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53화
81. 생명의 힘으로(1)
다사다난했던 길드원들과의 라이브 방송이 끝난 뒤.
너튜브 채널뿐만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해당 라이브 방송은 여러 가지 의미로 레전드 취급을 받았다.
길드 설립 이후로 계속 이어져 온
파격적인 행보에 비해서 알려진 정보가 워낙 적었기에 많은 사람의 기대를 모았는데, 방송의 내용과 재미가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계속 방송 출현이나 인터뷰를 거절하길래, 길드 분위기 굉장히 빡빡하고 재미없을 줄 알았음. 근데 내가 생각했던 거랑 완전 딴판임.
-조금 규모가 큰 길드 보면 재수 없는 놈들 엄청 많은데, 여기는 분위기도 좋고 모두 호감인 듯.
-또 방송해 줬으면 좋겠다. 낚시꾼 아재 반응 후기도 좀 올려줘요.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함. 그날 라이브 방송 마지막쯤에 그 어색한 분위기 ㅋㅋㅋㅋ
길드원 한 명 한 명 모두 재미있고 호감이 간다는 내용이 대다수를 이뤘고, 주기적으로 방송에 불렀으면 좋겠다며 다음 방송을 기다리는 사람도 생겨날 정도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방송에 출연했던 길드원들은 이렇게 뜨거운 반응에 굉장히 놀라면서 내심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아윤, 선우 남매는 학교와 주변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곤란하다는 하소연을 했다.
둘 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주변에서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생겼다며 어색한 반응을 보였다.
모두 입으로는 힘들다, 어색하다, 곤란하다고 불평하면서도, 내심,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거기다 다음 방송에 대해서 넌지시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
한편, 성공적인 라이브 방송을 끝낸 오연우도 요즘 최고로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특히 부모님께서 직접 라이브 방송을 보시고.
'저렇게 대단하신 분들이랑 알고 지냈던 거니?'
라고 말씀하시며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 좀 잘 부탁드린다고 나에게 선물까지 사서 보내시기도 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나라의 모든 이목이 우리에게 쏠리자, 미궁을 공략했을 때보다 더 많은 방송 출현과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길드의 거의 모든 연락 수단을 통해서 쏟아지는 러브콜에 서율희와 밑에 직원들은 답장을 보내기는커녕 대놓고 무시를 하는 중이라고.
이런 와중에 나는 다른 중요한 일을 핑계로 호숫가에 틀어박혔다.
****
-뽀로로롱!
-퐁퐁퐁!
물이 가득 차오른 생명의 샘 위를 위니가 행복한 표정으로 날아다녔다.
주변에는 샘물이 말라붙어 쓸쓸하고, 황폐한 느낌은 싹 사라지고 촉촉하고 생명력 넘치는 기운이 넘쳐났다.
이곳에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온몸에 그 기운들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 옆에는 이엘과 시르엘이 나란히 앉아 생명의 샘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위니가 미궁에서 획득한 생명의 문양으로 샘을 되살린 뒤,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온 두 엘프였다.
“정말 대단해요. 세진님, 이렇게 강한 생명의 힘을 모여들다니……"
시르엘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다는 표정을 한 채, 나와 생명의 샘을 번갈아 쳐다봤다.
반면에 이엘은 훨씬 편안한 표정과 자세로 샘과 그 위를 날아다니는 위니를 바라봤다.
생명의 샘이 되살아난 이후로 이엘은 완전히 건강을 되찾아 나의 근심 걱정을 털어낼 수 있게 만들어 줬다.
오늘 여기에 이엘을 데려온 이유는 생명의 샘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건강해진 이엘을 '그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유가 컸다.
'아르엘 님. 나무 정령님, 이엘 많이 건강해졌죠?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좋은 곳에서 편안히 푹 쉬세요.'
나는 머릿속에 아르엘과 나무 정령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그들이 그리워져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이엘이 작은 손으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 아빠.”
"응? 이엘. 왜 그러니?"
“저 샘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요.”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아픈 건 아닌데.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따뜻해지는 것 같아요."
묘한 표정을 짓는 이엘의 모습에 내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자, 옆에 있던 시르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켰다.
"세진 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무래도 이엘이 언니와 비슷한 능력을 깨우고 있는 것 같아요."
"아르엘 님과 비슷한 능력?"
“네. 저도 언니도 이엘과 비슷한 모습일 때 그 능력을 깨우치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시르엘은 이엘을 살짝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런가요?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죠?"
“후훗, 네. 정말이에요."
“하아…….”
몇 번이고 시르엘에게 확신을 받은 뒤에야 나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세진 님, 최근에 매일 여기에 들리고 계시죠?"
“네. 개인적으로 제가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서."
위니의 힘으로 생명의 샘은 완전히 되살아났지만, 아직 생명의 문양에 대해서는 아직도 진전이 없었다.
최대한 여유를 가지고 서두르지 않으려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는 여기 오실 때마다 이엘을 함께 데려와 보세요."
"이엘이요?"
