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02)

빈둥빈둥 놀면서 시급은 딥따 센 알바자리?

발칸과 살 떨리는 대결을 펼쳤던 병규는 집에 오자마자 골아떨어졌다. 마치 잠에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잠에 취해있던 병규는 다음 날 오전 일찍 일어났으나 먹을 게 없다는 심각한 사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동안 경찰서에 출근도장 찍느라 먹을 것을 전혀 장만하지 않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늘어지게 잠에 취해 있는 호랭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시내로 나선 병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옷 보따리를 끌어안고 길바닥에 나앉은 경애를 보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결국 야간 구두닦이가 망해버려서 집세도 못 내게 되고 쫓겨나게 된 거란다.

보따리를 부여잡고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그녀를 보며 병규와 호랭이는 난감해졌다.

“어떻게 할 거냐?”

“음.”

잠시 고민하던 병규는 삶의 비애가 어쩌고 하며 훌쩍거리는 경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도 될 것 같은데. 이층이 비어 있거든. 물론 나 혼자 사니까 불편한 건 좀 있겠지만.”

병규의 말에 서럽게 울던 경애가 어깨를 움찔 떤다. 옷소매로 눈물자국을 훔친 그녀는 빨갛게 부은 눈우로 질문을 던졌다.

“계약금과 월세는 얼만데요?”

“계약금? 그런 거 안 줘도 되는데.”

“안 돼요. 길바닥에 나앉는 한이 있어도 남의 집에 공짜로 얹혀 살 순 없어요.”

그녀는 의외로 단호했다. 병규는 생각했다.

‘이미 길바닥에 나앉아놓고선.’

그래도 이처럼 완강하니 어쩔 수 없다.

“좋아. 계약금 10만 원에 월세 만 원으로 하자.”

겉치레가 뻔한 조건. 그러나 소녀는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비싸요. 계약금은 500원짜리 네 개, 월세는 500원짜리 한 개로 해요.”

“엥. 계약금 이천 원에 월세는 오백 원?”

듣고 보니 황당하다. 이건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날강도가 아닌가.

‘차라리 이럴 거렸으면 그냥 공짜로 들어오던가.’

병규는 황당했다. 병규가 그녀의 엉뚱함에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불안한 표정으로 흘끔흘끔 그를 올려다보던 경애는 혹시나 그가 딴마음을 품을까 새로운 조건은 제시한다.

“대, 대신 청소랑 빨래랑 설거지는 제가 할 게요. 그러면 안 될까요?”

애처로운 그녀의 목소리.

별규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 소녀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좋아. 잘 부탁해.”

병규는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두 소능로 조심스레 맞잡으며 경애는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장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샤방한 미소와 함께한 그녀의 한 마디.

“사, 사장님?”

병규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경애를 집으로 데려온 병규는 일단 욕실부터 개방했다. 얼굴에 묻은 검댕이부터 지우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일단 말끔하게 단장하고 나온 그녀를 본 병규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완전 사람이 달라 보인다. 검댕이가 묻어있을 때에도 좀 괜찮은 정도였지만 깨끗이 씻겨 놓으니 이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예쁜 것이 아닌가.

발칸의 일로 우연히 알게 된 이한영이 부드러운 외모와 그에 상반되는 카리스마로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스타일이라면, 경애는 통통 튀는 고무공처럼 귀엽고 발랄했다.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지는 그런 아기자기한 귀여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그들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처음 한동안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원인은 생활비.

돈이 다 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애야 월세 500원의 조건이면서도 지가 먹을 건 지가 벌어오고 가끔씩 보너스(?)라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찬거리도 들고 오지만, 이놈의 털북숭이 담배 마니아는 하등 도움되는 것이 없다.

무슨 공장 굴뚝하고 친분관계가 있기라도 한 것인지 조막만 한 덩치에도 불과하고 담배를 하루에 무려 세 갑씩 피워댄다. 그것도 입이 얼마나 고급인지 국산담배 양담배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사 달래서 뻑뻑 피워대더니 마지막에 결정했답시고 고든 것이 가장 비싼 담배였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뒤늦은 애국심의 발로인지 양담배 선택 안 해준 것만은 무척 다행이다. 하지만 공장 굴뚝처럼 끊임없이 담배를 치워 없애는 호랭이는 그의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가뜩이나 담배 값도 비싸진 판에.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금연운동을 벌여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담배를 못 끊을 바엔 집을 떠나라는 협박에 호랭이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돌봐주는 계약조건엔 지속적으로 담배를 공급하는 조건도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뻔뻔하게 맞섰다.

결국 병규는 포기상태. 결국 병규네 일가(?)는 파탄재정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

어느 날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병규가 소리쳤다. 호랭이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그의 선언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한마디 감상을 전했다.

“지랄한다.”

“.......”

호랭이의 정감 넘치는 대사에 감격한 듯 병규는 잠시 침묵했다. 물론 미려한 언어적 유희로 톡 하고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의 자취방에서는 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네. 호랭이는 병규 오빠가 말을 할 때마다 왕왕 짖어. 꼭 대답하는 것 같아.”

호랭이를 껴안고 있던 김경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호랭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병규 혼자뿐. 덕분에 통괘하고 신랄한 호랭이의 대사가 그녀에게는 모두 앙앙거리는 견어(犬語 : 일명 개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휴.”

호랭이의 한마디에 목뒤까지 치솟은 혈압을 간신히 식힌 병규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러다 서른도 안 돼서 고혈압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가 어쩌다 저 골칫덩어리를 껴안게 되었누.’

