쩍 재끼며 말했다.

 “담배량을 늘렸다. 하루에 다섯 갑!”

 “......!”

 여담이지만 공손하게 호랭이를 받쳐 들고 있던 병규의 두 손이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호랭이의 목을 인정사정 없이 졸라버렸다고 한다.

  한편, 그렇게 병규와 호랭이가 훈훈한 정(?)을 나누고 있을 때, 풀숲 으슥한 곳에서 음침한 존재가 두 눈을 번뜩이며 질투의 불길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후오오오! 멍멍이.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군. 샤바샤바.”

  “변비냐? 꽤 오래 걸렸다?”

 숲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병규를 보며 이한영은 시계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호랭이의 황당한 요구에 힘이 쭉 빠져있던 병규는 어색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좋아. 이제 동생의 몸도 가벼워진 것 같으니 가 볼까?”

 힘차게 외친 그녀를 한 마리의 제비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언덕을 뛰어내렸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병규가 그 뒤를 따라 땅위를 스치듯 따라갔다. 둘의 움직임은 가히 인간의 한계를 넘어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앗! 같이 가요. 주인님. 샤바.”

 으슥한 곳에 숨어서 사태의 추이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던 바퀴벌레 왕자가 돌연히 뛰어나간 둘을 쫓아 파드드드 하는 요란한 날개 소리를 토해 내며 하늘을 날아올랐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그저 선선할 뿐인 바람이었지만 언덕 위에서 둘을 전송해야 했던 사내들에겐 살을 에는 북풍한설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서러운 바람이었다.

 그들은 외치고 싶었다. 누님을 따라가고 싶다고.

 골백번이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목숨이 다해 누님을 지키겠노라고.

 하지만 누님이 차분한 눈길로 돌아봤을 때, 그들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호수처럼 그윽한 누님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안다. 걱정 마. 너희들의 마음만은 내 가슴속에 담아가지고 가마.’

  가슴이 찡하게 아파왔다. 울컥하고 솟은 눈물이 뜨거운 사내들의 볼을 적셨다.

  아픈 가슴을 억지로 누를 그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 누님을 향해 두 손을 불끈 들어올렸다.

  ‘누님. 잘 다녀오십시오. 여기서 누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하는 바람을 가득 담아.

  “그런데 말야.”

  병규와 보조를 맞춰 달리던 이한영이 뒤를 흘끔 돌아보며 살짝 인상을 쓴다.

   “왜요?”

  “저 녀석들 말야. 내가 간다는데, 예의상이라도 같이 따라가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녀석들 그렇게 눈치까지 주는데도 끝까지 모르는 척하다니. 아쭈굴. 이젠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드네. 후우. 안 되겠어. 돌아가면 한 바탕 푸닥거리 좀 해야지.”

  “하, 하하. 그, 그런가요?”

  병규는 생각했다. 알다가도 모를 누님이라고.

  둘은 처음부터 한적한 창고 주변부터 뒤졌다. 아무리 허허실실의 묘를 살려 번잡한 곳에 숨어든 적이라 해도 절대로 사람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할 괴물들을 데리고 있는 이상 불필요하게 번잡한 곳은 피할 터.

  그런 생각에 이한영은 창고들 중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으로 향했고, 병규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비닐하우스처럼 길쭉하게 늘어진 창고들은 처음 시공 시부터 그다지 규칙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제멋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자연 이곳저곳을 뒤져야 할 두 사람으로선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일부 창고들은 셔터가 내려진 채 자물쇠로 잠겨져 있어 가뜩이나 바쁜 그들을 더욱 귀찮게 만들었다. 다행히 병규에겐 요수의 발톱이 있었고, 이한영은 수호신이 쇠를 흡수하는 불가사리인지라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창고의 내부는 칙칙한 어둠 속에 잠긴 채 독한 곰팡이 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특히나 보관된 물품이 곡류나 의류인 경우 그런 냄새가 훨씬 지독했다. 이한영은 아예 소매를 찢어 입을 가린 채 창고를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대여섯 곳을 뒤졌을 때, 셔터가 활짝 열려진 창고 앞을 지나게 되었다.

  ‘자주 사용하는 창고인가 보지?’

  병규는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이한영이 그를 잡았다. 이유를 물으려는 그의 입을 막은 그녀는 조용히 창고의 출입구 쪽을 눈짓해 보였다.

  발자국이 없다. 셔터가 오려진 곳 옆에 작게 나 있는 문 앞엔 진흙바닥임에도 별 다른 자국이 없다. 그리고 활짝 열려진 셔터. 그롯 역시 별 다른 흔적이 없었다. 물론 단단한 땅바닥이라면 사람의 발자국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 주변은 땅이 좀 무른 편이라 가볍게 내디딘 걸음에도 흔적이 쉽게 남는다.

  그런데 활짝 열려진 셔터 앞에는 말끔할 정도로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아니 흔적이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은 사람의 발자국이 아니라 거대한 트럭의 것으로 보이는 바퀴자국이었다는 게 문제다.

  ‘창고로 물품을 옮겨놓는 거라면 당연히 트럭이 들어갔겠지. 뭣 때문에 누님은 신경을 이렇게 곤두세우는 것일까?“

  병규는 숨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그녀의 지나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해하거나 말거나 살금살금 창고로 접근한 이한영은 활짝 열려진 셔터 안을 조심조심 살폈다.

 ‘역시.’

  생각대로다. 이 큰 창고가 거의 텅텅 비어 있다. 물론 어둠 속이라 창고의 저 끝까지 훤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는 범위, 창고의 중간 부분까지는 훤한 상태다.

  이건 확실하게 다른 창고들과 구별되는 차이점이다.

  다른 창고들은 각종 물품들이 셔터 앞까지 차곡차곡 배열되어 있는데 유독 이곳만 텅텅 비었다?

  수상하다. 아니 실재로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경우지만 여자의 직감이 바로 이곳이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한영은 병규의 손을 꼭 잡아 붙든 채 조심조심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의 트럭 바퀴자국을 따라 잠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돌연 활짝 열려져있던 셔터가 우렁찬 소음을 토하며 쿵하고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이한영은 당황하며 급히 자세를 낮췄다. 혹시나 있을 암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이번엔 팍! 팍! 하는 소음과 함께 조명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동자에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온 빛은 치명적이랄 수 있었다. 앞이 캄캄해지는 것은 둘째치고 눈 뿌리까지 쑤셔오는 그 통증이란. 이한영과 병규는 급히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시야 속으로 검은 얼룩이 져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호랭이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발. 발밑을 조심해!”

  창고의 무른 흙바닥 위로 솟아오른 아홉 개의 칼이 피를 본 상어처럼 두 사람을 향해 주르르 모여들었다.

  “읏.”

  병규는 앞에 보이지 않는 중에도 급히 이한영을 안아들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쉬이이잉.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꺄악. 뭐야!”

  돌연한 사태에 이한영은 병규의 목을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평소엔 거칠 것 없는 누님의 풍모지만 지금만은 여린 여자의 모습이다. 찰랑찰랑 귓가를 간질이는 그녀의 머리카락. 병규는 급한 와중에도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창고의 높이는 약 3미터 정도. 물론 병규의 점프력은 그것을 훨씬 상회했다. 적당히 힘을 쏟긴 했지만 금방 천정까지 닿았다. 미리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던 병규는 딱딱한 천정이 닿다 쭉하고 한번 훑었다.

  딱딱한 쇳덩이가 잡혔다.

  창고 건물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H 빔(건축물 공사 시에 사용하는 H 모야의 거대한 철골)이었다. H 빔을 단단히 붙든 병규는 이한영을 꼭 안은 채 아래로 떨어지려는 두 사람분의 관성에 대항했다.

  “끅.”

  어깨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병규는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두 사람 분의 체중을 한 손으로 버티다니. 예전 같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카카카캉.

  찢어지는 쇳소리가 발 아래에서 들려왔다. 멍울진 시야 속으로 번쩍번쩍 터져 나가는 불꽃들. 둥글게 오므려오던 아홉 자루의 칼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불똥이었다.

  아직 눈이 밝은 환경에 적응이 안 되었다. 여전히 앞이 어둡다. 병규는 시야를 되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뭐야. 칼 때문이었어? 괜히 놀랐잖아.

  그보다 시력이 돌아온 이한영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린다.

  병규는 괜히 머쓱하게 웃었다. 호랭이의 경고에 다급하게 띄어 오르다보니 미처 그녀의 능력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불가사리.

  쇠를 흡수하는 수호신. 쇠로 만들어진 칼은 그녀 앞에선 그저 흡수의 대상밖에 되지 못한다.

  “너 여길 한 번에 띄어오른 거야? 대단한데. 혹시 수호신이 개구리냐?”

  “하하. 글쎄요.”

  병규는 멋쩍게 웃었다.

  ‘그나저나 여길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려가자니 예전에 상대했던 이상한 닌자 녀석들과 한바탕 해야 할 것 같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여기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마디로 표현하면 진퇴양란의 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쯤 되었으면 누군가 나타날 때도 된 것 같은데.’

  전의 경험으로 볼 때, 닌자들은 하수인들에 불과했다. 분명 이들을 이끌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창고 저쪽에서 느긋한 걸음걸이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난 아미키리. 네가 바로 바퀴벌레를 부린다는 그 바퀴벌레술사냐?”

  키득거리며 나타난 새로운 능력자, 아미키리를 보고 병규는 세 번 놀라야 했다.

