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02)

주먹 한 방에 대기권 밖을 영원히 떠돌아?

깊은 밤의 정적이 세상을 차갑게 뒤덮은 시각.

휘어진 고목 위에 걸터앉은 채, 네온사인으로 환하게 빛나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 사람은 행인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날씨에도 찢어진 천으로 간신히 치부만을 가리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괜히 추위를 느낄 정도다.

게다가 그는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에 피부마저 축 늘어진 노인. 자연 측은한 마음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축 늘어진 피부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벗겨진 머리 역시 대머리와는 무관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름진 피부 아래의 근육은 젊은 생기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괴인.

발칸.

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심장 약탈자.

대대적인 군경의 수색을 비웃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자행하던 그. 그러나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피로가 엿보인다. 몸 이곳저곳에 붉은 혈흔마저 비친다.

으드득.

이 가는 소리.

발칸은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댄 채 이를 으드득 갈아댔다. 그는 지금 어제 오후에 마주쳤던 강력한 몬스터를 떠올리고 있었다. 잡스런 색이 섞이지 않은 하얀 털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검은 줄무늬. 발칸에게 좌절을 맛보게 한 것은 집채만한 백호였다.

“그 놈.”

발칸의 눈자위 심하게 실룩인다.

“이계의 몬스터 중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니.”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놈이 배에 구멍 난 애송이에게 정신을 팔지만 않았어도 그는 도망은커녕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직 부족하다.”

발칸의 두 눈으로 스산한 한기가 비친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을 해치우며 힘을 모았다. 그러나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이계의 몬스터에게 당할 정도라면 마계의 사악한 군주에겐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하리라.

그는 울부짖었다.

“힘이 필요해. 더 큰 힘이. 더 큰 에너지가.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단 말이다.”

발칸은 갈증을 느꼈다.

사악한 마계의 마인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월등한 힘이 필요하다. 그에 필요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선 인간의 심장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타락한 도시여. 너의 추악한 욕망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밤을 환하게 불태우는가.”

현란한 네온사인들.

그가 살던 세상, 이드라센에 비하면 이곳의 도시는 너무도 추악하다. 아름답게 밝혀진 밤의 거리만큼이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타락한 세상.

그래서 그는 도시의 야경을 싫어한다.

환하게 밝혀진 도시의 모습은 화염으로 불타오르던 마을과 왕국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였다.

바아아앙. 바라바라방~

요란한 소음과 함께 30여 대의 바이크가 도로를 질주했다. 그 오만 방자한 소란이 추억을 되새기는 그의 심기를 건들었다.

크르르르르.

발칸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목 울림이 새어나온다.

“사냥의 시간이 왔노라.”

발칸은 줄을 지어 달리는 바이크의 뒤를 느긋하게 쫓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병규는 이불도 깔지 않은 채 정신없이 골아떨어졌다. 너무 피곤했다. 희대의 살인마와 조우하고 거기에 죽음까지 경험했으니, 몸은 몰라도 정신은 어지간히 피곤했을 것이다.

그렇게 잠이 든 병규는 다음 날 오후 늦은 시간에야 깨어났다. 하루 온 종일 잠만 잔 것이다.

“아주 시체처럼 자더구나. 난 기껏 힘들게 살려놓은 녀석이 다시 황천으로 간 줄 알았다.”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며 호랭이가 구시렁거린다.

“윽. 담배 냄새.”

코를 쥐고 일어난 병규는 창문부터 열어젖혔다. 방 안에 꽉 찬 고약한 냄새에 머리까지 욱신거릴 정도다.

“엥? 넌 담배 안 피우냐. 그런 놈이 왜 담배를 가지고 다녀?”

호랭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병규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엉뚱한 녀석. 하여간 일어났으면 준비 좀 해라. 어젯밤에도 사람이 몇 죽은 모양이더라.”

발칸에 대한 얘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장롱 서랍에서 큰 여행가방을 꺼냈다.

세면도구와 두터운 옷들을 가방 속에 챙기는데 호랭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뭐 하는 거냐?”

“발칸을 잡으러 간다면서요?”

병규의 태연한 대답에 호랭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피난 가는 줄 알겠다. 아서라. 놈이 해외로 도피한 것도 아닌데 굳이 짐까지 쌀 필요가 있겠냐?”

“네?”

병규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자 호랭이는 자신의 코를 톡톡 건드려 보였다.

