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25화 (225/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5화

73. B등급 균열(2)

엘프들을 앞세워 진입한 숲속.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썩은 냄새를 풍기는 나무 거인, 저주받은 엔트들이었다.

길쭉길쭉한 팔다리에, 온몸에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쁜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렀다.

커다란 몸과는 상반되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일행에게 접근했다.

-그워어어억!

-그어억!

저주받은 엔트들은 뭔가 처절한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우리를 위협했다.

“모두 전투 준비!"

서율희의 지시에 엘프들은 일사불란하게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원하는 정령사

엘프들은 저주받은 엔트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면서, 전열의 엘프들을 보호

할 수 있도록 보조 마법을 걸어줬다.

숲속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곧장 다가오는 저주받은 엔트.

그들이 공격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 서율희의 입에서 공격을 지시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공격!"

공격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정령들의 화려한 공격과 강력한 화살 세례가 저주받은 엔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공격이 시작된지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도, 엘프들의 화력을 견디지 못한 엔트 한 마리의 거대한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억!

쿵!

나머지 엔트들도 엘프들의 공세를 겨우 견디며 한 걸음씩, 힘겹게 우리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저주받은 엔트의 사정거리에 전열의 엘프들이 들어오자, 그들은 크고 기다란 팔을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했다.

진짜 채찍처럼 무게에 빠르지는 않지만,

가속도가 붙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들렸다.

하지만 엔트들의 팔 공격은 엘프들에게 닿기에는 너무 느릿했다.

엘프들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벼운 몸놀림과 함께 쉽게 적의 공격을 피해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전열의 엘프들은 마치 농락하듯, 엔트의 거대한 몸 이곳저곳으로 파고들어 치명적인 공격을 날렸다.

-그어억! 그어억!

귀찮은 벌레를 떼어내듯, 엔트는 온몸을 뒤틀며 엘프들을 떼놓으려 버둥거렸지만.

악랄하게까지 보일 정도로 엘프들의 공격은 집요하게 녀석의 약점을 찾아 파고들었다.

-그어......

-쿵!

저주받은 엔트들은 집요한 엘프들의 공격에 하나, 둘씩 무릎을 꿇어야 했다.

크고 강력한 공격들은 마지막까지 단 한 명의 엘프도 피해를 주지 못하고 끝났다.

적들이 모두 쓰러졌음에도, 엘프들은 쉽게 긴장을 풀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 노련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허허. 이 정도면 우리는 필요 없을 정도인데?"

뒤에서 지켜보던 아저씨의 감상에 나머지 아르킨 길드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엘프들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령 마법이나, 활을 다루는 실력은 모두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고도로 숙련된 모습에 가까웠고.

엘프 특유의 가볍고 민첩한 몸놀림은, 같은 편이 보아도 귀찮아 보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거기다 전투 내내 모두 엘디르에 빙의한 것처럼,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냉정한 얼굴로 아주 침착하게 전투를 진행했다.

깐깐한 서율희도 내심 흡족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그들의 첫 전투가 얼마나 완벽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다 우리 길드에서 잘리는 거 아냐?"

"으으. 세진 오빠. 우리 안 자를 거죠? 그렇죠?"

엘프와 비슷하게 정령과 활을 다루는 정씨 남매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아저씨는 혀를 차며 아이들을 찔끔하게 했다.

"쯧쯧. 실력이 안 되면 더 노력해야지. 벌써 세진이한테 부탁할 생각부터 하면 안 돼.”

"으읏......”

“......”

진지한 부분에서는 한없이 엄격한 아저씨.

정씨 남매는 그런 아저씨의 따끔한 경고에 입을 다물었다.

남매의 의기소침해진 모습에 측은한 생각이 들어 뭔가 위로의 말을 전하려 했는데, 눈을 부릅뜨며 무언의 압박을 하는 아저씨 때문에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저씨는 이번 기회에 두 남매에게 앞으로의 험난한 도전을 미리 경고하려는 듯했다.

“근데 아이들이 기가 안 죽을 수 없긴 하네. 나도 살짝 긴장될 정도인데……”

아주머니도 감탄 반, 걱정 반 섞인 목소리와 함께, 엘프들이 있는 쪽으로 흐릿한 시선을 보냈다.

“얼마 전에는 한국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명령도 척척 알아듣네요?”

“부길드장님이 그것만 중점적으로 연습시켰으니까요. 아마 귀에 피가 날 정도였을걸요."

김유미의 감탄에 윤동현은 오히려 담담하게 반응했다.

실력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단순히 서율희의 명령을 수행하는 조직력 부분에서도 예상외의 선전을 보여줬다.

아직 복잡한 명령은 불가능할지라도, 짧고 간단한 지시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해 냈다.

오히려 복잡한 명령이 아니라 짧은

명령만으로 이루어졌기에, 전체적인 전투 양상이 더 깔끔하고 시원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점검을 끝냈으니. 다시 출발!”

피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주 짧은 장비 점검이 끝나자마자 다시 출발 지시가 떨어졌다.

엘프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하게 대열을 맞춰, 숲속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나머지 아르킨 길드원들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

그 뒤의 전투도 앞선 전투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공격해 오는 엔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음에도, 엘프들의 표정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강력한 정령 마법과 빗나가지 않는 화살들은 어김없이 엔트들의 몸을 난도질했고.

겨우 일행에 가까이 접근해도, 몸 가까이에 붙어 약점을 파고드는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아무리 많은 나무 거인이 달려들어도, 도저히 이 엘프들의 눈앞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다.

여유가 생긴 엘프들은 정찰 임무를 핑계로 숲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값비싸고 귀한 약초를 캐오거나, 맛있는 열매들을 가져오기도 했다.