  일단 이 녀석은 일본인인데도 한국말이 상당히 능하다. 얼굴만 좀 평범하게 생겼으면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리고 두 번째 놀란 것은 일본 사람이라고 다 잘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녀석은 정말로 헐벗었다. 어디서 저렇게 다 떨어진 옷을 구해다 입은 것인지, 온 사방이 알록달록한 치장이다. 조선시대 거지도 저것보다는 통일감 있고 센스 있는 옷을 입었으리라.

  또 머리는 얼마나 별나게 염색을 했는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특이한 잔디처럼 조일 지경이다. 분명 물감 통을 뒤집어쓴 것일게다.

  그는 비단 헐벗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굶주리기까지 한 모양이다. 지나치게 다이어트가 괸 것처럼 해쓱한 얼굴에 퀭한 눈을 보니 괜히 불쌍해진다.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는 측은한 마음이 들다 못해 동전이라도 하나 던져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앞서의 두 가지 놀람은 마지막 세 번째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 바퀴벌레술사?!”

  병규는 탱크 사냥용 90미리 무반동총에 직격으로 맞은 것처럼 심하게 몸을 휘청거렸다.

  맙소사.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란 말인가.

  내가 그 징글징글한 놈을 얼마나 싫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데. 그 밉살맞은 녀석을 제거하려고 그동안 퍼부은 노력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건만. 뭐라고? 바퀴벌레술사?

  병규의 눈자위가 심하게 실룩거렸다. 눈이 뒤집히기 직전의 전조증상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아미키리는 건방진 자세로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오가마가 바퀴벌레에게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웃음밖에 안 나왔다. 평소에도 덩치만 큰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그 정도로 형편없을 줄이야. 흥, 그런데도 오로치는 나보다 녀석을 신뢰하다니. 바퀴벌레 따위에게 깨지는 멍청한 놈을 말이야. 크큭. 그런데 넌 어쩌다 바퀴벌레 같은 걸 수호신으로 두게 되었냐? 바퀴벌레 수호신이라니. 크크큭. 뒤집어지게 웃기는 소리군. 어디 가서 나 능력자요라고 자랑도 못하겠구나. 수호신이 뭐냐고 물으면 바퀴벌레라고 대답해야 하니 말이다. 크크큭. 아. 걱정 마. 앞으론 그런 쪽팔리는 상황 따윈 다신 걱정 않게 될 테니까. 네 불쌍한 운명은 오늘 내가 확실히 정리해 주지. 이 면도칼 같은 아미키리의 갈퀴로 말이야.”

  쉴새없이 말을 쏟다내던 오가마는 문득 얼굴위로 그늘이 졌다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병규였다. 그가 벌겋게 충혈 된 눈동자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헉!”

  기절할 것처럼 놀란 아미키리. 순간, 그는 눈앞에서 박력 넘치는 표정으로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병규를 보며 갖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맙소사. 좀 전까지 천장에 매달려 있던 놈이 어느새 코앞까지 들이닥친 거지? 아니 아무리 중얼중얼 수다를 떨고 있었다고 해도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저 멍청한 풍가 녀석들은 또 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거냐!“

  사실 정확히 말해서 풍가 닌자들이 멍청해서 병규의 움직임에 반응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병규의 몸놀림이 너무 빨라서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천정에 매달려 있던 병규가 이한영을 안은 채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시 한 번의 도약만으로 아미키리의 눈앞까지 달려간 것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눈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앞나에 불과했다. 병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은신해 있던 곳에서 풍가 닌자들이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엔 이미 병규가 아미키리의 코앞에서 거친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 이 녀석. 감히 누굴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냐!”

  당황하던 아미키리는 대뜸 괴성을 지르며 갈퀴 같은 손으로 병규의 어깨를 잡아챘다. 면도칼처럼 날카롭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 당장 어깨 부분의 옷이 부욱 찢어졌다. 그러나 미처 옷 속에 숨은 살을 뜯어 발기기도 전 분노한 병규의 오른 손이 그의 목을 꽉 틀어쥐었다.

  “켁켁. 이 바, 바퀴벌레 자식이!”

  병규에게 덜렁 들려져 올라간 아미키리는 혀를 베어 물면서도 반항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바퀴벌레라는 말을 주절거리다니.

  “이 녀석이 죽으려고 아주 용을 쓰는구나!”

  성난 외침과 함께 아미키리는 곧장 지옥행 청룡열차처럼 땅바닥으로 철퍼덕 내팽개쳐 졌다. 등짝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아미키리가 켁켁 하고 가뿐 기침을 내뱉는데 살짝 눈이 뒤집힌 병규가 신혼초야 치루는 새신랑처럼 그의 배 위로 휙 올라가며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린다.

 퍽퍽!

 “누가”

 퍽퍽퍽!

 “바퀴벌레야.”

 퍽퍽퍽퍽!

 “어떤 놈이야!”

 퍽퍽퍽퍽퍽!

 “어떤 놈이 바퀴벌레술사라는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했어! 앙? 빨리 불어. 당장 불으라고!!”

 퍽퍽퍽퍽퍽퍽!

 “켁켁켁켁켁켁.”

 병규는 죽어라고 주먹을 날리면서 독촉을 했지만 아미키리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거친 숨소리와 켁켁켁거리는 비명이 전부였다.

 자고로 매질을 하면서 질문을 던질 땐 상대방에게 대답할 틈을 줘야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고 병규처럼 인정사정 없이 패는 경우, 그것도 얼굴만 집중적으로 묵사발을 내는 경우엔 절대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왜? 아니 입이 온전해야 대답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이대로 있다간 견적이 말도 못하게 나올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낀 아미키리. 그는 두 손으로 병규의 팔뚝을 움켜잡으며 마지막 발버둥을 시도했다.

 서거걱.

 아미키리의 갈퀴 같은 손가락에 스친 살이 예리하게 찢겨져 나가며 붉은 핏물이 송알송알 맺힌다.

 “이건 또 뭐야!”

 피를 본 병규는 분노하다 못해 아예 폭주하기 시작했다. 성난 병규가 두 손을 좌우로 쫙 펼쳐내며 힘을 쏟자 손가락 끝에서 무려 한 자 크기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솟아났다.

 요수의 발톱이었다.

 요수의 발톱에서 풍겨오는 가공할 기운과 예리한 기세에 아미키리는 얼굴가죽이 찢어져라 입을 떡 벌렸다. 병규의 손에서 나온 요수의 발톱에 비하면 그의 수호신, 아미키리의 갈퀴는 초등학생의 필수품. 문구용 도루코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바, 바퀴벌레라매!!”

 그는 병규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누군가를 향해 원망어린 비명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바퀴벌레를 입에 담은 죄로 정신이 나갈 정도로 무진장 두들겨 맞아야 했다.

 “아직도 바퀴벌레 타령이냐아아아!!”

 성난 병규의 고함. 그리고 이어지는 속 시원한 소음.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그렇게 그 날의 길고긴 싸움은 화끈한 주먹질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병규가 괴성을 지르며 마음껏 날뛰고 있을 때, 아미키리의 수하인 풍가 닌자들은 결코 넋 놓고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다. 그들은 처음 병규의 무식한 주먹질이 시작되자마자 바람을 타고 아홉 마리의 매처럼 그의 등을 노렸다. 그 비쾌하고 날렵한 움직임이란 사람이 아니라 아홉 마리의 제비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딜.”

 병규의 우악스런 주먹질을 감상하며 그의 영입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던 이한영은 풍가 닌자들이 움직이자말자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피리릿.

 이한영이 멋들어진 맵시를 뽐내며 앞을 가로막자 흑의인들은 다짜고짜 표창부터 던졌다.

 별 모양의 날카로운 수리표들이 불꽃놀이의 요란한 섬광처럼 날아들자 이한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춤을 추듯 표창들을 하나하나 쳐냈다. 바람의 능력을 이용한 잔재주는 그녀의 예리한 눈썰미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디를 어떻게 휘어져 들어와도 그녀는 가볍게 막아내는 것이었다.

 치킹. 치기깅.

 표창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풍가 닌자들은 즉시 등 뒤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날이 시퍼렇게 갈린 일본도였다.

 휘리릭.

 칼 빛이 눈을 찔러옴과 동시에 어지럽게 어울리던 두 개의 칼날이 이한영의 목과 아랫배를 노렸다. 위급천만의 상황. 그녀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빙글 돌아서며 등을 보였다. 칼은 어김없이 그녀의 등을 파고들었다.

 치킹. 킹.

 날카로운 소음. 그리고 손아귀로 전해져오는 묵직한 통장. 맨살을 내리쳤는데 이 묵직한 소음은 대체 뭐고, 강철을 내리친 듯 손아귀가 저려오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급히 칼을 회수한 그들은 형편없이 망가진 도신에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라야 했다.

 매끈하게 뻗은 도신이 무려 절반 가까이나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송충이가 나뭇잎을 갉아먹듯 무언가가 칼을 잘근잘근 씹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피를 내 쏟으며 죽어야 옳을 그녀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서자 그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래뵈도 꽤 유능한 능력자라고. 그런 쇠뭉치는 내겐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그녀의 얼굴에 사르르 지어지는 야릇한 웃음. 그 매력적인 미소에 닌자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뭔가 거대한 벽을 마주한 절망적인 느낌이랄까. 순간이지만 그들은 그런 암담함을 그녀에게서 느꼈다.