“녀석이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고약한 악취가 솔솔 풍기거든.”

“발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요? 그러면 굳이 제가 없어도 호랭이가 잡을 수 있잖아요?”

병규가 따져 묻자 호랭이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녀석아. 그 괘씸한 놈이 좀 빨라야 말이지. 이 작은 몸으론 일 년 내내 뛰어다녀도 녀석의 코빼기도 못 볼 것 아니냐.”

병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지의 아장거리는 걸음으로는 일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뛰어도 못 잡을 테지.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든 병규는 쪼그리고 앉은 호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지엄하신 호랭이님의 자존심을 건드린 꼴이 되고 말았다.

“너 이놈. 지금 뭐하는 짓이야?”

“헛!”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병규는 경악했다.

‘이런 젠장. 또 겉모습에 속아서 그만.’

모든 것은 조그맣게 변한 호랭이가 너무 귀엽게 생겼다는 데 있었다. 아기 호랑이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당장 가서 안아주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부라린답시고 치켜뜬 눈은 또 왜 이렇게 큰지. 쿡 하고 찔러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우선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저...... 그게. 호랭이 등에 보푸라기가 묻어서 턴 거에요.”

“정말?”

호랭이가 의심스런 눈빛을 던진다. 찔끔한 병규지만 침을 삼키며 시치미를 뗀다.

“네.”

“흐음. 믿어주지.”

순진하게도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호랭이는 날렵한 동작으로 병규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오늘밤에도 사람이 죽어나갈 거다. 우리가 발칸을 빨리 찾을수록 희생자가 줄어든다.”

“좋아요. 가죠.”

병규는 활기차게 외쳤다.

기왕이면 즐겁게. 그가 이도재와 이상철에게 모진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긍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신난 것 같은데? 자신이라도 있는 거냐?”

호랭이가 묻자 병규는 코밑을 훑으며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녀석을 잡으면 턱이라도 한 대 날려주고 싶어요.”

이미 한 번 죽은 몸, 더 이상 소심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병규는 호랭이를 어깨에 얹은 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채 현관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는 굳어버려야 했다.

30여 대의 오토바이와 50여 명의 인원이 문 밖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죽점퍼에 그려진 붉은 태양.

‘레드서클.’

병규는 크게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레드서클은 한마디로 이 지역의 유명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몇몇 애들이 장난 삼아 만든 엉성한 조직이 아니야, 2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유명한 폭력조직이다.

보통 불량 조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레드서클은 젊은이들 중심의 폭주족 모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구성원의 대부분이 10대에서 20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폭주족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들의 위세는 근방의 여느 폭력조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특히 배신자와 조직에 반항하는 자에 대한 잔인한 징벌이 유명했는데, 그 때문인지 레드서클이 이 고장에 생긴 이후로 다른 조직들은 지리멸렬돼 자취를 감췄다.

레드서클에 비하면 일진 같은 것은 얼라들 소꿉장난 정도에 불과했다.

‘뭐야, 어쩌자는 거야? 왜?’

병규는 곧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도재와 이상철.

두 녀석이 겁에 질린 채 거대한 오토바이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육중한 오토바이 위. 살집이 넉넉한 20대 중반의 붉은 머리 사내가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네가 병규란 애냐?”

레드서클의 리더, 불곰이 냉막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잠시 주저하던 병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불곰의 입에서 어이없는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런 바보 같은 자식들.”

불곰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도재와 이상철을 면상을 거칠게 걷어찼다.

“어디서 쥐어터지고 왔나 싶었더니 저런 비실이였냐?”

바이크에서 방망이를 꺼내든 불곰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두 녀석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보고 있는 사람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잔인하다.

“별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군.”

퉤 하고 가래침을 뱉는 백곰. 그 모습을 키득거리며 바라보는 레드서클의 나머지 녀석들.

병규는 이도재와 이상철이 한심하다 못해 불쌍해 보였다.

저런 일을 당하며 굳이 조직이란 곳에 들어가고 싶었을까? 저것이 저들이 말하는 의리란 말인가.

“누가 이 자식들 좀 끌어내.”

불곰이 거만하게 외치자 두 녀석이 나와서 질펀하게 뻗어버린 이도재와 이상철을 끌어낸다.

“우리 애들이 신세 좀 진 것 같은데, 잠시 면담 좀 해야겠다. 너.”

불곰이 거만한 목소리로 위협하자 50명 가까이 되는 녀석들의 시선이 일제히 병규의 얼굴로 꽂힌다.

