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02)

폭발! 질풍 삼연격

다음날 세상은 발칵 뒤집혀 버렸다.

무려 45명이 심장이 뜯긴 채 사망했고, 5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2명은 심각한 정신적 착란증세에 빠져 버렸다.

가히 테러에 준하는 엄청난 학살극.

‘잔혹한 살인마, 폭주족 50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다.’

방송사들은 일제히 피로 물든 병규의 집 주변을 끊임없이 스크린에 담으며 발칸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범죄들을 일일이 나열했고, 뉴스 채널들은 잡히지 않는 살인마와 무능한 경찰이라는 주제로 특집방송을 편성했다. 신문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주간지의 일면을 발칸의 몽타주가 차지해 버렸다.

일부 언론에선 발칸에게 살인을 사주한 인물이 있다느니, 발칸의 정체는 사실 정의를 수호하려는 과격분자라느니 하는 식의 허무맹랑한 소리들을 지껄여댔다.

이런 소란 중에 당연히 병규도 이래저래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로 그의 집 앞마당이었다는 것에 경찰과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은 엉망으로 박살나 버렸고, 자갈이 깔린 앞마당엔 심장이 뜯겨나간 시신이 피를 쏟으며 널브러져 있었다. 특히 불독의 시신은 휴지조각처럼 사방으로 뿌려져서 역겨운 냄새가 주변에 진동하고 있었다.

경찰은 병규에게 레드서클과 무슨 관계인지 지겹도록 추궁했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왜 하필 발칸이 그의 집 앞에서 그런 대학살극을 벌였는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며, 레드서클과 한바탕 분규가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혼자 레드서클과 분탕질을 했다는 걸 말해봤자 경찰에서 믿어 줄 리도 없다. 사실 경찰도 뭔가를 기대하고 병규를 조사하는 것은 아닌 눈치다. 그저 하도 시끄러운 사건이라 형식적으로 그를 귀찮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경찰서엔 그 말고도 이도재와 이상철 두 사람도 있었는데, 현장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사람은 그 두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들도 정상은 아니어서 계속되는 경찰의 취조에도 반쯤 실성한 표정으로 울기만 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기에. 병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한 번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경우는 자신의 내장이 배 밖으로 외출을 나온 경우였다.

하여간 그렇게 일 주일이 넘게 경찰의 조사에 불려 다니느라 발칸의 뒤를 추적하는 것은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끝도 없을 것 같은 시달림은 묘하게도 발칸의 다른 사건으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 50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은 지 채 열흘도 안 되어 발칸은 또 다른 대형 사건을 터트렸는데, 이번 대상은 유명한 조직폭력배였다.

세간의 관심은 당연히 그쪽으로 옮겨갔고, 그때서야 병규는 경찰의 조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어이. 집에 가냐?”

터덜터덜 경찰서를 나서는데 담배를 꼬나문 중년 사내가 아는 척을 해온다.

전영택 형사.

가볍게 전 형사라 불리는 그는 병규의 담당 형사였다.

“태워다 주마.”

괜찮다는 말을 하려다 병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 슈퍼스타. 어러 와.”

썩어가는 아반떼 승용차 뒤 자석에 탑승하니 조수석에 앉은 조영기, 조 형사가 아는 척을 한다.

신문과 방송에 실렸던 것을 두고 이렇게 놀리는 것이다. 병규는 그냥 피식 웃었다. 일 주일간 매일 같이 보았더니 이젠 제법 친해졌다. 솔직히 이 양반들이 자신의 담당형사라 다행이라 생각하는 병규였다.

이웃집 형들 같은 느낌이랄까.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모라 병규의 편의를 봐주어 그나마 조금은 편할 수 있었다.

“자유를 되찾은 소감은 어때?”

조 형사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묻는다. 경찰 조사가 끝난 것을 일컫는 것이다.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요.”

며칠 전 개학을 했는데, 아직 학교에 가보지 못했다.

“휘유.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을 오랜만인걸. 설마 공부가 좋다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있나?”

전 형사가 담배를 빙글 돌려 물며 묻는다.

“아직 없습니다.”

병규는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없게 생겼다.”

“윽!”

“하하. 선배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뭘 너무해. 남자끼리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지.”

“하하하. 애 표정 좀 보십시오. 완전 똥색인데요?”

“어? 정말이네. 설마 그 정도에 충격을 받은 건 아니겠지?”

“충격...... 받았는데요.”

“저런. 그렇게 소심해서야. 걱정 마, 짚신도 짝이 있다잖냐. 언젠가 아리따운 네 님도 나타날 게다.”

“오. 선배님 그거 확실한 겁니까?”

“물론 접대용 거짓말이지.”

“푸하하하.”

“큭!”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고물 차 안은 그렇게 왁자지껄했다.

‘어째. 호랭이가 조용하네.’

자나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어깨에 매달린 호랭이는 전 형사가 피우는 담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솔솔 풍기는 냄새에 담배는 당기는데 남의 시선이 있어 차마 피우지는 못하겠으니 아마 죽을 맛일 게다.

그렇게 한참 시내를 달리는데 운전을 하던 전 형사가 갑자기 눈을 치켜뜬다.

“저 자식이!”

차를 도로변에 급하게 세운 그는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 형사와 병규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따라 차 밖으로 나왔다.

도로변.

말끔하게 생긴 녀석 하나가 구두닦이로 보이는 소녀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싫다는 데도 강제로 팔을 끌어당긴다. 그 바람에 소녀의 옷이 헝클어졌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흘끔흘끔 눈길을 주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야, 이 자식. 너 뭐하는 짓이야?”

꽤나 열혈적인 성격인 듯 전 형사는 대뜸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엇?”

갑작스런 난입자에 무심코 인상을 찡그리던 녀석은 병규의 얼굴을 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후다닥 도망간다.

전형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병규를 쳐다본다.

“너, 저 녀석에게 돈 꿔준 거라도 있냐?”

“뭐, 그냥 좀 아는 사이죠.”

병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목을 긁는다.

‘저 녀석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보이는군.’

구두닦이 소녀에게 치근덕거리던 녀석은 그가 잘 아는 인물이었다.

안세준.

돈만 믿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방탕아. 저번에 한 번 크게 당하고 난 후, 의도적으로 그를 피해 다니고 있는 것같더니 이런 곳에서 또 몹쓸 짓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 영 인간이 못 되려나 보다.”

호랭이가 혀를 쯧쯧 찬다.

“어디 다친 데는 없냐?”

조 형사가 쓰러진 소녀를 일으키며 묻는다.

“괘, 괜찮아요.”

형사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인 소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구두통을 보고는 신음성을 흘렸다.

“아!”

그녀는 보석을 줍듯 땅바닥에 떨어진 구두솔들을 정성스럽게 챙겼다. 병규가 보기엔 못 쓸 정도로 오래된 도구들이었는데 그녀에겐 소중했던가 보다.

“몇 살이야?”

측은한 마음이 든 전 형사가 넌지시 묻는다.

“열일곱요.”

“엇.”

병규는 헛바람을 터트렸다.

열일곱이면 고1. 그보다 한 살 아래가 아닌가. 한창 드라마에 열광하고 부모님께 핸드폰 사 달라고 철없이 떼나 쓰고 있을 나이에, 찬바람을 맞으며 이렇게 힘든 일을 하다니.

놀란 마음에 자세히 보니 검댕이가 묻은 소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깜찍했다. 과연 깐깐한 안세준 녀석이 치근덕거릴 만도 하다.

“요즘 흔하지 않은 아이네.”

전 형사는 수수하게 웃었다. 구두닦이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가정 형편이 어떨 거라는 건 뻔히 보이지만, 보통 이 정도로 반반하면 좀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기 마련인데, 이 아이는 얼굴에 검댕이를 묻혀가며 험한 일을 하고 있다.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아저씨 혹시 구두 안 닦으세요?”

구두통을 챙긴 소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한밤중에 웬 구두니.”

“헤헤.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돈을 벌죠. 아무도 야간에 구두 닦는 일을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 야간근무자들이 꽤 많아졌으니까 그 분들을 상대로 구두를 닦으면 잘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소녀는 코밑을 훑으며 귀엽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보다 못한 조형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건넨다.

“저기...... 그런데 말야. 야간에 일하는 사람이 과연 구두를 닦으려 할까? 어두컴컴해서 봐줄 사람도 없는데.”

돌연 소녀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아아. 그럴 수가.”

그녀는 그 자리에서 철퍼덕 주저앉아 꺼이꺼이 서럽게 운다.

“좋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일 주일 동안 손님이 한 명도 없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이야. 흑흑흑.”

하도 그녀가 서럽게 울자 괜히 미안해진 두 형사.

“우리들 구두라도 좀 닦아주겠니?”

“정말요?”

언제 울었냐는 듯 소녀는 눈을 반짝였다.

얼떨결에 구두를 맡기게 된 두 형사.

“병규야. 조금 기다려도 되겠냐?”

“상관없어요.”

손을 흔들어 보인 병규는 차분히 소녀를 지켜보았다.

“헤헤헤. 일이다. 일.”

소녀는 간만에 생긴 일감에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며 열심히 구두질을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전 형사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김경애라고 해요.”

구두에 침을 퉤퉤퉤 뱉으며 소녀가 대답한다.

