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녕하십니까. 바퀴벌레 왕자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어이없는 광경에 병규와 호랭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절로 욕이 나온다.
어찌 욕이 안 나올 수 있을까. 힘겹게 일곱 괴한을 물리치고 몸도 마음도 가볍게 날라라~ 나서는데, 그 앞을 가로막는 다섯 명의 흑의 복면인과 괴물, 그리고 괴물에 준하는 거대한 덩치라니.
게다가 저 놈들. 이런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도 별달리 긴장한 구석이 없다. 게다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새카만 놈들은 아예 대놓고 칼을 등에 메고 있는 게 아닌가.
대한민국 경찰이 엄청 우습게 보였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렇게 버젓이 불법무기들을 메고 다닐 수 있을까.
병규가 속으로 욕을 하고 있을 때, 그나마 냉정함을 잃지 않은 호랭이는 차분히 흑의인들을 둘러보며 긴장감을 높이고 있었다. 일본도를 등 뒤로 비스듬히 비껴 찬 흑의인들에게서 좀 전에 상대한 괴한들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아까 전 그 놈들은 장난이었군.’
굳이 능력차를 계산한다면 세 배, 아니 네 배 정도?
아주 안정적이라고 할까. 좀 전의 괴한들이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껏 방출하고 있다면 이 녀석들은 제대로 갈무리하고 있다.
‘이 검댕이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골치 아프겠어. 저 망할 놈의 괴물도 그렇고. 하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아까부터 호랭이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는 것은 이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덩치였다. 신장은 대략 2미터 30센티미터 정도. 엄청난 키에 또 몸은 얼마나 비대한지 스모 선수들은 감시 그 앞에서 몸매 예기도 못 꺼낼 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괴한 모양인데, 맨들맨들한 대머리에 입과 코를 감싼 강철 마스크, 또 어설픈 폭주족 흉내라도 내는 것인지 가죽을 잘라 만든 것 같은 옷엔 수많은 쇠사슬들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가 울렸다. 가히 스크린에서나 등장할 만한 해괴한 몰골이 아닌가.
생긴 것도 기괴하고 옷차림도 기괴하다. 말투는 더더욱 거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호랭이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놈에게서 아무론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자. 이 녀석은 능력자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능력자는 수호신에게서 힘을 빌어오기 때문에 그 자신은 별 다른 기운을 풍기지 않는다. 때문에 천하의 호랭이조차 능력자를 구별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일은 힘들지도 모르겠다.’
호랭이는 갈기를 잔뜩 일으켜 세웠다.
물론 이 거대한 떡대는 얼마 전 어두운 지하실에서 밀령을 받고 출동한 그 작자, 바로 오가마였다.
‘대화, 이번엔 어떻게는 대화로 해결해야 된다.’
호랭이가 오가마를 보며 긴장을 높이는 동안 병규는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지금 저 인원가 정면으로 부딪혔다간 곧장 천국행 편도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그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오가마와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어떻게든 말로 해결을 봐야 한다. 아니면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하다고 그의 돌 같은 머리마저 급하게 회전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하하하. 저, 저기 무슨 일로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셨나요? 조,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나 보죠? 저희는 지나가던 길에 봉변을 당해서. 아하하하. 갑자기 건물이 왜 무너졌을까? 아이 참. 시원하게 무너졌네. 하하하하.”
라는 썰렁한 얘기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오가마를 비롯한 흑의인들은 깔끔하게 그의 말을 무시했다. 사실 이 중에서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고작 두 명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병규의 발악은 헛짓거리에 불과했단 소리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하하. 바쁘신가 보네요. 그, 그럼 볼일 보세요. 저희는 그만 가, 가봐야겠네요. 하하하.”
스스로도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어수선을 떤 병규는 소녀의 손을 잡은 채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흐읍...... 이상한 놈.”
그의 엉성한 핑계에 대한 오가마의 대답은 그저 손가락 하나를 가볍게 튕긴 것뿐이었다. 순간 오가마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들의 모습이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으악!”
소녀의 손을 붙들고 소박맞은 새색시인 양 쫄랑쫄랑 뛰어가던 병규는 갑자기 발밑에서 칼이 튀어나오자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특유의 순발력과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기습을 피한 그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설픈 핑계가 안 통할 것이란 건 익히 짐작했던 일이지만 돌연 발밑에서 칼이 튀어나올 줄이야. 이번만큼은 호랭이의 경고조차 없어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들은 기척이 읽혀지지 않아.”
호랭이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호랭이에게 기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놈들의 변칙적인 공격에 안 그래도 환장하실 노릇인데 호랭이의 도움마저 없다면 한층 더 힘겨운 대결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
파팟!