“허이그. 시끄러운 녀석들일세.”

병규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던 호랭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이 상황도 호랭이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있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얼굴엔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이상한 것은 병규도 별 다른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고요한 호수처럼 마음이 차분하다.

“이런 녀석들과 놀아주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 일단 여길 빠져 나간 뒤에 발칸이나 잡으러 가자.”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레드서클을 무시하다니. 죽다가 다시 살아난 뒤론 간이 상당히 부어버린 모양이다.

병규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다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 새끼가.”

“튄다. 잡아!”

거친 욕설과 함께 녀석들이 범람하는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재빨리 현관문을 잠근 병규는 뒷문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역시나 이쪽에도 지키는 녀석들이 있었다.

모두 세 놈.

불량스럽게 담배를 태우고 있던 녀석들은 병규가 뛰어나오자 오히려 쌍수를 들며 반긴다.

“어이구. 귀여운 아가. 잘 왔다.”

“콩알만한 녀석이 형님들과 놀고 싶었나 보지?”

키득거리며 다가서는 녀석들.

병규가 주춤하는데 등 뒤에서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와 욕설이 함께 들린다. 현관문이 박살난 것이다. 여기서 멍청하게 서 있다간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될 판이다.

병규는 즉각 뒷문을 향해 치달렸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세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과 발을 날려온다.

“얌전하게 맞고 끝내자.”

확실히 전문적인 싸움꾼이 아니라서 그런지 동작이 크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병규는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린 화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확실히 발칸을 만난 후부터 무언가 변해버렸다.

무엇 때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는 레드서클 녀석들의 움직임이 병규에겐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보인다는 것이었고, 반대로 그의 몸은 눈이 못 좇을 정도로 빠르다는 점이다.

부웅 하고 날아오는 주먹에 난 잔털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고개를 슬쩍 틀어 안면으로 날아든 주먹을 피한 병규는 슬쩍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그저 상대를 가볍게 밀쳐내기 위한 행동. 그러나 병규는 아직 자신의 몸이 얼마나 빠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딛는다고 앞으로 걸어간 것이 그만 힘이 너무 들어갔다. 휘릭 하는 바람소리가 나더니 그의 몸은 어느새 쏘아진 포탄처럼 앞으로 튕겨나간 것이다.

쩌걱.

“꾸엑.”

엉성한 주먹을 날린 닭 벼슬처럼 머리를 세운 녀석은 엉겁결에 병규의 몸통박치기(?)를 당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엇?”

거들먹거리며 병규에게 다가서던 녀석들이 일제히 굳어버린다. 굳어버리긴 병규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슬쩍 밀면서 밖으로 나갈 공간이나 확보할 생각이었는데, 생각 외로 문제가 커져버린 것이다. 닭 벼슬 머리는 입에서 제거품을 부글부글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레드서클과는 곱게 끝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런 쌍놈의 자식이.”

현관문을 박살내고 온 녀석들이 어느새 등 뒤에까지 접근해왔다. 부웅 하고 거친 파공성이 울린다. 무식한 녀석들이 대뜸 야구 방망이를 휘두른 것이다.

뒤통수를 쩌릿하게 만드는 살기에 크게 당황한 병규는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촤아아악!

뒷문을 지키고 서 있던 녀석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애송이 녀석이 갑자기 무식한 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우엑.”

“왁!”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병규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뻐엉 하는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녀석은 폭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다.

“꾸에에에엑.”

이번엔 63빌딩에서 번지 점프하는 멧돼지 우는 소리가 터졌다.

“아그그그.”

병규는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다.

자신이 무슨 뿔난 황소도 아니고, 머리로 두 사람이나 받아버렸으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에고. 이 녀석아. 좀 살살 뛰어다녀라.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날아다니냐?”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호랭이가 쉿소리를 낸다. 호랭이의 복실한 털은 엉망으로 엉켜버렸다.

“그게 어쩌다 보니.”

병규는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그렇게 뛰고 싶어서 뛴 게 아니지 않은가. 그저 슬쩍 뛴다고 생각한 것이 그렇게 번개같이 움직인 것이다.

한편 병규를 향해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던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뭐가 저따위로 빨라?”

순간적으로 병규가 보인 움직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빨랐다.

뭐가 휙 하더니 건너편의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영영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처럼 날아가 버린다.