병규는 피식 웃었다. 퉤퉤퉤라니. 요즘 같은 세상에 구두 닦으면서 침 뱉는 걸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하긴 하는데 닦는 건 영 엉성하다. 초보인 병규가 봐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된 게 닦으면 닦을수록 구두의 광택이 죽을까.

“장사가 안 될 만도 하구만.”

호랭이가 포옥 한숨을 쉰다.

하지만 정작 구두를 맡긴 두 형사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소녀가 구두를 닦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운가 보다.

그때였다.

거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떼의 무리가 우르르 지나갔다.

형사들의 표정이 가볍게 변한다. 검은 양복에 하나같이 짧은 머리. 상의 사이로 힐끗 보이는 신문지로 둘둘 만 길쭉한 물건.

보나마나 조직폭력배들. 게다가 저렇게 연장을 챙겨들고 바삐 뛰어가는 것이라면.

시선을 마주친 두 형사는 소녀에게 만 원짜리 두 장을 쥐여 주며 급하게 신발을 신고 그들을 따라갔다. 열심히 뛰어가던 전형사가 문득 생각난 듯 우두커니 선 병규에게 소리친다.

“병규야.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겼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버스 타고 들어가라.”

“네.”

병규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역시나 바쁜 양반들이다.

이때만 해도 병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집에 돌아가서 씻고 잘 생각뿐이었다.

“놈의 냄새가 난다.”

호랭이의 한마디. 그 한마디로 병규의 느긋한 표정이 변해버렸다.

“어떻게 할 거냐?”

호랭이가 조심스레 묻는다.

불과 며칠 동안 병규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죽기도 하고,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싸움질도 했으며, 언론과 경찰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호랭이는 병규의 상태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혹시나 이제와 못하겠다고 손을 흔드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염려와 달리 병규는 씩 하고 가벼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놈을 잡아야죠.”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이번 사건으로 경찰이 발칸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결국 호랭이의 말대로 그와 호랭이가 나서야 한다.

물론 갑자기 정의감이 솟았다거나 괜한 영웅심의 발로로 이러는 것은 아니다.

하필 그의 집에서 일어난 발칸의 대규모 살인. 병규는 이점에 주목했다. 어쩌면 발칸은 그를 찾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레드서클은 그 대신 희생양이 된 것인지도.

‘놈과 나 사이에 뭔가 운명적으로 꼬인 것이 있다면 차라리 화끈하게 풀어보는 것이 좋겠지.’

물론 발칸이 일부로 병규를 찾아왔던 것은 아니다. 다만 폭주족들의 시끄러운 소음을 쫓아오다 보니 어떻게 우연찮게 병규의 집에서 일을 벌이게 된 것뿐이다. 사실 발칸은 병규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병규는 발칸과의 악연을 끝내기 위해 천천히 형사들의 뒤를 쫓았다. 스르르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 그동안 그는 갑자기 빨라진 자신의 스피드에 놀라울 정도로 적응이 되어 있었다.

한편 검댕이를 얼굴이 잔뜩 묻히고 있는 구두닦이 소녀는 조폭들이 뛰어간 방향을 보며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은 조폭들이 신고 있던 검은 구두로 가득 차 버렸다.

“돈들이 뛰어갔어.”

일거리가 없어 의기소침하던 그녀에게 우르르 뛰어가는 조폭 무리는 이른바 대박이었다. 물론 지금 뛰어간 조폭들이 좋지 않은 일을 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구두가 지지 않을까?

‘화끈하게 몸을 풀게 되면 구두가 더럽혀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구두를 닦아야 할 테지? 조폭만큼 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드무니까.’

짤랑.

그녀의 머릿속에서 굶주린 돼지저금통이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한다.

“인생은 한 방!”

경애는 구두통을 어깨에 메고 병규의 뒤를 쫓았다.

은은하게 진동하는 차향. 정갈하면서도 세련된 실내장식들. 그리고 형광등 대신 실내를 밝힌 것은 작은 촛불들.

주인의 품성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단아한 실내였다.

‘의외로군.’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오로치는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던 그에게 이곳의 고아한 분위기와 주인의 독특한 느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독특한 취향이시군요.”

오로치는 향긋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능숙한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한영은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오로치는 가벼운 경탄성을 흘렸다.

일렁이는 촛불 속에 투영되는 그녀의 미모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과연 밤에 피는 백합이란 명성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어떻게 이런 보석이 암흑가에서 썩고 있었단 말인가.’

신풍(神風)이라는 일본의 능력자 조직에서 상당한 지위에 이른 그가 이제 갓 스물이 된 젊은 여자와의 대면에서 거듭 놀라고 있었다.

오로치.

사실 그는 일본의 양대 능력자 단체 중의 하나인 신풍의 총사였다. 원래는 일본 내의 조직운영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이지만 최근 모종의 이유로 한국 내에 기반을 닦아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다각도로 신풍에 협조할 지지자들을 수색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한국의 암흑가와 관련된 인물이었다.

현재 한국에는 일본의 야쿠자처럼 수많은 조직들이 전국에 산개해 있었가. 그들 중 몇몇은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방대한 곳도 있다. 좁은 나라에 덩치가 큰 조직들이 몰려있으니 자연 알력이 없을 수 없다. 때문에 몇 년 전만 해도 작은 구역을 놓고 조직간에 피를 뿌리는 일은 흔하지는 않아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런 양상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어느 날, 전국의 모든 조직들이 일제히 항쟁을 멈춘 것이다. 놀랍게도 그 것은 단 한 명의 여자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가 활동한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녀가 이룬 것은 가히 신화에 가까운 기록들이었다.

불과 일년.

그녀가 일 년간의 유희를 마쳤을 때, 한국의 모든 조직은 그녀를 신성시하게 되었다.

‘대체 이 가녀린 여자에게 어떤 카리스마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오로치였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의 능력에 대해 별 다른 기대를 안 했던 것이 사실이다.

암흑가의 성녀라고 칭해지고 있다지만 기껏해야 조그만 반도의 여자. 그런 여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러나 막상 그녀를 본 오로치는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그녀는 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녀의 능력은 그녀의 황홀한 미모보다 훨씬 더 탐나는 재능이다. 그는 적지 않은 수의 능력자들을 알고 있지만 그중에서 그녀와 비견되는 능력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 이 정도의 가치니 만약 제대로 된 훈련만 거친다면.......

오로치의 입술이 사르르 말려 올라가며 얇은 미소를 보인다.

“제가 제시한 조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이번에도 이한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로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갔기 때문이다.

“원하신다면 더 좋은 조건도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를 아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매사에 꼼꼼하고 완고한 오로치가 이런 느슨한 말을 하다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다. 그만큼 그녀가 뛰어나다는 뜻일까.

“음.”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던 이한영이 가볍게 운을 뗀다.

탁.

그녀가 여태 들고 잇던 찻잔을 가볍게 탁자 위에 올리자, 한순간 모두의 시선이 찻잔에 묻은 그녀의 입술자국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먼저 거부의 뜻을 밝혔다.

“형제들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일할 생각은 없어요.”

“어허.”

오로치는 가볍게 경탄성을 흘렸다.

“이해할 수 없군요. 이런 야쿠자 놀이가 뭐가 좋으신지.”

그의 도발적인 언사에 뒤를 지키고 선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가볍게 동요한다. 이한영은 손을 쓱 내저으며 그들을 제지했다.

“동생들의 모욕은 곧 저의 모욕이에요.”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 순간 등골 서늘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오로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부채로 얼굴을 부쳤다.

“으흠. 심기를 거스르게 되었다면 사죄하지요.”

이한영의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대나무처럼 꼿꼿한 맛이 있어야지. 생긴 것만큼이나 마음에 안 드는 자다. 일본에서 어렵게 왔다기에 평소 안 부리던 얌전까지 떨면서 상대해 주고 있는데, 이건 대화를 하면 할수록 짜증만 난다. 어디서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이 나타난 것인지.

자연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음성도 쌀쌀해졌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전 형제들을 버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이점 유념해주시길.”

그녀는 더 이상 이 답답한 군상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내가 들어왔다. 미리 출입을 자제해 달라고 말해두었는데도 들어온 걸 보면 꽤 급한 용무인 모양이다.

“누님.”

이한영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인 가물치는 조용조용 그녀의 귓가에 말을 전했다 이한영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급한 볼일이 있어 이만 자리를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부하들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쯧.”

그녀와 조폭들이 사라지자 오로치는 나직이 혀를 찼다. 역시나 쉽지 않은 상대다.

“원래 가치 있는 물건일수록 어렵게 얻게 되는 법이지.”

차가운 미소를 지은 그는 먼저 간 이한영의 뒤를 소리 없이 따랐다.

“발칸이 나타났다고?”

달리며 이한영이 물었다. 가물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네. 성동파 애들이 발견한 모양입니다.”

발칸. 최근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마. 그런 살인마를 발견했다면 응당 경찰에 신고해야겠지만 며친 전 이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왕건이 파가 놈에게 당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주먹으로 먹고사는 갱이 야쿠자나 마피아도 아닌 살인마 따위에게 단체로 죽다니. 이래서야 국제적인 망신이다.

그래서 근방 조직들의 요청에 그녀까지 출동하게 된 것이다.

