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4/102)

6. 불완전하기 때문에 넌 인간인 거야

  “잠들었네.”

  “고 녀석. 잠자는 모습은 공주 같군.”

  고롱고롱 낮잠을 자고 있는 퀴니를 내려다보며 병규와 호랭이가 한 말이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여서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소녀지만 잠자는 모습은 정말로 인형 같았다. 깊은 속눈썹에 반질반질 광이 나는 피부는 또 얼마나 좋은지 만지면 하얀 분이 묻어날 것만 같다.

  “당분간 쭉 이렇게 잠잘 것 같은데요.”

  “잘됐군. 그 사이 후딱 갔다 오도록 하자.”

  소곤거리는 음성으로 의논한 병규와 호랭이는 쓰윽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막상 방을 나서자니 영 방 한구석이 신경 쓰인다.

  “집세인상! 절대반대! 집세인상! 절대반대! 집세인상! 절대반대! 배고파서 못살겠다. 집주인은 세입자의 생활고를 배려해 달라. 집세인상! 절대반대! 집세인상! 절대반대!”

  한쪽 구석에서 사요한 눈빛을 쏟아내며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경애. 그녀는 ‘집세인상 절대반대’ 라는 피켓을 들고 역시 같은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두른 채 며칠째 농성중이다. 병규가 아무리 집세인상은 없을 거라고 설명해줘도 막무가내다.

  구두통을 두드리며 농성하는 그녀를 보며 병규는 황당함보다 측은함을 느꼈다. 대체 어떤 생활을 했으면 저렇게 오백 원에 목숨을 거는 걸까.

  “나 잠깐 나갈 건데. 넌 어떻게 할 거니?”

  피켓을 흔들고 있던 경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인다.

  “빨래할 게 있어.”

  병규는 피식 웃었다.

  다소 엉뚱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정말 참한 살림꾼이다. 하루 종일 농성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자세히 보면 집안은 항상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고, 소리 없이 알바도 다녀온다. 호랭이의 말에 의하면 밤늦은 시간엔 검정고시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절로 나도 힘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녀에게서 집세를 받아야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출부 급료를 챙겨줘야 하는 게 아닌 가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금방 올 거야. 배고프면 찬장 뒤져봐. 라면 몇 봉지가 남아있을 거야.”

  “응. 잘 다녀오세요~오.”

  경애는 나가는 병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어이구. 아주 입에 귀에 걸렸구먼. 귀에 걸렸어. 가이네가 둘이나 집안에 설쳐대니 그렇게 기분이 좋냐?”

  집을 나서자마자 호랭이가 짓궂게 묻는다.

  병규는 그저 히죽 웃기만 했다.

  사실 요즘은 매일매일이 행복하기만 하다.

  집안에서 온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전에는 이 큰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채 하루하루 의미 없이 지냈는데, 요즘은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행복이 깨지지 않기를.

  병규는 언제나 잠들기 전 기도하곤 한다.

  “그런데 말이야. 넌 왜 그렇게 경애에게 힘을 못 쓰냐?”

  “음. 아마도 제 누님들과 경애가 정반대 성격이라 당황스러워서 그런가 봐요.”

  “누님? 친누이 말야?”

  “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구나. 가족들이 걱정도 안 되나? 어째 통 연락 주고 받는 꼴을 못 보겠구나?”

  “하하. 뭐 서로 바쁘다보니.”

  호랭이와 잡담을 하며 길을 나서는데, 골목 맞은편에서 아는 사람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어이. 외출하는 거야?”

  붉은 색 스포츠카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던 이운석이 그를 향해 말을 건넨다. 그의 옆에서 한가롭게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홍대일은 한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도 고생 많네.”

  홍대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병규는 이운석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뭐, 고생이랄 것까지야. 공주님의 호위는 기사의 당연한 도리니까.”

  이운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그 옆의 홍대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기회가 된다면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내부를 관찰하고 싶을 정도다. 혹시 ‘로리’라는 두 글자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까?

  자영은 특재대의 인원을 나워 그중 일부에게 퀴니의 호위임무를 맡겼는데, 워낙에 지원자가 몰린 탓에 일 주일 단위로 사람이 교체되었다. 이번 주는 이운석과 홍대일의 차례였다.

  “그런데 우리 공주님의 시.종.은 공주님을 방구석에 버려두고 대체 어딜 가는 거냐?”

