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하는 곳이 어디죠?
귀탄과 피 튀기는 일전을 보낸 다음 날, 병규는 오랜만에 경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시간대가 안 맞아서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와. 그럼 이번엔 개구리 괴물과 한바탕 한 거야?”
“귀탄이라니깐. 귀탄. 그리고 반응이 그게 뭐냐? 남은 죽다 살았구만.”
생고생한 경험을 스펙타클(spectacle)하고 엘레강스(Elegance)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경애는 만세를 부르며 좋아한다. 아무리 힘들었다고 입 아프게 설명해도 전혀 씨알도 안 먹힌다. 뭐, 정의의 히어로에게 고난과 좌절은 필수요소라나?
아무래도 병규의 말을 안 믿는 것 같은 눈치다.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괴물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에고. 내 신세야.”
호랭이가 포옥 한숨을 내쉰다.
지엄하신 호랭이 신선님께선 지금 인형대신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처음엔 여자에게 안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호랭이였지만 한동안 그녀에게 시달린 후부터는 그녀의 품속에서 고롱고롱 잠이 들 정도의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빠. 호랭이에게서 담배 냄새가 나. 담배 좀 그만 피워.”
“담배 안 핀다니깐. 담배 쪽 얘기라면 네가 안고 있는 복슬복슬한 연초마니아에게 따져!”
“정말? 호랭이가 피웠어?”
호랭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호랭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경애가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고개를 비벼댄다.
“아앙. 너무 귀엽다. 이렇게 귀여운 호랭이가 담배라는 왕 거짓말이다. 그지?”
“앙.”
강아지처럼 귀엽게 대답하는 호랭이. 갈수록 호랭이가 경애의 애완동물화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저러다 영영 신선일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러면 그도 피곤해진다. 호랭이가 매일 피워대는 담배 값 때문에 등골이 휠 지경이다.
‘그나저나 편의점 일도 못하게 됐는데 어쩌지?’
스쿠터는 완전히 고철덩이가 되어버려서 수리가 아예 불가능했다. 덕분에 병규는 편의점 새벽일도 그만둬야 했다. 이제 다른 일자리를 잡아야 할 터인데, 마땅한 일이 없어 고민이었다.
‘이대로는 다음 학비도 못 내게 생겼네.’
그렇다고 학교를 때려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꽉 끼는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병규의 자취방을 찾아온 것은 바로 이런 때였다.
“잠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말과 함께 제시된 신분증은 놀랍게도 특별검사라는 명칭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엑? 검사가 왜?”
문득 병규는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이운석이라는 이름의 밤송이 청년, 분명 공무원이라고 했었지.
“혹시 이운석 씨가?”
두 사내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당황하던 병규는 침착을 되찾았을 수 있었다.
‘뭔가 빽이 있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검사를 부릴 정도였나? 앞으로 출세하려면 잘 보여야겠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병규는 사내들에게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업 때문에 그러는데. 갔다가 바로 올 수 있을까요?”
병규의 말에 두 사내는 씩 하고 웃었다.
“이미 학교로 공문이 내려갔을 겁니다.”
“.......”
그들의 발 빠른 대처에 병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납치된 그. 두 시간 후. 서울 중심가의 대형 빌딩에 도착하게 되었다. 30층 높이에 기하학적인 조형미마저 느껴지는 대형 빌딩은 의외로 썰렁했다.
뭔가 한 가닥 하는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입구의 경비도 오십대 후반의 평범한 인상이었고, 오가는 사람들도 바쁜 회사생활에 쫓기는 샐러리맨들이었다. 주위의 다른 빌딩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풍경이랄까.
병규는 이런 평범한 빌딩의 모습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특별검사까지 출동시킬 정도라면 SF 영화 속의 철통같은 경비는 몰라도 은밀하고 비밀스런 구석이 조금쯤은 있어야 할 텐데, 너무 평범했다. 지나칠 정도로.
“이쪽입니다.”
병규와 사내들은 경비실 옆쪽의 창고처럼 보이는 푸른색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통하는 원형 계단을 내려가자 은행의 금고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철문을 만났다.
‘이제야 제대로 되어가는군.’
병규는 속으로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의 평범한 모습은 지하의 비밀을 묻어버리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채 1분도 가지 못했다. 핵폭발에도 견딜 것 같은 이 강철 문짝은 단지 두껍고 커다랗다 뿐이지 지문검색과 안구 서치와 같은 특별한 보안은 전혀 장치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평범한 번호식 자물쇠도 없어서 그냥 힘껏 당기자 끽 하고 열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왠지 허무하네.”
김이 쫙 빠져버린 병규가 터덜터덜 철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를 안내한 두 사내가 문 밖에서 부동자세로 선 채 따라오지 않았다.
“저희들은 보안등급이 낮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병규는 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자물쇠 하나 안 달려 있는 곳에 무슨 보안등급을 따지는지.
“수고하셨습니다.”
사내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병규는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래된 하수구같이 생긴 둥근 통로를 조금 걷자 저쪽에서 눈에 익은 남자가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와.”
이운석이었다. 그의 나이 올해로 18세. 공교롭게도 병규와 동갑이었다. 그날 밤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말을 놓기로 했다.
그런데 담배는 그렇다 치고 고 2짜리가 스포츠카라니. 무면허 운전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더니 특재대는 특별히 국가에서 발급 해주는 면허가 있다나? 하여간 그는 학교도 그만두고 특재대에서 착실히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병규를 가장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생긴 것은 제법 번득하게 생겼는데, 문제는 나이가 들어 보인가는 것이다. 보는 사람마다 22살 이하로 안 보니 이 정도면 심각한 문제다.
“오느라 수고했다. 검사 녀석들이 괴롭히지는 않았냐?”
그는 어색하게 웃는 병규를 어깨동무하며 괜한 잡소리를 늘어 놓았다.
“가슴엔 왠 붕대야?”
병규가 이운석의 가슴을 턱짓하며 물었다. 귀탄에게 부러진 팔 말고도 이운석의 가슴엔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갈비뼈가 몇 개 부러졌었나봐. 일이 주 정도는 불편할 것 같아.”
이운석은 손가락으로 부러진 부위들을 가리키며 한숨을 푹푹 쉰다.
“일이 주? 뼈가 부러졌는데 치료기간이 고작 그거야? 한 몇 달 고생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병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이운석은 느끼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노노노~. 그런 말씀은 이 몸의 수호신인 기린(麒麟)(봉황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평화와 번영의 전조라 일컬어지는 성스러운 짐승. 기린은 모든 털가죽 있는 짐승들의 왕으로, 유명계(幽明界 : 저세상)와도 잘 통하는 신비로운 짐승이다.)님을 너무 우습게 보신 겁니다. 사실 뼈가 부러진 것도 너무 창피한 일이라 어디다 하소연도 못할 지경이랍니다. 훌쩍훌쩍.”
