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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21화 (221/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1화

72. 미궁을 위한 준비 (3)

모든 엘프의 시선이 이번에는 시르엘에게 몰려들었다.

“만약 엘프들과 절대 깨지지 않을 계약을 맺을 수 있다면, 그러면 걱정하시는 부분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절대 깨지지 않을 계약? 물론 그런 계약이

있다면 걱정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절대 깨지지 않는 계약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믿기 힘든 시르엘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른 엘프들은 뭔가 짐작하는 바가 있는지 저마다 표정을 달리 했다.

"설마……”

“그 방법이 있었군."

넬모란 장로도 시르엘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히며 되물었다.

“생명의 계약을 말하는 거냐?"

"네. 맞아요. 세진 님과 엘프들이 생명의 계약을 맺는다면, 감시 문제 라던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생명의 계약을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시르엘 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네. 맞아요. 우리가 지키고 있던 세계수는 불가능하죠. 하지만 새로운 세계수를 이용한다면요?"

"아……”

넬모란 장로는 탄식과도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남길 원하던 엘프들도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표정이 밝아졌다.

“시르엘 님. 허락해 주신다면 당장 세진 님과 계약을 맺겠습니다."

“저도 계약을.……”

“저도……”

여기저기서 흥분한 엘프들의 계약을 맺겠다는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흥분한 엘프들을 진정시키며 질문을 던졌다.

"잠깐! 잠깐만요. 시르엘, 도대체

생명의 계약이 뭔데요?"

“엘프가 세계수에 걸고 하는 계약이에요. 계약을 어기게 되면 생명을 잃기 때문에 생명의 계약이라고도 불러요."

"허......”

“저희 엘프들은 세계수의 은혜로 태어난 존재기 때문에, 절대로 세계수를 통해 맺은 계약을 깨뜨릴 수 없어요."

약간 살벌하게 느껴지는 내용에 나는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계약의 대가가 자신의 생명이라니……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르엘은 계속 생명의 계약에 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엘프 마을이 지키고 있는 세계수는 힘을 많이 잃어서, 더는 생명의 계약이 불가능해요. 하지만 이 곳에 있는 새로운 세계수라면 가능 할지도 몰라요.”

"위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위니라면 생명의 계약을 맺을 수 있게 해줄 거에요."

시르엘의 설명을 통해 대충 생명의 계약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녀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생명의 계약으로 지금의 고민은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죄를 지은 엘프들이 남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하던 엘디르도 표정을 굳힐 뿐, 그 사실에 대해서 반박하지 않았다.

잠시 시르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넬모란 장로가 내게 물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생명의 계약을 맺을 생각이 있는가?"

"으음. 시르엘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로서는 딱히 손해 볼 게 없어 보이는데요. 저는 계약을 맺어도 상관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남기를 원하는 엘프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

-......

-뽀로로롱!

위니는 작은 날개를 움직이며, 마당에 모인 수많은 엘프 사이를 신나게 날아다녔다.

엘프들은 그런 위니를 바라보며 애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위니. 이쪽으로 와봐.”

-......

내가 위니를 부르자. 작은 아기 요정은 곧바로 내 쪽으로 날아와, 내 손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시르엘.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일단 제가 먼저 계약을 맺어볼 생각이에요."

"시르엘이요?"

나는 시르엘이 직접 생명의 계약을 맺겠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반면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니...... 생명을 거는 계약인데.

무섭지 않으세요?"

“후훗. 지키지 못할 계약은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편안한 미소를 보인 시르엘은 위니를 감싸듯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위니의 몸 주변에서 생명의 샘과 세계수에서 경험했던 신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시르엘과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마치 꿈속에 들어온 것 같이, 온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세계수와 생명의 샘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이곳에 있는 세진 님과 세진 님의 가족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속삭임을 듣자마자 단번에 시르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약속이 약간 낯간지럽게 느껴졌지만, 그 속삭임에서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훈훈해졌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은 왠지 실례인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어...… 저도 세계수와 생명의 샘이 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시르엘과 엘프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내 속삭임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를 감싸던 기운이 폭발하듯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다시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 손 위에는 위니가 그대로 올라 와

있었고, 시르엘은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본 다른 엘프들은

놀라움과 흥분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정말 해냈군..….”

“이것이 생명의 계약……"

"대단해!"

반면 나는 별로 변한 게 느껴지지 않아, 뻘쭘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첫 번째로 나와 시르엘이 생명의 계약을 맺은 뒤.

차례로 다른 엘프들과 계약을 이어 나갔다.

시르엘과의 계약 때처럼 강렬한 느낌은 없었지만.

