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권) (9/102)

1. 개미핥기가 울고 갈 가공할 만한 혓바닥

  취리릭.

 기묘한 파공성.

 병규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채찍과 같은 그림자가 식탁 위의 접시를 향했고, 사람들이 채찍(?)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엔 이미 케이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병규는 입에 무언가를 한 가득 머금은 채 우물추물하고 있었다.

 “......?”

 “......!”

 떠들썩한 실내에 돌연 정적이 찾아왔다. 전경희를 비롯한 사람들은 지금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그의 입에서 뭐가 휙 나와서 케이크를 홱 하고.”

 “채찍 같은 것이.”

 뒤늦게 탁구공이 전경희의 발치에 떨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순식간에 케이크 조각을 낚아채 간 채찍(?)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챙그랑.

 예란이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이어 그녀는 의문과 경악이 반반쯤 섞인 음성으로 발했다.

 “혀, 혀가.”

 “메야?”

“설마. 방금 그게 혀였단 말야?”

 병규에게로 묻는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모두들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병규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예. 협니다.”

 그는 입을 벌리고 혀를 길게 빼내어 보였다.

 “얼마 전부터 혀가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날 수 있게 돼서요.”

 그는 혀를 길게 늘여서는 케이크가 있던 식탁 위의 접시를 날름날름 핥아 보였다.

 “.......”

 사람들의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병규는 나름대로 재주랍시고 과시한 거지만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몇 미터나 길게 늘어난 혀가 접시를 싹싹 핥고 있는 모습이 결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사사삭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표정은 병규의 재주를 신기해한 다기보다는 혐오스런 벌레를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한쪽에서는 조준엽이 구충제를 뿌린답시고 그의 주위에 독을 살포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특재대가 외계인을 들이기 시작했냐?”

 “혀가 쏙...... 혀가 쏙.......”

 “흑흑. 무서워.”

 “지구에 온 목적이 뭐냐!”

 여기저기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경악성들, 그리고 비명소리가 사태의 심각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 뭔가 또 실수한 거야?”

 병규는 울상이 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능력을 보이라고 해서 할 수 있는 재주를 해 보인 것뿐인데. 그때 그렇게 좌절하는 병규 옆, 전경희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굻었다.

 “못 이겨. 도저히 못 이겨.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겨. 절대로 절대로 못 이겨.”

 그녀는 난생 처음 절대적인 패배감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푹~~!!

 병규의 심장에 비수 박히는 소리가 터졌다.

  그렇게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 대충 특재대 인원에 대한 소개가 끝났다. 이 밖에도 몇 명의 능력자들이 더 있었지만. 바쁜 관계로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흠. 그런데 특별히 초대한 게스트가 이직 안 왔네.”

 “게스트?”

 병규의 물음에 운석의 얼굴에 게슴츠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네가 아주 좋아할 만큼 귀여운 손님이지.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네.”

 “아, 제가 조금 전에 봤어요.”

 쟁반에 맥주잔을 들고 다니던 권예란이 말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보니 들어오는 것 같던데 아직 안 왔어요?”

 그 말에 운석은 두 눈을 가늘게 벼리며 주위를 둘레둘레 살폈다.

 “어디? 어디? 에이. 없는데.”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지?”

 권예란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괜찼을 거야. 좀 맹하긴 해도 길을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니까.”

 말을 마친 운석은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는지 돌연 껄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주사도 참 독특한 사람이다. 말이 RH이는 것도 아니고 얼굴도 말짱한데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니 원. 그나저나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인 사람이 대체 누굴까.

 ‘귀여운 손님이라. 역시 능력자겠지?’

 병규는 운석이 초대했다는 손님이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지만 그 특별 게스트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소 소박한 병규의 환영파티는 끝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툭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저씨, 총각, 친구 같은 분위기 같아 병규는 나름대로 서먹함을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어두침침한 지하.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실내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을 완전히 쫓아내기엔 무리가 따랐다. 때문에 텅 빈 실내에 웅크리고 있는 세 사람의 발 아래엔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병풍처럼 한쪽에 가지런히 서 있는 거대한 석상이었다. 관리를 안했는지 울퉁불퉁한 표면에 물이끼 같은 것이 잔뜩 끼어 있었다.

 “흐읍. 그녀를...... 흐읍, 찾았다.”

실내에 웅크리고 있던 세 사람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호흡기에 문제가 있는지 숨을 쉴 때마다 폐병환자처럼 힘겨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잘됐군요.”

 세 사람 중 다른 하나가 대답했다. 앞서의 사내가 가래 끓는 듯한 불쾌한 음성이었다면 그의 것은 너무 가볍고 날카로워 요사함마저 느껴지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런데...... 쉽지...... 흐읍. 않을 것 같다. 쓸데없는 버러지가...... 흡. 붙어있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지요. 하지만 꼭 애햐 합니다. 대계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그의 음성엔 주위를 자극하는 묘한 흥분이 어려 있었다.

 “흐읍. 내가...... 가지.”

 차가운 음성의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두꺼비같이 넙죽 엎드려 있던 사내가 뒤쪽의 석상을 턱짓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를 탈출한 갓파 몇 마리가 말썽을 부린 덕분에 반도 녀석들이 바짝 긴장한 모양입니다. 풍가들을 함께 데려가십시오.”

 “흐읍. 그렇게...... 하지.”

 짧게 대답한 두꺼비 같은 자는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여태 침묵하고 있는 자에게 정중히 절했다. 바짓단에 작은 주렁주렁 매달린 쇳조각 때문에 움질일 때마다 소음이 일었다.

