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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31화 (231/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31화

75. 휴식의 시간(1)

"......진씨?"

“.......”

"세진 씨?!"

"으헉! 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가 날카로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율희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진 씨. 중요한 회의 시간에 지금 졸고 계신 거예요?"

"으으. 조금 피곤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길드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네요.”

"죄송합니다. 율희 씨."

따끔한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인정했다.

이런 내 모습에 그녀도 마음이 불편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싸늘해진 분위기에 함께 회의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도 모호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그나마 이런 분위기에서 말을 꺼낼 만한 담력을 가진 정대훈 아저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자, 길드장이 조금 피곤한 것 같은데. 너무 그렇게 날카롭게 행동 하지 말자고."

“하아…….”

“그리고 세진이가 없어도 부길드장이 다 알아서 잘하니까……”

“그럼 안 된다고요!"

-찔끔!

“아무리 제가 길드에서 많은 일을 맡고, 관리해도 길드의 주인인 세진 씨도 어느 정도 역할을 다 해야 해요."

“쩝‥….”

“이 길드는 세진 씨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길드니까, 어느 정도 그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나를 감싸주려 말을 꺼냈던 아저씨도 서율희의 날카로운 반응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진행할게요.”

그녀는 쉰다는 말만 남겨두고 쌩하니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나마 서율희를 가장 오래 봤던 윤동현이 나머지를 위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율희 누나도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아요. 제가 따라가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안해요. 동현 씨.”

"아뇨. 괜찮습니다. 길드장님. 금방

다녀올게요."

그가 서율희를 따라 회의실을 빠져 나가고, 나는 남아 있는 아저씨와 김유미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찮아요. 길드장님. 요즘 많이 바쁘시잖아요."

“그래. 우리 와이프 이야기 들어보니까 집에서도 엄청 바쁘다던데.”

오히려 걱정해주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부정하지는 못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최근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로 나는 굉장히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일단 B등급 균열을 클리어하면서,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귀찮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나마 서율희가 옆에서 많은 부분을 도와줬기 때문에 망정이지, 아마 혼자서 다 처리하려고 했다면 길드고 뭐고 다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태백산 미궁 공략을 위한 계획 준비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율희가 많은 부담과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상황.

이런 환경 속에 방금 그녀의 날카로운 반응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만했다.

그렇다고 내가 편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나도 여러 가지 일들로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첫 번째로는 서율희와 마찬가지로 태백산 미궁에 대한 준비.

아르킨 길드와 엘프들을 함께 합을 맞추는 연습은 계속됐고, 나도 항상 그 연습에 함께 참여해 내 역할을 다했다.

거기다 틈틈이 신지아의 연구소에 방문해 아티팩트에 대한 논의와 골렘 개발에 참여했다.

두 번째 이유는 새로 생긴 엘프 마을 때문이었다.

호숫가에 머무는 엘프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생겨난 엘프 마을, 내가 그곳의 장로가 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아졌다.

물론 시르엘, 엘디르, 피렌느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긴 했어도, 이제 막 생겨난 마을이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계속 생겨났다.

적당히 다른 엘프들에게 일을 대신 시켜도 될 문제였지만, 괜히 큰소리 쳤던 게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생명의 샘'에 대한 관찰과 연구도 틈틈이 이어나가고 있었으니. 정말 눈코 뜰 새가 없다는 말을 몸소 체감하는 중이었다.

아저씨는 이런 내 상황을 아주머니에게 자주 전해 들었는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무리할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좀 푹 쉬는 게 어떠냐?"

“율희 씨도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부길드장도 같이 좀 쉬어. 둘 다 너무 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김유미도 아저씨 말에 동의하며 말을 보탰다.

“대훈 아저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무리 바빠도 쉴 때는 좀 쉬어 야 한다고요."

"으음.......”

내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아저씨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밀어붙였다.

“요즘 나랑 우리 애들도 놀러 안 간지 오래됐고, 길드 사람들끼리 회식 안 했는지도 오래됐잖아."

“그렇긴 하죠.”

“거기다 옆에 새로운 엘프 마을도 생겼다며. 한 번 구경시켜줘. 세진이 네가 그 마을 주인이라면서?"

"주인은 아니고 그냥 관리만 도와 주는 거예요."

"에헤이, 괜히 그러지 말고, 아무 튼, 그럼 오늘은 다 같이 쉬는 거다?”

아저씨는 계속 나를 밀어붙였고, 김유미도 옆에 앉아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흐흐, 좋아. 좋아. 아이들한테 빨리 연락해 줘야겠다."

"와아! 그럼 오늘 말로만 들었던 그 엘프 마을을 구경할 수 있는 거예요? 너무 좋다!"

“근데 우리 오늘 쉰다고 율희 씨한테는 누가 말 하실 거예요?"

"......"

"......"

아저씨와 김유미는 서율희 이야기가 나오자,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유미야. 네가 가는 게 어떠냐?”

"에엑! 제가요? 오늘 쉬자고 하신 건 아저씨잖아요?"