인생 다 산 늙은이처럼 한숨이 절로 솟는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일은 하긴 해야겠는데, 공부와 병행하려니 여간 조건이 빡빡한 게 아니다. 수업 때문에 천상 야간 파트타임자리를 구해야 할 판인데, 그런 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해도 월급이 짜서 벌이가 영 시원찮았다.

“일단을 화보부터 뒤져봐야겠군. 에휴. 어디 일 적게 하고 돈 많이 주는 일자리 없나.”

병규가 푸념할 때다.

“오빠. 내가 알아봐 줄까?”

경애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무엇이!!”

두 눈을 번뜩이던 병규는 초롱초롱한 그녀의 표정에 ‘아뿔싸’하며 탄식을 토했다. 그녀의 예전 직업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은 페스트푸드 점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형편이 많이 좋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직업은 야간 구두닦이. 파산하기 딱 좋은 아이템에 올인하다 결국 그녀는 길거리에 나앉았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애써 창밖의 달을 응시하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흠흠. 뭐, 뭘 알아봐 준다는 거야?”

“빈둥빈둥 일하면서 월급은 딥따 쎈 알바 자리.”

“무엇이!!!”사기꾼의 전형적인 대사 같은 경애의 말에 병규의 인내심은 너무도 쉽게 한계를 보였다. 끊어질 듯 홱 돌아간 모가지와 자동차 전조등을 방불케 하는 강렬한 눈빛, 그리고 턱을 타고 줄줄 흘러 내리는 침이 그의 현재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했다.

“쓰, 쓰읍. 정말? 정말이야?”

“그러엄~. 날 믿으라고 오빠. 내가 이래뵈도 발이 딥따 넓잖아.”

“흠. 하긴 여자치고는 발이 좀 크긴 하...... 윽.”

병규의 명치에 통렬한 일격을 선사한 경애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내가 알아봐 주는 게 싫은 거야? 싫음 말고.”

“겨, 경애야. 농담이야. 농담. 하하하. 설마 내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니.”

병규는 그녀를 달래느라 한동안 진땀을 흘려야 했다. 대체 발 크다고 말한 게 왜 삐칠 사유가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 못할 그였다. 그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여 은근히 눈빛으로 호랭이에게 압력을 가했다.

“협조 안 하면 담배 없습니다.”

“큭. 사악한 놈.”

여간한 일에는 미동도 않는 호랭이였지만 담배문제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신선 체면에도 불구하고 경애에게 온몸을 바쳐 갖은 아양을 떨어야 했다.

병규의 헌신적인 봉사 때문인지 아니면 호랭이의 아양 때문인지 결국 그녀는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며 쫄래쫄래 나갔다.

“흑흑. 공짜로 방도 나눠준 은인에게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 꼭 이러고 살아야 해요?”

그녀가 사라진 후, 병규는 홀로 콜라 병을 깔짝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옆에서 담배를 꼬나문 호랭이가 그의 발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다 그 놈의 돈이 원수지.”

다음 날, 그녀는 용케 편의점 알바 자리를 구해 왔다.

“손님 오면 계산이나 하고 평상시엔 빈둥빈둥 놀면서 가게 정리나 하면 돼 오빠.”

“오오!”

경애의 말에 병규의 두 눈은 감격의 빛으로 일렁였다. 듣고 보니 정말로 빈둥빈둥 놀면서 돈 벌 수 있는 획기적인 알바 자리인 것 같았다.

“고맙다. 경애야. 흑흑.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으마.”

“응. 평생 잊지 마.”

“...... 저기, 경애야 이런 경우엔 보통 아유 뭐 이런 걸 가지고. 라는 식의 말해주는 거 아니니?”

“응? 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그녀. 차마 그게 예의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하하. 뭐 그런 식의 농담도 있다는 거지 뭐.”

“호호호. 정말 재미없는 농담도 다 있네. 호호호.”

“.......”

썰렁한 대화였다.

하여간 그렇게 병규는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그리고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는 편의점 가판대를 붙들고 ‘속았다’를 연발해야 했다.

편하게만 보이는 편의점은 사실 전혀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카운터에 앉아 POS기라 불리는 기기로 돈 계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냉장고의 술이나 음료수도 틈틈이 꽉꽉 채워 넣어야 하고, 또 새벽 시간대에 쏟아져 들어오는 본사의 배송을 받아 매대에 진열해야 한다. 웃기는 것은 매대 정리나 냉장고를 채울 때에도 손님이 들어오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건을 훔쳐 가는 엉뚱한 놈들이 심심찮게 있기 때문에 항상 손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취객이다. 어디서 퍼 마셨는지 술이 머리꼭대기까지 올라서는 아무나 보고 삿대질이고 욕이다. 처음에는 살살 달래도 보고 얼러도 보지만, 열이면 둘 셋 정도는 멱살잡고 흥분하게 된다. 덕분에 병규는 일 시작한 지 하루만에 경찰서에 출근도장을 찍어야 했다.

“사악한 것. 쉬운 알바 자리를 구해 준다고 하더니. 결국 이거였냐.”

병규는 앞치마를 입에 문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한심스fp 보던 호랭이가 혀를 차며 한마디 던진다.

“쯧쯧. 그 아이가 보기엔 빈둥빈둥 놀면서 일하는 것으로 보였겠지. 걔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잊은 거냐?”

“.......”

병규는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배부른 소리였던 것이다. 경애는 철도 들기 전부터 세상을 떠돌았다던데. 변변한 옷이 없어 어디 깔끔한 알바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투자금이 적다는 이유로 구두닦이를 했을까.

“헤요. 일이나 해야겠습니다.”

병규는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섰다. 경애를 생각하니 도저히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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