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60화
82. 마지막 이야기 (1)
'아르엘 재단'이 만들어지고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웅성웅성
"나왔다!!"
"오오오오!!"
“여기 좀 봐주세요!"
-찰칵찰칵!
나와 이엘이 모습을 드러내자 공항에 모인 엄청난 인파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부터, 눈에 띄는 색상의 환영 문구를 들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위치한 경호 요원들까지.
어수선하고 불편한 분위기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짓기 위해 얼굴 근육을 열심히 움직였다.
벌써 수십 번 겪은 상황인데도 이 놈의 얼굴 근육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내가 미소를 짓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짓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이엘은 꾸밈없이 순수하고 밝은 미소로 사람들의 환호성을 끌어냈다.
처음 아르엘 재단이 만들어졌을 때는 아직 품 안에 넣고 다니고 싶은 아이였는데.
어느새 쑥쑥 자라서 지금은 순수한 소녀가 아닌 아름다운 숙녀의 분위기를 풍겼다.
'자라면 자랄수록 아르엘 님을 닮아가네.'
약간은 희미해진 아르엘의 자상하고 포근한 미소가 이엘과 겹쳐 보였다.
예쁘고 건강하게 자란 딸의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기다린 기자들을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짧게 질문을 받았다.
“아르엘 재단의 공식적인 첫 유럽 순방은 어떠셨습니까?"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모두 친절하게 저희를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신 각국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아직 아르엘 재단의 유럽 지원이 부족하다는 불만의 현지 여론이 많은 거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물론 그런 소수의 여론도 존재했습니다만, 대부분 저희를 지지해 주고 신뢰를 보내주었습니다. 큰 갈등이나 어려움은 없었으니 과도한 추측은 자제해 주셨으면......”
기자들의 정석적인 질문에 미리 생각해뒀던 대답들을 술술 풀어놨다.
표정 관리는 아직 어색해도 이런 형식적인 인터뷰는 자면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나에게 쏟아지는 딱딱한 질문들과는 달리, 옆에 있던 이엘에게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질문이 쏟아졌다.
“유럽에서도 아르엘 재단의 상징, 이엘 씨에 대한 인기가 높은데. 직접 가보니 어떠셨습니까?"
“생각보다 많은 분이 반겨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좋은 추억이 된 것 같아요."
“영국의 유명 축구선수가 직접 찾아와 호감을 표했다는 소식은 사실입니까?"
“아...… 그건 그냥 인사만 나눈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 기자들과 질문을 마무리했을 때도 이엘에게는 계속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기자들의 질문을 끊고 이엘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몇 기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따라오려 했으나 금방 경호 요원에 의해 제지됐다.
"이엘 언니, 사인 좀 해주세요!”
“언니 사진 한 장만!"
기자들에 밀려 가까이 오지 못했던
여중생들이 다가와 사인을 요청했다.
"아빠. 잠시만요."
이엘은 나와 경호 요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중생 팬들에게 직접 사인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어줬다.
그 뒤로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에게도 이엘은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사인을 해주며 사진을 찍어줬다.
경호 요원들은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져 적절히 주변을 통제했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해 준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나서야 겨우 몰려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고마워요. 언니! 사랑해요!"
팬들의 격렬한 인사를 받으며, 나와 이엘은 공항에서의 길고 긴 환영식을 끝낼 수 있었다.
공항 입구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이혜린이 바로 우리를 맞이했다.
“수고했어, 오빠. 이엘도 고생 많았어. 얼른 차에 타자."
"네. 이모."
오랜만에 만난 이혜린을 보며 활짝 미소 짓는 이엘.
반면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차량이 출발하고.
앞 좌석에 자리한 이혜린이 뒷좌석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또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아...... 이런 쓸데없는 공항 입국 같은 거 좀 안 하면 안 돼? 그냥 균열 입구로 확 들어오면 깔끔하고 좋은데."
“이런 것도 다 재단의 이미지를 위해 해줘야 하는 거야. 그리고 이엘은 별로 싫은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저는 재미있었어요. 헤헤."
나와는 다르게 활짝 웃는 이엘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와는 다르게 이엘은 이쪽으로 완전 체질인 것 같았다.
이혜린은 이런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화제를 바꿔 다시 질문했다.
“유럽 순방은 어땠어?"
“말도 마라, 그쪽 지원 좀 늘려달라고 어찌나 징징대던지. 우리도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해 줘도 말을 못 알아들어."
그때의 진절머리나는 상황을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고 보니 뭐, 그 유명한 축구선수였던가? 그 사람 때문에 문제 생길 뻔했다고……”
“말도 하지 마. 그 개......크흠. 그 나쁜 놈이 어찌나 우리 이엘한테 집적거리던지."
유럽 순방 중에 자신의 유명세를 믿고 다가와 행패를 부리던 인기 축구선수를 떠올리며 분노를 삼켰다.
서슴없이 이엘에게 다가와 신체접촉을 하고 말을 거는 모습에 내 이성이 정말 폭발해버릴 뻔했다.
“진짜 엘디르, 진혁이 형, 아저씨까지 다 불러와서 본때를 보여주려다 참았다니까."
아마 그때 내가 참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켰으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나쁜 사람인 것 같지는 않던데……”
"아냐. 이엘 아빠 말 잘 들어. 모르는 남자들은 다 나쁜 놈들이니까 절대 믿으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요. 아빠.”