 그러나 충격의 여파로 몸이 굳은 것은 그야말로 잠깐에 불과했다. 시선을 교환한 아홉의 풍가 닌자들은 마치 사전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몸을 날려 왔다.

 제일 처음 그녀를 휩쓸어 온 것은 한 무더기의 표창이었다.

 피리리릭.

 휘파람 소리와 같은 소음을 등에 업고 신나게 날아든 표창. 그런데 표창들이 노리는 표적이 이상했다. 처음엔 이한영을 노리는 듯싶더니 별안간 방향을 휙 틀며 아미키리를 후려치고 있는 병규의 등짝을 후벼파려 드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짧은 경호성을 발한 이한영은 긴 머리카락을 파도처럼 출렁이며 두 손을 쭉 내밀었다.

 “흡!”

 먼지가 진공청소기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쇳가루가 자석을 향해 주르르 딸려가는 모습은?

 지금의 광경이 바로 그랬다. 그녀가 두 손을 내밀자 미친 듯이 질주하던 표창들이 빨려들듯 그녀의 두 손안으로 모여다는 것이었다.

 “이런 장난감 따윈 나한테 전혀 소용없다고 이미 말했을 텐데.”

 싸늘하게 소리친 이한영은 작은 공만 한 크기로 모인 표창뭉치를 두 손으로 압축했다. 딱딱한 쇳조각들이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찰흙처럼 흐믈흐믈 뭉개지더니 끝내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손을 갈무리하자 표창에 달려있던 작은 수실들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분히 경고성 짙은 실력 과시.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서늘한 킬 빛이었다.

 붕.

 세 녀석이 동료의 머리를 타 넘어오더니 별안간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칼을 날려 왔다.

 “소용없다니까!”

 날카롭게 외친 이한영은 거미줄을 걷듯 한 손을 휙 휘저었다. 확실히 그녀는 쇠를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손짓에 닌자들의 칼들이 주루룩 딸려 들어왔다. 그 인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극도의 수련을 거친 닌자들조차 한순간에 칼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닌자들이 노렸던 것은 그녀가 칼을 빼앗아 간 직후에 생기는 빈틈!

 이한영에게 칼을 뺏기자마자 닌자들은 현란하게 공중제비를 돌며 포위하듯 그녀의 주위로 날아 내렸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그녀를 향해 인정사정 없이 주먹과 발을 뿌렸다. 무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맨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물론 그들은 엄격한 수련을 거친 자들이니 만큼 맨손과 발이라도 결코 진검에 뒤지지 않는 위력을 품고 있었다.

 카가가.

 “크윽.”

 “큭!”

 뼈가 부서지는 듯한 파음과 함께 진득한 신음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신음을 흘린 주체는 허무하게 두드려 맞은 이한영이 아니라 거칠게 공격을 퍼부은 세 명의 닌자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여린 몸을 후려갈긴 그들의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것이었다.

 이한영의 능력은 단순히 쇠를 흡수하는 것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흡수한 쇠로 신체의 일부분, 혹은 전부를 금속질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무쇠보다 단단해진 그녀의 몸뚱이에 신나게 주먹질 발길질을 해댔으니 뼈가 부러지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을 공격한 닌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한영. 그런데 그녀의 말끔한 얼굴이 어찌된 이유에선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너희들.......”

 표정뿐만이 아니다. 말투에서조차 묘한 굴곡이 풍긴다.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훈계조로 고함을 지른 그녀. 말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던지 팔다리를 감싸 쥔 채 땅을 기고 있는 닌자들을 한 번씩 뻥뻥 걷어찼다.

 퍼엉.

 가볍게 찬 듯한데 북 터지는 듯한 폭음이 울린다.

 예전에 장난 삼아 가볍게 콩하고 내려친 주먹에 병규는 한참이나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다. 그 정도로 그녀의 파워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약간의 원한을 담아서 후려쳤다. 당연히 간단히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정도로 끝날 턱이 없었다.

 그녀의 발길질에 얻어맞고 솜방망이처럼 붕 하고 떠오른 닌자들은 그대로 멀쩡한 동료들을 볼링 핀 쓰러트리듯 뭉개며 저만치 굴러가 버렸다. 하나에 정확히 두 명씩. 그렇게 세 명을 날려 여섯을 치워버리자 이제 더 이상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닌자는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흥. 여자를 홀대한 벌이다.”

 코웃음을 치며 그녀는 두 손을 탁탁 털었다. 마치 지저분한 쓰레기를 치워버린 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그새 병규도 아미키리인지 쓰미키리인지하는 녀석을 아예 묵사발을 내놨다.

 “저런 아주 떡을 쳤네. 떡을 쳤어. 쯧쯧.”

 뭐가 그리 안타까운지 이한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혀를 찼다.

 대충 상황은 정리되었다. 장내엔 그들 말고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주 상태인 병규도 이한영이 머리를 통하고 가볍게 때려주니 곧 정신을 찾았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병규는 발아래 축 늘어진 아미키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옴마야. 누가 공업용 폐기물을 여기에다 버렸냐?”

 “이그. 녀석아. 어디다 정신을 팔았기에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냐.”

 병규의 머리를 다시 한 번 가볍게 통 때려준 그녀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네. 이 녀석들이 튀어나온 걸 보면 분명 놈들의 아지트가 여기 있을 텐데.......”

 창고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이곳에 어딘가로 통하는 비밀 문 같은 게 있다는 소리가 되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눈 비비고 찾아봐도 비밀 문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코를 킁킁거리던 호랭이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병규야. 수상한 냄새가 난다.”

 호랭이가 이끄는 대로 창고 한쪽 끝으로 걸어간 병규.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곳 역시 훤한 빈공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호랭이는 고개를 아래로 쭉 내려보았다.

 “아래쪽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나오고 있다.”

 “아래요?”

 병규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발아래 땅바닥도 별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른 곳과 똑같이 축축한 모래가 고르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시험 삼아 발을 몇 번 구르자 깡깡 거리는 괴이한 소음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즉시 바닥의 모래를 헤치자 두꺼운 철판이 드러났다. 그제야 면밀히 살피니 사방 2미터 정도 아주 가는 선이 보인다. 세밀히 살피지 않으면 절대로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흔적이었다.

 “여기다.”

 확신이 든 병규는 즉시 요수의 발톱을 빼냈다.

 “잠깐. 넌 너무 소란스러워.”

 그를 말린 이한영은 조용히 철판위로 손을 가져갔다.

 츠즈즈즈.

 들릴 듯 말 듯한 가느다란 소음과 함께 두꺼운 철판이 파도처럼 움직이더니 그녀의 손바닥으로 녹듯이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철판이 흡수된 자리엔 어두운 구멍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본 병규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사다리에 매달리려는 그를 이한영이 말렸다.

 “잠깐. 냉정하게 생각해 봐,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을. 처음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찰이었어. 놈들이 정말로 이곳에 있는 지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그 목적은 필요이상으로 달성했잖니. 입구로 보이는 홀도 발견했고, 잔챙이 놈들과 한바탕 하기까지 했으니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을 거야. 전략적으로 볼 때, 지금은 돌질할 때가 아니라 잠시 물러나 전력을 정비해야 할 시기야. 아마 지금쯤 족제비가 연락을 했을 테니 곧 특재대의 요원들도 이곳으로 달려올 거야.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들어가야 할까? 지금은 냉정을 찾아야 할 때야.”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병규를 설득했다.

 잠시 생각해보던 병규는 그녀의 향해 미소를 보였다. 어쩐지 사내다운 멋이 풍기는 그런 웃음이었다.

 “누님의 말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 가슴이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해서 그런지 몰라도 전 머리보다 제 가슴의 열정을 믿습니다.”

 “그러면 안 돼. 사람이 큰일을 앞두고 일단 냉정해져야지.”

 “누님.”

 병규가 그녀를 불렀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님은 특재대를 기다려 주세요. 누군가 한 명은 그들을 이곳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그 일을 누님이 해 주세요. 전 조금만. 조금만 더 가보겠습니다.”

 그는 이한영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런 성급한 녀석.”

 이한영은 인상을 잔뜩 썼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왜 일까. 머리로는 분명 지금은 물러날 때라는 결론을 내놓았는데.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가슴이 뜨겁다.

 ‘묘하게 사람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녀석일세.’

 피식하고 웃은 그녀는 병규를 따라 홀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무 늦는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있던 족제비가 초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누님과 병규가 창고에 들어간 시간이 5분이 넘어섰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확신이 생긴 그는 재빨리 핸드폰을 열었다. 사전에 이한영이 지시해둔 것이 있었다.

 한 창고 당 길게 잡아 5분. 만약 이 시간을 넘기면 병규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신호가 두 번쯤 울렸을 때, 수화기에서 맑은 음성이 들렸다.

 “네. 본부장 자영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여자의 음성이라 족제비는 잠시 당황했다.

 “저 혹시 병규라는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네. 저희 대원입니다만. 누구시죠?”

 잘못 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족제비는 빠르고 정확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전 병규를 대신해서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곳에 적이 있는 것이 확실한 듯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시바삐 와 주십시오.”

 “네. 곧 바로 갈게요.”

 족제비는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통화하는 여성이 마치 맘만 먹으면 금방 올 것처럼 얘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실례지만 지금 어디십니까?”

 “바로 당신 위에 있어요.”

 “위?”