칼 두 자루가 땅속에서 튀어나온다. 마치 땅속에 박아 놓은 것처럼 삐죽 튀어나온 칼은 땅 속을 헤엄이라도 치듯 을씨년스런 모양 그대로 땅을 가르며 달려들었다. 사타구니를 갈라오는 두 자루 칼의 그 끔찍함이란.
“우왁. 이건 남자를 두 번 죽이는 공격이라고!”
울부짖듯 소리친 병규는 두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요수의 발톱이 땅속을 푹 파고들자 흙바닥이 폭발하듯 일어나며 흑의인 두 명이 튀어나왔다. 그중 한 명은 요수의 발톱에 당했는지 어깨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제 모습을 보이는구나. 맛 좀 봐라.”
드디어 흑의인들을 보게 된 병규는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뒤로 다다다 물러서야 했다.
또 다른 흑의인 둘이 무섭게 벼려진 일본도 위에 올라탄 채 붕 날아왔기 때문이다.
“이건 사기야. 닌자라면 방패연에 매달려야지. 칼을 타고 다니는 게 어디 있어. 이 개사기 닌자들아!”
병규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그런 병규를 보며 호랭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녀석은 시커먼 놈들의 비겁한 공격 때문에 화가 난 거야? 아니면 시커먼 놈들이 닌자답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답이 무엇이건 간에 병규는 흥분한 화중에도 비교적 깔끔하게 대응해 내고 있었다.
요수의 발톱을 풍차처럼 붕붕 휘둘러대며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일본도를 잘게 쪼개버리고, 그대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몸을 꽈배기처럼 틀며 두 발로 일본도에서 뛰어내린 흑의인 둘을 걷어차 버린다.
마치 시원한 브레이크 댄스를 보는 것 같은 몸놀림.
대응이 얼마나 깔끔하고 시기적절한지 호랭이가 다 놀랄 정도였다.
‘뭐야. 이 녀석. 갈수록 몸놀림이 좋아지잖아.’
경험이 늘수록 강해지는 거야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 녀석은 정말로 하루하루가 다르다.
‘천부적인 감각? 그것도 아니면 숨겨진 능력이 드러나는 것일까?’
호랭이로서도 그 이유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답이 무엇이건 간에 병규의 수호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란 것이엇다.
“앗. 위험해.”
흑의인들의 괴상한 공격에 병규가 정신을 팔고 있는 틈을 타고 땅속에서 솟구쳐 오른 칼 한 자루가 소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놀란 병규가 소리를 지르며 막으려 들자 갑자기 휙 하고 방향을 바꾼다.
“으앗.”
병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칼을 소녀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소녀를 미끼로 병규를 노린 것이다.
“피햇!”
호랭이가 캥 하고 울었다. 거의 동시에 병규의 고개가 발작적으로 돌아갔다.
찍.
회심의 일도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이 녀석들!”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방울방울 덜어지는 핏방울을 응시하던 병규의 입에서 억눌린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요기가 불길처럼 타오르며 요수의 발톱이 순간적으로 두 배 가까이 길어진다.
“감히!”
성난 분노의 불길이 땅 밑을 파고들었다.
퍼펑.
폭발하듯 흙이 터져 나가고 땅 속을 파고 들어간 그의 손아귀에 흑의인 한 명이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왔다.
“!”
시퍼렇게 빛나는 병규의 두 눈을 보게 된 흑의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간다. 한 밤에 만난 사신이 자신의 목에 낫을 들이댈 때의 그 절망과 막막함이라고 해야 할까.
“손은 쓰지마.”
호랭이가 경고했다.
무쇠조차 쩍쩍 갈라버리는 손톱이니 사람을 썰었다간 어찌 될까. 모르긴 몰라도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기들 보다 모양새가 안 날 거이다.
“알고 있습니다.”
병규는 분노가 불처럼 이글거리는 상황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제대로 알아들었다.
퍽.
둔탁한 소리. 순간 흑의인은 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엎어졌다. 창자가 가닥가닥 찢어지는 고통이란.
웩웩.
사내는 그대로 상체를 접은 채 위장에 든 것을 토해 냈다. 병규는 구토하고 있는 사내를 차갑게 내려보았다.
“비겁한 녀석.”
그는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발로 밟아버렸다.
“큭.”
발아래 깔린 녀석의 머리통이 바르르 떨리다가 곧 축하고 쳐진다.
쉬쉬쉭!
동료를 구하기 위해 복면인 둘이 성게 모양의 표창을 날렸다. 흑의인들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 하나 단순한 것이 없었다. 그 작은 표창들마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복잡한 괘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것들이.”
병규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부아앙.
손가락 끝에서 길게 뻗어나간 요수의 손톱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길게 울부짖는다. 그 울부짖음이 그리는 궤적에 수많은 암기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고, 요행이 요수의 갈퀴 사이를 파고든 몇 개의 암기는 병규의 눈부신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저 맨 허공을 갈랐다.
“나 화났다.”
