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47화
79. 미궁의 끝 (4)
계속된 기자회견에서 엘디르에게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엘프에게 집중된 만큼, 엘디르에 대한 취재진의 열기도 뜨거웠다.
“엘프는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한국의 음식을 맛보셨는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 음식이 있으셨습니까?"
“아르킨 길드와 관계는 계속 이어가실 겁니까?"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계셨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하시는..….”
쏟아지는 질문에 엘디르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을 해나갔다.
“엘프의 전투 방식이라고 크게 특별하지 않습니다. 엘프의 특기인 정령 마법이 조금 특별할 뿐.”
“네 먹어봤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마을의 엘프 모두 새로운 음식과 문화에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세진 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계획은 없습니다."
내가 옆에서 걱정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엘디르는 아주 침착하고 깔끔하게 질문들에 대답했다.
서율희에게도 취재진의 질문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미궁에서 사용한 전략과 전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녀는 평소에 보여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질문에 응답했다.
그리고 쓸데없는 질문에는 칼같이 반응해 질문 자체를 막아버렸다.
"전세진 길드장님께 질문하겠습니다.”
“네.”
"혹시 '균숙자네 퓨이'라는 너튜브 채널 들어보셨습니까?"
"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예상했던 대로 기자는 너튜브 채널과 아르킨 길드 간의 연관성에 대해 질문을 해왔다.
“그 너튜브 채널에서 나오는 엘프들이 아르킨 길드에 합류한 엘프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기자는 질문을 던지면서 슬쩍슬쩍 엘디르 쪽으로 눈길을 줬다.
아마 어느 정도 확신을 하고 던지는 질문인 듯했다.
이미 너튜브 채널에서 엘디르가 직접 출현을 했었고, 이름도 정확히 언급했기 때문에 발뺌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와 함께한 엘프들이 그 채널의 영상에 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내 대답과 동시에 다시 한번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기 시작했고, 가져온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질문을 던졌던 기자는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전세진 길드장님과 그 채널의 등장하는 균숙자라는 인물이 혹시……?"
“네, 맞습니다. 제가 균숙자라는 이름으로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아. 질문에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숨겨왔던 진실이 드러나자, 질문을 던졌던 기자는 최고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너튜브 채널에 관한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자마자. 또다시 나에게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너튜브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겁니까?"
“아직 길드장님의 각성 능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혹시 너튜브 영상에서 본 신기한 능력과 연관이…...”
“영상을 보면 엘프의 모습을 한 따님이 있는 거로 아는데, 정말 친딸인 겁니까?"
하지만 너튜브에 관한 질문들은 모두 대답을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너튜브에 관련된 질문은 받지 않도록 하 겠습니다. 대신에……”
"......?"
"......?"
“제 채널의 방송을 통해서 관련 이야기를 풀어낼 계획이니.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분들은 제 채널, '균숙자네 퓨이' 방송을 시청해 주세요."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취재진은 내 대답에 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취재진은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까지도 카메라 플래시를 쉬지 않고 번쩍였다.
기자회견을 끝으로 나, 서율희, 엘디르는 물론, 병원에 입원해 있던 다른 엘프들도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병원 밖에서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은 우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주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
병원에서 균열 입구를 통해 엘프 마을이 있는 호숫가로 돌아온 뒤, 나는 가장 먼저 다친 엘프들을 살폈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상자는 없다고 해도, 몇 달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환자들이 많았다.
나는 일일이 그들을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치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닙니다. 세진 님.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이 상처만 회복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부상 때문에 제대로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들은 내 방문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언제든 다시 돕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나에게 신뢰를 보내는 모습에 조금은 부담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큰 상처를 입은 엘프뿐만 아니라, 몸 성히 귀환한 엘프들까지 직접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제 전투에 참여한 엘프들은 다 만나보셨습니다.”
"아아. 그래?"
"수고하셨습니다. 세진 님."
“수고는 뭘. 그리고 다친 엘프들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엘디르가 나한테 전해줘.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해줄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엘디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엘디르도 수고했어. 아마 엘디르가 없었으면 이 일을 절대 해낼 수 없었을 거야."
"아닙니다. 약간의 도움이 됐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의 한결같은 모습에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엘프 마을에서 용건을 끝내고, 집까지 배웅하겠다는 엘디르를 뜯어말린 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아이들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기 때문인지 더욱 아이들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쑥!
"어? 일어났구나!"
-......!
내 상의 주머니에서 위니가 얼굴을 내밀자, 나는 기쁜 목소리로 녀석을 반겨주었다.