세상에나, 견인차에 그렇게 심하게 부딪혀 놓고도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말은 못할망정 뼈가 부러져서 창피하다니.
‘도대체 인간이긴 한 거야?’
불만스레 궁시렁거리는 병규였지만 그 자신 역시 그런 존재임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맞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병규가 물었다.
“무엇이 궁금한가? My Friend~ 뛰어난 국가공무원에게 뭐든 물어보시게.”
“귀탄 말야. 그거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요물이야?”
“귀탄?”
“어제 만난 괴물 말야.”
“아아. 스크래그 말이군. 흐흠. 너 혹시 요 근래 언론에서 연일 보도한 살인사건 기억 나냐?”
“살인사건?”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되돌려보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의 두뇌는 퍼석한 돌가루만 날릴 뿐이었다.
“뉴스에서 한창 떠들어댔잖느냐. 뇌가 사라진 엽기적인 살인마가 나타났다고.”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호랭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참견했다.
“아! 그 사건?”
병규는 손바닥을 두드리며 탄성을 질렀다. 호랭이의 말을 듣고 보니 언뜻 본 기억이 난다. 피해자의 뇌가 사라져버려 장기매매와 관련된 사건이라느니 미치광이 살인마의 소행이라느니 말들이 많았던 사건이다. 더구나 북상하는 태풍과 함께 살인 또한 북쪽으로 점점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 전해져 한동안 언론은 살인마의 이름을 태풍이라 지으며 연일 난리도 아니었다.
“맞아. 바로 그 사건.”
“설마. 그 살인마가?”
병규의 물음에 이운석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스크래그. 바로 그놈이지. 뉴스에선 뇌가 사라진 것으로 단순 보도됐지만 사실은 빨아먹은 거야. 뇌에 구멍을 내고는 혓바닥으로 쭉쭉 핥아먹었지.”
이운석의 자세한 설명에 병규는 진저리를 쳤다.
“사람의 뇌를 빨아먹다니 지독한 놈이네. 그런데, 그 스크 뭐라고 하는 놈은 어디서 온 거야? 자연 발생된 것 같지는 않은데.”
“오우. 감 좋은걸. 그걸 눈치 채다니.”
이운석은 과장되게 소리치며 병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감이 좋긴 개뿔. 죄다 호랭이가 말하는 걸 대신 읊어주는 것뿐인데. 이운석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그게 어디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녀석인지 알지 못해서 특재대도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저런 정말 큰일이네. 그런데 그런 놈이 과연 몇 마리나 있다는 거지?”
“그걸 모르니 더 걱정일세. 이 일 때문에 본부가 발칵 뒤집혔어. 상부에선 한시바삐 처리하라고 난리지, 단서는 없지. 덕분에 요즘 우리 대장 불쌍하게 됐다.”
대화하는 동안 그와 이운석은 통로 끝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곳엔 앞서 본 것과 같은 거대한 철문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는데 이번만은 그나마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것마저 실망할 정도로 간단한 것이긴 했지만. 그저 문 옆에 붙은 마이크에,
“납니다. 문 열어주세요.”라고 소리치는 게 다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할 거라면 뭐하러 이렇게 거창한 문짝을 달아놓은 거냐? 도대체.’
이 문짝 만들 돈으로 가난한 자신에게나 투자해 주지라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았다.
“얼래? 또 복도야?”
철문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눈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것은 또다시 끝도 없이 펼쳐진 좁은 복도였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염치도 없는 복도 같으니라고.’
무슨 뱀 굴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염치없이 이어지는지. 만약 설계자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주리를 틀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얼마간 복도를 걸은 병규는 급히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이놈의 복도는 뱀 굴이 아니라 개미굴이다. 통로는 개미굴처럼 다른 통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각각의 통로 끝엔 어김없이 하나의 방이 존재했다. 이운석을 따라 걷는 몇 분 동안 지나친 복도만도 20여 개. 결국 20개의 방을 지나친 셈이다.
병규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이운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저곳 구경시켜주고 싶긴 한데 대장이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해서 말이야. 우선 본부장실부터 들르자.”
“에? 대장?”
병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대장과의 면담이라니. 갑자기 끌려오게 된 터라 이력서도 준비 못하고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자, 잠깐. 화장실 좀 가자. 머리라도 손질을 좀 해야.......”
“하하. 괜찮아. 괜찮아. 보면 아마 마음에 쏙 들 거야.”
이운석은 쾌활하게 웃으며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본부장실은 많은 방문으로 이어진 통로 끝의 검은 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곳의 총 책임자인 본부장은 의외로 20대 중반 정도의 젊은 여자였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더미와 전쟁중인 엑스맨의 대머리 아저씨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병규에게 그녀는 그야말로 색다른 반전이었다.
“잠시 나가 있을 테니까. 얘기 끝나면 불러. 대장.”
병규를 안내한 이운석이 씩씩하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본부장이란 여자에 대한 태도가 이웃집의 친한 누나 대하듯 한다고 해야 할까. 그의 말투와 행동 어디에도 상사에 대한 예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본부장은 얼떨떨하게 서 있는 병규를 푹식한 소파로 안내했다. 병규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책상 모서리에 놓여있는 얇은 서류 뭉치를 손에 들고 찬찬히 소리 나게 읽기 시작했다.
“태병규 씨. 나이는 18세. 현재 태흥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맞나요?”
“네.”
병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력서를 제출한 기억은 없는데 어떻게 알까 의아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큐 111. 중학교까지의 생활기록부 상의 특이점 없음. 잘하는 특기도 기록된 바 없고, 잘하는 운동도...... 기록상엔 없군요. 흠,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기록이군요.”
병규는 자신의 학적사항에 대해 줄줄 나열하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이운석을 만난 것이 어제,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되어 있다니. 그야말로 놀랄 노자다.
“좋아요. 이번엔 가족 관계를 보도록 하죠.”
서류를 훑어보던 그녀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녀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힌 것처럼 잠시 말을 끊고 콧소리를 냈다.
“흐음. 천하기업의 설립자이자 2년 전 고인이 되신 태수동 회장님의 3남 2녀 중 막내라. 태씨라는 말을 듣고 설마 했지만 정말로 천하기업의 자제 분이실 줄은 몰랐군요.”
경탄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보고서 뒷장에서 의외의 문구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능력자로서의 자질 제로? 한 번도 능력을 발현시킨 적 없음이라고? 이 얘기 정말인가요?”
확인하듯 묻는 그녀의 얼굴엔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병규는 멀뚱멀뚱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사실 질문은 그가 그녀에게 하고 싶었다.
