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20화 (220/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0화

72. 미궁을 위한 준비(2)

“이미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무조건 결정에 따라야 해!”

“우리의 의견도 중요한데 왜 마음대로 결정하는 거지?"

"맞아, 우리에게도 의견을 말할 기회를 줬어야지."

엘디르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엘프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대치하는 중이었다.

한쪽은 경비대원들이었고, 한쪽은 강제 노역하는 엘프들이었다.

경비대원들은 대체로 이 상황을 난감해 하는 것으로 보였고, 그 반대편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가장 먼저 넬모란 장로가 그들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오셨습니까. 장로님."

경비대원들은 넬모란 장로를 발견하자마자 짧게 인사를 건넸고, 나머지 엘프들도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엘디르 경비대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여기서 일하고 있는 엘프들이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내가 보기엔 경비대원들이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엘디르는 표정과 함께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모호한 태도에 넬모란 장로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 쪽으로 향했다.

“세진. 그동안 경비대원들이 이들 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인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경비대원 분들은 정말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주셨습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경비대원들을 옹호하자, 엘디르는 물론 나머지 경비 대원들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그리고 경비대원분들과는 별개로 나머지 엘프분들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경비대원들이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솔직히 할 일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죄를 짓고 강제 노역에 동원된 엘프들은 대부분 고분고분 지시에 따랐고, 이곳 생활에 불만을 품지도 않았다.

그나마 세계수 씨앗을 보호하는 경계 임무에 약간 의미가 있었을 뿐, 나머지 엘프들을 감시하는 일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나에게도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와 넬모란 장로, 시르엘까지.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세진 님!"

아까 경비대원과 대화를 나누던 남자 엘프 한 명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려 했다.

이를 지켜보던 경비대원들은 나를 보호하듯 그 엘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 엘프는 경비대원들에게 막혀 더는 다가오지 못했지만,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세진 님!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 예??”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

엘프 마을에서 장로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은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넬모란 장로가 먼저 말해줬던 경비대원을 추가로 지원한다는 것.

두 번째는 강제 노역을 위해 보내졌던 엘프들을 다시 엘프 마을로 되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추가로 경비대원을 더 파견하지만.

전투 전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에서 강제 노역 엘프들을 감시할 인원을 따로 배치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장로회에서는 감시가 필요한 엘프들을 일시적으로 마을로 되돌리고, 모든 경비대원을 전투에 투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장로회의 결정은 솔직히 나로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실력인 인정된 엘프 마을 경비대원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은 점이 있었으니, 바로 마을로 귀환하라는 소식을 전달받은 엘프들의 반응이었다.

어쩌면 장로회에서는 귀환 명령을 당연히 환영할 거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명목상으로 엘프들은 벌을 받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소식을 전해 들은 그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들 모두 마을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이곳에 남겠다며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식을 전한 경비대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을로 보내주겠다는데도, 자발적으로 남아 강제 노역을 하겠다는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시작된 서로의 분쟁이 이어져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

넬모란 장로 역시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너희들은 이곳에 남고 싶어서 경비대원들과 이러고 있었단 것이냐?"

“그렇습니다. 장로님. 저희는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

“허허. 이건 마을의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야. 억지를 부린다면 또 다른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저희를 움직이는 권한은 세진 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처음 저희를 이곳으로 보냈을 때, 장로회에서 세진 님께 우리를 관리할 권한을 모두 넘기겠다고 정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마을로 돌려보낼지 말지에 대한 결정은 장로 회의가 아니라 세진 님이 결정하셔야 합니다."

"흐음……”

약간 흥분한 기색이 있긴 했어도

논리정연한 엘프의 주장에 넬모란 장로는 침음을 흘렸다.

그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남자 엘프는 다시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세진 님. 매우 중요한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도 도울 수 있도록 남게 해주십시오."

"세진 님!"

“남을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남자 엘프를 시작으로 다른 엘프들도 나에게 남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넬모란 장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엘프들을 번갈아 보았다.

"자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길래 이들의 마음을 구워삶은 것인가?"

