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3/102)

5. 오빠는 풍각쟁이야~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요란한 박자에 맞춰 울리는 다소 고전틱하고 엽기적인 노래. 병규의 아침은 늘 이처럼 약간은 독특한 자명종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그러나 평소에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피식 웃게 만들던 엽기 만발의 노래가 오늘은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제 그 난리를 치르고 밤늦게 잠들었으니까 피로가 아직 안 풀린 것이다.

 “아으~ 누가 저 자명종을 좀 죽여줘!!”

 병구는 눈도 뜨지 못한 채 베개를 머릐 위에 뒤집어쓰고는 비명을 질렀다.

 짜증은 비단 그 혼자만 났던 것이 아닌가 보다. 그의 배 위에서 고롱고롱 잠자던 호랭이가 반쯤 뜬 눈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쥐를 본 고양이처럼 자명종으로 달려든다.

 “이눔시키! 이눔시키!”

 발톱을 곤두세운 앞발로 공 굴리 듯 자명종을 찰싹찰싹 후려치고, 레슬링을 하더니, 급기야 자명종을 붕 던져놓고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아 호랭이식 썸머솔트킥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깽~ 하고 날아간 자명종은 건전지를 토하며 뻗어 버렸다. 가볍게 자명종을 퇴치한 호랭이,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태생도 잊어버린 채 고개를 길게 빼며 늑대처럼 울어댄다.

 “아우우우웅~~~!”

 며칠 전에 본 늑대인간 영화가 감명 깊었던가 보다.

 병규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괴상망측한 표정으로 호랭이의 기행을 지켜봐야 했다.

 “크헤헤. 이겼다.”

 호랭이는 죽어버린(?) 자명종 앞발을 올려놓고 거창하게 웃더니 곧 고롱고롱 다시 잠이 들었다. 아마도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려대니 잠결에 달려들었던 모양이다.

 “잠꼬대도 가지가지군. 뭐, 그래도 조용해졌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지?”

 병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몰랐다. 이불 안에서 호랭이의 기행을 관찰하고 있는 두 눈이 있엇다는 것을.

 ‘멍멍이. 칭찬.’

 다음날, 기어코 사단이 일어났다.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난 퀴니. 자명종 앞에 쪼그려 앉은 그녀는 호랭이가 그랬듯 손바닥으로 자명종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이눔! 이눔!”

 반쯤 감긴 눈까지 똑같다.

 ‘서. 설마!’

 졸린 눈으로 퀴니를 쳐다보던 병규는 돌연 불길한 예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분명 저거 다음에 호랭이가 했던 것이.......’

 그렇다. 두 발을 모으고 공중 일회전을 하며 갈기는 썸머솔트킥!

 과연 퀴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세를 잡더니 자명종을 위로 던지며 동시에 펄쩍 두 다리를 치켜든다.

 그러나 아뿔싸!

 그녀에겐 호랭이와 같은 순발력이 없었다. 결국 썸머솔트킥을 빙자한 그녀의 발라당 킥에 맞은 자명종은 ‘케엥~’ 하는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뚫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오 마이 갓!!”

 병규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정상적인 사람과 살고 싶다고!!!”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이마에서 피를 주르륵 쏟고 있는 안세준이 한 손에 자명종을 들고 있었다. 지니가다 그녀가 날린 자명종을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깜짝 놀란 병규가 재빨리 그의 손에서 자명종을 낚아챘다.

 “아아! 이럴 수가. 무사해. 무사해. 천만다행이야.”

 놀랍게도 자명종은 표면이 조금 찌그러진 것 말고는 멀쩡했다. 초침도 잘 굴러가고 있다. 이층에서 창문을 뚫고 90밀리 포탄처럼 날아간 것을 생각하면 기적적인 귀환이랄 수 있었다.

 “아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아. 부처님 감사합니다. 알라~~!!”

 병규는 자명종을 품에 안고 불특정 다수의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자명종 살 돈이 굳은 것이다.

 “이, 이것 봐.”

 안세준이 그를 불렀다. 멀뚱히 쳐다보니 그는 피가 찔찔 새고 있는 자신의 이마를 가리킨다.

 “뭐 이상한 거 안 보여?”

 “어라. 어쩌다 그렇게 됐냐? 자빠진 거야?”

 “.......”

 안세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포옥 한숨을 쉬었다.

 “에휴.제발 정상적인 놈과 살고 싶다.”

 자명종을 날려버린 죄로 벌을 서고 있던 퀴니가 호랭이의 말에 동의하듯 한숨을 포옥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퀴니야. 잠깐만 이리와.”

 멀쩡히 길가다가 어느 집 삼층에서 날아든 자명종에 머리를 강타 당했다는 안세준의 기구한 사연(?)을 들은 병규는 당장에 퀴니를 불렀다. 퀴니는 두 팔을 쳐든 채로 쫑쫑 걸어왔다.

 “얘가 그랬냐?”

 안세준이 안면을 뒤틀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혼내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퀴니의 귀여운 얼굴을 보니 도저히 화를 못내겠기 때문이다.

 “휴.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해.”

