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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63화 (263/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63화

82. 마지막 이야기 (4)

서율희의 삼엄한 감시 아래에서 업무를 수행한 결과․

다행히 저녁 약속 시각 전에 밀린 업무를 모두 끝마칠 수 있었다.

그녀가 옆에서 보조해 주지 않았더라면 밤새 서류를 붙잡고 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서율희는 아직 남아 있는 업무가 있다며 나를 먼저 내보내 줬고.

그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

오랜만에 집 앞에선 나는 기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다다다다닷!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작은 형체가 나에게 불쑥 달려들었다.

"어서 와, 세진!"

"하하. 그동안 잘 지냈어?"

"응!"

티아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동안 뒤이어 퓨이와 세이도 모습을 드러냈다.

"퓨이! 퓨이!"

-그르르릉.

여전히 귀여운 모습의 퓨이와는 다르게, 세이는 그사이 많은 성장을 이뤄서 조금씩 늠름한 드레이크의 모습을 보였다.

“너희들도 잘 지냈지?"

역시 오랜만에 만난 두 녀석에게 손을 뻗었다.

퓨이는 내 손길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세이도 예전처럼 귀엽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없어졌어도 내 손길을 받아들이며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현관문 앞에서 아이들과 먼저 인사를 나누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부엌에 있던 아주머니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윤이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어서 와요. 오빠.”

“먼저 다 와계셨네요.”

“당연히 음식 준비하려면 일찍 와 있어야지. 몇 시간 전에 선우한테 연락받았었는데. 좀 늦게 도착했네?”

“아, 길드에 처리할 일이 좀 많이 남아 있어서."

아주머니에게 늦은 이유를 대충 설명하고 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전혀 몰랐지만, 지금은 작게 부풀어 오른 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임신 축하해! 아까 형한테 들었어. 6개월이라며?"

“네, 그리고 고마워요. 여기서 지낼 수 있게 해줘서."

“그 정도로 뭘 편안하게 내 집이라고 생각해."

내 축하에 특유의 쾌활한 미소가 아니라 편안하고 은은한 미소를 짓는 아윤.

마치 아르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차분하게 변한 그녀의 모습에 내심 놀라운 감정이 생겨났다.

길드에서 만났던 선우와 마찬가지로 아윤도 많이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세진! 내가 이 배 속에 아기한테 매일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어."

"퓨이! 퓨이!"

티아와 퓨이는 아윤의 양옆을 지키듯 서서 자신들의 태교 활동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했다.

방금 티아가 말한 것처럼 동화책 읽어주기, 편안한 음악을 틀어주기, 같이 숲속으로 산책하러 나가기 등등.

아이들 나름대로 배 속의 아기를 위해 많이 신경을 써주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많이 도와줘서 정말 편해요.”

“그래? 둘 다 대단하네?"

아기를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을 칭찬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이, 통나무집에는 또 다른 손님이 도착했다.

“오셨군요. 세진 님."

"오랜만이에요.”

"형! 도착했으면 바로 연락을 줘야죠.”

반가운 미소의 시르엘과 피렌느, 그리고 여전히 장난스러운 오연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셋 모두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르엘과 피렌느는 예전에 엘프 모습에서 조금 도시적인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옷차림이나 장신구도 현대인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래도 엘프 본연의 모습은 잃지 않아서, 두 가지의 모습이 묘하게 섞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연우는 행동이나 말투에서 훨씬 더 여유로워 보였다.

내가 없는 사이 혼자 너튜브 채널을 운영한 오연우는 이제 세계적인 너튜브 채널의 운영자가 됐다.

아르킨 길드, 이세계의 엘프, 여전히 귀여운 아이들까지.

오연우만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컨텐츠 강점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형. 나중에 유럽 순방 썰 좀 풀어 주면 안 돼요? 요즘 너튜브 영상에 화젯거리가 없어서 걱정인데. 좀 도와주시죠?"

“너도 참 대단하다. 보자마자 영상

이야기부터 꺼내냐?"

“요즘 형이 너무 바빠서 미리 말 안 해두면 약속 잡기도 힘들잖아요. 그리고 명색이 '균숙자네 퓨이' 채널인데, 한 번씩 주인공이 모습을 보여야죠."

"참나. 알았다. 나중에 시간 내볼게.”

"흐흐. 감사합니다.”

내가 언론 인터뷰나 방송 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너튜브 채널로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물론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는 귀신같이 이슈를 짚어내는 오연우의 컨텐츠 본능 때문인 경우가 많았지만.

약속을 받아낸 오연우가 물러난 사이 시르엘과 피렌느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네줬다.

"이건?"

"마을에서 받아온 과일 중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들로 가져와 봤어요. 오늘 동료분들이랑 모이시는 날이죠?"

“그리고 이건 장로님이 만든 귀한 약재로 만든 포션인데. 일이 힘들 때마다 하나씩 드세요. 세진 님이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루나르엘님이 직접 부탁해서 만든 거예요."

두 엘프는 과일과 포션, 그 외에도 선물을 한가득 전해줬다.

“뭘 이렇게 많이…… 저는 딱히 드릴 것도 없는데."

