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57화 (257/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57화

81. 생명의 힘으로(5)

"흐으음......"

나는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아 두꺼운 책을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지금껏 문양을 연구하는 데 사용했던 노트들과 여러가지 책들이 책상 위를 가득 채운 상태.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스승님이

남겨두고 떠난 '이리스의 저주 치료법'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던 내용이었기에 그 내용을 빠삭하게 암기할 정도였다.

다만 한 부분.

생명의 문양에 관련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서 큰 진전을 이뤄내지 못 했었는데.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엘프 마을에 초대를 받아 세계수의 정령을 만나고 온 것이 벌써 2주일 전이다.

그곳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곧바로

'이리스의 저주 치료법' 연구에 집중했다.

생명의 문양과 관련된 부분은 제외하고 완벽하게 치료법을 구현해내기 위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결과.

드디어 오늘 치료법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끝났다.

물론 나 혼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치료법이지만, 내가 목표했던 성과는 충분히 달성했다.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있느라 굳어 있던 몸을 풀면서 시간을 확인했 다.

시계는 오후 1시를 살짝 넘어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간 상태였다.

그사이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단 간단하게나마 뭘 좀 먹으러 갈까?'

배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나는 책상 끝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의 전송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 보냈던 메시지에 금방 답장이 돌아왔다.

답장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을 빠져나와 1 층으로 향했다.

1층 거실에는 아이들이 점심 식사를 끝내고 포만감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부엌에는 아주머니와 시르엘이 막 식사 정리를 끝내고 있는 참이었다.

방에서 내려온 나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세진이 내려왔구나. 미안해서

어쩌나, 혹시 방해할까 봐 우리끼리 먼저 점심을 먹어버렸는데, 금방 차려줄까?"

"아뇨. 괜찮아요. 저 빼고 다 점심 식사 끝낸 거죠?"

“응. 아이들도 다 먹었고, 진혁이랑 아윤이는 방금 같이 나갔어."

“세진 님. 간단하게 차랑 과일이라도 드릴까요?"

“금방 나가야 할 것 같아서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아주머니와 시르엘에게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 거실에 있는 아이들에게 향했다.

퓨이와 모렛은 서로 기대듯이 붙어 앉아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낮잠을 즐겼고, 티아는 세이를 품 안에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티아 품 안에 있던 세이가 내 기척을 느꼈는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지금 이 상태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눈을 감고 티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엘은 티아의 반대편 쪽 소파에서 몸을 기대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뱉었다.

자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깨우기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톡․ 톡․ 톡.

"이엘? 이엘?"

"으으응...... 으, 아빠?"

꿀 같은 낮잠을 자고 있던 이엘은 얼굴을 찡그리며 억지로 눈을 떴다.

이리저리 흐릿한 눈동자를 흔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안아달라는 투정에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엘을 안아줬다.

따뜻한 내 품이 기분이 좋은지 이엘은 만족스러운 고양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귀여운 잠꾸러기가 다시 잠들기 전에 나는 재빨리 말을 꺼냈다.

“이엘. 아빠랑 같이 잠시 나갔다가 올래?"

"으음...… 지금이요?"

“응, 지금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 는데, 이엘이 꼭 좀 도와줬으면 좋겠거든."

이엘은 외출이라는 말에 조금은 잠이 깼는지 슬며시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아빠랑 저랑 둘만 나가는 거예요?”

"응."

"헤헤. 좋아요."

놀러 나가는 게 아니었지만, 이엘이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니 약간 다른 아이들에게 미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엘이 외출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사이, 나는 아주머니와 시르엘에게 남아 있는 아이들을 부탁했다.

****

나와 이엘이 균열을 빠져나와 가까운 도로에 도착하자, 딱 맞춰서 고급 승용차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앞 좌석에서 내린 검은 정장의 남자가 깍듯이 내게 인사를 해 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진 님."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죠?"

“아닙니다. 바로 차에 타시죠.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신 곳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나와 이엘을 위해 뒷좌석의 문을 열어줬다.

내 뒤에 숨어 조금 낯을 가리던 이엘은 그 모습을 보고 차에 올라타기 전에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이엘의 귀여운 인사에 표정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딱딱한 남자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나와 이엘이 뒷좌석에 올라타고 차량은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엘은 오랜만에 바깥 외출이 신나는지, 창문에 달라붙어 시내를 구경하기 바빴다.

신이 난 이엘의 장단을 맞춰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량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커다란 빌딩 입구 앞에는 이혜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그녀를 알아본 이엘이 반가움을 표출했다.

"이모!"

"오랜만이야. 이엘!"

이혜린은 자세를 낮춰 이엘을 꼭 안아줬다.

반가워해 주는 이엘의 모습이 기쁜 지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가득 했다.

