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44화
79. 미궁의 끝(1)
폭발과 함께 몸이 튕겨 나가는 느낌과 동시에 귀가 멍해지면서 의식이 멀어졌다.
여기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의식을 부여잡기 힘들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와중에 온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귓 가에 누군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 난 뒤에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고,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나는 그렇게 편안한 상태로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
조금씩 의식이 되돌아오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바닥에 누워있는 나 자신의 상태였다. 긴장이 완전히 풀려 버린
탓인지, 팔다리는 물론 손가락 하나에도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아 있는 건가?'
막 의식을 되찾아 몽롱한 상황 속에서 나는 주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우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뭔가 어수선한 소리였다. 여러 사람이 다급하게 주고받는 대화나, 이리저리 빠르게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에 조금씩 돌아오는 감각이 돌아왔고, 나는 천천히 양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으윽......."
쏟아지는 밝은 빛에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주변의 밝기에 적응하며 나는 다시 눈을 떠 눈동자를 움직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균열 안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하늘은 균열에서 보던 하늘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나 보네.’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한동안 눈을 껌뻑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직 눈동자의 초점이 잡히지 않아 흐릿했지만 익숙한 뒷모습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와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아저씨.
그 옆에는 아주머니도 뭔가 열을 올리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임진혁과 엘디르의 모습도 보였다.
조금 더 눈동자를 움직여 보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윤동현과 엘프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할 뿐,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주변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머리 위로 불쑥 나타났다.
"일어났어요?"
“으윽…… 쿨럭! 쿨럭!”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목 안쪽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에 크게 기침을 내뱉었다.
"잠깐만요. 먼저 목부터 축이세요."
물이 든 병이 입가로 다가와 입안으로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줬다. 시원한 물 덕분에 목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천천히 사라져 갔다.
“하아…… 감사합니다. 율희 씨.”
내 감사 인사에 서율희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균열에서 전투하더라도 항상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얼굴 곳곳에 전투 흔적과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생생한 표정을 하고 나를 내려다 봤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네. 그냥 몸에 조금 힘이 없는 것만 빼면요."
“다행이네요. 모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걱정하지 말아요. 약간 부상이 심각한 분들도 있지만, 모두 생명의 지장은 없어요.”
모두 무사하다는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마음속 에 불편했던 무언가가 풀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뭐야! 세진이 일어난 거야?"
"세진아. 괜찮니?"
내가 서율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했는지,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세진아 괜찮냐?"
"괜찮아요. 아저씨."
“정말로 괜찮은 것 맞아? 어디 불편한 곳 없어?"
"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만 빼면 괜찮아요.”
내 대답에 아주머니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저씨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소리질렀다.
"아니, 이 새끼들은 빨리 구급차 안 올려보내고 뭐 하는 거야! 너희 상관 어딨어? 일 똑바로 안 할 거야?"
"죄송합니다. 그게 약간 혼선이 있어서…… 금방 구급차와 의료진이 도착할 겁니다.”
아저씨의 역정에 누군가 안절부절 못하며 대답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쪽에서 무전기 소리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아마 군인인 것 같았다.
좀 더 주변 상황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고개를 움직여 상체를 일으켰다.
"끄응."
"일어날래? 그냥 누워 있어도 괜찮은데."
나는 아주머니와 서율희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체만 일으켰을 뿐인데 잠시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잠시 눈을 감고 어지러움을 속으로 삭이다가 다시 눈을 떴다. 누워 있을 때보다 주변의 모습이 확실하게 눈에 비쳤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임진혁과 엘디르, 윤동현도 한 발짝 내 쪽으로 다가섰다. 셋 모두 온몸에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임진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때 네가 미친 줄 알았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뛰어들 줄이야.......”
"하하.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도 잘됐으니까 다행이잖아요?”
“다행은 개뿔……"
그는 그때의 상황이 또 떠올랐는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굉장히 놀랐었습니다, 세진 님. 그냥 부탁한다는 말씀만 남겨두시고 그런 행동을 하실 줄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설명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엘디르라면 잘 커버해 줄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요.”
“하하하.”
내 대답에 엘디르는 평소와는 다르게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윤동현은 그저 평소와 같은 미소로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나도 함께 살짝 고개를 숙여줬다.
일행과 대화를 나누던 나는 조금 시선을 옮겨 주변을 살펴봤다.