당연히 몸이 굳을 수밖에.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불곰의 호통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왜 멍청히 서 있는 거야. 빨리 놈을 잡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녀석들은 고함을 지르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병규는 일시 당황했다. 또다시 슬쩍(?) 움직여줘야 하는 걸까? 그러다 정말로 큰 사고라도 치면 어쩌나 내심 걱정스럽기도 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데 보다 못한 호랭이가 벼락치듯 말한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일단 왼발을 게걸음으로 내딛으며 두 주먹을 허리춤에, 다음 오른발을 엇갈리며 두 주먹을 가슴에, 마지막으로 튕기듯 왼발을 크게 뻗어내고 상체를 좌측으로 크게 뻗치며 두 주먹을 쏘아내라.”

병규는 즉각 호랭이의 말에 따랐다.

“처음엔 왼발을 게걸음으로 내딛으며 두 주먹을 허리에.”

휘익 하며 발그림자가 번개처럼 움직인다.

와 하고 달려들던 레드서클 녀석들은 반사적으로 흠칫 놀랐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두 번째는 오른발을 엇갈리며 두 주먹을 가슴에.”

두 다리를 엇갈리고 자세를 낮추자 마치 잔뜩 움츠린 용수철 같다.

와 하고 소리치던 녀석들의 고함이 으아아!로 서서히 바뀐다. 처음 맞은 녀석은 아침에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고, 두 번째로 부딪힌 녀석들은 십여 미터를 날아갔다. 그럼 세 번째는? 설마 대기권 밖을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쏴아아아.

녀석들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병규의 마지막 세 번째 동작이 이어졌다.

“마지막엔 왼발을 크게 튕기고.......”

움츠려있던 그가 발을 쭉 뻗어내자 십여 미터의 거리가 한순간에 압축되며 폭풍같이 기세가 칼날처럼 치민다.

“으아악.”

“말도 안 돼!!”

돌풍과 함께 병규가 몰아닥치자 레드서클 녀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이미 무시무시하게 달려들던 기세는 완전히 꺾여 버렸고, 지금은 맹렬히 달려들던 그 기세 그대로 집안으로 미친 듯이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아나는 그들의 등을 향해 병규의 두 주먹이 쏘아졌다.

“상체를 뽑아내며 두 주먹을 쏘아낸다.”

빠아앙.

대형 교통사고 때에나 들을 수 있는 폭음이 터진다. 가히 충격의 파도. 아우성을 지르며 집안으로 도망치던 녀석들은 해일처럼 몰려오는 충격의 파도에 몸을 실은 채 도미노처럼 연쇄충돌을 일으켰다.

뒷문 밖에서 병규의 두 주먹을 직격으로 받아낸 녀석이 밥상을 껴안고 현관문 밖까지 튕겨져 날아갔을 정도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나 병규 역시 무사하지는 않았다.

“아그그그그. 주먹아.”

이번엔 주먹이 깨질 듯이 아프다.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펜대 굴리는 것밖에 못하던 손이었으니, 갑작스런 주인의 폭력에 주먹은 또 얼마나 놀랐을까.

“쯧쯧. 한심한 녀석아. 고작 그거 했다고 주먹이 아프냐? 평소에 얼마나 비실거렸으면.”

호랭이가 혀를 쯧쯧 찬다. 하지만 호랭이의 상태도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털이 엉망이 된 것은 물론이고, 두 눈마저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사실 말을 안 한다뿐이지 심장이 벌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자칫 했으면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질 뻔했다. 안 떨어지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지 턱이 다 아플 정도다.

‘무서운 녀석.’

이 녀석이 빠르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게다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엉성한 자세에서 쏘아낸 일격이 이 정도라니. 몇 백년 동안 고생하며 도술을 익힌 것이 한스러울 정도다.

‘언놈은 가르쳐 주자마자 장풍을 날려대는데.’

솔직히 말하면 장풍이라도 볼 수는 없다. 두 주먹으로 쳐냈으까. 하지만 그 효과는 충분히 장풍에 비견될 만했다.

“이 자식들이. 뭐야! 왜 전부 이쪽으로 튀어온 거야. 빨리 그 녀석을 잡아오지 못해!”

집의 정문 부근에서 불독의 사나운 외침이 들린다. 열이 있는대로 났을 것이다. 5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고작 애송이 한 명을 못 잡고 풍비박산이 되어 여기저기 날고 있는 꼴이니.