  여태 가만있던 홍대일이 볼살을 늘어뜨리며 묻는다. 그의 말 중에 유난히 시종이라는 단어가 강조된 듯한 느낌이 든다. 퀴니를 뺏어 간 병규가 어지간히 눈에 가시 같은 모양이다.

  물론 병규는 억울했다. 어디까지나 퀴니가 따라온 것이지 자기가 납치한 게 아니지 않은가. 뻘쭘한 표정이 된 병규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볼일이 좀 생겨서요. 퀴니가 자는 사이에 잠깐 갔다 올 생각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그래. 뭐 애 보는 일도 피곤한 법이지. 여긴 우리가 맡을 테니 잘 갔다 와.”

  손을 흔들어 주는 이운석의 얼굴에 말끔한 미소가 걸린다.

  이운석과 홍대일을 뒤로하고 병규는 곧장 학교 뒷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가 굳이 퀴니가 낮잠 자는 시간을 틈타 학교 뒷간을 오르는 이유는 오로지 호랭이 때문이다.

  그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도력을 상실하고 몸까지 줄어버린 호랭이는 가끔씩 이렇게 산에 올라 탁기를 배출하고 순수한 땅의 기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고 배설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근데 호랭이. 굳이 힘들게 도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을까요? 호랭이는 지금 이대로도 귀여운데.”

  병규가 아쉬운 듯 말했다. 지금이야 어깨에 얹어놓을 정도로 작으니까 놀기 좋지만 본래의 몸뚱이로 돌아가면 깔려죽기 딱 좋을 판이다.

  “녀석. 지금까지 그 놈의 봉인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아직 그런 소릴 하는 게냐.”

  “뭐, 그거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고. 앞으로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게다가 퀴니랑 같이 있는 한은 저렇게 빵빵한 호위들이 항상 붙어있을 텐데. 굳이 호랭이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병규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정말로 그는 호랭이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있기를 바랐다.

  니코틴마니아라며 하루라도 빨리 호랭이를 처리하고 싶어했던 병규가 이렇게 180도 돌아서게 된 것은 모두 퀴니 덕분이다. 퀴니는 정부와 가스펠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받았는데, 그 돈의 일부가 생활비 보조금조로 병규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헌데 그 액수가 장난이 아니다. 특재대에서 병규가 받는 월급을 제하고도 매일 소고기 파티를 해도 될 정도다.

  이렇게 형편이 좋아졌으니 자연 호랭이에게 들어가는 담배 값 정도는 웃으며 꺼내줄 수 있게 되었다.

  “이놈아. 내가 불편해서 그런다. 됐냐? 코딱지만한 여우한테도 희롱 당하는데 열 안 받게 생겼어?”

  코딱지만한 여우란 특재대 본부장인 자영을 뜻하는 말이다.

  “헤헤. 뭐,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신다면야.”

  기분 좋게 웃은 병규는 한가로운 학교 뒷산을 경쾌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퀴벌레 왕자가 몰래 뒤따랐다.

  “오오. 오늘따라 주인님 기분이 좋으신 것 같은데? 샤바. 그럼 기회를 봐서 사모님을 내 태그 친구로 소개시켜 달라고 말해봐야지.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아직도 경애를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으샤. 공주님은 산책이라도 안 나오시려나.  구경거리도 없이 대기하고 있으려니 지루하네.”

  하품을 하던 이운석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말이 공주님 호위지, 잠복 수사하는 형사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다. 하루 종릴 대기상태로 기다려 봤자 퀴니 얼굴 보는 건 기껏해야 몇 분 정도에 불과할까.

  그나마 그는 한가롭게 놀 생각으로 이일에 자원한 거라 이 느긋함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반면 홍대일 선배는 심각할 정도로 열심이다. 나사에서 새로 개발했다는 최신형 망원경을 들고 틈나는 대로 병규의 자취방 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얼마나 망원경을 들여다봤는지 눈 주위가 동그랗게 패일 정도다. 이 정도면 열성을 넘어 스토커의 경지에 돌입했다고 봐야 옳다.

  그래도 그나마 이 선배는 좀 나은 편이다.

