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2화
72. 미궁을 위한 준비 (4)
엘프 마을에서 지원이 도착했다.
원래 이곳에 파견되었던 경비대원들과 지원까지 합하면 총 30명에 가까운 전투 인원.
거기에 이곳에 남기를 원해 나와 계약을 맺은 엘프 중에, 추가로 3명 정도 더 참여하면서 33 명의 전투 인원이 확보되었다.
이 과정에서 엘프 마을에 '생명의 계약'에 대해 전해졌는데, 여러 가지 의미로 논란이 되었다고 했다.
일단 엘프 마을의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는 장로회에서는 큰 충격에 빠졌다.
예상한 대로 넬모란 장로는 꽤 곤욕을 치러야 했다.
장로 회의에 불려가 몇 시간 동안 그때의 상황을 증언하고, 설명해야 했다고.
이전에 찾아보기 힘든 엄청나게 많은 엘프가 한꺼번에 '생명의 계약' 을 맺는 사태에, 장로회는 큰 우려를 표했다.
반면, 엘프 마을의 평범한 엘프들은 이 사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에 젊은 축에 속하는 엘프들은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문들을 통해 부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명의 계약' 사건으로 엘프 마을에는 큰 충격을 가져다주게 되었지만.
나를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한 이곳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정신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와아…… 정말로 다 엘프네.”
“형. 진짜로 이 많은 엘프랑 같이 싸우는 거예요?"
정씨 남매는 수십 명의 엘프를 바라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아르킨 길드원 모두 남매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영화에서나 볼법한 엘프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모습은 꽤 장관이라 할 만했다.
그나마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서율희가 엘프들을 둘러보며 내게 말했다.
"세진 씨. 여기 모인 엘프들이 전부 전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거죠?"
“네.”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렸겠죠?"
“당연하죠.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렸어요. 하지만 이번 일은 엘프들에게도 꽤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모두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 겠다고 말했어요."
“그렇군요.”
그녀는 모인 엘프들이 꽤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모두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
"흐음, 잠시만요, 엘디르! 조금만 도와줄래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가까이에 있던
엘디르를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세진 님."
"엘디르, 이쪽의 율희 씨 옆에서 일 좀 도와주실래요?"
서율희가 어떤 일이 필요한지 알려 주자, 엘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했다.
서로 엘프어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을 위해, 통역으로 이 엘을 붙여주었다.
“이엘,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잘 전달해줘. 알았지?"
"응! 열심히 할게요. 아빠."
이엘의 아이 특유의 의욕을 드러내면서 눈을 반짝였다.
나는 기특한 이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약간 불안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서율희, 엘디르 그리고 이엘. 이 셋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일처리를 해나갔다.
서율희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엘디르에게 물어보고, 이엘은 중간에서 똑 부러지게 각자의 할 말을 통역해 줬다.
내가 잠시 이 셋을 흐뭇하게 바라 보는 사이.
"세진 씨, 잠시만 좀 도와줘요."
"무슨 일이에요? 지아 씨."
"엘프들이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을 해보려고 하는데 지원자를 구할 수 있을까요?"
미래 그룹의 지원으로 엘프들에게 장비와 아티팩트를 맞춰주러 온 신지아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으음. 아무나 상관없는 건가요?"
“네, 일단은 엘프들이 인간과 똑같이 아티팩트를 쓸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거든요. 세세한 조정은 그다음이고요.”
“그럼 누구에게 부탁을……"
“저요! 제가 해볼래요. 그 아티팩트라는 거, 저번에 세진 님이 가지고 다니시던 거 맞죠?"
한국어를 알아들은 피렌느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아티팩트에 관심이 많았는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어가 어느 정도 가능한 피렌느였기에, 신지아가 하는 일에 더 수월하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요. 피렌느.”
“아앗! 맡겨만 주세요."
나는 곧바로 신지아에게 피렌느를 소개해줬다.
“지아 씨. 이쪽의 엘프는 피렌느라고 하는데. 지아 씨가 하는 일을 돕고 싶다네요."
“안녕하세요. 피렌느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피렌느 님. 신지아라고 합니다.”
“그냥, 피렌느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럼 어떤 일을 하면 되나요?"
신지아는 피렌느를 데리고 자신의 연구소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멀어져가는 둘을 바라보다가, 나도 맡겨진 일을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오늘 모인 엘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
“연우야. 그럼 우리도 시작하자."
“저는 이미 준비 끝났어요."
나는 오연우를 데리고 엘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한 명씩 사진을 찍고 그 엘프에 관한 신상을 기록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거주하는 엘프들이 많아지다 보니.
더욱 효율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변화의 시작으로 엘프들의 정확한 신상 정보를 파악하기로 했 다.
각자의 이름, 나이, 성별부터 특기와 전투 능력 보유 여부까지. 오연우의 사진까지 포함해 자세하게 기록했다.
나와 생명의 계약을 맺은 엘프들. 그러니까 먼저 파견 왔던 경비대원과 강제노역을 위해 이곳에 왔던 엘프들.
이 엘프들은 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오히려……
“저는 할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웠고, 아버지에게 궁술을 배웠습니다. 처음 전투 기술을 배웠던 것은 80년 전, 제가 27살이 되던 해에……”
“아뇨. 아뇨.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자세히 말해줘서 곤란할 정도였다.
아무튼, 나와 계약을 맺은 엘프들은 쉽게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추가로 파견된 엘프들.