 끼그극.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굳은 듯 서 있던 거대한 석상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

 석상이 움질일 때마다 지하실이 공허한 울림을 토해 냈다. 그런데 그 석상. 어딘가 눈에 익다. 3미터에 이르는 큰 키. 몸보다 긴 팔 다리, 지독한 악취.

 철컹철컹 하는 소음과 함께 창고를 막고 있던 거대한 셔터가 올라갔다. 그리고 음침한 사내와 거대한 괴물은 셔터 밖으로 펼쳐진 눈부신 빛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쾅 하는 소음과 함께 사내와 괴물을 집어삼킨 빛이 사라졌다. 셔터가 다시 내려간 것이다.

 찰캉찰캉.

 신경 거슬리는 소음이 점점 멀어지다 끝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과묵한 사내의 입이 열렸다.

 “괜찮겠는가?”

 요사스런 음성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폭풍의 군주시여.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마지막 사내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우려가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혹여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걱정하실 것 없사옵니다. 이런 작은 나라의 능력자들쯤이야 감히 당신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무래기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혹여 그가 이 일을 알게 될까 걱정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사내가 언급한 그가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묵한 사내의 음성에 두려움 따위는 묻어있지 않았다. 다만 될 수 있으면 귀찮음을 피하자는 정도의 느낌뿐이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오직 ‘그’뿐이다. 만약 우리의 움직임을 그가 눈치 챈다면 일이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다.”

 “심려 마십시오. 오가마. 그라면 틀립없이 잘해 낼 것입니다.”

 요사스런 사내의 입가가 벌어지며 소리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파티는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여러 능력자들과 어울렸던 병규는 다음날 오전에야 특재대의 지하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도로는 차량으로 꽉 차 있고, 거리는 토요일 주오일제 근무의 영향 때문인지 오전임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특재대를 나온 병규는 정처 없이 서울 시내를 활보했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자영에게 들은 가문의 속사정. 사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두둥 하는 충격은 없었지만 심경은 조금 복잡해졌다.

 왜 아버지는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은 것인지. 형들과 누나들도 자신처럼 이상한 능력이 있는 것인지. 어쩌면 신비한 능력을 가진 가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옛말일 뿐이고, 이제는 자신만 빼고는 모두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전화로 물어보고 싶지만 집을 뛰쳐나올 때 다짐한 것이 떠올라 괜히 가슴만 더욱 답답해졌다.

 태풍이 휩쓸고 간 서울의 풍경. 거리는 강풍과 폭우로 엉망진창이었지만 하늘만은 여느 때보다 맑았다.

 “가을도 아닌데 무슨 분위기를 그렇게 잡냐?”

 호랭이가 툴툴거리는 음성으로 딴죽을 걸었다.

 “분위기라니요. 취릭~! 그냥 오랜만에 서울도 올라왔고 해서 문명의 향기나 만끽하자는 의미죠.”

 “만끽은 개뿔. 정말 그런 거라면 뭐 볼만한 게 있는 곳으로 가던가.”

 뭐가 불만인지 호랭이는 연신 궁시렁거렸지만 더 이상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병규의 불편한 심기를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일 게다.

 “궁금하면 가보지 그러냐?”

 “에이. 취리릭~! 집나온 놈이 벌어 논 것도 없이 돌아가 봤자 뭐해요. 쪽만 팔릴 뿐이죠. 아구아구.”

 뒷머리를 벅벅 긁는 병규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호랭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에요?(왜요?)”

 “좀 이상하지 않냐?”

 “머가요?(뭐가요?) 아구아구.”

 호랭이는 뒤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려 길가에 위치한 노점상들을 턱짓했다.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우리가 지나간 다음엔 항상 비명 비스름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 뭐가 없어졌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쩝쩝. 에니. 그넝 니가요.(에이. 그럴리가요.)”

 대답하는 병규의 몸이 움찔한다.

 “그리고 보니 네 입은 조금 전부터 계속 우물거리네. 뭘 먹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꾸, 꿀꺽. 하하. 이거요? 그, 그냥 배가 고파서 그냥 뭘 씹는 척 하는 것뿐입니다. 하하하.”

 “병규야아?”

 “네, 네에?”

 호랭이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여며졌다.

 “웃음소리가 아주 많이 어색하구나.”

 “윽.”

 병규의 몸이 크게 떨린다. 역시 이 녀석은 거짓말이 서툴다. 예민한 호랭이님께서 그 정도 변화를 눈치 못 챌 리 만무하다. 물론 이미 말을 꺼내기 전부터 범행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놀라운 것은 병규의 적응력이다. 그제만 해도 죽겠다고 그 난리더니 이젠 제대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병규야?”

 호랭이의 은근한 음성에 병규의 고개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네?”

 “니가 했지? 오뎅이랑 붕어빵이랑 호떡이랑 떡볶이랑 번데기랑 순대 말야. 니가 했지? 고놈의 혓바닥으로 말이다.”

 병규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려 했지만 호홍~ 하고 웃고 있는 호랭이의 눈빛을 보니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네.”

 마지못해 시인한 병규. 호랭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잘못한 건 알지?”

 “네에.”

 병규는 참회의 눈물을 글썽였다. 호랭이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잘못한 걸 안다니 됐다. 나도 네 마음 모르는 게 아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꼬. 간신이 번듯한 직장을 잡긴 했지만 아직 월급도 못받은데다 평소에 많이 굶주렸으니 무의식적으로 그랬겠지. 그렇지?”

 “네, 맞아요. 바로 그런 겁니다.”

 병규는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평소엔 그렇게 못마땅하더니 지금은 아P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병규의 글썽이는 눈빛을 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호랭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됐다. 알면 됐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무의식중에 그런 건 아무 잘못 없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호랭이의 미소가 아주아주아주 진해졌다.