  지난주 호위 기사들이었던 조준엽 선배와 김한식 선배는 각종 첨단 장비를 동원해 병규네 집을 엿보다가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한 바탕 곤욕을 치렀고, 배기철 선배와 전경희는 아예 병규네 집에서 숙식을 하며 호위를 하겠다거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사태가 이 정도면 이미 특재대는 퀴니의 사설능력자부대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데 수색조는 아직 그 녀석들 본거지를 못 찾았다냐?”

  “오리무중이라네요. 다른 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공항이나 항만으로 입국한 기록조차 없답니다.”

  “그 녀석들이 어디 보통 녀석들이냐. 그런 기록이 남아있으면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그건 그렇고 심문은 어떻게 됐어? 설마 한식 선배가 맡았는데 아무것도 못 알아낸 것은 아닐 테고.”

  “아아. 그 어설픈 닌자 녀석들이야 예전이 다 불었죠. 한식 선배가 불 꼬챙이를 빙빙 돌리며 ‘홋시 인권유린이란 말을 알고 있나?’라고 묻자마자 안색이 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은 말까지 다 불어버리더라고요.”

  “하하. 당연한 일이지. 난 그 선배에게 걸리고도 입 다물고 있는 녀석은 아직 단 한 명도 못 봤다. 그런데 녀석들이 다 불었는데도 아직 아지트를 못 찾았단 말이야?”

  “네. 그 녀석들. 무슨 금제를 당했는지 병규와 싸우기 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흠.그래. 확실히 간단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군.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우리 공주님께서 낮잠을 오래 주무시네. 지금도 예쁜데 대체 얼마나 더 예뻐지시려고 그러시......!”

  낯짝도 두껍게 공주님 예찬론을 읊고 있던 홍대일이 돌연 입을 닫는다. 그 옆에서 한가롭게 담배를 빨고 있던 이운석 역시 표정이 변해버렸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두 사람의 눈동자에 동시에 깃든 것은 절절한 긴장감. 그것도 걷은 팔뚝으로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의 것이다.

  동시에 고개를 끄떡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빠를 동작으로 병규의 집을 향해 뛰었다. 목표는 하나. 그렇다면 지킬 것도 하나다. 그러나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그들은 등 뒤에서 들리는 묘한 목소리에 발을 멈춰야 했다.

  “냐. 좋은 찬데?”

  대체 언제부너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이운석의 빨간 스포츠카 지붕 위엔 못 보던 여자 한 명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검은 식 기모노에 삽으로 석고를 처바른 듯 허연 얼굴의 그녀는 돌아보는 두 사람을 향해 색기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의도적인지 치마사이로 빙어같이 흰 다리가 슬쩍 모습을 보인다.

  “냐. 이런 멋진 차 꼭 한 번 타보고 싶었어.”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오싹 돋았다.

  “그런데 난 오픈카가 좋은데 어쩌지?”

  애무하듯 차체를 쓰다듬는 그녀,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손이 맞닿은 곳이 지글지글 끓으면서 녹아내린다. 단지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린 것뿐인데, 자동차의 도장이 부글부글 끓고, 차체가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는 것이다.

  “능력자!”

  이운석이 무거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근데 얘를 어떻게 깨우나.”

  세상 모르고 잠든 퀴니를 내려다보며 경애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배가 살살 고픈 걸 보니 식사시간이 된 것 같은데, 병규가 애지중지하는 공주님은 일어날 생각은 안 하신다. 그렇다고 청승맞게 혼자 먹는 것도 좀 그렇고.

  첫날의 안 좋은 추억은 잊은 지 오래. 어느덧 그녀는 퀴니와 바퀴벌레 왕자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퀴니는 그렇다 치고 바퀴벌레 왕자와도 친해지다니. 정말 놀라운 친화력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귀엽네.”

  잠이 든 퀴니의 볼을 콕콕 찌르며 경애는 새삼 감탄했다. 뽀얗게 묻어날 것만 같은 피부와 오뚝한 콧날, 긴 속눈썹까지. 여자들이면 모두가 바랄 만한 완벽한 조건이 작은 얼굴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예쁘고 귀여운데다 부자라고까지 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다.

  “좋겠다. 넌.”

  경애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퀴니와 비교하니 새삼 처량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녀는 곧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때리며 기운을 충전했다.

  “에잇. 힘내자. 경애! 세상이 널 몰라주면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열심히 뛰면 되는 거야.”

  금세 용기백배해진 그녀.