 무심결에 고개를 위로 올린 족제비는 그만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두둥실 보름달이 떠오른 상공, 자그마치 열 두 대의 헬기가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난 수십 대의 특수차량들이 소리도 없이 몰려와 물샐틈 물류센터 주위를 감쌌다.

 족제비들이 놀라는 사이 공터에 착륙한 헬기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내렸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눈에 확 띄는 금빛 머리카락을 찰랑이고 있었다.

 그녀가 차분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여고생에서 곰을 연상케 하는 거한까지 이십여 명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헬기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사람들.’

 그들을 본 족제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으로 먹고사는 그들에게 가장 우선되는 것은 상대의 기세를 파악하는 눈썰미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감히 눈을 마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꽤 장신에 속하는 그가 위를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큰 거한은 물론이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호리호리한 아가씨조차 태산과 같은 막대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연락해 주신 분이시죠?”

 금발머리의 아가씨가 말을 걸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말을 하며 자영이 살포시 웃었다. 그저 가벼운 미소에 불과했지만 족제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진정 황홀한 미소다. 그녀의 전신에서 풀풀 풍겨 나오는 신비함에 영혼이 쫙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족제비는 그대로 머릿속이 멍해져 버렸다. 그리고 주절주절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족제비의 설명을 들은 자영은 이곳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즉각 작전수행을 위한 지시를 내렸다.

 일단은 피해 범위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선결과제.

 능력자들끼리의 다툼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 여파가 일반시민에게 미치지 않도록 이 지역을 공동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 작업은 경찰의 힘을 빌려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물류센터에 따로 연락을 넣은 듯 작업 중이던 인부들도 조용히 현장을 떠났다. 채 10분도 되기 전에 물류센터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물류센터의 공동화 다음으로 자영이 지시한 것은 군부대에서 파견된 저격수로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펼치는 것이었다.

 능력자들의 능력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지만 그 놀라운 힘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M 급 능력자라 하여 진짜로 무한정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수호신에게서 능력을 빌어다 쓰는 것이기 때문에 능력의 한계가 있다.

 자영은 그 점에 착안하여 특수부대에서 차출한 저격수들을 화물창고에서 최대한 멀찍이 배치하였다. 스나이퍼들에게 그녀가 내린 주문은 오직 하나, 허가 없이 목표지점을 벗어나려는 표적에 대한 경고 및 공격. 이것뿐이었다.

 처음부터 본격적인 싸움은 능력자들간의 대결로 정해져 있었다.

 저격수들을 배치한 자영은 특재대의 대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보았다.

 “여러분.”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저곳에 어떠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또 어떤 능력자가 어느 구석에서 칼을 갈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극단적으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라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도 전 여러분을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내야 합니다.”

 대원들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단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본부장을 응시할 뿐이다.

 “하지만.”

 말없이 그들의 무거운 시선을 받아내던 자영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전 여러분을 믿어요. 그깟 일본의 능력자쯤은 결코 여러분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전 확신합니다.”

 “하하하. 이제야 대장이 바른 소릴 하는군.”

 “그럼. 쪽바리쯤이야 전혀 문제없지.”

 “놈들. 감히 남의 땅에 와서 귀여운 공주님을 납치해 가다니. 뼈 한두 군데 부러뜨리는 것 정도로는 절대로 못 봐주지.”

 “멋있어요. 대장님.”

 대원들은 일제히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자영이 이런 말을 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대응이었다.

 자영은 대원들의 활기찬 호응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여러분. 그럼. 가시죠.”

 그녀의 작지만 힘찬 목소리에 모두는 절도 있는 거수경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미 어둠이 사위를 뒤덮은 시각. 드디어 특재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족제비가 가리킨 창고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특재대원들의 제일 후미. 두 명의 사내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남들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는데도 두 사람은 산책 나온 사람들처럼 느긋하기만 했다. 그러던 그들은 끝내 중도에 진로마저 엉뚱한 곳으로 바꿨다.

 병규와 이한영이 사라진 창고에서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텅 빈 창고 앞, 굳게 잠긴 자물쇠를 가볍게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퀴퀴한 공기를 흡입하며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미약한 달빛이 창고 안으로 새어 들어오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이는 것이 잡힌다. 길쭉하고 예리한 모양새.

 칼이다.

 언뜻 보이는 것만 십여 개.

 “케케. 역시 꿀꿀한 냄새가 나더라니.”

  독쟁이라 불리는 조준엽이 간사한 미소를 입기에 물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 김한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어르신.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대원들도 부를 것이지. 어째서.......”

  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특재대에서는 분명 준엽이 그를 선배라고 불렀는데, 단 둘이 남은 지금은 오히려 김한식이 준엽을 어르신리라 부르며 존칭하고 있는 것이다. 준엽 역시 그런 김한식을 하대하며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뭔가 둘 만의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준엽이 대답했다.

  “어허. 꼬맹이들을 부르면 괜히 번잡해지지 않느냐. 내 몫도 줄어들 테고.”

  “후. 나이가 몇이신데.”

  “녀석아. 나이가 많으니 가끔 이렇게 신선한 지극도 필요한 개야.”

  “몸도 불편하신 분이 그러시니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의료기술 참 많이 좋아졌습니다. 의수가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케케. 돈 좀 들였지. 옛날 땡중에게서 배운 법술도 도움이 좀 됐고. 그건 그렇고 저 녀석들 눈매가 보통 아니네. 넌 놈 푸는 게 싫은 모양인데 아예 내가 다 처리할까?”

  “엇.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딱 반으로 나누셔야죠.”

  김한식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준엽은 입가를 좌우로 쭉 늘이며 짧게 웃었다.

  “케케케. 결국 그럴 거면서. 일호. 이 녀석아. 넌 나한테 골백번 절을 해도 모자라. 이 몸이 준 선약 때문에 이런 즐거움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준엽은 게걸스런 웃음을 터트리며 기고만장해했다. 그 모습을 게슴츠레 바라보던 김한식이 툭하고 질문을 던진다.

  “참. 소도 녀석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중국에서 어르신을 찾는다며 방방 날뛰고 있다고 하던데.”

   “컥.”

  소도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웃어대던 준엽이 돌연 거북이처럼 고개를 움츠린다.

  “그, 그녀석이 왜 또 날 찾는데?”

  “언제 얼굴 한 번 보자고 하는 것 같던데요.”

  “속 좁은 녀석.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꽁해가지고선. 에잉. 어쩌다 내가 그런 녀석을 제자로 들였는지 원.”

  “글쎄요. 사실 순서를 따지자면 일의 발단은 어르신께서 소도와 사진이, 그리고 제게 이상한 약을 먹인 것 때문이죠. 덕분에 이렇게 죽지도 못하게 된 것이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고연 녀석. 저놈들이 꿈틀거리려는 것 같은데 넌 계속 수다만 떨 테냐?”

  “물론 아니죠.”

  김한식의 흉터 가득한 얼굴 위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웅.

  미약한 공기의 떨림. 그리고 달빛에 일렁이는 서늘한 칼 빛.

  김한식은 십여 개의 칼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빙글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대응은 그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슬쩍 흔들어 보인 것이 전부.

  그 작은 움직임에 돌연 폭풍 같은 기세가 일어나 창고 안으로 거칠게 후려갈겼다.

  퍼엉.

  “크윽.”

  “윽.”

  몇 차례 짧은 신음소리들이 들렸다. 암살자로서 투철한 교육을 받은 그들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튀어나오다니. 분명 엄청난 타격을 방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신음소리만 있을 뿐 땅바닥에 널브러지는 묵직한 소음은 잡히지 않는다.

  “몸은 제법 민첩하군. 그렇지만 아직 멀었어. 일본의 자객들은 검신에 먹을 발라놓는 것도 모르나?”

  “케케케.”

  범의 목울림과 같은 김한식의 조용한 음성, 준엽의 웃음소리. 그리고 창고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오는 듯한 느긋한 걸음소리. 그제야 어둠 속에 은신해 있던 자들은 알 게 되었다.

  사신이 방문했다는 것을.

  커다란 파이프 같은 둥근 통로.

  창고의 사다리 아래는 마치 영화에서 본 미국의 음침한 지하도를 연상케 하는 그런 폐쇄공간이었다. 통로 안은 위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천정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전등이 희미하게나마 통로를 밝히고 있었다.

  “일방통행이라. 이거 냄새가 좀 나네.”

  통로의 모양새를 본 이한영의 표정이 좋지 않다. 지루할 정도로 쭉 뻗은 좁은 통로. 들어가면 영영 나오지 못하는 쥐덫 같다. 이것이 만약 함정이라면 피하기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좋아. 내가 앞장서지.”

  이한영이 앞으로 나선다. 그녀는 쇠로 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이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나무말뚝 같은 고전적인 수단을 사용할 리 없으니 웬만한 함정은 그녀에게 무용지물이라고 봐야했다. 그러나 병규는 부득불 그녀를 자신의 뒤에 세웠다.

  “제가 앞장설 겁니다.”

  “뭐야? 너도 사내라고 존심을 내세우는 거야?“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원래 궂은일은 남자가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야 평소에 큰소리도 뻥뻥 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핑계를 댄 병규는 과감하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실없는 녀석.”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한영은 조용히 웃었다. 어쩐지 병규를 만나게 된 후부터 자주 웃게 되는 것 같다.

  “한 번 믿어줄까?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말야.”