 고개를 흔들며 안세준이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내내 웃고 있던 병규는 퀴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자명종도 무사하고 얄미운 안세준에게 한 방 먹이기까지 하니 가슴이 다 시원해졌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어두침침한 존재가 있을 줄은.

 ‘호오. 칭찬받았다. 샤바.’

 기다리고 기다리던 다음 날,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호랭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 그런 호랭이를 꾹 누르며 퀴니가 몸을 굴리자마자 그런 그녀의 머리 위를 요란한 날갯짓소음을 동반한 바퀴벌레 왕자가 엄청난 스피드로 지나갔다.

 바퀴벌레다운 반사신경과 민첩함으로 누구보다 먼저 자명종을 차지한 바퀴벌레 왕자.

 그 다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팔 대신 긴 더듬이로 자명종을 톡톡 쳐댄 바퀴벌레 왕자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온몸을 이용! 자명종을 허공으로 던져 넣...... 으려 했으나, 아뿔싸!

 자명종을 허공에 던지기엔 다리가 너무도 짧았다. 그렇게 되자 자명종을 안고 뒤로 한바퀴 일회전 한 격이 되었고, 탄력을 받은 자명종은 마치 예전에 모 국회의원이 선보였던 유도기술처럼 바퀴벌레 왕자님의 뒤로 넘어가서.......

 까앙!

 “쓰으으읍. 우아아아아악! 이번엔 또 뭐야!! 씨발라마!!!! 다 나와!!!”

 바퀴벌레 왕자는 곧장 책상 아래로 도망가 버렸다.

 “띠리리리리리링!”

 “니나노~오. 닐리리아~ 닐리리아~ 니나노오~”

 “빰빠라~ 빰빰빰~ 빠~~!! 일어나! 일어나! 아침이야~!! 일어나! 뺨뺨!”

 “꼬끼요오오오오~ 자~ 이 소리를 영어로 하면? 꼬끼오로오우우우~”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가지각색의 잠여종 소리.

 여느 가정집 같으면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뜬 주인이 반쯤 뜬 눈으로 자명종을 멈추고,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갈 테지만, 병규의 자취방에선 그런 일상의 풍경과는 전혀 동떨어진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엽기 발랄한 자명종 노래 소리.

 그런데 어째 소리가 좀 찌그러진다. 그럴 수밖에.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메쳐지니 온전할 텅이 없지. 사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용한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시작이다.

 벌떡.

 후다다닥.

 파다다다다.

 자명종 소리가 들리지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동을 시작하는 세 그림자. 당연히 호랭이와 퀴니, 그리고 바퀴벌레 왕자였다.

 이른바 아침마다 벌어지는 자명종 격투. 이제는 아예 셋이서 태그매치를 한다. 퀴니랑 호랭이가 한편을 먹고, 바퀴벌레 왕자와 자명종이 한편을 먹는다. 당연히 바퀴벌레 왕자와 자명종의 연전연패. 하지만 매일 계속되는 패배에도 바퀴벌레 왕자는 굴하지 않고 매일매일 새롭게 의욕을 다졌다. 경기(?)가 끝난 후엔 항상 자명종을 더듬이로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작전회의를 한다. 말 못하는 자명종을 상대로 저렇게 진지할 수 있는 것도 나름대로 재주이리라.

 바퀴벌레 왕자가 한쪽에서 궁상을 떠는 동안 만년 우승팀은 늘어지는 기지개를 켜며 오늘의 승리를 자축한다.

 호랭이를 따라 등을 곱게 펴며 하품을 하는 퀴니. 그녀는 갈수록 호랭이를 닮아가고 있다. 아! 발로 귀를 털고 있다.

 ‘저러다 맹수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병규는 정말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가뜩이나 평범하지 않은 앤데. 그리고 그런 불만은 자연스레 호랭이에 대한 분노로 옮아간다.

 퀴니나 바퀴벌레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신선씩이나 되는 호랭이는 왜 저렇게 쓸데없는 짓에 열을 올리는지.

 ‘고양이 과의 숙명인 거야?’

 화려한 기술을 연발하는 드림팀의 태그매치 경기를 관람한 병규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꼭 학교에 가야 한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너무 많이 놀았다. 잘못하다간 출석일수가 모자라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병규가 대충 학교 갈 채비를 마치자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퀴니가 그의 옆에 착 달라붙는다. 비스듬히 메어진 작은 가방을 보니 오늘은 기어코 따라나설 모양이다.

 “에효.”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퀴니가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건 이미 여러 날 전에 확인했으니 말이다. 사실 소란만 안 피운다면 뭐라 그러는 선생님도 드무니 상관없기도 하다.

 “아니. 병규야. 숨겨둔 애야?”

 “헛. 금발! 너 언제 우리 몰래 백마를 습격한 거야?”

 “능력도 좋네.”

 교실까지 가는 도중 마주친 녀석들이 퀴니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그런데 어째 보는 시선이 사촌동생이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다.

 “오오.”

 병규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교실. 병규는 서먹서먹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 들어 워낙 이상한 일을 많이 겪어서 이젠 이런 평범한 일상에 오히려 이질감을 느낀다.

 “에헴.”

 헛기침소리와 함께 깐깐하게 생긴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물리선생이다.