 “저기 앞에 보이는 꼬치구이 말이다. 왠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냐? 알겠지? 이번엔 잊지 말고 이인분이다.”

 “......?!!”

 개미핥기가 울고 갈 가공할 만한 혓바닥으로 서울 시내 노점음식들을 모조리 탐식하고 돌아다니던 혓바닥 절도범(?) 두 명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지하철에 있었다. 그저 동물적인 감각으로 음식들만 찾아다니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이다.

 병규는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마음도 심란하고, 반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했지만 기왕에 서울까지 온 거 정말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 머리나 식히지 뭐.’

 본부장에게서 여비도 두둑하게 받았겠다, 구경이라도 실컷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있자. 어디를 가야 할까.”

 솔직히 아무리 서울이라도 계획 없이 상경한 사람이 놀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도 애완동물(?)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은 더더욱 드물었다. 일단 놀이공원은 무조건 패스고, 명동이나 동대문 같은 곳도 패션 같은 것에 관심이 없으니 영 흥미가 안 생긴다. 인라인이나 좋아하면 자유의 광장 같은 곳도 괜찮겠지만 역시 호랭이와 둘이 가기엔 마땅치 않았다.

 ‘쩝. 이럴 줄 알았으면 구경이나 시켜 달라는 핑계로 본부장님이나 예란 누님을 꼬셔볼 걸 그랬나?’

 물론 꼬셔지지 않을 가능성 같은 것은 손톱의 때만큼도 염두 하지 않았다.

 결국 한참 고민 끝에 병규가 선택한 곳은 용산이었다. 전자제품과 컴퓨터로 가득한 그곳이 뭔 재미냐 하겠지만 전자계산학과인 그로서는 산만한 볼거리로 가득한 명동보다 오히려 컴퓨터 상가만 쭉 늘어진 용산이 더 구미에 맞았다.

 표를 끊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는데 매표소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금발머리의 소녀가 영어로 뭐라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그걸 알아듣지 못핸 매표소 직원이 당황하며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외국 애가 보호자도 없이 돌아다니네.”

 그때만 해도 병규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지하철로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용산은 경기불황의 한파로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한산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손바닥만한 공간에 들어선 여러 업체들의 직원들은 예전보다 몇 배나 득달같았다. 한 구역을 지날 때마다 꼬드기는 통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이 동네는 너무 시끄럽구나.”

 호랭이는 시끌벅적한 전자상가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해일처럼 넘실대는 전자파에 온갖 잡동사니가 다 모여 있는 곳이 전자상가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는 호랭이에게는 가히 지옥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호랭이의 구박에 밀려 병규는 결국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다음이라 바람이 조금 찼다. 거리에서 파는 핫바를 사먹으며 병규는 또 어딜가나 고민했다.

 그냥 눈요기라고 하자는 생각에 온 것이어서 그다지 사고 싶은 물건다 없었다.

 “여기 어디에 준엽이랑 녀석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

 “!”

 곰곰 생각해본 병규는 이운석이 독쟁이라 부르는 준엽이 용산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릴 들은 것을 기억해 냈다. 그조차 잠깐 까먹었는데, 호랭이가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인상가 외곽의 어디에 있다고 했었지. 아마?’

 자연스레 선인상가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선인상가 뒤편의 거리는 쇠퇴하고 있는 용산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삼십 년쯤 입은 양복처럼 후줄근한 모습. 공장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은 문을 연 곳보다 셔터가 닫힌 곳이 더 많았다. 간혹 문이 열려 있는 도매상의 직원들도 누가 왔다 갔다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권태로움과 무료함만이 그들의 얼굴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에고. 여기서 어떻게 준엽 형의 가게를 찾지?”

 병규는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사이에서 연락처도 없는 준엽의 영업점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뒤늦게 용산이 얼마나 광활한 곳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거야말로 서울 난장에서 박 서방 찾기 아닌가.

 슬렁슬렁 한 집씩 살피다보면 찾게 되겠지라고 간단하게 생각한 게 실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번호라도 받아오는 건데.’

 후회는 언제나 늦기 마련이다.

 “어쩔 거냐? 더 찾아볼 테냐?”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요. 그만 돌아가죠.”

 막 병규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Help me~!"

 저 끝에서 뛰어온 금발머리 여자아이가 그의 몸과 크게 부딪혔다. 길이 이렇게 넓은데 하필이면 그와 부딪히다니. 우연히 부딪혔다기보다는 고의적인 태클이라고 봐야 했다.

 “아이고. 등뼈 휘어지는 줄 알았다. 뛸 때는 앞을 보고 다녀야지. 내 등짝에 먹다 남은 핫도그라도 붙어 있었니?”

 소녀를 안고 데굴데굴 굴러간 병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짜증이 났을 테지만 여자애라 그런지 말이 부드럽게 나갔다.

 게다가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있는 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면 더더욱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얘,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가은데.’

 그때였다.

 부리나케 달려오는 급한 발소리와 함께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황당하게도 녀석은 벌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날이 시퍼런 단도를 들고 있었다.

 품에 안겨 작은 새처럼 숨을 헐떡이는 소녀와 칼을 든 괴한을 번갈아 보며 쳐다보던 병규,

 “오호라. 대충 어떻게 된 시나리오인지 알겠다.”

 그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불알 찬 사내 주제에 요상한 것(?)에 맛(?)을 들인 모양인데. 나 참, 말로만 변태를 들었지 진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자신 있으면 따라와 봐.”

 병규는 소녀의 손을 잡고 으슥한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규의 어깨 위에서 말없이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호랭이가 병규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혹시 사단이 일어나길 바라는 거 아니냐? 마음이 복잡하니 대판 싸워보기라도 하겠다는 심보라든가 말이야.”

