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40화
78. 미궁에 들어서다(1)
태백산 미궁의 진입부.
나를 포함한 아르킨 길드원 모두는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집합 장소 에 모여 있었다.
꽤 먼 곳에서부터 퍼져나오는 미궁의 꺼림칙한 기운.
수많은 길드의 도전에도 쉽게 공략되지 않았던 미궁인 만큼, 그 주변 에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길드원 대부분은 미궁의 불길한 분위기에도 평소와 같은 표정과 행동을 보였다.
가장 나이가 어린 선우나, 김유미 정도만 제외하면 모두 평범한 균열에 입장을 기다리는 모습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길드원들의 모습을 묘하게 바라보고 있자, 서율희가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이제 미궁이 얼마 안 남았는데 모두 긴장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서."
내 말을 들은 서율희가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듯한 대답을 내놨다.
“익숙해진 게 아닐까요? 세진 씨가 계속 말도 안 되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다녔으니까요. 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장난이 섞인 말이었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나와 함께 한 일행들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많이 겪었으니까.
그것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왠지 모를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어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크흠. 저번과는 다르게 기자들이나 카메라는 안 보이네요. 굉장히 떠들썩하게 모여들 줄 알았는데.”
“미궁은 균열이랑은 다르니까요. 아마 지금부터 미궁 주변에는 민간인은 출입 금지명령이 떨어졌을 거예요. 우리가 입장하는 순간부터는 완전 경계 구역이 될 거고요."
서율희의 말대로 평소의 균열 진입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균열 관리센터에서 몇 명 현장에 나와 일을 하는 평소와는 달리, 주변에는 마치 전쟁을 준비하듯 군인 들이 경계 태세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간부들은 물론 병사들까지, 우리들의 모습에 비하면 잔뜩 굳은 얼굴로 정말 전쟁을 코앞에 둔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정말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은 분위기네요."
“만약 우리가 공략에 성공하지 못 한다면,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다름없죠."
만약 우리가 입장해 미궁을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이 태백산 일대는 미궁이 쏟아내는 괴수들로 금방 가득하게 될 것이다.
지금 긴장한 표정의 군인들은 그 사태를 대비해 괴수들의 확산을 막고, 진압을 위한 각성자들이 도착할 때까지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우리가 깔끔하게 미궁을 공략해 낸다면 그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군인들도 눈과 귀가 있는지라, 우리에 대한 평가와 공략 가능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저렇게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약간 미안한 마음으로 군인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
균열 관리 센터에서 나온 직원과
군인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르킨 길드의 수장, 전세진 씨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미궁에 진입하기 전에 확인하셔야 할 서류입니다. 확인해 주시죠."
평소보다 두툼한 서류들을 받아들며, 나는 최대한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서류에는 읽기도 어려운 말들로 복잡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해 미궁에 들어간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들어가는 미궁이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서류에 서명을 써내려갔다.
옆에 서율희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넘기는 도중에 센터 직원과 함께 왔던 군인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낮지 않은 계급에 누가 봐도 여기 있는 모든 군인의 지휘관인 것으로 보였다.
“이곳 태백산 미궁 방어선을 책임지고 있는 안명희 중령입니다."
“아. 네. 아르킨 길드의 전세진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미궁 진입을 포기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
“무슨 목적으로 미궁을 도전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들의 무모한 도전 때문에 여기 있는 많은 병사가 애꿎은 희생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이곳을 책임지는 지휘관이라 밝힌 그는 우리가 미궁 도전을 포기할 것을 권유했다.
군인답게 직설적으로 말했지만, 강제로 억압하는 분위기는 들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이끄는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많은 분이 무모한 도전이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해 주시는 말씀은 고맙지만. 저도 이 도전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나에게는 이곳에서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존재했다.
단호한 내 태도에 안명희 중령은 살짝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요. 힘들겠지만 당신들이 이 미궁을 공략하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는 행운을 빌어주는 말을 남긴 뒤,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멀어져갔다.
작성이 끝난 서류를 센터 직원에게 건네자 그는 서류를 받아 챙기면서 말했다.
“확인 절차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제 준비되시는 대로 미궁에 진입하시면 됩니다. 여기는 곧 통제구역이 되기 때문에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웃는 얼굴로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센터 직원도 우리에게 응원의 말을 남긴 뒤, 이곳을 떠나갔다.
이제 미궁의 진입로에 남은 것은 정말로 아르킨 길드원뿐이었다.
준비를 끝낸 길드원들이 내 쪽으로 모여들었다.