 사실 물리 선생은 생긴 것만큼이나 지독한 인간이었다. 거의 매주 숙제에 시험문제도 책 한 권을 달달 외우길 바라는 그런 옹졸한 타입이다. 게다가 사람 무시하는 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태흥고등학교에 재임중인 교사 중에서 인기도 최악을 달리는 선생이 바로 물리선생이다.

 막 교재를 펼치고 강의를 시작하려던 물리선생. 핸드폰을 꺼두지 않았나 보다. 벨이 울린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니 하필이면 그 벨소리가.......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호, 혹시’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든 병규는 급히 무릎 위를 봤다. 호랭이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신경. 조건반사다.

 ‘안 돼!!’

 병규는 튀어 나가려는 호랭이를 재빨리 낚아챘다.

 그러나 아뿔싸!

 호랭이에게 신경을 쓰느라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위험분자를 간과하고 말았으니.......

 벌떡 일어난 퀴니. 가히 동물과 같은 몸놀림으로 책상 위를 내달린다. 그리고는,

 “이눔! 이눔! 이눔!”

 힘찬 구령과 함께 물리 선생의 싸대기를 시원스레 날리고, 이어 정강이를 걷어차 깽깽 뛰는 선생의 턱을 향해 호쾌한 발라당 킥까지 한 세트로 선사해 버렸다.

 뻐걱! 하는 통괘한 소음과 함께 육중한 물리 선생의 몸이 뒤로 훌러덩 자빠져 버린다.

 “허.......”

 병규의 입에서 힘없는 한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문득 그는 생각했다. 혹시 자신은 저주받은 것이 아닐까? 왜 하는 일마다 이렇게 꼬이지? 괜스레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 그의 불행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선행. 채 어떻게 된 사태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신경 거슬리는 소음을 듣게 되었다.

 파드드드.

 “아야야. 이게 또 무슨 소리?”

 고개를 든 선생의 눈에 뭔가 거무튀튀하고, 넓적하면서도 야리꼬리하게 생긴 것이 갈색 날개를 펼쳐들며 소리도 요란하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 바퀴벌레!!”

 그것도 초대형이다.

 놀란 선생이 자지러지기도 전에 구석 으슥한 곳에서 튀어나온 초특급 바퀴벌레는 선생의 주름진 얼굴에 찰싹 달라붙으며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친구!! 샤바. 말을 할 수 있는 동료는 처음일세. 이젠 작전회의를 할 수 있게 됐어. 샤바샤바.”

 퀴니에게 맞는 것을 보고 자명종처럼 생각하게 되었는가 보다.

 “컥.”

 선생의 검은자위가 위로 스르르 올라가더니 무슨 간질병환자처럼 온몸을 파르르 떤다. 그리고 입 밖으로 밀려나오는 게거품.

 그 순간, 멍하게 풀어져있던 병규의 눈에 언뜻 초점이 잡혔다.

 번개같이 후다닥 달려 나간 그는 선생을 붙들고 ‘어서 일어나게. 샤바. 자네가 누워있으면 태그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외치는 바퀴벌레 왕자를 뻥 창밖으로 차버린다. 그리고는 물리 선생을 끌어안고 한바탕 통곡을 했다.

 “이럴 수가. 선생니이이이이임!”

 가슴 저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통한의 울음. 보는 사람의 눈시울이 다 붉어질 정도로 리얼한 연기였다.

 “이 바보 녀석들.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선생님께서 바퀴벌레의 공격을 받고 실신하셨잖아. 빨리 119에 전화해. 그리고 사내 녀석들은 빨리 나와서 거들어!”

 병규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고함을 지르자 엄청난 사태에 바짝 얼어있던 학생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마, 맞아. 선생님은 바퀴벌레에.”

 “그, 그런데. 그게 바퀴벌레가 맞긴 맞아?”

 “푸, 풍뎅이 아닐까?”

 “바보야. 무슨 풍뎅이가 항아리 뚜껑만하냐?”

 “하, 하긴.”

 “그런데 방금 전의 바퀴. 말을 하지 않았냐?”

 “그럴 리가! 분명 환청을 들은 거야.”

 “그, 그래. 많이 놀랐었으니까. 하하하. 우린 단체로 환청을 들은 거야. 하하하.”

 바퀴벌레 왕자를 보고 집단으로 쇼크를 먹었다 보다. 죄다 바퀴벌레에 관한 얘기뿐이다. 선생 역시 마찬가지라서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바퀴벌레 노이로제 때문에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여간 덕분에 퀴니가 저지른 일은 그렇게 유야무야 묻힐 수 있었다.

 “휴. 자칫 했으면 퇴학당할 뻔했다.”

 정말이지 위험천만의 상황이었다.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순간의 재지로 위기에서 벗어난 병규는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안도의 한숨의 쉬었다. 그런 병규의 허리를 콕콕 찌르며 퀴니가 물었다.

 “변기. 나 미워?”

 “에효.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다 너에게 쓸데없는 걸 가르친 저 체신 머리 없는 호랭이 탓이지.”

 그날, 호랭이는 병규와 만난 이후로 처음 하루 종인 금연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병규에게 차여 창밖으로 날아간 바퀴벌레 왕자는,

 “친구! 어딨는가! 샤바. 친구!! 태그 연습하세! 샤바. 친구우우~! 샤바샤바.”