  “퀴니야. 우리 라면 먹자~아.”

  막 그녀가 퀴니를 깨우려 할 때였다.

  콰콰쾅.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과 함께 돌연 방의 한쪽 벽이 우르르 허물어졌다.

  “뭐, 뭐야?”

  갑자기 벽이 허물어지자 경애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흐읍.”

  푸석하게 날아오른 먼지를 뚫고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듯한 무시무시한 괴인이 그녀의 동공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괴인을 본 경애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꿈에 볼까 두려운 괴물이 아닌가.

  그려늘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던 괴물이 가래 끊는 음성으로 물었다.

  “흐읍. 바퀴...... 벌레는...... 흐읍. 어디 있나!”

  “불이라도 났나?”

   기분 좋게 집으로 귀가하던 병규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와 소란스런 사람들의 외침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골목 안에서 오른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불이 나도 큰불이 난 모양이다.

  좁은 골목을 턱하니 막아선 소방차와 그 틈바구니를 빽빽하게 들어찬 구경꾼들.

  “으.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중이야.”

  병규는 골목길로 진입하기 위해 꽤나 힘든 여정을 거쳐야 했다.

  “여?”

  툴툴거리며 골목길로 들어서던 병규의 입에서 난데없는 의문성이 흘러나왔다.

  폭풍이 한차례 훑고 지나간 듯한 풍경. 아니 작은 화산이라도 폭발한 듯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은 녹고 반쯤은 무너진 담벼락, 가로수는 번개라도 맞은 듯 검게 그을려 독한 연기를 뿜고 있었고, 콘크리트 바닥은 가뭄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검게 변한 흙덩이를 토해놓았다.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골목길의 모습은 축격적이고 생소한 광경이었다.

  툭.

  마트에 들러 사온 아이스크림 봉지가 바닥에 툭 떨어졌는데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맙소사.”

  병규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이번 주 내내 골목을 지키던 빨간 스포츠카는 지붕이 다 녹아버린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비 맞은 수채화 같은 풍경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란의 한 귀퉁이, 백도어가 열린 구급차 옆에 팔과 어깨를 붕대로 칭칭 감은 이운석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뗳게 된 거야!"

  병규는 그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쥐며 독촉했다.

  "...... 놈들이 왔었다.“

  고개 숙인 이운석의 입에서 맥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놈들?

 어떤 놈들 말야.“  ”아마도...... 전에 퀴니를 노렸던 바로 그 놈들인 것 같다.“

  “뭐? 그래서.”

  “.......”

  이운석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모했다. 하지만 그의 자괴감 어린 표정은 이미 대답을 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 바보자식.”

  병규는 그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붙이며 윽박질렀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필이면 잠깐 자리를 비운 시간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그만해라. 다친 사람을 다그쳐서 어쩌겠다는 거냐!”

  호랭이가 일침을 놓았다. 그제야 병규는 그가 움켜쥐고 있던 이운석의 어깨 부위가 피로 흥건해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흥분하지 마. 녀석도 최선을 다했다. 보면 모르겠냐?”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대일 선배는?”

  이운석은 말없이 엠블런스 안을 턱짓했다. 의식도 없는 피투성이의 환자 하나를 두고 의사와 간호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이 무너졌다.

  한심스럽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한 그들을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한순간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몹쓸 짓을 하다니. 한심스럽고 답답해서 혀라도 뽑아내고 싶을 지경이다.

  “제길.”

  욕지기를 뱉으며 벌떡 일어선 병규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기울여 바람처럼 달렸다. 골목길을 지나 허름한 그의 이층집까지 한달음에 내달린 그는 훤하게 열린 방문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층격을 받았다.

  처음이다. 자기 집에 들어가기 무섭다는 생각이 든 것은.

  꿀꺽.

  병규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 걸음을 옮겼다.

  “.......”

  반쯤 뭉개진 s방안의 모습에 병규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병규야. 경애. 경애가 있다.”

  귓가에 종이라도 울린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들어간 병규는 무릎을 모으고 훌쩍거리고 있는 경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병규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무슨 일이야. 퀴니는. 퀴니는 어디 갔어!”

  “흑흑. 오빠.......”

  “퀴니는 어디 갔냐니까!”

  그녀는 그가 흔드는 대로 맥없이 출렁였다. 눈물이 비처럼 뿌려졌다.

