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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23화 (223/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3화

72. 미궁을 위한 준비(5)

신지아는 가깝게 붙어 있는 나와 시르엘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뒤에는 왠지 모르게 장난스러운 미소의 피렌느도 함께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시르엘을 자연스럽게 떨어뜨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아 씨?"

“으음. 일단 피렌느랑 아티팩트 점검은 끝냈거든요. 세진 씨 골렘에 관한 내용을 좀 상의하려고 왔는데......"

"......"

“두 분 굉장히 사이가 가까워 보이네요?"

살짝 한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한편 시르엘은 피렌느를 통해 신지아의 질문을 전해 듣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세진 님과 저는 굉장히 특별한 관계랍니다.”

“어어…….”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시르엘의 대답은 다시 피렌느를 통해 신지아의 귓가로 흘러 들어갔다.

이제는 뾰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지아 씨. 그게 아니라…..."

나는 다급하게 '생명의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며,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엘프와도 계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자세한 설명에도 싸늘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신지아의 좋지 않은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시르엘.

시르엘은 다시 한번 내 쪽으로 가깝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세진 님. 저도 모르게 뭔가 실수를 한 건가요?”

"아뇨. 실수하신 건 없는데. 일단 좀 떨어져 주실래요?"

"......?"

다시 한번 시르엘을 떨어뜨려 놓았지만, 신지아의 표정은 점점 싸늘해져만 갔다.

'아오. 일이 왜 이렇게 꼬이냐.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줘요!'

나는 그나마 도움이 될만한, 피렌느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키득거리면서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대충 모든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

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했다.

“세진 씨. 대충 다 정리됐는데..….”

엘디르와 함께 돌아온 서율희가 이 살얼음판에 합류했다.

“안녕하세요. 지아 씨."

“오랜만이네요. 율희 씨."

서율희는 본능적으로 이 분위기를 읽었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신지아와 인사를 나눴다.

“세진 님. 저는 대원들을 통제하고

있겠습니다."

"아, 고생하셨어요. 엘디르.”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엘디르는 피렌느와는 달리 이런 분위기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지, 금방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남아 있는 사람은 신지아와 서율희, 그리고 시르엘과 피렌느.

얼핏 보면 아름다운 여성들에 둘러싸인 행복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상황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나는 지금 내 상황과 딱 떨어지는 유명한 말을 떠올리며,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신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진 씨. 잠시 저랑 단둘이 이야기좀 해요."

신지아가 내 한쪽 팔을 잡아끌어 나를 데려가려고 하자, 서율희가 반대 의견을 냈다.

"죄송한데, 세진 씨는 제가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먼저 세진 씨에게 왔는데, 율희 씨가 양보해 주세요."

“길드의 일이라서요.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가 아르킨 길드의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

서율희가 길드의 이야기를 꺼내자, 신지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런 반응에 서율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자 신지아가 내 팔을 더욱 강하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것도 중요한 일이에요."

“무슨 일이신데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연인 관계에 일이라서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

이번에는 서율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점점 상황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 내가 나서려는 순간.

“어머! 두 분은 연인 관계 셨군요?"

"......?"

"......?"

시르엘이 흥분한 표정으로 나와 신지아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실망스럽다는 듯 내게 말했다.

“세진 님. 왜 일찍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반려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 그게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네요."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시르엘은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신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진 님의 반려자라면 저희에게도 중요하신 분이에요. 지아 님.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아…… 세진 씨, 이분이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흥분한 시르엘이 신지아가 엘프어를 못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을 쏟아내자 당황한 신지아가 나를 바라봤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에 시르엘은 계속 말을 쏟아냈고, 나는 떠듬떠듬 그녀의 말을 번역해 신지아에게 전해줬다.

시르엘의 말을 전해들은 신지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아무래도 나의 반려자라는 표현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반면 서율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흥분한 시르엘에 의해 날카롭던 분위기는 흐지부지돼버렸고.

"세진아, 오늘 저녁에 환영 파티하는 거지? 한 잔, 딱! 어때?"

저녁에 있을 환영 파티에 벌써 들뜬 아저씨의 등장으로 완전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

"......"

"화났어요?"

"화 안났어요."

화 안 났다고 말하면서도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신지아.

그 모습이 내심 귀엽게 느껴져,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을 꺼냈다.

“기분 풀어요.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

내 부드러운 말에 신지아는 약간 표정을 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엘프들은 정말 하나같이 예쁘네요. 특히 시르엘 님은 여자인 제가 봐도 아름다웠어요."

