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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28화 (228/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8화

74. 새로운 엘프마을(2)

갑작스럽게 몰리는 부담스러운 시 선들에 나는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짧게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미뤘다.

어쩌면 내 의견이 이 문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르토 쪽 엘프들은 이런 내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듯한 반응을 보였고, 니르웬 쪽 엘프들은 살짝 실망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있으면 날도 어두워지고, 이제 저녁 준비도 해야 하니. 오늘은 이만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보 죠.”

일단 싸움을 멈추고 다음에 다시 자리를 만들자는 내 의견에 시르엘과 엘디르가 동조하고 나섰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여기에 모이신 모두 더는 감정적인 언쟁은 그만두시고,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각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요."

“앞으로 이런 식의 언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경비 대장의 권한으로 모두 구속해 마을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진 님의 말대로 조만간 다시 자리를 마련할 때까지 자중하십시오."

시르엘은 최대한 부드럽게 엘프들을 달랬고, 엘디르는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엄포를 놨다.

두 사람의 말이 통했는지 엘프들은 슬슬 눈치를 보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르토와 니르웬은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남기고 떠나갔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세진 님.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엘프 마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의 오르토.

“저는 이 문제를 세진 님이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곳에 남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세진 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신뢰와 존경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니르웬.

상반된 두 사람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모여있던 모든 엘프는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갔다.

"에휴, 저희도 갈까요? 엘디르, 엘디르도 오늘은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어요. 아무래도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평소에 식사 권유를 하면 무조건

거절부터 하는 엘디르였지만. 오늘은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별다른 말없이 순순히 식사 초대를 받아들였다.

****

“아빠, 엘프 마을 사람들끼리 싸우는 거예요?"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에 이엘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엘의 질문에 식사를 같이하던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내 대답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던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시르엘과 피렌느는 민망한 듯 허둥거렸다.

심지어 엘디르마저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의 이목이 쏠리자 당황스러웠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냐, 싸우는 건 아니고, 문제가 좀 생겼는데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조금 한 것뿐이야."

"......"

나는 싸우지 않았다고 돌려 말했지만, 이엘과 아이들의 표정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내가 숨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모두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내가 아이들의 거짓말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듯이, 아이들도 내 거짓말을 곧바로 알아본 것 같았다.

이런 아이들의 반응에 내가 난감해 하고 있는 사이, 시르엘이 입을 열어 아이들을 위로했다.

"괜찮아. 얘들아. 오늘 엘프들끼리 살짝 말다툼이 있긴 했지만, 세진 님이 잘 말려주셨어."

"정말요?"

“그럼. 그리고 이 문제로 다시 싸우지 않도록, 세진 님이 잘 해결해 주실 거야. 그렇죠? 세진 님?"

“아...... 네. 물론이죠. 제가 잘 해결해야죠."

시르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래도 그녀의 말이 통했는지, 아이들은 다시 얼굴을 밝게 했다.

티아는 옆에 있는 이엘을 꼭 껴안으면서 말했다.

“도대체 왜 싸우는 걸까? 우리처럼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치?"

"맞아요."

"퓨이! 퓨이!"

“후모!"

아이들은 티아의 말에 동의하면서 목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자랑이라도 하듯, 밥을 먹다 말고 서로를 껴안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작된 프리허그 캠페인.

나도 그 포옹을 피해갈 수 없었다.

티아를 시작으로 퓨이, 이엘, 모렛까지 내 품에 안겨들었다.

황당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이런 순수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아까 있었던 일로 찝찝했던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프리허그 캠페인은 나에게서 끝나지 않고, 시르엘과 피렌느, 엘디르까지 이어졌다.

피렌느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의 포옹을 받아주었고, 시르엘도 포근한 미소와 함께 아이들을 품 안에 안았다.

약간 어색한 표정의 엘디르도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품 안에 안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표정이 부드럽게 변해갔다.

별것 아닌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포옹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복잡했던 마음이 스르륵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프리허그 캠페인 덕분에, 나머지 식사시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될 수

있었다.

****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아까 안아주지 못했던, 임진혁을 안아주겠다며 그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갑자기 안겨드는 아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볼 임진혁을 상상하며,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피렌느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뭔가 부끄럽네요. 저렇게

아이들은 서로 잘 지내려 하는데, 어른인 우리는 별일 아닌 일로 싸우고 있으니."