여느 때처럼 아저씨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확인 절차는 다 끝난 거냐?"
“네. 우리만 준비되면 미궁에 진입하면 돼요."
“그럼 뭘 꾸물거려. 바로 들어가자.”
아저씨는 더 기다리기 싫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길드원들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길드원 모두 눈빛으로 준비가 끝났음을 내게 알렸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균열에 진입
하겠습니다.”
****
산의 진입로를 따라 이동을 시작한 일행.
뒤쪽에 분주하던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점점 미궁 특유의 불길한 기운은 강렬해졌다.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에 하늘의 태양 빛마저 가리고, 주변의 모든 풍경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뒤틀리면서, 균열 입구를 통과할 때 드는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헉!”
"으읏!"
"......!"
일행은 평소와는 다른 진입 과정에 각자 신음을 흘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일단 미궁에 진입한 것 같아요. 지금부터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까.”
서율희의 경고와 함께 일행은 각자의 위치를 찾아 경계를 시작했다.
"세진 씨!"
"알겠습니다."
나는 미리 계획했던 대로 엘프들을 불러내기 위해 균열 입구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눈앞에 균열 입구가 생겨나고, 그곳을 통해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이 차례로 입구를 빠져나왔다.
또 엘프들에 이어 모렛 병사와 2 개의 골렘도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쿠모! 쿠모!”
-그그그그긍.
-그그그그긍.
엘프들도 우리를 따라 금방 주변을
경계하는 위치를 잡았다.
그리고 엘디르가 대표로 상황을 알렸다.
“엘프 전원 무사히 합류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 평소의 균열 같았으면, 이제 정해진 길을 따라 일행을 이동시켰겠지만.
이곳은 평범한 균열이 아니라 미궁이었다.
미궁이 균열과 다르게 미궁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평범한 균열은 눈앞의 적들을 물리치며,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아주 단순한 직선적인 구조라면.
미궁은 길도 목표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저 넓게 펼쳐진 공간에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들과 싸우며 무작정 길을 나서야 하는 구조. 말 그대로 미궁이었다.
미궁 도전에 실패한 많은 길드가 전투의 어려움이 아닌, 길을 찾을 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끔찍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고 전했다.
미리 챙겨온 망원경을 꺼내 주변을 둘러보던 서율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저 끝없는 평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네요. 정말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어요."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 위에 덩그러니 놓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상황에 대해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나와볼래?"
나는 상의 주머니의 단추를 열며 미궁의 해결책을 불러냈다.
-뽀로로롱!
-......!
주머니 속에서 밖으로 날아오른 위니는 그동안 답답했었는지 팔과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위니야. 여기서 생명의 문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어?"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태백산까지 우리를 인도했던 위니. 위니의 능력이라면 미궁 안에서도 생명의 문양을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추측을 했다.
내 부탁을 들은 위니는 잠시 날개를 퍼덕이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눈을 감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니가 끙끙대는 모습으로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자, 나는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옆에서 함께 지켜보던 서율희도 초조한 표정으로 위니를 응시했다.
만약 위니가 단서를 찾아주지 못한다면, 다른 길드들이 경험했던 끔찍함을 우리도 똑같이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시간은 점점 흐르고.
몇 번이고 내가 마른침을 꼴깍이고 난 이후.
끙끙대던 위니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뽀로롱!
-......!
위니는 날개를 퍼덕이며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휑한 평야만 보일 뿐, 우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위니의 느낌뿐이었다.
"위니가 가리킨 방향으로 출발할게요. 모두 경계를 늦추지 말고, 대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이동!"
미궁에 진입하고 한참 동안 자리를 지키던 우리는 드디어 첫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력과 청력이 뛰어난 엘프 경비대원을 앞세워 전방, 좌우,후방까지 자세히 살피며, 아주 천천히 미궁 내부를 이동했다.
평소보다 느린 이동 속도였지만.
직선적인 구조가 아니라 사방이 열려 있는 미궁이었기에, 모든 방향을 경계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광활하다 못해 공허하게 느껴지는 평지.
꽤 오랜 시간 이동을 계속하느라 살짝 경계가 풀어지려 할 때쯤.
"전방! 전방에 뭔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처음으로 엘프들의 감각에 무엇인가 포착되었다.
지루한 이동에 지쳐 있던 일행이 뭔가 발견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모든 일행은 얼굴을 굳혀야 했다.
“괴수들입니다. 빠르게 이쪽으로
접근합니다."
“모두 전투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