 병규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모르는 척 입을 놀렸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전 절대로 약한 소녀를 돕기 위한 정의로운 마음에서 그런 것뿐입니다.”

 “이 아이를 돕고 싶었다면 간단히 경찰에게 전화를 해도 될 텐데?”

 호랭이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이미 만사 다 들킨 모양이지만 의지의 한국인 병규는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했다.

 “어허. 그런 책임감 없는 짓을! 경찰은 너무 늦어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제 손으로 깨끗이 마무리 짓겠습니다.”

 “흐음. 어째 너 요즘 들어 부쩍 성격이 활달해진 것 같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병규는 호랭이의 비꼬는 말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한편 소녀의 뒤를 쫓고 있던 괴한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놈 때문에 괜히 일이 복잡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알아서 으슥한 곳으로 들어간다.

 수없이 임무를 행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난생 처음이다.

 “운동 좀 했나보군. 가소로운 자식.”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저런 상대가 오히려 처리하기 편했다. 자만심 강한 녀석의 폐에 구멍을 내는 것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다.

 과연 뒤를 쫓아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그 놈이 두 손을 척하니 허리에 걸친 채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다.

 “하하. 예까지 따라오다니. 용기는 가상하네요. 변.태.아.저.씨.”

 나름대로 정곡을 콕 찌르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복면사내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사람이 없을을 보고 적이 안심한 듯  목을 빙빙 돌려가며 근육을 풀고 있었다.

 제대로 한 판 뜰 모양이다.

 병규의 고개가 살며시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래? 이 녀석 단순한 변태 아저씨가 아닌가? 설마 어린애의 코 묻은 돈을 노리는 쓰레기? 그리고 난 그런 일에 어이없게 말려든 지나가던 불쌍한 행인?’

 일명 퍽치기라고 해서 행인의 뒤통수를 친 후에 맞은 놈이야 죽은 말든 돈을 챙기는 악독한 놈들이 있다.

그렇다면 녀석은 상대를 잘못 만난 셈이다. 비록 아직 힘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는 없지만 병규 역시 엄연한 능력자. 퍽치기 따위가 상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의 생각대로 녀석은 애초에 대화의 여지조차 없는 듯, 품속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양손에 나눠진 두 개의 단도.

 ‘그래도 이쯤에서 어설픈 협박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괴한은 유치한 대사의 협박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려 음침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며 천천히 다가설 뿐이다.

 “크크.”

 웃음소리가 커진 순간, 놈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흔들렸다. 손끝에 있던 단도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물 찬 제비처럼 날아들었다.

 “엇.”

 병규는 급히 상체를 숙였다. 호랭이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간 단도가 뒤편 벽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허억.”

 반쯤 졸린 눈으로 병규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호랭이가 화들짝 놀란다.

 “위험한 놈이네. 이거.”

 힐끔 뒤를 돌아보며 병규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협박도 없이 칼을 날리다니. 위협치고는 심각한 수준이다. 칼을 날린 지금도 킥킥대고 웃을 뿐 금품을 달라는 얘기 따위는 일절 없다.

 사실 괴한의 입장으로서는 해치우려는 대상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저놈. 이상한 기운을 부린다.”

 호랭이가 그의 상의 안으로 파고들며 경고했다. 단도가 날아올 때 귀에 거슬리는 파공음을 들었던 것이다.

 “알았어요.”

 상대에게 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이 될 참이다.

 좁은 골목. 빠져나갈 통로는 오직 괴한이 버티고 선 통로뿐. 본래는 적당히 시비나 붙으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이쯤 되고 나니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다.

 괴한이 소매 없는 재킷에서 다시 두 자루의 단도를 꺼냈다.

 “저놈 대체 칼을 몇 개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단도는 고작 손바닥만한 길이에 불과했지만 칼을 여러 자루씩이나 들고 다니는 게 영 꺼림칙했다. 전문적인 칼잡이란 소리다.

 병규는 방패로 쓸 만한 것이 없나 살폇지만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봉지들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병규는 막 단도를 던지려 하는 괴한을 향해 쓰레기 봉지를 뻥 차버렸다.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자 노랑색 봉지가 터지면서 안쪽의 음식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칙쇼!”

 괴한은 뒤로 펄쩍 물러서며 욕을 했다. 이런 일에까지 지저분하게 옷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래. 이 사람이 일본인인 모양이네, 일본인이 웬 강도짓? 배 탈 돈이 모자란 건가?”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배냐? 비행기 표면 몰라도.”

 “아! 호랭이 말이 맞겠네요. 저. 돈이 없으면 일본대사관에나 찾아가 보세요. 우리 나라는 댁 말고도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많아서 골치 아프거든요? 굳이 일본 문제아까지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요. 아참, 한국말 못하는 것 같던데. 일본대사관을 일본말로 뭐라고 하지?”

 긴장을 풀기 위해서인지 병규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이럴 때는 서양말로 하면 되잖아. 서양말.”

 “오케이. 좋은 생각이네요. 일본도 영어 배우려고 꽤 투자를 많이 한다고 들었으니까. 아마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되겠죠. 음. 그러니까. 유 고오르 투(You go to)...... 음. 자패니즈으~ 음.음. 대사관이니까 대충 큰집이겠지. 빅(Big) 하우즈으~(House). 유아르~ 언더스텐. 그러니까 합해서. 유 고우르 투 자패니즈 빅 하우즈으~ 오케?”

 (참고로 한국 내 일본 대사관은 ‘Embassy of Japan in Korea'다)

 “......?”

 물론 괴한은 병규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놈 지금 나더러 일본 감옥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거야? (Big House는 감옥을 뜻하는 은어다.) 미친놈.”