‘왜 그녀는 내 집안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리고 자질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의 혼란스런 마음을 눈치 챈 그녀의 눈썹이 다시 한 번 역팔자로 휘어졌다.
“혹시 집안에 대한 얘기를 전혀 듣지 못하셨나요?”
병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요.”
서류를 탁자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은 그녀는 관찰하듯 잠시 병규에게 시선을 모았다.
‘황금색?’
그녀의 눈동자는 빠져들 것만 같은 황금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과 눈썹도 눈부신 황금색이다. 처음엔 염색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원래부터 그런가 보다. 혼혈 같아 보이진 않는데, 참 특이한 느낌이다.
한참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침묵. 병규는 답답했다. 그때 그의 어깨에 늘어져 있던 호랭이가 탁자 위로 뛰어내리며 말을 걸었다.
“병규 너.......”
병규는 혹시 그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가닥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호랭이는 어깨에서 내려오자마자 그의 손목을 왕하고 물며 발버둥쳤다.
“이 녀석. 너 부잣집 아들내미였구나. 부친이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었어? 그럼 엄청 부자였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그런 집안의 부잣집 도령이 그렇게 돈 몇 푼에 징징 우는소릴 했냐? 불쌍한 신선의 담배 값에 손을 부르르 떨었어? 이 짠돌이. 쫌팽이. 쪼다 같은 놈. 허이구야. 그동안 눈치 보며 담배 동냥하던 생각하면, 허이구야. 억울해라.”
그의 손목을 물고 긁으며 버럭버럭 성을 내던 호랭이는 끝내 털퍼덕 주저앉아 꺼이꺼이 한풀이를 한다.
“하아. 역시나.”
허파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쉰 병규는 과감히 호랭이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신선이란 작자가 입맛 열면 담배 타령이냐.”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 호랭이에 대한 실망과 회한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호호호.”
돌연 본부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억울해 하실 것도 없어요. 자료에 의하면 병규 씨는 정말로 돈이 없는 거니까. 2년 전에 빈손으로 집을 나온 후로 아예 집안과는 인연을 끊었거든요. 보고서에 의하면 누이와 몇 번 통화한 것 말고는 연락한 기록도 전무하군요.”
“쳇. 그런 거냐? 괜히 좋다 말았네.”
본부장의 말에 호랭이는 언제 징징거렸냐는 듯 기지개를 활짝 켠다. 금방 태도가 돌변하는 걸 보니 눈물까지 찔끔거리던 신세한탄은 연기였던 것이 분명하다.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병규는 그대로 뻥찐(?) 표정이 되었다.
“어머? 그 표정 귀엽네요.”
본부장이 병규의 얼굴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처음 보았던 다소 사무적인 태도와는 크게 대비되는 행동이었다.
“저, 저, 호랭이의 말이 들리세요?”
병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본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가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흥. 이제는 좀 컸다고 말을 막하는 구나. 꼬맹이 여우야.”
“호호. 꼬맹이란 소릴 들을 나이는 까마득한 옛날에 지났답니다. 호랭이님. 지금은 오히려 호랭이님께서...... 푸훗.”
“어쭈. 방금 전의 그 신경 거슬리는 웃음은 뭐야?”
“아. 봄이라서 그런지 꽃가루 알러지가......”
“뭬야? 요즘은 여우도 꽃가루에 캑캑거리냐?”
“호호. 보기보다 예민하답니다.”
은근히 불꽃 튀는 말싸움. 병규의 혼란은 점점 심화되었다. 그는 손을 펼쳐 두 사람 사이를 막으며 질문을 던졌다.
“자, 잠깐만요. 여우, 여우라니요?”
호랭이가 심드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구미호보고 여우라고 부르는 게 잘못이야? 그럼 여시라고 부를까?”
“에?”
병규의 목이 망가진 인형처럼 끼그극 어색하게 돌아갔다. 본부장은 빨간 입술을 예쁘게 오므리며 대답했다.
“네, 저 구미호 맞아요.”
“에에에?”
병규는 제자리에서 팔짝 뛰고 말았다.
“호호. 하지만 단순한 구미호가 아니에요. 선호(仙狐)이기도 하답니다.”
병규의 반응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던 본부장이 한마디를 보탰다.
“선호요?”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된 여우를 말하는 거다.”
호랭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러니까 호랑이 신선인 호랭이처럼 선호는 여우 신선을 말하는 거군요?”
“어헛. 어디 감히 여우랑 이 지엄하신 호랭이님을 비교해?”
“어머 어머. 호랭이님. 말씀이 지나치세요. 감히 제가 호랭이님과 비교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저 역시 구미호라는 번듯한 타이틀이 있다고요. 게다가 선호인증시험 사상 최단기간 합격자라는 명예로운 기록보유자이기도 하고요. 평범한 선호와 똑같이 취급하시면 정말 곤란해요.”
“안 평범하긴 개뿔. 하긴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놈이 요귀가 안 되고 신선이 된 게 좀 특이하긴 하지. 그나저나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선계의 인간계 개입이 본격화된 모양이구나.”
“네. 각성한 능력자들의 능력이 선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정도라 모두들 바짝 긴장하고 있어요.”
“그 태평스런 양반들이 긴장할 정도야? 대체 어느 정도기에 그래?”
“아직까진 개입 포기라 정확한 통계는 불가능하지만 일반 선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자들도 몇 명 보고되었다고 들었어요.”
“일반선인으론 감당이 안 돼? 헹. 분명 또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의 괜한 걱정일 테지.”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됐어. 그런 쓸데엇는 얘긴 이제 됐고, 여기에 파견된 건 너뿐이냐?”
“아니요. 오늘은 볼일 때문에 출근하지 않으셨지만 저 말고도 삼부선인께서 함께 계세요.”
“사, 삼부선인?”
여태 본부장의 무릎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호랭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아니. 그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인간계에 있는 거야?”
테이블 위로 팔짝 뛰어오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심심하시다고 잠깐 인간계 구경 오신 거죠. 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삼신님과 툭탁거리신 모양이인데, 여기저기 참견만 하고 일은 통 안 하셔서 걱정이에요. 휴우.”
본부장은 정말로 고민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삼부선인이라는 사람이 어지간히 일을 안 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호랭이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삼부선인과 삼신할마탱이가 싸웠어? 그럼 삼신할마탱이는 안 오겠네?”
“네. 여기 온 이후로 아직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하하하. 그래? 하하하하. 둘이 싸웠어? 그것 참 잘됐다. 크하하하하.”
호랭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탁자를 앞발로 탁탁 두드리며 껄껄 웃는다. 가만 보아하니 호랭이는 삼부선인이 싫은 게 아니고, 그로 인해 삼신할매를 만나게 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심하게 당했으니 꿈에서도 보기 싫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호랭이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가관도 아니었다.