값비싼 약초는 당연히 가방에 차곡차곡 보관되었고, 맛있는 열매들은 뒤에서 할 일 없는 우리의 입으로 들어갔다.

열매를 맛본 우리의 감상은……

-열매 채집하는 실력도 흠잡을 데 없다.

였다.

완벽한 엘프들의 활약에 아르킨 길드 멤버들은 후방에서 열매를 집어 먹으며,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 엘프들의 전투를 구경했다.

"잠시 휴식! 엘디르 님. 정해진  서대로 주변 경계 철저히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약간 긴 한국어 지시였지만, 엘디르는 곧잘 서율희의 지시를 알아듣고 엘프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서율희 에게 다가섰다.

“흠흠,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뇨.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생각보다 엘프들이 훨씬 잘해주고 있어서."

“정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네요. 이 정도일 줄은……”

“저도 그래요. 아무래도 첫 균열 경험이다 보니, 분명 실수하거나 허둥대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엘디르 님이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었네요."

나와 서율희가 엘프들의 첫 균열 입장에 약간의 걱정을 했던 것과 달리, 엘디르는 굉장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 서율희 님이 말씀해 주신 정도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 자신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실력을 확인해 보니 전혀 지나치지 않았다.

오히려 엘디르의 표현이 겸손해 보일 정도의 훌륭한 실력이었다.

나는 살짝 기대감을 드러내며 서율희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 정도면 태백산 미궁….가능할까요?"

그녀는 지난번처럼 쉽게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태백산 미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표정이 크게 달랐다.

빛을 잃은 눈동자에 인상을 찌푸렸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눈동자를 빛내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성공과 실패의 확률을 점치며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을 꺼냈다.

"하아…. 그래도 반반! 제가 수집한 정보와 엘프들의 실력을 고려해 봤을 때, 성공 가능성은 50% 정도.”

"오오!"

서율희 입에서 나온 생각보다 긍정적인 가능성에 나는 놀라움을 표했다.

“기뻐하기는 일러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거예요. 정보가 틀렸거나, 우리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성공확률은 지금도 희박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냉정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지만, 내 밝아진 표정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며 일축했었기에, 그 모습에 비한다면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직 시간은 좀 더 남았다.

넉넉한 기간은 아닐지 몰라도, 뭔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시간은 충분했다.

서율희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엘프들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마지막 녀석이 남았네요.”

그녀는 이 균열의 마지막 과제.

'저주받은 뒤틀린 엔트'를 언급했다.

거대한 몸을 움직이는 다른 엔트들과는 다르게, 땅에 뿌리를 박아 움직일 수 없는 녀석이지만.

지독한 저주를 뿌리면서, 여러 가지 마법도 할 수 있는 꽤 귀찮은 균열의 최종 보스였다.

거기다 끊임없이 저주받은 엔트들을 소환하는 녀석이기에 장기전으로 간다면 필패!

빠르고 신속하게 본체를 제압하는 게 중요한 녀석이다.

“아직 복잡한 명령은 전달할 수 없어서, 조금 불안하긴 하네요."

“그래도 잘해내겠죠. 여차하면 저랑 다른 길드원들도 있으니까요."

마지막 보스만을 남겨두고, 휴식을 취한 엘프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우리가 균열에 입장한 뒤에도 취재진과 관리 센터 직원들은 계속 균열 입구를 지켰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자 균열 관리 센터에서는 미궁 진압반을 미리 대기시켰다.

이미 내부적으로 아르킨 길드가 클리어할 가능성이 없다고, 잠정적으로 판단한 상황.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도 지금의 상황이 중계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혹시 또 다른 끔찍한 미궁이 발생해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을까, 걱정스럽게 이곳을 주시했다.

"어? 어?! 나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미궁 진압반은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췄고.

관리 센터 직원들은 위험 지역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취재진과 민간인들을 해산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흉측한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바로 아르킨 길드였다.

그들의 모습은 처음 균열을 입장했을 때와 달라진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전 멀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아르킨 길드원들이 완전히 균열 입구에서 걸어 나오자, 균열은 스르륵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에 이곳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킨 길드의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입구를 빠져나와 관리 센터 직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균열 클리어했습니다."

"아......"

“확인 서류 안 주시나요? 그냥 갈까요?"

“아, 아닙니다. 서류에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저기 균열핵은……?"

"여기 있습니다.”

길드장인 전세진이 균열핵을 내보이자 센터 직원은 물론이고, 멀찍이 주시하고 있던 균열 진압반도 추할 정도로 입을 벌렸다.

전세진은 그런 모습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서명만 마친 채, 길드원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센터 직원이 황급히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전원 무사히 귀환했으니 걱정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

아르킨 길드원들은 멍한 표정의 직원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수많은 취재진이었다.

“균열을 완벽히 클리어하신 겁니까?"

"부상자는 없습니까?"

“어떻게 그 적은 인원으로 균열을

클리어하신 겁니까?"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좀 해주시죠."

엄청난 질문세례가 쏟아졌지만, 아르킨 길드원들은 최대한 말을 아끼며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딱 한 명의 기자만이 질문의 대답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균열은 어떠셨습니까?"

-툭!

"엇? 이건 ...…?"

“균열에서 가져온 열매인데. 참 맛있더라고요. 하나 드셔보세요."

“......”

기자는 멍한 표정으로 평범하지 않은 열매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아르킨 길드원들은 그대로

취재진을 뚫고 지나갔다.

잠시 후, 인터넷에는 하나의 기사가 올라왔다.

-균열의 열매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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