 괴한이 불쾌함을 병규의 발언에 분노를 높이고 있을 때 병규와 호랭이는 감격 어린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오오~ 병규. 너 외국말 좀 할 줄 아는데? 혀가 아주 제대로 꼬부라졌어.”

 “그죠? 카. 제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제대로 했으면 통역사 저리 가라였을 겁니다.”

 "휘이~ 그래? 꽤 잘하는가 보네. 외국어 시험 치면 몇 점이나 나오는데?“

 “그, 그게 토익시험은 제 신발치수 정도밖에.......”

 “헛! 그럼 200점도 훨씬 넘는 거잖아. 어떻게 하면 만점에 두 배가 넘는 고득점을 할 수 있는 거냐? 히야. 어쩐지 혀가 참기를 처바른 것처럼 매끄럽다했더니.”

 “하하. 제가 원래 뽐내길 싫어해서 그렇지 좀 잘난 면이 많죠. 하하하.”

(참고로 Toeic은 990점 만점이다.)

 “그래. 역시 사람은 하나 정도는 잘하는 게 있기 마련이구나.”

 “하하. 아직 호랭이가 모르는 장점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답니다. 푸하하하하.”

 둘의 잡담은 그야말로 점입가경. 눈앞에서 칼을 들고 서 있는 괴한 따위는 아P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괴한의 눈에서 적의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도 뒤집어써서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는데 정작 놈은 깽깽거리는 강아지와 요사스럽게 웃어가며 남의 속을 박박 긁고 있다니.

 “고통 없이 죽여주려 했더니 안 되겠군. 손가락 끝에서 발끝까지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물론 병규와 호랭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위협적인 분위기만큼은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어이구.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칼 들고 있었지요? 깜빡 잊었네.”

 “생각해보니 그러네. 네 화려한 외국어에 잠시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다. 골치 아프니까 단 제압한 다음 경찰에 넘기는 것이 좋겠다.”

 “네. 알겠어요.”

 병규가 대답하기 무섭게 돌연 괴한이 칼을 휘둘러왔다.

 “죽어.”

 휘익.

 날카로운 칼바람 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막상 칼을 휘두른 앞을 보니 병규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위!”

 고개를 쳐들자 과연 병규가 그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가......다가 갑자기 살 맞은 새처럼 아래로 뚝 떨어졌다.

 “꾸엑.”

 덕분에 괴한은 그에게 깔리고 말았다.

 “에고. 이거 너무 날카롭네.”

 귀탄의 점프력으로 몇 미터나 훌쩍 뛰어넘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요수의 손톱으로 벽에 잠시 지지하려고 했던 것이 실수였다. 마음먹은 대로 능력이 발휘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긴 한데, 손끝에서 푸르스름하게 튀어나온 요수의 발톱은 날카로워도 너무 날카로워서 잠시 몸을 고정시키려던 의도와는 달리 단단한 건물 벽을 그대로 두부처럼 쪼개버렸고, 덕분에 병규는 쭉 갈라지는 건물 벽을 따라 그대로 아래로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의 발밑에 깔린 괴한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불의의 일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때문이다.

 “뭐,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니 만사 땡이네.”

 쾌활하게 웃어준 병규는 끈 대신 괴한의 점퍼를 벗겨 그를 묶어 버렸다.

 “그나저나. 넌 어쩌다 이런 못된 사람에게 쫓기게 됐니?”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괴한을 처리한 병규는 이번엔 금발의 소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소녀는 무서운 일을 겪었음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그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보는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어? 이 애. 머리만 염색한 건가?’

 금발이라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눈동자가 검었다. 요즘엔 애나 어른이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다니니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소녀의 눈썹마저 금발이라는 것이다. 보통 눈썹은 염색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본부장님도 황금색 눈동자였었지.’

 둘 다 외국인처럼 머리색이 황금색이지만 생김새 자체는 전혀 달랐다. 본부장인 자영의 얼굴선이 아기자기한 동양적인 색깔이라면, 가늘게 떨고 있는 소녀는 서양인 특유의 시원시원한 얼굴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별난 점이라면 보통 코쟁이라면 애나 어른이나 일단 거부감부터 들기 마련인데, 이 소녀는 묘하게 정겨운 분위기가 난다는 것이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 같다랄까?

 병규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정말 귀엽게 생겼구나. 그런데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됐니? 외국애가 이런 데 혼자 있으면 위험해. 쓰레기는 오빠가 치워줬으니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렴.”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병규의 팔소매를 붙들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그때, 묘한 눈길로 소녀를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고개를 휙 쳐들었다.

 “사람들의 인기척이 즈껴진다.”

 “네?”

 병규가 미처 호랭이의 말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기도 전,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여섯 명의 사내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에 뒤집어쓴 두건과 손가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단도의 서늘한 칼 빛. 방금 전에 병규가 해치운 괴한과 한패거리임이 분명했다.

 “너 생각보다 원한 산 일이 많은 것 같네. 아니면 네 부모님이 그런 걸까?”

 병규는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대략 중학생쯤의 나이로 보이는 데, 아직 소녀임에도 불고하고 눈물나게 예뻤다. 인형같이 예쁘다는 말은 꼭 이 소녀를 위해 있는 말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쪽 계열(?)을 즐기는 변태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변태의 눈에 쏙 들 만큼 귀엽고 예쁘다고 해도 저렇게 많은 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덤벼들다니.

 틀림없이 어떤 조직적인 음모가 바닥에 깔려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병규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차림에서 찾았다. 한마디로 소녀의 옷은 무지하게 비싸 보였다. 비싸서 그런지는 몰라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부터가 평민들의 그것하고는 완전 다르다. 그 야들야들한 감촉에 눈물이 핑 돌 정도다.