작은 강아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아웅아웅 웃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등을 바닥에 비비면서 몸을 꼬아대는 것은?
호랭이 딴에는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결코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풋.”
“흡.”
본부장은 금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고, 병규는 볼을 부풀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어? 너희들 표정이 왜 그러냐?”
호랭이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동그랗게 떠진 눈이란.
“안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지진이라도 난 듯 부르르 떨던 본부장은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감정폭발! 그녀는 그만 지엄하고 위대하신 호랭이님을 덥석 껴안아 버리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헛.”
병규는 돌연 변해버리는 본부장의 태도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다시금 머릿속에 새겨지는 호랭이의 위대함.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를 홀려버리다니. 어쩌면 여자에 한해 절대 무적일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꺄아. 귀여워. 호랭이님. 너무 귀여우세요.”
“헛. 이게 무슨 요망한 짓이냐. 놔라. 이년아. 허엇. 얼굴 비비지 마.”
“아이. 부드러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호랭이님이 이렇게 귀여우신 줄. 호랭이님. 이 기회에 그냥 제 것이 되시는 게 어떠세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내가 인형이냐? 네 것이 되게?”
“안 될까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물었다. 애절한 그녀의 표정엔 구미호 특유의 묘한 색기가 넘쳤다. 그러나 호랭이는 남자라면 금세 껌뻑 넘어갈 듯한 그녀의 현란한 시선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안 돼.”
“정말로요?”
“응.”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호랭이. 결국 본부장은 눈물과 함께 호랭이를 놔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랭이를 풀어주며 뇌까린 그녀의 말이 묘하게 자존심을 박박 긁는다.
“흑흑. 역시. 그런 것이었군요. 호랭이님은 역시 삼신님의 것이었군요.”
“이, 이것아. 누가 삼신할마탱이 것이란 말이냐! 난 그 할마탱이 얘기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게 바로 나야.”
“정말요?”
“당연하지.”
호랭이가 씩씩거리며 흥분하자 호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본부장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뇌까리는 걸 보니 호랭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물론 그것이 아정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애완동물에 대한 솬심인지는 두과 봐야 할 문제지만.
한편, 두 신선(짐승이기도 한)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관람하고 있던 병규는 대충 사태가 수습되는 것 같자 여태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두 분 말씀을 가만 들어보니 신선들이 인간계에 들어오게 된 것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아.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했습니다.”
병규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자영이 깊숙이 상체를 숙여 보였다. 신선 같은 근엄함도, 정보 고위직의 거만함도 찾을 수 없는 공손한 모습. 물론 병규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숙여진 그녀의 블라우스 너머로 깊게 파인 골짜기를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얼씨구나~ 땡 잡았네~’였으니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알려드렸네요. 특수재해대책본부, 줄여 특재대의 본부장을 맡고 있는 자영이라고 해요.”
자영이라 이름을 밝힌 구미호 본부장은 잠깐 동안의 다소 칠칠맞던 모습에서 벗어나 본래의 차분하고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음. 그나저나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까. 능력자가 무엇인지는 아시죠?”
그녀의 물음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웅은,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비슷해요. 하지만 그냥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능력자라고 부르는 건 아니에요. 능력자라고 불리기 위해선 우선 기본적으로 평범 이상의 이 능력을 쓸 수 있어야 하고, 또 능력을 빌려주는 수호신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해요. 물론 꼭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고 된 능력자들은 모두 이 경우에 해당 되었죠.”
“말씀을 가만 들어보니 생각보다 그런 능력자가 많은가 보죠?”
“사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건 아니에요. 우리 나라는 100만 명 중의 하나 정도로 그나마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많은 편이죠. 물론 선계에서 통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능력자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아마 각성되지 않은 능력자들까지 포함하면 수가 조금 더 늘어날 거예요. 그런 이유로 특재대를 비롯한 세계의 특수능력자 협회들은 능력자들의 정보를 모으는 한편, 편의상 능력자들의 힘의 정도와 위험성. 그리고 주위게 미치는 영향력을 종합평가해서 A에서 F까지의 등급을 매기고 있죠. 참고로 저희 특수재해대책본부, 줄여서 특재대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등급은 A에서 C 등급까지지요. 가령 이운석 씨는 공식적으로 B+ 급으로 판정되었지요.”
“꼭 학점 같군요.”
병규는 사람을 능력에 따라 분류한다는 말에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다소 사무적으로 틀릴지는 모르지만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랍니다.”
지영의 표정은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싱그러운 봄바람처럼 나긋나긋하기 이를 데 없어 찝찝했던 마음이 절로 녹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아까 전에 말씀하신 인반 선인으론 감당이 안 되는 능력자가 A 급입니까?”
“아니요.”
지영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사실 A 등급 위에도 한 가지 스페셜 등급이 따로 있어요. 그들은 좀 특별해요. 전 세계를 통틀어 몇 되지 않는데다 능력의 정확한 수위조차 파악되지 않았죠. 그들의 등급은 M. mystery, 또는 miracle의 약자죠. 간단하게 말해 측정불가 등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측정불가라.”
병규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신선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능력이라니. 대체 어느 정도일까.
“대충은 능력자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능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알고 계신가요?”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의 맥을 자영이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 아닙니까?”
병규가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자영은 입가를 살짝 들어올리며 황홀할 정도의 미소를 보였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면 어떻게든 일반인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알려졌겠죠. 사실 능력자가 나타나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가장 최초의 보고가 불과 30년 전이었으니까요.”
“30년밖에 안 됐단 말입니까!!”
병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놀라 부르짖었다.‘엄마야~’하며 깜짝 놀란 장여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너무 놀라시는데요?”
“아니. 그게 왠지 놀라주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아서.”
병규는 은근슬쩍 자리에 도로 앉으며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그런가요?”
억지웃음을 짓는 자영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하하. 문위기가 좀 굳은 것 같아서 개그 좀 해 봤습니다.”
병규가 뻘쭘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큰소리로 웃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한다.
“두 번만 더 개그 했다간 여기서 동계 체육대회가 열리겠다. 이 녀석아.”
“그렇게 썰렁했나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모피코트 장만을 심각하게 고려해 봤다.”
호랭이가 모피코트를 입는다라. 거기에 선글라스 하나만 씌워 놓으면 멋진 그림이 될 것 같지 않은가?
“음음. 능력자의 각성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소울임펙트(Soul Impact) 현상에 대해 말을 안 할 수 없겠군요,”
가볍게 헛기침을 한 자영이 어렵사리 뒷말을 이어나갔다.