“저도 잘……”

나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내가 생각하는 아주 기본적인 선에서 그들을 대우해 주고, 약간의 보상을 해준 것뿐이었다.

이 문제에 엄격한 엘디르가 있어서, 오히려 형편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상황에 모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시르엘이 나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세진 님이 주는 보상 때문에 남으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큽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이유죠?"

시르엘의 질문에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던 남자 엘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정말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서는...... 이곳에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장로회가 만든 낡은 규칙도 없고, 외부와의 교류를 억지로 차단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

남자 엘프가 꽤 민감한 주제를 꺼내자, 모든 엘프가 넬모란 장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넬모란 장로 본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오히려 계속해 보라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벌을 받기 위해 이곳에 억지로 왔지만, 저희는 이곳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세진 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계속 남아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자 엘프의 말을 끝으로 다른 엘프들의 외침도 쏟아져나왔다.

“세진 님. 저도 정령을 다룰 줄 압니다. 전투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치료약을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약초를......"

“저도......"

그들은 각자 자신의 특기를 이야기하며,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리려 했다.

이런 엘프들의 모습에 넬모란 장로는 허탈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남고 싶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구먼."

“그렇네요. 장로님."

시르엘도 넬모란 장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굉장히 미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저렇게 열정적으로 나를 도와주겠다며 애원하는 그들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약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시 조용!"

엘디르는 소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던 엘프들을 조용히 시키더니, 굉장히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 봤다.

“잊고 있었나 본데. 일단 너희들은 죄를 짓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주제에 넘는 행동은 삼가도록 해라.”

"......"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무거운 침묵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냉정함이 남아 있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

“세진 님. 잊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들은 이전에 세진 님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주려 했던 자들입니다. 쉽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큭...…"

엘디르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자, 남자 엘프를 포함한 무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그때의 일이 떠올라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마치 도움이 되기 위해 남겠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곳에서

누리는 이득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 뿐입니다.”

"세진 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저희는 과거의 잘못을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으려는 것도 세진 님께 속죄하기 위해서…….”

“그걸 어떻게 믿지?"

"......"

엘디르는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남자 엘프와 그 무리를 노려봤다.

“마을의 손님을 습격하려는 행동에서 너희들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만약 이후에 세진 님이 너희들의 의견과 다른 행동을 보인다면, 다시 그런 짓을 벌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우리 경비대가 이곳에 투입된 것이지."

단호한 말에 남자 엘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 약간의 안쓰러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엘디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은 내가 잘 대해줘서 저런 식으로 행동할지 몰라도.

이후에 내 행동이 저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 또 엘프 마을에서처럼 뒤통수를 칠지 몰랐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엘디르는 넬모란 장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로님. 이미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고, 더는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반항한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엘프 마을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점점 차가워지다 못해, 이제는 사나워지는 그의 눈초리에 넬모란 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다리게. 엘디르 경비대장."

“……”

“세진, 이 문제는 전적으로 자네의 결정에 맡기겠네.”

“장로님?"

"확실히 저들에 대한 권한은 세진이 가지고 있지. 마을로 귀환시키는 문제를 장로 회의만으로 결정한 것은 옳지 않아."

"......"

넬모란 장로는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장로회의 일원으로 일단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보류하겠네. 만약 자네가 저들이 남길 원한다면, 내가 다시 마을로 돌아가 그 뜻을 전하겠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래대로 진행하지."

모든 일의 결정권이 나에게로 넘어 왔다.

넬모란 장로뿐만 아니라, 시르엘, 엘디르.

경비대원과 남길 원하는 엘프들까지.

모두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결정을 기다렸다.

'어떻게 하지?'

더 많은 엘프가 남아 나를 도와준다면, 태백산 미궁 공략에 확실히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컸다.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엘프도 있었으니.

하지만 엘디르의 말대로 이 엘프들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경비대원들과는 달리, 일단은 죄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것이니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내 고민이 깊어지자, 시르엘이 내 옆으로 다가와 슬쩍 말을 건넸다.

"세진 님.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

0