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02)

역시 고전적인 방법이 최고지?

“이봐. 일어나.”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병규는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몸은 아직 무겁고, 희미한 시야는 손으로 비벼 봐도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힘들게 상체를 일으킨 병규는 저혈압 환자처럼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붕 뜬 것 같던 정신이 차츰 돌아오고, 부옇던 시야가 정상으로 회복되자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띠꺼운(?) 표정의 집채만큼 거대한 호랑이, 그것도 눈처럼 하얀 백호였다.

“헙.”

호랑이의 웅장한 자태를 본 병규는 금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폐마저 잔뜩 오그라들어 비명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이 호랑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간신히 잠들기 전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온다.

‘그래. 바람이나 쐴 겸 약수터에 갔다가...... 살인마와 마주쳤지. 그래서 난.......’

끊어진 필름들이 한꺼번에 와르륵 정보를 쏟아내며 조각난 기억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뱃속을 파고들던 그 고통, 자신을 내려다보며 기괴하게 웃던 괴인의 추악한 얼굴.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현기증과 통증. 그리고 의식이 무너지던 희미한 순간에 본 집채만한 백호.

‘맙소사.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야?’

꿈이길 바랐지만 유감스럽게도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백호는 그 모든 것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 그놈은?’

병규는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살폈지만 발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그를 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거대한 백호뿐.

‘흐미~.’

커다란 맹수가 그를 노려보며 식욕을 과시하고 있으니, 이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꼬. 병규는 정말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데, 그를 향해 두 눈을 부라리고 있던 백호가 ‘파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놀랍게도 짐승에 불과한 호랑이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뜨헐. 진지한 표정으로 있으려니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것 같구만.”

“......?”

“야야. 긴장하지 말고, 담배 없냐?”

“......??”

병규는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호랭이가 말을 한다?’

이게 무슨 아주 공갈 염소 똥 같은 일이란 말인가.

병규가 선뜻 대답을 않자 백호가 인상을 찌그리며 독촉했다.

“담배 말야. 담배.”

“......!”

호랑이가 태연히 말을 하더니, 이젠 담배까지 달라고 협박한다.

“하, 하하. 그래. 그랬던 거구나.”

땡땡 얼어붙었던 얼굴이 일그러지며 헤 벌린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학교 뒷산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온다는 소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발칸에게 당했던 상처들도 말끔하게 나았고, 흉터조차 보이지 않았다.

“역시. 꿈이었던 거야. 하하하. 다행이다. 꿈이어서.”

병규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대소를 터트렸다. 꿈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긴장이 탁 풀려 전신이 흐물흐물 해진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때. 병규는 지금 자신이 그런 경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눈앞에 있는 것이 호랑이가 아니라 뿔이 삼천 개쯤 달린 흉악한 사탄이라도 해도 이제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이마를 찡하게 울리는 통증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짜식이. 담배 달라니까 무슨 헛소리가 그리 많아?”

병규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은 백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마를 짜릿하게 자극하는 통증에 병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절대 아파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그의 머리통을 쪼갤 듯 관통한 감각은 분명 통증이다.

그렇다면 웅장한 자태로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 거대한 백호도 현실이란 말인가. 그리고 놈이 으르렁거리며 말을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담배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생생한 라이브라는 말이 되는데.......

“아직 정신 못 차렸냐? 담배!”

호랑이의 고함에 흠칫 놀란 병규는 반사적으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다행이 이도재 녀석에게 비싸게 주고 산 담배가 있었다.

“넌 젊은 놈이 군바리처럼 무슨 디스냐? 요즘 좋은 담배 많이 나왔잖아. 불!”

이놈의 호랑이. 남의 담배를 얻어 피우는 주제에 잔말이 많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호랑이의 앞발 휘두르기 한 방이면 저 하늘의 별이 될 신세인데. 병규는 조심스레 불을 당긴 라이터를 백호의 입가로 가져갔다.

“조심해. 수염 태우지 말고.”

괘씸한 호랑이는 잔소리에 이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협박까지 한다. 병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호랑이 입에 물려진 작은 담배게 불을 붙였다.

“후~ 좋군.”

말년 병장 같은 방만한 자세로 호랑이는 들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천연덕스럽게 연기로 동그라미까지 만들어대는 모습에 병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고 있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믿자니 황당하고, 안 믿자니 욱신거리는 두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좀 전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처럼 미쳐 날뛰더니. 지금은 또 양가댁 규수인 양 얌전을 떠는군.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냐?”

담배를 뻐끔거리던 백호가 넌지시 묻는다. 좌우로 쭉 찢어진 백호의 입 모양이 어쩐지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솔솔 풍긴다.

“저, 저기. 호랑이님.”

병규는 주저주저하며 간신히 말문을 연다.

“호랭이라고 불러.”

“네. 호랭이님.”

“그냥 호랭이.”

“네, 호랭이. 그런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된 거라.......”

호랭이라는 이름의 백호가 고개를 쳐들며 깊은 숨을 내뱉는다. 삐죽삐죽 솟은 송곳니 사이로 매캐한 담배연기가 구름처럼 인다.

“후~ 젠장 담배 맛 죽이는군.”

호랭이가 대답은 않고 공연히 분위기만 잡자 병규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런 병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랭이가 입꼬리를 좌우로 쭉 넓히며 웃어 보였다.

“뭐, 그렇게 불안해할 건 없어. 별일 아니었으니까.”

“벼, 별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병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별일 아니었지. 닥치는 대로 살인을 하는 마귀 같은 인간이 나타났단 소리에 어렵게 인간계로 걸음을 했더니 웬 애송이 녀석이 피바다 속에 누워있지 않겠냐? 아! 배에 이만한 구멍이 났더구만.”