미궁에서 돌아온 뒤로 계속 잠을 자고 있어서 걱정했는데, 웃는 모습을 보니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위니야. 마지막에 네가 날 구해준 거지?"
-끄덕끄덕.
“고맙다. 네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어."
감사 인사와 함께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위니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평소 같았으면 신난 표정으로 날개를 움직여 이리저리 날아다녔을 텐데, 아직 피곤이 남아 있는지 얌전히 내 주머니 속에 자리했다.
나는 중얼거리듯 위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집을 향해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집 마당에 도착하니 집 안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왠지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얼굴의 환한 미소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의 포근한 분위기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향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집 안의 모습이 모두 정겹게 느껴졌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집
안쪽에서 아이들의 어수선한 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아! 왔다!
-다다다다다닷!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왔다.
"세진!!"
"아빠!!"
"퓨이!! 퓨이!!”
“후모!!”
"어이쿠! 이렇게 한꺼번에 달려들면 어떡해?"
나는 입으로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최대한 팔을 벌려 아이들을 꼭 끌어 안았다.
품속에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꼬물거리는 움직임에 마지막까지 가슴 속에 남아 있던 긴장이 깔끔하게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진 님 오셨어요?"
“수고했다.”
한발 늦게 모습을 드러낸 시르엘과 임진혁이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품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눈빛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 뀨우우?
"너도 잘 있었어?"
-뀨우.
마지막으로 다가와 애교를 부리는 세이까지.
나는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의 뜨거운 환영 인사를 받으며 중얼거렸다.
"다녀왔어."
****
집으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났다.
미궁 공략으로 떠들썩한 세상과는 다르게, 이곳 호숫가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아직 많은 엘프가 부상에서 회복중이지만, 약초밭을 관리하거나 호수에서 낚시를 즐기는 엘프의 모습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크고 작은 부상이 있었던 아르킨 길드원들도 이제 괜찮다는 연락을 최근에 주고받았다.
대신 주변의 높은 관심으로 출입을 자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만간 완전히 회복을 끝내고 다시
모이기로 약속을 했다.
-뾰로롱!
-......!!
미궁에서 나온 뒤로 약간 힘이 없었던 위니도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 완전히 기운을 되찾았구나?"
-끄덕끄덕.
-휙!
"응? 위니야. 어디 가는 거야?"
녀석은 원래의 기운을 되찾자마자 나를 재촉해 어딘가로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살짝 흥분한 것 같은 위니를 진정시키며 따라간 곳은 과거에 나무 정령이 있었던 숲이었다.
지금은 그가 희생해서 지켜낸 생명의 샘만이 남아 있는 곳.
위니는 거침없이 숲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정령이 있었던 곳까지 도착했다.
내가 쓸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위니는 살포시 땅에 내려앉아 손을 땅바닥에 가져갔다.
그러자 땅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과거에 나무 정령이 만들었던 통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내가 놀라운 표정을 짓는 사이, 위니는 나에게 손짓을 보내고 통로 안쪽으로 훌쩍 날아갔다.
나는 머뭇거릴 틈도 없이 위니를 따라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예전과 달라진 것 없는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메마를 대로 메마른 생명의 샘에 도착했다.
이전에 느껴졌던 신비한 기운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위니는 자연스럽게 샘 가운데 올라서더니 눈을 감고 집중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위니의 행동에 반응하듯 생명의 샘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미약한 반응이었으나, 갈수록 그 공명은 점점 크게 통로를 울렸다.
나는 기대감과 동시에 불안함이 가득한 표정을 한 채,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위니를 중심으로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울림이 계속되더니, 이윽고 그 울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변화가 생겨났다.
-화아아악!
생명의 샘과 위니를 중심으로 신비한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내가 입을 벌리고 감탄을 하는 사이
위니의 주변에서는 미궁에서 빠져 나온 직후에 보여줬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문양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
'생명의 문양.…...'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생명의 문양을 살피는데.
위니가 만들어내던 문양이 점차 흐릿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짧은 흔적만 남기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겨우 찾아낸 생명의 문양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허망하게 문양의 잔상을 쫓았다.
-뾰로롱!
-......!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내 쪽으로 위니가 다가왔다.
그리고 위니가 움직임과 동시에 생명의 샘에서도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퐁! 퐁! 퐁!
메말라가던 샘 한 가운데에서 아주 조금씩 샘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나는 되살아난 생명의 샘을 발견하고 아쉬운 표정을 지워냈다.
'아직 생명의 문양은 완벽히 찾아 내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나는 이곳에 잠들었던 아르엘과 나무 정령.
그리고 활짝 웃고 있는 이엘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