내 말에 이엘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에 불쾌했던 감정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대견한 마음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엘은 내 손길에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이혜린과 다른 사람이 있어서 많이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 이엘은 이렇게 다른 사람 앞에서 애 취급하는 걸 많이 부끄러워했다.
나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면서 금방 손길을 거두었다.
“혜린아,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설마 뭐 또 인터뷰나 행사 일정 잡아놓은 건 아니지? 그러면 나 진짜로 이엘 데리고 도망갈 거야."
“그런 일정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잠시 회장님만 뵈러 가는 거니까. 어휴! 오빠는 재단 대표가 몇 년째인데 변하질 않네. 그러니까 매번 서율희 부길드장이 불평불만이지."
"......"
그녀의 묵직한 팩트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뒤에 번거로운 일정이 없다는 사실에 조용히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미래 그룹 빌딩에 도착한 우리는 주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비서실장과 다른 직원들과도 익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회장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 이엘!"
"지아 언니!"
그곳에는 강유환 회장뿐만 아니라
신지아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지아를 발견한 이엘이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고, 그녀는 그런 이엘을 꼭 껴안으며 고생했다고 등을 쓰다듬어줬다.
이엘과 신지아가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번에는 고생 좀 했습니다."
“왔느냐. 수고했다.”
회장과 나는 건조하게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회장의 눈빛은 신뢰와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협의는 잘 끝났느냐?”
“네, 약간 잡음이 있긴 했는데, 원래 저희가 계획한 물량을 공급하기로 합의했어요.”
“다행이구나. 안 그래도 다른 대륙 쪽에서도 말이 많은데, 이번 협의로 어찌 수습될 것 같구나.”
전 세계의 각성자들을 무력화시키는 '티머시 증후군’.
그리고 그 불치병의 유일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는 '아르엘 재단'이었기에
여러가지로 잡음이 많았다.
처음 재단이 생겨나고 1년 동안은 국내의 환자들을 위주로 치료에 집중했다면.
나머지 2년 동안은 전 세계의 환자들로 그 범위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이런 전 세계적인 요구에 발맞춰. 처음에는 한 달에 7, 8명 정도를 치료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지금은 수 백 명을 치료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거기다 이엘과 내가 직접 환자와 만나지 않아도, 재단에서 만들어내는 생명의 문양이 담긴 마정석과 특수한 회로만 있다면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두 가지.
첫째는 환자의 상태에 맞춰 적절히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의 힘이 필요한지 몰랐기 때문에 힘의 낭비가 있었다면.
지금은 여러 사례와 축적된 데이터를 이용해 환자의 상태에 따라 적절히 그 힘을 분배할 수 있어졌고.
그 결과 이엘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게 됐다.
둘째는 다른 엘프들도 아주 미약하지만, 생명의 문양을 다룰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세계수의 영향인지, 생명의 샘의 영향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이엘 뿐만 아니라 시르엘이나 피렌느, 엘디르도 어느 정도 생명의 문양을 다룰 수 있게 됐다.
이엘처럼 강력한 힘을 내지는 못해도 충분히 도움이 될만한 정도였다. 이렇게 이엘과 엘프들이 생명의 문양을 마정석에 적절히 담아주면.
나와 신지아가 연구해 만들어낸 회로를 이용해 누구나 티머시 증후군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는 미래 그룹의 독점적인 투자 지원이 있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이득을 본 상태였다.
아직 전 세계에는 치료받지 못한 환자가 넘쳐났고.
많은 국가가 아르엘 재단이 만들어 내는 마정석과 회로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 모든 일이.
3년 만에 아르엘 재단이 외교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게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재단의 대표를 맡은 나로서는 그저 귀찮은 일들의 연속일 뿐,
재단이 성장한 것이 전혀 기쁘거나 달갑지 않았다.
애초에 재단 대표도 말도 안 되는 회장의 억지로 맡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드디어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넌지시 재단 대표 자리에 대해 말을 꺼냈다.
"회장님."
"......?"
“이제 재단도 안정화됐고, 마정석과 회로 생산도 순조로우니 저는 슬슬 대표에서 물러날까 하는데…….”
"허어! 이렇게 늙은 나도 아직 일하고 있는데. 젊은 놈이 벌써 쉴 생각을 한단 말이냐?"
“크흠. 쉬는 게 아니라. 대표는 좀 더 믿음직한 사람에게 맡기고, 저는 다른 일을 하겠다는 거죠. 예를 들면 지아 씨랑 회로 연구에 더 집중한다든가, 아니면 마정석 생산 쪽에..….”
내가 대표직을 물러나기 위해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니 회장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 세진이 네가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그렇게 힘든 건 아니고,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음음. 그럴 수 있지. 그럼 대표 자리에 물러나는 대신 내가 추천하는 자리를 한번 맡아 보겠느냐?"
“네! 한번 해보겠습니다. 어떤 일을……?"
내 물음에 강유환 회장은 조용히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책상과 복잡한 서류들. 그리고 강유환이라는 이름이 적힌 회장 명패가 올려져 있었다.
“.......”
"어떠냐? 한번 해보겠느냐? 의외로 적성에 맞을지도 몰라."
“……그냥 제가 재단 대표 계속하겠습니다."
“허허. 아쉽구먼. 고생한 너를 위해 좀 더 쉬운 일을 맡기려고 했는데. 아쉬워."
그는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는 위로의 말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고, 나는 고개를 숙이며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