"어허, 세진이 설득은 내가 했잖아. 그럼 남은 율희 씨 설득은 네가 해야지."

"히잉. 그런 게 어딨어요?!"

“크흠.”

조금 전까지 엘프 마을을 구경할 상상을 하며 설레던 김유미는 울상을 지었다.

아저씨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애절하게 내 쪽을 바라봤지만.

"......"

나도 슬쩍 시선을 돌려버렸다.

김유미에게는 미안하지만, 방금 잘못을 저지른 나였기에, 서율희에게 오늘은 쉬자고 말할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김유미는 흔들흔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이 마치 혼나기 위해 교무실로 불려가는 학생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안쓰러운 그 모습에 나는 미안한 감정이 떠올랐고, 아저씨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휴대폰으로 도착한 메시지.

-부길드장님이 오늘은 쉬시겠대요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는지, 메시지 뒤에 웃는 모습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나중에 들어서 안 사실이지만.

김유미가 말을 전하러 가기 전에 이미 윤동현이 비슷한 이야기를 서율희에게 하는 중이었고, 김유미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낼 때 옆에서 윤동현이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아무튼.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짓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느긋하게 오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빠, 어서 오세요!"

"와아! 세진. 오늘은 일찍 왔네?”

"퓨이! 퓨이!"

-삐이익!

예상외에 빠른 귀가에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최근에 일이 많아 귀가가 늦는 날이 많아져서 그런지, 일찍 귀가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내가 몰려든 아이들을 하나씩 챙기고 있을 때, 부엌에서 아주머니가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세진아. 오늘은 일찍 돌아왔네?”

“네. 길드 일이 좀 빨리 끝나서요. 아저씨한테 못 들으셨어요?"

“그런 말 하나도 없던데. 응? 잠깐만….. 어휴, 이제 문자로 보냈네. 거기다 오늘은 다른 길드 사람도 여기 오는 거야?"

“네. 아저씨는 아윤이랑 선우 데리고 오신다고 했고, 다른 분들도 잠시 집에 들렀다가 여기로 모이기로 했어요."

“이 사람은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

이야기해 주지. 준비할 시간도 없게.”

"하하. 오늘 갑자기 일정이 바뀐 거라. 아저씨도 깜빡하셨나 봐요.”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아주머니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부엌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응? 불이라도 켜놓고 오셨나?'

그렇게 의문을 가지는 사이. 아주머니가 뛰어들어 간 부엌에서 시르엘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시르엘도 있었네요?"

“벌, 벌써 오셨어요? 오늘도 늦게

들어온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네. 오늘은 예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요."

“다행이네요…..."

"......?"

뭔가 어색한 시르엘의 반응에 잠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계속 안겨드는 아이들 때문에 금방 머릿속 에서 그 생각을 지워냈다.

"퓨이! 퓨이!"

“세진, 오늘은 일 다 끝난 거지? 그럼 우리랑 같이 놀자."

- 삐이익!

-......!

퓨이와 티아는 물론이고.

세이는 내 바짓가랑이를 물어 당겼고, 위니도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나를 끌어당겼다.

"알았어. 나 이제 어디 안 가니까 천천히 천천히."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가야 했다.

아주머니는 아이들과 내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고, 시르엘은 뭔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아르엘의 모습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놀아주기 시작했다.

최근에 자주 놀아주지 못해서 그런지,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아이들을 상대해주고 있을 때.

피렌느가 집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헉?! 세, 세진 님.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좀 일찍 왔는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노, 놀랐다고요? 누, 누, 누가요?"

"......?"

가장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는 피렌느가 처음 한국어를 배웠을 때처럼 말을 더듬는 모습에.

다시 한번 더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눈을 좁히며 피렌느에게 물었다.

“혹시 뭐 또 사고 쳤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뭐 매일 사고만 치는 줄 알아요?"

“매일 사고를 치는 건 아니지만, 제일 많이 사고를 치시긴 했죠."

“.......”

엘프 마을이 생기면서 많은 엘프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데, 그 중 피렌느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비례해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는데.

특히 가장 강렬했던 것은 그녀가 호기심에 여러 가지 성인용품을 들여온 사건이었다.

나도 정확히 점검하지 못한 물건들이 그녀를 통해 엘프 마을로 흘러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 장로들에게도 전해졌다.

나는 이 일 때문에 피렌느와 함께 장로 회의에 끌려가, 그 물건들의 정체와 사용법에 대해서 진땀빼며 설명을 해야만 했다.

호기심 대마왕 피렌느답게, 엄청나게 많고 다양했던 그 물건들은 엘프 장로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피렌느. 다 좋으니까. 제발 장로 회의에 또 끌려가는 일만 없게 해주세요."

"아! 진짜로 사고 친 거 아니라니까요!"

그녀는 내 말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뒤로.

오랜만에 아이들과의 시간이 즐거워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흘러갔고,

시르엘과 피렌느의 이상했던 모습은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모이기로 했던 길드원들이 통나무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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