  “말해. 말하라고.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냐고.”

  괴성을 지르던 그가 경애를 확 밀쳤다. 그녀가 묵직하게 쓰러진다. 그녀를 노려보며 병규는 악을 질렀다.

  “멍청아. 도망갔어야지. 퀴니를 데리고 달아났어야지. 바보야. 도대체 뭘 한 거야. 보나마나 멍하니 구경만 했겠지. 그 어린것이 녀석들에게 붙들려 울고불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바보처럼 비명만 지르고 있었겠지. 멍청아. 도대체 넌 뭐야. 뭐냐고. 대체 뭘 한거야. 뭘 한 거냐고! 떼라도 써보지 그랬니. 니가 잘 하는 건 그것뿐이잖아. 놈들에게 억지라도 부려보지 그랬냐고 이 바보야!”

  짝.

  머릿속으로 번쩍 빛이 튀어 올랐다. 오른 쪽 뺨이 열기로 확 달아오른다.

  “알았어.”

  그의 뺨을 갈긴 경애가 말했다.

  고운 볼을 타고 내린 눈물방울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그 눌물을 머금은 눈동자.

  가슴에 쑤셔 박힌 칼이 서서히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

  “내가 찾아올게.”

  병규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경애를 붙잡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여자가 우는 걸 처음 봤다.

  아니 보기는 많이 봤지만 자신의 앞에서, 그것도 자신이 내뱉은 말과 행동 때문에 슬퍼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가 울고 있었다.

  또르르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이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없었다.

  “젠장.”

  병규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여린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아무 일도 없었을 테지. 아니, 무사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다만 답답해서, 찢어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래서 소리친 것뿐인데. 그런 것뿐인데. 그런데.......

  쾅.

  병규는 발악을 하듯 맨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젠장.”

  쾅쾅.

  두 번, 세 번......

  살 껍질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젠장. 그런데 왜 아프지 않지? 맞지도 않은 가슴은 또 왜 이리 아픈 거야. 누구야. 누가 내 가슴을 찢어놓은 거야! 누구냐고!

  쾅쾅쾅.

  피가 튀었다. 바닥을 끈적끈적하게 적신 피가 방울져 그의 얼굴을 적셨다. 또르르 굴러 떨어진 묽은 핏방울이 눈물처럼 뺨을 적시고 턱 아래에 맺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고함을 질렀다. 고함인데 왜 울음처럼 들리는 걸까. 왜 통곡처럼 들리는 거지?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비명을 지르는 거냐고!

  미친 듯이 바닥울 쳐대던 그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뚝 멈춰졌다. 하얀 털을 날리며 작은 신선이 의연한 자태로 그의 주먹 아래서 있었다.

  “그만해라.”

  달빛을 담은 그 눈빛이 그에게 말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넌 인간인 거야.”

  비로소 병규는 울 수 있었다.

  “퀴니 님의 구출작전에 특재대의 모든 재원을 쏟아 붓겠습니다.”

  급하게 소집된 임시 회의에서 본부장인 자영은 심각한 말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물론 모든 인력을 투입하겠다는 그녀의 과격한 발언에 단 한 사람의 대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퀴니가 납치된 것만으로도 특재대를 대 혼란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에 이운석과 홍대일이 당했다는 비보까지 전해졌다. 지금 특재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흉흉 그 자체였다.

  “지금 진행 중인 모든 수사는 이 시점을 기해 모두 중지됩니다. 데모게이트 조사에 투입된 정보부의 대원들 역시 전원 이번 작전에 투입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납치사건이 아닙니다. 이건 명백한 특재대에 대한 도전이며. 체제를 부정하는 불순한 음모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퀴니 님은 단순히 특재대의 손님이 아니라는 점을. 그녀는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녀가 우리 특재대의 명백한 일원이라는 데 이의가 있는 분은 없을 줄 압니다. 수사에 만전을 기해주십시오. 이미 상부의 허락을 얻어 군경의 협조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자영의 지시는 그야말로 총력전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것이었다. 능력자들은 단 한마디의 반대도 없이 묵묵히 현장으로 떠났다.

  그 후로 3일. 군경에 협조를 구해 전국적인 규모의 대규모 수색 작업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오리무중. 여전히 사라진 퀴니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자영을 비롯한 특재대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퀴니가 무사할 확률은 턱없이 줄어드는 것이다.