신지아가 대뜸 엘프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긴 하죠. 종족 자체가 그런 종족이니까요. 심지어 남자 엘프들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니…..."

그녀는 내 대답에 표정을 더 어둡게 만들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뭐가요?"

“사실 별로 중요한 일도 없었는데, 바쁜 세진 씨를 부른 거예요.”

"......"

“저렇게 예쁜 엘프들이 세진 씨랑 가깝게 지낸다고 생각하니, 저는 너무 못난 것 같아서 심술부렸어요."

풀이 죽어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왜 웃어요?"

“겨우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저는 정말로 진지했는데……"

신지아가 이번에는 울상을 짓자, 나는 웃음을 거두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엘프들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엄청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요."

"......?"

"으으음. 뭐랄까? 엄청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는 느낌? 아니면 아주 예쁜 꽃을 바라보는 느낌?”

엘프들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며 느낀 점은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종족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이질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는 점이었다.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면 설레는 기분이 들고, 자연스럽게 욕구가 생기기 마련인데.

엘프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그런 기분이 덜했다.

신지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마치 아름다운 꽃이나 조각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꽃이나 조각상에도 충분히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설명을 들은 신지아는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그럼요. 제가 뭐하러 거짓말하겠어요. 그리고 시르엘은 이엘의 이모예요. 저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요.”

“……”

내 부드러운 설명에 신지아의 표정이 완전히 풀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내 쪽으로 끌어왔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내 품으로 안겨왔다.

신지아는 내 가슴에 고개를 살포시 기대며 말했다.

“세진 씨, 이번에 중요한 일 하는 거죠?"

“네. 맞아요.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나는 이엘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저도 최대한 열심히 도와줄게요. 대신에 하루만 저랑 같이 있어 줄래요?"

하루 내내 같이 있어 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나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얼마든지요. 근데 온종일 저랑 뭘 하려고요?"

“우리 사이에 당연한 일을 해야죠.”

"......?"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하루 종일 세진 씨랑 같이 골렘을 정비할 생각이에요. 어때요? 재미있겠죠?"

"아…… 재미있겠네요."

김이 팍 샌 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내 반응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신지아는 더욱 내 품 안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세진 씨가 방금 생각한 건, 이번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마음껏 해줄게요."

"......꿀꺽."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속으로 미궁 공략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추가했다.

****

그날 저녁.

기존에 있던 엘프와 새롭게 합류한

엘프들까지, 모두 아르킨 길드원과 함께 환영 파티를 열었다.

다시 한번 아주머니의 실력이 한껏

발휘되어, 많은 인원에도 맛깔난 음식들이 모자라지 않게 준비됐다.

거기다 오랫동안 지켜왔던 모렛의 맥주와 엘디르의 도움으로 완성한 엘프주까지 모두 풀리며 파티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평소에 딱딱한 분위기로 경비대원들을 긴장시키던 엘디르도, 오늘만큼은 조용히 엘프주를 홀짝이며 대원들의 긴장 풀린 모습을 모른척했다.

맛있는 음식과 술로 즐거워진 분위기 속에 엘프들과 아르킨 길드원들은 살짝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환영 파티가 있고 난 이후에.

서율희는 본격적으로 엘프들을 통솔해 미궁을 공략할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의사소통 문제.

긴급한 전투 상황에서 빠른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효율적인 전투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전체적인 지휘를 맡게 된 것은 서율희였기에, 엘프들에게 간단한 한국어를 공부시킬 수밖에 없었다.

많은 준비 기간이 남아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전투 중에 필요한 아주 짧은 단어 위주로 엘프들을 공부시켰다.

다행히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전투에 필요한 짧은 단어들은 금방 숙지시킬 수 있었다.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들과는 별개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자발적인 한국어 공부가 시작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나둘씩 한국어 공부를 하더니, 어느새 대부분 엘프가 한국어를 옹알거리기 시작했다.

피렌느의 요청으로 엘프들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교재와 책, 필기구를 대량으로 들여와야 할 정도였다.

비전투 인원들이 한국어를 배우며 놀기만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전투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면으로 노력했는데.

엘프 비법으로 치료제를 만든다든가, 전투 중에 잘 찢어지지 않는 옷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특별한 능력이 없으면 식사를 만들고, 뒷정리를 도와주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엘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미궁 공략을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킨 길드에 합류한 엘프들의 실력을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

태백산 미궁을 가기 위한 과정 중에 하나.

바로 B등급 균열의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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