“소울임펙트. 해석하면 영혼 충돌쯤으로 부를 수 있겠네요. 말 그대로 소울임펙트는 인간의 영혼에 어떤 충격이 일어난 현상을 뜻해요. 즉, 능력자들이 태어나게 된 어떤 영혼차원의 계기라고 볼 수 있죠. 사실 소울임펙트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을 뜻하는 말은 아니에요. 갑자기 어느 날 동시에 능력자들이 각정하게 된 현상을 두고, 틀림없이 그들의 영혼에 어떤 형태의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나오게 된 이야기죠. 하여간 이러한 의미로 불리는 소울이펙트는 지금까지 총 네 번이 있었어요. 30년 정 북미 지역을 시작으로, 20년 전 한국, 중국, 일본을 위시한 동남아 일대 지역세 세컨드 임펙트가 일어났고, 10년 정의 서드 임펙트는 유럽,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생된 포스 임펙트는 아프리카 지역이었어요. 그렇게 소울임펙트로 능력을 각성한 능력자들은 이상하게도 신화나 전설 속의 존재들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왜 소울임펙트라는 현상이 일어났는지, 또 소울임펙트로 각성된 능력자들에게 어째서 수호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아직 의문. 세계 능력자 연합에서 총력을 기울여 연구 중이지만 아직 뚜렷이 밝혀진 것은 없어요.”
마침내 자영의 설명이 끝났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병규. 돌연 펑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앞으로 꼬끄라져 버렸다. 자영이 ‘엄마야~’ 하면서 놀라는 가운데 신음소리 섞여 병규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으으. 너무 어려운 얘기야.”
그의 뇌 성분이 딱딱한 돌덩이와 얼마나 유사한지 똑똑히 확인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쯧쯧. 멍청한 녀석. 넌 머리통 속에 뇌 대신 짱돌을 처박고 다니냐? 이 쉬운 설명을 어찌 그리 못 알아들어. 쉽게 말해서 소울임펙트라는 현상 때문에 능력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런 소울임펙트가 총 세 번 있었다는 거다. 그중 우리 나라는 그 두 번째 소울임펙트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고.”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자영의 설명을 간단하게 함축시켜 주었다.
“오오. 그런 말이었습니까? 그렇게 간단히 알아들으시다니. 과연 훌륭하십니다. 호랭이님.”
병규는 정말로 호랭이가 존경스러운 듯 두 눈을 반짝였다. 기고만장해진 호랭이. 담배를 꼬나물고 다리까지 꼬면서 애써 거드름을 피운다.
“헤헴. 이제라도 알아봤으니 다행이군. 넌 날 모시는 것 만해도 영광인 줄 알아야 해. 그러니 앞으로 담배 공급량을 좀 늘리도록 해라.”
양반다리를 하고 누워서 내리는 명령. 물론 병규가 네 영감마님 하고 순순히 따를 리 만무했다. 슬그머니 돌아가는 눈동자만 봐도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생각 좀 해 보도록 하죠.”
당연히 평생 생각만 하다 말 것이다.
그렇게 병규와 호랭이가 사이좋게 노닥거리는 동안 자영은 병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병규와 호랭이의 사연은 선게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다. 말도 못할 말썽꾸러기를 한 인간이 떠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선계의 선인들은 대부분 인간 하나 망친 거라고. 괜히 날개 달고 천계 갈 인간 하나, 미친 광돌이로 만들어 버린 거라며 개탄했다.
물론 자영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순진하게 좋은 결말을 바라기엔 그동안 호랭이가 저지른 일이 너무 많았다. 오죽했으면 선인들의 우두머리인 태상노군 님이 무려 석 달 열흘간 삼신님께 치성을 드려 호랭이를 맡겼을까.
하지만 지금 본 둘의 관계는 그간의 걱정을 일시에 일축시켜 버릴 정도로 좋았다. 좀 툭탁거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정이 들어서일 테지.
그런 이유로 지영은 병규를 새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신선들마저 포기한 폭주 건달 신선나부랭이 호랭이와 저렇게 무난하게 지낼 수 있다니. 이운석을 통해 들은 병규의 믿지 못할 능력보다 오히려 그런 면이 더 빛나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물론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호랭이가 선계에 있을 때처럼 난동을 부리려 해도 부릴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과 병규가 호랭이를 괴롭히고 후환을 두려워할 만큼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랭이의 목숨 줄인 담배를 병규가 조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뭔가 빼먹은 것 같은데.’
뒤늦게 병규는 문득 여기서 끝날 얘기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간 게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물어봤네요. 저 본부장님.”
“네에?”
병규가 부르자 자영은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이마가 닿을 듯 그녀가 다가서자 도리어 병규가 흠칫 놀라며 조금 물러섰다. 빨갛게 모여진 그녀의 입술에 괜히 뺨이 붉어졌다.
“저, 저기. 지금까지 설명은 잘 들었는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그 뭐시냐 아까 전에 제 집안 얘기가 나왔을 때 왜 그렇게 놀라셨는지. 설마 그 소울임펙트나 능력자 같은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나름대로 병규는 심각했다. 집안 얘기인데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영은 병규가 그럴수록 더욱 표정을 밝게 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아니라는 투로 충격적인 말을 쏟아낸다.
“꽤 유명하거든요. 아니. 제일 유명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쪽 방면에서는.”
“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능력자 집안입니다. 태씨 문중은.”
쿠쿵.
그 순간 병규는 가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리곤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자신의 집안에 그런 내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짐작 못했다. 얘기는커녕 불온한 낌새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고독했다. 특별히 가족관계가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엔 대기업가의 막내로 남들이 상상도 못할 귀여움과 부귀를 한껏 누리며 살았다. 문제는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두 눈이 문제였다.
남들에게 안 보이는 것,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 귀신과 요괴가 보였기 때문이다. 귀신을 보는 어린아이가 과연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다 유령이 보인다고 말하면 새파랗게 변해버리거나 그를 멀리하며 수군대는 사람들. 그런 이유로 병규는 항상 외로웠다. 그리고 항상 두려웠다.
그랬는데, 그렇게 두렵과 외롭고 괴로웠었는데, 그런 것들이 이제 보니 다 집안 내력이었다니. 그런데 왜 아무도 얘길 해 주지 않았을까. 왜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상한 것이 보인다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절대로 누구 앞에서도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을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영에게 들은 집안 내력에 비하면 다른 사항들은 하찮게 느껴질 정도다. 그 모습이 한심해 보였던지 호랭이가 한마디했다.
“아서라. 고민은 멍청한 너와는 전혀 안 어울린다.”
“하하. 그렇죠?”
하지만 그래도 병규는 불안정안 모습이었다.
그 후로 자영은 몇 가지 질문을 더했다. 언제부터 능력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병규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덕분에 호랭이가 거만을 떨며 많은 정보를 흘렸다. 정보 하나당 담배 한 갑의 값비싼 대가를 받긴 했지만.