 ‘이 애, 아마도 외구계 대기업 회장의 손녀딸이거나. 아니면 국내에 들어온 외국 주요 인사의 딸 정도 되는 거겠지?’

 사연을 대충 짐작해 내자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도와주는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상대가 어디 좀 많아야지. 게다가 죄다 위험한 냄새가 풍긴다.

 쩝.

 “이걸 어쩐다.”

 병규는 곤란한 일이 있을 때면 으레 그렇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말 몇마디로 해결될 상황은 절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이들의 동료가 저쪽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는 형편이니.

 ‘이럴 때는 도망이 최고지.’

 경계하듯 뒷걸음질치던 병규는 돌연 쓰레기 봉지를 발로 뻥 차고는 그대로 소녀를 안고 잽싸게 점프했다. 이미 인간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신체능력. 단번에 무려 5~6미터를 붕 떠오른 그는 좌우의 벽을 차례로 밟으며 위쪽으로 솟구쳤다.

 그런데 일이 쉽게 안 풀리려고 그러는지, 막 옥상으로 오르려 하는 순간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두 자루의 단도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엇.”

 병규는 깜짝 놀라며 급히 신형을 틀었다. 두 자루의 단도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휘릭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빗나간 단도들이 돌연 고개를 휙 틀어 다시 그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뭐야. 이건.”

 대경실색한 병규. 급한 와중에도 왼손에 요수의 발톱을 꺼내들고 크게 빙글 돌렸다.

 티팅.

 요행인지 두 자루의 단도 모두를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쉬익. 바람소리가 귓가를 진동한다.

 무려 10미터 상공에서 수직으로 곧바로 떨어지는 것이다. 병규는 솔직히 말해 겁이 조금 났다. 저 멀리 보이는 땅바닥이 갑자기 눈앞까지 튀어 오르는데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귀탄에게서 흡수한 능력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발이 땅이 닿자마자 기묘한 탄성이 허벅지 아래에서 일어나며 반동으로 그를 한 번 더 허공을  튕겨 올렸다. 병규는 제비처럼 몸을 휘돌며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긴장으로 손발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병규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무사하다니.’

 쾌감과도 같은 묘한 전율이 등허리를 훑고 지나간다.

 그런 놀라움은 그를 공격한 괴한들도 마찬가지인 듯, 무심한 눈동자들에 놀라운 빛이 잠깐 스쳤다.

 그때, 병규의 가슴에 안긴 소녀가 몸을 조금 흔들었다.

 ‘아차차.’

 그제야 소녀를 안고 있었음을 상기한 병규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콜록.”

 너무 꼭 안고 있어서 숨이 막혔던가 보다. 소녀는 손을 풀자마자 얕은 기침을 했다. 그나마 그 난리 통에도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다.

 “괜찮니?”

 소녀는 그 큰 눈으로 병규를 올려다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울기부터 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어린 아이가 이렇게 대범할 수가. 게다가 그 치명적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이랑. 자칫했으면 상황도 모르고 뺨을 비빌 뻔했다. 하긴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병규. 위!”

 호랭이의 급박한 경고성. 병규는 그녀를 안은 채로 발끝으로 땅바닥을 가볍게 퇴겼다. 가볍게 튀겼다곤 하지만 그의 순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 그의 머리를 노리고 수직으로 떨어진 비도가 땅에 박혔을 땐, 이미 그는 골목의 안쪽 깊숙한 곳에 몸을 착지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칼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요.”

 병규는 가쁜 숨을 헐떡였다. 호랭이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아무래도 바람을 부리는 놈들 같다.”

 “바람요? 어느 녀석이죠?”

 그 녀석만 먼저 처리하면 나머지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병규는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골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는 녀석들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한 놈이 아냐. 저 녀석 모두에게서 같은 냄새가 나.”

 “뭐라고요? 저 녀석들 전부요? 능력자들은 수호신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그렇게 똑같은 능력을 가진 능력자가 한꺼번에 있을 수 있는 겁니까?”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들에게서 똑같은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야. 그것도 시궁창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바람 냄새가 말이야.”

 코를 킁킁대던 호랭이는 정말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인지 인상까지 잔뜩 찌푸린다. 유감스럽게도 병규는 후각이 그리 발달된 것은 아니라서 썩은 바람 냄새가 어떤 것인지는 맡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능력자 여섯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하. 그냥 모른 척하고 가면 봐주지 않을까요?”

 “말도 안 통하잖아. 그러고 너 설마 이 여아를 저런 놈들에게 넘길 생각이냐?”

 “하하. 당연히 농담이었어요.”

 호랭이의 추궁에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병규였다.

 “어, 그런데 두 녀석이 안 보이네?”

 방금 전까지 분명 골목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여섯이었는데, 잠깐 사이 넷으로 줄었다. 그렇다면 둘은 어디로 간 것일까. 뒤로 빠졌을까? 그렇다면 좋겠지만, 녀석들의 능력이라는 바람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제길, 역시 위에 있잖아.”

 두 놈이 거미처럼 병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호랭이. 얘 좀 잠깐 보살펴 주세요.”

 호랭이를 소녀의 머리 위에 올려준 병규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앞으로 내달렸다. 어차피 소녀가 목적이라면 죽이지 않을 것이다. 방해가 되는 자신을 먼저 처리하려 들 테지.

 “억?”

 “헛.”

 병규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자 입구를 막고 있던 네 놈들은 깜짝 놀라 경악성을 흘렸다. 뭐가 이렇게 빠른지. 몸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재빨리 품에서 꺼낸 단도를 휘두르려 했다.

 “너무 늦어!”

 벼락같이 외친 병규는 돌연 무릎을 굽혔다 쭉 펴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빠각.