병규의 성난 분노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린다. 어린 소녀까지 이용하는 놈들의 치졸한 공격에 드디어 그의 눈이 뒤집힌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한바탕 성난 괴성을 토해 낸 그는 요수의 발톱을 인정사정없이 휘두르며 흑의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한지 차분하고 조직적인 공세를 펴던 흑의인들조차 일시 당황하며 놀란 메뚜기인 양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고, 병규는 질풍노도의 기세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리와아!!”
그러나 그는 그렇게 분노하여 막무가내로 달려 나간 때문에 소녀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걱정스런 표정으로 병규를 보고 있던 소녀는 문득 자신의 주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름?’
무심코 위를 올려다 본 소녀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거대한 거한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오로치가...... 찾는 꼬맹이가...... 너냐? 흐음. 어리......군.”
거한은 다름 아닌 오가마였다.
어린아이라면 경기 일으키기 딱 좋은 몰골의 오가마. 그러나 그의 뒤에 우두커니 선 괴물에 비하면 그는 그나마 준수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까드드드드드.
목을 부풀리면서 나는 기이한 울음. 그리고 그 코를 쥐게 하는 독한 냄새란. 게다가 키는 얼마나 큰지 머리 꼭대기를 쳐다보기 위해선 작은 소녀는 아예 뒤로 누워야 할 판이었다.
“하.......”
갓파를 올려다보던 소녀의 동공이 활짝 열린다. 그리고 급기야 그 작고 앙증맞은 입술도 활짝 열려 버렸다. 하지만 소녀의 입술을 뚫고 나온 소리는 누구나 상상하던 그런 비명이 아니었다.
“화아.”
탄성. 그리고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꽃송이처럼 영롱한 웃음. 놀랍게도 소녀는 갓파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 황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민 채 타박거리는 걸음으로 갓파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괴물의 숨소리가 높아진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오가마였다.
“흐읍. 안 돼!”
거칠게 외친 오가마는 막 갓파의 발을 잡으려드는 소녀의 앞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엄청난 주먹 힘에 땅이 반 자가량 푹 꺼져버렸다. 소녀는 깜짝 놀라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서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오가마는 소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분위기로 말뜻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갓파를 가리키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흐읍. 죽고...... 싶냐? 이 녀석......은 사람을 먹는다. 흐읍. 지금도...... 간신히 다루고 있는......데. 네가 건들면...... 후읍. 당장 먹어 버릴걸?”
이것은 결코 소녀를 위협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부리고 있는 갓파는 사람의 뇌수를 즐긴다. 그리고 통제가 제대로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야마타노 오로치의 강력한 최면으로 간신히 부리고는 있지만 언제 어떤 계기로 금제가 풀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가마가 이 골칫덩어리를 굳이 데려온 것은 혹여나 반도의 능력자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경찰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오가마의 그런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하긴 아예 그의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니.
그녀는 두 볼을 팽팽하게 부풀리며 오가마에게 소리쳤다.
“어린 아이. 안 나빠. 아저씨. 나빠.”
부정확한 발음으로 소리친 그녀는 갓파를 올려다보며 맑은 음성으로 외쳤다.
“착한 아기. 나쁜 아저씨. 혼내.”
“흐읍. 뭐라는 거냐. 흐읍. 기분...... 나쁜 계집. 일단...... 흐읍. 네 입부터 막아야...... 겠군.”
오가마는 솥뚜껑 같은 두 손으로 소녀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소녀를 한 치 앞에 두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콱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읍. 어떤.......”
고개를 돌리자 녹색의 커대한 덩어리가 눈 안으로 가득 차 온다. 그를 내려다보는 세로로 커다랗게 갈라진 것은 놀랍게도 눈동자.
황망하게도 그의 어깨를 잡아 붙든 것은 제어되지 않는 괴물, 갓파였다.
“흡. 뭐......?”
그의 답답한 숨소리가 빨라진 순간, 도저히 움질일 것 같지 않은 오가마의 거대한 몸이 붕 떠올라 그대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아아앙.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린다.
“이런. 흐음.”
오가마는 땅바닥에 누워버릴 것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인정하긴 싫어도 분명한 사실. 그리고 그를 메친 것은 지금까지 수족처럼 부리던 괴물, 갓파다.
“마수를...... 마음대로...... 흡. 부릴 수...... 있다는 말. 흡. 사실이었군.”
놀라 부르짖는 그를 갓파가 지그시 내려다본다.
까드드드드드.
놈의 목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착한 아기. 부탁해.”
갓파에게 한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준 소녀는 곧바로 병규에게로 뛰어갔다.
병규는 아직까지 눈이 뒤집힌 상태 그대로였다.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흑의인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좋지 못한 상황이다.
