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7화
74. 새로운 엘프마을(1)
"예? 엘프들끼리 분쟁이 있었다고요?"
내가 깜짝 놀라 묻자, 시르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앉아있는 피렌느의 표정도 영 좋지 않았다.
둘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것 같았다.
최근에 B등급 균열을 클리어하고 난 다음, 엘프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무슨 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건데요?"
걱정이 담긴 내 질문에 시르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세진 님이 엘프들에게 수고의 대가로 보수를 줬던 것 기억하세요?"
“네. 당연히 기억하죠.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인데…....”
B등급 균열을 클리어하고 난 뒤.
균열에서 얻은 괴물의 부산물과 약초, 열매들은 판매한 금액은 공평하게 엘프들에게 나눠줬다.
나와 '생명의 계약'을 맺고 함께한 지 오래된 엘프들은 당연하게 그 보수를 받아들였지만.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엘프들은 이 상황을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다른 엘프들처럼 금방 익숙해질 거로 생각하고, 공평하게 보수를 지급했다.
"혹시 보수가 부족했다거나……?"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분쟁이 발생한 건 세진 님과는 관련이 없어요."
"......?"
“문제는 세진 님께 받은 보수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엘프들끼리 논쟁이 생기고 있어요."
시르엘의 설명에 나는 쉽게 이해를 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라고 준 보수인데."
"그게 설명하기 좀 복잡한데…
****
원래 엘프들은 마을 단위로 공동생활체를 유지했다.
각자 개인의 재산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마을 구성원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 사용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마치 예전 시골 마을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공동생활 속에서도 당연히 문제가 생겨날 수밖 에 없었는데.
생겨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예방하기 위해 규칙을 만드는 곳이 장로회였다.
마을에 소속된 엘프들은 장로회에서 결정된 규칙을 무조건 따라야 했고, 그 규칙들은 엘프들에게는 절대적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장로회에서 정한 규칙 중에 이런 규칙이 있었다.
-마을의 공동체가 힘을 모아 얻은 것들은 장로회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마을의 공동 재산은 장로회의 허락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규칙인데.
문제는 몇몇 엘프들이 내가 지급한 보수를 마을의 공동 재산이라 주장 한다는 것이었다.
그 엘프들의 말에 따르면.
균열 전투는 마을의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보수는 당연히 마을의 공동 재산이고.
따라서 장로회의 허락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이것은 마을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나눠준 보수이기 때문에 마을의 규칙과는 상관없고.
장로회의 허락과는 상관없이 개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주장도 존재했다.
이렇게 완벽히 상반된 두 개의 주장으로 나뉘어, 엘프들은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
사건의 앞뒤를 파악한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르엘의 말대로 내 잘못은 전혀 없긴 했는데,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건 또 나였기 때문에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잘만 보수를 받아왔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분쟁이 생긴 거예요?”
문득 떠오른 의문에 시르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진 님이 처음 보수를 줬을 때, 대부분 엘프가 받기를 꺼렸었어요. 아마 피렌느가 없었다면 그렇게 빨리 적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
"헤헤."
그녀가 피렌느를 언급하자, 옆에 있던 피렌느가 쑥스러운 듯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때 열심히 엘프들에게 설명해주던 피렌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이번에도 반대하는 엘프들에게 잘 설명해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지금은 저번이랑은 좀 많이 달라져서요."
“......?"
“그게……”
시르엘이 뭔가 말하기 껄끄러운 표정을 짓자, 내 옆에 서 있던 엘디르가 대신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곳에 오래 머무른 엘프들, 그러니까 세진 님에게 죄를 지어 이곳에 온 엘프들은 모두 젊은 편입니다. 대부분 호기심이 많고 개방적이죠."
"피렌느처럼?"
내가 피렌느 이야기를 꺼내자, 엘디르는 슬쩍 피렌느 쪽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만큼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음."
“반면에 새로 이곳에 지원을 나온 엘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합니다. 엘프로 따지면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죠."
“허…… 겉모습만 봐서는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데요?"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꽤 나이 차이가 크게 납니다. 지금 장로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엘프들은 모두 이 나이대의 엘프들입니다."
“일종의 세대갈등인가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엘디르의 설명을 듣고,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문득 시르엘의 의견이 궁금해졌다.
“시르엘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둘 중에 어느 쪽 의견이 옳다고 생각해요?"