 마침 그에게 칼을 휘두르려 했던 녀석의 턱이 병규의 뒤통수와 부딪히며 통쾌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케엑.”

 입으로 피를 뿜으며 뒤로 나자빠지는 녀석. 턱뼈는 확실히 박살났을 것이다. 물론 일을 저지를 병규의 뒤통수도 멀쩡할 리 만무했지만 병규는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그대로 나는 새처럼 공중으로 솟구치며 몸을 한 바퀴 휘돌렸다.

 까마득히 멀어진 지상.

 그리고 금발의 소녀를 향해 수직 하강하고 있는 두 녀석. 병규는 자신을 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녀석들은 병규가 빠져나가자 얼씨구나나 하며 그녀를 노렸다.

 “저 녀석들이!”

 으득 이를 깨문 그는 그대로 건물 벽에 두 다리를 착 모았다. 수직으로 선 벽에 두 다리를 대고 수평으로 서게 된 병규, 마치 중력의 영향에서 잠시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반드시 땅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절대 불변의 법칙, 이미 1660년대 하필이면 사과나무 옆을 지나던 재수 좋은 뉴턴이라는 과학자가 발견해내지 않았던가.

 얼굴의 피가 쏠리고, 병규의 몸 역시 자연스레 아래로 쏠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병규는 중력의 힘을 그대로 이용했다.

 “으다다다다다!”

 다리의 순발력을 폭발시키며 그대로 벽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수직의 벽을 달리는 것이다. 정녕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기사.

 물론 괴한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제비처럼 떨어지는 병규의 몸뚱이를 향해 그들은 단도와 수리검을 소금 뿌리듯 뿌려댔다. 헌데 그들의 비쾌한 대응보다 병규의 동물적인 감각이 한 발 앞섰다. 암기가 비처럼 쏟아져오자 병규는 곧장 발을 박차고 맞은편 건물 벽으로 건너뛴다. 그리고 또다시 건물 벽을 평지처럼 내달리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순발력과 무지막지한 점프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헉.”

 “무슨 저런!”

 터져 나오는 경악성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허공을 수놓은 암기들은 지남철을 따르는 쇳가루처럼 병규를 향해 곧바로 방향을 틀어왔다.

 병규 또한 암기를 등짝에 수놓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암기가 다가올 때마다 그는 좌우의 벽을 지그재그로 밟아대며 무서운 속도로 소녀를 향해 떨어져 내려갔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가 몸을 허공으로 솟구친 후부터 요수의 발톱이 계속 건물 벼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요수의 발톱은 병규가 움질일 때마다 마치 낙서를 하듯 벽을 긋고 다녔다.

 “이 놈들!”

 가히 핵탄두와 같은 기세로 무섭게 내리꽂는 병규, 그러나 두  내는 이미 소녀를 품에 안을 정도 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소녀의 가녀린 얼굴이 막 괴한의 품에 가려질 찰나, 다급해진 병규는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더러운 손 저리 치웟!”

 취리릭.

 욕설과 함꼐 병규의 입에서 무언가가 채찍처럼 쏘아졌다.

 “크악.”

 뭔가 물컹한 게 눈을 쓱 훑자 두 괴한은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짧은 틈, 전 체중을 실은 병규의 무릎이 왼쪽 괴한의 목덜미를 후려갈겼고, 그 반동으로 팽이처럼 회전한 병규의 발이 오른쪽 사내의 면상을 그대로 밟아버렸다. 

 “커억.”

 “크악.”

 두 사내는 격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땅을 굴렀다.

 쿵.

 두 사내를 박살내며 허공에서 몇 차례나 회전을 거듭한 병규는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아욱. 젠장. 등짝의 수난 시대군.”

 절로 욕이 나온다. 그나마 두 사내를 이용해 충격을 줄였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등부터 떨어졌다면 그대로 등뼈가 아작 났을 것이다/

 “아파?”

 몸을 움츠리고 있던 소녀가 쪼르르 달려와 병규를 부축하며 짧게 물었다. 그 순진한 눈동자에 병규는 고통 중에도 불구하고 여색하게 웃었다.

 “아, 아냐. 괜찮아.”

 힘드 없으면서 부축하려고 낑낑거리는 소녀의 따뜻한 손길에 등허리를 진동하는 통징이 휙 하니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통증은 소녀 때문에 잠시 잊는다 해도 입안의 찝찝함만은 어쩔 수 없었다.

 “퉤퉤. 으......짜! 웬만하면 얼굴 좀 세탁하고 다니지.”

 병규는 오물이 묻기라도 한 것처럼 침을 뱉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었다지만 음식 맛이나 평가할 귀한 혀가 남의, 그것도 딸랑딸랑한(?) 사내자식의 눈탱이를 훑었다는 것이 영 찝찝했다.

 침을 퉤퉤 뱉으며 병규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좁은 골목길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괴한들은 말이 없었다, 오직 바닥에 누운 세 명의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

 병규가 건물 벽을을 평지 달리듯 달리고 다시 두 사내를 번개같이 박살낸 것은 필설로는 길었지만 실제로는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병규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벽에 두 발을 가져간 순간, 갑자기 소녀를 덮쳐가던 두 사내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말이 없던 괴한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동료 셋이 쓰러졌다. 상대를 얕보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이제는 이 강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논의해야 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셋이 동시에 달려드는 것. 지금까지 본 대로라면 녀석은 점프력과 빠른 몸놀림 외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는 것 같다. 손끝에서 그림자처럼 푸르스름하게 솟구쳐 나온 발톱모양의 기운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쓸데없이 건물 벽에다 낙서나 하는 용도라면 굳이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차차창.

