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62화 (262/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62화

82. 마지막 이야기 (3)

약간의 소동이 일어난 후.

다행히 위층에 있었던 선우가 내려오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됐다.

선우를 통해 내가 진짜 길드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보안 요원은 어찌 할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이신 줄 몰라뵙고."

"아뇨, 출입증을 놔두고 온 제 잘못이죠."

나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에 너무 죄송하다는 태도를 보여 난감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형이 직원분들이 몰라볼 정도로 출근을 너무 안 하신게 문제가 아닐까요?”

“하하하. 그게 맞긴 하지.”

팩트를 던지는 선우의 말에 나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건물 입구에서 있었던 작은 소란은 금방 해결되었지만.

그사이에 주변으로 몰려든 길드의 직원들은 나를 환상의 동물 구경하듯이 바라봤다.

“저분이 길드장님이시래.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기셨네."

“TV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아르엘 재단 대표도 맡고 계시잖아."

“나 길드에 들어온 지 1년 넘었는데 실물은 처음 봐.”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선우는 작게 키득거렸다.

괜히 심술이 나서 불퉁한 표정으로 선우를 쏘아붙였다.

"야. 빨리 안내나 해, 혼자 웃지 말고.”

"큭큭. 알았어요. 형, 화내지 마세요."

“선우, 너 많이 컸다. 예전에는 이렇게 능글거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요? 뭐. 저도 이제 성인이니까. 처음 형이랑 만났을 때랑은 많이 달라졌죠."

겉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아저씨와 나, 아윤의 뒤를 따라다니던 막내의 느낌이 사라지고, 지금은

어디서든 한 사람의 몫을 해낼 것 같은 믿음직스러움이 생겼다.

짧은 시간에 성장한 선우의 모습을 보니 이엘과는 또 다른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소문이 진짜인가 보네? 율희 씨의 뒤를 이어 길드를 이끌 에이스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에이. 그건 아니죠. 그냥 형들이랑 부길드장님 따라다니다 보니까 조금

일찍 많이 배웠을 뿐이죠.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선우는 과장된 소문이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실제로도 녀석은 최근에 아르킨 길드의 에이스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후방에서 서율희와 함께 후방지원을 맡았던 선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전술적인 능력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경험을 쌓았던 선우는 금세 하나의 파티를 이끌 정도로 성장했다.

거기다 엘프와 교류를 이어나가면서 엘프의 정령술까지 배우면서 각성 능력도 한층 진화했고.

이제는 후방지원뿐만 아니라 공수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길드의 최고 유망주가 됐다.

추가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암암리에 수많은 다른 길드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 중이라고……

늠름해진 선우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말했다.

"짜식. 어쨌건 열심히 해라. 아저씨나 아주머니도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갑자기 무슨...… 빨리 올라가요. 부길드장님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내 칭찬이 쑥스러웠는지, 선우는 급히 화제를 돌리며 나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금방 건물 상층부에 도착한 우리는 또 한 명의 반가운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에요.

길드장님!"

“유미 씨도 잘 지내셨어요?"

“저야 늘 똑같죠. 뭐.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찾아오시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바빠서."

“장난이에요. 장난, 재단 일로 많이 바쁘신 거 알고 있어요. 부길드장님 만나러 오신 거죠?"

“네.”

“지금은 미팅 때문에 조금 바쁘신데. 방에서 기다리고 계실래요? 끝나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방이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방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고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 그럼 저는 가볼게요."

"왜? 좀 더 이야기나 하지."

“죄송해요. 파티원들이랑 있다가 급하게 연락받고 잠시 나온 거라. 저녁에 또 이야기 나눠요."

선우는 저녁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길드장의 방으로 향했다.

-덜컥!

문을 열고 방 안에 불을 켜보니, 잘 꾸며진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모든 물건이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그래도 누군가 관리를 계속해 줬는지 먼지 하나 없이 아주 깔끔했다. 다른 사람의 방에 있는 것처럼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데, 김유미가 차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 다.

“감사합니다. 유미 씨.”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될 것 같아요.”

나는 감사 인사와 함께 차를 받아들면서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동현 씨랑은 어떻게 잘 지내고 계세요?"

“흥! 그 사람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

"글쎄, 길드장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가볍게 윤동현의 안부를 묻기 위해 꺼낸 이야기에 김유미는 흥분해서 말을 쏟아냈다.

약간 두서가 없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최근에 길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길드원들이 늘어났는데.