“괜찮아요. 저희는 이미 세진 님께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볼게요."

"벌써 가려고요? 나중에 같이 모여서 저녁 식사하는 게 어때요?"

“오늘은 동료분들이랑 보내세요. 대신에 내일은 꼭 마을에 들려주실래요? 벌써 많은 엘프가 세진 님을 기다리며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을에서 엘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내심 난감해 했다. 나를 극진히 대접해 주는 일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워낙 그 정도가 과해 매번 힘들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 이렇게 정성 가득한 선물을 가져온 두 엘프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아. 그럼 그렇게 할게요.”

내일 마을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두 엘프는 크게 기뻐했다.

****

조금씩 어두워 질 무렵.

통나무 집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게 문을 일찍 닫은 아저씨와 임진혁이 모렛과 이엘을 데리고 도착했고,

신지아의 뒤를 이어 길드일을 끝마친 서율희, 김유미와 선우가 통나무 집의 문을 두드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허겁지겁 도착한

윤동현을 마지막으로 즐거운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자! 오늘은 실컷 마시자!"

아저씨는 시작부터 기분이 좋은지 가게에서 가져온 술들을 실컷 마시기 시작했다.

저렇게 술을 좋아하면서도 가게에 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주머니가 준비한 맛있는 음식들을 오랜만에 맛보며 나도 즐거운 분위기를 즐겼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챙겨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슬쩍 옆으로 다가온 선우가 나를 불렀다.

"어? 왜?"

"형. 저기 좀 보세요.”

"......?"

선우가 가리킨 방향에는 왠지 엄청나게 긴장한 표정의 윤동현이 보였다.

그는 슬쩍슬쩍 김유미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런 그의 시선을 무시하는 중이었다.

오연우는 선우와 함께 뭔가 아는

눈치인지 갑자기 큰 목소리로 산만한 분위기를 잠재웠다.

“여러분 잠깐만요. 누군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데요?"

아리송한 말에 모두 두리번거리는 사이, 윤동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뚜벅뚜벅 김유미를 향해 걸어 갔다.

갑자기 주변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함께 시선을 받게 된 김유미도 덩달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윤동현이 김유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자 뭔가 일어날 것만 같다는 기대감이 점점 부풀어갔다.

비장한 표정의 윤동현이 그녀를 강하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모두가 이렇게 모인 자리에서 꼭 말하고 싶었어요. 어쩌면 유미 씨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지만..…."

그는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그녀 앞에 내보였다.

상자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반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미 씨, 저랑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어…… 으……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청혼에 김유미는 크게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작은 숨소리마저 숨겼고, 찰나의 순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

비장한 표정이던 윤동현도 얼굴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당황하던 김유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윽. 이렇게 프로포즈하는 게 어딨어요?"

"유미 씨?"

“나는 오늘 온종일 짜증만 냈는데……

흑, 정말 나빴어요."

서럽게 우는 그녀의 모습에 윤동현은 크게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거절…… 하시는 건가요?"

"이익! 정말 멍청이가!"

"......?"

“언제 거절한대요? 미리 신호를 보내줬으면 좋았잖아요. 이렇게 갑자기 프로포즈할 줄은……"

"그러면?"

김유미는 눈물범벅인 얼굴을 붉히며

한쪽 손을 그의 앞으로 내보였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윤동현.

그때 뒤에서 오연우가 낮게 속삭였다.

"반지…… 반지!!"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윤동현은 허겁지겁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김유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반지가 끼워지는 순간.

모든 사람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두 연인은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갑작스러운 프로포즈는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고, 사람들은

앞다퉈 두 사람을 축복했다.

****

시끌벅적했던 밤이 지나고.

나는 약간 몽롱한 기분으로 새벽에 눈을 떴다.

오늘 엘프들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어제 술을 무리하지 않았던 탓에 숙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녘.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퓨우우우?"

“나 때문에 일어났어? 더 자."

"퓨이..….”

잠을 자고 있던 퓨이가 일어나 나에게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퓨이의 어리광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우리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갈까?"

"퓨이!"

나는 퓨이를 안아 들고, 다른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집을 나섰다.

상쾌하면서 으슬으슬한 새벽 공기를 느끼며 퓨이와 함께 언덕 위로 향했다.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도착했을 때,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위쪽으로 해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축축한 잔디를 피해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퓨이를 무릎 위에 올려뒀다.

조용한 언덕 위에서 그렇게 퓨이와 함께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퓨이!"

나는 문득 처음 균열에 들어왔을 때, 어려웠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균열에서 외롭게 지내던 시절.

처음 퓨이를 만나고 삶의 의미를 찾았었다.

허름하던 텐트 생활을 하면서도 퓨이와 함께 있어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이 지나고.

지금은 퓨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

귀여운 아이들과 믿음직스러운 동료.

그리고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많은 엘프들까지.

처음에는 우연이 얻게 된 이 능력 이 축복인 줄 알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닫게 됐다.

진정한 축복은 그 능력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만나게 되었던 수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만든 균열.

나는 이곳에서 그 축복받은 선물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닌.

모두와 함께 균열에서 살아갈 것이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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