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34화
76. 뜻밖의 초대(1)
오연우와 피렌느가 엘프 마을로 놀러간 후.
나는 느긋하게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아주 오랜만에 소파에 늘어져 TV를 시청했다.
고통스럽던 숙취도 조금씩 사라져 어느새 원래의 몸 상태로 돌아온 듯 했다.
-삐이익! 삐이익!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나에게 세이가 계속 달라붙었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로 녀석을 쓰다듬어주거나,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며 놀아줬다.
“아앗! 그렇게 세게 물면 안 놀아 준다?"
-뀨우우……
내가 약하게 다그치자 녀석은 잠시 풀이 죽어서 눈치를 봤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그랬냐는 듯 다시 내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뀨우우.
세이는 한참 동안 내 손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지쳤는지, 내 배 위에 올라오려고 버둥거렸다.
내가 살짝 손으로 받쳐주니 녀석은 배 위에 올라가 꼬리를 말고 몸을 웅크렸다.
녀석이 잠을 자려는 모양새로 잠잠해지자 나도 노곤한 기분이 몰려왔다.
몸을 완전히 소파에 밀착시키고,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세이의 작은 숨소리와 TV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자장가 삼아 조용히 낮잠을 청했다.
****
달콤한 낮잠을 즐기던 나는.
주변의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슬쩍 눈을 떴다.
내 배위에 있던 세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주변에는 돌아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뜬 채로 소파 위에 누워, 아직 남아 있는 달콤했던 낮잠의 여운을 즐기고 싶었으나.
"어? 세진 일어났다."
“아빠. 일어나셨어요?"
"퓨이! 퓨이!"
아쉽게도 금방 아이들에게 발각되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속 잠을 자서 그런지 몸은 찌뿌둥했지만, 숙취는 깔끔하게 사라져 기분은 무척 개운해졌다.
양팔을 쭉 펼치며 기지개를 켜고 있으니 내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나는 아이들을 한 명씩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나 자는 동안 뭐 하고 놀았어?"
“할머니랑 모두 같이 엘프 마을에서 놀았어요. 오늘 할머니한테 약초 다듬는 법을 배웠거든요."
"퓨이! 퓨이!"
"그리고 과일들로 주스 만드는 법도 배웠어. 나중에 세진한테도 만들어 줄게."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아이들은 루나르엘과 엘프 마을에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시간은 오후 4시를 넘겼고.
해도 조금씩 산등성이 쪽으로 넘어 가는 중이었다.
오랜만의 휴일 대부분을 잠으로 때운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늦게나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까 낮잠을 자기 전에 봤었던 오연우와 피렌느 그리고 시르엘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오는 거야?"
“네…….”
“너무 피곤해서 낮잠만 자 버렸네.
오랜만에 찾아온 건데, 너무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
신경을 못 써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오연우의 반응이 살짝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기가 살아서 빨리 영상 찍자고 난리를 부렸을 텐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피렌느 역시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마지막으로 시르엘을 쳐다보니 그녀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직감적으로 뭔가를 눈치챈 나는 피렌느를 향해 눈을 좁히며 질문을 던졌다.
“피렌느, 또 사고 쳤죠?"
"에? 무, 뭐가요?"
“괜히 더 혼나기 전에 빨리 말해요. 무슨 사고를 친 거예요?"
시선을 땅바닥으로 보내며 입을 우물거리는 피렌느.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 앞에선 아이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나는 오연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연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 데 그래?”
"으으,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일단 말을 해봐. 뭐가 문제인지 알아야 뒷수습이라도 하니까."
"그게..….”
나는 오연우를 통해 오늘 자고 있었던 동안 엘프 마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
나의 허락을 받고 엘프 마을로 향한 오연우와 피렌느.
처음에 그 둘은 별다른 것 없이 평범하게 엘프 마을을 구경했다고 한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엘프 마을의 집들도 구경하고, 이제 어설프게나마 한국어가 가능한 마을 주민들의 환영까지.
피렌느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마음껏 마을 사진도 찍고, 점심 식사까지 대접을 받아서 오연우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덕분에 피렌느에게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 그녀가 오연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게 된다.
그 부탁은 다름이 아니라 엘프 마을에서 방송을 해보고 싶다는 것.
"예? 방송이요?"
“네. 저번에 제가 방송에서 만났던 분들에게 마을을 자랑하고 싶은데. 안될까요?"
“으음. 그럼 세진이 형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세진 님 허락만 받으면 되는 거죠? 당장 받으러 가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 나는 소파 위에서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에 바쁜 일정에 피곤해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를 깨우기 미안했 던 그들은 자는 나를 내버려 두고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어쩌죠? 지금 형한테 허락을 받기는 힘들 것 같은데."
“그럼 아주 잠깐만 방송해 보면 안 될까요?"
"으음......"