조폭들에게 있어 그녀는 다만 상징적인 존재만은 결코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자인 것이다.

“어떻게 됐지?”

현장에 도착한 이한영은 우선 정황부터 살폈다.

“성동파와 남방이네 애들이 녀석을 골목으로 몰아넣은 모양입니다.”

“좋아.”

이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좋은 상황이다. 구석까지 몰아넣었으니 이제 잡기만 하면 될 터. 막 그녀가 수하들을 이끌고 좁은 골목으로 걸어가려 할 때였다.

“어허. 이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유명한 사람을 보게 되네.”

조폭들을 미행하고 있던 전형사가 그녀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해온다. 전 형사를 본 이한영의 표정이 가볍게 변한다. 그녀 역시 전 형사가 초면은 아니다.

“전 형사님이시군요.”

“하하. 보잘것없는 사람을 기억해 줘서 고마운 걸. 그런데 서울에 계신 아가씨가 이런 시골엔 무슨 볼일이신가?”

“그저 잠깐 볼일이 생겨서.......”

이한영은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눈치 빠른 전 형사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저런. 궁지에 몰린 녀석들이 백합을 호출하셨군. 그런데 대체 백합꽃이 출동할 정도의 사건이 뭐가 있을까.”

“.......”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가물치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누님. 귀찮은데 대충 밀어 놓을까요?’

이한영은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능글맞게 웃고 있는 전 형사, 그는 이 바닥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다. 20년 경력의 강력계 형사. 그녀가 암흑가의 상징적인 존재라면 그는 우리 나라 경찰의 신화 같은 존재다. 아마 실적으로만 따졌다면 옛날에 경찰청장에 올랐을 것이다. 겉보기엔 부스스한 옆집 아저씨 같이 생겼지만 적으로 두면 상당히 귀찮은 존재다.

“선배님. 저는 볼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한영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수하들에 둘러싸인 채 좁은 골목으로 뛰어갔다.

“이런 역시나 비밀인가?

전 형사는 며칠 째 못 감은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때 놀란 표정으로 서 있던 조 형사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저기 선배님. 백합이라고 불리는 여자라면.......”

“그래. 그녀가 바로 밤에 피는 백합. 암흑가의 성녀라고 불리는 이한영이지.”

“하.”

조 형사는 감탄한 듯 탄식을 발했다.

그녀는 경찰 쪽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다.

20살. 약관의 나이로 암흑가를 평정한 여걸.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전국의 조폭이 구름처럼 몰려든다는 암흑가의 신성.

그 누구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렇게 대단한 전설을 세우지 못했다. 하물며 그녀는 여자가 아닌가.

놀라운 것은 그녀가 그러한 명성을 쌓는 동안 불법적인 일에는 단 한 건도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듣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네요.”

“그렇지. 왜 반했냐?”

“에이. 어디 좀 예뻐야 말이죠. 깨끗이 포기할 랍니다.”

“하하. 잘 생각했다. 내가 봐도 넌 무리인 것 같으니까.”

얼굴이 일그러지는 조 형사의 등을 팡팡 소리 나게 두드려 준 전 형사. 사실 그는 딴 생각에 몰두했다. 암흑가의 성녀까지 출동했다면 이것은 절대 보통일이 아니다. 틀림없이 큰일이 터졌다는 얘기가 되는데.

문제는 지금 즉시 본부에 협조 요청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잠시 사태를 관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쩝. 좀 기다려보지 뭐.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녀의 이름값만으로도 조용히 끝날 수도 있으니까.”

전 형사는 관망을 택했다.

“어이. 후배. 우리도 슬슬 들어가 보자고.”

“네.”

두 사람이 골목길로 진입하려는데, 한쪽에 시립해 있던 떡대들이 우르르르 몰려오더니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 형사가 경찰 배지를 보였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전 형사가 권총을 꺼내어 빙빙 돌리자 순순히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애들 상대할 때는 이 장난감이 최고라니까.”

“들었냐?”

“네.”

형사들의 뒤를 뒤쫓던 도중 그들은 우연히 이한영과 가물치의 대화를 엿들은 병규와 호랭이는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괴물 녀석이 포위를 당했다라.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호랭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소리다.

그가 알고 있는 발칸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포위당할 존재가 아니다. 설사 수 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더라도 그 빠른 다리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발칸이 구석에 몰렸다?

감이 좋지 않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냥꾼은 자신의 몸뚱이를 이용해 맹수를 유인한다. 발칸이 포위당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저희도 들어가 보죠.”

“어떻게 들어가려고? 저 덩치들이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도 않은데.”

“잡지도 못할 만큼 빨리 달리면 돼요.”

“뭐라?”

“꽉 잡아요. 호랭이.”

말을 마친 병규는 돌연 전속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히 질풍 같은 빠르기. 얼마나 빠른지 정작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잔상만 보일 정도다.

“헛!”

골목을 지키고 선 떡대들도 병규가 맹렬히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어 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들 사이를 통과해 버리고 말았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 벌어진 일이었다.

“방금 그게 뭐였지?”

“그, 글쎄.”

떡대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병규의 가공할 스피드에 그들은 감히 쫓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로켓이라도 등에 메고 있지 않는 한 절대로 잡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랭이. 발칸을 잡을 수 있는 도술이라는 게 뭐예요?”

바람 같은 스피드로 골목 안으로 숨어든 병규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주박술(呪縛術)이라고 들어봤냐?”

“모르겠는데요.”

“그런 게 있다. 잠깐 동안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술법이지.”

“아. 그걸로 발칸을 못 움직이게 하려는 건가보죠?”

“그렇지. 그런데 한 가지 제약이 있다.”

“뭔데요?”

“한 번밖에 못 써. 도력을 봉인할 때 딱 일 회분만 남겨놓았거든.”

“...... 실수하면 절대로 안 되겠네요.”

“하하. 걱정 마라. 설마 이 몸이 그런 초보자나 저지를 실수를 하겠느냐?”

호랭이의 너털웃음. 왠지 모르게 신임이 안 가는 병규였다.

한편 헐레벌떡 병규를 따라온 떡대들의 장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에겐 전 형사의 장난감(?)도 병규와 같은 스피드도 없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곤 어깨에 멘 구두통 하나뿐인데.

“저기 잘생긴 아저씨들. 혹시 구두 닦으실 생각 없으세요? 요즘 봄맞이 할인행사 중인데.”

그녀는 어떤 환경에서도 영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촤악!

푸른빛이 허공을 가르자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진다. 뒤이어 터지는 참혹한 비명소리.

“으아악.”

“아악!”

허리가 양단된 두 사내가 피거품을 뿜어내며 땅 위로 허물어진다.

“흠흠. 좋은 냄새야.”

발칸은 코를 벌름거리며 키득거렸다. 십여 명의 조폭들이 그의 발아래 시체가 되어 누워있다. 그를 포위했다고 알려진 성동파와 남방파의 조직원들이다. 병규의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발칸은 이제 막 죽인 시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짜릿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크흐흐. 좋군. 흐흐흐흐.”

싸늘한 달빛 아래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발칸은 희열에 들떴다.

달빛에 푸르게 변색된 그의 두 손.

놀랍게도 그의 손끝에서 레이저포인터에서 쏘아진 빛줄기처럼 푸르스름한 기운이 한 자나 솟구쳐 오르고 있다.

그 푸르스름한 기운은 그가 키메라의 몸이 되었을 때 하사받는 요수의 발톱. 마법사들이 소드마스터의 검기를 흉내 내어 만들어 낸 무엇이든 잘라버리는 절대의 검이다.

이계를 넘어오기 전에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차원의 문을 넘는 동안 붕괴된 육체와 더불어 지금까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끄러운 폭주족 녀석들을 대량으로 해치우고, 다시 며칠 전 검은 양복 입은 녀석들의 심장을 대거 취하며 몸이 크게 회복되자, 요수의 발톱도 어느덧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발칸의 전투력은 호랭이와 맞붙을 때와 비교하면 열 배 이상 강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변한 것은 그의 능력뿐만이 아니다. 그의 모습 역시 예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대머리였던 머리엔 짧은 머리칼이 가득 뒤덮여있고, 60대 노인처럼 주름이 가득했던 피부는 40대 정도의 것으로 팽팽해졌다.

“크크크크.”

발칸은 득의의 괴소를 지었다. 골목 안으로 또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리낟. 새로운 먹이가 죽는 줄도 모르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귀찮은 경찰들이 몰려들기 전까지 몇 명이나 먹을 수 있을까. 30명? 50명? 가끔은 사냥보다 이렇게 저절로 굴러든 먹이를 노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두려움도 모르고 달려드니 귀찮게 쫓아갈 필요도 없지 않은가.

“엇?”

발칸은 발견한 이한영은 깜짝 놀라 신음성을 발했다. 벌거벗은 발칸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다. 그의 발아래. 고기조각이 되어 널려 있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그리고 질펀하게 널어진 내장들.

“이...... 이......!”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잠깐 사이에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한편 발칸은 그녀를 보고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녀의 미모에 혹한 것은 아니다. 키메라가 되면서 성욕도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에게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것은 그녀의 전신에서 어떤 압력이 풍겨져 왔기 때문이다.

“이얏!”

가물치가 연장을 꺼내들고 휘두른다.