  남자에게 선두를 내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녀석이라면 충분히 앞을 맡겨도 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타다다다다.

  무작정 앞으로 뛰어나간 병규. 그러나 사실 그는 그렇게 무대포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믿는 것이 있었다.

  “호랭이. 잘 부탁해요.”

  “헹. 아주 이젠 입에 붙었구나. 걸핏하면 부탁한다는 소릴하고.”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호랭이가 코웃음을 친다. 이 보송보송한 털복숭이 호랭이님은 보기보다 다용도이시다. 보통은 잔소리에 폭주하는 그를 정신 차리게 하는 역할을 하시지만 가끔씩 길찾기나 경보기 같은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해 내신다. 동체시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면 째깍째깍 알려주고, 후각은 또 얼마나 뛰어난지 수십 미터 전방의 쇠 냄새도 잡아낸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길들여진 청각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통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2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전면에 사람과 쇠 냄새.”

   차차창

  호랭이의 경고성이 터지자마자 둥근 통로의 전면에서 거대한 낫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나 병규는 속도를 줄이긴 커녕 오히려 둥근 통로의 벽면을 발로 타타탁 밟으며 빙글 한 바퀴 돌았다. 그의 손엔 어느새 요수의 발톱이 튀어나와 있었다.

 치키킹.

 쇳소리가 터지며 화려한 불꽃이 둥근 통로를 한 바퀴 휘돈다. 짜르르 터져 나간 불똥이 일순간 통로를 밝혔다. 둥근 벽면을 타고 병규가 한 바퀴 현란하게 휘돌고 다시 바닥으로 착 내려서자 통로를 가득 메우던 거대한 낫들이 벼이삭처럼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쩌저저정.

 요란한 굉음을 내며 바닥에 차곡차곡 쌓이는 쇠뭉치들을 보며 이한영은 혼이 빠진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매트릭스냐?”

 거대한 낫이 삐죽 튀어나오자마자 병규가 보인 반응은 가히 인간의 반사신경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꽤 많은 능력자를 알고 있고, 또 그녀자신도 그런 능력자 중의 하나지만 병규와 같은 운동능력은 생전 처음이었다.

 병규는 이한영의 물음에 대꾸는 않고 무서운 얼굴로 통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거기 숨어 있는 거 안다. 나와!”

 그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통로를 왕왕 울리지 낫이 튀어나온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흑의인 넷이 나타났다. 그들은 상체를 드러내자마자 대뜸 등 뒤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들은 낫이 잘려나간 것을 뻔히 봤으면서도 단 한 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섬뜩할 정도로 무심한 표정들.

 그들이 칼을 잡아가는 그 순간, 돌연 병규가 발끝을 튀기며 가볍게 도약했다. 그의 하체 근육은 고탄력 스프링과 같은 엄청난 탄성을 지닌 물건. 비록 발끝을 가볍게 찬 것이지만 그의 신형은 찰나의 순간, 이미 흑의인들의 머리 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퍽.

 한 녀석의 뒤통수에 병규의 발이 틀어박혔다. 목각인형처럼 쓰러지는 녀석을 훌쩍 밀어낸 병규는 그 반동으로 풍차처럼 회전하며 다음 두 녀석을 동시에 날려버렸다. 마지만 녀석이 움찔하며 칼을 뽑아들었을 때엔 이미 세 녀석이 피를 뿜으며 바닥으로 널브러진 후였다.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빠른 공격.

 그러나 동료들이 모두 쓰러졌음에도 최후의 흑의인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비정한 정도의 승부욕.

 휘익 하고 공기를 가르는 검술이 제법 예리하다. 그러나 병규에겐 아이들 젓가락놀음처럼 보였다.

 “장난 하냐?”

 요수의 발톱을 슬쩍 휘두르자 싸늘한 예기를 쏘아내던 칼이 마른 나무젓가락처럼 잘려나가 버린다. 흑의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놀란 흑의인이 주춤하는 사이 병규는 무릎을 접었다 피며 가볍게 몸을 날렸다.

 취악.

 하체에서 비롯된 압축된 탄성이 그를 로켓처럼 쏘아냈다.

 뻥.

 병규의 어깨가 흑의인의 배에 비스듬히 틀어박히자 호쾌한 파음이 터졌다. 시속 100킬로로 달려오는 덤프트럭과 정면 추돌한 충격!

 “꾸엑.”

 통로의 천정까지 솟구쳐 오른 흑의인은 뱃속의 오물을 게워내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허.”

 병규가 순식간에 흑의인 넷을 처치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한영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이건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지 않은가.

 병규가 뒤를 돌아보며 멋쩍게 웃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들어 보였다.

 “너. 최고다!”

 그 후로 통로를 뛰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총 네 번의 암습을 받았고, 그때마다 병규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버렸다. 얼마나 대응이 빠른지 이한영은 나설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다. 나중엔 아예 뭐가 튀어나오건 뛰던 걸음을 멈추지 않게 될 정도였다. 암습자들을 뭉개놓느라 잠시 뒤쳐진 병규는 채 열 걸음도 걷기 전에 다시 앞으로 나서곤 했다.

 모든 일을 병규가 다 처리하니 이한영은 기분이 조금 묘했다. 편한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철이 들 무렵부터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암흑가의 여두목으로 위상을 떨친 그녀로서는 병규의 모습이 그렇게 생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봄 햇살의 따스함 같다랄까.

 ‘참 믿음직한 녀석이라니까.’

 남자의 등이 이렇게 듬직해 보인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길고 어두운 통로를 십 분이나 달렸다. 이미 물류센터에서 한참이나 벗어났겠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마침내 그들은 통로의 끝을 보게 되었다.

 20평가량 될까?

 통로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꽤 넓직한 지하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한영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암습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다행이 지하도에서와 같은 돌연한 공격은 없었다. 대신 그녀의 귓가에 새로 들어온 것은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이었다.

 “냐. 생각보다 빨리 왔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지하실 저편,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본 병규는 대뜸 인상부터 찡그렸다.

 ‘젠장 . 저건 이미 화장이 아니잖아. 변장이야. 아니 변신인가?“

 대체 어떻게 화장을 하면 목이고 얼굴이고 저렇게 석고상처럼 하얗게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삽으로 퍼 올린 화장품을 부삽으로 낯짝에 고루 펴 바른다는 전설의 경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냐. 재미있는 남자네. 난 화차야. 네 이름은 뭐지?”

  입을 가린 채 쿡쿡대고 웃던 화차가 병규에게 물었다. 병규는 띠꺼운 표정으로 콧바람을 뿜었다.

  “헹. 변신 요외에게 알려주라고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네.”

  “냐. 가르쳐 줘.”

  “싫네요.”

  병규가 화차와 가벼운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이한영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묘한 느낌이다. 불안하거나 불길한 것과는 뭔가 달는.

  ‘저 여자. 뭔가 있군.’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때 병규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그녀에게서 전혀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는지 태연하기만 했다.

  “보아하니 당신도 그 수사노오인지 수상한 놈인지 하는 녀석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좋은 말할 때 우릴 그 작자에게 안내해 주쇼.”

  “냐. 싫다면?”

  화차의 눈이 반짝인다. 병규는 천연덕스럽게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여자를 때리는 건 취향이 아닌데.”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주먹을 들어 보이며 정말로 이걸 써야 할지 아니면 말로 잘 구슬려야 할지 고민한다. 그녀에게 당할 가능성 따위는 아예 염두에도 없는 모양이다.

  “쿡쿡. 냐. 잼있어. 너 웃기는 아이구나.”

  화차가 다시 입을 가리며 쿡쿡 웃는다. 그런데 얼굴 표정은 분명 짓궂은 웃음인데 그녀의 말투는 묘하게 살기가 감돈다. 이한영은 바짝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때였다.

  막 그들이 빠져나온 통로 저 깊숙한 곳에서 발소리가 울려왔다. 경쾌한 발소리는 빛살처럼 빨라서 처음 갘지했을 때만해도 아주 먼 곳에서 은은하게 들리던 것이 불과 몇 초 만에 쿵쿵하고 가까운 곳이 울려댄다. 소리만 두고 본다면 발소리의 주인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빠른 사람이 분명한 듯했다.

  ‘적? 아니면 아군?’

  이한영은 자세를 비스듬히 잡았다. 통로 쪽에서 튀어나오는 녀석이 적일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나타난 사람은 이운석, 특재대의 요원이었다.

  “엇? 네가 어떻게.”

  이운석을 본 병규는 반가움과 어리둥절함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하. 대장은 헬기에 탑승한 채 줄곧 네 전화를 추적하고 있었지. 그래서 일이 터지자마자 바로 도착할 수 있었던 거야. 지금 다들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내가 발이 좀 빨라서 제일 먼저 도착하긴 했지만.”

  웃음과 함께 간단한 설명을 마친 그는 입술 한쪽을 들어 보였다. 매끄러운 미소. 그러나 스산한 한기가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 또 만났군.”

  이운석의 말에 침중한 표정이던 화차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인다.

  “냐. 그러네. 그런데 하나가 안 보이는걸? 뚱뚱한 녀석은 잘 있어?”

  “다행히도. 아직 몸이 불편하긴 하지만 말이야.”

  “냐. 그거 유감인걸. 그때 확실히 죽인 줄 알았는데.”