호랭이는 그 큰 앞발로 그의 머리통만 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따, 딸꾹.”

“내장이란 내장은 죄다 뱃속에서 쏟아져 나와있더구먼. 황소 응아처럼 뭉개진 간은 이쪽에, 찢어진 걸레 꼴이 된 대장은 저쪽에, 접시꽃 당신처럼 생긴 췌장은 저쪽에, 허파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꽉꽉거리며 굴러다니지, 캬~. 정말 사진이라도 찍어서 엽기 사이트에 올리고 싶을 정도였다니깐.”

“딸꾹 딸꾹 딸꾹.”

호랭이의 현실감 넘치는 설명이 이어질수록 병규는 경련을 일으키듯 요란하게 딸꾹질을 해댔다. 들으나마나 호랭이가 말하는 애송이는 바로 그 자신일 게 뻔했으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어?”

병규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호랭이의 말을 들어보니 방금 전에 겪은 일장의 활극이 모두 현실이었던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의 몸에 상처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네가 알고 싶은 게 바로 저거냐?”

그의 궁금증을 눈치 챈 호랭이가 앞발로 한쪽을 가리켰다.

“등 뒤에 뭐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본 병규는 눈앞에 펼쳐진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아연실색해야 했다.

그의 등 뒤, 난장판이 되어버린 숲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 추악한 면상의 살인마도, 배 밖으로 내장이 툭툭 떨어지던 믿지 못할 장면들도 모두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는 것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숲의 전경도, 그 폐허 속을 뒹굴고 있는 잔해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반쯤 뭉개진 숲 속엔 또 하나의 그가 있었다. 또 다른 병규가 검붉은 핏물을 뒤집어쓴 채 그곳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왜 내가 또 있는 거야!”

병규는 벌러덩 자빠지며 경악성을 질렀다. 허둥지둥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조금 높은 코, 짙은 눈썹에 입술 아래의 점까지. 영락없는 그의 얼굴이다.

핏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가 얼굴을 만져보려 손을 내밀었지만 허무하게 쓱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몇 번을 해봐도 그는 자신의 몸을 만질 수가 없었다.

“소용없다. 이쪽과 그쪽은 전혀 다른 세계야. 아무리 그래 봐야 네 몸뚱이를 만질 수는 없다.”

“저, 전. 죽은 건가요?”

병규가 울먹이며 묻자 호랭이는 담배를 빙글 돌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젠장.”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병규는 한 섞인 욕지기를 터트렸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형편이라 괜한 머리털만 쥐어뜯었다.

“저승사자님. 저승사자님. 저 어떻게 살아날 수 없을까요?”

병규는 무섭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호랭이에게 매달렸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고 싶었다. 불가능한 건 알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저승으로 가기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억울했다.

“놈. 내가 어딜 봐서 음침한 저승사자같이 생겼냐?”

담배를 뻐끔거리던 호랭이가 버럭 화를 낸다.

“그, 그럼. 저승사자가 아니신가요?”

“당연하지. 그런 구닥다리 몰개성한 놈들과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이 호랭이님의 위신을 깎는 일이다.”

“그럼. 호랭이는 대체 뭐 하는 분이죠?”

“나? 나야 당연히 신선이지.”

“시, 신선요?”

병규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두 눈만 깜빡거렸다.

‘이 호랑이가 지금 나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거야?’

그런 생각도 당연한 것이, 불량배인 양 학생의 담배나 삥 뜯고 있는 호랑이를 누가 신선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놈 혹시 사람을 홀리는 여우가 둔갑한 것은 아닐까?’

병규는 정말로 진지하게 호랭이를 의심했다.

“놈. 못 믿겠다는 표정이구나. 왜? 내가 신선이라는 말이 그렇게 믿기 힘드냐?”

병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믿기 힘든 게 사실이네요.”

“크흐. 그 놈의 선입관이 문제야. 신선이 꼭 가지런하게 뒤로 넘긴 백발에 수염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린, 중후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여야 한다고 법률로 정해놓기라도 했냐? 하여간 미디어가 문제라니깐.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쓸데없는 편견이나 심어주고 말이야. 에잉.”

호랭이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

“한 개비 더 줘봐.”

“네네.”

병규는 윗주머니의 담배를 꺼내 호랑이 입에 물리면서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영혼뿐인 제가 어떻게 담배를 가지고 있는 거죠? 담배는 분명 저쪽의 제게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 호랭이는 귀찮은 티가 역력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원래 사람이 죽을 때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오게 돼 있어. 묻어온다고 해야 하나? 뭐 가지고 온다고 해봐야 그 물건의 실체가 아닌 영기 같은 것이긴 하지만. 넌 지금 영혼인데도 뻔뻔하게 옷을 입고 있잖아. 옛 왕들의 무덤에서 온갖 보물들이 출토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종교들에서는 모두들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간다고 하던데요.”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인간세상에서 귀중한 돈과 금은 저승에선 길가의 돌멩이보다 가치가 없으니까. 잔뜩 싸 짊어지고 가 봐야 힘만 들 뿐이다.”

호랭이의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체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지금 병규에게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혼이 육신을 떠나온 것으로 보아 자신은 죽은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그의 앞에 턱하니 앉아 담배나 뻐끔거리고 있는 호랭이는 사신이 아니란다. 그러면 대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절 데려갈 저승사자는 언제 오는 건가요?”

“음. 저승사자? 아아. 저승사자 말이지.”