"네. 이엘이 새로운 능력을 완전히
깨달으려면 여기에 자주 오는 게 좋거든요. 그리고 어쩌면 이엘이 세진 님이 하시려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시르엘의 설명을 듣고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옆에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이엘이 내 한쪽 팔에 달라붙었다.
“저도 아빠랑 같이 여기에 오면 안 돼요?"
“이엘은 여기에 오는 게 좋아?"
"으음. 여기 있으면 엄마 생각도 나고, 나무 정령님 생각도 나서 좋아요. 그리고 아빠랑 같이 있는 것도 좋고요. 헤헤."
이엘이 볼을 살짝 붉히면서 방긋 웃어 보이자,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귀엽고, 예쁜 미소를 짓는 딸의 부탁을 세상의 그 어떤 아빠가 거절할 수 있을까?
"알았어. 그럼 매일 나랑 같이 여기에 오는 거야. 나중에 재미없다고 혼자 도망가면 안 돼?"
"와아! 고마워요. 아빠, 절대 안 그럴게요."
"어이쿠! 이제 이엘도 다 커서 한 번에 못 안겠네.”
"헤헤. 아직은 괜찮아요.”
이엘은 행복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기분 좋은 묵직한 충격에 앓는 소리를 냈다.
시르엘은 나와 이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
시르엘의 권유대로 이엘과 생명의 샘에 출근 도장을 찍은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이엘은 매일 나를 따라 생명의 샘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엘은 몇 시간 동안 생명의 샘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위니와 계속 장난을 치며 놀기도 했다.
능력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는 조급함이나 압박 같은 것은 크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나도 마음이 편했다.
반면에 나는 살짝 조급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생명의 문양으로 이 샘을 되살리기
전부터, 문양의 힘과 스승님이 남긴 티머시 증후군 치료법이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는데.
제일 중요한 생명의 문양을 해석하는 일에 애를 먹고 있어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완전 맨땅에 머리를 박는다는 기분으로 덤벼들었음에도 작은 해석의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이전에는 몰라서 답답했던 상황이라면, 지금은 알고 있는데도 사용을 못 하니 더욱 답답한 상황이었다.
“아빠? 힘들어요?"
"아니야. 아빠 괜찮아."
"이거 드세요."
이엘은 내가 계속 답답한 표정을 짓자 걱정이 됐는지, 집에서 가져온 사탕 하나를 내 입안에 넣어줬다.
"맛있죠?"
“응. 이엘이 줘서 그런지 더 맛있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엘은 배시시 웃음을 짓다가 다시 사탕을 꺼내 위니에게도 나눠줬다.
잠시 사랑스러운 이엘과 위니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급할 건 없으니까. 너무 답답하게 생각하지 말자.'
사탕을 우물거리던 나는 이엘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엘은 여기 온 뒤로 뭔가 달라진 것 없니?"
그동안 일부러 부담감을 주기 싫어서 하지 않았던 질문인데, 기분 전환 겸 가볍게 물어봤다.
내 질문을 받은 이엘은 한동안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잠시 후 아주 모호한 대답을 내놨다.
“으음. 잘 모르겠어요.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네. 그냥 위니랑 논 것밖에는 잘 모르겠어요."
이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시르엘의 말을 듣고 약간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이엘의 말에 내심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겉으로는 절대로 그런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이엘을 진심으로 칭찬해 줬다.
“잘하고 있네. 이엘이 원하는 대로 계속 그렇게 하면 돼."
다행히 이엘은 내 칭찬에 힘을 얻은 표정으로 직접 위니와 노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의기양양하게 나서는 이엘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나는 편안한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위니가 생명의 샘 위로 날아가 빙빙 돌면, 이엘은 그 옆에서 팔을 크게 흔들었다.
"......?"
술래잡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위니의 움직임에 따라 팔을 흔드는 모습이 딱히 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
"꺄하하. 너무 세게 하면 안 돼!”
이엘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하기 힘든 아이들의 놀이에 내 표정이 점점 미묘해지던 그 순간.
나는 아이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흐름을 발견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것은...…?!'
처음에는 몰랐는데 집중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아이들을 중심으로 생명의 샘 주변의 기운들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생명의 샘을 중심으로 퍼져나오는 기운들로 마치 물놀이를 하듯, 서로에게 퍼붓는 중이었다.
'이걸 왜 지금 눈치챘을까?'
처음 이엘을 데리고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곰곰이 되짚던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엘은 본능적으로 이 기운들을 다스리는 법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내가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삽질을 하고 있던 사이, 이엘은 위니와 함께 차근차근 능력을 각성시켜 나갔던 것.
진실을 깨달은 나에게 더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엘과 위니를 중심으로 울렁이는 기운에 반응하듯, 샘 중앙의 생명의 문양도 작게 공명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반응하지 않던 문양이었는데, 이엘과 위니의 놀이에 아주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로 기쁨과 혼란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찰나.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기운을 감지했다. 호숫가를 둘러싼 균열 밖에서 부르는 기운이었다.
이곳으로 찾아와 나를 찾을 만한 존재는 딱 한 명뿐이었기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생명의 샘이 있는 땅밑을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이제 많이 익숙해진 거대한 새들이 숲 위를 빙빙 돌며, 특유의 울음소리로 방문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