  “수사의 폭을 넓힙니다. 현재 국내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은 모두 조사대사에 포함시키세요. 한국 국적의 일본인 2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되는 적들의 규모를 생각해볼 때 일반 가정집에 숨어있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문을 닫은 공장이나 창고들을 집중적으로 수색하세요. 특재대의 사활이 걸린 일입니다. 모두들 힘들겠지만 그녀를 구출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합시다.”

  시간이 갈수록 특재대의 긴장은 심해졌고, 수사 범위는 무한정으로 넓어졌다. 초조해진 대원들의 신경 역시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음주운전 특별 단속기간이란 핑계로 전국적인 교통통제가 이루어졌다. 경찰은 모든 전과자를 상대로 탐문작업을 벌였고, 군엔 테프콘2가 발령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 벌써 일 주일째.

  사정을 모르는 방송은 연일 정부의 의도를 거칠게 질타했고, 신문에선 북한과의 전쟁 위험에 대한 믿지 못할 소식들이 연일 특집기사로 다뤄졌다.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이뤄진 사상최대의 수색작전.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조그만 단서라도 있어야 복잡한 매듭을 풀듯 뒤를 쫓을 수 있을 텐데, 정말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자영은 책상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지난 일 주일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한 그녀는 굉장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어리도 사라졌는지 전혀 흔적도 없다는 게 말이 돼? 그 동네 사람들은 눈구멍이 모두 잘못되기라도 한거야? 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거냐고.”

  그녀는 손톱을 깨물며 뚜껑 닫은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심각하게 초조해하는 모습이다.

  지금 본부장실엔 호랭이와 병규, 그리고 자영.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나머지 인원은 죄다 현장에 투입된 상태다. 자영은 병규가 흥분할까 봐 일부로 작전에서 배제시켰다. 현장투입이 아직 이른 감도 있었고, 자칫 감정을 앞세워 일을 그르칠까 저어한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병규가 멍하니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일이 벌어진 그날 저녁부터 아예 특재대 밖을 나서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암담한 정보들. 병규의 표정 역시 점점 굳어만 갔다.

  “안 되겠어요. 내일까지 단서를 찾지 못하면 선계의 힘을 빌려야겠어요.”

  호랭이가 깜짝 놀란다.

  “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선계의 힘을 빌리겠다니. 자칫하면 선호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무거운 얼굴로 시선을 창가로 두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이 나라는 끝장이에요.”

  “무슨 말이야. 설마 어린아이 하나 없어졌다고 그런 일이 벌어지겠니?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줄은 안다면 조금 차분하게 기다려 봐.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게다.”

  “후. 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번 일은.”

  호랭이는 그녀의 말에서 엄청남 무게를 감지해 냈다. 가슴을 누르는 그 압박감이란 구미호인 그녀를 심각하고 압박하고 있었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니. 아무래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구나.”

  호랭이가 넌지시 물어보자 자영은 병규에게 슬쩍 시선을 주며 착잡한 속사정을 드러냈다.

  “사실 아므르 퀴니 님은 단순히 가스펠의 비밀특사 따위가 아니에요.”

  “그쯤은 예상했다. 비밀특사 정도로 보기엔 그녀에 대한 처우는 너무 대단해. 나라 전체가 들썩일 정도라니. 어느 나라 대통령의 영애라도 되는 거냐?”

  멍하니 있던 병규가 고개를 들어 자영을 주시했다. 여태 무반응이던 그가 퀴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관심을 보인다.

  잠시 한숨을 쉬며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던 자영은 곧 믿지 못할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녀는, 아므르 퀴니 님은 실은 유럽의 능력자연합인 가스펠의 실질적인 총수예요.”

  “뭣!”

  호랭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물론, 가스펠에서 내세우는 표면적인 총수는 따로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가스펠을 지배하고 있는 배후는 바로 퀴니 님이예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제 십오륙 세에 불과한 꼬마가 어떻게 한 국가도 아닌 유럽 전체 능력자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단 말니다. 농담 식으로 주고받았던 ‘로리 공화국’ 어쩌고 하는 헛소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배경이 어떤 것인지는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실재로 가스펠에서 그녀의 존재란 거의 신앙에 가까워요. 아마 퀴니 님의 특별히 당부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가스펠에서 파견된 호위 능력자들로 바글바글했을 거예요.”