그의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하던 호랭이는 커다란 두 눈을 게슴츠레 치켜뜨며 말했다.

“글쎄다. 아마 네가 사고로 뒈지거나 병으로 돌아가시지 않는다면 안 호, 육십 년 정도 후에는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병규는 아연실색하며 소리쳤다.

“네? 오, 육십 년 후에요? 그, 그럼 전 그동안 어떻게 되는 거죠?”

“뭘 어떻게 돼. 그냥 육신으로 다시 들어가면 되는 거지.”

호랭이의 핀잔에 울상이 된 병규는 자신의 육체는 손으로 휘휘 저어 보였다. 영혼인 그의 손은 자신의 육신을 휙휙 통과해 버렸다.

“보다시피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러는 거죠.”

병규의 말에 호랭이가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인간계과 선계는 한쪽으로만 보이는 유리와 같아서 볼 수는 있어도 간섭하는 건 불가능하거든. 나 정도나 되는 신선의 도력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

“아아. 그렇군요. 전 선계에 있는 것이라 인간계에 있는 육신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군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병규는 문득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랭이의 말을 듣자니 그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왜 선계에 와 있는 것일까.

“설마. 절 데려온 분이 바로 호랭이...... 당신이십니까?”

병규의 서늘한 시선에 뜨끔한 호랭이는 고개를 슬쩍 서산마루로 돌리며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신선들은 인간들의 일에 참견 못하게 되어 있거든. 하지만 너의 경우는 본의 아니게 휩쓸리게 된 상황이라서 말이야. 그 인간같지도 않은 놈을 발견하고 쫓으려고 했는데 그만 죽어가는 네 녀석이 눈에 띈 거야. 어쩔 수 없이 놈을 포기하고 도술로 널 치료했지. 그렇게 멋지게 사라지려고 했는데, 마침 너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더란 말씀이야.”

“담배...... 말인가요?”

“흠흠. 그래. 연초. 그래서 치료해 주느라 고생도 했으니 담배 한 개비 정도는 얻어 피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널 살짝 선계로 데려온 거지.”

“그럼 그냥 제 주머니에서 꺼내 가시지 뭐 하러 힘들게 영혼을 끌고 오신 건가요?”

“저런. 신선씩이나 되는 존재가 남의 물건을 슬쩍해서야...... 체면문제지. 인간에게 공양 받은 것이라면 상관없기는 하지만 말이야.”

병규의 두 눈이 가늘게 여며진다.

“공양? 협박 아닌가요?”

“허허. 그 무슨 말씀. 내가 생긴 게 좀 험악해서 가끔 오해를 받긴 하지만 절대로 강제로 물건을 갈취한 적은 없다. 허허허.”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무안한지 호랭이는 연신 목덜미를 벅벅 털어댔다.

“에효.”

병규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니. 신선씩이나 되는 호랭이께서 대체 뭐가 부족해 가난한 고등학생을 삥 뜯으십니까?”

병규의 지적에 호랭이는 미안하기는 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말야.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말야. 요즘 삼신 할마탱이가 잠잘 시간도 모자를 정도로 일감을 주면서 정작 월급을 쥐꼬리만큼밖에 안 주잖아. 그래서 뭐,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병규의 입이 뜨억 하고 벌어졌다. 담배 피는 호랭이에 이어 이제는 삼신할매의 등장이다.

“대체 삼신할머니께서 무슨 일을 시키는데 그래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의 인상이 대번에 콱 찌그러졌다. 삼신할매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표정이다.

“그 놈의 삼신할마탱이. 가뜩이나 이러저러한 일로 바빠 죽겠는데, 수입이 시원찮다고 나보고 부업까지 뛰라잖아.”

“대체 무슨 부업을?”

“뭐 별건 아니야. 무당 삥 뜯기랑 부적 그리기, 에...... 그리고 요즘은 구슬 꿰기랑, 봉투 붙이기 같은 것도 시키더구만.”

“.......”

구슬 꽤는 호랑이.

작은 구슬들을 실에 꿰느라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떠올리니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부적 그리기와 봉투 붙이기는 더더욱 가관이라 감히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병규는 헛기침과 심호흡으로 웃음을 간신히 참아 넘김 뒤 조용히 물었다.

“흠흠. 삼신할머니면 분명 아이를 점지해 주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그런 일을 시키는 거죠?”

호랭이는 긴 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토해 내며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은 표정이 되었다.

“후. 그것도 다 호랑이 담배 필 시절의 얘기지. 요즘 같은 세상에 애가 안 생기면 병원을 찾지 누가 삼신할마따구를 찾냐?”

호랑이 담배필 적 얘기를 담배 피는 호랑이에게 듣자니 참 묘하게 현실감이 넘친다. 호랭이의 말이 이어졌다.

“뭐, 한동안 의사 노릇하다가 안 되니 다시 커플 매니전지 카풀 매니저인지 하는 걸 해보겠다고 부산을 떨더구만. 될 리가 있나? 요즘 세상은 그저 인터넷이 최고야. 하여간 그것도 실패하니까 괜히 엉뚱한 날 갈구는 거지 뭐. 나 원 참 더러워서. 개인사업을 차리던가 해야지.”

호랭이의 맥 빠진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의 푸념에 불과하지만 요즘 같은 불황기엔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까 정리해서 설명하면 그 인간의 심장에 미친 살인마를 뒤쫓던 중 다 죽어가는 저를 발견하고 치료해 주셨다. 치료를 마친 후 그냥 선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제 품에서 담배 냄새가 솔솔 풍기더라. 그래서 담배나 좀 얻어 피우잡시고자 제 영혼을 잠깐 선계로 불러들였다, 이 말씀이시네요?”