한참 설명을 들은 자영이 병규의 능력에 대해 정리했다.
“그러니까 몬스터의 피나 살점을 먹게 되면 그 몬스터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니다.”
“네. 정확한 것은 아니고, 그 힘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나마 요즘엔 어느 정도 잘 다룰 수 있게 될 것 같더라.”
“흠.......”
잠시 자영은 병규의 능력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대체 그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봐야 할까. 현재의 능력만으로 따지고 보면 B급 정도. 하지만 잠재력을 감안했을 때에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요괴의 힘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받아들인 요괴의 힘을 어느 수준까지 활용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의 수호신은 대체 무엇일지. 그 밖에도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가 태씨 문중의 자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고 폭주 건달 왕 날라리 변태 신선인 호랭이를 마음대로 대하는 것 역시 절대로 간단한 능력은 아니지.’
결국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뿔테 안경 너머로 평범한 외모의 병규를 응시하던 자영은 서류철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맨 위에 계약서라고 씌어 있었다.
“이게 뭐죠?”
“보시다시피 계약서예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계약섭니까?”
병규의 물음에 자영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특재대에 들어오신 것을 축하드려요.”
“엥?”
병규의 두 눈이 커졌다.
“...... 저기, 그러니까 제가 특재댄지 특활부선지 하는 곳에 들어가겠다고 말한 기억은.......”
“초봉으로 연 2천. 일이 없는 한 출근할 필요 없음. 위험수당 지급!”
“허허. 기껏 그런 유혹으로 넘어갈 만큼 값싼 남자가 아닙니다. 전.”
“전기세. 수도세. 인터넷 통신료. 자동차세. 전액 대납에 업무에 사용된 기름값까지 계산해 드립니다.”
“이보세요.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대체!!”
“......군 면제.”
“서명하는 곳이 어디죠?”
“.......”
누가 말릴 세라 부리나케 서명을 마친 병규가 뒤늦게 생각이 난 듯 자영에게 물었다.
“아. 잊을 뻔했는데, 특재대에서 하는 일이 뭐죠? 요괴사냥입니까?”
“뭐. 요괴사냥도 가끔 하지만 주 업무는 폭발물 제거예요.”
“폭발물 제거?”
병규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웬 폭발물? 설마 굉장히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인 것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슬그머니 후려친다. 그런 병규를 보며 자영은 정말로 묻어날 것만큼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네. 가끔 있거든요. 능력자 가운데.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그런 폭발물들을 처리하는 것이 저희의 주 업무죠.”
땀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운동기구들. 벽은 물론 천장까지 도배를 하다시피 걸려 있는 거울. 실내를 빙 둘러쳐진 스피커와 눈부신 조명. 그리고 한쪽에 마련된 대형 에어컨과 최신식 샤워실.
여느 훌륭한 스포츠 센터의 내부 풍경처럼 보이는 이곳은 사실 특재대의 전용 헬스실이었다. 고작 스무 명가량이 사용하는 장소 치고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큰 이곳에 지금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고 있었다.
파티의 주제는 신입대원 환영회. 당연히 병규를 위한 파티였다.
“지나치게 조촐하잖아.”
본부장이란 여자가 환영파티를 해야겠다며 수선을 피우기에 대단한 만찬을 기대했건만 기껏 준비한 게 근처 마트에서 사온 맥주 몇 짝과 포테이토 칩 안주가 전부다.
‘겉보기엔 화려하고 대우도 좋은 전문직 같은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
병규는 좀 전에 한 계약이 과연 잘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재고했다.
“이것 봐. 모두들 바쁜 몸인데도 널 축하해주기 위해 납시셨는데 표정이 그게 뭐냐? 자자. 이리와. 내가 사람들을 소개시켜주마.”
이운석이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병규의 손을 잡고 무작정 잡아 끌었다. 이 작자는 생긴 것도 터프하고, 성격도 털털한데 술은 무척 약한 듯, 맥주 몇 잔에 금세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는 걸음마저 비틀거린다. 말하는 꼬락서니는 더더욱 가관이다.
“자. 이쪽의 뻘건 머리 꼬댕이를 짤랑이고 있는 알딸딸한 미모의 아가씨는 우리 특.재.대.릐 왕초, 대빵, 고도리이신 구미호 본부장님. 인사해.”
왕초, 대빵은 알겠는데 고도리는 대체 뭔지. 한숨을 쉬며 병규가 ‘이미 소개받았잖아요.’라고 말했지만 이운석은 막무가내였다. 빨랑 인사를 하란다. 결국 병규는 에고에고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두 번째 뵙습니다.”
자영은 예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호호. 네에.”
“헤~. 우리 고도리 이쁘지? 하지만! 벗! B.U.T. 저 뽀장뽀장한 얼굴과 쭉쭉이 빵빵...... 쩝...... 하려간 속으면 안 돼! 간을 빼 먹을지도 몰라. 알았냐? 왜냐고? 왜냐하면, 울 이쁜 고도리 대빵은 여우걸랑. 하하. 여우야. 그것도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구미호.”
“피. 전 채식주의자라니까요. 괜히 신입대원 겁주지 말아요.”
“예입, 알겠습니다. 고도리 대빵!”
거창하게 거수경례를 한 이운석은 슬금슬금 도망가고 있는 병규의 목을 잽싸게 낚아챘다.
“어딜 가냐?. 내가 소개시켜 준다니까. 자자~ 다음은 꺽다리 아저씨다.”
다음으로 소개받은 인물은 2미터 가까이 되는 장신의 중년인이었다. 고개를 꺽어야만 얼굴을 볼 수 있는 키 큰 사람이 머리는 또 얼마나 긴지, 앞머리가 턱 아래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헤. 여기 까무잡잡 얼굴의 배기철 선배는 몸의 연성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흐믈흐믈~ 하게도 되고, 빳빳하게 할 수도 있어. 그래서 별명이 흐믈흐믈 고슴도치! 특재대에서 부인이 가장 행복할 것 같은 남편부문에 5년간 당당히 일위. 생각해봐. 몸의 연성이 자유롭다면 틀림없이 그 딸랑이도 길었다 줄었...... 아야.”
“이놈아. 술 처먹었으면 곱게 취해. 헛소리 좀 하지 말고. 다 큰 어른 보고 딸랑이가 뭐냐? 딸랑이가.”
“헤헤헤.”
이운석의 머리를 콩 쥐어박은 검은 얼굴의 중년사내는 엄한 얼굴로 다그치긴 했지만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 저어기 컴퓨터 가게 아저씨가 있다. 보러가자.”
이번에 그가 소개한 사람은 30세 정도의 마른 체구를 한 조준엽이었다.
“에헴.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용산에서 컴퓨터 가게를 하고 있는 행님이시다. 앞으로 깍듯이 뫼셔라.”