 라고 외치며 병원으로 실려 간 선생을 찾아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느 날 저녁, 부엌 싱크대 밑에서 자명종을 껴안고 ‘자명종군. 좋은 계획 없는가? 샤바~’라고 중얼 거리고 있는 바퀴벌레를 게슴츠레 바라보던 병규는 한참 음침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녀석을 처치해야 할 것 같아.’

 며칠, 그나마 좀 적응이 돼서 징그럽게 느껴지는 것은 많이 덜해졌지만, 문제는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저 녀석이 따라붙는다는 점이다. 그것도 얼마나 교묘하게 숨는지 도무지 찾아낼 수 없을 정도다. 그나마 계속 안보이게 따라다니면 별 문제 될 것도 없겠는데, 가끔씩 놈이 꼭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주변을 풍비박산 내버리는 통에 미칠 지경이다.

 일전엔 학교 화장실에 볼일을 보고 있을 때 나타나는 바람에 공동화장실이 순식간에 개인 전용실이 되어버린 적도 있었고, 등교 길에 겁도 없이 그의 옆에 나타나는 바람에 할생으로 가득 찬 등교 길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어 버린 적도 있었다.

 설사 폭탄이 떨어져도 그 지경까지는 안 될 것이다.

 ‘이 상태로는 저놈의 초대형 바퀴벌레가 내 방에 산다는 걸 들키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야. 그럴 바엔 차라리 더 정이 들기 전에.......’

 병규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우선 인터넷을 통해 바퀴벌레에 대한 지식을 쌓은 병규.  바퀴약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일반적인 방법부터 시도했다. 전날 저녁에 본 사극에서 짜증나는 와녀가 사약을 받던 장면을 떠올린 그는 바퀴약계의 사약이라고 할 수 있는 로취베 X트를 대량으로 구입했다.

 “집에 바퀴가 좀 많으신가 보죠?”

 “하하. 학교 창고에서 쓸 겁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마트 직원에게 어색한 웃음으로 대꾸한 그.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퀴벌레 왕자에게 잠깐 산책을 명한 후 대인용 발목지회 파묻듯 집안 곳곳에 로취베 X트를 설치했다. 말이 일곱 통이지 한 통에 여섯 개씩 든 것을 채 열 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뿌려댔으니 곳곳이 지뢰밭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 이 정도면.”

 바퀴벌레가 잘 다니는 길목 요소요소마다 지뢰를 설치한 병규는 고된 노동의 대가에 만족하며 일찍 잠이 들었다.

 어둠이 스멀스멀 몰려오고, 여태 숨어있던 바퀴벌레 왕자가 슬금슬금 책상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평소처럼 자기의 구역을 순찰하던 바퀴벌레 왕자는 평소엔 보지 못한 묘한 녀석을 발견했다. 작은 집과 같은 모양으로 방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는 녀석이었는데, 작게 뚫린 구멍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흘러나오는 것이엇다.

 “어쩔씨구리. 넌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이냐? 샤바. 정체를 밝혀라. 샤바.”

 당연히 그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괴이쩍은 표정으로 놈을 살펴보던 바퀴벌레 왕자. 문득 이 수상쩍은 녀석과 똑같이 생긴 놈들이 사방에 쫙 깔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퀴벌레 왕자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한다.

 “오호라~! 샤바. 이제 보니 네놈들이 감히 이 왕자님의 나와바리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모여든 모양인데? 샤바샤바.”

 불량스럽게 바닥에 침을 찍 뱉은 바퀴벌레 왕자는 괴성을 지르며 병규가 설치한 지뢰를 향해 용맹무쌍하게 달려들었다.

 “쓴맛을 보여주마!! 쌰바아!”

 다음 날 아침. 여느 때보다 상쾌하게 일어난 병규는 문밖을 나서다가 ‘헉.’ 하고 경악을 내지르며 나빠져야 했다. 고생고생하며 방 구석구석 배치해 놓았던 지뢰들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문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이건! 혹시...... 네 잔꾀는 좁쌀만큼도 안 통한다는 경고의 의미?”

 그의 머릿속으로 지뢰를 발견하고 피식~ 하고 웃는 바퀴벌레의 얼굴(?)이 떠오른다.

 왠지 바퀴벌레에게 농락당한 느낌이 든 병규, 그 길로 당장 마트로 달려가 새로운 무기를 구해 가지고 왔다.

 ‘이번만은, 반드시.’

 회심의 미소를 지은 병규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바퀴벌레를 불렀다. 바퀴벌레 왕자는 부르자마자 장롱 구석에서 파다다다 날아왔다.

 “오오. 주인님 절 다 불러주시고. 감격입니다. 샤바샤바.”

 그토록 멀리하던 주인이 자신을 불러주다니. 삼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기특한 바퀴벌레 왕자엿다.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는 바퀴벌레를 보고 병규는 양심이 조금 찔렸다. 하지만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최소한 바퀴벌레 한 마리라도 처리해야 하는 법.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그는 과감히 아끼던 참치 캔 하나를 뜯어 바퀴에게 주었다.

 “그동안 너무 구박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자, 이건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주는 거야.”