윤동현과 김유미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신입 길드원들에게는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

근데 신입 길드원 중 윤동현에게 계속 관심을 표하는 여자 길드원이 나타났고, 이 사실을 김유미가 알게 됐다는 것.

물론 윤동현은 김유미와 교제 중이니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문제는.

“동현 씨가 아직도 그 불여시 같은 년이랑 같이 파티 활동을 하고 있다니까요."

“으음. 신입 길드원이니까 당연히 동현 씨 같은 경험자가 맡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그렇지. 지켜보는 저는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

그녀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서율희예요. 들어갈게요.

방문이 열리고 서율희와 함께 윤동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유미는 윤동현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팍팍 드러냈다.

윤동현도 그녀의 분위기를 읽고 금방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단 불편한 분위기는 모른척 하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네. 잘 지냈어요."

“저도 잘 지냈습니다.”

우리가 짧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계속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던 김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러면 나가볼게요. 이야기 나누세요."

그녀가 훌쩍 문을 열고 나가버리자 윤동현은 허망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바라봤다.

"저…… 따라가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런, 유미 씨한테 이야기 들으셨나 보네요. 부끄럽습니다."

그는 잠깐 고민한 끝에 나와 서율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김유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둘이 나가고 난 뒤.

방 안에는 나와 서율희 둘만 남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지고.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약간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서율희는 옆에서 이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긴장하셨어요?"

"......"

"뭐. 제가 혼이라도 낼 줄 알았어요?”

"아닌가요?"

최근 재단의 일이 바빠지면서 길드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고, 내가 해야 할 일 처리를 길드장 대리라는 명목으로 그녀가 다 떠안았다.

직책은 부길드장일지라도, 묵묵히

길드장의 책임과 의무까지도 그녀가 다 감내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번 유럽 순방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길드 일은 거의 내버려 두다시피 했기 때문에 찔리는 구석이 정말 많았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있나 보네요.”

“그건 당연하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기회에 율희 씨가 정식으로 길드장을 맡는 게 어때요?”

“.......”

“사실상 율희 씨가 길드를 이끄는 거나 다름없는데 굳이 제가 길드장을 맡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제안을 듣고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진 씨는 아직도 그대로네요.”

"네? 그게 무슨?"

“아르킨 길드는 아직도 세진 씨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단체에요. 지금은 급격히 그 세력을 불렀어도 중심을 잡아줄 사람들은 모두 세진 씨와 함께했던 그분들이에요."

서율희는 진지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정대훈 아저씨나, 아주머니, 진혁 씨 같은 분들이 지금은 균열 제거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길드원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도 전부 그런 의미에요.

지금도 세진 씨 부탁 한마디면 전부 모일 분들이에요. 추가로 엘프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

“저나 동현이, 유미 씨, 선우도 마찬가지예요. 세진 씨는 길드에서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이 없으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곳이에요."

그녀의 진실한 이야기에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세진 씨. 예전에 저랑 약속했던 거 기억하세요.”

"약속이요?"

“미궁 공략에 참여하는 대신, 공략에 성공하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하셨잖아요.”

나는 약간 희미해진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서율희와 했던 약속을 기억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네요. 그때 그런 약속을 했었죠."

"조금 늦었지만, 지금 그때 했던 약속을 지켜주셔야겠어요."

"......?"

“제 부탁은 간단해요. 세진 씨가 영원히 아르킨 길드의 길드장으로 남아주시는 것. 그게 제 부탁이에요.”

"......?!?!"

전혀 예상치도 못한 부탁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런 내 반응을 즐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쉽게 길드장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은 앞으로 없으면 좋겠네요.”

살포시 입꼬리를 올리는 서율희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아주 무섭게 느껴졌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연약한 나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리고……”

-쿵!

그녀는 어디선가 꺼내온 엄청난 크기의 서류 뭉치를 내 앞에 내려놨다.

“율희 씨? 이건 도대체?"

“오랜만에 길드에 오셨는데 그냥

보내드리면 너무 섭섭하겠죠? 지금까지 제가 임시로 처리했던 결재 서류, 그리고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길드의 중요 계획들이에요. 찬찬히 검토해 주시죠?"

“저…… 율희 씨? 오늘 저녁에 약속 있는 거 아시죠?"

“아. 물론 알고 있죠. 저도 참석해야 하니까. 그러니 빨리 시작하시죠.

다 못 하면 정말 혼나셔야 할거예요.”

무지막지한 서류들에서 시선을 돌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어요."

“하아.”

나는 결국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서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삼엄한 서율희의 감시 아래.

꼼짝없이 붙잡혀 저녁 약속 시각까지 밀려 있던 길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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