  둘의 대화를 들은 병규는 문득 화차에 대해 짚이는 것이 있었다. 퀴니가 납치되던 날, 호위를 서고 있던 이운석과 홍대일이 누군가에게 당한 채로 구급차에 실려 있었다. 이제 보니 그때의 적이 바로 눈앞의 여인, 화차였던 모양이다.

  “유감이라.......”

  화차의 말을 곱씹어 보던 이운석은 돌연 병규의 뒤에 묵묵히 서있는 이한영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족쇄 좀 풀어줘.”

  그의 말에 병규의 눈이 둥글게 떠졌다. 누나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한영의 태도였다.

  “에? 설마 너 여길 아예 통째로 날려버릴 생각인 거냐?”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일그러트리며 이한영이 대답했다. 자연스러운 태도. 그의 돌연한 질문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모습이다.

  “그건 아니고. 빚짖 게 좀 있어.”

  “헤에. 당했냐? 꽤 대단한 녀석이었나 보네.”

  이운석의 발목에 묶인 쇠고리에 손을 대며 이한영은 슬쩍 화차를 곁눈질했다. 특별히 들은 말은 없지만 동생을 곤란하게 만든 녀석이 누구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족쇄를 풀어야 할 정도였나?’

  이운석의 발목에 매여진 족쇄는 그녀가 직접 설치한 물건이다. 예전에 그가 자신의 능력을 전혀 컨트롤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하자 어쩔 수 없이 넘치는 힘을 눌러놓기 위해 장착한 일종의 봉인이다.

  그런 것을 풀어 달라는 말은 곧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인데, 그녀가 보기엔 화차는 그 정도까지의 능력자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쩌면 상성이 안 맞는 것일지도.’

  능력자들 간에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꼽으라면 ‘역량’과 ‘능력의 종류’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역량’은 수호신의 힘뿐만 아니라 능역자의 자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설사 수호신이 약하더라도 능력자가 힘을 키우면 훨씬 높은 수준의 힘을 발현시킬 수 있지만 상성만큼은 노력만으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자들끼리 하는 말로 물을 부리는 능력자와 불을 사용하는 능력자들끼리의 다툼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다.

  “오! 시원한걸.”

  족쇄가 사라지자 이운석은 가볍게 다리를 풀며 탄성을 지른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밝은 표정이다.

  “가볍냐? 하긴 십오 년 만이지?”

  “무슨 소리야. 누나. 십칠 년 만이라고. 나이가 들더니 이젠 치매가 슬슬 도지는 거 아냐? 하아. 그러니 빨리 시집이나 가라고. 외롭게 혼자 사니까 그런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이제 겨우 스물넷밖에 안 된 꽃다운 처녀에게!”

  “하하. 그런가? 그러 참 고마운 소리인걸?”

  밝게 대답하며 이운석은 몸을 풀듯 가볍게 뛰었다. 족쇄를 벗기전과 그다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움직임. 그러나 이를 가만 응시하던 병규와 화차의 눈에 예리한 섬광이 스쳤다.

  발소리가 안 들린다.

  좀 전만 해도 쿵쿵 울리던 그의 걸음이 지금은 솜털만큼 가볍게 느껴진다.

  “냐. 그런 것이었구나.”

  화차가 잘게 웃는다.

  “누나.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병규랑 먼저 가.”

  화차에게 매력적인 웃음을 뿌려 보인 이운석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고생해.”

  이한영은 혼자 남게될 동생이 걱정도 안 되는지 병규를 질질 끌고 반대편의 문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병규는 생각했다.

  ‘화끈한 성격들이구나.’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병규와 이한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대던 화차는 뭐가 불만인지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냐. 역시 안 되겠어. 오로치가 아무도 통과시키지 말라고 했거든. 미안해. 여기서 그만 죽어줘.”

  조용한 음성과 함께 화차가 한 발을 내밀었다.

  ‘흥. 오냐 그럴 줄 알았다.’

  내심 경계심을 지우지 않았던 이한영은 고개를 그녀에게로 돌리며 회심의 미소를 보였다. 이한영과 화차의 거리는 약 5미터. 순간적인 공격은 불가능한 거리. 그런데도 화차는 한 걸음 내디딘것 말고는 별 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렇다면 역시 뭔가 잔재주가?’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돌연 땅이 들썩하더니 꼬챙이 같은 가시 십여 개가 불쑥 튀어나오며 이한영을 찔러가는 것이다.

  “앗.”

  병규가 깜짝 놀라며 몸을 날렸지만 이미 가시들은 그녀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은 직후였다. 그러나.......

  치지지징.

  마치 젓가락으로 철판을 긁는 듯한 묘한 괴음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꼬챙이에 꿰뚫려 죽은 줄 알았던 이한엉이 조용한 웃음을 머금는다.

  “아하. 이런 능력이었구나. 저 녀석이 고생할 만도 했네.”

  그녀는 옷을 찢고 들어온 꼬챙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잡아 뚝뚝 부러트렸다. 꼬챙이의 두께는 어른의 허벅지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도 매우 단단해 보이는데 이한영은 마치 이쑤시개 부러트리듯 가볍게 분질렀다.

  “좋아. 이 정도라면 걱정할 필요 없겠어. 우린 먼저 간다.”

  동생에게 손을 흔들어준 이한영은 발걸음도 가볍게 그곳을 떠났다.

  “냐. 더딜!”

  화차가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려 하자 휘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이운석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아름다운 레이디께선 저와 어울리셔야지요. 우리끼리 청산해야 할 문제도 있으니 말이죠.”

  미간을 찡그리며 이운석과 이한영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화차는 곧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냐. 그럴게. 어차피 갈수로 더 험한 지옥이 있으니까. 차라리 내게 당하는 편이 좋았을 거야.”

  “하하. 그러야 가봐야 아는 일이고. 우리 누나. 겉보기엔 야들야들해 보여도 사실 굉장히 강하답니다.”

  “냐. 너보다 강해?”

  “뭐. 대충 나만큼 강하지요.”

  “냐~. 쿡쿡. 그럼 별거 아니겠네.”

  이운석의 말에 작게 고소를 짓던 그녀는 이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냐. 그런데 혼자서 날 이길 수 있겠어? 전에도 한 번 졌었잖아. 몸이 좀 가벼워진 정도로 날 어떻게 할 순 없을 거야. 차라리 조금 기다렸다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덤비지 그래?”

  “훗. 글쎄요.”

  가벼운 웃음을 날린 이운석은 돌연 발을 들어 퍽 하고 땅을 찼다. 땅바닥이 파도처럼 일어나며 그 속에서 커다란 덩치의 사내 하나가 튀어나왔다.

  놈의 등에는 고슴도치처럼 수십 개의 강철 가시가 박혀 있었다.

  “굳이 정의로운 악당 두 분을 상대하는데 동료들의 힘까지 빌릴 필요는 없습니다. 

  차가운 웃음을 띠는 그의 그림자가 일렁일렁 일어나더니 모든 털 있는 짐승의 왕, 기린의 위대한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휘오. 지겨운 파이프 통로 다음엔 계단인가?”

  화차가 있던 방을 빠져나온 이한영은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가는 계단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도대체 이 녀석들의 아지트는 뭐 이런 식으로 설계된 거야? 대장 얼굴 한 번 보려다 진이 싹 빠지겠네.”

  “비싼 티를 내네요. 어쩔 수 없죠. 일단 올라가 보죠.”

  병규는 한숨을 포옥 내쉬는 이한영의 등을 밀며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설마 누님과 운석이가 오누이였을 줄은 몰랐네요.”

  “몰랐냐? 닮았다고 많이들 그러던데.”

  “뭐,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긴 한데요.”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렇지 특재대 요원인 운석과 암흑가의 누님이라 불리는 그녀를 오누이로 연관지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체 어쩌다 그렇게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이거야말로 창조신에게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아리송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참 잘생겼네.’

  이운석은 남자인 자신이 봐도 짚투가 날 만큼 멋진 녀석이고, 누님은 조폭 형님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릴 만큼 아리따우니, 평범하게 생긴 병규로서는 조금 억울한 생각마저 들 정도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병규는 새삼 불공평한 세상사를 불평했다.

  “아 참. 누님. 좀 전에 운석이의 발에서 흡수한 발찌는 뭐예요?”

  “아. 족쇄? 별거 아니야. 그저 일종의 봉인이지.”

  “봉인?”

  “응. 옛날엔 동생 녀석이 힘 조절을 못해서 일을 좀 저질렀거든.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흡수한 금속들을 융합해서 만들어 준 거야. 그게 보기엔 흔해빠진 은 같지만 사실 밀도가 굉장히 높아.”

  밀도라.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 밀도가 높으면 부피가 작아도 무게가 무겁다는 정도는 기억난다.

  “어느 정도죠?”

  “발 한 짝에 100킬로 정도.”

  “네?”

  아무렇지 않게 툭 뱉은 그녀의 말에 병규는 경악성를 내질렀다. 한 짝에 100킬로라니. 두 짝을 합하면 200킬로. 성인 남자 세 사람분의 무게다.

  병규는 운석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그는 괴물 스크래그를 상대로 그름 위를 거니는 한 마리의 천마처럼 신나게 날뛰었다. 빗방울 사이를 헤집고 마음껏 뛰어 다니던 자유로운 모습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그때도 200킬로나 되는 족쇄를 발에 매달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맙소사. 나 같으면 뛰기는커녕 걷지도 못하겠다.’