 “주, 주인님. 샤바.”

 바퀴벌레가 흘리는 눈물도 부엌이 홍수가 날 지경이다. 아까보다 양심이 조금 더 찔리는 병규. 그러나 애써 무너지려는 의지를 곧추세웠다.

 “녀석. 어서 먹기나 해.”

 “네. 잘 먹겠습니다. 주인님. 샤바.”

 더듬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참치 캔으로 기어간 바퀴는 정말 게걸스럽게 참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병규는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뒷짐을 진 그의 손에는 다 쓴 치약 통처럼 구겨진 튜브식 바퀴벌레약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 바퀴벌레 왕자가 먹고 있는 참치 안에는 좁쌀 반 톨만 한 분량으로도 바퀴가족 일가를 몰살시킨다는 치명적인 독약이 걸쭉하게 풀어져 있었다.

 ‘휴. 정말 못 할 짓이구나.’

 병규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참치 캔을 먹던 바퀴벌레 왕자가 돌연 몸을 움찔 떤다. 병규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착잡한 심정으로 뇌까렸다.

 ‘녀석. 부디 좋은 곳 가라. 다음엔 꼭 바퀴 말고 다른 종족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웬걸 당장 몸을 뒤집으며 돌아가셨어야 할 바퀴벌레 왕자가 그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저...... 주인님.”

 “흡.”

 벌써 좋은 곳으로 갔겠지 생각한 바퀴벌레의 목소리에 숨이 턱 막힌 병규, 조심스레 고개를 내려 바퀴벌레를 쳐다봤다. 몸을 뒤집은 채 다리를 바르르 떨며 죽었어야 할 바퀴벌레 왕자가 그럴 보며 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병규는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했다. 그런 그를 향해 왕자가 좀 미안한 표정으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이거 좀 싱거운 것 같은데 고추장 좀 더 타면 안 될까요?”

 “......!”

 “젠장, 어떻게 해야 그 녀석을 퇴치하지?”

 연이은 실패에 고심하던 병규는 평생 안 하던 공부까지 해 가며 바퀴벌레 퇴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신문에서 좋은 힌트를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신문에 나온 사건은 어느 악독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기 위해 남편의 신발에 매일 조금씩 농약을 뿌려 결국 1년여 만에 독살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군. 한 방으로 안 된다면. 조금씩 조금씩 죽이면 되는 거야.”

  다행스럽게도 병규가 원하는 효능의 바퀴약은 이미 개발되어 시판 중이었다. 분필같이 생긴 문제의 바퀴약은 그저 바닥에 쭉선을 그으면 지나가는 바퀴들이 죽어버린다는 오묘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멀리 서울까지 가서 문제의 비약을 구해온 병규, 입가에 침을 흘리며 열이 날 정도로 방바닥에 낙서를 해댔다.

  “케헬헬. 이래도 안 죽나보자. 흐흐흐흘.”

  그날 밤. 병규는 유난히 포근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헉.”

  그의 입에선 전날과 마찬가지로 격한 신음성이 터져 나와야 했다.

  온 동네에서 모여든 것 같은 각양각색의 바퀴들이 무려 3센티 두께로 칠해진 문제의 비약을 타고 넘으며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엌에서 화장실까지 어이진 긴 선을  이용한 멀리뛰기. 식탁 아래 사각형으로 그려진 비약 안에서 행해지는 마루체조, 싱크대에 찬 세제물 속에서 행해지는 수영경기, 그리고 방 한바퀴를 도는 체육대회의 꽃 장거리 마라톤. 그리고 어디서 뜯어온 것인지 모를 꽃잎을 던지며 환호하는 바퀴벌레 응원단까지.

  그들의 체육대회는 경기를 펼치는 선수는 물론, 응원하는 관객들마저 발 한 번만 삐끗해도 곧장 비약을 밟고 사망하는 죽음의 랠리였다.

  “뭐냐. 쟤들?”

  병규의 배 위에서 자고 있던 호랭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는 병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죽으라고 줄 그어 놨더니 오히려 즐긴다?

  “호오.”

  퀴니는 바퀴벌레 떼를 보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바퀴벌레 왕자는......, 동네의 어린 바퀴들을 모아놓고 일대 강연을 펼치고 있었다.

  “오늘은 지뢰에 대비하는 법에 대해서 학습하겠다. 보통 잘 다니는 길이라고 방심하는 법이지만, 인간은 그런 허점을 교묘히 파고든다. 평소에 음식이 안 떨어져 있던 곳에 먹음직스러운 것이 있으면 무작정 달려들지 말아라! 4 미닛 44 서컨드 4444 밀리세컨드 이내로 즉사다. 입을 댔는데 약간이라도 시금컬컬한 맛이 아면 그냥 혼자 먹고 얌전히 죽어라. 괜히 식구들 챙겨준다고 가져 갔다가 ‘카드 값 비관 일가족 자살?”이란 제목으로 신문 일면 장식하지 말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나마 조금만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조심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학습할 놈이다. 이 놈은.......“.