그러니까 나와 계약을 맺지 않은 엘프들은 반응이 천차만별이었다.
"와아! 이게 그 선명한 그림을 그려주는 장비인가요? 제 모습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여기....…"
"오오! 정말로 선명하게 그림을 그려주네요."
오연우의 카메라를 보고 신기해 하면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엘프도 있었고.
그냥 물어보니까 대충 대답하는 엘프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 하지?"
"......"
몇몇 엘프들은 내 질문에 굉장히 반항적인 태도로 대답을 거부했다.
물론 이런 엘프들은.
"저기 엘디르!"
“세진 님. 부르셨습니까?"
"속닥속닥……”
“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살기가 뚝뚝 덜어지는 엘디르가 전부 처리해줬다.
반항적인 엘프들은 엘디르의 교육을 받은 뒤로는, 아주 고분고분 내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한창 일을 진행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와 정씨 남매 그리고 시르엘이 간식과 마실 거리를 가지고 왔다.
인원이 많은지라 두 손에는 힘겨워 보일 정도로 많은 짐이 들려 있었다.
"퓨이! 퓨이!"
-삐이익!
아주머니를 따라 나왔는지, 퓨이와 세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볐다.
“하하. 잘 놀고 있었어?"
"퓨이!"
-삐익!
주변을 둘러보니 티아도 시르엘의 곁에 있었다.
"모렛은?"
"퓨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렛을 찾자, 퓨이가 꼬리로 맥주 창고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임진혁과 함께 또 술을 만들고 있는듯했다.
내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자 엘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네?”
“이 아이들을 키우시고 계시는 건가요?"
“맞아요. 이 슬라임은 '퓨이', 이쪽의 새끼 드레이크는 '세이'라고 해요.”
"퓨이! 퓨이!"
-삐이익!
내가 아이들을 소개해 주자 여자 엘프는 굉장히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저도 만져봐도 될까요? 혹시 물지는 않나요?"
"하하. 괜찮아요. 아주 착한 아이들이라서 절대 위험하지 않거든요.”
“그럼……”
여자 엘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퓨이를 쓰다듬었다.
"퓨우......"
“아. 정말 말랑말랑하네요."
퓨이는 낯선 엘프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퓨이의 편안해 보이는 표정에 여자 엘프도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여자 엘프는 한참 동안 퓨이를 쓰다듬다가 이번에는 세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이도 퓨이처럼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약간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내 옆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
여자 엘프가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 영악한 녀석은 오히려 그 모습을 즐기듯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너도 참……”
-그르릉. 그르르릉.
도도한 고양이 같은 모습에 내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녀석은 내 다리에 몸을 비비며 그르렁거렸다.
마치 봐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이.
이런 퓨이와 세이의 귀여운 모습때문에 주변에는 엘프들이 점점 몰려들었다.
퓨이는 어느새 엘프들의 품속을 제 집 드나들 듯이 이리저리 옮겨 다녔고.
세이는 엘프들의 관심을 즐기면서, 다가오는 손길을 꼬리로 쳐내고 장난을 쳤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뒤로 다가왔다.
"세진 님."
"세진! 이것 봐봐. 내가 만든 팬케이크야."
내 쪽으로 다가온 시르엘과 티아. 시르엘의 손위의 접시에는 아직 따뜻해 보이는 팬케이크와 과일 주스가 들려 있었다.
"응? 이거 정말로 티아가 다 만든 거야?"
"으음. 다는 아니고……”
접시를 살펴보니 중간에 살짝 많이 탄 팬케이크가 보였다.
내 눈치를 보는 티아를 웃으며 바라보다가, 포크를 이용해 팬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중간에 탄 팬케이크에서 씁쓸한 맛이 올라왔지만, 달콤한 시럽과 부드러운 팬케이크 식감이 느껴져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맛있는데."
"정말? 정말로 맛있어?"
“그래, 정말 잘 만들었네. 잘했어, 티아."
“헤헤.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
내 칭찬이 만족스러운 듯 티아는 몸을 배배 꼬면서 얼굴을 붉혔다.
“주스도 같이 드세요.”
“아. 고마워요. 시르엘.”
나는 시르엘에게 주스를 받아 한 모금 입으로 넘겼다.
"으음? 이거 엘프 마을에서 가져온 과일로 만든 건가요?"
“네. 맞아요. 이번에 엘프 마을에서 과일을 더 보내주셨거든요."
과일 주스에서는 저번에 엘프 마을에 방문했을 때 맛봤던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상큼함이 일품이었다.
순식간에 내가 가져온 팬케이크와 주스를 다 비워내자, 시르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더 가져다 드릴까요. 세진 님?"
"아뇨, 괜찮아요.”
"......?"
“크흠.”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챙기는 시르엘의 모습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생명의 계약을 맺은 후, 다른 엘프들도 조금 친근해진 경향이 있었지만.
시르엘은 조금 더 친밀하게 나를 대했다.
마치 엄청나게 잘 챙겨주는 누나가 생긴 느낌?
절대 나쁜 기분은 아니었는데, 가끔은 살짝 부담스럽게 느껴져 난감할 때가 있었다.
“세진 님? 어디 불편하세요?"
부자연스러운 내 모습에 시르엘이 한 발 더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순식간에 거리감을 줄이는 그녀의 행동에 내가 당황하는 순간.
“세진 씨?"
신지아가 뒤쪽에서 나를 부르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