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38화
77. 마지막을 위한 준비 (1)
엘프 마을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벤트 덕분에 한동안 시끌벅적했지만, 모두 금방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약간 달라진 점이라면 엘프 마을에 방문했던 이벤트 덕분에 다른 많은 사람이 엘프의 문화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곳에서 너튜브 채널로 접촉을 해왔다.
여행사에서 엘프 마을 관광을 여행 상품으로 기획하고 싶다는 제의부터, 엘프차와 엘프주 등등 엘프와 관련된 상품을 유통하고 싶다고 계약서를 보내온 곳도 있었다.
몇몇은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기업도 포함되어 있어서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피렌느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어 하는 의사를 드러냈지만, 일단 나는 모든 제안을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제안들이 잘못되었다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지금 내 상황이 도저히 일을 늘릴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보류해야만 했다.
피렌느도 이런 내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약간 실망은 했지만 이견을 내지는 않았다.
대신 중요한 일들이 처리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언제든지 이 제안들을 다시 검토해 보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서야 깔끔하게 물러섰다.
아무튼.
엘프 마을 이벤트가 있었던 이후로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금방 사그라들고, 모두 본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갔지만.
그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알수 없는 긴장감이 조금씩 우리를 잠식해 나갔다.
****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이엘, 나는 이엘에게 곧장 다가가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이엘? 어디 아프니?"
"으음...… 아뇨. 그냥 조금 피곤한 것 같아요."
"혹시 어디 아프면 꼭 나한테 말해야 한다."
"알았어요. 아빠."
이엘은 내가 걱정하지 않게 하려는 듯 해맑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걱정으로 굳은 내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시르엘 역시 눈동자에서 불안함을 지우지 못했다.
이엘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쓰러지듯 내 품 안으로 안겨 왔다. 그러고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좋아서 부리는 어리광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최근에 이엘은 금방 피곤해하면서 이렇게 쓰러지듯 잠을 청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가끔은 혹시 이러다 이엘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 품에서 깊이 잠든 이엘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옆에 있던 시르엘에게 이엘을 맡겼다.
곤히 잠든 이엘을 받아든 시르엘은 뭔가를 눈치챘는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내게 물었다.
“나무 정령님께 가실 건가요?"
“네.”
"알겠어요. 이엘은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부탁드릴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엘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최대한 아이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어쩌면 나보다 더 이엘과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낸 아이들이었기에, 평소와 달라진 모습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퓨우우우.…..”
힘이 빠진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나를 올려다보는 퓨이.
그 옆에는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밝은 웃음을 짓고, 아이들을 하나씩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엘은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옆에서 지켜봐 줘. 알았지?"
내 말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은 모두 표정을 밝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 나갔다 올게."
아이들과 시르엘에게 인사를 남기고 나는 집을 나섰다.
-이엘은 괜찮은가?
“아직은 괜찮습니다. 조금 자주 피곤해하고, 잠이 많아진 것만 빼면 평소랑 다름없습니다."
-흐음...…
나무 정령은 이엘의 소식을 들으며 불안한 반응을 내비쳤다.
“생명의 샘은……?"
-예전에 말했던 대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이야.
“.......”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촉박할지도 모르겠어.
어느 정도 예상을 했음에도 심각함이 느껴지는 나무 정령의 말에 내 표정은 처참하게 변했다.
이제는 정말로 뒤가 없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왔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나무 정 령은 왠지 모르게 편안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세진. 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생각나나?
“처음 왔을 때 말입니까?"
-그래. 그때 나는 자네를 믿지 못하고 계속 의심했었지. 아르엘 님이 자네에게 신뢰를 보였을 때도 솔직히 나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어.
“네. 그땐 그랬었죠.”
나무 정령은 예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아련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르엘 님이 마지막으로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났을 때도, 나는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어.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너는 아르엘 님이 떠난 뒤에도 아르엘 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최선을 다해 이엘을 지켜줬지. 이제야 그분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
“아뇨.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아냐. 너는 충분히 노력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말이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나무 정령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내가 나서야 할 때인 것 같아.
“나무 정령님?"
내가 다시 말을 꺼낼 새도 없이 나무정령의 중심으로 은은한 생명의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엇?!"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내 모습에 나무 정령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진정시켰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저 조금이나마 너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니까.