  병규는 그대로 하얗게 타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다소 잔인하긴 하지만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연이는 실패에 고심한 병규는 급기야 너무 잔인해서 지금껏 사용을 자제하던 금지된 술법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그가 이 방법을 꺼렸던 것은 독일군의 잔인함을 그린 몇몇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덩 이상 그런 약한 마음을 품을 수는 없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인정사정 봐줄 것 없이 터트려 버릴 생각이다.

  “에? 샤바. 그냥 여기서 두 시간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오. 샤바. 그건 쉬운 일이지요. 샤바샤바.”

  “그래. 그렇게 해 준다니 다행이다. 그럼 금방 다녀올 테니 집 잘 지켜라.”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방구석에 혼자 남게 된 바퀴벌레 왕자는 자신을 믿어주는 주인의 신뢰에 잠깐 동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오. 구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주인님은 날 신용하고 있었던 것이야. 그러니 집을 맡기지. 샤바. 속으론 다정해도 겉으론 냉정하게 큰일을 주도해 가는 과감한 결단력. 오오. 왕자인 내가 꼭 배워야 할 군주의 덕목이 아닌가. 샤바샤바.”

  그렇게 감격에 떨던 바퀴벌레 왕자, 문득 이상한 소음을 듣고 방으로 들어갔다.

  치지지지지.

  방 한 중앙에 놓여진 작은 접시, 그 위에 올려진 깡통으로 작은 불꽃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샤바.”

  다이너마이트처럼 심지가 타들아 가고 있는 깡통을 쳐다보며 바퀴벌레 왕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는 빠르게 타들어 갔다. 그렇게 열심히 타던 심지가 깡통 안으로 사라졌을 때, 푸쉬이이익 하는 거친 소음과 함께 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래? 어래? 샤바?”

  깡통에서 솟구쳐 오른 연기가 내부를 완전히 잠식하고 있는 병규네 집 문밖엔 ‘연막 살포 중’이라고 씌어진 종이가 팔락거리고 있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산책을 하니 기분이 좋군.

  호랭이와 퀴니를 데리고 공원 산책을 다녀온 병규는 개운한 표정이었다.

  “하루 종일 실실 쪼개긴. 뭐가 그리 기분이 좋냐?”

  “하하. 조금 있으시면 호랭이도 알게 될 겁니다.”

  호랭이의 퉁명스런 물음에 병규는 하하하 웃으며 문을 열었다. 돌연 확 하고 끼쳐오는 매캐한 냄새. 눈물이 찔끔하고 코가 시큼해진다.

  “켁. 켁. 뭐, 뭐야. 이건.”

  호랭이가 두 앞발로 코를 문대며 괴로워했다.

  “쿨럭. 아. 연막 한 번 엄청나네.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연기가 안 가시다니.”

  “어? 병규야. 퀴니. 저 녀석.”

  “헛.”

  병규는 입을 헤벌린 채 뒤로 넘어간 퀴니를 질질 끌어냈다.

  “젠장. 그 약국 아저씨. 바퀴벌레 잡을 거라고 그랬지. 누가 생화학 무기를 달라고 했나. 바퀴 잡으려다 사람이 죽겠네.”

  자욱하게 낀 연막은 한참 후에야 가라앉았다. 환기나 시킬까 하고 방으로 들어간 병규는 자욱한 연막 속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작태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바퀴벌레 왕자는 전에 체육대회 하던 그 멤버(?)들을 모아놓고 화생방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이 정도에 쓰러져? 너무 허약하군. 샤바.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이 너. 다리가 굽었잖아. 그래. 그렇게 활짝 펴. 넌 더듬이가 그게 뭐야! 기운차게 못해? 지금 너희들의 고생이 장차 자손의 면역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샤바. 이런 기회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냐. 주인님이 우리 백성들을 위해 제공한 소중한 기회. 확실하게 살려야 한다. 자! 그럼 모두 같이 외쳐보겠다. 깨스! 깨스!

  “으아악. 도저히 못 참겠다.”

  인간도 못 견딜 연막 속에서 태연히 면역강화훈련을 하고 있는 바퀴벌레들의 모습에 얼이 빠져있던 병규는 급기야 이성을 잃고 말았다. 뚜껑이 활짝 열려버린 그는 오래전에 사 놓고 사용하지 못했던 최후의 비밀병기. 분무식 레X드를 꺼내들고는 ‘어? 주인님 오셨어요? 샤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바퀴벌레 왕자를 향해 무작정 분사해버렸다.

  치이이이이이익.

  피하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분사된, 인간이 만든 가장 지독한 바퀴벌레 퇴치약.

  과연 천하의 바퀴벌레 왕자도 참을 수 없었던지 움찔하더니 다리를 발발 떨기 시작한다. 그 길고 팽팽했던 더듬이마저 아래로 축 쳐져버리더니 이내 흐느적거린다.

  “크하하하하하하하.”

  병규의 입에서 득의의 괴성을 터져 나왔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한 톨의 양심 때문에 주저하던 지난 과거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병규가 ‘Mission Complete'를 외치며 환희에 젖어있던 그때, 분무를 맞고 바바바 떨던 바퀴벌레가 툭 하고 내뱉는 말 한마디.

