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56화
81. 생명의 힘으로(4)
이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루나르엘은 얼굴을 내 쪽으로 향했다.
"죄송해요. 세진 님. 다른 일행분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계셨을 텐데……”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일행들과 여행을 즐기러 온 것이 주 목적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내가 대답을 하기 전,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할머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이엘. 우리는 지금부터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향할 거란다."
"저도 같이요?!"
"물론이지. 세진 님과 이엘을 모두 만나고 싶다고 나에게 말씀을 전해 주셨단다."
"와아아……”
이엘은 세계수가 있는 곳에 간다는 말에 설렘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가 있는 곳은 모든 엘프들이 신성하게 여기고 꿈꾸는 장소지만, 엘프 마을의 장로라고 할지라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희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엘디르와 엘프 경비대원들은 다시 한번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와 이엘, 루나르엘을 보호하듯 길을 나섰다.
이엘이 느끼기에도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마을을 빠져나와 숲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굳어진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는 경비대원. 그와 상반되게 이엘은 나와 붙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을 것 같아 이엘의 분위기에 맞춰 나도 붙잡은 손을 신나게 흔들었다.
점차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빼곡해지고, 길은 갈수록 험해졌지만 이엘은 불 평하거나 힘든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꿋꿋하게 움직였다.
“이엘, 아빠가 업어줄까?"
"아뇨…… 아직은 괜찮아요."
긴 여정에 이엘의 상태가 살짝 걱정되려고 할 때쯤.
앞쪽에 있던 루나르엘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에 맞춰 나와 이엘, 경비대원들도 모두 멈춰 섰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일행의 앞으로 나서더니,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에 있던 이엘의 상태를 살폈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이엘은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친 기색이 느껴지는데도 억지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스러웠다.
루나르엘은 그 모습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양손을 앞에 모으고 눈을 감아 집중했다.
나를 포함한 경비대원들과 엘디르는 숨죽이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엘도 이때는 긴장했는지 내 손을 힘줘서 꽉 잡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루나르엘은 나와 이엘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분께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네요. 가시는 방법은 알고 계시죠?"
"이번에도 나머지 분들은 여기 계시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고는 약간 긴장한 표정의 이엘
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는 나머지 일행과 잠깐 눈인사를 나누고 이엘의 손을 다잡았다.
"이엘. 그럼 가볼까?"
"응......"
이엘은 떠나기 전 루나르엘과 경비 대원들에게 손을 흔들어줬고, 그들도 화답하듯 웃으며 우리를 배웅해 줬다.
뒤에 보이는 일행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어두컴컴한 숲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약간 음산한 분위기에 이엘은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는 최대한 이엘이 불안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계속 숲길을 나아갔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예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으며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상했다. 그리고 내 예상에 딱 맞춰서 우리들의 눈앞에는 빛으로 가득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모습에 약간 반가움을 느끼던 와중에 공터에는 곧바로 변화가 생겨났다.
-드그그그그극.
-뿌드드드득!
저번보다 훨씬 빠르게 땅이 갈라지고 나무뿌리가 움직이더니 통로가 생겨났다.
마치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리에 딱 달라붙은 이엘을 이끌고 거대한 통로 입구로 향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샘과 비슷한 기운을 내뿜는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몽롱한 기분과 함께 잠시 정신을 잃었다.
****
"......"
몽롱한 기분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온통 새하얀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곧바로 이엘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아빠랑 티아 공주님, 퓨이랑 같이.……”
- 하하하! 재미있었겠네. 나도 그렇게 다 함께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여기에 같이 놀러 오면 안 될까요?"
-그러면 좋겠는데. 여기는 쉽게 올 수 있는 곳 아니라서.
이엘은 예전에 봤던 어린 엘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 어?! 일어났구나?
"아빠!"
내가 일어난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이엘이 휙 하고 달려왔다.
"이엘, 괜찮니?"
“네. 세계수의 정령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이엘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리고 뒤늦게 세계수의 정령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어...... 잘 지냈어?"
-네 덕분에 이제는 좀 살만해 졌거든. 아직도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
세계수의 정령이 팔을 살짝 휘두르자 주변에 웅장한 기운이 출렁거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윗주머니에서 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뽀로로롱!
작은 요정의 등장에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니? 너 언제 거기 들어가 있었어?"
-......!!