“뭐. 짧게 정리하면 그런 거지. 널 치료했을 때엔 이미 그 악독한 놈은 멀리 도망가서 쫓기엔 무리였거든.”

호랭이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다.

“휴.”

병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담배 한 개비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선계까지 끌고 왔다는 호랭이의 말은 황당하지만 어쨌거나 호랭이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것도 생명을 구해준 구명지은.

“구해주신 은혜, 정말로 잠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 백골이 되어, 사해 바다를 표류하다 멸치 똥이 되는 한이 있어도 결코! 절대로! Never! 잊지 않겠습니다.”

병규는 호랭이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조아렸다.

“그, 그래? 잊지 않는다니 다행이구나. 커험.”

호랭이는 불편한 자세로 병규의 인사를 받았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시 이제 은혜에 대해 인사도 드렸고 해서 말입니다만.”

병규가 눈을 빛내며 호랭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볼일이 끝났으면 그만 절 다시 몸으로 보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응? 응? 아. 몸? 그래. 보내줘야지. 알았다. 기억만 지우고 나서 바로 돌려보내 줄게.”

“넷?”

조신한 자세로 부탁하던 병규는 기억을 지운다는 호랭이의 말에 팔짝 뛰었다.

“기억을 지워요? 왜요?”

“당연히 선계가 있다는 걸 평범한 인간이 알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지.”

‘그런 줄 알면 아예 날 이리로 안 데려왔으면 됐을 거 아뇨!’

병규는 불만이 뭉클 일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혹시나 이 자칭 호랭이 신선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만 손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제 기억을 지우실 생각이죠?”

“흠흠. 잠깐만 기다려.”

그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호랭이는 담배를 입에 꼬나문채 고개를 휘휘 돌렸다.

“가만있자. 어느 놈이 적당한가.”

수풀을 뒤적이던 호랭이는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를 앞발에 들었다. 공중으로 휘휘 던져보더니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좋아. 이게 적당할 것 같군.”

순간 병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설마. 그걸로 제 뒤통수를?”

병규가 호랭이 앞발에 쥐어진 짱돌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자, 호랭이는 입가를 좌우로 쭉 늘리며 찐하게 웃는다.

“역시 고전적인 방법이 최고지.”

“히익!”

병규는 비명을 질렀다.

“그, 그걸로 뒤통수를 잘못 맞으면 한 방에 저승구경 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럼. 이걸로 해주리?”

호랭이는 발톱을 잔뜩 세운 앞발을 들어 보였다.

“히, 히끅.”

“괜찮아. 한두 번 하는 장사도 아니고. 깔끔하게 기억만 지워줄게.”

“만약 잘못돼서 제가 죽으면요?”

“뭐. 그것도 나름대로 깔끔한 처리 아니겠어?”

깔끔한 처리라는 것은 옳은 말이다. 저걸로 맞았다간 적어도 뒤통수만큼은 깔끔하게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 피는 호랭이가 음침한 미소를 풍기며 어기적거리며 다가서자 병규는 좁혀진 거리만큼 슬금슬금 물러섰다.

“걱정 마라. 고통은 순간에 불과하니까 말야.”

돌멩이를 쥔 앞발을 스윙하듯 휙휙 돌리던 호랭이가 돌연 병규에게 달려든다.

“으헥.”

짱돌을 손에 들고 달려드는 호랭이의 박력에 병규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머릿속으로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자연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호랑이의 앞발 후려치기가 몇 kg의 충격이더라?’

정확한 수치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 방에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두려운 마음이 왈칵 솟자마자 그는 호랭이의 서슬 퍼런 공격을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달아났다.

“이놈아 도망가지 말고 그냥 얌전히 맞아.”

“싫어요. 그걸로 한 방 맞으면 죽는다고요.”

“그건 장난이고. 안 아프게 해줄게. 나도 명색이 산신령인데 설마 그렇게 무식하게 하겠느냐?”

“그걸 어떻게 믿어요?”

호랭이가 펄쩍펄쩍 뛰며 뒤를 쫓았지만 병규는 그때마다 요리조리 잽싸게 몸을 피해버렸다.

인간의 몸놀림이 감히 야성을 떨칠 수 있을까만은 이상하게도 잡을 만하면 쭉 하고 병규의 몸이 빨라지고, 다시 잡을 만하면 또 쭉 하고 빨라지는 통에 도무지 짱돌로 찍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달릴수록 점점 빨라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그래도 사람 같더니, 나중엔 지가 제트비행기인 줄 착각하는 것처럼 맹렬히 달려댄다.

“하이그. 이놈아. 그만 좀 달리고 얌전하게 한 대만 맞아라. 제바알.”

호랭이는 안달이 난 목소리로 애걸했지만 병규는 오히려 혀를 내밀어가며 죽어라고 내뺐다.

“헹. 싫네요. 뒤통수에 짱돌을 꽂고 사느니 차라리 죽을 때까지 도망 다니겠습니다.”

“이놈아. 이게 그냥 짱돌인 줄 알아?”

호랭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나 같은 산신령이 쓰면 하잘것없는 작대기도 신물이 되는 법인데, 이 짱돌이라고 평범하겠느냐? 외상없이 기억만 날름 지워줄테니 제발 말 좀 들어라.”

“싫네요.”

“이놈. 당장 거기 안 서면 확 잡아먹을 테다.”

“어차피 돌 맞아 물려 죽으나 마찬가지랍니다.”

