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61화 (261/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61 화

82. 마지막 이야기 (2)

강유환 회장과 재단 관련 이야기와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똑.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장이 문을 두드리고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회장님, 다음 일정을 위해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비서실장의 말에 회장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와 이엘을 바라봤다.

“식사라도 함께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은 일정이 바빠 힘들겠구나.”

“당분간은 한국에서 나갈 일이 없을 테니까 다음에 또 보면 되죠. 그리고 오늘은 저도 선약이 있어서."

“알았다. 그럼 다음에는 낚시라도 같이 가자꾸나. 오랜만에 대훈 동생도 보면 좋을 텐데, 요즘 굉장히 바쁘다더구나?"

“네. 안 그래도 지금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사업이 엄청나게 잘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허허. 대신 안부도 좀 전해주고.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나야겠다."

회장은 나와 이엘, 신지아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비서실장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남은 우리는 조금 뒤늦게 이혜린의 마중을 받으며 건물을 나섰다.

“오빠. 태워다줄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차량 불러올 테니까."

이혜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신지아에게 이후의 일정을 물었다.

“지아 씨도 같이 갈래요?"

“아뇨. 저는 아직 업무 시간이라서.

잠시 회장님을 만난다는 핑계로 빠져나왔거든요.나중에 저녁에 만나러 갈게요. 오늘 다 모이는 거죠?"

“네. 그럼 나중에 봐요. 지아 씨."

"언니. 꼭 와야 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이엘도 나중에 보자."

신지아는 건물 앞에서 나중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먼저 떠나갔다.

남아 있던 우리는 이혜린이 불러온

차를 타고 다음 약속 장소로 향했다.

****

약간 늦은 점심시간.

나와 이엘은 '율라슈토(Yulasto)'라는 간판을 단 가게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간판에는 아주 귀여운 털북숭이 마스코트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마음껏 마시자..….'

속으로 간판의 뜻을 해석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문이 열림과 동시에 딸랑이는 방울 소리가 울렸고,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영업 시간 아닙니다.”

"그럼 저희 나갈까요?"

“네. 나중에 찾아…… 세진아!!”

카운터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던 아저씨는 나와 이엘을 발견하고 놀란 목소리로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리고 정리하던 것들을 거칠게 내팽개치고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하하. 지금 한국에 도착한 거야?"

“네. 회장님 얼굴만 잠시 보고 여기로 온 거예요."

그는 얼굴 가득 흘러넘치는 반가움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오! 이엘! 못 본 사이에 훨씬 더 예뻐졌네.”

옆에 있던 이엘을 발견한 아저씨는 많이 성장한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움을 표했다.

소란스러움 때문인지 가게 안쪽에서 누군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사장님, 영수증 정리 다 끝나셨으면 좀 도와주러...… 세진 님!”

“후모!"

엘디르와 모렛은 우리를 발견하고 아저씨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달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엘디르,모렛도 잘 지냈어?"

“네. 세진 님도 잘 지내셨죠? 이엘도 보기 좋습니다.”

“모렛!”

"후모! 후모!"

이엘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 모렛에게 격렬한 반가움을 표했고, 모렛도 여전히 복슬복슬한 털을 휘날리며 품 안에 안겨들었다.

“가게 일은 좀 할만해요?"

“그럭저럭 적응한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봐왔던 경비대원 복장이 아니라 앞치마를 두른 엘디르의 모습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가게 안쪽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진혁이 형은요?”

“아, 진혁이는 주변 분점들을 관리하러 돌아보는 중이야. 아침 일찍 출발했으니까 조금 있으면 오겠다."

“분점이요? 벌써 분점이 생긴 거예요?"

“일단 3개. 워낙 장사가 잘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대훈 아저씨, 임진혁, 엘디르 그리고 모렛.

이렇게 모인 넷은 예전에 장난으로 말했던 술집을 정말로 창업해 버렸다.

듣기로는 윤동현도 가게에 지분을 가지고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창업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냥 아저씨의 장난인 줄 알았다.

'아마 술집의 술을 아저씨가 다 마셔버리는 바람에 망하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하며 불안해하기도 했 는데.

내가 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완전 대성공을 일궈냈다.

율라슈토(Yulasto)

마음껏 마시자는 엘프어를 가게 이름으로 정하고.

엘프주와 엘프 음식을 진짜 엘프가 가져다주는 술집.

처음에는 엘프라는 신비한 이미지를 이용해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화제몰이를 했다면.

지금은 엘프주 특유의 깊은 맛과 이색적인 음식들로 호평을 받으며, 나이를 불문하고 매니아들을 양산하는 추세였다.

모렛의 맥주 창고를 호시탐탐 노리던 장난스러운 모습과는 다르게, 아저씨는 철두철미하고 능숙한 장사 수완을 보여줬고.

연예인 뺨치는 신비함을 가진 엘디르와 귀여운 마스코트 모렛이 대중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며 승승장구했다.