그의 고함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병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의 것으로 보이는 오토바이 몇 대가 눈에 들어왔다.

후다닥 달려간 병규는 꽂혀 있는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너 이거 운전할 줄은 아냐?”

“스쿠터 정도는. 이 녀석도 그냥 당기면 가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병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놈의 오토바이가 이렇게 커?’

만약 넘어지면 혼자 일으켜 세우기도 힘들 것 같다. 또 무슨 치장은 이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지. 두 개나 붙어 있는 배기통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에이. 몰라. 그냥 고고(gogo)!”

말과 함께 병규는 스로틀(throttle)을 힘껏 당겼다.

바아아앙.

거친 배기음과 함께 바이크의 앞바퀴가 덜렁 들렸다.

“우악.”

병규는 비명을 지르며 일시 당황했지만 용케 균형을 잡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엇? 저 새끼 잡아.”

“도망간다.”

등 뒤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스쿠터 이외의 바이크 운전을 처음인 병규는 그저 운전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바이크의 출력이 너무 좋아서 조금만 잘못해도 앞바퀴가 들려버린다.

“이커 알피엠(rpm)이 끝까지 올라갔는데도 기아가 왜 안 바뀌지?”

그는 자동으로 변속되는 스쿠터만 타봤기 때문에 gsx-r600처럼 수동변속기가 달린 바이크에 대해선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1단으로 100킬로 이상 달리는 오토바이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병규는 무작정 스로틀을 끝까지 당겼다.

꾸아아아앙.

gsx-r600이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태어난 후 처음, gsx-r600은 1단 기어로 시속 60킬로를 달려야 했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불곰은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휘둘러 사내들을 후려갈겼다. 그 녀석이 겁나게 빨라서 잡을 수 없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다. 뒷문을 지키던 녀석들이 거품을 물고 기절한 것도 봤다.

생각보다 애송이의 실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50명이 넘게 출동했는데 그런 어벙하게 생긴 녀석 하나를 못 잡다니.

이 얘기가 다른 곳으로 퍼졌다간 다른 조직들 앞에서 고개조차 못 들고 다니게 될 형편이다.

“씨발 자식들. 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녀석을 쫓아. 찾으면 아주 아작을 내 버려. 아니 아예 죽여버려!!”

불곰은 독기를 줄줄 흘리며 그렇게 외쳤다.

수하들이 줄줄이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천둥 같은 소음이 터진다. 그 모습을 불만스테 지켜보고 있던 불곰은 가래침을 탁 뱉으며 자신도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직접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시체 하나 치운다.’

카본 글러브를 착용하며 불곰은 이를 갈았다.

“가자!”

그가 손을 치켜들자 30여 대의 바이크가 일제히 경적을 울려댄다. 개조된 혼에서 우렇차게 울리는 소음은 천둥소리에 비견될 만했다. 그러나 기세 좋은 외침과 달리 그들은 출발을 할 수가 없었다. 선두에 선 녀석들이 출발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미친 새끼들이 오늘따라 왜 자꾸 버벅거리는 거야?”

불곰은 짜증이 팍 일었다. 그가 조직을 이끌게 된 이후로 오늘이 가장 짜증나는 날이다. 고작 그 애송이 때문에.

선두에서 한 녀석이 뛰어왔다.

“형님. 웬 미친 노인네가 길을 막고 비켜서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불곰은 바이크에서 내려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과연 녀석의 말대로 추레한 노인네 하나가 턱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노인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저 양반이 돌았나. 치매 아냐? 때가 어느 땐데 홀랑 벗고 다녀?”

불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요상한 날이다. 감히 겁도 없이 레드서클에 단독으로 덤벼드는 애송이가 나타나더니 이번엔 미친 노인네까지 그의 심기를 거슬린다.

“노출증 환자인가 봅니다.”

“설마 우리에게 그 처량한 딸랑이라도 보이고 싶은 거야?”

“어이. 할아방. 그런 거라면 여고를 찾아가야지? 그리고 허름한 거라도 코트 하나 장만해.”

“푸하하하하.”

쏟아지는 비웃음들. 그러나 노인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느긋함. 그리고 귀기 서린 푸르스름한 눈빛.

불곰은 먹던 음식이 목에 걸린 것처럼 불괘해졌다. 그는 몰려든 부하들을 헤치며 자신의 바이크에 올라탔다.

“이봐. 이래도 비키지 않을 테야?”