달래도 보고, 애걸도 해 보고, 협박도 해 봤지만 병규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젠장. 괜히 장난을 쳐 가지고’

뒤늦게 후회하는 호랭이였지만 아무리 달래고 윽박질러도 영악한 병규는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쫓아다니던 호랭이 신선임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헉헉헉. 너 무슨 놈의 발이 그리 빨라. 능력자였냐?”

“에? 능력자요?”

병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다.

“능력자 아냐? 그것 참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호랭이는 콧수염을 당기며 생각에 잠긴다.

“능력자란 게 뭐죠?”

“뭐, 말 그래도 특이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특이한 인간을 말하는 거지. 불을 마음대로 부린다던가, 신통력이 생긴다던가 하는 거 말야. 물론 아무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나저나 너 다리가 빨라진 게 언제부터냐?”

“그게 조금 전부터인데요.”

“허허. 그거 이상하네. 보통은 어릴 적부터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기 마련인데.”

호랑이는 혀를 끌끌 찼다. 병규는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은 채 괜한 뒤통수만 긁적였다.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놈아. 이리 가까이 와봐. 할 말이 있다.”

“에이. 짱돌로 찍으려고 그러는 거죠?”

“안 해. 이놈아. 네 녀석 따라다니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엥. 그렇게 안심시킨 다음 몰래 후려치려는 속셈 다 알아요.”

“어허~! 설마 신선인 내가 체통도 없이 한입으로 두말하겠냐? 정말로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리 가까이 와봐.”

못 미더운 표정으로 호랭이를 쳐다보던 병규는 우물쭈물 가까이 다가갔다.

“쯧쯧. 어찌 그리 신선 말을 못 믿어. 일단 담배나 하나 줘봐라.”

병규가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주자 호랭이는 시골 영감처럼 뻐끔뻐금 연기를 피워댄다.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 양반이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병규는 불안한 표정으로 호랭이의 눈치만 봤다.

“할 말이 뭐고 하니.”

분위기만 잡고 있던 호랭이가 어렵사리 운을 뗐다.

“나랑 계약 좀 하자.”

“계약요?”

병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무슨 계약인데요?”

“사실 이 몸은 곧 힘을 잃는다.”

“네? 왜요?”

“너무 큰 힘을 썼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널 살리느라 너무 큰 힘을 썼다는 소리다. 배때기에 이만한 구멍이 뚫린 놈을 살려야 했으니 좀 큰 힘을 썼겠냐? 덕분에 몇 백년분의 도력이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그런.”

병규는 당황했다.

불량스런 양아치처럼 담배 삥을 뜯고, 기억을 지워주겠다며 짱돌을 휘두를 때만 해도 그렇게 밉살스럽게 보일 수 없더니, 이제는 고마움을 넘어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호랭이의 말이 이어졌다.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 이런 말 잘 알지?”

“네.”

“그래. 안다니 다행이구나. 그런 의미로 두 가지만 내게 약속해다오.”

“두, 두 가지요? 어떤 건데요?”

“그것이 뭔고 하면.......”

호랭이가 병규에게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호랭이가 힘을 찾게 될 때까지 숙식을 제공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병규 때문에 놓친 살인마, 발칸을 잡을 수 있도록 협조할 것. 병규로서는 두 가지 다 들어주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큰 호랑이를 부양하라니. 아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주민들의 신고가 빗발칠 것이다. 그러나 호랭이는 이 문제게 대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난 도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조금 후엔 몸을 작은 강아지만 하게 변화시킬 게야. 왜 굳이 그런 일을 하는고 하면 그 편이 도력을 모으는 데 훨씬 능률적이기 때문이지. 하여간 그렇게 한 번 몸을 작게 변화시키면 다시 도력이 회복될 때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못 돌아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그 모습이 되면 내 힘을 모조리 잃게 된다는 것이야. 도력은 물론이고, 태산을 허물어 버릴 힘조차 사라져 버리게 되지. 정말로 강아지만한 기운밖엔 남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니 원래의 도력을 되찾을 때까지만 날 돌봐달라고 하는 게야. 네 생명을 구하다 이렇게 된 일이니 당연히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생각보다 논리적인 호랭이의 반격에 병규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들어줄 수는 없다. 첫 번째 요구는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어도, 두 번째 요구만큼은 절대로 불가다. 발칸을 같이 잡자니. 놈에게 당한 기억이 너무도 생생한 병규에겐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쯧쯧. 걱정도 팔자다. 누가 너보고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놈과 싸우래? 넌 그냥 녀석 근처까지만 날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 그렇게 하면 내 도력으로 놈을 잡을 수 있게 될게다. 괜히 내가 널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야. 네 다리가 무척 빨라서 도움이 될 것 같으니 하는 말이지.”

“차라리 경찰에 맡기는 건 어때요? 안 그래도 요즘 발칸 때문에 군경에 비상이 떨어진 모양이던데요.”

“그 녀석의 움직임 못 봤냐? 경찰은 녀석의 그림자도 못 잡을걸?”

“하지만 경찰은 총도 있고, 인원도 많으니.”

“소용없다. 그렇게 잡힐 녀석이었으면 벌써 잡혔겠지. 녀석이 한반도에 오기 전에 이미 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일본을 들쑤셨다는 얘기도 못 들었냐.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호랭이의 설명을 듣던 병규는 문득 궁금해졌다.

“발칸은 도대체 뭐죠? 아까 말했던 능혁자인가 뭔가 하는 건가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놈은 달라. 사실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는 나도 알지 못 한다. 왜냐하면 녀석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이계. 다른 세상에서 온 녀석이야. 발칸은.”