시퍼런 칼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발칸은 가볍게 요수의 발톱을 휘둘러 가물치의 칼을 베어 버렸다.

쩌겅.

무섭게 잘 갈려진 칼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잘려 나간다.

“엇?”

가물치가 머뭇거리는 사이 두 번째 공격이 그의 머리를 찍어온다.

“뒤로 빠져!”

이한영은 급히 그를 잡아당겼다.

취악.

소름 끼치는 요기를 발산하는 요수의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가물치의 앞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녀석.”

마침내 이한영이 나섰다.

부웅.

호쾌한 주먹질. 가녀린 그녀였지만 주먹을 뻗는 동작은 더없이 시원했다.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발칸은 그녀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왠지 좀 전의 비쩍 마른 녀석이 휘두른 검보다 이 여자의 주먹이 더 두렵게 느껴진 것이다.

발칸의 신형이 휘리릭 퍼지며 그 자리를 피한다. 덕분에 이한영의 일격은 엉뚱한 담벼락을 후려치게 되었다. 펑 하는 소음과 함께 돌무더기가 우수수 무너진다.

‘권사인가?’

발칸의 표정이 가볍게 변했다. 이 여자. 뭔가가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불안감이 단순히 권사에게서 느껴지는 것 이상이라는 점이다.

이 정도라면 가히 마계의 마인들에 준하는 압박이 아닌가.

‘뭐지. 이 여자는?’

발칸은 긴장했다. 인간 중에서는 처음 만나 보는 강자다.

“어서 피해.”

발칸의 앞을 막아선 이한영은 우선 부하들을 돌려보내려 했다. 가물치를 위시한 부하들은 머뭇머뭇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누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빨리 안 가? 너희들이 있으면 내가 제대로 싸울 수 없잖아. 설마 갓난아기처럼 일일이 뒤치다꺼릴 해줘야 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 가물치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곧 허리를 깊숙이 숙인 다음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론 방금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니다. 그들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으면 그녀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은 확실하다. 발칸의 순간적인 움직임.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누님, 역시 평범한 인간은 절대 아니지.’

가물치는 이한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일단 경찰에 연락을 넣어야 한다. 놈이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화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가 막 핸드폰을 꺼냈을 때다.

“어이.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가는 거야?”

맞은편에서 전 형사와 조형사가 느긋하게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가물치는 능글맞게 손을 흔드는 그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형사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오우. 이거 생각지도 못한 환영인걸?”

전 형사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마치 정말로 기쁜 것처럼. 하지만 그와 달리 조형사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사람들이 경찰을 반길 때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선배릐 말대로 뭔가 큰 일이 터진 것이다.

가물치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사님. 급합니다. 빨리 경찰의 지원을 요청해 주십시오.”

“지원? 무슨 일인데 그래?”

“발칸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여러 명이 놈에게 죽었습니다.”

툭.

전 형사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이건 생각보다 엄청난 사건이다.

“바보 같은 녀석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빨리 말했어야 할 것 아냐. 설마 너희들끼리 해결하려고 한 거냐?”

휴대폰의 번호를 누르며 전 형사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직통회선으로 전화를 건 그는 큰 목소리로 한참을 떠들었다.

“다행히 인근 주택가에서 먼저 신고가 들어간 모양이다. 잠시 후면 도착한다니 우선은 녀석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만 하자.”

권총을 꺼낸 전 형사는 약실에서 공포탄을 빼버렸다. 발칸과 같은 살인마에게 공포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보이는 즉시 사살.

그것이 100여 명에 가까운 사망자들에 대한 애도일 것이다.

콰쾅.

묵직한 폭음과 함께 가녀린 인영 하나가 먼지구름을 뚫고 날아왔다.

“아앗. 누님.”

땅 위에 털퍼덕 떨어진 인영을 본 가물치 들은 대경실색하여 달려갔다. 입가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한영.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가물치 들이 이한영을 감싸고 비명을 경악성을 지르는데, 이번엔 먼지구름이 부옇게 오른 골목 저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크아아아아악.”

소름이 오싹 돋는 처참한 비명.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먼지구름 속을 향한다. 바람과 함께 먼지가 날려가고 그곳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발칸이었다.

그는 어깨 한쪽이 은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를 몹시 괴롭히는 모양이다.

“헤헤.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줬지.”

가물치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는 이한영이 힘없는 미소를 보였다.

“크아아악.”

죽을 것같이 비명을 지르던 발칸. 돌연 갈퀴 같은 손으로 은빝으로 번들거리는 어깨의 생살을 과격하게 뜯어낸다.

투투툭.

근육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음. 사람들은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해야 했다.

찍, 찌익......

마침내 어깨의 살이 절반 가까이 뜯겨지고 푸른 피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발칸은 더 이상 괴성을 지르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은회색의 금속질을 벗겨낸 것이다.

“이년!”

발칸은 독기 어린 눈으로 이한영을 응시했다.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음산한 살기를 뿜으며 발칸이 성큼성큼 다가선다.

“이런 이제 힘이 별로 없는 데 어쩌나.”

이한영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옷도 지저분해지고, 머리 모양도 망가진 낭패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잠깐. 잠깐. 그쪽과 마저 놀고 싶으면 먼저 우리의 허락을 받으시라고, 용의자 씨.”

전 형사가 담배 연기를 피워내며 앞으로 나선다. 발칸의 눈이 찌푸려졌다. 전 형사의 손가락 사이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권총이 보였기 때문이다.

“푸른색 피라. 오늘 색다른 구경을 했어. 그래서 나도 좋은 구경을 시켜주지.”

입에 문 담배를 빙글 돌린 전 형사는 권총을 꺼내들자마자 느닷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쏘는 데 조금의 주저도 찾아볼 수 없다.

탕.

총성이 메아리가 되어 골목길을 떠돈다.

총알이 틀어박힐 때마다 발칸은 몸을 움찔하며 물러섰지만 별다른 타격이 없는 듯 곧 다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미치겠네. 어디서 이런 괴물이 굴러왔을까 몰라. 하여간 너 역시 용의자니까 쓸데없는 절차를 씨불여 줘야겠지?”

전 형사는 총알 한 방에 하나씩, 미란다원칙(Miranda原則)을 중얼거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넌 아가리 닥쳐를 할 수 있고.......”

탕.

“씨팔 놈의 개소시를 씨불이다가 법정에서 좆같이 불리해질 수도 있고.......”

탕.

“돈 펴 발라 산 변호사로 취조실서 연장질 못하게 할 수도 있고.......”

철컥.

“변호사 살 돈 없으면 그냥 얌전히 연장질 당해도 좋고, 인터넷에 맞았다고 지랄 발광 하소연해도 좋고.......”

철컥.

“개소리 씨불이기 싫으면 얌전히 아가리 닥치고 있어도 된다. 이 씨팔놈아.”

철컥철컥.

“젠장할. 어떤 미친놈이 미란다를 만들어서 사람 귀찮게 하는거야.”

실탄을 다 소비한 전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총을 패대기쳤다.

“이런 개자식. 좀 죽어라.”

탕탕탕탕.

조 형사가 화풀이를 하듯 총알을 쏟아 붓는다.

두 형사의 행동이 얼마나 과격했는지 조폭들이 오히려 몸을 움츠릴 지경이었다.

“보기보다 성깔 있는 형사님들이셨네요.”

“그러게.”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병규와 호랭이는 서로를 마주보며 두 형사의 히스테리 표출에 몸을 떨었다.

원래대로라면 벌써부터 나섰어야 했을 둘이지만, 워낙에 주위의 눈이 많아 주저하던 참이다.

“그런데 발칸 말이에요. 뭔가 확실히 달라진 것 같은데요.”

“그래. 젊어진 것 같구나.”

두 손을 내려뜨리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걷는 모습엔 전과는 다른 숨 막힐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젊어지다니. 기력을 너무 쏟아 한꺼번에 늙는 경우는 봤어도 저 녀석처럼 몇 십 년이나 젊어지는 경우는 처음이다.

‘역시 이계의 인간이라 다른 것인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발칸의 변화를 호랭이는 그렇게 납득했다. 하지만 한 가지 꺼려지는 것은 젊어진 것과 동시에 놈의 분위기 또한 상당히 변했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강해진 것인가.

‘게다가 손끝에서 나오고 있는 저 기운!’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길게 뻗어 나와 보이는 그것은 신선인 호랭이마저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 이상 잡생각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발칸이 괴성을 지르며 두 형사를 덮쳐갔던 것이다.

“꽉 잡아요.”

병규는 호랭이에게 말한 뒤 재빨리 몸을 날렸다.

휘이익.

거센 파공음이 귓전을 스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발칸의 앞에 서 있었다.

“넌?”

전 형사를 베어 가던 발칸은 갑자기 나타난 병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눈에 익은 얼굴이다.

‘이 녀석은 분명 산에서 내게 죽었을 텐데.’

아무리 다시 봐도 그때 그 녀석이다. 짜증이 날 정도로 도망을 치던 녀석이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뱃속의 내장을 모두 헤집어 놓았는데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상 다시 죽으면 그만이다. 안 그래도 그때 하얀 털의 몬스터의 방해 때문에 심장을 뜯어먹지 못해 아쉬웠다.

“다시 한 번 죽여주마!”