 괴한들이 허리에 손을 가져가자 그들의 허리띠가 쇳소리를 내며 곧게 펴졌다.

 “요대검!”

 호랭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요대검은 허리띠 대신 허리에 차는 몽창몽창 휘는 부드러운 검으로 보통 연검이라 부르는 물건이 바로 이것이다. 요대검은 검신이 매우 유연하고 탄력적이며 칼날이 매우 날카롭다. 또 워낙에 검신이 잘 휘므로 수련하기 어렵지만 대신 제대로만 익히면 초식의 무한한 활용이 가능해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팟.

 요대검을 꺼낸 세 복면인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한 명은 위로, 나머지 둘은 바닥에 기듯이 낮게 달려든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표홀하고 날카로운 움직임. 게다가 삼인이 일체가 되어 위와 아래로 동시에 덤벼드니 엄밀한 그물망에 갇힌 듯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병규는 소녀에게 엉거주춤 부축을 당한 상태로 별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서워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마치 사냥감이 덫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보들. 누가 쓸데없이 벽에다 낙서를 하겠냐?”

 말과 동시에 병규의 몸이 분리되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좌우의 벽을 뻥뻥 걷어찼다.

 괴한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 놈이 미쳤나? 왜 갑자기 쓸데없이 벽을?’

 그들의 생각이 미쳐 끝나기도 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쩌저저저적.

 놀랍게도 병규의 가벼운 발길질에 두꺼운 건물 병이 마치 하늘에서 내리꽂는 뇌전을 그대로 모셔온 것처럼 요란한 소음과 함께 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괴한들의 입 또한 갈라지는 벽과 함께 위아래로 쩍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물망처럼 잘게 쪼개진 벽, 벽을 걷어찬 뒤 괴한들을 향해 씩 웃어주는 병규, 그다음은 뻔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르르르르릉.

 거대한 진동과 함께 좌우의 빌딩 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먼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던 괴한이 쏟아지는 돌덩이에 ‘켁’ 하면서 떨어졌고, 그 다음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건물 잔해 아래에서 얼이 빠져 있는 두 괴한의 차례였다.

 “잘 가~”

 얄밉게도 병규는 간물 잔해 속으로 묻히는 괴한들을 향해 정답게 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했다.

 휘이이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하늘 높이 솟구친 먼지구름을 날려버렸다. 진하게 묻어나던 먼지가 가라앉자 그 속에서 사람인지 먼지덩어리인지 구분하기 힘든 세 개의 작고 큰 덩어리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이런 무식한 자식아! 무슨 일을 이렇게 과격하게 처리해.”

 호랭이가 몸을 푸르르 떨며 고함을 쳤다.

 “하하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병규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썼는지 검은 머리카락이 아예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사람이 죽었으면 어쩔 뻔했냐?”

 성을 내는 호랭이의 음성에 한 가닥 근심이 서려 있었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나가는 호랭이라고 해도 신분이 신선인지라 살생이 꺼려지는 건 당연했다. 그건이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다.

 “에이. 설마요. 저 녀석들도 한 가닥 하는 능력자니, 틀림없이 무사할 거라 믿었어요. 뭐, 그래도 죽는다면 어쩔 수 없죠. 정당방위니까요. 먼저 죽이려 한 건 녀석들이니까 재수 없게 죽어도 어쩔 수 없죠. 천벌입니다. 하하하.”

 “휴. 간단해서 좋구나.”

 호랭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날 죽이려 했으니 죽어도 싸다니. 신선인 호랭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발칙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이번엔 특별히 봐주기로 했다. 다행히 일곱 녀석의 심장소리가 아직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무섭게 쏟아지는 건물 잔해 속에 파묻히고도 살아있다니.

 “대체 누구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군.”

 호랭이의 툴툴거리는 음성에 한 간닥 안도의 숨이 섞여 있었다.

 “문 닫은 공장들이었던 모양이네요.”

 괴한 셋을 파묻고 무너진 벽 내부엔 흰 천으로 뒤덮인 기계들 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좌측의 건물은 타이어 조각이 널려 있었고, 우측엔 상자마다 수북하게 쌓인 작은 컴퓨터 칩들이 보였다.

 대한민국에 장기불법체류 중인 불황의 현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씁쓸했다.

 “사람은 없지만 여기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다.”

 호랭이가 한마디 한다. 건물에 사람이 없었다 해도 이 정도 소란이면, 벌써 경찰서나 소방서에 연락이 갔을 것이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귀찮은 일에 휩싸일 뿐이다.

 “네.”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그의 소매를 꼭 붙들고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소녀는 뿌옇게 쌓인 먼지를 전혀 털 생각도 않고 큰 눈을 말똥거리며 병규를 올려다본다.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 꼭 밀랍으로 만든 인형 같았다.

 “자, 귀여운 아가씨. 우리 이 지긋지긋한 골목을 나가서 쭈쭈바나 빨면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차분히 대화 좀 나눠볼까요?”

 병규가 손을 내밀자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에 한 줄기 가는 미소를 보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와. 웃으니까. 예쁜걸?”

 병규는 환하게 웃으며 소녀의 코를 꼬집어 주었다. 손을 때자 소녀의 코에 손자국모양으로 뽀얀 살이 묻어 나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작은 둔덕처럼 쌓여 있는 건물 잔해를 넘어 골목을 나섰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 밖으로 발을 내디디는 순간 병규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흐읍. 이 녀석들은....... 뭐지?”

 귓구멍으로 거칠게 파고드는 탁한 음성.

 골목 밖,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한 패거리의 검은 복면인들과 목에 가래라도 걸린 듯 탁한 음성을 뱉어내고 있는 거대한 떡대. 그리고 상상하기도 싫은 괴물, 귀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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