병규는 아연실색했다. 이계라니.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니. 사실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발칸의 가슴은 갈비뼈의 모양대로 피부가 얇게 주름이 져 있었는데, 이것이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호흡을 할 때마다 촤르르 일어나곤 했다. 아무리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해도 그런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떠냐?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줄 만하지 않냐?”

호랭이가 은근한 음성으로 물어온다.

‘근처까지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된다라.’

병규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지그시 눈을 감자 아픈 기억들이 떠오른다.

푸욱 하고 등을 뚫고 뱃속을 파고들던 녀석의 주름 가득한 손. 쏟아지던 내장. 붉게 변해버린 시야. 미칠 것 같은 고통. 병규의 입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불끈불끈 솟는 복수심.

“정말 발칸 앞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병규는 재차 확인했다.

“물론. 그 이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화통한 호랭이의 약속에 병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잘 부탁해요.”

“그럼 알았다.”

흐믓하게 웃은 호랭이는 곧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얼핏 듣기엔 먹이를 위협하는 범의 목 울림과 비슷한 소리였지만, 묘한 가락이 느껴졌다. 이것이 짐승인 그가 주문을 읊는 방법이었다. 이미 깨달음을 얻은 그로서는 굳이 복잡한 주문으로 주술을 발동시킬 필요가 없었다. 신기의 구현은 의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곧 펑 하는 연기와 함께 호랭이의 몸뚱이가 작아졌다. 강아지만 해질거라 하더니 정말로 그의 주먹만해졌다.

그것도 몰라볼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다.

큰 머리. 역시나 덩치에 비해 큼직한 발바닥. 동그란 두 눈. 앙증맞은 코에 복슬복슬한 하얀 털까지.

정말로 인형 같은 깜찍한 모습이 아닌다.

본신이 능글맞은 호랑이 신선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당장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비벼댔을지도 모른다.

“휴휴.”

가슴을 쓸어내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은 병규. 이번엔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호랭이를 내려다본다.

“정말로 원해래도 못 돌아가는 거죠?”

“그래.”

“정말이죠?”

“신선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씩 웃는 병규.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주섬주섬 찾는다.

“뭘 찾는 게야?”

불길한 예감이 들은 호랭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병규는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정답게 대답했다.

“정말로 고전적인 방법이 최고인지 한 번 실험해 보려고요.”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는 그의 손엔 큼직한 돌멩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따, 딸꾹.”

호랭이 신선님의 얼굴이 참으로 박진감 넘치게 변해버렸다.

병규가 눈을 뜨고 제일 처음 본 것은 하늘이었다. 물통에 푸른색 물감을 딱 한 방울만 풀어놓은 것 같은 밋밋한 색감. 그 아래를 흐르는 구름 역시 뭉기적거리듯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이리 세상이 흐려 보일까.’

병규는 눈에 뭐가 들어갔나 싶어 손으로 비벼봤다. 안경이 잡혔다.

‘안경이 더러워진 걸까?’

찌그러진 안경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안경을 눈에서 떼니 세상이 한층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너무도 맑고 투명한 세상. 안경을 쓴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가볍고 밝은 세상이다.

어찌된 일인지 시력이 좋아진 것이다.

병규는 굳이 이유를 따지려들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죽었다 새로 태어난 목숨. 복잡한 생각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병규는 안경을 휙 집어던졌다. 코를 내리누르고 있던 안경을 벗어버리니 등에 지고 있던 멍에마저 훤하게 날아간 기분이다.

잠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윽.”

아랫배가 욱씬 쑤셔온다.

괴롭지만 그 통증이 반갑기도 하다. 이제야 육신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움직이기 불편할 게다. 도술로 대충 치료하긴 했지만 충격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불현듯 들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털 뭉치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랭이다.

백곰인 양 크고 위압적이던 거대한 백호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하얀 털의 강아지가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잘 만든 인형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안아보려고 무심결에 손을 내밀던 병규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저게 겉보기엔 순진무구(?)한 강아지인데, 속은 최소 몇 백 년은 묵은 능구렁이다. 그것도 담배 냄새에 환장하는 연초 마니아.

문득, 씨가를 물고 있는 호랭이 새끼를 떠올렸다.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머금으며 그 귀여운 면상으로 타락한 마피아처럼 온갖 인상을 쓰고 있는 아기 호랑이.

‘미치겠군.’

한동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무진장 애써야 했다. 덕분에 등의 통증이 도져서 눈물을 찔끔거려야 했다.

간신히 담배 피는 아기 호랭이의 마수에서 회복한 병규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불과 몇 시간 만인데 기름칠 안한 톱니바퀴인 양 전신이 삐거덕거린다.

충격이 남아있다는 호랭이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부위에 약한 통증이 왔다.

배 부위를 내려다보니 길게 찢어진 상의 안쪽으로 달 표면의 크레이터처럼 움푹 파인 흉터가 보였다.

놈의, 발칸의 손이 튀어나왔던 자리다. 드릴로 파헤치듯 살점을 파고들던 그 섬뜩한 감각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새삼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든다.

‘젠장 침이라도 뱉어줬어야 하는 건데.’

“뭘 그리 궁시렁거려.”

호랭이가 그의 어깨에 펄쩍 뛰어오르며 핀잔을 준다. 어느 틈에 그의 주머니에서 빼냈는지 담배를 물고 있었다.

“불 좀 붙여줘.”

입에 문 담배로 그의 뺨을 쿡쿡 찌르며 졸랐지만 병규는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싫어요.”

“뭐샤! 작아졌다고 날 우습게 볼 생각이냐?”

호랭이가 갈기를 치켜세우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병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천만에요.”

