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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33화 (233/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33화

75. 휴식의 시간(3)

-꿀꺽꿀꺽.

또 한잔의 엘프주를 받아넘기며 나도 모르게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으어어어.….."

“세진 님, 괜찮으세요?"

옆에 있던 시르엘이 내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걱정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즐겁고 들뜬 분위기 속에 따라주는 엘프의 술잔을 하나씩 받아넘기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세상이 뒤흔들리고 있었 다.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엘프주이지만.

그렇다고 도수가 약한 술은 아니라서, 무턱대고 받아넘기다 보니 어느새 내 한계 주량을 넘어서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술 한잔을 따라주고 싶어 기다리고 있는 엘프들이 한가득했다.

보다 못한 루나르엘과 시르엘이 앞으로 나서, 기다리던 엘프들을 직접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세진 님은 이제 더 술을 마실 수 없으니까. 다음 기회에 오도록 하세요."

“억지로 세진 님께 술을 따라주지 마세요. 이러다 새로운 마을의 장로 님이 쓰러지겠어요."

둘의 설득 때문에 엘프들은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물러서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변에 몰려들었던 엘프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대끼는 속을 진정시켰다.

“세진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시르엘. 오랜만에 조금 과음을 해서 그런지 약간 어지럽네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시르엘에게 나는 살짝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대답해줬다.

루나르엘은 이런 내 모습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세진 님. 엘프들에게 술을 대접한다는 의미는 굉장히 뜻깊은 행동이라…… 모두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세진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약간 무리한 것 같네요.”

“아...... 그런가요?"

그녀가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조금 전까지 술을 따라주고 싶어 안달 났었던 엘프들이 약간 다르게 보였다.

쉴 새 없이 술을 따라주며 엘프들 모두 행복한 미소를 짓길래, 짓궂은 장난을 치는 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말로 나에게 술을 대접한 것이 기뻐서 그랬던 것 같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아까 아쉬운 얼굴을 하고 돌아간 엘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쩝…… 조금 무리하더라도 더 마실 걸 그랬나?'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루나르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위로했다.

"괜찮아요. 오늘 술을 따라주지 못한 엘프들에게는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의 부드러운 위로에 나는 표정을 풀고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확실히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까.

이렇게 몰려들었던 엘프들이 사라지고.

루나르엘과 시르엘은 내가 혼자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갑자기 주변에 많던 엘프들이 사라지자 약간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홀로 자리에 앉아 준비된 음식을 깨작거리며 속을 달랬다.

부대끼던 속이 약간 가라앉고 여유가 생기자,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형형색색 조명 아래에서.

초대된 길드원들과 엘프들이 저마다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몇 엘프들은 약간 어색하게 한국 말을 사용하며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또 몇몇은 가볍게 노래를 부르거나 흥겹게 춤을 추면 서 즐거운 마음을 표현했다.

-털썩.

"어이, 엘프 장로님! 좀 괜찮으십니까?"

옆으로 누가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취기가 올라온 모습의 아저씨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좀 괜찮냐? 그러게 술잔도 적당히 받아야지. 사회생활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크크큭.”

"조금 무리하긴 했네요. 그래도 술을 대접하는 일이 엘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들었더니 나쁜 기분은 아니에요."

루나르엘이 나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저씨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서 그렇게 술을 따라 주려고 했던 거야? 그것참 좋은 풍습이네. 점점 마음에 드는걸?”

“아저씨한테는 정말 좋은 풍습이겠네요.”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 아래쪽에서 내 다리 를 툭툭 건드렸다.

“모렛?"

“후모, 후모.”

나는 아래쪽에 있는 모렛을 무릎 위로 끌어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모렛, 왜 그래?"

“후모?”

녀석은 음식과 함께 놓여 있는 엘프주를 가리키며 뭔가 기대하는 눈빛을 보였다.

아마도 자신이 만든 엘프주의 평가가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맛있었어. 이 정도면 모렛은 진짜로 술집을 차려도 되겠는데?"

“후모! 후모!"

내 칭찬에 모렛은 기쁜 듯 웃으며 짧은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아. 정말로 괜찮은 술이었어. 그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향이나, 부드러우면서도 화끈한 맛. 아주 좋아.

모렛, 나랑 같이 정말로 술집 하나 차리지 않을래?"

“후모! 후모!"

엘프주를 칭찬하면서 같이 술집을 개업하자는 아저씨.

하지만 모렛은 화를 내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내 쪽으로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모렛은 아저씨랑은 술집 을 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허, 이거 섭섭하구먼. 어쩔 수 없지. 이 섭섭한 마음은 술로 왕창 해결해야겠어."

"후모! 후모!"

아저씨는 일부러 약 올리는 표정을 지으며 술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고, 모렛은 기겁하며 내 품을 떠나 재빨리 아저씨의 뒤를 따랐다.

나는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다가, 술이 아닌 시원한 과일 주스를 한 잔 입에 머금었다.

주변은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아까처럼 신나는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두런두런 모여들어 각자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엘과 티아가 나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퓨이와 세이의 귀여운 재롱도 구경하는 사이.

홀로 자리를 지키던 나는 살짝 노곤함과 졸음이 몰려왔다.

약간 정신이 흐려지려고 할 때.

-털썩.

또다시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음? 아저씨가 또 오셨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니, 서율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술을 약간 과하게 마셨는지, 평소의 차가운 얼굴이 아니라 조금은 붉게 달아올라 생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로 남은 어색함 때문인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까 술 엄청나게 받아 드시던데."

“아…… 이제는 괜찮아요. 조금 무리하기는 했는데.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죠."

