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9화
74. 새로운 엘프마을(3)
호숫가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한 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을 시작했다.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시르엘을 찾아갔다.
예고 없는 내 방문에 그녀는 첫 번째로 깜짝 놀랐고, 그다음에 바로 이어진 내 부탁에 다시 한번 더 놀라야 했다.
“지금 당장 장로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요?"
“네. 조금 갑작스럽기는 해도 부탁드릴게요."
"으음.......”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안 될까요?"
“혹시 어제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맞아요."
시르엘이 어제의 일을 언급하며 묻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내 대답에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세진 님의 뜻이 그렇다면, 저도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고마워요. 시르엘."
“그럼 언제 출발하실 예정이신가요?"
예정을 물어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해줬다.
"지금 당장이요!"
"......?!"
****
나와 시르엘은 예전에 만들어놨던 균열 입구를 통해 곧바로 엘프 마을에 도착했다.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덕분에 마을에는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저번과는 다르게 반가운 얼굴로 둘러싼 엘프들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좀 바빠서요. 아뇨. 선물은 안 주셔도 되는데. 어엇!"
무작정 선물을 떠넘기는 엘프부터,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하는 엘프까지. 너무나도 열렬한 환영에 함께하던 시르엘이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나는 엘프들의 뜨거운 관심을 겨우 물리치고, 시르엘과 함께 가장 익숙한 루나르엘의 집으로 향했다.
-똑. 똑. 똑.
집 문을 두드리자 예전과 다름없는 아름답고 신비한 외모의 루나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어서 와요. 세진 님."
그녀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얼굴 가득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루나르엘 님."
"괜찮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시르엘, 너도 잘 지냈니?"
“네. 어머니."
그녀는 시르엘과도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잠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은 이엘과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이엘이 오지 않았다는 말에 루나르엘은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다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집 내부 모습을 구경하는 사이, 루나르엘은 금방 차와 간식을 내왔다.
“대접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네요. 손님이 올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를 해뒀을 텐데."
“아뇨. 이 정도도 충분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아마 세진 님이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벌써 눈치채셨네요.”
적지 않은 연륜 때문인지 루나르엘은 금방 우리의 방문 목적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녀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인자한 미소로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루나르엘의 배려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마을의 장로님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장로님과 이야기를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시르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시르엘은 어제 있었던 일들과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흐음, 그런 일이……"
시르엘의 설명을 전부 들은 루나르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겠어요. 장로님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 다르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물론이고 시르엘마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그렇게 간단히 허락해 주셔도 되는 건가요?"
"물론 장로님들을 불러내는 건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세진 님의 부탁이고, 또 저도 그 문제는 우리 마을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루나르엘은 내 질문에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해 줬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시르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혼자 집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마을의 경비대원이 나를 찾아왔다.
“세진 님, 저와 함께 가시죠."
"......?"
나는 경비대원에게 이끌려 장로들의 회의가 열리는 커다란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오랜만에 다시 방문하게 된 회의장.
저번에 왔을 때 차갑고 살벌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이번에는 친근한 분위기로 시작됐다.
“오랜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되는군. 그동안 잘 지냈나?"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실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엘프는 편안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고, 나도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한쪽에서는 넬모란 장로가 슬쩍 반가운 눈빛을 보냈고, 또 루나르엘도 응원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물론 회의실에 모인 모든 장로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굉장히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래.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무슨 일인지 바로 들어볼 수 있겠나?"
“다름이 아니라……”
나는 아까 시르엘이 설명했던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엘프 장로들에게 설명했다.
장로들은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 설명이 끝나고. 회의실에 분위기는 조금 전보다 무거워졌다.
“세진, 일단 무슨 상황인지는 잘 전해 들었네. 그리고 한가지 말해주자면 우리 쪽에서도 이미 그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하던 중이었다네.”
"아. 그렇군요."
“마을의 중요한 문제이니 당연히 우리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하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상황이라네."
장로의 대표는 진심으로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단순히 그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고.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겠지?"
“네. 저 나름대로 해결책을 생각해 봤습니다."
“대단하군. 마을의 일원도 아닌 자네가 이렇게 문제의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다니……”
장로들의 대표는 그 말을 끝으로 주변의 장로들에게 슬쩍 시선을 보내자, 시선을 받는 동시에 장로들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아무래도 나를 빗대어 나머지 장로들의 행동을 탓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자네가 생각한 해결책을 한 번 이야기해주겠나?"