  “무. 푸헤헤. 이거 좋은데? 쌰이뱌. 꺼억~. 주인장 여기 바퀴약 1000cc 추가. 원샤스루~~ 샤아뱌. 푸헤헤. 바퀴왕국이여 영원하라. 백성들이여~ 세상을 다 가져라. 샤뱌뱌뱌뱌뱌뱌뱌.”

  “......!!”

  바퀴벌레 왕자의 주정을 듣고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는 병규. 그 옆을 지나가던 퀴니가 양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레 한마디 툭 던진다.

  “변기. 맨날 바퀴랑만 놀아. 퀴니 외로워.”

  “하.......”

  그 순간 호랭이는 입 밖으로 사람의 혼이 승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오빠~. 나왔어. 보고 싶었지?”

  열렬한 환영을 기대하며 삼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경애는 확 달라져버린 집안 분위기에 움찔 놀랐다.

  “왔......니?”

  그녀를 돌아보며 힘없이 손을 흔들어주는 병규는 불과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낙하산 대신 보자기를 들고 2000미터 상공에서 거꾸로 추락한 사람 같다 랄까?

  얼굴은 여든 먹은 노인네처럼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엔 흰머리까지 보인다. 게다가 살짝 벌려진 입가로 허탈한 듯 흘러나오는 ‘허허허허허.’하는 자조어린 웃음이란.

  “오, 오빠.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간 경애는 그를 끌어안고 하늘이 떠나가라 오열했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고. 누구야. 누가 그랬어. 어서 말을 해봐.”

  “그러니까.......”

  “아아. 맙소사. 이 흰머리 좀 봐. 얼굴 주름은 어떻고. 피부상태도 엉망이야. 이빨은 닦은 거야? 윽. 눈곱이다. 사람이 아무리 충격을 받았어도 씻기는 해야지. 방안 청소도 안 했지? 아아. 책상위의 이 먼지 좀 봐. 아, 원래 책상은 안 쓰는구나. 아냐 아냐. 푼수처럼 지금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오빠 말해줘.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어. 응? 숨기지 말고 말해줘.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바퀴.......”

  “설마 말 못할 사정인 거야? 지나가는 여자라도 덮쳤어? 그래서 방송에 이름이라도 나온 거야? 그런 거야? 아니면 덮친 여자가 돈을 요구해?”

  “벌레.......”

  “그것도 아니면. 헉! 깨달음? 드디어 도를 깨달은 거야? 약수터에서 선인이라도 만난 거야?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거지? 그런 거지? 그래서 지금 해탈이라고 하려는 거지? 안 돼. 가지마. 모처럼 경애가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왔는데 오빠가 죽으면 내가 다 먹어야 하잖아. 내가 살 찌면 오빠가 책임질 거야? 안 돼. 가지 마 오빠. 내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절대로 살아줘. 오빠아아아~”

  “쿨럭!”

  끝내 병규는 각혈을 하고 말았다.

  “우앙. 오빠, 때가 된 거야? 이제 떠나는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는 거냐고. 우아아앙. 가지 마. 가더라도 집문서랑 통장 비밀번호는 알려주고 가. 집이랑 돈이랑 남기고 가는 거 아깝잖아. 그러니까. 알려주고 가. 오빠. 아아아아앙. 오빠아아아아.”

  “컥컥컥. 커억.”

  경애의 절규(?)로 병규의 가슴은 아예 피로 물들어 버렸다.

  바로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접근했으니.

  터엉~~

  짧은 쇳소리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기는 진동음. 경애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비벼댔다.

  “쓰읍. 키아아아아아아아앙.”

  당해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안다. 쟁반 모서리로 머리를 찍히면 얼마나 아픈지.

  “이케케케케케. 아파라. 도대체 누구얏!”

  도끼눈을 하고 빙글 뒤를 돌아본 경애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작은 소녀를 보게 되었다. 금발 머리를 곱게 땋은 소녀는 정말이지 인형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귀여웠다. 동그랗게 뜬 맑은 눈과 빤질빤질 광택이 나는 코, 그리고 그 아래 자리잡은 발그스름한 입술이란 여자인 경애가 봐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깜찍했다.

  그러나 그런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의 손에 들린 각진 양철 쟁반을 보았을 때, 경애의 눈은 휘딱 뒤집어져 버렸다.

  “뭐야! 너. 왜 남의 머리통을 후려갈긴 거야. 그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너 집이 어디야. 엄마 어딨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들, 멀뚱멀뚱 경애를 쳐다보고 있던 퀴니의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잔소리를 한없이 쏟아내고 있는 경애를 가볍게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퀴니는 피를 토하며 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병규를 가리키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변기. 내꺼. 건들지 마.”

  “뭐라?!!”

  물의의 일격을 받은 경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변기가 니꺼라니. 변기라면 화장실에 있잖아. 그런데 왜 오빠를 가리키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얘. 대변기!”

  “호. 호호. 너 정말 웃기는 애구나. 오빠를 보고 변기라고 놀리다니, 장난이 심한 건지, 철이 없는 건지. 그래도 본인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심했다. 앞으로 그런 얘기는 뒤에서 조용조용히 해라. 알았지?”