오연우는 웬만하면 내 허락없이 방송을 켜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늘 온종일 자신을 친절하게 안내해 준 피렌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 조금만 하는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연우 님."
그렇게 둘은 엘프 마을을 배경으로 라이브 방송을 켜게 되었고 문제의 사건이 진행되었는데……
****
"하아. 그러니까 내가 자는 사이에
엘프 마을에서 라이브 방송을 켰다?"
"......"
"......"
“거기다 그냥 방송만 한 게 아니라, 엘프 마을에 초대를 해주겠다고 선언했다고?"
“그게 피렌느 님이 너무 흥분하셔
가지고……”
“죄송합니다……"
나는 분명 사라졌던 숙취가 다시 되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너튜브 채널의 반응을 살펴보니 벌써 난리가 난 상태였다.
-엘프 마을에 갈 수 있다는 게 사실임?
-오늘 라이브 방송에서 정말로 초대해 준다고 말했다는데.
-으아아! 진짜 엘프 만나러 간다!!
-방송만 한 거야? 공지는 따로 없어?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자세한 공지를
기다리는 사람부터, 어떻게 소문을 듣고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까지.
우리 채널의 구독자뿐만 아니라 여러 커뮤니티에서 실시간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대략 사태파악을 완료한 나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장로 회의에 끌려갈 정도로 복잡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오연우와 피렌느의 설레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없던 일로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받을 질타와 비난은 어느 정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오연우와 피렌느를 보며 말했다.
“빨리 채널에 공지로 실수라고 올려. 아직 자세하게 계획을 밝힌 것도 아니고, 실수라고 말하면서 사과하면 대충 무마할 수 있을 거야."
오연우와 피렌느가 너무 신경을 쓰지 않도록, 최대한 별일 아니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계속 눈치를 보던 오연우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형. 그냥 이거 진짜로 하면 안 돼요?"
"뭐? 진짜로 사람들을 엘프 마을에 초대하겠다고?”
“네. 저번에 여기로 사람들을 초대한 적도 있고. 엘프 마을의 엘프들도 상관없다고 그래서요."
오연우의 말에 나는 시르엘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연우 님의 말대로 마을의 엘프들이 바깥세상에 관한 관심이 커졌거든요. 아마
마을에 손님을 초대한다는 계획에 대부분 찬성할 거예요."
시르엘의 말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깥세상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모습의 엘프들이었다.
처음 엘프와 만났을 때라던가, 우리가 세계수를 지키는 마을에 방문 했을 때, 모든 엘프의 시선에는 경계와 불안으로 가득했었다.
그나마 피렌느가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교류를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외부의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니.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생각의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듯 했다.
“그래도 장로회에서는 반대하지 않을까요?"
"그게 사실은요. 오르트 장로님과 어머니에게도 여쭤봤는데, 세진 님만 허락하신다면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
“이 마을에 대한 일은 세진 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만약에 세진 님이 찬성하신다면 마을에 외부인을 초대해도 괜찮다며...... "
"허어..….”
이어지는 시르엘의 설명에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장탄식을 내뱉었다.
설마 오르트 장로와 루나르엘까지도 그렇게 쉽게 허락을 해줄지는 몰랐다.
그들이 나를 믿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상황에 그만큼 부담스러워졌다.
덕분에 나의 고민이 길어지자 오연우와 피렌느의 눈에는 기대감과 불안으로 가득해졌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나는 불쑥
시르엘에게 질문을 던졌다.
“시르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저 말인가요?"
깜짝 놀라 되묻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엘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천천히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저는 마을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어제 길드원분들이 마을에 방문하셔서 정말 즐거웠거든요.”
그녀는 어제의 일을 이야기하며 작게 웃음 지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어제 길드원들과 엘프 마을에 초대를 받아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아르킨 길드원들은 이미 엘프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완전히 외부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내 생각 이상으로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모습에 신기할 정도였다.
“아직 마을 엘프 중에는 외부인의 방문에 달가워하지 않는 분이 있을지 몰라도, 세진 님이 초대한 분들이라면 모두 허락할 것 같아요. 물론 저도 같은 마음이고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시르엘은 신뢰 가득한 눈빛과 따뜻한 응원의 말로, 어지러웠던 내 마음을 정리해 줬다.
“저도 시르엘 님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세진 님이 데려오신 분들이라 면 최대한 열심히 마을을 안내해 줄 거예요!"
피렌느도 나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
을 했지만, 시르엘과는 다르게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느껴져 오히려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형.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라도 사과 공지 올릴까요?"
“사과 공지는 됐어."
"......?"
“대신 자세한 일정이 나올 때까지
사람들에게 기다려달라고 공지 올려.”
“아. 네! 바로 그렇게 올릴게요."
오연우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 새로운 공지를 올리기 위해 노트북을 가지러 뛰어갔다.
시르엘과 피렌느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