“그럼 뭐가 문제야?”

“안 어울려서 말이죠.”

“뭐? 뭐가 안 어울려!”

“자라나는 새싹에게 흡연은 심각한 피해를 양산합니다. 그리고 그 귀여운 얼굴에 담배라니요. 전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이, 이놈이. 감히 누구에게!”

호랭이가 그의 어깨를 물며 괴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 작은 이빨로 아무리 아등바등 힘을 써봤자 따끔거리기만 할 뿐이다.

병규는 놀리듯 비실비실 웃어대며 충격적인 일격을 날렸다.

“어디서 들었는데요. 애완동물에게 너무 잘해주면 나중에 버릇이 나빠진데요.”

“크아아악.”

급기야 호랭이가 폭주해 버렸다. 병규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발톱을 세워서는 땅을 파듯 그의 머리를 마구 긁어댄다.

“야야야. 그건 좀 아파요.”

“아프라고 하는 짓이얏!”

“진짜 아프다니깐요. 그러다 제 머리 다 빠지겠어요.”

“시끄러. 이 배은망덕한 놈아. 기껏 힘들게 살려놨더니 뭐라고? 애완동물? 죽어라 죽어!”

“야야야야.”

병규와 호랭이는 그렇게 툭탁거리며 좁을 산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이. 이게 누구야.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신 병규 어르신 아니신가.”

좁은 산길을 내려가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또 그 녀석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쭈굴. 이 녀석 봐라. 어른이 되라고 했더니 불장난이라도 했나. 아주 거지꼴이 됐구만.”

발칸에게 쫓기느라 엉망이 된 병규의 옷을 보고 녀석들은 캘캘거리며 비웃음을 날린다.

“뭐냐? 이 녀석들은?”

호랭이가 코웃음을 치며 묻는다. 병규는 깜짝 놀랐다. 호랭이가 말하는 걸 저 녀석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호랭이는 태연자약했다.

“걱정 말아라.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너만 들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저 녀석들은 뭐냐니깐?”

“뭐, 흔한 불량배들이죠.”

“불량배?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널 잘 아는 모양인데. 설마 너 이런 녀석들에게 당하고 산 거냐?”

병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호랭이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좀 비참하게 느껴진다.

한편 시빗거리를 찾던 이상철은 일그러지는 병규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쭈. 이놈 봐라. 표정 죽이는데? 허이구야. 이건 또 왠 개새끼냐? 설마 비상식량하려고 주워온 거냐?”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병규의 뺨을 툭툭 쳐온다.

아마 전 같았으면 이 돼지같이 생긴 녀석의 못된 짓거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눈물을 글썽였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의 심장을 뜯어먹는 발칸과 집채만한 호랑이를 상대하고 난 뒤라 녀석의 짓궂은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귀엽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웃어? 씨벨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만.”

이상철은 보기 흉하게 인상을 쓰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치켜들었다.

‘죽어?’

병규는 화가 콱 치밀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부웅 하고 떨어지는 이상철의 큼직한 주먹. 그러나 병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피한답시고 가볍게 발을 움직였는데 무려 오, 육 미터 밖을 미끄러지듯 물러나게 된 것이 아닌가.

“엇?”

졸지에 허공에 주먹질을 한 이상철의 하얗게 놀라는 얼굴. 그러나 놀라기는 병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칸이나 호랭이 때도 그렇지만 갑자기 빨라진 다리에 영 적응이 안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움직이는 것일까 의심이 들 정도다.

그가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데 호랭이가 장난스레 말을 건넨다.

“저렇게 느린 녀석들이 과연 널 때릴 수 있을까?”

“......?”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넌 충분히 강해. 적어도 저 녀석들보다는 100배 정도 말이지.”

“.......”

병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빨라진 다리에 밝아진 눈.

갑작스런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발칸에게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외친 외침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걸 바랐지.’

옛날부터 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힘이었다.

“어쭈, 피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던 이상철이 뱃살을 출렁거리며 다시 달려든다. 좀 전의 헛손질이 쪽팔렸는지 이번엔 고함까지 지르며 혼신의 힘을 쏟는다.

“.......”

예전엔 그렇게 무섭게만 보이던 녀석의 솥뚜껑만한 주먹이 지금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만 느껴진다.

주먹이 가까워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 병규는 마지막 순간, 한줄기 바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휘릭.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그는 어느새 이상철의 등 뒤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도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게 된 이상철. 녀석이 발을 꼬며 휘청거리자 넘쳐나는 살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그 모습을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던 병규는 녀석의 엉덩이를 가볍게 발바닥으로 밀어주었다.

“어이쿠.”

묵직한 소음과 함께 녀석이 엎어진다. 미련한 몸이라 넘어지는 것도 요란하다.

“이런 젖 같은 가식이!”

지켜보고 있던 이도재가 갑자기 덤벼들었다. 온갖 폼을 다 잡는 녀석답게 부웅 하고 발을 날려왔다. 병규는 피하긴커녕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녀석의 사타구니를 가볍게 걷어차 주었다.

“꺽!”

이도재의 눈이 하얗게 돌아가더니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잡고 주저앉는다.

“이런 엿 같은!”

자빠지면서도 욕을 쏟아내는 녀석. 그래 바로 이 입이었지. 항상 시궁창 같은 욕을 쏟아내던 저질적인 주둥이가.

퍽!

병규는 가차 없이 녀석의 입을 걷어차 버렸다.

“켁.”

강냉이처럼 부서진 이빨을 우수수 토해 내며 너석이 나동그라진다.

“크악. 아아아아악.”