발칸은 손끝으로 요수의 발톱을 꺼내며 병규를 베어 갔다. 그물처럼 사방에서 조여 오는 푸르스름한 기운. 그러나 병규는 오직 발칸의 가슴만은 노려볼 뿐이었다.

“하나. 두 주먹을 허리에!”

병규의 신형이 돌연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가공할 살기를 뿌리던 요수의 발톱은 허망하게 허공을 베어 버렸다.

“무슨!”

발칸의 경악성이 채 꺼지기도 전이다. 사라졌던 병규의 그림자가 그의 턱 아래에 나타났다.

“헛!”

발칸의 입에서 헛바람소리가 터지고, 병규의 어깨는 거대한 창이 되어 그의 아랫배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다.

쿵.

첫 번째 충격.

속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발칸의 건장한 동체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다. 그러나 병규의 공격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둘. 두 주먹을 가슴에!”

스프링이 압축되듯 낮아졌던 병규의 신형이 경쾌한 리듬을 타며 한 바퀴 휘돈다. 번개같이 휘둘러진 팔꿈치가 명치에 두 번, 송곳처럼 꽂히고!

쿠쿵.

두 번째 충격.

발칸의 입에서 피가 솟구친다.

“셋. 내 주먹은 질풍이다!”

뻥!

호쾌한 파음과 함께 질풍처럼 날아든 병규의 두 주먹이 발칸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쩌걱.

가슴뼈가 박살나는 처절한 소음과 함께 발칸의 몸뚱이가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질풍삼연격(疾風三聯擊)!

아랫배, 명치, 가슴으로 이어지는 질품 같은 타격이다.

질풍삼연격의 폭발적인 타격을 한 몸에 받아낸 발칸은 푸른 핏물을 분수처럼 게워내며 무려 십여 미터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휘이이잉.

찬 바람이 불어온다.

장내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황망한 눈으로 병규를 쳐다볼 뿐이다.

“영기야. 쟤가 우리가 일 주일 내내 조사하던 그 병규란 애 맞냐?”

“글쎄요. 선배님. 생긴 건 분명 그 넘아가 맞는 것 같은데 행동은 영 딴 사람이네요.”

전 형사와 조 형사는 서로를 쳐다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얌전해 보이던 녀석이 휙 하고 나타나 들고뛰고 날뛰고 하더니 ‘빠바바바방’하는 폭음과 함께 발칸이 새처럼 날아 두꺼비처럼 저쪽 구석에 찌그러진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호랭이는 찢어져라 입을 벌린 채 병규를 올려다봤다.

사실 지금 가장 놀라고 있는 것이 바로 호랭이였다. 질풍삼연격은 폭주족과의 다툼 때 병규의 움직임이 하도 한심해서 호랭이가 장난 삼아 한 수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완벽하게 시전하다니. 아니 사실 병규의 질풍삼연격은 호랭이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원래 질풍삼연격은 한 걸음에 한 방씩, 총 세 번의 권을 날리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가르쳐 주지도 않은 변화까지 동원해가며 무려 다섯 발의 공격을 해댔다. 아마도 가벼운 체중과 단련 되지 못한 주먹을 생각해서 팔꿈치 치기를 넣은 것이겠지. 하지만 무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게 문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따로 연습한 것 같지도 않은데 별안간 실전에서 놀라운 재주를 보인 것이다.

호랭이로서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정도로 놀랄 수밖에.

병규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순간이지만 몸을 움직이고 권을 뿌릴 때 깊숙이 몰입되었다. 짜르르 풀리는 긴장과 함께 상쾌한 쾌감이 몰려온다.

주먹에 남아 있는 쩌릿한 느낌도 나쁘지 않다. 뼈가 시큰거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몸이 움직여줘서 다행이다.

“크아아아악.”

분노의 찬 괴성이 하늘을 떨쳐 울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괴성이 들려온 방향을 향한다.

발칸.

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발칸의 상태는 감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배와 명치가 말뚝으로 박은 것처럼 푹 파였으며 오른쪽 가슴은 완전히 함몰되어 버렸다. 그러나 가슴뼈가 절반쯤 주저앉았는데도 놈은 멀쩡하게 살아 움직였다. 아니 멀쩡히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두 눈에 독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성큼성큼 다가서는 것이다.

전신에서 푸른 핏물을 뿜으며 걸어오는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막 기어 올라온 야차를 보는 듯하다.

“이 노옴.”

발칸의 두 눈에서 시퍼런 귀화가 피어오른다.

분통이 터졌다. 저딴 놈에게 한 방을 먹다니. 간신히 회복된 육체를 이렇게 망가뜨리게 되다니.

아니 그보다는 순간이지만 병규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것이 더욱 분통터진다. 스피드는 그의 장기가 아닌가.

전에도 귀찮을 정도로 재빠른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감히 태만히 볼 수 없을 정도다.

대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완전히 달라졌다. 역시 예전에 확실하게 처리했어야 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지.”

발칸은 이를 으드득 갈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에게서 설기설기 뿌려지는 짙은 살기.

“헛.”

사람들은 모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병규는 침착했다.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랭이!”

“준비 다 됐다.”

병규의 어깨에서 펄쩍 뛰어내린 호랭이가 발칸을 향해 나직이 으르렁거린다. 호랭이의 털이 죄다 허공으로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성큼성큼 걸어오던 발칸의 움직임이 멈춰버린다. 땅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실이 솟아나 전신을 옭아매는 것 같다.

“억.”

발칸은 이마에 힘줄이 생길 정도로 힘을 썼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호랭이의 주박술에 걸려든 것이다.

“병규야 지금이다.”

호랭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술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힘든 모양이다.

“알았어요.”

병규는 대답과 함께 앞으로 뛰어나갔다.

발칸이 호랭이의 주박술에 꼼짝 못하는 지금이 기회다.

“크아악.”

돌연 괴성을 토하더니 손끝에서 칼날같이 매서운 기운이 솟구친다. 그것은 스타워즈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광선검처럼 투명한 푸른색 빛다발이었다.

광선검과 다른 점이라면 손가락마다 하나씩, 양손 모두 열 개나 되는 빛다발이 솟구쳐 나왔다는 점 정도.

쩌릿.

병규는 순간 뒷골을 엄습하는 섬뜩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굴렸다.

쫘아악.

날카로운 파공음이 그의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재빨리 일어난 병규는 점퍼의 뒤가 갈기갈기 찢어진 것을 보고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푸른 빛줄기를 쏘아내는 발칸은 두 손을 축 늘어트린 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 가슴의 기복. 놈은 더 이상 움직임에 장애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병규의 다급한 물음에 호랭이의 신음 섞인 대답이 들려온다.

“크윽. 저 녀석. 예전보다 힘이 훨씬 세졌다.”

주박술이 깨지고 만 것이다. 몸을 줄이기 전, 호랭이는 주박술을 위해 약간의 도력을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 양에 문제가 있었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발칸의 힘이 강해질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꿀꺽.

병규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지금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호랭이의 주박술을 믿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것이 깨져버렸다. 그리고 발칸은 두려울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며 그를 압박해오고 있다.

병규는 고민했다.

정면으론 승산이 없다. 도망치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달아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죽기 전의 맹세가 떠올랐던 것이다.

휘릭.

터벅터벅 다가오던 발칸의 그림자가 출렁하더니 어느새 그를 턱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준비는 됐나?”

‘무슨 준비?’

병규는 묻고 싶었다. 발칸의 입술이 진한 살기를 뚝뚝 흘린다.

“처참하게 죽을 준비 말이다!”

말과 함께 아래에서 위로, 현란한 푸른 빛줄기를 쏘아내는 발칸의 손이 갈퀴처럼 쭉 훑어 오른다.

촤아악.

거친 파공음. 경악한 얼굴의 병규는 다섯 조각이 되어 갈라졌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발칸의 표정은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아무런 느낌도 없다. 분명 애송이 녀석을 베었는데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잔상! 이 녀석이.”

발칸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그에게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 호랭이를 손에 든 병규가 미끄러지듯 착지하고 있었다. 그가 벤 것은 고속으로 움직인 병규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물결치듯 일렁이며 사라지는 병규의 그림자를 보고 발칸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움직임. 완전 그의 복사판이 아닌가. 게다가 처음엔 그저 귀찮은 정도에 불과했던 놈의 스피드가 이제는 그의 눈이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이런 죽일 자식!”

마치 놀림을 당한 것처럼 기분이 엉망이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쾅하는 폭음과 함께 발칸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고 병규에게 쏘아졌다.

“꽉 잡아요. 호랭이.”

호랭이를 어깨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병규는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죽인다아!”

괴성과 함께 발칸의 두 손이 날아들었다. 그 손끝에서 손톱처럼 길게 뻗어 나온 푸른 빛줄기가 머리를 절단하려 든다.

“흡!”

짧은 심호흡과 함께 마침내 병규가 움직였다.

“내 주먹은.......”

타타탁

한 번, 두 번, 세 번!

황폐한 대지를 두드리는 천신의 쇠망치처럼 호쾌하게 땅을 두드리는 그의 발걸음.

“질풍이다!”

우렁찬 뇌성을 담은 그의 주머니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빠바바바방.

가슴마저 뻥 뚫리는 듯한 폭발음.

질풍삼연격!

그것이 다시금 터진 것이다.

“크아아아악.”