유럽에 있었던 나에게도 알음알음 소식이 전해질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대단하네요. 아저씨. 이렇게 크게 성공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푸하하. 이놈아. 세상을 뒤흔드는

'아르엘 재단' 대표면서 겨우 술집을 보고 감탄하냐?"

“이거랑 그거는 또 다르죠. 정말

축하해요. 아저씨."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덕분 아니겠냐. 고맙다 이 녀석아."

아저씨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면서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도 약간의 쑥스러움과 훈훈함을 느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딸랑!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게 안으로 누군가 발을 들여놨다.

평범한 옷차림에도 여전히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랑하는 임진혁이었다.

"세진아!"

"형, 오랜만이에요."

임진혁도 아저씨와 비슷하게 이름을 부르며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반가움에 비례하듯 너무 강하게 끌어안은 탓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컥! 형. 숨 막혀요."

"하하. 미안. 너무 오랜만이라서."

앞서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임진혁도 반가운 얼굴로 우리와 인사를 나눴다.

그러던 중 또 하나 축하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형 축하해요. 얼마 전에 소식 들었어요."

"아아, 들었냐?"

임진혁은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풀어진 얼굴에서 행복한 감정이 줄줄 흘러나왔다.

“5개월이라고 했었나?"

“이제 6개월이다."

“와! 벌써 그렇게 됐어요? 저번에 봤을 때는 전혀 티도 안 났던 것 같은데."

얼마 전 결혼한 임진혁과 정아윤 사이에 임신 소식은 아저씨 사업 성공과 더불어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었다.

“결혼식 때 아저씨가 아윤이 손을 놓으면서 서럽게 울던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안 울었다니까!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랬어."

내가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자 아저씨는 발끈해 외쳤다.

"어? 근데 임신 6개월…… 결혼식은 아직 반년이 안 된 거로 아는데……”

“크흠! 큼.”

“…...”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임신의 비밀에 임진혁은 다시 한번 얼굴을 붉혔고, 아저씨도 불편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이 형도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뒤에서 할 건 다 한단 말이지.'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에 눈치가 보여서 빨리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 다 모일 수 있는 거예요? 가게는 어떻게 하시려고.”

“당연히 오늘은 휴업이지. 오랜만에 다 모이는 자리에 우리가 빠질 수 있나. 오늘은 간단히 재고 정리랑 장부 확인만 하고 끝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왠지 죄송하네요."

"죄송하긴 뭘. 나도 오랜만에 마음 놓고 마셔봐야지. 최근에 가게 관리하느라 제대로 못 마셨거든. 흐흐. 오늘은 모두 각오해야 할 거다."

아저씨의 무시무시한 선언에 모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세진아."

“네. 형."

“너 부길드장한테는 연락했냐?"

“…...”

임진혁의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했다.

이 모습을 본 아저씨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고, 임진혁은 정말로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 서율희 부길드장이 벼르고 있 는거 알지?"

"......”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 ♩∼♬∼♪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from 서율희

-길드 건물로, 지금 당장!

짧은 메시지에서 그녀의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하고 미세하게 몸을 떠는 사이, 옆에서 같이 화면을 확인한 아저씨가 다시 혀를 차기 시작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쯧쯧.”

잠시 고민을 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일단 길드 건물로 향하기로 했다.

“이엘, 아빠는 잠시 길드에 들렀다가 가야 할 것 같은데."

“율희 언니 만나러 가는 거예요? 그럼 저도 갈래요."

"으응? 아니. 아빠는 일 때문에 가는 거라...... 이엘은 저녁에 언니랑 만나도록 하자."

“으음. 그러면 알았어요."

아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길드에서 벌어질 일들을 이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엘을 아저씨에게 맡기고 임진혁과 함께 아르킨 길드 건물로 향했다.

****

도심의 중심부.

그중에서도 작지 않은 크기의 빌딩 입구에 적혀 있는 아르킨 길드의 문장.

오랜만에 오는 길드 건물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형, 같이 안 들어가요?"

“크흠. 나는 오늘 아윤이 산부인과 예약이 있어서."

임진혁은 애처로운 눈길을 외면하고 나를 건물 앞에 내버려 두고 혼자 떠나버렸다.

외로이 건물 앞에 남겨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1층에 설치된 보안 게이트를 발견하고 품 안의 지갑을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드에서 발급해 줬던 보안 출입증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쓱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근처에 근무하고 있던 입구 보안 요원에게 다가섰다.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그는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손님이시면 저쪽 안내 데스크로 가시면 됩니다.”

"그게 손님이 아니라 저도 여기 길드원인데요."

내가 길드원이라 밝히자 보안 요원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최근에 본 적 없는 사람이 자신을 길드원이라 밝히자 수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만, 성함과 직책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이름은 전세진이고요. 직책은......”

“…...?”

“여기 길드장인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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