경계선을 구축하고 있던 군인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장비들을 철수시키고 있었고, 무전기를 든 통신병들은 어딘가로 계속해서 무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 쪽을 바라보니,
미궁의 기운으로 가려져 보지 못했던 태백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불쾌한 기운은 싹 사라지고 맑고 깨끗한 산의 기운이 가득했다.
마치 그림같이 느껴지는 그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아주 천천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우리가 미궁을 공략했구나……'
엄청 기쁘다거나, 뭔가 격렬한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기분으로 태백산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의 평온함이 깃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와중, 돌연 미궁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나는 엄청난 폭발에 휘말리면서 의식을 잃었는데.
몸 상태를 살펴보니 자잘한 타박상만 있을 뿐, 큰 상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억 속의 폭발 위력과 그때 내 상황을 따져보았을 때, 지금의 내 상태는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의구심이 생긴 나는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예요?"
“......”
“......”
“......”
내 질문은 들은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는 더 빨리 구급차를 올려보내라고 다시 소리쳤고, 아주머니는 다친 곳이 없는지 내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임진혁과 서율희는 그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고, 윤동현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진지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준 사람은 오직 엘디르뿐이었다.
“강력한 폭발의 여파로 저희도 정확히 본 건 아니지만, 세진 님은 어떤 힘의 보호를 받으며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요?”
“네. 저희가 확인했을 때는 이미 정신을 잃고 계셨고 몸에는 큰 상처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내가 무슨 수를 썼다고 생각 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그 설명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골렘의 동력부를 일부러 폭주시켜 폭발을 일으키는 계획은 성공적이었어도, 그 뒤의 계획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냥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허공에 뛰어내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 곳에 멀쩡한 상태로 일어난 상황이었다.
'뭐지?'
내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윗주머니에서 해답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
-뽀로로롱!
작은 요정 날개를 퍼덕이며 내 눈 앞에 날아오른 위니는 우쭐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위니! 네가 날 살린 거야?"
-끄덕끄덕!
"아......."
어쩌면 같이 폭발에 휘말릴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위니가 정신을 잃어버린 나를 보호한 것이었다.
“고마워, 위니.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내 감사 인사에 녀석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주변을 획 한 바퀴 날아돌았다.
위니의 귀여운 행동에 미소를 짓고 있는데.
녀석은 뭔가 전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응?”
-......!
손짓과 몸짓만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의문스럽게 그 행동을 바라봤다.
위니는 그런 내 모습을 살짝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뭔가 다른 행동을 취했다.
작은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집중한 표정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위니.
그리고 잠시 후.
위니를 중심으로 신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
"이건 ...…?"
다른 사람들은 그저 위니가 내뿜는 신비한 기운에 취해 탄성을 내뱉었지만, 나는 그 신비한 너머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생명의 샘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 기운.
세계수의 정령을 만났을 때 강하게 느꼈던 그 기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것을 위니의 몸 주변에서 느낄 수 있었다.
기쁨과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기운을 내뿜던 위니가 깜짝 놀라더니 다시 내 주머니 속으로 급히 파고들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익숙한 얼굴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섰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다치신 분들은 없습니까?"
미궁에 들어서기 전에 만났던 군지휘관과 센터 직원이었다.
아저씨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렇게 늦게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 이곳 최전방 방어선 에 떨어진 후방으로 의료진들을 배치하다 보니 지원이 약간 늦었습니다. 모든 의료진을 이곳으로 집결시켰으니 이제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지휘관은 아저씨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쩔쩔매며 변명을 늘어놨다. 그의 말대로 주변의 부상자들 곁으로 많은 의료진이 달라붙었다.
지휘관 옆에 있던 센터 직원은 멍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하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아르킨 길드장님. 미궁을 어떻게 나오셨는지…… 아니, 그러니까 미궁을 공략하신 거 맞죠?"
“….…”
나는 뚱한 표정으로 직원을 올려다
봤고, 그는 내 반응에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서율희가 나 대신 대답을 했다.
"저기요."
"에...… 넷?”
“뒤에 안 보여요? 본인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세요."
"아……”
그녀가 쏘아붙이듯 대답하자 센터 직원은 멍하니 태백산을 바라봤다. 미궁의 불길한 기운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에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내 쪽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미궁 공략을 축하드립니다. 아르킨 길드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