처음엔 그의 과격한 행동에 당황하던 흑의인들이었지만 지금은 차츰 태세를 정비하며 조직력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가 타박거리는 뜀박질로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흑의인 하나가 칼로 병규의 머리를 찍어내고 있었다.
놀란 소녀는 급히 두 손으로 인을 맺으며 힘껏 소리쳤다.
“실드!(Shield)"
"이놈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병규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호랭이는 정말로 필사적으로 외쳤다. 처음 열이 뻗쳤을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이성이 잇는 것 같더니 지금은 완전히 미쳐 날뛰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는 지 주위 기척을 좇아 동물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이 뒤집히면 앞이 안 보인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정말 그러는 놈은 처음이네. 오래 살다 보니 별의별 놈을 다 보게 되는구나.’
호랭이는 어떻게는 병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의 귀를 깨물기도 하고 어깨를 할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병규는 더더욱 날뛸 뿐이었다. 이쯤 되자 호랭이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무섭게 돌아치는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도 힘에 벅차다.
그런 와중에 호랭이는 보게 되었다. 병규의 머리를 갈라오는 한 자루의 칼을!
“이놈아. 정신 차려!”
호랭이는 목이 터져라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우뚝. 혼신을 다한 것이라 봉인된 신력이 흘러나왔는지 이번엔 약간이나마 효과가 있었다. 발광하던 병규의 몸이 잠시 멈춰진 것이다. 그러나 피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칼은 이미 병규의 이마를 쪼개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가냘픈 소녀의 음성이 들린 것은.
“실드!”
그리고 믿지 못할 기적이 일어났다. 병규의 머리 위로 거무스름한 빛깔의 투명한 막이 생겨난 것이다.
짜가강.
투명한 막과 검이 부딪히자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다. 투명한 막은 유리 깨지듯 산산이 부서졌지만 사내 역시 무사하진 못했다. 용하게 칼을 놓치진 않았지만 반탄력으로 호구가 찢어지며 뒤로 벌러덩 자빠져 버리는 것만은 면할 수 없었다.
“큭!”
그 와중에 병규가 정신을 차렸다. 눈앞을 번득인 현란한 칼 빛과 찢어지는 소음이 자극이 되었던 모양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놈아. 이제 정신을 차렸냐? 상황 파악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자. 저 녀석. 넘어진 녀석을...... 빨리!”
호랭이의 급박한 재촉에 병규는 혼란스런 상황에서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발로 녀석의 가슴을 찍어 버렸다.
뽀각.
“컥.”
뼈 부러지는 소음이 터졌다. 모르긴 몰라도 갈비뼈 두세 대는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부족하다. 갈비뼈가 부러져도 사람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 물론 바라의 기운을 이용해서 칼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호랭이는 어정쩡하게 쓰러트려서 후환을 남기느니 아예 기절시키는 쪽을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놈 말고도 상대해야 할 녀석이 셋이나 남았다.
“확실하게 기절시켜.”
호랭이의 호령에 벌떡 일어난 병규는 엎어져 있는 사내를 향해 발을 날렸다. 혹시나 부러진 가슴뼈가 폐를 찌를까 봐 아예 눈 딱 감고 뒤통수를 힘껏 찼다.
퍽.
수박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의 질퍽한 소음이 터지며 사내의 몸이 축 늘어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사내를 기절시킨 병규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따. 눈앞에 붉게 보이고,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다. 잠깐 동안 정신을 놓았던 것 같은데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녀석아. 너 잠깐 정신이 나갔었단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글쎄요.”
병규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잠깐 정신이 나간 걸까. 도무지 모르겠다. 녀석들이 소녀까지 이용하는 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혹시 내 수호신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혹이 강하게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따름이다.
“아직도 딴 생각이냐? 아직 세 놈이나 남았다. 정신 바짝 차려.”
호랭이의 호통에 병규는 느슨해진 경각심을 곧추세웠다.
과연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에 잠시 주춤했던 놈들이 즉각 반격을 가해왔다.
두 녀석이 현란하게 몸을 날리며 병규의 좌우로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영악하게도 조금 거리를 두고 각종 암기들을 소나기처럼 뿌려댔다.
‘다 막는 건 불가능해.’
빠르게 판단한 병규는 가볍게 발끝을 튕겼다. 그의 몸이 긴 호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발밑으로 암기들이 스쳐간다. 몰론 영화에서처럼 빗나간 암기들을 사이좋게 대신 맞아주는 멍청한 엑스트라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암기가 빗나가자마자 두 녀석은 곧장 그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칼을 비켜 세우며 날아드는 놈들의 눈가에 득의의 미소가 떠오른다.
멍청한 녀석. 허공에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 급한 마음에 몸을 띄웠겠지만 그것이 도리어 제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생각이었다. 물론 허공에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흑의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그들이 더 이상 암기를 쓰지 않고 칼로 병규를 베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암기를 던지고 싶어도 방금 다 소비해서 어쩔 수 없었겠지.