  경애의 설명에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퀴니. 무슨 소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충 옳은 말인 것 같아서 ‘응.’ 하고 대답했다. 배시시 웃은 경애는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고집쟁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말 참 잘 듣는구나. 그리고 오빠를 보고 ‘내꺼’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야. 사람은 물건이 아니란다.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는 없는 거야. 앞으론 그런 말 절대 쓰지 말아요. 알았지?”

  그러나 방금 전의 말 잘 듣던 아이가 이번엔 또 고개를 휘휘 젓는다.

  “변기. 내꺼.”

  “윽. 얘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니까. 오빠가 들으면 얼마나 어이없겠니. 오빠. 피 좀 그만 토하고 정신 좀 차려봐. 방금 전에 얘가 한 말 들었지? 아이참 경련 좀 그만 좀 일으키고 사람 말 좀 들으라니까. 이럴 때 오빠가 따끔하게 한마디해야 한단 말이야!”

  경애가 거칠게 흔들어대는 통에 정신을 차린 병규는 잠시 경애와 퀴니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끈적거리는 느낌에 턱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보았다. 벌겋게 응어리진 피. 이걸 자기가 뱉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오빠. 뭐라고 말 좀 해달라니깐!”

  경애가 독촉한다. 한참이나 손가락에 묻은 피를 응시하고 있던 병규는 초연한 표정으로 경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나 그냥 퀴니 꺼 할리.”

  “무, 무엇이!”

  쿠쿠쿵.

  아닌 밤중에 날 벼락이라더니. 경애에겐 병규의 말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럴 수가. 전혀 생각도 못한 전개에 예상도 못한 배신이 아닌가. 혼란스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울먹울먹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래. 그랬던 거구나. 집세를 올릴 생각인 거지? 한 달에 500원으론 모자랐던 거야? 알았어. 오빠. 내가 떠날게. 하지만 대신 호랭이는 내게 줘. 나도 오빠를 기억할 만한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말야. 흐앙.”

  울음보를 터트린 경애는 호랭이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컥.”

  담배 한 모금 빨고 싶은 마음을 애완용 개 껌으로 간신히 달래고 있던 호랭이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눈물을 뿌리며 강력하게 태클를 거는 경애의 박력! 천하의 호랭이님이라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스 바디태클로 버둥거리는 호랭이를 덥석 껴안은 경애는 방 한쪽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징징징 울어댔다.

  병규는 아예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녀가 뭘 하든 신경도 Tm지 않고 그저 왜 이리 자신의 인생은 꼬이기만 하는지 골몰할 뿐이었다.

  반면, 경애가 호랭이를 끌고 가는 것을 본 퀴니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그녀는 생각이 단순한 싱물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이 능력은 대상의 사고가 정말로 단순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에, 사람 같은 복잡한 생물에겐 통하지 않아 그다지 효용성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애는 그 속마음이 그대로 훤히 읽혀지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마음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

 퀴니는 생각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에너지라고.

  문득 그녀는 폭풍처럼 솟구치는 그녀의 음성적 에너지에 갇힌 멍멍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구해줄 마음에 한 걸음 다가섰더니 웬걸, 경애가 고양이를 본 개처럼 으르릉대는 것이 아니가. 도저히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안긴 호랭이도 이미 벗어나는 걸 포기했는지 한숨만 포옥 쉬고 있었다.

  “안 돼. 이제 내겐 호랭이밖에 없어. 얘까지 빼앗아가게 할 순 없어.”

  그녀의 절규에 난감해진 퀴니. 무슨 생각 떠올랐는지 싱크대 아래에서 다 찌그러진 자명종 하나를 들고 나왔다.

  “어? 그 자명종은 내가 오빠에게 선물한 건데. 어쩌다 그렇게 망가진 거야?”

  경애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자명종과 퀴니를 번갈아 보며 쳐다본다. 순간 그녀에게서 읽혀진 생각은 ‘자명종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500원 + 500원’

  이상한 공식이었다. 보통사람은 그냥 5000원이라고 할 텐데. 그녀는 모든 돈 계산을 500원짜리로 했다.

  이상한 언니라고 생각한 퀴니는 피식 하는 짧은 웃음과 함께 기상벨 조정침을 또르르 돌렸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마침내 울린 자명종.

  그 순간 경애는 그토록 믿었던 호랭이가 단숨에 자신의 품을 벗어나 자명종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에?”

  채 충격이 가시도 전, 이번엔 자명종을 켠 소녀 역시 한 마리의 야수로 돌변하여 자명종을 향해 돌진한다.

  그놈의 조건반사가 뭔지.

  “무,무슨!”

  황당한 사태에 그녀가 입을 못 다물고 있는 그때, 무언가가 경애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또 뭐야 하며 고개를 돌려본 그녀는......

  “하하. 안녕하십니까. 샤바. 가만 보니 이 댁 사모님 되시는가 보군요. 전 이번에 새로 주인님의 소환충이 된 바퀴벌레 행성의 바퀴벌레 왕자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기상벨 태그매치에 관심 없으세요? 요즘 새 파트너를 모집중인데. 샤바샤바.”

  “......!!”

  샤아아아아아악

  “응? 이거 핏기가시는 소리잖아?”

  명상 중이던 병규는 돌연 들려온 소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머리를 산발한 웬 여자가 치마를 펄럭이며 대로변을 질주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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