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42화
78. 미궁에 들어서다(3)
거대 괴수 두 마리를 쓰러뜨리고 난 뒤.
우리는 계속해서 적들과 싸워나갔다.
다른 배경의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괴수들은 집요하게 우리를 공격했고, 축적되는 피로와 함께 부상자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인원이 생겼음에도 사망자가 없다는 사실이 크나큰 행운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전투할 수 없는 인원들을 계속 귀환시키다 보니 처음 엘프 인원들은 절반 정도만 남게 되었다.
아르킨 길드원 중에서는 김유미와 정씨 남매가 부상으로 전장에서 이탈했다.
"끝까지 못 싸우고, 먼저 돌아가서 죄송해요..….”
"괜찮아. 유미 씨.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남은 건 우리가 처리하고 돌아갈 테니까."
“대훈 아저씨 말이 맞아요. 남은 인원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김유미뿐만 아니라 정씨 남매도 아쉬움에 눈물을 글썽거렸고, 아저씨와 서율희는 일부러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물론 그들의 웃음과는 별개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은 쉽게 얼굴을 펴지 못했다.
다시 한 차례 부상자들이 떠나가고.
나는 많은 인원의 빈자리에 쓸쓸함과 동시에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내 옆자리에 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떠나보낼 때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던 아저씨는 미간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확실히 많이 빠지긴 했네.”
“그래도 아직 전열을 유지할 인원은 충분히 남아 있으니 괜찮아요."
“맞습니다. 엘프 전력이 많이 줄긴 했어도, 아직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습니다.”
서율희의 말에 엘디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모두가 긍정적으로 이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심각한 표정의 윤동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아직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전투의 피로는 계속 쌓이고 있어요. 평소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전투를 이어나가 보니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도 힘들었고요."
"으흠.…..”
“계속 피로를 쌓아가며 전투를 하다가, 어느 순간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견에 그의 목소리처럼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긍정적인 말을 했던 서율희와 엘디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윤동현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몹시 어려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합니다. 이번 도전이 길드장 님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괜찮아요. 동현 씨.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 숙이는 윤동현.
나는 그 모습을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힘든 이 상황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으로는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이성적으로는 윤동현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느껴졌다.
생각보다 훨씬 힘든 상황에 내 목표만 고집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여기서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이번 도전에서 실패해도 미궁에는 다시 도전할 수 있겠지만, 이엘에게는 남아 있는 미래가 얼마 없었다.
나무 정령의 희생으로 겨우 그 한계를 늘렸을 뿐, 두 번째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슬쩍 다가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세진아."
"아주머니……”
“네가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줬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도울 차례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끝까지 따라갈 테니까 너무 고민하지 마.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해.”
아주머니에 이어 임진혁도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평소와 같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임진혁뿐만 아니라, 아저씨, 서율희, 엘디르도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가다듬었다.
“저를 믿어줘서 모두 감사합니다.”
일행들을 둘러본 뒤 한번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어려운 도전이겠지만, 포기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모두 끝까지 노력해 봅시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걸렸다.
윤동현도 더는 복잡한 표정을 짓지 않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와중에 주머니에 들어 있는 위니가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내 눈앞으로 날아올랐다.
"왜 그래 위니야?"
-......!
위니는 열심히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손짓을 섞어가며 뭔가를 나에게 설명하려 했다.
귀엽게 보이는 행동과는 다르게 위니의 진지한 모습에 나는 집중해서 그 행동을 관찰했다.
“으음. 그러니까……”
-......!
"다음? 다음을 말하는 거지?"
-끄덕끄덕.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까지 받아 위니의 행동을 해석한 결과……
“가까운 곳에서 문양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
앞으로 이어질 다음 장소에서 우리의 목표, '생명의 문양'을 강하게 느꼈다는 위니.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약간의 희망과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문양의 기운을 가깝게 느꼈다는 것은, 마지막에 가깝게 도달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가장 어려운 상대를 맞이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부상자들로 인해 많은 인원이 빠지고, 지속적인 피로의 누적으로 오랜 싸움을 이어나가기 힘든 상황에.
마지막 목표에 가까워졌다는 소식은, 그 어려움을 떠나서 충분히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일행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을 대비했다.
평소보다 더 긴 휴식 시간을 취하고 위니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일행은 이동을 시작했다.
걸음을 옮긴 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번 주변의 배경이 뒤틀리더니 새로운 배경이 눈앞에 펼 쳐졌다.