휘이이잉.
병규가 팔랑개비처럼 몸을 휘돌자 시리도록 푸른 음영이 허공에 그려졌다. 그가 가진 최대의 무기. 요수의 발톱이었다.
쩌거겅. 쩌겅.
흑의인들의 칼은 그야말로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채 일그러지기도 전에 병규의 두 다리가 날아들었다.
퍼퍽!
둔탁한 소음이 터지고 두 흑의인은 볼품없는 모양으로 땅을 굴렀다. 쓰러지는 그들 사이로 병규가 고양이처럼 날렵한 자세로 뛰어내렸다.
멋들어지고 완벽한 승리. 여유만 있으면 승리의 V 자라도 그려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 장면에 그가 상상도 못한 반전이 있을 줄이야. 쓰러진 줄로만 알았던 흑의인들이 별안간 몸을 굴러 병규의 팔과 다리에 엉겨 붙는 것이 아닌가.
“엇?”
놀란 병규는 몸을 거칠게 흔들었지만 그들은 꿈쩍도 않았다. 심지어 요수의 발톱이 허벅지살을 마구 헤집어 놓는데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엉겨 붙어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흑의인이 검을 빼어들고 달려들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 셈이다.
두 흑의인에게 잡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 동료의 희생을 딛고 병규를 향해 단도를 날리는 놈의 입가에 미소가 보였다. 그러나.......
취리릭.
채찍 소리? 막 칼을 날리려는 순간, 뭔가 뭉클한 것이 얼굴을 쓱 훑어오는 것이 아닌가. 칙칙하고 끈끈한 무엇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자동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그는 제대로 수련을 거친 고수. 무의식적인 반응과는 별개로 두 팔은 그대로 병규를 베어갔다.
그러나 눈을 감는 바람에 그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달려드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호랭이님께서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병규와 사내 사이에 다리처럼 놓여진 긴 혓바닥. 그 위를 바람처럼 내달린 호랭이는 발톱을 팍 세워서는 막 표창을 날리려 하는 사내의 얼굴에 긴 사선을 그어 주었다.
“끄악!”
면상이 찢겨나가는 통증에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퍼펑.
두 번의 폭음. 그리고 뭔가 묵직한 것이 쓰러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는 얼굴에 묻는 축축한 것을 손으로 쓱 문대며 재빨리 앞을 살폈다.
맙소사.
잠깐 사이 목숨을 걸고 적의 손발을 묶었던 두 동료는 배를 부여잡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섬뜩한 음성.
“퉤퉤. 너 감히 내 순결한 혓바닥으로 너의 면상을 핥게 했지? 괘씸한 녀석. 혓바닥의 순정을 가져간 악독한 놈. 넌 다른 놈보다 딱 두 배만 더 맞아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일행 중에 드물게 한국말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거짓말!!!’
그는 소리쳤다. 자신의 얼굴을 쓱 훑고 지나간 게 이 녀석의 혀라고?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잖아!
“아리에나이!(말도 안 돼)”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를 무참히 짓밟는 병규의 한마디.
“시끄러! 뭐라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 일단 맞아!”
퍽퍽퍽퍽퍽.
음침한 골목길을 통쾌하게 울리는 소음. 털썩. 마침내 묵은 쌀자루같이 사내가 퍼져버렸다. 그런데 상태가 다른 녀석들에 비해 영 안 좋다. 거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가 아닌가. 가만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한마디 툭 던졌다.
“두 배 라매?”
“이 정도도 많이 봐 준 거예요. 퉤.”
땅바닥에 침을 툭 뱉으며 불만스레 대답하는 병규였다.
그럴 수밖에, 첫날 밤 새색시에게 주기 위해 고이 간직하고 있던 혓바닥의 순결(?)을 엉뚱한 놈이 가져갔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급하게 뻗어내느라 그만 녀석의 입술에 혀가 잠깐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후우”
병규와 호랭이가 흑의인들과의 싸움에서 무사히 승리를 거두자 소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겼다.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착한 아기’가 생각났다. 무서운 아저씨를 상대로 잘하고 있을까? 잘하고 있을 거야. 그 아인 무척 강한 힘을 가졌으니까.
소녀는 ‘착한 아기’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순수하고 맑은 눈에 ‘착한 아기’의 거대한 등이 보였다.
녹색 이끼와 지글지글 주름진 피부, 거기에 검버섯처럼 드문드문 피어 있는 곰팡이들.
헛구역질이 절로 날 정도로 징그러운 모습이었지만 소녀의 눈에는 오히려 귀엽게만 보였다,
“착한 아기.”
소녀는 이상하게 추악한 괴물을 아기라고 불렀다. 그것도 착한 아기라고. 저 거대한 덩치를 보고 왜 ‘착한 아기’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는지 의문이다.