  병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문득 그는 궁금해졌다. 족쇄를 푼 그는 대체 얼마나 빠를까. 드디어 날개를 얻은 천마는 과연 어떤 신위를 보일 것인가.

  “이런.”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던 이한영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녀는 주먹 크기 정도로 찢어진 상의를 살짝 들어올리며 불만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망할 녀석. 남의 비싼 옷을 다 찢어놓다니. 일만 끝나면 찾아내서 꼭 옷값을 받아내고 말겠어.”

  그녀의 음성 어디에도 동생에 대한 걱정은 묻어있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실내였다. 그리고 공기마저 탁했다.

  그렇게 탁하고 어두운 실내를 밝히고 있는 것은 고작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스탠드 하나. 스탠드에서 흘러나온 백광은 휑한 실내를 밝히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침잠하게 가라앉은 어둠을 밀어내기엔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그렇게 음울한 스탠드의 불빛이 희미하게 밝혀진 탁자 주위, 세 명의 사내가 저마다의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하고 있었다.

  “흐흡. 놈들이...... 왔다.”

  거대한 덩치의 오가마가 크게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둥근 안경을 정성스레 닦고 있던 오로치가 잠시 손길을 멈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안경 닦는 일에 몰두했다.

  “생각보다 빠르군요. 반도의 능력자 중에서도 머리가 굴러가는 녀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흐읍. 어쩔...... 텐가.”

  “그들이 왔다고 해도 별 상관없습니다. 이미 실험은 충분했으니 말이죠. 적당히 놀아주다 몸을 빼면 되겠지요.”

  오로치가 콕노래처럼 가볍게 흥얼흥얼 말을 이어갈 때였다.

  텅

  짧은 쇳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엔 ‘십이’라고 적힌 목패가 떨어져 있었다.

  “십이?”

  오로치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천정에 매달려 있는 목패엔 ‘일‘부터 ’십이‘까지의 숫자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것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오로치가 설계해 놓은 관문이다.

  일에서부터 팔 단계가지는 적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수행하고, 나머지 구에서 십이까지의 네 단계는 도주시 적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열두 번째, 제일 마지막 관문에 해당하는 목패가 떨어진 것이다.

  “흠.”

  오호치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심기가 불편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다. 이미 안경은 탁자 위에 던져진 채였다.

  “흐읍. 누군가. 퇴로로...... 들어왔군.”

  “열두 번째 관문이라. 그 관문을 지키고 있는 화차와 쓰치노코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닐 텐데. 아마도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침입한 쥐새끼가 있는 모양이군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오로치는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가 의자 위에 몸을 뉘이자마자 또 하나 툭 떨어진 목패가 그를 다시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떨어진 목패엔 ‘일’이 적혀있었다.

  “녀석들. 설마 양동작전으로 나온 것인가? 어떻게? 퇴로는 절대로 못 찾을 장소에 위치해 있을 터인데.”

  왕왕 울리는 오로치의 음성이 끝날 즈음, 오가마가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흐읍. 가봐야...... 겠다.”

  “굳이 오가마 님이 나서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일단은 기다리심이.”

  오로치가 촉망 중에도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오가마가 가래 끓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흐읍. 바퀴벌레. 놈이...... 왔다.”

  “아, 일전의 그. 어떻게 그가 온 줄 아시는 거죠?”

  오가마는 말없이 탁자 위에 작은 유리병을 올려놓았다. 코르크로 막혀 있는 유리병 안엔 작은 벌레 십여 마리가 들어 있었다.

  “바퀴벌레?”

  오로치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손으로 입을 감싼 채 의장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리병을 가리키며 오가마가 말했다.

  “흐읍. 조금 전부터...... 이놈들의 움직임이 활발...... 해졌다. 흐읍. 놈이 온 거다.”

  “하지만 그런 지저분한 벌레들을 보고 움직이기는.......”

  그때, 폭풍과 같은 웅장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일시에 모든 잡음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좋다.”

  굵직한 목소리로 떨어진 허락. 오로치와 오가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접었다. 단상의 사내는 묵묵히 그들의 절을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말을 이었다.

  “가라. 오가마. 반도의 능력자에게 대일본의 힘을 보여주고 오너라.”

  “흐읍. 네.”

  주군만큼이나 간결하게 대답한 오가마는 촤륵촤륵 하는 소음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후 오로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폭풍의 신이시여. 오가마는 버릴 패가 아닙니다.”

  폭풍의 신이라 불린 수사노오는 근엄함이 뚝뚝 묻어나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녀석은 임 딴 곳에 눈이 팔려있다. 마음이 먼 곳에 있는 자는 항상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허나.”

  “그 이야기는 이제 됐다. 어차피 도망가긴 틀린 것 아닌가? 퇴로조차 차단되었다 하지 않았는가.”

  “그건 아닙니다.”

  오로치는 얇은 입술을 좌우로 길게 늘이며 사요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영악한 여우는 도망갈 굴을 여러 개 파 놓는 법. 빠져나갈 곳은 또 마련되어 있으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소신이 당황한 것은 저들 중에 소신의 계획을 일말이나마 파악한 자가 있다는 것때문이었습니다.”

  “그렇군.”

  수사노오는 가볍게 대답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한 반응. 설사 탈출하지 못하더라도 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다. 그에겐 두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강했다.

  “그런데, 오가마 혼자서 될까?”

  “아마도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시길. 따로 대책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흠.”

  수사노오는 잠시 운을 뗐다가 느린 음성으로 물었다.

  “그 아이인가?”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난 그 아이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다. 그 아이의 말도 그렇고.”

  “마계의 절대자, 마왕이 차원을 넘어 현세에 강림했다는 소리 말이십니까?”

  수사노오는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오로치가 가장 자랑하는 능력은 최면이다. 그것도 한두 명 정도가 아니라 동시에 수백 명에게 강력한 암시를 거는 집단최면.

  금발머리의 소녀가 이곳으로 잡혀왔을 때, 오로치는 대뜸 그 능력을 사용했다.

  원래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마수와 연관된 소녀의 능력이었다. 그와 수사노오는 오랜 연구 끝에 갓파를 비롯한 전설속의 몇몇 요수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요수는 어디까지나 요수, 놈들은 만들어 준 주인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지옥의 마물이었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오로치의 강력한 최면으로 간신히 조정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 번에 서너 마리가 한도. 최면을 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다 그나마 작은 충격에도 최면이 쉬이 풀려버렸다.

  마수들의 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잘해야 B 급 능력자들을 간신히 상대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 원대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선 수많은 마수들을 한번에 부려야 한다.

  고심하던 그때, 그들이 알게 된 것이 바로 퀴니였다. 가스펠이라는 어마어마한 조직을 등에 업고 있는 이 맹랑한 꼬마는 놀랍게도 영혼이 없는 요수들과 교감이 통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자연스럽게 요수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퀴니가 가스펠의 비호도 없이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오로치는 큰 분란을 일으킬지도 모를 위험한 작업을 감행했다. 특재대의 시선을 자신들 쪽으로 돌려놓고 그녀에 대한 보호가 느슨한 틈을 노려 납치한 것이다.

  오로치의 최면술에 대한 소녀의 저항력은 놀라웠다. 웬만한 능력자도 오 분을 넘기지 못하는 그의 최면을 무려 육 일이나 버텨냈다. 그러나 역시 체력이 문제였다. 극도로 피로한 그녀는 결국 오로치의 마수에 걸려들게 되었다.

  간신히 일을 성사시킨 오로치는 별 기대 없이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여나 가스펠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입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가스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적이고 놀라운 소식이었다.

  마왕.

  마계의 제왕이 이 땅에 강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퀴니, 그녀는 지금껏 마왕을 찾기 위해 수년 동안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고 있었다.

  데빌게이트를 물리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그들에게 마왕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 경악이었다.

  “난 혹여나 이 세상에 강림했다는 마왕이 ‘그’가 아닐까 우려된다.”

  수사노오가 조심스럽게 언급하는 그. 이 조그만 땅에서 태어난 주제에 감히 세계 제일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절대의 능력자. 분명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마왕이라 불리고 있었다.

  “주군.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수사노오의 편치 않은 심기를 눈치 챈 오로치는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히 아뢰었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주군의 능력과 소녀를 앞세워 데몬게이트 놈들을 무릎 꿇리게 된다면 세계의 능력자들을 규합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그깟 마왕쯤은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수사노오는 고개 숙인 오로치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너무 쉽게 말하는 군.“

  오로치는 입가를 슬쩍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자신 있습니다. 설사 진짜 마왕이 존재한다 해도 절대로 주군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 요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지 않습니까.”

  “정말 그런 아이까지 동원해야 할까?”

  “작은 일에 심기를 허비하지 마시길. 주군은 큰 사람입니다. 오직 대계만 보십시오. 궂은일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수사노오는 잠시 침묵했다. 마침내 열린 그의 입은 짤막한 신임을 뱉었다.

  “믿겠다.”

  “감사합니다.”

  오로치는 깊숙이 고개를 조아린 채 방에서 물러났다.

  “흐흐흐. 마왕이라.”

  오로치의 입에서 음침한 괴소가 흘러나온다.

  “복수의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군.”

  깔끔한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며 추악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것은 여태까지 깔끔한 모습이던 오로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로치의 몸속에 스며든 발칸은 곧장 통로 끝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빛깔의 초가 놓여진 작은 쪽방 의자엔 금발머리의 소녀가 영혼을 잃은 목각인형처럼 늘어져 있었다.