나는 딱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살짝 서운함을 나타냈다.

“나도 왔는데, 너무 이엘만 반가워 하는 거 아냐?"

"반가워하기는.…… 오늘 오빠가 갑자기 연락하는 바람에 일정 조절하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크흠.”

괜히 말을 꺼냈다가 나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잠시 나를 째려보던 이혜린은 이엘의 손을 잡고 앞장섰고, 나도 그 뒤를 따라 건물 입구로 향했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곧바로 건물 최상층으로 안내를 받았다.

이엘은 창문으로 보이는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정신이 팔려 한참동안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중간에 많은 직원의 인사를 받고, 오랜만에 만나는 비서실장을 만나고 나서야 커다란 방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똑․똑․똑.

“회장님. 전세진 길드장이 도착했습니다."

- 그래. 얼른 들어와.

우리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방 안쪽에서는 곧바로 강유환 회장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혜린이 문을 열자 강유환 회장의 커다란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회장님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읽던 강유환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이해 줬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뭐. 늙은이가 안 죽고 있으면 된 거지. 별일 있겠어."

강유환 회장은 자신을 늙은이라 칭하며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누가 봐도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주 정정한 모습이었다.

그때 스승님의 치료 약을 전해준 뒤로 계속 회춘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 인사에는 무심하게 대답을 끝낸 회장은 이엘에게 시선을 옮기며 자상함과 반가움이 가득가득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허허. 이엘도 함께 왔구나.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구나.”

"안녕하세요."

“그래그래, 다리 아프겠다. 어서 자리에 앉자꾸나.”

강유환 회장은 이엘을 이끌고 손님용 자리로 향했다.

아까부터 뭔가 계속 차별을 받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 말 없이 뒤따랐다.

강유환 회장과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와 간식이 도착했다.

특히 이엘을 위해 미리 준비를 해 뒀는지 과일 쥬스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케이크를 내왔다.

살짝 눈치를 보던 이엘은 케이크를

맛보자마자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볼이 가득해질 정도로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회 장은 간식을 내온 직원에게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내게 말했다.

“다행히 준비한 간식이 이엘의 마음에 들었나 보군. 밖에 미리 말해 놨으니 갈 때 좀 챙겨가도록 해라.”

"저…… 집에 아이들이 좀 많아서……”

“다른 아이들 몫도 챙겨놨으니 걱정 마라."

"흠흠. 감사합니다. 회장님."

강유환 회장은 자기 앞에 놓인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갑자기 연락한 덕분에 오늘 일정을 몇 개나 취소했는지.”

“급하셨으면 그냥 전화로 통화했어도 괜찮았는데.”

"......"

"죄송합니다."

그의 엄한 표정에 나는 금방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것이냐?"

“저번에 미궁을 공략하기 위해 지원받았을 때 기억나시죠?"

"물론 기억나지. 솔직히 이렇게 빨리 미궁을 공략할 줄은 몰랐는데.”

회장은 그때를 잠시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 했던 약속. 이제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연락 드렸습니다.”

"약속?"

내 말에 다시 한번 기억을 되짚던 강유환 회장은 뭔가를 생각해내고 눈을 크게 떴다.

“티머시 증후군의 치료법! 설마 그 실마리를 찾은 것이냐?"

“실마리를 찾은 게 아니라.”

"......?"

“치료법을 완전히 찾았습니다."

"......!!"

내 말에 그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처음 보는 강유환 회장의 모습을 감상하며 나는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정말…… 정말로 치료법을 찾아낸

것이냐?"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꽤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해요. 그때 회장님이 마신 치료제를 건네준 분이 알려준 방법이거든요."

"오오!"

내 추가 설명에 강유환 회장은 감탄을 토해냈다.

치료제의 효능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신뢰를 보내는 듯했다.

“저도 최근에 알아낸 거라서 준비가 많이 필요한데, 그것 때문에 좀 부탁을 드리려고요."

“뭐든지 말해봐. 돈? 희귀한 재료?

아니면 전문가가 필요한 건가?"

"아뇨. 치료법 자체에는 큰돈이나, 특별한 재료는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치료법을 시험해 볼 지원자가 필요해서요. 혹시 회장님이 좀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드디어 내가 찾아온 이유를 깨달은 강유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자는 몇 명이나 필요하지?"

“5명? 그 정도면 확실히 시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알았다. 최대한 빨리 지원자를 모집해 너에게 전달해 줄 수 있도록 하겠다. 추가로 더 필요한 건?"

"흐음."

더 필요한 게 없냐는 회장의 질문에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이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엘은 어느새 케이크를 다 먹고 빈 그릇을 아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주신 케이크랑 맛있는 간식이 많이 있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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