“그래요? 다행이네요."

"......"

"......"

순간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고.

왠지 숨이 막히는 분위기에 올라오던 술기운이 저절로 깨는 기분이 들었다.

서율희는 손에 들고 있던 엘프주를 홀짝이더니,몽롱한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정말 좋은 곳이네요. 마을도 정말 예쁘고, 엘프들도 모두 착한 것 같고, 이제는 한국말도 잘하니까 더 가깝게 느껴져요.”

“네. 모두 좋은 분들이죠."

어느새 나도 이 마을에 소속감을 느끼게  됐는지, 그녀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회의 시간에 죄송했어요.”

"예?"

“그렇게 짜증을 낼 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괜히 감정이 격해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뇨. 제가 잘못한 일이니까.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그녀는 나를 잠시 지긋이 바라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솔직히 조금은 서운했어요. 저에게 미궁이라는 어려운 짐만 맡겨놓고, 길드 일에는 신경을 써주시지 않는 것 같아서요."

“.......”

“그런데 오늘 여기에 직접 와서 엘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세진 씨가 얼마나 엘프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어요."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그녀의 낯선 칭찬에 나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괜히 시선을 돌렸다.

“여기 있는 엘프들 모두 세진 씨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세진 씨도 나름 바쁘게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다는 걸요.”

그러면서 서율희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다시 사과의 말을 꺼냈다.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오해해서 죄송해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미궁에 관해서 율희 씨에게 많은 부담을 준 건 사실이니까요. 솔직히 율희 씨가 없었으면 미궁에 도전할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이번에는 내가 칭찬하는 듯한 말에 그녀가 쑥스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뿐만 아니라 길드원들도 율희 씨가 얼마나 고생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지, 다 알고 있을 거예요."

"…...”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제가 고맙다고 해야겠죠. 율희 씨가 길드의 중심을 잡아주고 계시니까요."

“그런…… 가요?"

"물론이죠."

서로의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놓은 탓인지 약간 쑥스럽긴 해도, 뭔가 후련하면서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나와 서율희는 처음 어색했던 분위기는 없애고,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길드의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엘프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그녀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세진 씨. 만약에 이번 미궁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낸다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부탁이요? 무슨 부탁인데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곤란한 부탁은 아닐 거예요. 제 부탁 들어주실래요?"

“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면 당연히 해드려야죠."

"후훗. 고마워요.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더 열심히 미궁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하.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서율희와 서로 바라보며 웃는 사이, 새로운 엘프 마을의 밤은 점점 깊어져 갔다.

****

-뀨우?

“......"

-뀨우우우.

"으으응...… 세이야. 나 조금만 더…… 잘게."

나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옆에서 장난을 치는 세이를 밀어냈다.

이런 내 움직임에도 녀석은 나에게 더 달라붙어 나를 깨우려 노력했다.

-삐이익! 삐익!

"끄으으 퓨이야. 세이 좀 달래줘 봐…… 퓨이야?"

약간 멍하니 퓨이를 찾다가,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이미 침대를 떠난 아이들. 그리고 평소의 아침과는 다른 분위기.

약간 싸한 느낌과 함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창문으로는 아침 햇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화창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오전 11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뒤늦게 아침 길드 회의를 생각해내고,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뀨우?

"으헉! 늦었다!"

나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휴대폰을 챙겨 방을 빠져나왔다.

세이도 내 뒤를 쫄래쫄래 뒤따랐다.

1층으로 내려가니 임진혁과 피렌느, 그리고 오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일어났어? 속은 좀 어때?"

"형! 저 늦었어요. 오늘 길드 회의

있는데……”

"그거 취소됐어. 오늘 길드원 전부

쉰다던데?"

"어...... 정말이에요?"

“휴대폰 확인해 봐. 부길드장이 보낸 문자 있을 테니까.”

황급히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그의 말대로 오늘 회의를 취소한다는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나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맡겼다.

“하아…… 다행이다.”

“크크큭. 커피 한 잔 타줄까?"

"부탁드릴게요.”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

아침부터 혼자 허둥지둥한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임진혁은 키득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옆에서 이 모습을 구경하던 오연우가 슬쩍 말을 꺼냈다.

"형. 그럼 오늘 쉬시는 맞죠?"

“그런 것 같네. 원래는 길드에 나가 어제 못한 회의를 끝냈어야 했는데…… 근데 넌 언제 왔냐?"

“흐흐, 오늘 길드 일정이 취소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죠."

“하아, 너도 진짜 지독하다.”

최근에 너무 바빠서 오연우의 연락을 받아줄 수가 없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 같았다.

“엘프 마을 새로 생겼다면서요. 저 구경 좀 시켜주시면 안 돼요?"

“지금 나 좀 힘든데. 나중에 같이 가면 안 되겠냐?"

“형, 정말 이럴 거예요?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을 이렇게 매몰차게 대해도 되는 거예요?"

"으으. 나 진짜 힘들어서 그래.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나는 말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내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는지. 오연우도 더는 억지 부리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피렌느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음. 그러면 제가 같이 구경시켜 주고 올까요?"

“피렌느가요?”

"오옷! 저는 상관없어요. 형, 그럼 피렌느 님이랑 엘프 마을에 다녀올게요."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머리를 울리는 숙취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그렇게 해라. 피렌느. 이 친구 좀 부탁드릴게요."

“헤헤. 맡겨만 주세요.”

오연우와 피렌느가 집을 나서고,

조용해진 거실 소파에서 나는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앞으로 생길 사건에 대해서는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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