  “그, 그런 일이.”

  냉정한 표정으로 자영의 설명을 듣던 병규마저 경악을 금치 못해E다. 그런 비사가 숨어 있을 줄이야.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리라도 생긴다면 일본은 가스펠의 표적이 되어 버릴 거예요. 그리고 우리 나라 역시 불똥이 튀겠죠. 퀴니 님이 사라진 곳이 이곳이니까요. 결코 그들은 가만 있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아시겠어요? 능력자들 간의 전쟁이 벌어진다는 말이에요. 그 어떤 검색에도 걸리지 않는 살아 있는 핵폭탄들이 거리 한 복판에서 터질 거란 말예요.”

  “녀, 녀석들은 그런 걸 알고 있을까?”

  “아마도 알고 있을 거예요. 히로부미는 멍청한 작자가 절대 아니니까요. 설사 그가 모른다 해도 부관인 오로치는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멍청이들이 왜 그런 위험까지 감수해 가면서 그 꼬맹이를 데려간 거지?”

  “글쎄요.”

  미진한 그녀의 음성. 호랭이는 그녀가 무언가 짐작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뭐냐. 숨기지 말고 털어봐라.”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지금 데몬게이트라는 다국적 기업에 의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예요. 겉으로는 평온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능력자들 간의 갈등으로 혼란 그 자체죠. 그리고 이미 승세는 서서히 데몬게이트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예요. 정보부의 보고로는 이미 7할 이상의 능력자들이 데몬게이트에 흡수됐다고 해요. 이미 데몬게이트의 영향력은 정계와 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죠. 최근 극우단체들의 홀동이 활발해진 것도 데몬게이트의 배후조작으로 정보부에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히로부미 같은 국수주의자가 그런 꼴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있을 턱이 없죠. 히로부미는 오래전부터 일본 내 반 데몬게이트 조직의 두목으로 활동하면서 데몬게이트의 사업 확장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어요. 아마 이번 일도 그 것과 관련 있을 거예요.”

  “데몬게이트.”

  병규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상하게 요 근래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다, 대체 어떤 조직이기에.

  “이미 가스펠에서는 퀴니 님의 실종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해요. 최근 정보부에 등록된 다수의 유럽계 능력자들이 입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큰일이 벌어집니다.”

  자영은 굳은 목소리로 외쳤다. 호랭이는 더 이상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자영의 판단은 옳은 것이다.

  확실히 그 같아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문제는 여간해서는 인간계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선계의 방침. 이것이 있는 한 설사 허락이 떨어진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이 뻔하다.

  자영으로선 최후의 선택을 한 셈이지만 상황 자체는 암담했다. 자칫하다간 국내 영토에서 유럽 연합과 일본의 능력자들의 전쟁이 벌어진다. 과거 청일 전쟁의 한 장면이 다시금 재현되려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고작 꼬맹이 하나 가지고 전쟁이라니.”

  호랭이는 황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줄이야. 어쩐지 퀴니가 병규를 따라간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하더니 그 이면엔 이러한 복잡한 사정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호랭이.”

  묵직한 분위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여태 조용히 있던 병규가 몸을 일으켰다.

  “저와 잠시 어디 좀 가죠.”

  “더디로? 무슨 일이죠?”

  자영이 물었다. 그녀의 말끔한 이마위로 근심이 한 가닥 걸려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났어요.”

  병규는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특재대를 나선 병규는 잠시 말없이 걸었다.

  흔들리는 거리. 굳은 얼굴로 열심히 길을 걷고 있는 행인들. 소란스러운 자동차 소음. 뻑뻑한 매연. 불쾌한 냄새. 우중충한 가로수들. 보도블록 위에 검게 말라 붙어 있는 껌 자국들.

  그리고 어깨 위의 호랭이에게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담배냄새의 향긋함.

  “어쩔 작정이냐?”

  호랭이가 물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숨은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호랭이의 물음에 병규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지갑과 핸드폰을 꺼냈다. 오래된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낸 호랭이를 향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어두운 곳에 숨었으면 어두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죠?”

  동그랗게 눈을 뜨는 호랭이. 그는 피식 실없이 웃으며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님? 아, 저 혹시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에 발칸 일로...... 예. 예. 기억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네. 저 근데 누님에게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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