병규의 질풍에 휩쓸린 발칸은 피보라를 뿜으며 저쪽 구석으로 튕겨져 날아간다.

“쿨럭. 쿨럭.”

놈의 입에서 한 바가지의 핏물이 터져 나온다. 이번엔 꽤나 태격이 컸었던가 보다. 그러나 그 처참한 광경도 질풍의 권을 받고 뭉개진 그의 몸뚱이보다는 덜 비참했다.

가슴, 목, 그리고 얼굴.

질풍 같은 병규의 스친 부위가 마치 찌그러진 철판처럼 움푹 들어가 버렸다. 특히 얼굴 부위의 충격이 컸다. 부서진 턱이 목 아래에서 덜렁거린다.

꿈에 볼까 두려운 처참한 광경.

그러나.......

그런 처참한 몰골이 되었으면서도 발칸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크크크크.

공포영화 속의 괴물을 보는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장면.

사람들은 전율했다.

발칸의 무지막지한 생명력에 그리고 그를 두 번이나 날려버린 병규의 폭발적인 움직임에.

‘이, 이 녀석. 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야?’

호랭이는 속으로 경악성을 질렀다. 단 세 번 펼친 것에 불과한 질풍삼연격. 그런데 이제는 절정을 넘어 완숙미가 풍길 정도다. 이런 엄청난 격투센스를 가진 녀석이 존재하다니.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다.

한편 소원이던 한 방에 보너스까지 날려준 병규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어느새 베어졌는지 그의 점퍼 소매가 잘개 쪼개져 바람에 나풀거린다.

‘저 녀석의 손끝에서 나오는 저 푸른 빛줄기.’

너무 날카롭다. 가볍게 스친 것뿐인데 옷이 이 지경으로 찢어지다니.

‘만약 피부에 당하기라도 한다면.’

아마 파절이처럼 잘게 다져질 테지.

이건 너무 불공평한 대결이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혼신을 다해 공격을 명중시켰는데도 저 녀석은 불사신처럼 일어나는데, 자신은 녀석의 공격에 스쳐도 파절이 신세라니.

불공평하다 못해 억울할 정도다.

“휴.”

병규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딴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허깨비처럼 일어난 발칸이 그를 향해 기분 나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심장이...... 필요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발칸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몸이 너무 망가졌다. 아직은 움직일 만하지만 더 이상은 위험하다.

“벌레 같은 애송이 녀석에게.”

녀석은 너무 변했다. 스피드는 감히 그가 따를 수 없을 정도고, 토닥거리는 반항이 고작이던 녀석의 주먹은 우레처럼 몰아친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잡아도 끝장을 낼 수 있는데, 계속해서 당하기만 하다니.

참을 수 없는 치욕. 분노가 용솟음친다. 그러나 지금은 망가진 몸을 수복하는 것이 먼저다.

굶주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다행이 검은 양복을 입은 녀석들과 긴 머리의 여자, 그리고 총을 쏘아 갈기던 녀석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있다.

‘클클.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애송이를 향해 썩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애송이 녀석이 움찔 어깨를 떤다.

“심장! 심장을 내놔!”

발칸은 괴성을 지르며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목표는 창백한 표정의 이한영이었다.

“엇!”

발칸의 뜻 모를 미소에 긴장하고 있던 병규는 놈이 돌연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자 헛바람을 삼켰다.

“달려라. 병규야!”

호랭이의 급하게 소리친다. 말이 터지자마자 병규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휘이잉.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어느새 병규는 이한영의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발칸보다 늦게 출발했는데도 도착은 그가 훨씬 빠르다.

“이놈!”

발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이런 징그러운 자식.

“함께 죽어라.”

발칸은 요수의 발톱을 무려 한 자나 뽑아내어 병규와 이한영을 향해 휘둘렀다.

‘피해봐라. 네가 피하면 뒤의 여자가 죽는다. 알량한 동정심으로 뛰어들었겠지만 네놈 역시 살아남으려면 몸을 피할 수밖에 없을 테지.’

발칸의 입술이 추악한 미소를 그린다.

그러나 그가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병규는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죽음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저 혼자 살겠다고 가녀린 여자를 죽음 앞에 내몰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간격이 부족해.’

질풍삼연격을 펼치기엔 발칸과의 간격이 너무 적다. 질풍삼연격외엔 별 다른 공격법을 모르는 병규에겐 이것은 매우 난감한 상태였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도 없다. 발칸의 공격은 이미 코앞까지 밀려들었다.

병규는 화들짝 놀라며 엉성한 자세로 주먹을 날렸다. 워낙에 엉성한 동작이라 별 다른 위력도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때린 부위가 하필이면 뭉개진 턱이었다.

“쿠엑.”

발칸은 피를 뿜어내며 쿵쿵 뒷걸음질쳤다.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것은 병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엑.”

병규는 고개를 길게 빼며 토악질을 했다. 어쩌다 보니 발칸이 토해낸 피가 입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남의 입에서 튀어나온 피를 삼키게 되다니. 생각만으로도 속이 매슥거린다. 그러나 그런 메스꺼움은 식도와 위장이 타들어 가는듯한 통증에 곧 잊혀져 버렸다.

뜨겁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뱃속이 지글지글 끓는다.

그리고 이상하게 손끝이 가려워 온다. 발칸의 피를 먹은 부작용일까? 설마 이 녀석의 피는 독?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약수터에서 발칸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는 놈의 피를 마셨었고, 한동안 고통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병규야. 왜 그러냐?”

그의 상태가 이상함을 느낀 호랭이가 걱정스럽게 물어온다. 그러나 병규는 으으 하는 신음성만 낼 뿐이었다.

가렵던 손끝이 이젠 뜨거뤄 미칠 것 같다. 얼마나 괴로운지 손가락 끝을 깨물어 뜯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저 괴물 같은 자식은 왜 또 달려드는 것일까.

“크아악.”

악취 풍기는 그 괴성. 이젠 지겹다.

“지겨워.”

병규의 입술이 열리며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지겹단 말이다!”

병규는 뇌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짜증을 두 손에 담아 발칸을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뜨거워 미칠 것 같던 손가락 끝에서 뼈가 시릴 듯한 냉기가 뻗어 나갔다.

촤아아악!

한순간 허공이 무수한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잘게 쪼개진 채 무너지는 대기의 파편 속에서 귓가를 자극하는 서늘한 절삭음이 들려온다.

서걱!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 생소한 감각!

병규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찢어질 듯 부릅떠진 발칸의 두 눈이 보였다.

섬뜩한 살기를 뽐내던 녀석의 눈동자에 지금 깃들어 있는 것은 고통, 그리고 죽음?

그제야 병규는 볼 수 있었다. 발칸의 허리에 몇 개의 푸른 선이 그물 모양으로 그어져 있음을. 그 푸른 선은 처음엔 보일까 말까한 가느다란 선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굵어지더니 잠시 후엔 푸른 핏물을 울컥울컥 토해 냈다.

발칸의 눈가에 거센 경련이 일어나더니 눈동자가 점점 회색빛으로 탁하게 물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털퍼덕.

상체가 기우뚱하더니 내장을 후두둑 떨어트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상체가 땅바닥에 털퍼덕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피를 분수처럼 쏘아올리고 있던 발칸의 하반신이 앞으로 엎어졌다.

“.......”

병규는 발칸의 상체와 하체가 양단되는 충격적인 장면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문득 그는 손끝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감각을 기억해냈다.

정신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를 향한다. 흐릿한 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의 손가락 끝.

푸르스름한 빛이 한 자나 뻗어 나와 있었다.

그것은.......

발칸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던 요수의 발톱이었다.

병규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너. 어떻게 된 거냐?”

호랭이가 놀란 음성으로 묻는다. 병규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이 먼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왜 발칸의 능력이 자신에게 그대로 복제되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설마 피?’

그러고 보니 그의 몸이 갑자기 빨라진 것도 발칸의 피를 삼킨 후의 일이다. 독이라 생각한 발칸의 피가 사실은 특수한 능력을 발현시켜주는 효능이 있었던 것일까. 혹시 이대로 영영 이 광선검처럼 생긴 걸 열손가락 끝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내려보니 다행스럽게도 요수의 발톱은 사라지고 없었다.

“휴.”

별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호랭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병규를 올려다봤다. 비상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라는 것은 처음 볼 때부터 알았다. 보통사람이 그렇게 빨리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호랭이가 알고 있는 여타의 능력자들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대체 어떤 능력자인 거지?’

호랭이는 어려운 문제를 만난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한편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발칸이 죽었다.

그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경찰력이 총동원되고도 못 잡은 살인마를 어린 고등학생이 잡았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발칸을 처치한 그 수법은 놀랍게도 살인마인 발칸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기술이었다.

‘대체 저 아이는 뭐란 말인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발칸이 죽었음에도 주변의 공기는 차갑게 냉각된 채 쭉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용기 있게 병규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 전엔 대단하던걸?”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멍하게 병규의 어깨를 이한영이 툭하고 쳤다. 그제야 병규는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병규는 다시 한 번 딱딱하게 굳어야 했다. 그녀의 등 뒤로 병풍처럼 쭉 늘어선 조폭들의 면상이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이. 너희들 때문에 귀여운 동생이 긴장하잖아. 저쪽으로 가 있어.”