****
“이곳이 자네가 사는 곳인가?"
“네. 원래는 저쪽 호수 너머에 사시던 아르엘 님의 도움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좋은 곳이야."
나와 함께 균열 입구를 넘어온 엘프 장로의 대표, 테오른은 호숫가의 풍경을 감상하며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함께 이곳으로 넘어온 루나르엘은 아르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루나르엘과 테오른이 잠시 주변을 구경하는 사이.
엘디르가 경비대원들과 함께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테오른 님, 루나르엘 님.”
“수고가 많네. 엘디르 경비대장."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엘디르와는 다르게, 그를 따르는 경비대원들은 갑자기 호숫가에 방문한 테오른과 루나르엘을 보고 크게 동요하는 듯했다.
"엘디르 경비대장. 이곳에 와 있는 엘프들을 좀 불러 모아주겠나."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불러모으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기다리는 동안 저희 집으로
가시죠."
“잠시 신세를 져야겠네."
"아뇨. 괜찮습니다. 별로 멀지 않으니 따라오세요.”
엘디르는 명령에 따라 엘프들을 모으러 떠났고, 시르엘과 나는 처음 이곳에 방문한 테오른과 루나르엘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얼마 걷지 않아 멀리서 통나무집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마당에는 집 밖으로 나와 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테오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통나무집을 구경했고.
루나르엘은 아이들 사이에 놀고 있던 이엘을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 할머니!"
이엘은 루나르엘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포옥!
달려와 그대로 할머니 품에 안긴 이엘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세진 님을 따라 도착했단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니?"
“네. 잘 지내고 있었어요.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나도 그렇단다. 이엘."
할머니와 손녀가 오랜만의 만남을
기뻐하는 사이, 이엘을 따라 나머지 아이들이 뒤따라 이곳으로 왔다.
“어? 저번에 봤던 이엘 할머니다."
"퓨이?"
“후모?"
티아는 루나르엘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는 척을 했고, 처음 보는 엘프에 퓨이와 모렛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있었던 피렌느는 테오른과 루나르엘을 발견하고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앗! 테오른 장로님?!”
“잘 지냈느냐. 피렌느.”
“아…… 네. 잘 지냈어요……"
뭔가 기가 죽은 듯한 모습을 한 피렌느는 슬쩍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세진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뭐가요?"
"아니, 갑자기 왜 테오른 장로님이..….”
"뭘 그렇게 속삭이느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테오른의 낮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떨어졌다.
“일단 들어가시죠."
“그럼 실례하겠네.”
“실례할게요. 세진 님.”
나는 테오른과 루나르엘을 집으로 안내했다.
거실에 편한 자리로 안내한 뒤, 바로 부엌으로 가 마실거리와 간식을 준비했다.
이엘은 루나르엘과 시르엘 곁에 달라붙어 쫑알쫑알 이야기를 계속했 고, 루나르엘은 그런 귀여운 손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느새 거실로 나온 세이를 포함한
나머지 아이들은 새로운 방문자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고.
피렌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한 모습으로 테오른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마실 거리와 간식을 대접하면서 슬쩍 질문을 던졌다.
“테오른 님은 피렌느와 친분이 있으신 건가요?"
"가까운 친척이라네. 내 동생의 딸이거든."
“아…...”
“어렸을 때부터 마을의 사고뭉치로 유명했는데. 여기서는 사고를 안치고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
"테오른 장로님!!"
테오른에 의해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흘러나오자,피렌느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평소에 피렌느를 지켜본 바로는,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느껴져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화를 나누는데, 옆에서 퓨이가 슬쩍 울음소리를 냈다.
“퓨이, 퓨이."
"아! 그러고 보니. 아이들 소개를 안 하고 있었네요.”
나는 테오른과 루나르엘에게 차례로 아이들을 소개해 줬다.
그들은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허허. 넬모란 장로에게 전해 들었 지만,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구먼."
"그러게요. 얘들아. 우리 이엘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정말 고맙구나.”
그렇게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집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테오른 장로님. 이곳에 있는 엘프들 모두 모였습니다.”
엘디르가 집 안으로 들어와 정중하게 보고를 올렸다.
“알겠네. 지금 바로 나가도록 하지.”
테오른 장로를 시작으로 나와 루나르엘이 일어났고, 피렌느와 시르엘은 아이들과 함께 집 안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