"으음....… 원칙적으로는 장로회의
허락을 받는 게 맞지만, 이곳의 상황은 특별한 경우라 원칙만을 우선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녀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자, 옆에 있던 피렌느도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시르엘 님 말이 맞아요. 앞으로 일일이 장로회에 허락을 맡아야 한다니 으으! 상상만 해도 싫어요."
피렌느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꼭 끌어안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렌느는 확실히 장로회의 허락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슬쩍 옆에 있는 엘디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디르도 이 상황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어요?"
“네. 서로 다툼이 심해지지는 않아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일단 엘프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하실 것까지는 없고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엘디르의 모습에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엘디르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저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다면, 그저 장로회에서 결정이 내려지길 기다릴 겁니다."
그는 정말로 이번 상황에 관심이 없는지,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집 밖에서 엘디르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 엘디르 님! 엘디르 님! 여기 안계십니까?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엘디르는 곧바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도 뒤늦게 그를 따라나섰다.
집 밖에는 경비대원 한 명이 엘디르에게 뭔가를 전하고 있었다.
"엘디르, 무슨 일 있어요?"
내 질문에 엘디르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엘프들 사이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제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죠."
“으음…… 알겠습니다."
나보다 약간 늦게 따라 나온 시르엘도 끼어들었다.
"저도 갈게요."
집에 있는 아이들은 피렌느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경비 대원을 따라 엘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수의 엘프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을의 규칙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규칙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다른 상황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뭐가 다르단 말이냐? 분명 장로회에서 결정하고 나선 일인데."
각각의 진영을 대표하는 듯한 두 명의 엘프가 살벌한 분위기로 언쟁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오르토 님.”
"크흠, 경비대장 왔는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엘디르가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자, 오르토라 불린 엘프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아꼈다.
그는 이번에 새로 지원을 나온 엘프 중에 가장 연장자로, 이번 B등급 균열에서도 엘디르와 함께 엘프를 통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엘프다.
반면 그와 언쟁을 하고 있던 엘프는.
예전에 엘프들을 억지로 마을로 귀환시키려 했을 때, 가장 앞에 나서서 이곳에 남을 수 있도록 애원했던 그 남자 엘프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니르웬?"
"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군요. 세진님!"
내가 니르웬의 이름을 기억해내자 그는 굉장히 감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표정은 뒤에 들려오는 냉담한 목소리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니르웬. 또 소란을 일으키는 건가?"
차갑게 굳은 표정의 엘디르는 위압감을 뽐내며 니르웬을 압박했다.
“소, 소란을 일으킨 게 아닙니다. 엘디르 님."
"소란이 아니라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보도록."
“저희는 그저 오르토 님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했을 뿐입니다."
"부당하다니! 지금 마을의 규칙을 부정하는 것이냐?"
니르웬의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르토가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저희가 받은 보수를 억지로 뺏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뺏는 게 아니다. 장로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잠시 모아두겠다는 거지.”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만든다면, 그게 뺏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겁니까?"
“네놈! 계속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냐?"
"그만하십시오. 세진 님도 계시는데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
엘디르가 나를 언급하며 두 엘프를
나무라자, 살짝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에 오르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세진 님. 죄송하지만 이건 엘프 마을의 문제입니다. 외부인인 세진 님은 자리를 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꽤 정중한 말투로 내게 자리를 비켜달라 부탁했다. 그러자 니르웬이 발끈한 표정으로 나섰다.
“어떻게 세진 님께 외부인이라 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보수를 지급하신 분이 누구인지 잊어버리신 겁니까?"
“나도 세진 님께 감사한 마음은 똑같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문제는 그것과는 별개로 마을의 질서에 대한 문제야."
다시 한번 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번에는 시르엘이 나서서 두 엘프를 진정시켰다.
“일단 진정하세요.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은 잘 알겠어요.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서, 저는 세진 님도 외부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엘디르, 그렇죠?”
“저도 동의합니다. 세진 님도 이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말씀하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르엘과 엘디르가 내 편을 들고 나서자 오르토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와 대비되게 니르웬은 밝아진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시르엘 님과 엘디르 님 말씀이 맞습니다. 세진 님.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의견이요?"
“네. 세진 님의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흐음..….”
니르웬뿐만 아니라, 오르토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엘프의 시선이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끄응.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