이한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턱짓을 하자 조폭들은 궁시렁궁시렁 투정을 부리며 물러난다.

“내 이름은 이한영이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빨간 입술 속에 감춰진 가지런한 치아가 맛깔스런 미소와 더불어 환한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

“병규, 태병규라고 합니다.”

손바닥을 청바지에 쓱쓱 문댄 병규는 황송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단단하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손은 예상과 달리 촉촉하고 따뜻했다.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데?”

“고등학교 2년입니다.”

“에에, 18? 그럼 나랑 2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

그녀가 놀란 듯 소리쳤다. 놀라기는 병규도 마찬가지였다. 2살 많다면 그녀는 스물이란 소리가 된다. 조직을 이끌기엔 지나치게 젊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가 아닌가. 거친 사내들의 무시 속에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 것인가는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너보다 개미 눈곱만큼 나이가 많으니 누님이라고 불러라.”

나이차가 조금밖에 안 난다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그녀의 말에 병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누님”

“병규야. 이 여아에게 능력이 뭐냐고 물어봐라.”

호랭이가 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능력자!’

병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에 호랭이가 자신을 보고 능력자라고 부른 적이 있다. 어쩌면 자신의 이상한 능력이 능력자라는 호칭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 그런데 실례가 안 되면 누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어? 내가 능력자인 걸 어떻게 알았어?”

이한영이 놀란 듯이 묻는다. 이번에도 호랭이가 대답할 말을 대신해 주었다.

“발칸의 어깨가 은색으로 변한 걸 봤다고 그래.”

“발칸의 어깨가 은색으로 변한 걸 봤거든요.”

이한영은 입술을 곱게 모았다.

“호오. 생각보다 관찰력이 좋은걸? 좋아.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말해 줄게. 내 수호신은 불가사리.(원래 이름은 불가살이. 조선조에 등장했다고 하는 괴물로 쇠를 먹고 자란단고 한다.) 쇠를 흡수하거나 발출할 수가 있어.”

“쇠를 흡수하는 능력요?”

“그래.”

이한영은 곧바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발그스레한 그녀의 손바닥은 별달리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을 집중하자 손바닥에서 수은같이 생긴 액체금속이 땀처럼 송알송알 배어 나왔다.

“아까 녀석의 어깨는 이걸로 한 대 쳐준 거야. 그때 방심하지만 않았으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문득 병규는 의문이 생겼다.

“갑자기 또 한 가지가 궁금해졌어요.”

“뭐가?”

“그렇게 흡수된 쇠는 어떻게 되는 거죠? 저, 혹시 볼일 보실 때 나오는 건가요?”

이한영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런 건 숙녀에게 묻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의 머리를 콩하고 쥐어박으며 매몰차게 말했다.

“아고야.”

병규는 두 손으로 맞은 곳을 비비며 고통을 호소했다. 살짝 내려친 것 같은데 마치 해머의 모서리로 찍힌 것처럼 아프다. 이한영이 그의 등을 두들기며 맑게 웃었다.

“사내자식이 엄살은. 그런데 넌 수호신이 뭐냐?”

“아이고. 정말로 아프단 말입니다.”

병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신의 행동이 단순히 꾀병으로 보였다는 게 억울했다. 정말로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호신이라니요?”

“몰라?”

병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이한영의 한쪽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모른다는 병규의 대답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 눈치다.

“네 힘의 근원 말이야. 보통은 꿈에 보인다거나. 환상으로 보게 되는 거. 능력자들은 백이면 백, 모두 꿈이나 환상을 통해 수호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고 들었는데?”

병규는 뺨을 긁적이며 가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어떤 존재와 만난 기억은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호랭이 정도. 하지만 그의 능력은 호랭이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짜식. 가르쳐 주기 싫은 모양이구나.”

병규의 등을 소리 나게 팡팡 두드려 준 이한영이 씩 하고 진하게 웃는다. 의뭉스런 병규의 태도에 기분 상했을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예의 씩씩한 미소를 보였다.

“자. 명함이다.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해라. 그냥 놀러 와도 상관없고. 내 술을 무제한으로 사주마.”

명함 한 장을 넘겨준 그녀는 갑자기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네 능력이 발칸하고 비슷하다고 핵도 너무 걱정 마. 무력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성자의 성검(聖劍)도 악마의 혈도(血刀)도 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내 가슴 만진 거. 어떻게 책임질 거냐?”

움찔.

병규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후후후.”

병규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한 그녀는 손을 흔들며 동료들에게로 걸어갔다.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병규는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보고는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성격은 터프한 누님이 명함은 참 귀엽네.”

그녀의 명함엔 ‘무엇이든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노골적인 문구와 함께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웅위한 필채로 새겨져 있었다. 병규를 웃게 만든 것은 명함의 바탕그림이었다. 험악하고 경직된 분위기의 광고문구와 달리 명함의 배경은 꽃과 SD캐릭터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명함만 가만 들여다보면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정의의 소녀 탐정단 분위기가 물씬 풍겨질 정도였다.

“언제 술 한 번 얻어먹으러 가야겠군.”

병규는 명함을 들여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차가운 손이 그의 어깨를 툭 짚었다.

“너 정체가 뭐야?”

“헉.”

헛바람을 삼킨 병규.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보니 전 형사와 조 형사가 음울한 표정으로 서 있다. 병규는 가슴을 쓸어내리면 반문했다.

“저, 정체요?”

병규는 찔끔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사실 그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두 형사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녀석. 너 아까 전에 엄청 멋있었다고. 아냐? 난 딴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음음. 그런데 손가락 끝에서 나오던 그건 뭐냐? 발칸하고 똑같은 거던데. 설마 무슨 특별한 무공을 연마한 거냐?”

이들은 능력자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듯 자신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다.

“아하하.”

병규는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두 형사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경찰이 도착하는 모양이다.

병규가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전 형사가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점잖게 말했다.

“또 경찰서 들락거리는 건 싫지? 어서 가봐.”

“네? 그래도 돼요?”

“짜식. 괜찮으니까 가 봐도 돼. 뭐, 발칸을 처치한 영웅이 되어서 득달같은 기자양반들과 다시 친해지고 싶다면 남아있어도 되고.”

“절대 사양입니다.”

병규는 두 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폭주족 사건으로 기자라면 학을 떼게 된 그다.

“그럼.”

병규는 두 형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주고는 병규가 후다닥 달려가는데, 호랭이가 그의 어깨에서 펄쩍 뛰어내린다.

“어? 왜요?”

“잠깐만.”

후다닥 뛰어간 호랭이는 작은 상자 하나를 물고 왔다. 뭐냐고 물으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병규가 가만 보니 그저 녹이 잔뜩 슨 조그마한 무쇠상자에 불과했다. 위아래로 나누어진 이음새로 보니 작은 물건들을 집어넣는 보석함인 모양이다.

“이런 고물 상자를 어디다 쓸려고 챙겨온 거예요?”

바람처럼 달리며 병규가 묻자 호랭이는 자랑스럽게 히죽 웃는다.

“비싸 보이지 않냐? 분명 보석같은 게 들어 있을 게야.”

“하하.”

병규는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이 놈의 털복숭이 연초마니아는 신선 같지가 않다.

‘뭐 아무렴 어때.’

병규는 더욱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피를 묻힌 찝찝한 기억을 날려버리려는 것처럼.

“야. 이놈아. 날려가겠다. 좀 살살 좀 달려.”

호랭이가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후, 현장에 경찰과 중화기로 중무장한 특수부대원들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일은 기껏해야 뒷수습에 불과했다.

발칸이 죽었다.

경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한 달 이상 계속된 야근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물론 씁쓸한 소식도 있었다. 이번에도 10여 명의 희생자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발칸을 잡았다는 기쁨에 경관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은 편이었다.

마침 현장에 형사 두 명이 있었던 관계로 정황조사도 손쉽게 끝날 수 있었다. 전 형사는 발칸을 잡은 영웅에 대해 ‘아는 바 없음’이라고 대답했다. 발칸을 발견하고 추적하던 중 비명소리가 들려 쫓아와 봤더니 발칸이 상체와 하체로 양단된 채 쓰러져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이한영과 그녀의 부하들은 그의 증언에 확고한 증인이 되었다. 몰론 그들 역시 병규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벌떼처럼 현장에 나타난 기자들은 발칸을 처리한 영웅에 대해 저마다의 견해도 기사를 썼다. 어느 신문엔 피해자 가족의 복수극이라는 기사가 실렸고, 다른 기사엔 현장에 있던 조폭들이 의심스럽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내용이 어떻든 간에 사건은 그렇게 종결될 수 있었다.

한편 그 즈음, 경애라는 구두닦이 소녀는 사건현장을 헤매고 있었다. 이미 밤이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두만 보이면 신나게 쫓아가서 야간 출혈 대 서비스 중이니 구두 한 번만 닦으시라고 홍보하곤 했다. 그러나 밤중에 누가 구두를 닦겠는가. 게다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장인데. 당연히 그녀는 번번이 거절당해야 했고, 그때마다 소녀는 시무룩한 표정이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새로운 목표를 찾아내고는 신이 나서 달려간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그녀는 아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하하.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 놔도 살아남을 것 같은 아인걸?”

전 형사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자 조 형사가 맞장구를 친다.