“나무 정령님! 설마?"
내가 뭔가를 깨닫고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나무 정령은 오히려 후련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어. 그저 원래의 내가 그랬듯이 평범한 나무로 돌아가는 것일 뿐.
"......"
-내가 가진 힘으로 생명의 샘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남은 건 너에게 맡기도록 하마.
나무 정령을 중심으로 계속 피어오르던 기운은 계속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더니,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나무 정령님."
-죄송할 것 없다. 말하지 않았느 냐? 그저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사그라드는 기운을 따라 나무 정령의 목소리도 점차 희미해졌고, 귓가에 겨우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이엘이 다시 건강해지면 가끔은 이곳에 놀러 와 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무 정령은 존재감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주변은 평소와 다름없는 숲의 풍경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며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
적막이 흐르는 길드 회의실.
그곳에는 나와 서율희만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제 내가 결연한 목소리로 연락을 했을 때부터 상황을 눈치챘는지, 평소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네. 이제 시간이 없어요. 가능하면 빨리 일을 진행하고 싶어요."
"솔직히 말해서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힘들겠죠?"
그녀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일단은 알겠어요. 세진 씨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일을 진행해 볼게요.”
"고마워요. 율희 씨.”
“일단 저에게 고마워하기 전에, 다른 길드원들에게 감사하세요. 이런 위험천만한 일에 모두 참여하겠다고 해줬으니까.”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이번 일에 참여하겠다고 해준 길드원들을 떠올렸다.
임진혁과 정씨 가족은 물론이고, 윤동현과 김유미까지.
아르킨 길드원 전원이 태백산 미궁 공략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길드원들도 정말 고맙죠. 하지만 율희 씨한테도 고마운 건 마찬가지예요.”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그만한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니까요."
그녀는 가볍게 내 말을 받아넘기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기본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난 상황이에요. 아시다시피 엘프들과 계속 호흡을 맞춰보기도 했고, 미궁에 대한 자료도 최대한 모았고요.”
서율희는 몇 가지 서류들을 내게 건넸다.
"이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미 우리 길드는 태백산 미궁 공략을 위해 허가 신청을 해둔 상태에요. 저번에 B등급 균열을 클리어했기 때문에 필요한 요건은 다 갖춘 상황이거든요.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요."
“무슨 문제가……?”
“저번에 우리가 B등급 균열 입장 허가를 받은 것에 대해 말이 많았던 것 기억하시죠?"
아직 신생 길드나 다름없던 아르킨 길드가 갑자기 B등급 균열을 배당 받으면서 언론과 관련 업계에서 논란이 있었다.
물론 우리 길드가 깔끔하게 균열을 클리어 내면서 약간 논란이 사그라 들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을 물고 늘어지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은 상황.
“그것 때문인지 이번에 허가가 잘 안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에요.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일을 진행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흐음.……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요? 저번처럼 억지로라도 되게 해야죠."
“……"
“그 회장님한테 손 써달라고 부탁하세요. 아마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해야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거예요."
대놓고 강유환 회장을 언급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율희 씨, 저번에는 이런 거 싫어 하시지 않았어요?"
지난번에는 강유환 회장이 힘을 쓰는 것에 대해 아주 싫어했었는데, 저번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서율희는 내 물음에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좋은 건 아니에요. 괜히 길드에 이상한 소문만 생기고, 다른 길드가 견제할 빌미를 만들어 주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세진 씨한테 중요한 일이잖아요."
“면목 없네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분이 손쓰게 만드세요. 안 그러면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게 생겼으니까."
"알겠어요."
나는 믿어달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율희는 준비한 서류들을 차례로 보여주며 지금껏 준비한 것들을 차례로 설명해준 뒤,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게 제가 준비한 끝이에요. 아직 미궁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워낙 많아서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약간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머지는 저희가 직접 부딪치고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아마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예요.”
“저는 걱정 안 해요. 우리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이가 없었는지, 서율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절대로 자신만만할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안해하는 모습보다는 왠지 믿음이 가네요."
"으읏, 너무 생각 없이 말했나요?"
어려운 상황에 너무 근거 없이 자신만만해 한 것 같아, 나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는 이런 내 모습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