그녀의 한탄에 모두 공감이 되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균열을 클리어한 대가로 받은 보수를 놓고,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엘프들.

고민하던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문제의 발단은 내가 지급한 보수

때문이었지만, 그 문제의 이면에는 복잡한 사정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런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엘디르가 특유의 담담하고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오랜 세월 멈춰있어서 조금씩 뒤틀렸을 뿐입니다."

"......?"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엘프 마을 안에서만 생활한 지 벌써 수백 년입니다. 엘프로 마을에서 살면서 바깥세상으로 나갈 기회는 겨우 한두 번. 평생 마을에서 살다가 죽는 엘프도 있었습니다."

평생 한마을에서 살다가 죽는다.

엘프 마을이 작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긴 세월을 마을에 갇혀 산다는 것은 나에게 마치 감옥처럼 들렸다.

엘디르의 무거운 이야기에 시르엘과 피렌느는 표정을 어둡게 했다.

“그런데 세진 님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변했습니다.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줄 유일한 존재가 나타난 겁니다.”

"잠깐! 그럼 나이 많은 엘프들은 왜 저를 달갑지 않아 하는 거죠?"

나는 오늘 만났던 오르트를 떠올리며 엘디르에게 물었다.

“나이가 많은 엘프들은 그동안 전통과 규칙 덕분에 마을이 유지되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만약 세진 님의 등장으로 그것을 부정하려는 엘프가 생긴다면, 그건 곧 마을의 붕괴라고 생각할 겁니다."

"허어……”

엘디르를 통해 전해 들은 엘프 마을의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통해 아까 마주 했던 엘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르트는 왜 그렇게 나를 불편하게

대했는지, 니르웬은 왜 그렇게 나에게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는지.

마을의 전통과 규칙을 중요시하려는 윗세대의 엘프들과 답답한 규칙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는 젊은 엘프들.

“정말로 저 때문에 마을이 붕괴할 수도 있을까요?"

“..…. 완전 말도 안 되는 걱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엘디르는 내 질문에 굉장히 어려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르엘과 피렌느도 굉장히 괴로운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을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말에는 끝까지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해온 일들은 선의에 비롯돼 행한 일인데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충격적인 결말에 순간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를 지켜보는 세 명의 엘프들도 이런 내 심정을 잘 알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우리 사이에는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임진혁에게 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무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각자의 눈빛 한구석에는 남아있는 고민의 흔적을 쉽게 지워낼 수 없었다.

****

다음날 새벽.

나는 밤새 잠 못 이루게 했던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른 새벽 호숫가로 향했다.

아직 호수에는 새벽 안개가 짙게 끼어있었다.

어젯밤 제대로 숙면을 하지 못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새벽 안개가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진 님?"

엘프 경비 대원 중 한 명이 내 이름을 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엘디르와 함께 자주 얼굴을 마주했던, 나와 생명의 계약까지 맺은 엘프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데로윈입니다. 세진 님."

"아. 미안해요. 데로윈.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하하. 괜찮습니다.”

내 사과에 데로윈은 털털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데로윈은 여기에 무슨 일로?"

“저는 원래 매일 이 시간마다 산책을

나옵니다. 평소에는 아무도 안 나와 있는 시간인데, 누군가 호숫가에 있는 것 같아서 와봤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세진 님은 이렇게 이른 새벽에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아...… 잠시 고민할 게 좀 있어서요."

질문에 내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무언의 긍정에 데로윈은 난감하다는 표정과 함께 머리를 긁적거렸다.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에 내가 먼저 호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데로윈도 나를 따라 시선을 호수로 향했다.

우리는 나란하게 서서 잠시 조용하게 호수를 바라봤다.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아침 햇살에 수면 위의 안개가 조금씩 엷어졌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데로윈이었다.

“세진 님.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

“저도 이곳에 와서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세진 님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계약도 맺은 거고요."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마을에 어른들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세진 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지금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한 데로윈이

이렇게까지 말해주자, 뭔가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요. 데로윈."

"하하. 이거 뭔가 좀 쑥스럽네요. 그럼 저는 계속 산책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데로윈은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인사를 하고 빠르게 멀어져갔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호수로 시선을 옮겼을 때는 어느새 안개가 거의 없어지고 난 뒤였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나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뭔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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