“사막부족을 상대로 모래 장사를 할지도 모릅니다.”

“하하, 그렇군.”

그녀를 보자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둘은 곧이어 들려온 소식에 얼굴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부검을 위해 운반 중이던 발칸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불길한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고층 빌딩 옥상.

이한영의 사무실에 나타났던 오로치라는 사내가 큰 가방을 든 채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좋았어.”

한참 동안 꼼꼼하게 주위를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흐흐흐. 생각지도 못한 수익이군.”

큰 가방을 쳐다보며 오로치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웃음을 흘렸다. 녹색진물이 흥건히 묻어 있는 가방엔 경찰들이 백방으로 수색하고 있는 발칸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이한영의 뒤를 몰래 추적하던 그는 우연찮게 발칸이 병규에게 당하는 모습과 발칸의 시신이 경찰들에 수송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의외로 시신의 수송이 허술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능력인 최면술을 사용하며 시신을 탈취하여 이곳으로 도주한 것이다.

발칸.

최근 한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살인마. 그 역시 발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발칸은 한국에 상륙하기 전 일본을 먼저 경악하게 만든 살인귀였다.

일본의 능력자들이 그렇게 애써도 잡지 못한 녀석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행운이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발칸이 죽건, 아니면 죽지 않고 계속 살인을 하고 돌아다니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은 남의 나라 일에 불과하니까. 그런 그가 발칸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발칸이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생명체라는 것 때문이다.

푸른색의 피. 경이로운 생명력. 그리고 다채로운 능력들.

세상 어디를 뒤져봐도 이런 인간은 없다.

비록 시신이 불과하지만 최근 막바지에 이른 갓파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지저분하게 생겼군.”

가방을 열고 발칸의 시신을 확인한 오로치는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시체의 부패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이대로라면 아지트까지 가기도 전에 다 썩어 버릴지도 모른다. 오로치는 핸드폰으로 수송할 차량과 인력을 호출하고는 가방의 지퍼를 다시 닫았다.

그때 막 지퍼를 잠근 가방에서 기이한 소음이 들렸다.

쩍!

“뭐야?”

불길한 생각이 든 오로치는 서둘러 가방을 열러 보았다. 발칸의 가슴이 세로로 쭉 갈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오로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중한 연구재료가 못쓰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그러나 순간 번쩍이는 호기심은 숨길 수 없었다. 과연 이놈의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인간과 비슷한 구조일까? 아니면 전혀 다를까.

그는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벌어진 가슴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때였다.

휘릭.

돌연 찢어진 가슴 안에서 채찍 같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으헛.”

오로치는 대경실색하며 물러났지만 촉수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전선처럼 쭉 뻗은 촉수다발이 목을 칭칭 감는다.

“크륵.”

오로치의 입에서 거품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목을 조여 오는 촉수들. 오로치는 손을 버둥거리며 촉수를 뜯어내려 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숨통을 조여 온다.

“커컥.”

오로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혈관이 툭툭 불거진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최면술이 주특기인 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목을 휘감은 촉수들을 뜯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전혀 새로운 소음이 그의 신경을 자극해 왔다.

찌극. 츠르륵. 찌익 찍.

끈적끈적한 소리와 함께 갈라진 발칸의 가슴에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스르로 밀려나온다.

“컥컥컥.”

오로치의 눈알이 툭 불거졌다.

그것은. 발칸의 벌어진 가슴 사이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그것은 다른 아닌 심장이었다.

촤라라락.

목을 조여 오는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오로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야 했다. 그의 입이 쩍 벌려진 순간, 촉수에 딸려나온 발칸의 심장이 그의 목구멍으로 콱 틀어박혔다.

“끅.”

오로치의 눈알이 하얗게 돌아간다.

츠르르르

그의 목을 죄던 촉수들이 술술 풀려나더니 목구멍으로 넘어간 심장을 따라 거대한 문어처럼 오로치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촉수가 모두 입 속으로 사라지자 오로치는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감전된 것처럼 극심한 경련. 그러한 경련은 얼마 후 거짓말처럼 뚝 멈춰졌다. 그리도 잠시 후 갑자기 번쩍 떠지는 오로치의 눈. 어찌된 일인지 그의 눈동자는 시퍼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크크크크.”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의 입가에 조용히 새어나온다.

“멍청한 녀석. 덕분에 살았다.”

오로치를 잠식한 발칸은 특유의 괴소를 흘렸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중간에 이 멍청한 녀석이 시신을 훔쳐내지 않았다면 검시관의 낯짝도 못보고 완전히 부패해 버렸겠지.

몸을 옮기는 것은 지독하게 위험한 모험이어서 완벽한 키메라인 자신으로도 성공확률이 10퍼센트에도 안 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야말로 하루 빨리 힘을 길러 이드라센을 구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닌가.

“놈!”

흡족한 미소를 뿌리던 발칸의 두 눈에서 돌연 스산한 살기가 뻗친다.

병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다음번엔 내가 네놈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주마.”

발칸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두 사람이 그곳에 나타났다. 오로치의 연락을 받고 발칸의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발칸은 오로치의 뇌를 뒤져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아냈다.

“아마키리와 쓰치노코?”

사내들은 갑자기 총사가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네. 총사님. 하명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발칸은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완벽해.’

이제부터 당분간 오로치로 있으면서 힘을 모으면 된다.

“아지트로 가자.”

“네.”

코가 땅에 닿을 듯이 절을 한 두 사내는 썩는 냄새로 진동하는 가방을 집으려 했다.

“그것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어서 빨리 안내나 해.”

“...... 네.”

두 사람은 오늘따라 총사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게 될 물건 때문에 자신들을 호출하다니. 완벽주의자인 그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별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미키리와 쓰치노코를 앞세우고 비밀 아지트로 들어선 발칸은 그곳의 최상층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풍기는 한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수사노오. 신풍의 주군이자 폭풍의 군주라 불리는 절대의 능력자.’

그는 신풍에서 오로치가 유일하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남자였다. 발칸은 그에게 오페투지하며 공손하게 말을 올렸다.

“주군. 다녀왔습니다.”

“.......”

수사노오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발칸은 오로치의 뇌를 탐색해봤지만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가끔 그가 이런 식으로 침묵을 즐긴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분이다.

“일어나라.”

한참 만에 수사노오의 말이 떨어졌다.

‘헉’

발칸은 경악했다. 말과 함께 수사노오에게서 상상도 못할 압력이 밀려나왔기 때문이다.

발칸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갔던 일은 어떻게 됐는가?”

“송구스럽게도 그녀는 저희의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흐음. 안타까운 일이군. 하지만 사람은 많으니 심려할 바는 아니다. 피곤한 듯 보이니 돌아가 쉬거라.”

“네.”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인 발칸은 뒷걸음으로 수사노오의 면전을 벗어났다.

“휴.”

밀실을 빠져나온 그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정말이지 평생 흘릴 땀을 한순간에 쏟아낸 것 같다.

‘인간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다니.’

수사노오를 생각하면 절로 몸이 떨려온다. 이드라센을 침범한 마족들 중에도 그 정도의 존재감을 보이는 놈은 드물었다.

‘낯설군.’

쉬려고 찾은 오로치의 침실이지만 남의 방이라 그런지 발칸은 통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옷이 답답하다.

이계에 온 이후로 항상 치부만 가린 간편한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제와 생소한 문명에 녹아들려니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옷의 단추를 풀던 그는 문득 차원을 통로로 넘을 때 우연히 챙긴 작은 상자가 없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깝군.”

발칸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무슨 수를 써도 열 수 없는 물건이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일 년이 넘게 들고 다니던 것이라 갑자기 없어지니 허전하다.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그렇게 꽁꽁 봉해져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쓸데없는 잡념이군. 차라리 이 시간에 이 몸의 기억이나 더듬겠군. 혹 쓸 만한 것이 있을지.”

가만 내버려두어도 어차피 영혼이 육체에 동화되며 자연스럽게 기억들이 전이되겠지만 이 방식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발칸은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혼란스럽게 스며드는 오로치의 기억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을 쯤. 돌연 발칸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기억을 찾아낸 것이다. 뛰듯이 방을 나선 발칸은 몇 개의 어두운 통로를 지나 커다란 창고를 찾아내었다. 그곳에서 그는 동질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하하하. 놀랍군. 이곳의 인간들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었는가?”

발칸은 대소를 터트렸다. 어둠 속에 반짝이는 존재들을 보니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크흐흐. 영악한 놈. 타국의 국민을 상대로 이 녀석들의 위력을 실험해 볼 생각이었군.”

일본인인 오로치가 왜 한국에 기반을 닦으려 노력할까를 살피다가 찾아내게 된 것이 바로 이 녀석들이다. 놀랍게도 녀석은 자신과 관계된 사람이 아니라면 떼로 몰살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냉혈한이었다.

“좋아. 네 녀석의 실험. 내가 대신 해 주지. 크흐흐흐.”

음침한 미소를 흘리던 발칸은 문득 한 남자를 떠올리고는 차가운 미소에 한 줄기 살기를 띠었다.

“그래, 그 녀석에게도 선물을 보내줘야겠어. 깜짝 놀랄 마한 선물을 말이야. 크흐흐흐.”

까드드드드드드.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살기에 반응하며 낮게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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