“힘내.”
그렇게 소녀가 방긋 웃으며 타박타박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까드드드드드.
괴성에 가까운 울부짖음.
소녀의 걸음이 문득 멈춰졌다.
“착한 아기. 왜?”
그녀의 검은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찍!
듬직하게만 보이던 괴물의 거대한 어깨 한쪽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 사이로 샘솟듯 솟구치는 징그러운 녹색 피.
찌지직.
균열이 점점 더 심해지고 더 많은 피고 솟았다. 균열 사이로 피에 물든 허연 어깨뼈가 보인다.
가슴 앞에 모인 소녀의 두 손이 덜덜 떨려 온다. 그 떨림은 ‘착한 아기’의 몸에 생긴 균열이 심해질 때마다 점점 더해만 갔다.
쫘아아아악!
벼락? 소녀의 귀에는 정말 그렇게 들렸다. 그 거대한 괴물의 등짝이 젖은 헝겊처럼 허무하게 좌우로 찢겨져 나가고 그 사이로 핏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철퍽!
땅바닥에 쏟아진 핏물이 묵직한 소음을 토하고 범람하는 강물처럼 주르르 퍼져 나간 녹빛 강물은 소녀의 발목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며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그리고 그 녹색의 핏물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징그러운 내장들.
소녀의 두 눈에서 영롱한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착한 아기. 일어나. 일어나.”
그녀의 가녀릴 두 어깨가 구슬프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달픈 울음소리는 곧 이어 들려온 탁한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후웁, 애...... 먹이는......군.”
양쪽으로 찢겨져 너덜거리는 괴물 사이로 오가마의 기괴한 몰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양손은 좌우로 뜯겨나간 괴물 조각을 쳐들고 있었다.
설마, 맨손으로 갓파를 찢어발겼단 말인가? 그 엄청난 괴물을?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젖은 빨래처럼 그의 양손 아래 축 늘어진 괴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흡.”
오가마를 본 소녀의 입이 한껏 벌려졌다. 무엇에 놀란 듯 그녀의 맑은 두 눈마저 크게 확장되었다.
입. 괴물과의 격투로 벗겨졌는지 그의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가 어딘가로 없어지고 없었다. 그런데, 저것이 진정 사람의 얼굴일까? 그에겐 코와 입이 없었다, 대신 깊에 움푹 들어간 엄청난 흉터.
거대한 철근이 머리의 절반 가까이 파 들어간 것 같은 엄청난 흉터였다.
“흐읍. 물이...... 없으니. 흐읍. 이 녀석 재생...... 걱정은 없겠군. 흐읍.”
오가마가 두 손을 놓자 피륙을 모두 쏟아낸 괴물의 거죽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퍼덕,
파란 핏물을 튀기며. 그 처참한 소리에 소녀는 저도 모르게 두 귀를 막았다.
“흐읍, 자...... 이제 못다 한 얘기...... 흡. 해 볼까?”
찌극. 찌극.
아직 살아 펄떡펄떡 뛰는 괴물의 내장을 밟아 터트리며, 오가마의 거대한 몸이 소녀를 덮어갔다.
“맙소사. 뭐 저런 괴물이.”
병규의 몸이 덜덜 떨린다. 절대적 절망감이라고 할까. 비 오는 날 아스팔트 위에서 그렇게 애먹으며 간신히 침묵시킨 괴물이 저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녹색의 피 안개 속을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오가마의 거대한 모습은 가히 지옥의 틈바귀에서 흘러나온 사신의 그것처럼 비춰졌다. 절로 몸과 마음이 위촉되어 버린다.
더불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의혹.
‘대체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작은 소녀 하나를 잡기 위한 인원치고는 너무 거창하다. 벌건 대낮에. 닌자 같은 놈들게 괴물, 거기다 그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놈까지. 설사 미국 대통령 딸을 납치한다고 해도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병규가 정신적인 혼란에 빠져있을 때, 호랭이가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병규야. 도망이다. 저 아이를 데리고 달아나자."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신선, 연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생각해 내니 말이다.
병규는 즉각 몸을 움직였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다. 가녀린 소녀는 금방이라도 오가마의 큰 손이 잡힐 듯이 보였다.
온힘을 다한 병규의 몸은 그야말로 한 줄기 바람과 같았다. 아니. 그것으론 부족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병규는 이미 오가마의 손아귀에서 소녀를 낚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꽉 잡아!"
소녀를 부둥켜안으며 소리친 그는 정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렸다.
"흐읍?"
오가마는 문득 손아귀에서 없어진 소녀의 존재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동자를 슬쩍 들어올리자 이미 20여 미터 밖을 신나게 내달리고 있는 병규의 등이 보인다.
"어딜 감히."
오가마가 한 손을 내밀었다.
쑥~!
"헉!"