위니는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양팔을 좌우로 막 흔들었다.
귀여운 투정에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섭섭함이 조금 풀렸는지 위니는 심술 난 표정을 풀고 세계수의 정령에게로 날아갔다.
-너도 수고가 많았어.
-......!
세계수 정령의 칭찬에 위니는 아주 기쁜지 사방으로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령 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튼, 고마워. 정말로 네 덕분에 엄청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뭐, 나한테도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옆에 있는 이엘에게 슬쩍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그건 그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그렇게 되나?”
-물론이지. 나는 인간이 아니라 딱딱하게 거래를 주고받을 생각은 없어도. 은혜는 꼭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딱히 대가를 받으러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갚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었었기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뭐. 거창하게 인간들이 좋아할 만한
금은보화가 있는 건 아니고. 지금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만한 것을 줄게.
“그게 무슨……?"
모호한 말에 내가 입을 제대로 열기도 전에 세계수 정령을 중심으로 신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생명의 샘에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가 새하얀 공간을 뒤덮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에너지들은 천천히 한 곳으로 모여들더니 아주 작고 푸른 빛무리를 형성했다.
은은한 빛을 내뿜던 그 빛무리는 정령의 손짓에 따라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어찌 손 쓸 틈도 없이 이엘의 몸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어엇?!"
"앗!"
-......!!
나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위니도, 빛무리를 받아들인 이엘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이엘에게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상황에 나는 정령을 향해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잠깐, 잠깐, 조금만 기다려봐.
"......?"
-저길 봐봐. 예쁘지?
정령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두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이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아……."
-......!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들어낸 것을 바라보며 이엘은 감탄과 기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위니도 그것이 신기한지 이엘의 어깨에 내려앉아 멍하니 바라봤다.
이엘은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정확히 모르는 눈치였지만, 나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봤다.
'생명의 문양!'
생명의 샘이나 위니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엘의 힘만으로 생명의 문양을 구현해 내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다급히 정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뭐긴 뭐야. 네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 아냐?
세계수의 정령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능글맞게 웃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일까,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 힘을 왜 이엘에게 준거야? 나한테 줬어도 됐잖아?"
-쯧! 미안하지만 이건 아무나 다루는 힘이 아니야. 너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잖아?
"......”
이번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생명의 샘을 살피면서, 이 문양의 힘이 쉽게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엘이 생명의 기운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아쉬워하는 내 모습을 보고 정령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뭐.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어. 나랑 같이 한 100년 정도만 여기서 수련하면 이 힘을 다룰 수 있을 거야.
“...… 그건 사양할게."
-크크큭, 그건 아쉽네.
나를 놀리던 세계수의 정령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면서, 진지하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 이건 어떻게 보면 축복이자, 저주나 다름없는 힘이니까. 아르엘이나 이엘이 그랬던 것처럼.
".….."
-이엘은 불완전한 능력의 상태 때문에 고생했지만, 다행히 네가 노력해준 덕분에 완전히 능력을 개화할 수 있었던 거야. 나는 약간의 물꼬만 터준 것뿐이고.
그의 설명을 이해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을 지켜본 세계수의 정령은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으으윽!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피곤하네. 미안하지만 나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벌써?"
쉰다는 말에 이엘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세진 덕분에 위기는 벗어났어도, 아직 회복해야 할 부분이 많거든. 아마 한동안은 잠을 자야 할 것 같아.
“얼마나 자야 하는데요?"
-한 4, 5백 년 정도?
"으으응. 그럼 영원히 못 보는 거네요."
이엘이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세계수의 정령은 과장되게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에 내가 보고 싶으면 가끔 생명의 샘을 찾아가 말을 걸어줘. 꿈속에서라도 이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요. 꼭 그렇게 할게요.”
두 손을 꽉 쥐며 결심하는 이엘.
세계수의 정령은 그 모습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이엘보다 더 작은 몸집의 정령이었지만, 그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가봐. 루나르엘에게 나 대신 안부 좀 전해주고,
정령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새하얀 공간은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이엘이 세계수의 정령에게 뭐라 소리친 것 같았는데,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흐릿해지는 공간처럼 의식도 점차 아득해지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정령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려 퍼졌다.
-이엘을 잘 보살펴줘. 앞으로 네 인생에 행운이 가득하길 기도하고 있을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