이운석이 허리를 넙죽 굽히자 같이 섰던 병규도 얼떨결에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훤칠한 두 청년이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허릴 숙이자 준엽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놈. 술 한 잔 먹으니 예의 참 발라지네. 그래도 기왕이면 다음부터는 컴퓨터 가게주인 말고 해커라고 소개시켜줘라. 알았지?”
“에이. 행님, 해꺼는 무슨. 참. 이 행님은 특별히 조심해라. 독쟁이(Poison Master)니까. 이 행님이 주는 건 몽창 은 바늘로 찔러 봐야 해. 알았지?”
“어쭈 어쩐지 잘나간다고 했더니. 역시. 이 녀석아. 술 먹고 꼬장 부린다고 하면 오냐 젊은 객기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어가 줄줄 알았냐? 고연 놈. 못된 버릇을 즉시 바로잡아주는 것도 분명 웃어른의 의무렷다.”
조준엽의 한 손이 소리 없이 스르르 올라갔다. 그 손바닥에 맺히는 진녹색의 어스름한 기운이란.
“히끅. 형님께서 진짜로 열 받았나 보다. 도망이다.”
인색마저 녹빛으로 변하는 조준엽을 피해 달아나던 이운석과 병규는 쟁반을 들고 술과 안주를 나르고 있는 마른 체구의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아이구야. 아야야.”
“괘, 괜찮아요?”
쟁반에 이마를 살짝 찍힌 이운석이 죽는다고 엄살을 떨자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뒤로 크게 나자빠진 예란은 제 아픈 것도 잊고 남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다.
‘오~ 상당히 괜찮은데?’
병규의 그녀는 깔끔하고 조신한 모습에 순간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긴 생머리에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녀린 몸매. 무엇보다 한 송이 수선화 같은 부드러운 미소와 친절한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이구야. 이마 다 까져버렸네. 까욱.”
“어디봐요. 혹도 없고, 괜찮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 방금의 충격으로 머리통이 팽팽 돌아버렸는데. 머리통 안의 두부가 스핀 먹어 버렸음 책임질 거야?!”
“호호. 머릿속에 두부가 들으셨어요? 한 번 꺼내줘 봐요. 정말 팽이처럼 팽팽 도는지 보게.”
입을 가리며 웃는 그녀의 우스개 소리에 병규는 흠칫 놀랐다.
‘저 여자, 조신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살벌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전 소개해 주지 않을 거예요?”
“아! 깜빡했다. 자자. 병규. 이쪽의 해실거리는 아리따운 아가씨는 권예란. 음. 나이 20세. 다 좋은데, 다만 쭈쭈기 싸이즈가~ 대충 보면 알겠지만 부실~.”
“부실이라뇨. 그럴 때는 날씬하다고 하는 거예요.”
존심 상하는 애기에도 불구하고 예란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이운석의 다름 말엔 정심(正心)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에이~ 날씬은 무슨. 부실공사! 부실공사!”
“호호호. 뭐라고 하셨죠오?”
권예란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단순히 웃음소리만 높아진 것 뿐인데도 이운석은 거의 발작적인 반응을 보였다.
“발작, 발작했다. 노처녀 히스테리다.”
이제 겨우 나이 스물인 처자가 왜 노처녀가 되는 건지. 머리가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던 이운석은 갑자기 힘이 솟았는지 병규를 덜렁 들다시피 하며 또다시 도주의 길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거대한 덩치의 거한에게 잡히고 말았다.
“잡았다. 욘석.”
이운석을 낚아챈 사내를 보기 위해 병규는 한참이나 고개를 올려야 했다. 배기철이라는 남자도 컸지만 이 남자도 만만치 않다. 아니 오히려 철탑 같은 탄탄한 근육 때문에 훨씬 더 거대해 보인다고 할까? 드럼통 같은 그의 허벅지 하나만으로도 병규의 체중과 엇비슷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온몸에 가득 그려진 흉악한 흉터들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위로는 팔이며 다리며 어깨며 할 것 없이 마치 송충이가 기어간 듯한 끔찍한 흉터로 가득 뒤덮여있었다. 얼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전에 만난 조폭들은 그에 비하면 순진한 유아원생 같아 보일 정도다.
“아이고 숨 막혀. 선배님. 숨 막혀 죽겠습니다.”
이운석은 여자의 허리통만 한 그의 팔뚝에 가로막혀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운석도 결코 작은 덩치는 아니었지만 거한에 비하면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처럼 초라해 보였다.
“잘했어요. 한식 님.”
거한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 권예란은 공 차듯 이운석을 뻥뻥 걷어찼다. 뾰족한 하이힐로 인정사정없이 차니 이운석은 죽겠다고 난리다.
“커억. 켁. 아, 아파. 윽. 거긴! 아아악!! 으읍!”
비명소리가 시끄러웠던지 거한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이운석의 입까지 막아버렸다. 손바닥 하나로 얼굴 전체가 가려진다.
“케케. 녀석 결국 혼쭐이 나는구나.”
간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조준엽이 병규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거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김한식 선배시다. 나이는 대략 40은 넘은 것 같다. 척 보면 알겠지만 몸 쓰는 일 쪽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지. 지하세계의 전쟁에 달통한 전쟁 광으로 그쪽 사람들은 블러드머신이라고 부르는가 보더군. 우리 특재대에서 유일하게 능력자와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선배의 육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A 급 능력자에 준하는 덴저러스한 인물이야.”
“과연 그렇군요. 그럼 얼굴의 흉터들도?”
“아니 그건 키우는 고양이가 할퀴어서.”
“......?”
“이봐.”
누군가 병규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생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뒷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땋아 내린 스무 살가량의 여성이 서 있는 것이었다. 순간 병규는 눈앞에 작고 맹랑한 흑마 한 마리가 갈기를 휘날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적당하게 그을린 피부의 그녀는 꽃과 같이 차분한 분위기의 앞서는 두 여인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였다.
훅 걷어붙인 팔과 짧은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근육은 여성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해 보였다. 물론 근육이라고 해서 남자들처럼 우락부락한 몸집을 생각하면 착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탱탱한 고무공 같다고 할까. 그녀의 피부는 손가락으로 찌르면 곧장 통하고 튀어나올 것처럼 묘한 탄력이 넘쳤다.
병규가 돌아보자 그녀는 치기 어린 미소를 보였다. 그 웃음이 또한 너무 매력적이었다. 땋아 내린 머리와 함께 길게 내려간 머리끈과 하얀 치아가 유난히 빛나 보인다. 아름다운 미녀보다는 잘생긴 미소년을 보는 것 같다. 아마 학창시절, 같은 여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을 것 같다.
“난. 전경희라고 해. 태씨 문중의 사람이라던데, 실력 좀 볼 수 있을까?”