"여기는..….”
“아아…...”
주변 배경을 확인한 엘프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메마른 대지에 썩어 비틀어진 나무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과거 울창한 숲을 이뤘을 것이라 예상만 될 뿐, 숲의 싱그러움과 생기발랄한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참한 모습을 둘러보던 일행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일행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시체들이 가득한 대지에 나무 한 그루가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저건 설마......”
엘프 마을에 가본 일행과 엘프들은 거대한 나무의 모습을 보고 어렵지 않게 무엇인가를 연상시켰다.
“세계수…….”
멀리서도 느낄 수 있던 세계수의 신비한 분위기와 상반되는 음침함과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겉모습은 영락없는 세계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엘프들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그으으으으으.
-그으으으으으.
세계수를 닮은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귀곡성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소름이 돋는 그 소리에 일행 모두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투두두둑 투둑.
대지에 가득하던 나무들의 시체가 그 소리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기괴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
위니는 좀비와 같은 나무들의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거대한 나무를 열심히 손가락질했다.
그 뜻을 이해한 나는 안전하게 위니를 주머니에 넣어두며 중얼거렸다.
"알았어. 위니야. 위험하니까 절대 주머니에서 나오면 안 된다."
-......!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나무들은
어느새 일행을 포위해 들어왔다.
“저 거대한 나무를 해치워야 해요!"
"세진 씨! 골렘을 이용해 전방을 뚫어내요. 나머지는 후방을 견제하면서 진형을 유지하세요."
나는 서율희의 지시에 맞춰 두 대의 골렘을 최대한 빠르게 전방으로 이동시켰다.
-기이이익. 쾅!
-뿌드득. 뿌득!
골렘의 묵직한 공격에 길을 막던 나무들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쓰러져 나갔다.
하지만 워낙 수가 많았던 탓인지 쓰러뜨리는 수보다 몰려드는 나무의 수가 더 많게 느껴졌다.
거기다 이전의 전투로 1대의 골렘이 크게 손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그 위력이 더욱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길을 막는 나무들의 움직임이 느렸고, 몰려드는 숫자에 비해 공격은 위력적이지 않았기에.
우리는 포위 공격을 버텨내며 억지로 전방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나무들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마법과 화살이 주변을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임진혁과 엘디르의 눈부신 활약과 서율희의 침착한 지휘에 힘입어, 일행은 거대한 나무를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나무들의 포위 공격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쯤.
-그오오오오오.
-그오오오오오.
아까보다 더 불길한 귀곡성이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나무 기둥 가운데에 검은 틈이 생겨나더니, 그 사이에 기분 나쁜 거대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거대한 눈동자가 우리쪽으로 향하고.
다시 한번 우리 주변에는 엄청난 진동과 함께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파밧!
"이건 또 뭐야!"
지진이 일어난 듯한 진동과 함께 땅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그곳에서 거대한 나무뿌리가 솟아났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크라켄의 촉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모두 피해!"
-쭈우욱! 쾅!
거대한 나무뿌리가 땅을 강타하고.
다행히 모든 일행이 그 강력한 일격을 피할 수 있었으나, 나무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쾅! 쾅! 쾅!
이어지는 나무뿌리의 공격에 일행의 전열은 점점 흐트러졌다.
서율희는 최대한 빠르게 전열을 수습해보려 했으나, 좀비같이 몰려드는 나무들의 포위 공격 속에서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전황을 살피더니,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내게 소리쳤다.
"세진 씨!"
"말씀하세요."
“이대로 모두 돌파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요. 일행을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예?"
일행을 나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해 되물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나머지 분들도 제 말 잘 들으세요."
그녀의 작전은 간단했다.
그나마 돌파력이 있는 골렘을 앞세워 거대한 나무를 향해 돌파하는 인원과 이곳에 남아 후방의 적들을 저지하는 인원을 나눈다는 작전.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는 상황에서 그녀의 작전이 유일한 돌파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원을 둘로 나누는 만큼 위험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후방에 남아 나머지 적들을 저지하는 인원들은 사실상 미끼 역할이나 다름없었다.
그 위험성 때문에 나는 서율희의 작전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진 씨!"
"......."
“고민할 시간 없어요. 남은 사람들은 제가 어떻게든 버티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어지러운 전황 속에 자신을 믿어달라 소리치는 서율희, 나는 그녀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