병규는 돌연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슨 일이야!"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진 호랭이가 데굴데굴 땅을 구리며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힘없이 대답한 병규는 고개를 품으로 돌렸다.
"괜찮니?"
뺨과 코에 검댕이 잔뜩 묻은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요란하게 넘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두 손으로 소녀를 꼭 감싸고 보호했던 것이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 병규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되지 않았다. 일어서기는커녕 팔에 힘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억눌린 것과는 달랐다. 힘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증상은 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젠장. 왜 이래."
호랭이는 등을 땅에 대고 발라당 누운 그대로 괴로운 비명을 질렀고, 소녀는 병규에게 깔린 채 가쁜숨을 할딱였다.
"저 녀석의 능력이 바로 이거구나."
"힘을 줄 수가 없어요."
"두꺼비. 녀석의 수호신은 사람의 생기를 흡수하는 두꺼비 놈인가 보다."
"그럼 어떻게 하죠?"
"없어. 적어도 지금 이 몸으로는. 돌아버리겠네. 도력이 돌아오면 간단한 일인데."
호랭이가 안타까운 듯 소릴 질렀다.
치르릉. 치르릉.
귓전을 때리는 쇳소리. 오가마의 몸에 붙은 쇠사슬이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을 토하고 있었다.
놈이 다가오고 있다.
걸음이 느리긴 하지만 이렇게 손끝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라면 녀석의 걸음이 지금보다 몇 배 느리더라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
"경찰들은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건물이 무너진 게 언젠데 아직도 안 나타난단 말인가. 아니 이런 소란인데도 인근 주민들은 눈과 귀가 멀었단 말인가. 신고를 해도 수백 통은 했어야 할 텐데.
'이대로 당해주긴 너무 화가나. 무슨 방법이 없을까?'
호랭이는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는 오가마를 주시했다. 녀석의 한 손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걷는 게 힘든 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녀석은 치켜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저 손. 분명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손이 가리키는 구역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호랭이는 발을 움직여 보려 애썼다. 안 된다. 미동은 하지만 제대로 움직여지진 않는다.
'그럼 어쩐다? 몸은 꿈쩍도 할 수 없는데. 대체 뭘 움직여야!"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병규야!"
"네?"
병규가 눈만 데구루루 굴려 호랭이를 보며 대답했다.
"그렇군. 말은 할 수 있구나."
호랭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마도 온몸의 근육 중에서 가장 힘이 센 근육이 혀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생기를 뺏기는 부위의 우선순위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증거다.
'말은 가능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은 호랭이의 말은 병규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
"병규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네?"
"묻지 마라. 시간이 없다. 조금 있다 내가 신호하면 네 혀로 힘껏 날 밀어라. 있는 힘껏! 멀리 날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몸에 기운ㄷ이 돌아오면 전속력으로 뛰어라 방향은 아무 쪽이나 상관없다. 알았지?"
"...... 알았어요."
"좋아. 그럼."
잠깐 심호흡을 한 호랭이가 입을 ㅎ나껏 벌리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촤라락.
병규의 혀에서 채찍처럼 뻗어나간 물컹한 살덩이가 호랭이를 밀었다. 호랭이가 워낙에 가벼워 밀어내는 것은 크레 어렵지 않았다.
땅위를 구르며 주르르 미끄러져 나간 호랭이.
"움직일 수 있다."
호랭이는 네 발을 곧게 추스르며 반갑게 소리쳤다. 역시나 녀석의 능력은 일정한 범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호랭이의 계획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엇?"
과연 호랭이의 기대대로 오가마는 호랭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 그 손으로 날 가리키는 거야.'
호랭이의 계획이란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었다. 본래 사람의 의식이란 예상치 못한 현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면이 있다. 가령 떨어진 사과 하나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다 사과 전부를 쏟아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
호랭이가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오가마는 능력의 범위에서 빠져나간 작은 짐승에 정신이 팔려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고, 호랭이의 기운이 빠지는 순간 병규가 벌떡 몸을 일으킬수 있었다.
"됐다."
"달려!"
환호성과 같은 호랭이의 외침.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그러나 오가마의 다른 손이 움직이고, 달려가려던 병규가 앞으로 크게 꼬꾸라지면서 그 계획은 엉망진창이 된 채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젠장. 두 손으로 각각 펼쳐낼 수 있는 능력이었군."
호랭이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이젠 정말 방법이 없다. 최후만이 남은 것이다.
그때 병규의 품속에서 작은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컴컴한 어둠 속으로 스며든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Grease)"
"흐업."
돌연 오가마의 왼발이 쭉 미끄러지면서 다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놈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대체."
병규는 의문으로 가득한 눈을 소녀에게 보냈다. 소녀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복잡한 인을 그리고 있었다.
'모를 일투성이로군. 하지만 지금은 우선.......'