꽤나 고통스러운지 두 손으로 턱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친다. 고작 이 정도도 못 참아서 울부짖는 녀석이 그렇게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다니. 짜증이 확 인다.

“개, 개자식. 죽여, 죽여버릴 거야.”

피를 꾸역꾸역 게워내면서도 쌍욕을 입에 담는 이도재의 밉살 맞은 얼굴. 죽인다는 말을 너무 쉽게 쏟아낸다. 이미 한 번 죽었던 병규는 유난히 죽음이라는 말에 과민반응을 보였다.

“그래 죽여봐. 이미 한 번 죽었는데 두 번 못 죽을 것 같아? 죽여봐. 죽여보란 말이다. 이 자식아!!”

그는 해일처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이도재의 면상을 아주 자근자근 밟아버렸다.

“훠이. 너도 한 성질 하는걸?”

호랭이가 휘파람을 분다. 이놈의 털북숭이 신선.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다.

철컥.

차가운 쉿소리.

“너 이자식 후회할 짓을 한 거야. 알아?”

이상철이 칼을 빼들었다. 잭나이프를 손에든 녀석의 얼굴에 광기가 흐른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 두려움에 벌벌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호 차분하다. 아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마저 배어든다.

“웃어? 미친 새끼.”

이상철을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다. 휙휙 하고 휘두르는 어설픈 칼질이 제법 예리하다. 정말로 사람을 베기로 작정한 것이다.

“골수까지 썩은 녀석이군. 이런 녀석은 사정 봐줄 필요 없다. 통쾌하게 날려버려.”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호랭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럴 작정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놈의 사각으로 스며들며 손바닥으로 가볍게 턱을 올려쳤다.

카각.

듣기 괴로운 소음이 일며 녀석이 뒤로 넘어간다. 쓰러지는 장면조차 어찌 저리 둔하게 보이는지.

“크윽!”

신음을 흘리는 녀석의 보기 싫은 얼굴. 지끈지끈 심해지는 짜증.

“칼에 찔리면......”

병규는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훨씬 더 아프단 말이다. 이 자식이다!”

활화산 같은 외침. 병규는 빙글 몸을 휘돌며 쓰러지는 녀석의 면상에 화끈한 발길질을 찍어냈다.

쩍!

“크에엑.”

발정난 돼지새끼처럼 꾸물대는 녀석. 아직도 짜증이 풀리지 않은 병규는 가차 없이 녀석을 밟아댔다. 몸을 둥글게 말며 끙끙거리던 녀석은 소나기처럼 퍼붓는 구타에 끝내 그의 발을 잡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냉정한 병규의 입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한마디.

“넌 내가 그렇게 말할 때 용서해 준 적이 있어?”

녀석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한다. 병규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없지? 단 한 번도. 가증스런 자식!”

퍽퍽퍽퍽.

다시금 병규의 구타가 계속되었다. 호랭이가 중간에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헐떡이던 병규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으힉!”

희멀건 얼굴의 안세준이 놀라며 뒤로 털썩 주저앉는다.

“그래. 네가 있었구나.”

병규는 느긋한 걸음으로 안세준에게 다가갔다.

“너, 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아는 거야? 사람을 팼다고. 소년원. 아니 감방이다. 알아? 아는 거냐고.”

안세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병규를 손가락질하며 두서없이 소릴 지른다.

패닉상태. 지금 그에게 병규는 죽음의 낫을 들고 다가오는 사신이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

근업하신 호랭이 신선님마저 짜증을 낸다. 동료가 당하고 있는데도 이 녀석은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비겁한 소리만 쏟아낸다.

병규는 게거품을 물며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을 묵묵히 지켜봤다.

불쌍하다.

녀석의 울부짖는 모습에서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휴.”

한숨을 쉬며 병규는 발길을 돌렸다.

“어? 저 녀석은 안 패는 거냐?”

“그럴 가치도 없는 녀석이에요.”

“그래?”

곰곰 생각하던 호랭이. 모슨 이유에선지 그의 어깨에서 펄쩍 뛰어내린다. 왜 그러는 걸까 고개를 돌려봤더니 호랭이는 아직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안세준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발톱으로 쫙쫙 그어버린다.

“끄아아악. 내 얼굴.”

안세준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꽤나 신경을 쓰는 녀석이니 호랭이의 일격이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것보다 치명적이었을 테지.

“너무하신 거 아녜요? 신선님?”

“괜찮아. 살짝 그어서 흉터도 안 남을 거야.”

호랭이는 개운한 표정으로 웃었다. 병규도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모처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병규와 호랭이가 사라진 후,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안세준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유 있는 동작으로 목과 손목을 돌리며 관절을 푼 그는 손수건을 꺼내 옷에 묻은 먼지를 꼼꼼하게 털어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먼지를 대충 털어낸 그는 값비싸 보이는 손수건을 휴지처럼 던져버린다. 그의 입가에 맺힌 비릿한 웃음. 그 모습은 과연 조금 전에 병규 앞에서 불쌍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인 사람이 그가 맞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아참. 잊을 뻔했군.”

뒤늦게 호랭이에게 당한 얼굴의 상처를 깨달은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 문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호랭이가 그려놓은 열 줄기의 손톱자국이 말끔하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좋아.”

비로소 만족스런 웃음을 그려낸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끙끙거리고 있는 이도재와 이상철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본다.

‘쓸모없는 녀석들.’

경명 어린 시선을 던져준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 불독 씨인가요? 전 안세준이라는 사람입니다. 아아. 다른게 아니고, 당신에 아이들이 누구에게 처참하게 당한 사실을 알려 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