  발칸이 그녀의 귓가에 몇 마디 소곤거리자 소녀는 스르르 힘없이 일어섰다.

  “착한 아이구나.”

  비린내가 확 풍기는 웃음을 흘린 오로치는 소녀의 손을 잡고 몇 개의 방을 지나 상당히 큰 지하창고에 도달했다.

  어둠.

  지하창고는 손끝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어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호흡과 불쾌한 냄새가 창고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로치가 몇 마디 조용히 말하자 멍한 눈의 소녀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말했다.

  “착한 아기들. 내 말 들어.”

  까드드드드드드

  크르륵. 크득. 크르르르륵.

  소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어둠이 공포를 토해 냈다.

  화차를 이운석에게 넘기고 전진한 병규와 이한영은 빙글빙글 원형으로 돌아가는 계단에서 새로운 능력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아야카시.

  그는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뚱보였다. 얼마나 뚱뚱한지 넓은 계단을 단지 허리 살 하나로 가득 채우는 놀라운 진기명기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병규와 이한영을 황당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그의 능력이었다.

  땀.

  그의 능력은 지금도 비 오듯이 흘리는 땀과 관련이 있었다. 그의 땀은 수호신의 능력 때문인지 기름과 같은 성질을 띠었다. 엄청나게 미끄럽다는 소리다.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구저 한 번 씩 웃고 말았을 그의 능력이지만 이렇게 계단 한 복판에서 만나니 무척이나 난감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몸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 땀 때문에 미끄러워서 도저히 계단을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미치겠네.”

  이한영은 계단 위에서 괴이쩍게 웃고 있는 술 드럼통 허리를 쳐다보며 난감해했다.

  조금만 올라가면 저 밉살스런 녀석을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슬며시 한 발을 올렸다. 줄줄줄 흘러내리는 기름에 닿자 아예 마찰력이 제로가 된 것처럼 쭉 미끄러진다. 병규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꼴사나운 자태를 연출할 뻔했다.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병규에게 물었다.

  “라이터 가지고 있니?”

  “네. 여기요.“

  “좋았어. 기름이라. 그렇다면 이런 수도 있지.”

  병규에게 받은 라이터에 불을 올린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해봐라.”

  주르르 흘러내리는 기름 같은 땀에 라이터 불을 가져간 그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불은 붙지 않았다. 기름 같아 보이긴 해도 역시 땀인 것이다.

  “우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계단 위에서 아야카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라뭐라 일본말로 떠드는 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도 대충 음침하고 기분 나쁜 분위기만은 충분히 전해져왔다.

  “저 놈을 그냥.”

  약이 오른 이한영이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른다.

  “흐음. 10미터 정도라.”

  아야카시와의 거리를 잰 병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해 보자!”

  코 밑을 한 번 쓱 훑은 병규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나섰다. 그리곤 이한영이 물어보기도 전에 텅 하는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쳤다. 7미터 정도 솟다 힘을 잃고 몸이 떨어지려 하자 재빨리 벽을 발로 차 다시 한 번 뛰어오른다. 그렇게 양쪽 벽을 디딤돌 삼아 지그재그로 가파른 수직 벽으로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히익!”

  아야카시는 비명을 질러댔다. 이렇게 엄청난 높이를 도약하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감히 상상도 못했다. 놀란 아야카시는 허둥지둥 계단을 오르며 더욱더 기름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기름은 계단은 아예 밟지도 않는 병규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녀석.”

  눈 깜짝할 사이에 뒤를 따라잡은 그는 아야카시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미끄덩. 이럴 수가. 땀으로 범벅이 된 아야카시의 옷이 그만 허무하게 손아귀에서 빠져버린다. 그러나 병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병규는 즉각 오른 손으로 요수의 발톱을 뽑아냈다.

  슈아악.

  그의 손가락 끝으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병규는 그대로 계단을 베어 냈다. 서걱하는 시원한 소음과 함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매끄럽게 잘려나갔다.

  발밑의 계단이 훌러덩 잘려나가자 어어어 하며 허둥거리던 아야카시는 결국 뒤로 벌렁 자빠져 버렸다. 그런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땀이 얼마나 미끄러웠던지 그 큰 덩치가 넘어진 그대로 계단 위를 스케이트처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가뜩이나 비대한 덩치의 그가 계단을 가득 채우며 쓸려 내려오니 도저히 피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야 이대로 점프하면 되지만.......’

  문제는 저 아래 있는 이한영이었다.

  병규는 고민하지 않았다. 몸이 시키는 대로, 가슴의 외침을 믿으며 그대로 난간을 넘어 아래로 떨어졌다. 둥글게 회전하며 올라가는 계단의 중앙으로 번지점프 하듯 뛰어내린 병규.

  20미터 아래의 이한영을 발견하고는 발로 계단의 난간을 힘껏 걷어찼다.

  쭝.

  쇠로 만든 난간이 부르르 떨며 길게 울어댄다. 난간을 걷어차며 탄력을 얻은 그는 다시 계단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쿵!

  “끄악. 아고고고고.”

  계단에 등부터 떨어진 병규는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괜찮니?”

  이한영이 달려와 그를 일으키며 걱정스레 물었다.

  “헤헤. 괜찮아요. 원래 튼튼한 거 빼면 시체라서.”

  병규는 뼈마디가 욱신거리는데도 애써 웃음을 보였다.

  “참. 누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제 등에 업히세요.”

  “응? 무슨 소리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에게 병규는 계단 위를 턱짓을 해보였다.

  “크아아아아!!”

  긴 비명을 지르며 아야카시가 계단을 꽉 메운 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가히 산악인이 산사태를 만난 것에 버금가는 임펙트!

  “꺄악. 거대한 비누가 몰려온다.”

  질겁한 그녀는 대뜸 병규의 목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그녀를 껴안게 된 병규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보기보다 꽤 볼륨이 있네.’

  급한 중에도 잠시 엉뚱한 생각을 품었던 그는 무릎을 접으며 모든 힘을 축적했다.

  추악.

  온몸의 피가 하반신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다. 그 무거운 압력. 감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간 목이 부러져나갈 것 같다. 그런 압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을 때, 두 사람은 본래의 자리에서 6미터나 솟은 채였다.

  ‘아직 부족해.’

  병규는 발밑에 걸리는 난간을 살짝 걷어차며 다시 한 번 점프, 그렇게 세 번 정도 더 올라가서야 간신히 아야카시의 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맙소사. 뭐 저런 녀석이 다 있냐?”

  내내 병규에게 안겨있다 간신히 풀려난 이한영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능력자다. 적어도 이렇게 좁은 계단에서는.

  한 편 병규는 그녀의 뒤쪽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충 이만큼이었지. 아마?’

  그의 양손은 조금 큰 풍선을 올려놓은 것처럼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뭐해? 가자.”

  계단 아래서 요란한 소음과 함께 아야카시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을 확인한 이한영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병규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험험.”

  헛기침을 한 병규는 그녀를 따라 계단을 뛰어올랐다. 불과 몇 미터도 안 되어 출구가 나타났다.

  “코앞에 목적지를 두고 그렇게 애먹었구나.”

  이한영은 치가 떨린다는 듯 고기를 흔들었다. 병규는 뒷머리를 슬쩍 긁었다.

  “좋았냐?”

  호랭이님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힐끔 이한영을 곁눈질한 병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그. 얌전히 인정하니 뭐라고 갈구지도 못하겠군.”

  호랭이님은 세상 다 산 늙은이처럼 혀를 쯧쯧 찼다.

  작은 철문을 통해 들어간 곳은 주차장같이 생긴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텅 비었다는 의미다. 흔한 전등 하나 밝혀져 있지 않아 휑한 느낌은 한층 더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또 뭐 하나 나올 분위기인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한영이 중얼거린다. 별달리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 물류센터 이후로 보통 여자라면 기절해도 열댓 번은 기절했을 상황을 수 없이 겪었지만 아직 그녀의 목소리엔 여유가 있었다. 그런 대범함이 그녀를 암흑가의 여보스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일 것이다.

  그때 그들이 들어온 문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닫혔다.

  “니가 닫았니?”

  이한영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병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절로 닫혔는데요.”

  “그래?”

  그녀의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느낌이 좋지 않다. 그런 느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손잡이를 돌려본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긴 것이다.

  이한영은 피식 웃었다. 그녀나 병규나 이런 자물쇠에 갇혀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무슨 꿍꿍이짓을 꾸몄는지 구경이나 해 볼까?”

  나가는 것은 간단하지만 굳이 그 징그러울 정도로 미끈거리는 계단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한다면 오직 전진. 이런 황당한 계획을 꾸민 보스의 얼굴을 뭉개주러 가는 길뿐이다.

  막 그녀의 음성이 끝났을 때다.

  때리리리리리링.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며 천장에 달린 화재용 스프링클러가 일제히 물을 쏟아냈다. 샤워기처럼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이한영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었다.

  “설마 이걸로 익사시킬 생각인 거야?”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병규와 호랭이는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쏟아지는 물줄기. 이와 비슷한 상황을 과거에 한 번 경험해봤던 그들이다.

   “설마.......”

  의문성이 끝나기도 전이다.

  철컹.

  무언가 묵직한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 촤르르 하며 셔터가 들어 올려지는 소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병규로서는 차마 잊지 못할 괴음이 슬며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까드드드드드드드.

2권 끝, 3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