비슷한 과정으로 각자의 계약 내용을 속삭이면 간단하게 계약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곳에 남기 위해 나와 계약을 맺는 엘프들은 모두 나의 말을 따르고,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을 속삭였다.

나도 대충 잘 돌봐주겠다는 말로 그들의 속삭임에 대답했다.

다행히 계약은 맺은 엘프들은 모두

만족하는 표정으로, 몇 번이고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사실 나로서는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좋아하는 엘프들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뭐, 자기들이 좋다는데…….’

나는 일부러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에 남기를 원하는 모든 엘프와의 계약이 끝나고.

“이제 다 끝난 거죠?"

“네. 그런 것 같네요.”

내 물음에 시르엘이 대답했다.

약간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정리하려 하는데……

“저...... 세진 님."

"왜 그러시죠?”

“저도 세진 님과 생명의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예??"

갑자기 경비대원 중 한 명이 나와 생명의 계약을 맺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어어, 경비대원 분들은 굳이 계약하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어차피 이 곳에 남으실 텐데.”

“그래도 세진 님과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안 되겠습니까?"

“끄응..….”

무작정 나와 계약을 맺고 싶다는 경비대원.

슬쩍 눈치를 보니, 나머지 중에서도 계약을 맺으려는 엘프들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경비대원들도 이곳에서 세계수를 지키고, 엘프들을 통제하느라 고생했는데, 계약을 안 맺어주려니 왠지 차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아니, 나랑 계약 맺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속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최대한 그런 기색을 숨기려 노력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는 경비대원에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세진 님! 정말 감사합니다!"

경비대원과의 계약도 앞선 엘프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내 말을 잘 따르고, 세계수와 생명의 샘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맹세.

첫 번째 경비대원과 계약이 끝나자마자. 다른 경비대원들도 연달아 앞으로 나서, 나와 계약을 맺을 것을 희망했다.

한명 한명 계약을 해주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파견 온 모든 경비대원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엘디르도 계약 맺을 거예요?”

"세진 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하아. 그럼 이리 오세요."

마지막으로 엘디르까지 계약을 맺으며, 넬모란 장로를 제외한 이곳에 있는 모든 엘프와 생명의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넬모란 장로는 허탈한 표정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허허. 결국은 이렇게 돼버리는구먼."

“장로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뭐가 걱정인가? 모두 자네를 위해

생명을 걸었는데.”

"아니. 그러니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많은 엘프들과 계약을 맺어도……”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자, 넬모란 장로는 편안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생명의 계약은 스스로가 진심이 아니라면 맺을 수 없는 계약이야. 모두 스스로 생각해 결정한 계약이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리고……”

"......?"

"만약 자네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부족한 만큼 더 노력하면 되지 않겠나?”

“우문현답이네요."

"허허허."

연륜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약간이나마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구먼. 장로회에서 결정한 일들이 다 틀어져 버렸어."

"죄송해요, 장로님."

"죄송합니다."

시르엘과 엘디르, 나머지 엘프들도 넬모란 장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결국에 그가 대표로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이곳에 그 누구도 계약을 맺을 수 없었을 테니.

넬모란 장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도 이게 옳은 일이라 생각해서

허락했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그나저나 마을로 돌아가면 다른 장로들에게 욕을 좀 먹겠구먼. 그 앞뒤 꽉꽉 막힌 자들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넬모란 장로는 우리들에게는 괜찮다고 말하긴 했어도 마을로 돌아가 융통성 없는 장로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 절로 앞서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장로를 관둬야 할지도 모르겠어."

“아마 괜찮으실 겁니다.”

“세진, 그렇게 되면 나와도 계약을 맺어주겠나? 여기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끄응, 언제든지 오시면 환영해 드릴 테니, 계약 이야기는 그만 좀……”

"허허허허."

난처해하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넬모란 장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에 나머지 엘프들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모든 엘프와 생명의 계약을 맺은 뒤.

이곳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먼저 경비대원의 감시 임무가 사라졌다. 모두 생명의 계약을 맺었기에 더는 하나하나 감시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제노역을 하던 엘프들도 더는 강제노역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하던 약초밭일, 엘프차 만드는 일, 야생의 약초를 캐오는 일들은 물론이고, 직접 나서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진행했다.

거기다 나무 정령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다.

내가 머무는 통나무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엘프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엘프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일단 표현하는 친근함은 배로 늘어났고, 내가 내리는 지시는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러다가 진짜로 내가 엘프 마을 촌장이 되는 거 아냐?'

이렇게 호숫가 숲속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태백산 미궁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과정도 진행되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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