그녀는 매우 호전적인 태도로 두 손을 마주쳐 보였다. 당연히 병규는 이건 또 뭐냐는 식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 보는 여자가 돌연 한판 붙어보자니. 신혼부부의 침실테크닉 같은 걸 해보자는 건 아닐 테고.(무지하게 바라마지 않지만) 설마 싸움질을? Oh~ No. 오늘 같은 날 싸움질이나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다 여자랑 싸우기는 더욱 싫다. 이건 때려도 손해 아닌가. 그런데 주위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뭐야. 전경희 한 판 붙으려고?”
“야야. 그만둬. 오랜만에 들어온 신입인데 또 그만두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오늘 같은 날. 싸움이라니요. 그만두세요.”
자영까지 나서며 적극적으로 말리는 걸 보니 이거 분위기가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다. 하지만 전경희는 느긋하게 웃었다.
“뭐 어때? 목숨 걸고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간단하게 실력 좀 보자는 건데.”
“하지만 그의 능력은.......”
“아 됐어. 대장 참견은 그만 둬. 난 그저 실력을 구경하고 싶은 것뿐이야. 명망 높은 태씨 문중의 사람이 과연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궁금한 것뿐이라고.”
전경희의 눈이 기이한 열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조심해라. 저 녀석은 전투력만으로는 우리 특재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자야. 한 대만 잘못 맞아도 곧장 황천행이다.”
김한식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충고한다.
‘이것 봐요. 위험한 걸 알면 좀 말려 달라고요.’
병규는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이운석은 이미 저만치 물러난 후였다.
“할꺼지? 하자. 응? 붙자. 그래 줄 거지?”
전경희는 두 눈을 별빛처럼 반짝이며 계속 물었다. 만약에 안 된다고 했다간 밥숟가락 챙겨들고 따라붙을 것 같은 집요함이 느껴졌다.
‘이거야 원. 귀여운 얼굴과 안 어울리게 무지하게 터프한 여자일세.’
병규는 난감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우리 집안의 능력이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군.’
과연 어떤 대결을 벌일까. 고개를 삐걱거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면 분명 주먹다툼을 벌이자고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주위의 예상과는 달리 식탁을 질질 끌어 한쪽 벽에 바짝 붙이고는 그 위에 접시 두 개를 올려놓았다.
“능력자라는 사람들이 원시인처럼 주먹질이나 하는 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좀 신선한 내기를 생각해 냈어.”
“내기?”
병규는 물론 존대를 하지 않았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그녀가 먼저 반말인데 굳이 존대를 해 줄 필요성도 못 느꼈고, 또 왠지 배알이 뒤틀리기도 했다.
경희는 식탁에서 십여 보 정도 떨어진 자리에 경계선처럼 화장지를 길게 펼쳐 놓았다.
“이곳에서 저쪽의 접시에 놓여진 물건을 먼저 가져오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
“음. 순발력을 겨루자는 거야?”
“아니. 이곳에서 움직이면 안 돼. 즉 자신은 움직이지 말고 십 보 밖의 물건을 가져오는 거야. 대신 형평성을 위해 접시에 올리는물건은 자기가 직접 고르는 것으로 하자. 난 이 탁구공으로 하겠어.”
그녀는 작은 탁구공을 왼쪽 접시 위에 올렸다.
“힘이 아니라 능력의 응용력을 겨루자는 말이군.”
그제야 그녀의 뜻을 알아들은 주위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네가 머리를 쓰다니. 별일도 다 있군.”
“대자앙. 오늘 해가 어느 쪽에서 떴죠?”
“글쎄요. 잠깐 나가서 확인해봐야겠네요.”
“와. 신기한 구경을 다 하는데.”
다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머리를 쓰는 내기를 한다는 것에 놀랐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시끄러워요. 내가 정말로 침팬지 정도의 지능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그동안은 머리 쓸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란 말이에요.”
전경희가 빽 소릴 지르자 주위 사람들이 움찔 놀란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중에도 조준엽과 이운석은 한마디씩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무, 물론 침팬지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 침팬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돌고래 정도라면 모를까. 케케.”
“이 양반들이. 오늘 아무래도 푸닥거리 한 번 해야겠네.”
전경희가 소매를 걷으며 성큼성큼 다가가자 조준엽과 이운석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덕분에 내기는 잠시 중단되어야 했다.
“난 케이크 조각으로 하겠어.”
병규는 오른쪽 접시에 케이크 조각을 올려놓았다.
“엥? 웬 케이크?”
“저건 잡기도 나쁠 텐데.”
모두들 의문 어린 눈으로 접시 위의 케이크 조각과 병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탁구공을 올려놓은 전경희의 꽁수는 대략 짐작이 가지만 케이크를 올려놓은 병규의 생각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회는 없어? 상품이 안 걸려 있다지만 명성이 걸린 문제라고. 태씨 일가의 명성이 너로 인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고.”
전경희가 눈썹 끝을 살며시 올리며 묻자 병규는 씩하고 웃어 보였다.
“최선의 선택이야.”
“좋아. 시작해볼까?”
전경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푼다. 가볍게 스텝을 밟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작해도 좋겠습니까?”
사회자를 자처하고 나선 이운석이 병규와 그 옆에 나란히 선 그녀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핫.”
시작 소리와 동시에 전경희는 맹렬한 동작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가히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 팡 하는 통괘한 소음과 함께 불쑥 내밀어진 그녀의 주먹 끝에서 대포알 같은 기운이 뻗어 나가 식탁 위의 탁구공을 강타했다. 맹렬한 권풍에 튀어 오른 탁구공이 맞은편의 벽에 부딪히고 그 반동으로 다시 이쪽을 향해 통통 뛰어왔다.
“역시 저런 수작이었군.”
조준엽이 혀를 쯧쯧 찬다. 아무리 머리를 쓴 내기라 해도 결국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녀의 저돌적인 능력을 생각하면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벽에 튀긴 탁구공은 어느새 절반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병규는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실력에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탁구공이 그녀의 발치까지 튕겨올 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아예 승패에는 관심도 없는지 혀를 내두르며 전경희의 신묘한 묘기를 칭찬했다.
“세상에. 십 보 밖의 물체에 충격을 줄 수 있다니. 대단하네. 그 무협지에서 나온 권풍 비슷한 것 같아.”
그는 그녀의 놀라운 실력에 대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경희는 우쭐해지면서도 겸손한 그의 태도에 왠지 조금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병규는 그녀의 실력에 놀란 것뿐이지 결코 승부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네 능력 정말 멋있는걸. 처음에 얕잡아 보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야. 하지만 이 승부는 반드시 내가 이기겠어.”
말과 동시에 병규의 고개가 식탁으로 향했다.
취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