바아아앙.

거칠게 울어대는 바이크의 육중한 위협음. 그러나 노인은 관심도 없다는 듯 귀까지 후빈다.

“뭐야? 보험이라도 타먹어 보겠다는 심산이냐? 그런 생각이라면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

불독은 스로틀을 힘껏 잡아당기며 음산하게 소리쳤다.

부하들이 우르르 비켜선다. 저렇게 목소시를 깔 때의 불독은 정말로 위험하다. 가뜩이나 오늘은 애송이 녀석 때문에 화가 날 대로 난 상태. 노인은 날을 잘못 고른 것이다.

“뭉개주마.”

부아아앙.

바이크가 요란한 괴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달려 나간다.

이젠 노인이 피하려 해도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대로 갈아붙여주마. 그러나 마지막 순간 불독은 보았다. 노인의 입에서 새어나온 빨간 혓바닥이 입술을 축이는 모습을.

노인은 그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팔팔한 먹이로군.”

부르르.

불독의 몸이 떨려왔다. 추워서가 아니다. 공포심이었다.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동물의 그것과 같은.

“바보 같은 소리!”

그는 스멀스멀 깃드는 공포심을 부정이라도 하듯 극한까지 스로틀을 당겼다. 아예 묵사발을 내주리라.

그때, 노인의 몸이 흐릿하며 사라졌다.

그것은 병규가 순간적으로 보인 것과 유사한 움직임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불독은 그런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심장은 이미 그의 몸과 작별을 고했기 때문이다.

콰다당.

무서운 기세로 튀어나간 바이크는 이미 죽어버린 주인과 함께 땅바닥을 요란스럽게 굴러갔다. 타이어에 말려든 불독의 시신이 사방으로 피와 살점을 뿌려댄다.

“좋군.”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는 심장을 한 입 베어 물며 발칸은 희열의 괴소를 흘렸다. 역시 젊은 녀석의 심장은 최고다. 차원을 넘으며 무너진 그의 육신에 한 가닥 활기가 생긴다.

심장의 질긴 근육을 껌 씹듯 찌걱찌걱 씹으며 그는 시신을 나머지 녀석들에게로 돌렸다.

“으헉.”

멍청하게 서 있던 레드서클의 녀석들이 뒤늦게 반응한다. 몇몇은 비명을 지르고, 몇몇은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막나가는 그들이지만 사람의 심장을 뜯어먹는 살인마와는 비교자체가 안 된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발칸이 성큼 발을 앞으로 내딛자 녀석들은 하늘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튀며 달아났다.

“이제야 사냥하는 맛이 나겠군.”

발칸은 사과를 먹듯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심장을 우직 베러 물었다.

난생 처음 600cc 오토바이를 몰고 정신없이 도로로 달려나간 병규. 그러나 역시나 변속도 않고 1단으로 계속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얼마 못 가 엔진이 눌어붙고 말았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도로변에서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까지는 이 녀석 덕분에 수월하게 도망쳤는데, 이제 꼼짝없이 레드서클과 한판 떠야 할 상황이다.

아무리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재주가 생겼다지만 그 많은 인원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러나 호랭이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녀석들을 모두 박살내고 또 다른 바이크를 얻어 타고 가자고.”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무슨 유치원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쉽게 말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마치 호랭이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병규 역시 마음이 편안했다.

“그런데 호랭이. 신선이 바이크라는 말을 해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건 또 뭐야?”

“안 될 거야 없지만,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신선이라 그러면 좀 고풍스럽게 말해야 멋이 나잖아요. 가령 자동차를 무쇠마차라고 부른다던지.”

“어허. 내가 말했잖아. 다 그 놈의 미디어가 심어놓은 쓸데없는 고정관념이라니까.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대사를 읊겠냐?”

“하긴 그러네요.”

마음이 가볍다. 정말로 자신이 폭력조직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 맞긴 한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설마 그 녀석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생각을 아니겠지?”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씩 하고 웃었다.

“뭐, 기다렸다가 먼저 오는 녀석을 날려버리고 그 오토바이로 바꿔 타기로 하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 시간이 넘도록 병규를 뒤쫓아오는 바이크는 단 한 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병규는 도로변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허비한 채 터덜터덜 한 시간이나 걸어 집에 도착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병규가 집에 도착 했을 때 자신의 집을 사방으로 포위한 경찰로부터 50여 명에 이르는 폭주족들이 발칸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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