병규는 오가마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어차피 저 녀석의 능력 앞에서 도망가는 건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끝장을 내자."
호랭이가 병규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왔다.
상대는 상상도 못할 능력자. 하지만 이제 그 힘이 두 손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을 절단 내 주마!"
힘껏 소리친 병규는 땅바닥을 힘껏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새처럼 날아오른 그의 두 팔에서 갈퀴 같은 요수의 발톱이 무려 두자나 뻗어 나왔다.
"흡. 감히......!"
비틀거리던 오가마가 급히 손을 뻗었다.
퍼펑!
거친 폭음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회오리치듯 솟구쳐 올랐다.
철커덩.
수인으로 맺었던 마나를 풀며 가쁜 숨을 내쉬던 소녀는 문득 들려온 쇳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병규가 땅을 박찬 자리에 작은 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과거 호랭이가 주워온 물건으로 과거 발칸이 차원을 넘어올 때, 아공간에서 우연찮게 구한 미지의 물건이었다. 그동안 병규과 호랭이는 이 상자 안에 혹여나 귀중한 것이 들어 있지는 않을까 열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 결국 반 포기상태였는데 혹여나 능력자들 중에 잠긴 물건을 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랭이의 조언에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챙겨오게 되었다. 하지만 파티다 뭐다 정신없이 놀다보디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소녀는 눈을 빛내며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 표면에 복잡하게 음각되어 있는 그림들. 그러나 그녀의 눈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어엿한 문자로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마치 노래와 같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암흑에서 태어나 어둠의 자유를 그리는 그대여. 그 잿빛 날갯짓에 하늘을 숨죽이고, 성난 발걸음에 세상을 잠재우는 외로운 종결자. 이제 깊은 암흑 속에 웅크린 그대의 여섯 발자국이 영겁의 수면의 깨고 척박한 대지 위에 깊은 족적을 남기리니. 마신의 어린자식들이여. 결배할지어다. 그대......."
주문이 계속됨에 따라 소녀의 작은 몸이 허공을 조금씩 떠올랐다. 그렇게 무려 일 미터가량 떠올랐을 때.
부웅.
돌연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상서롭지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맞닿은 상자의 금속부분이 침식되듯 검게 물들어갔다. 먹물이 묻은 듯 상자에 음각된 백색그림들이 지워지고, 마침내 쩌정 하는 유리 꺠지는 듯한 소음.
그리고 다음 순간!
해머로 찍고 바이스로 압축해도 열리지 않던 상자의 표면이 모빌조각처럼 촤르륵 일어나더니 윗부분이 갈라지며 철커덩 열려버리는 것이었다.
촤아악.
빛 무리. 상자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빛은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따사롭고 따뜻한 느낌의 그것이 아니었다. 검은 먹구름 같은 어둠의 빛이 스멀스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압축된 듯한 어둠의 광체는 감은 눈꺼풀 안으로 들어와 동공을 직접 자극한다.
츠츠츠츠츠.
둥둥 떠올랐던 소녀의 몸이 조금씩 가라앉자, 반대로 검은 빛 덩어리는 물속으로 헤엄치듯 위로 떠올랐고, 소녀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쉬쉬쉬쉬.
바람소리가 일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암흑의 빛이 빨려들듯 중심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잠시 후, 암흑의 빛을 모조리 흡수한 검의 덩어리의 표면이 흑영처럼 번들거렸다.
꿀꺽.
병규의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호랭이 역시 혼란스런 표정으로 뚫어져라 검은 덩어리를 쳐다봤다. 막 병규와 일격을 나누던 오가마는 으스스한 눈길을 잔뜩 찌푸리며 검은 덩어리를 응시했다.
무얼까. 저건 대체.
꼬리뼈에서 시작된 전율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끝을 스치더니, 온몸의 솜털마저 파르르르 솟게 만든다.
이 순간, 모든 시간의 흐름자저 정지된 듯 모든 이의 시선은 검은 덩어리에 몰렸다.
파삭.
검은 덩어리가 미동하자 모든 이가 흠칫 놀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둥둥 떠 있던 검은 덩어리가 살그머니 펴졌다.
납작하게 붙어있던 검은 등껍질이 부스스 쪼개지며 얇은 피막 같은 날개가 드러났다. 뒤이어 가시 같은 3쌍이 발들이 촤르르~ 펼쳐진다.
파드드드드.
날개가 움직이자 귀에 거슬리는 소임이 인다.
"저...... 저건은 설마!"
병규의 눈이 놀라움에서 경악으로 급격히 변질되었다. 암흑 덩어리에서 깨어난 존재. 그것은, 아니 그것의 모습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무엇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혐오스러운, 그리고 그의 방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존재.
기지개를 한 그것은 훑어보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놀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여섯 개의 다리를 활짝 펴 보이며 명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바퀴벌레 왕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